[슬램덩크] 신성의 팽창
같은 학년 우성명헌의 단편 이야기입니다
포스타입에 공개했던 글을 펜슬에 재업로드합니다
1인칭이고, 우성이 미국으로 떠나는 당일에서 역순으로 진행됩니다
주의: 구토, 아동학대 및 방임을 연상시키는 묘사가 있습니다, 명헌이 우성과 같은 학년입니다
(추가) BGM: 사건의 지평선
우성아, 우리가 이겼다.
형들하고는 작별 인사를 마쳤다. 부득불 공항까지 따라오겠다고 우긴 녀석은 지금 가장 보기 싫은 사람 베스트3에 속했다. 3위는 산왕공업고등학교 2학년 기계과 A반 이명헌이다. 2위는 산왕공고 기숙사 옆방 친구였던 이명헌이고. 1위는 지난 인터하이에서 8번을 달고 함께 뛴 포인트가드 이명헌이라고 한다.
우성이 캐드는 다 떼고 떠나야 하는데. 이따금 도감독님보다 호랑이처럼 느껴지던 담임과는 시원섭섭하게 작별했다. 엄마랑은 미리 인사했다. 광철이는 내일 모레 비행기로 미국에서 만난다. 나는 아직 미성년자니까 이것저것 서류에 사인하는데 보호자가 필요했다. 친척 어른들에게는 인사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광철이 그랬는데, 나중에 내가 잘 되면 알아서 인사하러 올 거란다.
인사, 인사, 인사. 기약 없는 약속들 사이에 너와의 인사를 끼워 넣고 싶지 않았다.
왜냐면 우리는 헤어지는 게 아니니까. 나는 농구를 하러 가는 거고, 그냥. 그냥 있잖아. 우리가 여기서 헤어져 남이 된다면 농구하러 가는 의미도 없어지는 거야.
너도 같은 마음이라고 말해줘. 응? 빨리.
치기어린 마음이 티셔츠 끝자락을 붙잡고 칭얼댔다. 광철을 졸라서 얻어냈던 두 벌의 티셔츠. 남색은 네가 가지고 소라색은 내가 챙겼다. 백화점에서 샀다더니 때깔이 곱다. 넌 뭘 입어도 근사했지만. 그래도 선물해준 남색 티셔츠를 오늘 같은 날에 입고 나왔다는 건, 역시. 그렇지? 브랜드 티셔츠는 처음이라고 한 번? 두 번 입었었잖아. 자주 입어달라고 노래를 불렀는데 왜 오늘일까. 너도 싫은 거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나, 혹시나 싶어 비행기 표가 얼마인지 알아봤거든. 네 생활비하고 내 용돈하고 합치면 한 장은 구하겠더라. 아니면. 넌 돈 낭비를 싫어하니까 내 수하물로 몰래 체크인한 다음에…….
“정우성, 듣고 있어? 들어가라고 안내 떴다니까, 베시.”
명헌이 기내용 캐리어를 내게 돌려준다. 매정해. 나 같으면 캐리어 끌어안고 절대 안 줬을 텐데. 비행기 영원히 못 타게 해버렸을 텐데.
하지만 비행기를 타야 하는 사람은 나다. 입술을 꽉 깨물었다.
“삼.”
이대로 가면 네 목소리는 아주 오랫동안 못 들을 거다.
“이.”
날 똑바로 봐 주는 까만 눈동자도. 널따랗고 각이 진 어깨와 둥근 손끝도 오래오래 그리워하게 될 터다.
“일.”
눈앞에 있는 이명헌이 벌써 과거의 사람이 되어버렸다. 나는 그리움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찔끔 흘렸다. 나, 네 앞에서 우는 거 싫은데.
“넌 눈에 수도꼭지를 달아야 해, 베시.”
명헌이 바지 뒷주머니에서 흰 손수건을 꺼내 젖은 뺨을 닦아줬다. 챙김 받는 건 언제나 기분이 좋다. 좋은데, 슬펐다. 이명헌을 좋아하는 건 늘 당혹스러움과 아릿함을 동반했다.
“명헌아.”
“베시.”
“이명헌.”
명헌이 어깨를 으쓱였다.
“할 말 있으면 해라, 베시.”
“나 가버리면 돌아갈 때 외로워서 어떻게 해?”
명헌이 대답 대신 축축한 손수건으로 내 인중을 문질렀다. 아, 정말.
“콧물 안 났어.”
“눈으로 한 번 울었으니 코로 울까봐, 베시.”
난 이명헌의 이런 점이 몹시 짜증나면서도 좋았다.
“이상한 소리하지 말고 대답해 줘.”
“글쎄.”
명헌이 손수건을 털어 각이 지게 두 번 접고, 원래 있던 자리에 넣어두고서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까만 눈동자에 반짝임이 넘실거린다. 어떻게 저런 눈빛으로 날 쳐다보지. 저녁인데도 주변을 환하게 밝히는 공항의 조명 탓일까?
“넌 어쩌지, 우성아. 나 없어서 외로우면.”
나는 양팔을 벌렸다. 명헌이 한쪽 눈을 찡그린다. 그냥 기다렸다. 이러고 있으면 네가 먼저 다가와 마주 안아주는걸 아니까.
이렇게.
“어리광은 졸업하고, 베시.”
“평생 졸업 안 할래.”
“불길한 소리는 하는 거 아니다, 베시.”
온몸으로 명헌을 안았다. 힘을 줘서, 품 안의 네가 숨이 막히도록. 숨 쉬는 거에 정신이 팔려서 내가 뱉을 비겁한 말을 흐지부지 흘려듣도록.
“정말 좋아해.”
너는 내가 대나무처럼 쑥쑥 자란다고 했지만, 내 마음은 죽순이 아니었다. 열매는커녕 꽃도 피우지 못한 묘목으로 성급하게 결실을 기대하는 건 잘못이겠지. 작별 인사는 그래서 안 하려 했던 거야. 기계과에서는 단짝이고 농구부에서는 넘볼 수 없는 페어라고 소문났던 우리는, 졸업식이 뭐야. 당장 내일부터 얼굴 보기도 어려울 텐데. 이 공항에서 시시하게 끝을 선언할 수는 없어. 내가 용납하지 못하겠어.
그렇다고 이게 마지막이 아닐 거란 장담은 할 수 없잖아.
우리는 확고한 믿음에 배신당한 적이 있으니까.
이게 만약에.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토할 것 같은 어떠한 가능성 때문에 말이야. 내가 널 다시 보지 못하는 그런 인생을 산다면. 이 순간에 내 마음을 전하지 못한 것을 죽을 때까지 후회할 테지.
“명헌아. 명헌이 형. 정말, 진짜로 좋아해. 친구로서도 좋아하지만. 그 이상으로. 세상에서, 농구 빼고, 네가 제일 좋아.”
명헌은 말없이 내 등을 토닥여줬다. 같은 마음이라는 걸까? 에두른 거절? 아니다. 거절하는 손끝이 이만큼 다정할 리 없다.
나는 명헌이 숨 막혀 죽기 전에 놓아주었다. 숨이 차서 조금 발그레해진 얼굴이 보였다. 사랑스럽다.
“걱정 말고 다녀와라, 베시.”
“정말?”
“정말.”
“나중에, 막 청첩장 보내고 이러는 거 아니지?”
“그런 거라면 직접 전해주러 갈 테니까.”
눈에 힘 줬다. 수도꼭지, 잠금.
“농담이야, 베시.”
명헌이 내 팔뚝을 토닥였다. 코트 위에 있는 것 같다. 숨이 턱에 차오르도록, 마지막까지 뛰고 또 뛰었던 인터하이의 그 경기가 떠오른다. 하지만 옛일이다.
난 이제 가야 한다. 명헌도, 형들도, 익숙한 사람들이 없는 먼 곳으로.
“돌아올게.”
명헌이 희미하게 웃었다.
“떠나면서 뒤돌아보면 안 된다, 베시. 멈추지 말고 가.”
짐을 정리하고 버스로 향하는 내내 기분이 이상했다. 무언가를 두고 온 것만 같았다. 걷다 서기를 반복하니 반발자국 뒤쳐져 따라오던 명헌이 눈썹 하나를 치켜떴다.
“두고 온 거 있어, 베시?”
유니폼. 챙겼고. 운동화. 챙겼다. 운동복. 양말. 빨래. 데오도란트. 아, 이건 다 써서 방에다 버리고 왔지. 아대. 스포츠수건. 지난 마을축제 때 얻은 볼펜. 학생수첩. 지갑. 스킨과 로션. 혹시 모르니 가지고 왔던 선스틱. 휴대용 비누. 그리고 제일 중요한, 이명헌.
“다 챙겼어.”
“그럼 빨리 걸어.”
선배들 기다린다, 베시. 덧붙여진 말마따나 우리가 집합에 조금 늦었다. 평소 같으면 현철이 형이 꾸물대는 내 허리를 반으로 접어버리려 했을 텐데 오늘은 좀 봐주는 눈치였다. 아니, 그것보다……. 타인에게 신경 쓸 에너지가 남아있지 않은 것 같았다.
“생각났어.”
명헌이 내 등에 코를 박을 뻔 했다.
“정우성.”
“두고 온 거.”
“뭔데, 베시.”
되묻는 명헌의 어조가 태평했다. 돌아보니 너 두고 온 거 없잖아, 라고 얼굴에 쓰여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정말 두고 왔다고.
“인터하이 우승컵…….”
명헌이 내 뒤통수를 찰싹 소리 나게 때렸다. 아야.
“현철 선배 앞에서 그 얘기하면 너 진짜 골로 간다, 베시.”
이명헌이 내 스포츠백 가방끈을 움켜잡고 나를 앞으로 질질 끌어댔다. 나는 명헌이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흐느적거리는 문어 내지는 종이인형처럼. 반강제로 로비를 나서자 정문에 버스가 바로 대기하고 있었다. 이크, 우리 진짜 꼴찌였구나.
“얼른 자리에 앉아라.”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베시.”
당연하다는 듯 나란히 비어 있는 자리는 두 개였다. 다만 감독님의 뒷좌석이다. 이명헌 배신자가 먼저 창가를 선점했다. 나는 빛의 속도로 스포츠백을 선반에 올려놓고 조신한 자세로 자리에 앉았다. 길쭉한 팔다리를 잘못 놀려 감독님이 앉은 앞좌석을 차고 싶지 않았다.
작년 인터하이에서는 이 숙소에서 결승 당일까지 머물렀었다. 돌아가는 길에 신이 나서 명헌이와 수다를 떨었던 기억이 생생한데 오늘 버스 안은 장례식 분위기다. 그래도 훌쩍거림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다들 어제 울 만큼 울었으니까. 나도 그렇고.
산왕공고가 우승컵을 놓쳤다.
내 마지막 인터하이였다. 북산과의 시합은 자동적으로 고교 은퇴 경기가 되어버렸다. 농구야 미국으로 가서 계속 한다지만, 더 이상 산왕공고 이름이 박힌 유니폼을 입을 일은 없다.
실감이 안 났다. 내 포인트가드는 이제 명헌이가 아니다. 이명헌의 에이스 자리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길 터다. 불공평했다.
“정우성.”
옆자리의 명헌이 내게 기대듯이 상체를 바싹 붙여 속삭였다.
“눈물 참아.”
나는 대꾸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눈가가 시큰거렸다. 어제 남들보다 배는 울었던 것 같은데 또 나올 눈물이 있다니. 난 농구를 잘하지만 울기도 잘 우는구나. 눈물도 에이스인 줄 처음 알았다.
고작 1점 차였다. 우리는 40분을 죽어라 뛰어다녔는데 5초도 안 되는 순간에 승패가 갈렸다. 아니야. 우리가 모자라서 진 게 아니었다.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 정말 열심이었으니까, 내가 소원을 빌었던 이름 모를 그 신이 응답해준 거다. 그런데도 대기실로 돌아가는데 터진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우는 날 일으켜 세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공기가 무겁고, 젖어 있었다. 훌쩍거림과 한숨소리가 흩어진다. 명헌아, 우성이 좀 챙겨라. 감독님의 덤덤한 지시에 반응하여 다가오는 온기가 익숙했다. 너의 팔을 붙잡고 어린애처럼 더 크게 울어버렸다.
눈이 탱탱 부을 정도로 울고, 명헌에게 기대서 꾸벅꾸벅 졸았다. 이리저리 몸이 휩쓸린다 싶더니 어느 순간에는 발가벗겨져서 욕조에 앉혀져 있었다. 눈이 갑자기 따끔했다. 흘러내린 비눗물이었다. 엄지로 내 눈가를 조심스럽게 닦아준 네가 샤워기를 틀었다. 내 정수리에 대고. 찬물이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음은 네가 알아서 해.
베시, 도 씻겨 내려간 엄정한 목소리였다. 명헌은 샤워기를 내 손에 쥐어준 다음 축축하게 젖은 운동복 차림으로 욕실을 나갔다.
인터하이 동안 명헌과 나는 룸메이트였다. 작년도 그랬다. 학년도 같고, 주전이니 같은 방에 배정되었다. 올해는 낙수 형이 같은 방에 묵었다. 동오 형은 원래 다른 방이었지만 형제끼리 같이 있으라며 현철 형과 방을 바꿨다. 그렇게 네 명. 씻는 둥 마는 둥 경기장을 나서서 숙소로 돌아왔는데 내가 정신 못 차리고 한참동안 욕실을 차지하고 있었던 거다. 3학년 형들이 먼저 써야 하는데.
나중에 현철 형에게 물어보니, 낙수 형하고 동오 형은 현철 형네에서 씻고 부대껴 잔 듯 했다. 명헌은 옆방에서 간단히 씻은 후 돌아와 오늘 체크아웃 때까지 곁을 지켰다.
그 배려는 에이스 보호구역 같은 거였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미안하기도 하고.
역에서 내려 기차로 갈아타는 내내 다들 조용했다. 그래도 기차가 완전히 속도를 낸 다음부터는 작게 소곤거리는 목소리들이 들렸다. 농구부의 앞날을 걱정하는 오지랖 넓은 친구들이나 벌써부터 윈터컵 주전을 얘기하는 형들이나. 내 옆자리가 지정석인 명헌은 기차에서는 창가를 양보하고 통로 좌석에 앉아 있었다. 날 놔두고 이어폰을 낀 채다.
툭, 어깨를 건드리니 명헌이 내 쪽을 돌아보았다.
“뭐 들어?”
명헌이 이어폰 하나를 빼서 내 귀에 꽂았다. 잡음이 심했다. 인상을 찡그리며 이어폰을 귀에서 떨치자 명헌이 그걸 주워 제 귀로 도로 가져갔다.
“라디오.”
“웬 라디오?”
“뉴스에서 우리 소식이 나오기에, 베시.”
아. 괜히 심장이 철렁했다. 내 표정을 본 명헌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이어폰을 갈무리했다.
“전국대회 열리는 지역 뉴스였나 봐, 베시. 지금은 안 들린다.”
휴대용 라디오에 이어폰 줄을 돌돌 감은 명헌이 화제를 바꿨다.
“언제 떠나, 베시?”
“뭐?”
또 화들짝 놀라 명헌을 쳐다봤다.
“어디를?”
“여름에 경기 다 치르면 미국 간다고 했잖아, 베시. 정확히 언제냐고.”
아, 그거…….
“모르겠어. 비행기 표는 끊어놨다고 했는데 안 물어봤어.”
“그게 언젠데, 베시.”
“모르겠어.”
나는 거짓말을 했다. 심지어, 그걸 감추기 위해 너스레를 떨었다.
“왜? 알면 같이 가게?”
“글쎄.”
명헌이 라디오에 시선을 고정시키며 이어폰 줄을 풀었다 감았다 했다. 나는 쿡쿡, 어깨로 명헌의 어깨를 두어 번 찔렀다. 날 좀 보라고. 명헌은 내 신호를 무시했다.
“선배들이 너 언제 가는지 궁금해 해, 베시.”
“어? 형들은 그런 얘기 안하던데?”
“너 어제 정신 못 차리고 있을 때.”
또, 한 번 더 어깨를 밀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명헌이 드디어 싸구려 라디오에서 눈을 떼고 날 응시했다.
“송별 파티하자고 했어, 베시. 다들 쳐져 있으니까 기분전환 삼아서.”
“…… 나 떠나는 거 축하하는 게 기분전환이 돼?”
명헌의 눈에 잠깐이나마 따뜻한 빛이 돌았다. 저 눈빛이 뭘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이명헌은 장난치고 싶거나 날 칭찬할 마음이 들 때 꼭 저렇게 봤다.
“부원들이 너 많이 챙기잖아, 베시.”
아닐 텐데. 명헌의 간질거리는 시선이 기분 좋은 것과는 별개로, 아닌 건 아닌 거였다.
나는 백여 명에 육박하는 부원들의 어슴푸레한 이미지를 떠올렸다. 몇몇은 농구 에이스인 날 시기해서 멀찍이서 흉을 봤다. 몇몇은 형들이나 명헌하고 농구하느라 대화를 나눌 기회조차 없었고. 그렇게 적당히 소거해나가다 보면 남는 부원이 없었다. 역시, 아닌 것 같은데…….
“정주성이라고 별명까지 지어줬는데 몰랐어, 베시?”
“그게 뭔데?”
“정신 차리고 보면 주먹을 부르는 성격.”
이, 씨. 진짠가?
“별명까지 지어줄 정도니까, 베시. 다들 한 마디씩 해주고 싶을걸.”
“롤링 페이퍼처럼?”
“해줄까, 베시?”
롤링 페이퍼라. 한 학년 끝날 때 익명으로 돌아가며 속엣 말을 써서 준다는 그거. 자랑은 아니지만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다. 고백 편지나 초콜릿은 분에 넘칠 만큼 받았던 것 같지만. 근데, 친한 부원들에게 받아야 의미 있는 거 아닌가? 다들 롤링 페이퍼에 익명으로 성토하는 거 아니겠지?
남들 입 터는 거야 간지럽지도 않다. 무엇보다 나는 관심 있는 것만 신경 쓰며 살고 싶다. 다른 애들 마음은, 이게 조금 재수 없게 들릴 수 있다는 건 알지만, 정말은 하나도 궁금하지 않아.
이명헌. 내가 궁금한 게 뭔지는 너도 알잖아.
“명헌아, 나 미국 가면.”
원래는 편지 많이 써주라, 라고 부탁할 셈이었다. 갑작스레 충동이 일었다. 네가 매일매일 편지를 써 줬으면 좋겠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날 생각하면서.
“편지 많이 써줄 거야?”
명헌이 한쪽 눈가를 찡그렸다. 난 저 버릇이 내심 귀여웠다. 내키지 않는 무언가를 해야 할 때면 저렇게 티를 냈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그러지 않는 것 같은데. 꼭 내 앞에만 저런다.
알고 있으려나 모르겠다. 눈가의 근육이 살짝 움직인다 싶으면, 열에 아홉은 내 부탁을 들어주었다는 거.
“너무 많이는 안 되고, 베시. 국제우편은 비싸.”
“어쨌든 써준다는 거지.”
“선배들 편지 모아서 꼬박꼬박 부쳐줄게, 베시.”
“네 건?”
“나는, 음.”
명헌이 허공을 더듬으며 셈을 했다.
“한 달에 두 번 정도.”
나는 작게 혀를 찼다.
“더 많이 써 주지.”
명헌이 다시 이어폰 줄을 풀어 양쪽 귀에 꽂았다. 이 이상은 어리광을 받아주지 않겠다는 신호다. 나는 궁금했고, 더 캐묻고 싶었다. 그렇지만 참았다. 너도 어제 풀타임으로 뛴 주전이었으니까. 피곤하고, 힘들 거다. 명헌에게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나처럼 눈물샘이 터지지는 않을 거다. 명헌이 진짜 힘들어할 때 튀어나오는 버릇이랄까, 증상이 있었다. 죽으라고 짠 게 틀림없는 여름훈련을 함께 견디고 나니 알게 됐다. 나는 다소 안심하여, 뭐, 조금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궁금한 것들을 머릿속에서만 곱씹었다. 내 빈 자리를 너는 누구로 채울 거야? 한 달에 두 번 쓰는 편지라면 평소에는 얼마만큼 날 생각할거야? 충격적인 패배를 안겨 준 경기를 초 단위로 분석해야 하는데, 난 당장은 네 속마음이 알고 싶어. 이런 내가 싫어? 산왕의 에이스 자격이 부족한 걸까?
“정우성, 시끄러워.”
“뭐? 나 아무 말도 안 했어.”
“생각이 시끄럽다, 베시.”
그리고 이명헌은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도착지까지 잘 생각인가보다. 나는 무심하게 지나쳐가는 창밖 풍경에 생각을 흩어 보냈다. 그래. 머리를 비우자.
……5분? 그쯤 지나니까 정말 아무런 생각도 안 났다. 졸렸다. 나는 입이 찢어져라 하품한 뒤 명헌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눈앞의 상대가 흐느적거렸다. 이름은 모르겠다. 같은 학년인 건 기억하지만. 포지션은……. 무슨 가드.
수업이 없는 주말이었다. 맞은편 녀석은 아침에만 해도 나를 무서워하는 눈치였는데 몰아치는 체력 훈련과 포메이션 연습에 나도, 쟤도 지쳐버렸다. 곧 전국대회다. 감독님을 비롯한 트레이닝 코치는 그 말을 주문처럼 써먹었다. 전국대회는 매미소리 한창일 때 하잖아. 그런데 신학기부터 ‘곧 전국대회다’라고 쪼아대면 질릴 수밖에 없다고요? 오늘처럼 후덥지근한 날에는 더더욱. 에어컨 틀어줘. 선풍기라도. 떼쟁이 정우성이 아우성쳤다. 의젓한 정우성은 츳츳 혀를 차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냉방기 사용은 7월부터. 지금은 6월이니까 안 돼.
사방에 땀 냄새가 진동한다.
탈취제는 물론이고 데오드란트도 꼬박꼬박 사용하는데 냄새가 그대로라는 건 우리가 열중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아니면 EF 선배들의 말이 맞거나.
산왕공고에서 E반과 F반은 여학생의 반이었다. 우리 학교가 남녀공학이 된 지 얼마 안 되긴 했는데. 그래도 EF반과 연애에 성공한 운동부원들은 드물었다. 농구부 주전쯤 되지 않으면 연애하는 걸 대놓고 말리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이에 대한 해답은 트레이닝 코치가 썰을 풀어줬다. 몇 년 전인가 장난삼아 EF반끼리 설문조사를 했단다. 운동부 남자애들이 인기 없는 이유는 뭘까? 머리를 짧게 깎아서? 운동하느라 바빠서? 조사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여학우 대부분이 ‘운동부는 어쩐지 땀 냄새날 것 같은 이미지가 있어’서 싫다는 데 표를 던졌다.
그러니까 박박 씻고 다녀라. 화장실 다녀오면 손도 제대로 씻고. 잘 씻어야 감기도 안 걸려. 젊은 트레이닝 코치는 잔소리가 많은 편이었고, 진짜인지 아닌지 모를 설문조사 결과를 알려준 뒤에도 어김없이 훈계를 늘어놓았다.
늦봄이나 늦가을에만 오는 코치가 체육관에서 사라지면, 주장인 성구 형이 잔소리를 했다. 너희 코치님 말씀 기억나지? 잘 씻고 다녀라. 앙케이트? 그거 뻥일걸. 그래도 씻어. 체육관에 냄새 밴다.
하지만 성구 형, 냄새는 이미 밴 거 같은데요.
어쩌면 내가 신경이 곤두서서 그렇게 느끼는 걸지도.
농구공에서 나는 익숙한 가죽 냄새도 짜증이 났다. 뭐든 걸리기만 하면 헤드 락을 걸어 메쳐버리고 싶었다. 현철이 형한테 몸으로 익힌 기술을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써먹어. 머리 아파. 눈이 뻑뻑했다. 땀 때문에 달라붙은 옷이 거슬린다. 연습에 집중 안하면 명헌이가 눈치를 주거나 뒤통수를 때리거나 귀를 잡아당기거나, 아무튼 혼냈는데. 그럴 사람이 옆에 없으니 마음껏 언짢은 티를 냈다.
이건 다 주장하고 감독님 때문이다. 오늘은 다른 부원하고 연습해보라니! 난 명헌이면 되는데. 저쪽에서 3학년에게 패스하는 명헌이도 낯빛이 별로였다. 그런데, 지나치게 별로다. 아니, 잠깐.
“10분 휴식!”
코치의 외침에 나와 강제로 일대일을 하던 부원이 그대로 주저앉았다. 걔한테 공을 맡기고 날다시피 명헌에게 향했다. 명헌은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앉는다기보다 엉덩이를 걸친 모양새이긴 하다. 그마저도 걱정이 됐다. 지금 이명헌은 서 있을 기력이 없다.
“명헌아.”
반질반질한 눈동자가 나를 쓱 돌아본다. 그리고는 천천히 일어섰다. 들고 있던 물통을 떨구듯이 바닥에 놓고 조용하게 움직인다. 발소리조차 없었다. 다들 숨을 고르기에 바빠 기이한 꼴에 관심을 가지는 이는 없었다. 마음이 조급하다. 그런데도 차마 붙잡기 어려웠다. 명헌이가 먼저 말을 걸지 않았으니까. 명헌은 이유 없이 침묵하지 않는다.
초조하게 쫓아간 곳은 화장실이었다. 이명헌은 제일 마지막 칸을 벌컥 열더니, 그대로 주저앉아 변기를 붙잡고, 토했다.
나는 발을 동동 굴렸다.
생각하자, 정우성. 뭘 할지. 등을 두드려줄까? 손끝이 움찔거렸지만 참았다. 세상에는 힘들 때 위로받고 싶어 하는 사람과 혼자 있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는데, 내가 이해하기로 명헌은 후자였다. 그렇다고 멀뚱히 있을 거야? 이명헌은 내 친구다. 그냥 친구가 아니라 가장 멋지고 근사한 패스를 해 주는 내 가드, 농구할 때 없으면 안 되는 반쪽이다. 그러니까 명헌이는 아프면 안 된다. 아프더라도, 그걸 멀거니 보고 있어서는 더더욱 안 된다. 아, 그렇지.
왔던 길을 후다닥 돌아가 물통을 가지고 왔을 때, 명헌은 세면대에서 입을 헹구고 있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시큼한 냄새가 진동하던 화장실이 묘하게 시원했다. 창문을 열었구나. 그새 야무지게 뒷정리를 한 모양이다. 나는 명헌에게 물통을 내밀었다.
“마셔.”
입을 헹구는 김에 세수까지 한 명헌의 얼굴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지금 필요한 건 수건인데, 베시.”
“탈수 오면 더 힘들어.”
고된 훈련으로 지친 명헌은 두 번 사양하지 않았다. 물통을 받아들자마자 한 번에 원샷을 했다. 턱을 타고 흘러내린 물방울이 고개를 젖혀 드러난 목젖에 맺혔다. 닦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수건이 없는데. 그럼, 손으로라도.
“10분 끝났겠다.”
“어, 그러게.”
“들어가자, 베시.”
의연한 태도를 되찾은 명헌이 앞장섰다. 나는 갑자기 속상해졌다. 최강이 뭐라고. 전국대회, 인터하이, 그게 다 뭐라고 이렇게 힘들어야 하나. 물론, 최강이라는 칭호는 거저 얻는 게 아니다. 노력해야했다. 꾸준해야했다. 그래도 마음이 안 좋았다. 주전이랍시고 힘든 티를 안 내려는 명헌이 딱하기도 했고.
…… 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덜 힘들어서 그런 거였다. 남 걱정에, 못 하겠다고 드러눕고 싶으면 한계가 아니었다. 진짜 한계에 다다르면 아무 생각이 안 났다. 버티는 게 고작이랄까. 명헌이가 게워내고 5시간 후, 저녁 훈련을 시작하기 직전에 나도 화장실로 달려가 토했다. 머리가 아픈 게 실내 공기가 텁텁해서 그러나 했는데 더위를 먹은 거였다. 어쩐지 밥 두 공기밖에 안 들어가더라.
저녁을 꾸역꾸역 먹은 직후였다.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음식물이 죄다 넘어와서 목구멍이 따갑고 아팠다. 변기를 붙잡고 끙끙거리는 내내 명헌이 등을 두드려줬다. 위로하듯, 애를 재우듯 토닥토닥 두들기는 손길 탓에 눈물이 다 났다.
“명헌아, 어때?”
부주장 목소리다. 동오 형은 곤란해 하는 사람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훈련 개 같아요, 힘들어요, 우는 소리를 하려 해도 입에서는 단내만 났다.
“토했으니까 괜찮아질 겁니다, 베시.”
“그러면 다행인데. 훈련은 계속할 수 있겠어?”
명헌과 눈이 마주쳤다. 명헌이 다시 동오 형을 올려다보았다.
“계속 한대요, 베시.”
동오 형이 화장실 바닥을 꺼트릴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좀 더 쉬고 들어와라. 내가 성구한테 얘기해놓을게. 무리하면 내일 더 탈난다. 양동이 쓴 애들에게도 똑같이 말해놨어.”
양동이라면 토할 때 쓰라고 가져다 놓은……. 우웁. 다시 올라오려고 한다. 등을 두드리는 손이 도로 바빠졌다. 다행인지 뭔지 헛구역질이었다. 더 토했으면 위액을 뱉었을 거다.
정신을 차려보니 동오 형은 가버리고 없었다. 불도 켜지 않아 어두운 남자화장실에는 우리 둘 뿐이다. 연습하러 가야하는데. 잔뜩 긴장했던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눕고 싶다. 이성이 쉬고 싶어 하는 본능을 마구 쥐어박았다. 넌 산왕의 에이스야! 죽더라도 농구공은 한 번 더 튀기고 죽어!
“째자.”
명헌이 선언했다.
“이러다 죽는다, 베시. 째자, 훈련.”
나는 멍 하니 명헌의, 정확히는 명헌의 윤곽을 쳐다보았다.
“동오 형이 쉬고 오라 했잖아…….”
입이 머리와 따로 놀았다. 부주장이 뭐라 하건 바로 들어가서 연습하려 했던 생각이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었다. 그래, 명헌이가 째자면 째야지. 저녁 훈련은 고작 두 시간짜리이긴 했지만. 내일이면 또 강행군이 이어질 테지만 말이다. 어, 아닌가? 오늘이 토요일 맞나?
“일어나. 바람 쐬다가 눈치껏 들어가자, 베시.”
후들거리는 다리를 간신히 일으키니 명헌이 손을 내밀었다. 힘든 와중에도 심장이 콩콩 뛰었다. 명헌이 먼저 스킨십을 하는 적은 거의 없다. 냉큼 손을 잡자 명헌이 빈손으로 수신호를 보냈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손동작에 담긴 의미를 읽어냈다. 조용히, 저쪽으로.
체육관 실내에서 화장실까지 이어지는 복도에 있는 시설이라고는 창고와 주전들의 릭커룸 뿐이었다. 그런데 락커룸으로 들어가는 문과 마주보는 커다란 복도 창문은 요령껏 손잡이를 밀면 열렸다. 개구멍, 아니, 창문 구멍이다. 정문까지 가는 게 귀찮으면 여기로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감독님이나 주장에게 잘못 걸리면 혼나긴 했는데 지금은 보는 사람도 없으니까.
내가 먼저 넘어가고 명헌이 뒤따라왔다. 창문을 넘어가면 바로 화단이다. 종아리의 맨살에 잡초가 쓸렸다. 간질간질하다. 화단을 벗어나자마자 뒤돌아 손을 뻗었다. 어두워서 명헌의 표정은 읽기 어려웠어도 괜찮았다. 손을 잡아줬으니까.
화단을 넘어가면 흙길이다. 쓰레기 버리러 가는 길목이라 가로등 따위는 없다. 우리는 순전히 기억을 등불삼아 움직였다. 지름길 찾아다닌 농구부원들이 뻔질나게 밟고 다닌 흙길을 따라 학교 본관까지 가로지르다 보면 작은 공터가 있었다. 갓 입학했을 때는 선생님들이 거기서 담배를 폈는데 선도부의 건의로 금연 구역이 됐다. 즉, 버려졌다. 이제 공터는 점심시간 전에 도시락 까먹거나 땡땡이치는 곳이었다. 가끔 나 같은 애들이 고백편지를 받는 곳이기도 했고.
늦봄과 초여름이 기 싸움을 벌이는 저녁 날씨는 모호했다. 더운 듯 안 더운 듯. 바람이 약하게 불었다. 지친 몸에는 그마저도 자극이었는지 팔뚝에 닭살이 돋았다. 아, 나 민소매 입었지. 오소소 소름이 일은 팔뚝을 문지르고 싶은데 잡은 손을 놓아주기 싫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몸을 배배 꼬고 있으니 명헌이 먼저 손을 풀고, 빈 벤치에 앉았다. 그러고는 손을 까딱.
“입 헹구고, 다 마셔.”
어디서 많이 본 500미리 생수다. 조금 전에 락커룸 앞에 쌓아놓은 생수 더미에서 하나 빼왔나보다. 이명헌 진짜 손 빠르다.
나는 얌전히 생수를 받아 시키는 대로 했다. 다 마시고 습관처럼 병을 우그러트리려는데 엄청난 소음이 났다. 시끄럽다. 빈 병의 입구를 잡고 살살 흔들다가 명헌의 옆에 앉았다.
고요했다.
“우리 찾으려나.”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명헌이 다리를 쭉 펴고 앉아 발을 까딱거리다 대꾸했다.
“다들 눈이 풀렸던데, 베시. 안 찾을 걸.”
“주장은 찾을지도.”
“주장도 아까 헛구역질했어, 베시. 내가 봤다.”
“본격적인 특훈은 7월 들어가면 한다며. 뭐가 이렇게 빡세.”
“작년보다 강도를 높인 것 같기도 하고…….”
울고 싶어졌다.
“광철이 보고 싶어.”
“나도 할머니 보고 싶다, 베시.”
“농구하고 싶어. 이렇게 힘든 거 말고 재미있는 농구.”
명헌이 작게 목을 울렸다.
“너 그냥, 베시. 연습 상대가 내가 아니라서 짜증난 거였잖아.”
“알면 바꿔달라고 그러지이이이.”
머리로 명헌의 어깨를 마구 밀었다. 힘이 다 빠진 명헌의 상체가 옆으로 마구 밀렸다.
“코치 말이 맞다, 베시. 내가 주전이 아니면…….”
“내가 주전인데 왜 네가 주전으로 못 뛰어!”
“…… 부상이나 불가피한 사유로 코트에 들어가지 못하면, 그때는 다른 가드한테서 공 받아야할 거 아냐, 베시.”
명헌 쪽으로 기대다시피 무너진 몸이 기우뚱,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명헌이 바로 앉으면서 밀어낸 거다. 나는 입술을 삐죽였다.
“이명헌 몸 함부로 굴리는 주전인줄 몰랐네. 실망이야.”
“식중독, 베시. 맹장이 터지거나, 베시.”
어? 듣고 보니.
“반대로 생각해도 마찬가지다, 베시.”
“에에, 설마.”
“앞일은 아무도 몰라, 베시. 매 순간에 전념하고 충실하려면 미래를 읽을 줄 알아야 해.”
알 것 같으면서 이해가 안 갔다. 이명헌이 없는 경기장. 그런 게 가능한가? 뭐. 이 년 전에는 그랬었지. 나 혼자 농구하고 다니던 중학생 시절에. 나한테 날개를 달아주는 패스가 너무 달아서 중학교 일일랑 까먹고 지냈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끝이 있다. 그걸 졸업이라고 한다. 이명헌은 실업으로 갈 거라 노래를 불렀었다. 빨리 돈 벌고 싶다고. 내 쪽으로 말할 것 같으면……. 미국 유학은 거의 확정됐다. 나는 미국의 대학 리그로, 프로 리그로, 고개를 치켜들고 더 높은 곳으로 향할 예정이었다.
명헌은 농구에 진심이었지만 돈도 똑같이 중요하게 여겼다. 내게 돈은 명성, 승리와 마찬가지로 부수적인 요소였다. 잘하면 뒤따라오는 것. 사는 데 필요하지만 걱정할 일 없는 것. 그런데 아무리 농구를 잘해도 명헌이는 내게 딸려올 것 같지 않다. 세계 제일, 우주 제일의 농구 선수가 되어도 이명헌은 이명헌이다.
하필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에는 떼를 쓰고 싶지도 않았다. 마음에 멍이 든 것 같다. 나는 평생 네가 주는 공만 받고 싶은데.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베시.”
명헌이 손가락으로 내 손등을 툭 건드렸다.
“머리 굴리는 건 내가 할 테니까, 베시. 넌 열심히만 하면 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항상 집중하고, 베시.”
난 언제나 너한테 집중했었어, 명헌아.
오늘 학생식당의 점심 메뉴는 카레다. 나는 직감했다. 이명헌, 점심시간에 백퍼 실종된다.
명헌은 삶은 당근을 안 먹었다. 식감이 물컹해서 싫다고 했다. 삶지만 않으면 괜찮단다. 삶은 양배추는 잘만 먹으면서. 얼마 전에는 당근이 싫은 걸 솔직하게 고백하라 추궁했더니 기숙사 냉장고에 있는 생당근 하나를 통째로 와작와작 먹었다. 내 앞에서.
그날 이후로 당근만 보면 이명헌이 떠올랐다.
아무튼, 명헌이는 식당에서 만들어주는 카레는 안 먹었다. 그런데 기숙사에서 사는 농구부원은 도시락을 싸오기 어려웠다. 누군가 만들어주지 않는 이상에는 말이다. 어제까지 확인한 바로 이명헌에게 도시락을 싸주겠다며 고백한 EF반 학생은 없다. 설마, 오늘? 영어 쪽지시험에 하나만 맞아서 복도로 불려가 선생님한테 혼났던 조금 전에? 그럴 리 없지. 이명헌이 도시락을 받았으면 같이 먹자고 했을 거다. 그럼 나는 미리 매점에 다녀와서 지금쯤 명헌이랑 밥 먹고 있었겠지.
종치자마자 명헌네 반에 쳐들어갔는데 없었다. …… 진짜 학생식당 갔나? 식당에서 파는 메뉴는 교직원메뉴, 오늘의 메뉴, 라면 이 셋뿐이다. 라면은 국물이 많고 양이 적어서 어지간히 쪼들리는 지갑 사정이 아니면 잘 먹지 않았다. 그 돈으로 매점에서 빵 사먹는 게 차라리 낫기도 했고. 그래도 그렇지, 왜 날 빼고 가?
실종된 명헌을 찾아 후다닥 뛰어다니는데 창밖 저 아래 익숙한 얼굴들이 눈에 띄었다. 어슬렁어슬렁 본관으로 향하는 사바나의 야생무리들이다.
“혀엉!”
요구르트를 쪼르릅 빨던 현철 형이 날 올려다봤다.
“어어, 이명헌 껌딱지! 명헌이는 어디 가고 너 혼자냐?”
현철이 형 옆에서 낙수 형이 현철 형의 옆구리를 퍽 찼다. 저거, 괜히 애 놀리지 말라는 뜻이다. 근데 난 애 맞으니까. 명헌이 껌딱지도 맞다. 나는 창문 밖으로 몸을 길게 뺐다. 옆에 있던 동오 형이 깜짝 놀라하며 소리를 질렀다. 너 그러다 떨어진다!
“명헌이 못 봤어요오?”
“정우성, 창문 안으로 들어가!”
“명헌이 못 봤냐니까요?”
“안 들어가?”
현철 형이 허공에 주먹을 내질렀다.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 괜찮지롱~ 하고 나댔다가는 이따 부 활동에서 스트레칭 명목으로 다리를 꺾일 거다. 허리나. 팔 따위를. 나는 얌전히 몸을 뒤로 물렸다.
“명헌이 성구 보러 부실 갔어!”
낙수 형이 소리쳤다. 내가 맞받아쳤다.
“왜요?”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왜 그걸 몰라요?”
“야, 그만해. 시간낭비야.”
현철이 형이 동오 형에게 쓰레기를 넘기고 앞으로 튀어나갔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형이 내 쪽으로 오려는 거구나. 나도 달렸다. 인간은 생존의 위기를 느끼면 한계 이상의 힘을 발휘하게 되어 있었다. 사냥하지 않으면 먹고 살 수 없는 사바나의 야생동물도 마찬가지였다. 현철이 형은 계단을 세 개씩 뛰어올랐고, 나는 네 개씩 뛰어 내려갔다.
이 자식, 어디 갔어? 현철 형이 잠시 숨을 고르는 틈을 타서 몰래 실습실로 들어갔다. 운이 좋았다. 일층의 토목실습실은 잿밥이며 자질구레한 쓰레기가 많이 나와 뒷문이 따로 달려 있다. 살그머니 움직여 오늘의 위기를 한 건 넘기긴 했는데, 배가 고팠다. 나 점심 아직 못 먹었는데. 명헌이 탓이니까 빵 사달라고 해야지.
아. 그제야 생각이 났다. 명헌이 있을 만한 곳.
가끔 엉뚱하긴 해도, 이명헌은 차분한 사람이었다. 반 애들하고 곧잘 어울리면서도 조용한 걸 선호한다. 어지간하면 부탁도 잘 들어준다. 코트 밖에서는 그랬고, 코트 안의 이명헌은 또 다른 사람이 된다. 정확하고 날카롭다. 가차 없었다.
그래도 그 애가 던져주는 공은, 뭐라고 해야 하지. 치트키를 거머쥔 느낌이다. 이 공으로 득점을 못하면 바보가 되는. 같은 1학년이나 2학년 형들, 3학년 선배들의 패스를 받아도 뭔가 달랐다. 어떻게 그러지. 그게 무척 신기해서 주전 후보로 함께 연습할 때 명헌을 꼼꼼히 체크했다. 버릇이나 자주 보내는 패턴 경로 같은 거. 패턴 경로는 잘 모르겠지만, 버릇은 하나 찾았다. 동료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명헌은 관찰자였고, 코트를 뛰어다니며 서술을 했고, 누구도 예상치 못한 순간에 공이 퍽 하고 온점으로 찍혀 들어갔다. 그걸 주워 먹으면 득점. 아니면 리바운드나 실점.
여태 명헌의 공을 제일 많이 주워 먹은 게 나였다. 그게 무척 뿌듯했고 기분이 째졌다. 어디 가서 자랑하고 싶었다. 얘가 패스 요리를 잘 해요. 맛집이에요.
“어휴.”
절로 한숨이 나왔다. 드디어 찾았네. 패스 요리사가 체육관 뒤 공터의 벤치에 앉아 있었다. 낙엽이 한창 떨어질 때라 땅바닥이 얼룩덜룩했다. 일부러 부스럭부스럭 요란하게 다가가자 명헌이 내 쪽을 돌아보았다.
“찾느라고 점심 못 먹었어.”
명헌의 얼굴에 의문이 서렸다.
“반 애들한테 너 데리고 가라고 부탁했었는데.”
“내가 걔네랑 왜 먹어?”
“너, 네 반에도 친구 없잖아.”
그랬나? 네가 안 보여서 바로 복도로 나가긴 했는데. 서로 의문을 가지고 멀뚱히 마주보길 몇 초. 명헌이 먼저 빵을 내밀었다. 아싸.
나는 명헌의 옆에 앉아 빵 봉지를 뜯었다. 그러자 명헌이 반 뼘 정도 옆으로 물러났다. 빵을 한 입 물고 엉덩이를 바싹 붙였다. 명헌이 떨떠름해하며 날 봤다.
“퍼스널 스페이스란 말 모르지, 정우성.”
너한테만 그러는 건데.
“그, 이싱힝 마응 안허?”
“…… 씹고 말하자.”
나는 빵의 절반을 먹어치우고 다시 말했다.
“이상한 말투, 그거 왜 안 쓰냐고.”
“아아.”
명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3학년 선배들이 내 말투가 거슬린대서. 그래서 생각해본다고 했어.”
성구 형이 그래서 불렀나보네. 그걸 본인들이 직접 말 안하고 형한테 전달한 것이 좀 웃겼다. 가만, 생각해본다고?
“다 생각하면 어떻게 되는데?”
“예전 말투로 돌아가려고.”
?
“생각은 했잖아.”
진짜 알수록 이상한 애다. 보통은 선배가 하지 말라는 건 눈치껏 그만두지 않나? 뭐, 나는 안 그렇지만.
“점심 뭐 먹었어?”
돌아오는 답이 한 박자 느렸다.
“컵라면.”
“매점 거?”
“아니, 감독님이 주셨어.”
“왜?”
명헌이 날 쳐다봤다. 왜라고 물어보는 게 이상했나? 빤히 쳐다보는 눈이 연습 시간이나 합동 실습할 때와는 달랐다. 나, 저 눈빛을 여러 번 경험해봐서 안다. 같은 반 애들이 가끔 저렇게 날 쳐다봤다. 뭔가를 재면서, 날 끼워줄까 말까 고민하듯이. 사람 기분 상하게.
그런데 명헌이 저러니까 불안이 호기심을 밟고 치밀어 올랐다. 내가 뭐 잘못했어? 널 거슬리게 했을까?
“가끔만 그래. 감독님이 내 형편 아시니까 챙겨주시거든.”
무슨 소리지? 튀어나오려는 질문들을 입술로 붙들어 물었다. 이건 명헌이에게 중요한 이야기다. 퍼뜩 든 생각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처음 보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살짝 긴장한 얼굴.
“나, 너보다 한 살 많은데. 그 얘기는 못 들었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생일이 반 년 빠른가……. 크게 중요한 건 아니고, 어릴 때 아파서 한 학년 더 다녔거든. 부모님 이혼하시고 여기, 옆 동네로 이사 와서 할머니랑 같이 살았어. 중학교까지는. 그리고 산왕에서 부분장학금 준다고 해서 온 거고.”
남은 빵을 우겨넣고 씹은 다음에, 질문했다.
“어디가 아팠는데?”
“마음이.”
내가 어떤 얼굴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명헌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 확실했다. 자세하게 알려 달라 조르지도 않았는데 저 도톰한 입에서 꼬맹이 이명헌에 대한 이야기가 줄줄 흘러나왔다.
선을 본 건지 연애결혼인지는 모르겠는데 부모님이 원래 데면데면했단다. 아주 어릴 적에도 화목하게 식사한 적이 없었다니까. 어느 날은 아버지인지 어머니인지 부모 중 한 명에게 크게 혼이 났다고 했다. 그렇게 꾸지람들은 적이 거의 없었으니, 고등학생 이명헌의 짐작으로는, 대수롭지 않은 화풀이였을 거라고. 왜냐면 꼬맹이 이명헌은 농구하고 뛰어다니는 걸 좋아했다는 점 외에는 눈치 잘 보고 얌전했던 아이였으므로. 혹시 모를 일이다. 고등학생 이명헌은 꼬맹이 명헌이 잘못했을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았다.
너 이렇게 고집부릴 거면 나가! 벼락같은 호통에 꼬맹이 이명헌은 진짜로 집을 나갔다. 저금통을 깨고, 그대로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혼자 돌아다닌다고 이상하게 여기는 어른은 어째 없었다고 했다. 시내버스를 타고 시외버스로 갈아타서 몇 달 전 연휴에 찾아뵀던 할아버지 집에 갔다. 그때는 할아버지가 살아계셨단다. 딱 한 번 와 봤던 조그마한 동네 터미널에 내려 컴컴한 시골길을 걸어 조부모 댁에 도착했다. 듣는 나도 황당했는데 명헌이네 할머니 할아버지는 얼마나 놀랐을까.
뭐, 여기까지는 영특한데 엉뚱하고, 많이 주눅 든 어린아이의 구조신호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꼬맹이 이명헌은 돌아가지 않겠다고 했다. 놀란 부모가 달려와 애를 어르고 달랬다. 학교는 가야지, 친구들이 너 기다린다는 말에도 넘어가지 않았다. 할머니가 제법 엄한 분이셨기 때문에, 이상을 감지한 웃어른 앞에서 부모는 아이를 함부로 다루지 못했다.
농구공만 끌어안고 살던 꼬맹이 이명헌은 시골 논두렁을 헤집고 다니는 말썽꾸러기 이명헌이 되었다.
담임에게는 애가 아파 시골로 요양을 보냈다며 에둘러댔다. 그러는 사이, 그들 가족은 자연스럽게 남남이 됐다. 지병이 있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족들이 마지막으로 모였다. 조모가 손자를 양육하되 비용은 이혼한 친부와 친모가 일부나마 지원해주기로 했다. 느지막이 전학 절차를 밟을 때에 몸만 한 살 자란 꼬맹이 명헌은 다음 학년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할머니의 제안이었다고 했다. 십 년도 살지 않은 꼬맹이 이명헌 인생 중 가장 원통했던 날들은 그렇게 무사히 지워졌다.
나는 입을 뻐끔거리다 감상을 뱉었다.
“명헌이 형.”
명헌이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어째 그렇게 말할 거 같더라니.”
“아니, 형 맞잖아?”
“학년은 같잖아. 의미 없어.”
정말 웃겼는지, 계속 웃던 명헌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저렇게 웃는 거 처음 본다. 신기하다.
“이건 다른 애들한테는 비밀이다.”
“비밀?”
“그래. 비밀이 무슨 뜻인지 알지? 너만 알고 있으라고.”
내가 바보인 줄 알아? 불퉁하게 되물으니 명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 가끔 바보 같아, 성적을 포함해서. 다른 건 몰라도 성적을 지적당하면 할 말이 없었다. 기초 과목은 엇비슷했지만 전공실습 과목에서는 명헌의 성적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언제였더라, 기왕 기계과에 왔으니 졸업까지 딸 수 있는 자격증은 다 따는 것이 목표라 했다.
나랑 전국대회는? 인터하이, 윈터컵은? 따지듯이 물었을 때 네가 뭐라고 했었지.
“점심시간 얼마 남았지. 매점 들릴까?”
“베리 굳 아이디어.”
나는 명헌을 따라 일어났다. 샛노란 잎사귀가 살랑살랑 춤추며 내려와 우리가 앉았던 자리를 차지했다.
아들, 산왕 가면 같이 농구할 친구들이 잔뜩 생길 거다.
광철의 말에 반신반의했었다. 사탕발림 같았다. 최강. 말은 좋다. 그런데 난 최강에 소속되는 것보다 최강과 싸워 이기는 게 취향이었다. 그저 그런 애들하고 경기해봤자 괴롭히는 것밖에 안 된다. 그래도, 믿고 의지하는 어른이 그렇게 말하면 기대하게 되잖아. 전국최강이라는 산왕의 농구선수가 되면, 중학교 때와 다른 농구를 할 수 있을까?
부 활동 둘째 날. 첫날 자기소개를 마친 입부 희망자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얼추 반 한 개 정도는 되겠다. 사전에 고지 받은 게 있어 무얼 하는지 대강 알고 있었다. 어제는 그룹별로 체력 테스트를 했고 오늘은 슛, 핸들링, 드라이브인 테스트를 한다. 상대는 주전들. 여기까지는 감독이 은근슬쩍 찔러준 거고, 나머지는 내가 유추한 거다. 골밑슛을 보지는 않을 테니 3점 슛이나 자유투를 넣어보라 할 거다. 핸들링에 상대를 붙인다 하면 드리블이나 패스 시험이겠지. 돌파는 일대일일 거고.
쉽네, 뭐, 라고 생각했지만 정말로 시시하게 끝나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지루하다. 시시하다. 이런 단어들에는 이제 경기마저 일 지경이었다. 정체되어 있는 느낌이 끔찍하게 싫었다. 농구는 운동이다. 움직이고 발전해야지, 고여 있으면 의미가 없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내 차례는 아직 아니었다. 그런데 다른 애들 테스트에서 견적이 나왔다. 산왕의 주전들은 테스트의 목적에만 충실하여 디펜스에 전념하고 있다. 그런데도 과감히 공격하려 드는 녀석들이 없었다. 멍청한 거야, 겸손한 거야? 전자이지? 아니면 테스트 자체가 몰래 카메라라거나? 나 열 받아 죽으라고? 점점 표정관리가 안 되어가는 게 느껴졌다. 이러다 분노의 일대일을 할 거 같았다. 광철이 마구잡이로 농구하지 말라고 했는데. 진정하자. 침착해야 한다. 일단은 테스트를 성공적으로 치러야 했다. 그래야 주전으로 뛸 가능성이 올라간다.
그때, 네 이름이 들렸다.
“이명헌, 포지션은 포인트 가드입니다.”
용. 이명헌에게서 자그맣게 뒷말이 새어나왔다. 잘못 들었나?
중학교까지는 통했겠으나 고등학교 주전들 사이에서는 왜소하게 느껴지는 1학년이 앞으로 나와 공을 받았다. 첫인상은 입술이었다. 뭐라고 해야 돼, 저걸. 육감적? 같은 남자애한테 육감적이라 표현해도 되나? 그런데 입부하러 모인 애들이 전부 빡빡머리라 인상이 거기서 거기였다. 개중에 이명헌은 입술하고……. 입술 그만 생각해……. 눈이 까맣고. 생태학습 갔을 때 만난 사슴 생각난다. 그리고 눈썹. 농구를 오래 했을 큰 손. 양쪽 검지와 중지에는 테이핑을 했다. 다친 건 아닌 듯. 기합 넣은 건가? 4번 유니폼을 입은 주전 선배가 감독과 무어라 속삭임을 주고받고, 3점 슛 라인에 있는 주전에게 고갯짓을 했다.
단숨에 알았다. 쟤가 뛰는 걸 놓치면 안 된다.
포인트 가드라는 이명헌은 슛 자세가 좋았다. 자유투는 간단히 통과했다. 슈팅 가드를 해도 되겠다. 네트를 깔끔하게 건드리고 떨어지는 공을 받은 주전이 이명헌에게 패스했다. 타앙, 타앙. 공을 튀기는 이명헌 앞에 한자리수 주전이 붙었다. 여태까지와는 좀 달랐다. 센터 같다. 체급이 다르지 않나? 경기 중에 대치하게 되면 체급이고 뭐고 의미가 없긴 하지만.
오, 사, 삼, 이.
처음이었다. 바이얼레이션 5초가 지나가기 전에 공을 던진 1학년은. 또, 아무도 없는 2점 슛 라인 안으로 공을 냅다 던진 1학년도 이명헌이 처음이었다. 엥? 주전 선배가 눈을 끔뻑였고, 나도 비슷하게 반응했다. 저렇게 대치하는 상황에서 룰에 걸릴 것 같으면 되든 말든 슛을 쏘잖아. 사실, 그러라고 있는 테스트였다. 공을 지키는 목적이 뭔데, 득점을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명헌은 공을 옆으로 던지고 본인이 그 자리로 달려갔다. 가상의 팀원을 생각하기라도 한 듯이.
득점 욕심을 안 내는 선수는 드물지 않나.
간신히 공을 되잡은 이명헌이 슛을 날렸다. 공은 림에 맞고 튕겨져 나왔다. 아쉬웠다. 저게 나한테 왔으면…….
드라이브인 테스트까지 끝낸 감독이 콧수염을 만지며 이명헌을 불렀다. 공을 왜 던졌느냐는 질문을 하는 것 같다. 이명헌이 대답한다. 뭐라고 한 거지. 궁금하다. 이명헌과 대치한 주전 선배가 뒤이어 불려갔다. 터덜터덜 걷는 것 같더니 감독에게 깨지는 눈치였다. 주전 선배가 꾸벅 구십도 각도 인사를 했다. 이명헌이 따라서 인사하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다음.”
감독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정우성입니다.”
포지션은 생략했다. 어제 말했으니까. 주전 선배들의 눈총이 날아드는 게 느껴졌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이명헌이라는 1학년이 있는 곳을 흘끔거렸다. 말간 시선과 마주쳤다. 날 응시하는 두 눈은 긴장한 기색 없이 차분했다.
갑자기 자신감이 생겼다. 농구를 함께 할 사람, 산왕에 있긴 있었다.
그렇게, 나의 세계가 부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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