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호대만/손톱

다정한 목소리였다고 내 멋대로 착각한 걸지도 모르지만

  • 커플링은 편의상 표기했습니다. 원하시는 쪽으로 소비하셔도 상관없습니다.

  • 슈터는 손 관리에 예민하다는 기사를 읽고 초고를 작성했는데... 초고를 쓴 게 하도 오래 전이라 기사를 못 찾겠네요. 저의 추측과 날조로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이게 마지막 공이다. 강백호는 공을 한 손으로 들어 형광등 불빛에 이리저리 비추어 보았다. 공은 먼지 한 톨, 손 기름으로 번들거리는 곳 하나 없이 깨끗했다. 강백호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공을 공 바구니에 넣었다. 청소를 마쳐 마음은 뿌듯하기에 그지없기야 했으나, 공을 힘껏 던졌다가 공 바구니가 엎어지기라도 하면 기껏 청소한 체육관이 엉망이 될 테니 말이다.

청소를 마치고 둘러보는 체육관은 평소보다 조용했다. 일기예보대로 저녁 늦게부터 눈이 내린 탓이었으나 강백호의 생각은 달랐다. 같이 있는 사람이 입을 꾹 다물고 있어서 이렇게 조용한 거다.

체육관 한구석에서, 정대만이 철제 의자에 앉아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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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백호가 체육관을 혼자 정리한 것은 강백호 본인이 보충 훈련을 희망했기 때문이고, 정대만이 늦은 시간까지 체육관에 함께 남은 것은 강백호와 함께하기 위함이다. 정확히는, 재활을 마치고 복귀한 강백호가 아직 무리하지는 말라는 권고를 깡그리 무시하고 밤을 새워 훈련하다 늦은 새벽에 훈련 나온 정대만에게 적발되었기 때문이다.

농구부원들은 제각기 기겁했으나 정대만이 감시자를 자원하고 안한수 감독이 허락한 덕분에 강백호는 보충 훈련이 정도를 지나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보충 훈련을 계속할 수 있었다. 말이 감시이지,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고 시범을 보이거나 상대가 되어주며 가르쳐 주는 과외나 다름없었다.

 강백호가 과로하지 않게 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집에 보내버리는 것이었고, 얼마 전 유명 대학으로부터 입학 추천을 받아 더 이상 훈련에 열을 올리지 않아도 되었으니, 강백호와 함께하는 것은 정대만의 선의라고 보아 마땅했으나 강백호는 혼자 다른 생각을 했다.

“대만 군은 농구를 너무 좋아하니까, 졸업하기 전에 고교 농구를 조금이라도 더 하고 싶었던 거겠지.”

그게 아주 틀린 말은 또 아니라서, 정대만은 감사히 여기라고 버럭 소리 지르는 송태섭을 만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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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만은 아주 훌륭한 감시책이었다. 오늘치 보충 훈련도 아주 칼같이 끝났다. 정대만은 강백호가 볼멘소리를 해도 눈 하나 깜짝 않고 뒷정리를 명했다. 강백호는 입술을 삐죽거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보채고 고집부려도 심드렁한 표정으로 안 된다는 말을 반복하는 정대만에게는 강백호 또한 질릴 대로 질렸다. 융통성이라고는 한 톨도 보이지 않는 얼굴 앞에서는 발을 쿵쿵 구르거나 드러누울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리고 강백호는 정대만이 곤란해하는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 새벽에, 제 이름을 부르며 달려온 정대만의 핏기 가신 얼굴이 자꾸 어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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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를 마쳤는데 정대만은 관심도 없다. 같이 남았으면서, 싫은데 억지로 남은 것도 아니면서 정리를 강백호에게 죄 미뤘을 때부터 불만스러웠다. 처음부터 강백호 혼자 하도록 시켰다면 또 모를까, 평소 정대만은 쉽게 우울해지는 후배를 위해 뒷정리까지 전부 함께했다. 버릇을 잘못 들여놓고 뒤로 빼니 외로움 잘 타는 후배로서는 배로 서러울 수밖에.

강백호는 입술을 삐죽 내민 채로 정대만에게로 다가갔다. 눈이 그치지 않을 성싶으니 귀가를 서둘러야 했다. 강백호는 몰라도 정대만에게는 그를 걱정하는 부모님이 계셨다. 강백호는 돌아가는 길에 잔뜩 투덜거려야 겠다고 다짐했다.

정대만은 얇은 막대에 손톱을 비비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삭, 삭, 희미한 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막대와 손톱이 마찰하며 나는 소리였다. 체육관에 사람이 없어서인지 작은 소리가 잘도 들렸으나, 강백호는 제가 숨 쉬는 소리가 커서 저 소리가 묻힐까 걱정이 되었다. 강백호는 숨을 죽였다. 의자에 앉으면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날 게 분명해 의자에 앉지도 못했다. 그는 어정쩡하게 서서 고개만 숙였다. 정대만을 집으로 보내야 한다는 생각은 이미 머릿속을 떠나고 없었다. 소리가 듣기 좋았고, 정대만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긴장하지 않으려 의식한 얼굴이 신중해 보였다.

강백호는 인기척도 내지 않고 정대만이 하는 모양을 조용히 지켜보다가, 그가 막대를 손에서 거두고 나서야 물었다.

“뭐 한 거야?”

그러자 정대만이 화들짝 놀라 퍼뜩 고개를 들었다. 강백호는 정대만이 의자에서 넘어지지 않도록 그의 양 팔을 손으로 잡아 붙들었다. 그는 정대만이 놀란 가슴 쓸어내릴 틈도 주지 않고 얼굴을 들이밀고, 다시 물었다.

“그거 뭐야? 손톱에 비빈 거. 삭, 삭.”

정대만은 질문에 답하는 대신 체육관 정리는 마치고 왔느냐고 다그쳤으나 강백호는 얼른 고개를 끄덕여 물음을 넘겼다. 정대만도 그 말을 믿어주고야 싶었으나 강백호의 눈동자가 번들거려 신뢰성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정대만은 고개를 쭉 빼서 강백호의 뒤쪽을 기웃거렸다. 얼핏 보이는 체육관은 깨끗했다. 정대만은 한숨을 내쉬며 얇은 막대를 강백호에게 보여주었다.

“파일이야. 손톱 정리. 손톱이 길면 부러지기 쉬우니까, 주기적으로 정리해야 해.”

그 말에 강백호가 정대만의 손을 쥐고 살펴봤다. 긴 손톱 끝이 매끄럽게 갈려 있었다. 강백호는 곧장 정대만에게 반문했다.

“이게 정리한 거야? 아직 긴데? 할 거면 제대로 해야지. 줘 봐, 이 천재가 해 줄 테니까.”

강백호가 조물조물하던 정대만의 손을 꽉 쥐고 파일을 갈취하려 들자, 정대만이 기겁하며 잡힌 손을 빼냈다. 그는 아주 소중한 것을 품에 안듯이 손을 감추고는 단호하게 외쳤다.

“손톱이 너무 짧아도 슛 안 들어가! 이 길이가 적당하다고!”

이어서 그는 제 손톱 관리 경력이 농구 경력과 맞먹는다고 씩씩거렸다. 정대만의 농구 경력을 모르는 강백호에게는 그다지 설득력 있지 않았으나 대사 자체에서 연륜이 느껴졌으므로 강백호는 몸을 뒤로 물렀다. 그러자 정대만이 티 나게 안심하며 힘 빠진 숨을 뱉었다. 하지만 안도하기에는 일렀다. 강백호가 정대만의 눈앞에 그의 양손을 디밀었다.

“나도 해 줘, 손톱 정리.”

강력하게 호소하면 오히려 뒷걸음질치게 되는 법이다. 정대만은 거절했다. 조금 떨떠름하게.

“그 정도는 스스로 해.”

강백호는 꿋꿋했다.

“대만 군이 잘 한다며! 엄청난 경력자라고 했잖아. 나도 해줘!”

시키는 대로 훈련도 조금만 하고 체육관 정리도 혼자 했지 않았냐고 우기며 눈을 찌를 듯이 양손을 들이밀면 정대만으로서는 방도가 없었다. 강백호가 토라지면 귀찮아질 게 분명했다.

 정대만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귀찮음을 갈무리하고 파일을 바로 쥐었다. 정대만이 제 옆자리를 툭툭 두드리자 강백호는 잽싸게 철제 의자에 궁둥이를 붙였다. 강백호는 들뜬 얼굴로 양손을 내밀었고, 정대만은 강백호의 오른손을 쥐고 파일을 가져다 댔다. 삭, 삭, 희미한 소리와 함께 손톱이 갈려 나갔다.

정대만은 강백호의 손에 집중하느라, 강백호는 정대만의 손길에 집중하느라 고개를 숙였다. 머리가 모여 숨결이 닿을 것처럼 가까웠다. 정대만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작고,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이번만이야.”

눈이 내려서, 사람이 없어서, 체육관이 조용해서. 다정한 음성이 잘 들렸다. 강백호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손을 잡은 손이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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