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램덩크 2차 창작

[정환수겸] 김감독의 내 집 마련 프로젝트 01

그 감독은 어쩌다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나

“너희는 앞으로 살면서 무수히 많은 소비를 하게 될 거야. 푼돈 한 푼, 두 푼 쓰는 거야 막 써도 괜찮지만 금액이 커질수록 생각하는 시간도 그에 비례해야 한다. 쉽게 말해 큰돈일수록 이것저것 따져가며 신중히 써야 한다는 거지. …근데 이 자식들아, 감독님이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좋은 말씀 해주시는데 귀담아 안 듣냐?”

수겸이 앞에서 열변을 토하든 말든 바닥에 빙 둘러앉은 선수들은 눈앞의 피자를 입으로 밀어 넣기에 여념이 없었다. 현재 수겸이 맡은 대학 농구부에 소속된 선수들은 성인이긴 했으나 고작 20대 초반에 불과했기에 감독인 수겸의 눈엔 아직도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들 같았다.

“다 너네 잘되라고 하는 소리야. 내가 너희 나이 때는 이런 말해 주는 선배나 어른이 없었다고! 특히 지금 4학년들은 졸업하면 바로 사회에 뛰어들 텐데, 지금부터 돈 관리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10년 뒤 사회적 지위가 완전히 달라진다.”

이런 걸 다 어떻게 알았냐고? 나도 알고 싶지 않았다. 젠장….

생각만 해도 속이 쓰려서 수겸의 미간이 마구 구겨졌다. 손에 들고 있던 남은 피자 조각을 전부 입에 밀어 넣은 선수 한 명이 입을 우물거리며 수겸에게 물었다.

“그래서 결론이 뭔데요, 감독님?”

결론 타령을 하는 걸 보니 여태 수겸이 한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은 게 분명했으나 수겸은 자라나는 후배 선수들을 위해 기꺼이 다시 입을 열기로 했다. 마치 과거의 나에게 하는 말 같아서 입안이 쓰긴 했지만.

수겸은 단전에서 올라오는 깊은 한숨을 내뱉고, 바닥에 앉아 멀뚱히 자신을 보고 있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허튼 데 돈 쓰지 말고 열심히 모아서 집부터 사라.”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큼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김수겸. 열심히 살았다. 진짜 열심히 살았다.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했던 농구를 무려 프로선수로 은퇴하는 30대 초반까지 쉬지 않고 했다. 이 말인즉슨, 지금 온몸이 만신창이라는 뜻이다. 무릎 연골은 진작 다 닳아서 없으며, 목, 허리, 팔꿈치까지 온몸의 관절과 근육이 시도 때도 없이 비명을 질러댔다. 프로 시절, 또래보다 높았던 연봉은 은퇴 후 병원비를 위한 선불금액이었다는 사실을 왜 그때는 미처 몰랐을까?

연봉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수겸은 자신이 받는 연봉이 리그 내에서도 나쁘지 않은 수준이었고 평범한 직장인들에 비하면 감지덕지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문제였다. 통장에 큰돈이 꽂히니 씀씀이까지 덩달아 커져 버렸다. 게다가 그 당시의 수겸은 자신의 벌이가 평생 이 정도 수준에 머무를 거라는 엄청난 착각 또한 하고 말았다.

그러나 사회가 그리 녹록지 않다는 걸 알게 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자신의 선수 생명이 끝나감을 느끼고 은퇴를 결심할 무렵부터, 수겸은 새 진로를 물색해야 했다. 비록 선수로서의 김수겸은 이제 막을 내려야겠지만 그는 아직도 농구를 사랑했다. 때문에 그가 은퇴 후 지도자의 길을 선택한 건 무척이나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갑 사정만큼은 당연하지 못했다. 당장 다달이 들어오던 수입이 반 토막이 난 것이야 예견된 일이었지만, 설마 고정비용까지 늘어날 줄은 수겸도 미처 몰랐었다. 응? 이게 무슨 소리냐고?

자, 생각해보자. 농구선수 김수겸은 프로에서도 1부 리그에 속한 구단에 계약된 선수였으므로 구단에서 제공하는 온갖 혜택을 누려왔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숙소다. 이 숙소에서 선수들은 별도의 추가 비용 없이 의식주와 교통편을 제공 받았다. 이 당연하던 모든 것들이 사회로 내팽개쳐진 순간 전부 돈으로 환산된다는 사실을, 수겸은 길바닥에 우두커니 서서야 깨닫게 되었다.

사실 먹고 입고 이동하고 하는 거야 당연히 돈이 들어가야 나온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진짜 감당하기 어려운 건, 가만히 서서 숨만 쉬어도 나가는 돈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뭐긴 뭐겠어. 당연히 월세지.

은퇴하자마자 대학리그에서 꽤 높은 순위의 대학 농구팀 감독 자리에 앉게 된 수겸은 새로운 꿈에 부풀어 있었으나, 그 꿈은 대학 인근에서 자취방을 구하러 들어갔던 첫 번째 부동산에서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사람은 땅 위에서 숨만 쉬어도 부동산 비용을 내야 한다. 심지어 그 땅이 ‘서울’이다? 당신은 숨 쉴 공간이 한 평 넓어질 때마다 어마어마한 비용을 추가로 지불해야 할 것이다.

이 사태를 타파하기 위한 해결책은 두 가지뿐이었다. 수입을 늘리거나, 비용을 줄이거나.

그러나 첫 번째 방법은 사실상 불가능한 방법이다. 애시당초 이제 막 은퇴 후 감독 자리에 뛰어든 초짜 감독에게 높은 연봉을 제시하는 곳은 없었다. 지금의 자리도 지도자 경력이 전무한 수겸-사실 그에겐 고등학교 시절, 감독의 부재를 대신해 선수 겸 감독을 맡았던 아픈 과거가 있으나 여기서 그 일을 들추진 말도록 하자-에겐 과분한 처사였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다. 어쩔 수 없다. 허리띠를 졸라매는 수밖에.

그러나 김수겸이 누구인가. 한다면 하는 인간이며, 독하기로 따지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사람이다. 고정비용? 까짓거 줄여줄게. 안 쓰고 안 먹는 게 뭐 어렵다고.

그리하여 그는 무식하지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택했다. 무조건 월급의 반을 적금으로 묶어버리고 남은 절반으로 생활했다. 문제는 이 생활비의 절반조차 몽땅 월세로 나간다는 것이다. 수중에 남은 돈을 세어보고 있자니 수겸은 성인이 되자마자 독립한 이후 처음으로 부모님이 보고 싶었다. 어머니, 아버지. 사는 건 왜 이렇게 힘든가요?

허나 이 세상 불변의 진리는,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며 살다 보면 어떻게든 살아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1년, 2년, 3년, 지나다 보니 연봉도 조금씩 오르고 저축 금액도 점점 늘어났다. 30대 중반이 되자 프로선수 시절 모았던 돈-물론 이 돈은 대부분 자취방 보증금으로 들어갔다-과 감독 일을 시작하고 모은 돈까지 합해서 나름 종잣돈이라 부를 수 있을 만큼의 금액이 모였다. 어느덧 통장에 찍힌 액수를 보며 수겸은 잠시나마 다시 행복한 미래를 꿈꿨다.

하지만 아까 말했었지? 우리 사회.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고.

그렇게 ‘내 집 마련’이라는 희망찬 미래를 꿈꾸던 김감독. 그의 꿈은 이번에도 역시나 부동산에서 와장창 깨지고야 말았다. 여기서 수겸은 또 한 가지 현실을 깨달았다. 물가는 내 연봉보다 빠르게 오르고, 집값은 그거보다 더 빠르게 오른다.

인생의 쓰디쓴 맛을 보고야 만 김감독은 그제서야 계획을 수정하기로 한다. 정직하게 저축만 해서는 서울에서 죽었다 깨어나도 집을 살 수 없다는 현실을 뼈저리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아니겠냐며. 수겸은 뒤늦게 부동산에 관한 공부를 시작했다. 일단 주변 매물의 시세부터 파악했는데 그는 여기서 어렵지 않게 몇 가지 규칙들을 알 수 있었다.

부동산의 가격을 형성하는 몇 가지 요소가 있는데 그중 가장 알기 쉬운 건 바로 ‘입지’였다. 대표적인 예로 ‘역세권’이란 말을 들을 수가 있는데, 쉽게 말해 지하철역 반경 몇 미터 안에 있느냐에 따라서 집값이 요동친다는 뜻이다. 역하고 가까울수록 비싸고 멀어질수록 싸진다.

구단에서 제공하는 버스로 이동하던 시절에야 숙소가 어디 구석에 짱 박혀 있든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지금은 어쨌거나 월급쟁이 직장인이다 보니 출퇴근의 편의성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최우선 조건이었다. 그렇게, 지금 다니고 있는 대학 주변 지하철 라인을 따라서 쓸 만한 집들을 물색하던 수겸은 해서는 안 될 실수를 저지르고야 만다.

바로, 마음에 드는 몇몇 아파트들의 과거 시세를 보고야 만 것이다.

처음엔 그저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지금은 욕 나오게 비싼 이 아파트가 과거엔 얼마였나 한번 볼까 싶었던. 그리고 호기심에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 죽는다.

하필이면 수겸은 자신이 처음 프로리그에 입단했던 시기의 시세-정확히는 분양가였던-를 확인하고야 말았고, 그는 조용히 일어나서 침대로 향했다. 그리고 말없이 침대 위에 올라타 매일 밤 소중히 끌어안고 잤던 베개에 사정없이 주먹을 내리꽂았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아니! 시발! 어떻게! 집값이! 10년 전! 보다! 3배가! 오를 수가! 있냐고! 시발! 내가! 그때! 연봉! 몇 년만! 모았어도! 그 집! 사고도! 남았다고! 이런! 시발! 좆같은! 경우가! 다 있냐고! 세상이! 시발!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더 때려도 먼지조차 나오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김감독의 주먹은 멈췄다. 그리고 그는 말없이 밖으로 나가 집 앞 편의점에서 소주 세 병을 사서 돌아왔다. 모니터 화면 속 야속하기만 한 10년 전 집값을 바라보며 안주도 없이 소주를 깠다. 이게 지금 빈속에 술이 들어가서 속이 쓰린 건지, 아니면 그냥 이 현실이 너무 좆같아서 속이 쓰린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그 무렵, 진실을 마주한 죄로 스스로를 후회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었던 수겸을 더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일이 발생했다. 별생각 없이 참석한 프로 시절 동고동락했던 선수들과의 술자리에서 들려온 몇몇 근황은 홧병이 나서 불붙어있던 수겸의 속에 기름을 붓고야 말았다.  

그들 중엔 수겸이 찾아봤던 10년 전 그 아파트를 그 당시에 실제로 사들여 몇 배의 수익을 낸 선수도 있었다. 심지어 어떤 놈은 열심히 모은 연봉으로 건물을 사서 은퇴 후 건물 관리나 하고 월세나 받아서 띵까띵까 놀고먹고 있었다.

뭐? 누구는 월세 내는데 누구는 월세 받고 있다고? 10년 만에 이렇게 차이가 날 수가 있다고?

이날을 계기로 수겸은 다시 태어났다. 더 집요하고. 더 독하게. 이 험한 세상,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내 인생 내가 개척해 나가야 한다! 잃어버린(?) 10년을 반드시 되찾아야만 한다!

그리하여 그는 더욱 ‘내 집 마련 프로젝트’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그는 밤낮없이 먹이를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처럼 마음에 드는 집을 찾아 헤맸다. 사실 지금의 재정 상태로도 몇 가지만 포기하면 서울 변두리, 혹은 수도권의 쓸 만한 아파트 정도야 사고도 남았다. 그러나 그 정도로는 결코 성에 차지 않았다. 그는 이미 부동산 투자에 성공한 지인들과 견줄 정도거나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진 아파트가 아니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겐 장애물이 너무 많았다. 일단 그런 아파트들은 비쌌다. 진짜 토 나오게 비쌌다. 마음 같아서야 ‘몇억 몇천, 전부 현금이다!’ 하고 떡하니 내놓고야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당연히 불가능하고 무조건 대출을 껴서 사야만 했다. 근데 하필 또 지금 시중금리는 연일 고공 행진이었다. 이쯤 되면 수겸은 세상이 날 외면하나 싶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들어갔던 은행에선 야박하기만 한 대출한도와 야속하기만 한 대출금리가 그를 반겼다. 상담 창구에 앉아 저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들었던 그때. 수겸의 눈에 은행원 뒤편의 현수막 속 문구가 눈에 띄었다.

< 신혼부부 우대 금리 제공. 최대 연 X.XX% 까지 가능. 지금 당장 신청하세요! >

미혼 청년인 수겸에겐 해당하는 게 없어서 그간 몰랐으나 사실 이 나라는 기혼자, 특히 신혼부부에겐 상당한 혜택을 제공하고 있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게 ‘주택담보대출시 우대 금리 제공’과 ‘주택청약시 특별공급 대상으로 선정’ 등이었다.

그러니까 일단 결혼만 하면 집을 살 때 대출금리를 더 낮게 받을 수 있으며, 운 좋으면 이제 막 새로 지은 삐까번쩍한 아파트에도 우선 입주할 수 있다는 소리다. 세상에, 이렇게 좋은 제도가?

그럼 뭐하냐고. 나한테는 해당이 안 되는데!

사실 이 나라에서 홀로 독립한 청년에게 주는 혜택이 없지는 않았다. 단지 그게, 저 어디 귀퉁이에 있는 코딱지만 한 임대 아파트여서 수겸의 성에 안 찰 뿐이었다. 심지어 그 청년 임대주택마저도 심사 기준에 부합하는 연 소득이 터무니없이 적어서, 애매하게 소득이 높았던 수겸은 해당조차 되지 않았다. 게다가 좀 있으면 ‘청년’에 해당하는 나이 또한 지나버리게 된다. 수겸은 이젠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만 나왔다.

그럼 ‘청년’도 아니고 ‘기혼’도 아닌 사람은 뭐 평생 내 집 마련은 꿈도 꾸지 말라는 건가?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낸 세금이 얼만데. 내가 돌려받을 수 있는 혜택이 이렇게 없다고? 혜택받고 싶으면 결혼해라 이거야?!

결혼, 결혼, 결혼. 이제 수겸의 머릿속엔 그 단어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복잡한 머릿속이 좀처럼 정리가 되질 않아 답답했다. 누군가에게 이런 속내를 터놓고 싶어진 수겸의 발걸음이 자연히 어느 장소로 향했다.

[ S : 나 너네 병원 앞으로 간다. 잠깐 나와.]

연락한 친구는 대학 병원에서 전문의로 근무하고 있어 오프가 아니면 사실상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렇게 불시에 연락하면 퇴짜를 맞기 마련인데 이날은 웬일인지 바로 답장이 왔다.

[ H : 후문 앞 카페. 도착 5분 전 연락.]

아무래도 오늘은 짬이 나는 모양이었다. 수겸의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서둘러 약속 장소로 향하며 시키는 대로 도착하기 전에 연락하고 기다리니 잠시 후 카페 문을 열고 커다란 남자가 성큼 걸어 들어왔다.

수겸이 손을 번쩍 들자 그 남자는 별말 없이 반대편 자리에 앉았다. 잠깐 흘러내린 안경을 손끝으로 추켜올리더니 미리 시켜둔 음료를 입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왜 갑자기 찾아왔어? 너 무슨 일 있어?”

“현준아.”

“응?”

“나랑 결혼할래?”

푸왁-!

미처 막을 새도 없이 입안에 넣었던 음료가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그것도 모자라서 사레가 들려버린 현준은 고개를 돌리고 쉴 새 없이 콜록거렸다. 사실 농담으로 한 말이었는데. 이 정도 격한 반응일 줄이야 몰랐던 수겸이 머쓱한 얼굴로 냅킨을 건넸다. 기침이 멎어 들고 어느 정도 진정되자 사색이 된 얼굴로 현준이 소리쳤다. 

“너, 그런 미친…! 아니, 너 진짜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아니거든. 나 완전 멀쩡하거든.”

“멀쩡한 놈이 그딴 소리를 해?”

“반쯤은 농담이었어. 물론 반은 진담이니까 네가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기꺼이….”

“그만, 그만해. 너 지금 제정신 아닌 게 분명하니까.”

두통이라도 오는 듯 현준이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었다. 정작 폭탄 발언을 한 당사자는 팔짱을 낀 채 무슨 생각에 잠겨있는지 시선이 위쪽 허공을 향해 있었다.

“일단 들어나 보자. 도대체 어쩌다가 그런 소리를 하게 된 거야?”

“현준아. 너 집 있냐?”

“집? 지금 사는?”

“응. 자가로?”

“있겠냐? 나도 의대 졸업하랴, 수련의 하랴, 군대 갔다 오랴. 이제야 전문의 달고 돈 좀 벌어보나 하고 있는데. 집은 무슨.”

“역시 그렇지? 사실 우리 나이에 집을 사는 게 흔한 일은 아니지.”

현준은 도대체가 수겸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얘기를 꺼내는지 짐작조차 가질 않았다. 아까는 대뜸 결혼하자더니 지금은 집이 있냐고 물어보질 않나. 현준의 의문이 커지고 있는데 수겸이 눈은 살벌하게 뜬 채로 입꼬리만 올려서 웃었다. 흡사 무언가 나쁜 계획을 하는 악당 같은 얼굴이었다.

“근데 집을 살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이 있어. 바로 결혼을 하는 거야.”

“…너 진짜 단단히 돌았구나. 미쳤어. 진짜.”

“그래. 나 돌아버렸다. 세상이 날 이렇게 만들었다고!”

물론 현준도 수겸이 말하는 바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결혼하면 이것저것 혜택이 많기는 하지. 근데 그렇다고 누가 결혼을 하냐고. 당장 받을 수 있는 혜택보다 장기적 손실이 더 큰 게 뻔한데. 아무래도 수겸의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지 못한 모양이라 현준은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그리고 여전히 눈을 번뜩이고 있는 오랜 친구를 향해 침착하게 말했다.

“네 말대로 결혼하면 집을 구하기 유리한 건 맞아. 그런데 결혼이 그렇게 쉬운 건 아니잖아. 일단 결혼할 상대를 찾으려면 연애부터 해야 하고. 여기에 들어가는 시간과 비용은 생각해보지 않은 거야?”

“그럼 너무 늦어. 결혼할지 안 할지도 모르는 상대와 연애하면서 시간을 허비하다가 그 사이에 집값만 더 올라버릴걸?”

“아니, 그렇다고 아무나 붙잡고 당장 결혼할 거야?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는데?”

“나랑 뜻이 맞는 사람하고 일단 결혼하고 집을 산 다음에 적당히 때를 봐서 이혼하면 되지 않을까?”

수겸의 마지막 발언에 현준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아무래도 자신의 친구는 생각보다 훨씬 더 미쳐버린 듯했다. 도저히 저건 정상적인 사고방식은 아니었다. 확실히 수겸은 하나에 꽂히면 막무가내로 밀고 나가는 스타일이긴 했다. 이럴 때 현준이 해야 할 일은 바로, 논리적인 근거로 수겸을 설득하는 것이다.

“뜻이 맞는 사람이라면, 너처럼 집을 구하려고 결혼하려는 사람이라는 거지?”

“그렇지.”

“그런 사람을 찾아서 결혼했다고 쳐. 근데 집은 하나고 사람은 둘이잖아. 나중에 이혼하면? 사이 좋게 공동명의로 찢어져서 지분을 나누어 가질 거야?”

“아니, 아니! 그건 절대 안 되지!”

양손으로 테이블을 짚고 벌떡 일어서서 격하게 부정할 정도로 수겸은 깜짝 놀랐다. 정말로. 손톱만큼도 고려해보지 않았던 문제였다. 건너편에 앉은 현준의 표정이 마치 ‘거 봐라. 내가 너 그럴 줄 알았다.’라고 말하는 듯 보였다. 수겸은 다시 자리에 앉아 손에 턱을 괴며 잠시 고민하더니 다시 말했다.

“조건이 하나 더 필요해. 나랑 가짜로 결혼을 해주되, 집 명의에는 관심이 전혀 없는 사람.”

“…있겠냐?”

한심하다는 듯이 되묻는 현준을 보며 수겸이 미간을 찌푸렸다. 확실히 쉽지 않은 문제였다.

“역시 없으려나….”

“잠깐.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나한테 부탁할 생각은 마라. 나는 너랑 결혼하면 무조건 그 집에 대한 소유권 주장할 거야. 나도 손해 보는 장사는 하지 말아야지.”

“시끄러. 넌 탈락이야. 꺼져.”

수겸의 단호한 말에 어깨를 으쓱이며 응수한 현준은 얄밉게도 조금도 아쉬워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수겸도 현준에게 큰 기대를 했던 것은 아니어서 곧장 시선을 돌리고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천천히 주변 인물들을 하나씩 떠올려보았다. 

그러니까. 내 주변에서 모든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이….

순간, 수겸의 뇌리를 스치고 한 남자가 떠올랐다. 그러자 흥분으로 인해 수겸의 동공이 눈에 띄게 확장되고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딱 한 명 있었다. 수겸의 주변에서 고작 집 하나에 미련 갖지 않을 만큼 돈도 많고, 미혼이고, 입도 무겁고, 나중에 이혼해도 뒤탈이 없을 만한 사람.

수겸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곧장 밖으로 나섰다. 당황한 현준이 엉거주춤 일어나며 소리쳤다.

“김수겸! 너 어디가?!”

그러자 열린 문밖으로 몸이 반쯤 나간 채로 뒤를 돌아본 수겸이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이정환한테 프러포즈하러 간다!”


* 본 내용은 모두 픽션이며 착한 어른들은 절대로 따라 하시면 안 됩니다. (이거 청약 사기야!)

* 사실 제가 '타로이야기'의 주인공 타로의 모델이 수겸이란 사실을 비교적 최근에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냥... 돈타령하는 수겸이가 보고 싶었어요. (미안해요 김감독) 그치만 현실 돈타령은 너무 슬프니까....... 집타령으로 바꿔보았습니다. 그래서 수겸이가 좀 캐붕 수준으로 돌아있는데 오타쿠 뇌절이라고 생각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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