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램덩크 2차 창작

[정환수겸] 덤프트럭에 박았지만 제가 피해자입니다.

아고물, 근데 이제 김수겸이 아저씨고 이정환이 고등학생인.

침대 위에 쓰러지듯 풀썩 엎드렸다. 어찌나 몰아붙였는지 손가락 하나 움직일 기운이 없었다. 확실히 30살이 되니 체력이 예전 같지 않다고, 베개에 얼굴을 묻으며 생각했다. 이 와중에 눈치 없이 뒤에서 바싹 붙어있는 근육 덩어리를 신경질적으로 밀어냈다.

“무거워. 저리 가.”

까칠한 언동에도 상대방은 웃기만 하고 순순히 옆으로 물러났다. 그리곤 얼굴을 팔에 괸 채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제법 다정한 눈빛이었다. 저런 걸 보고 멜로눈깔이라고 하던가. 아무튼 원나잇 상대에게 받고 싶은 눈길은 아니었다.

“어디 학교 다녀?”

…이건 원나잇 상대한테 더더욱 듣고 싶었던 말은 아니었는데.

도대체 그런 질문을 하는 의중이 뭔지 파악하느라 수겸은 잠시 말을 잃었다. 지금 나를 학생으로 본 건가? 이건 뭐 그럴 수 있다고 치자. 동안 소리 듣는 건 하루 이틀도 아니니까. 근데 무슨 학생? 대학생이면 차라리 다행인데, 시발 고등학생이면… 이새끼 이거 원조교제 하는 새낀가?!

순간 수겸의 표정이 험악해지자 상대방도 당황한 듯 서둘러 말을 얹었다.

“실례였다면 미안. 말하기 싫으면 말 안 해도…”

“저 학생 아닙니다.”

역시나, 전혀 예상 못 했다는 표정이군. 만약 정말로 날 고등학생으로 알고 그런 거면 당장 강냉이를 날려버려야겠다고 결심하며 수겸이 주먹을 꽉 쥐었다.

“이래 봬도 계란 한 판이 넘었어요. 혹시 당신 미성년자 가지고 놀려던 거면…”

“아니, 그런 거 아닙니다! 죄송해요. 당연히 저보다 어리신 줄 알고…”

내가 당연히 그쪽보다야 어리겠다만, 그렇다고 어떻게 학생으로 볼 수가 있지? 설마…? 문득 드는 불길한 예감에 수겸이 서둘러 물었다.

“그럼 그쪽은 나이가 어떻게 되는 데요?”

“저는 해남대…”

“대학생이라고?! 네가?!”

차마 그 얼굴로 어떻게 대학생이냐는 말까진 할 수 없어서 간신히 참았으나 이미 표정에서 다 드러났을게 뻔했다. 수겸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이거 그거잖아. 속인 사람은 없는데 속은 사람만 있는 거. 지금 여기 피해자만 두 명인 거지?

그러나 또 다른 피해자는, 곤란한 얼굴을 하고선 엄청난 폭탄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고등학생입니다. 해남대부속고.”

김수겸, 인생 좆됐다. 


모텔 방 안에 딸린 화장실은 방음이 잘 안되어서 문을 닫아도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줄기 소리를 들으며 수겸은 침대에 주저앉아 머리를 쥐어뜯었다. 

 

나 이제 잡혀가나? 시발 갑자기 왜 손목 시렵지?

30년 넘게 살면서 설마 술 먹고 원나잇 한 번 잘못해서 인생 말아먹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러나 이대로 인생 좆될 수는 없어서, 수겸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침착해. 이건 교통사고 같은 거야. 예측할 수 없는 사고였던 거지. 과실 비율을 잘 따져보자.

수겸은 이 불행의 시작점을 다시 떠올려보았다. 일단 전날 밤에 동창 모임에 갔다가 술에 꼬라박았고, 어찌저찌 나와서 귀가하는데 지하철역이었던가? 횡단보도 앞이었나? 아무튼 거기서 그 자식을 봤는데 얼굴이… 얼굴이 너무 내 취향이라 계속 쳐다봤는데 그러다 눈이 마주쳤지. 그러다가 내가 먼저 그 녀석 넥타이-지금 생각해보면 교복 넥타이였던-를 잡아당겨서 입술 먼저 갖다 박았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먼저 들이박은 게 맞았다. 의심할 여지 없는 '100:0' 이었다.

시발, 술이 웬수지! 급기야 수겸은 침대에 드러누워 허공을 발로 치며 육성으로 온갖 욕을 내뱉기 시작했다. 눈앞이 깜깜한데 수치스럽고 또 억울하기까지 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아니, 침대에서라도 내가 박았으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이런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샤워를 마친 불법 고등학생이 허리에 수건을 두른 채 욕실 밖으로 나왔다. 그 모습을 보자 벌떡 일어난 수겸의 눈이 살벌하게 빛났다. 

“...그래, 내가 백대빵일 리가 없어.”

“네?”

“길 가다가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한 번 물어보자고. 누가 널 고등학생으로 보겠어? 안 그래?!”

“아니, 그런 말 하셔도… 어쨌거나 그쪽이 착각하셨단 사실은 변함이 없는데요.”

젠장, 말이라도 못 하면…! 또다시 두통이 몰려와서 수겸은 도로 침대에 누웠다. 그러다 옆에서 바스락 거리는 소리에 돌아보니 제 두통의 원인인 녀석이 와이셔츠에 팔을 끼우고 단추를 잠그고 있었다. 이 와중에 저 잘빠진 몸을 보니 눈이 절로 돌아가서 몰래 흘겨보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거센 현타가 몰려왔다. 아직도 정신 못 차렸네. 너 지금 좆됐다고, 김수겸!

“표정 풀어요. 신고하거나 하진 않을 테니까요.”

듣던 중 그나마 반가운 소리였다. 수겸은 속으로는 무척 안심했으나 겉으론 말이 뾰족하게 나갔다.

“당연히 그래야 하는 거 아니냐? 네가 양심이 있다면.”

“흠, 고등학생 따먹어놓고 양심 운운하기에요?”

“따먹긴 누가…! 따지고 보면 네가 날 따먹은 거나 마찬가지잖아!”

“혹시 미성년자 약취 유인죄라고 들어보셨어요?”

그새 교복을 전부 갖춰 입은 녀석이 어깨를 으쓱 해 보이며 말했다. 상대 쪽에서 치사하게(?) 법을 들이미니 반박할 거리가 없었다. 수겸은 지금 눈앞에 서 있는 저 자식이 얄미워서 죽을 것 같았다. 그리고 저게 어딜 봐서 교복이냐고, 백 미터 밖에서 봐도 양복이구만!

“말은 똑바로 해야지. 내가 협박한다고 해서 네가 순순히 따라올 위인이냐?”

“어제는 제가 순순히 따라가긴 했죠. 그래서 신고 안 한다니깐요?”

팔짱까지 끼고선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녀석이 얄밉기는 했으나 어쨌든 신고만 안 하고 넘어간다면 그저 재수 없는 해프닝 정도로 끝날 일이었다. 그제야 머릿속을 가득 메운 상념이 사라진 수겸이 한결 좋아진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주머니를 뒤져 지갑을 꺼내 지폐 몇장을 선심 쓰듯 건넸다.

“받아. 차비나 하라고.”

거절하려는 듯 밀어내는 손짓에도 아랑곳않고 대충 그 녀석 바지 뒷주머니에 지폐를 꽂아 넣었다. 녀석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역력했으나 그대로 미련 없이 지나쳐갔다. 어쨌든 내가 어른인데, 나보다 한참 어린 애를 빈손으로 그냥 보내기엔 양심이 허락치가 않았다.

현관 앞에 제멋대로 놓여 있는 운동화에 발을 한 짝씩 끼워 넣었다. 근심이 사라지니 발걸음이 가벼웠다. 밖으로 나서면서 모텔 문을 닫기 전, 안에 멀거니 서 있는 녀석한테 마지막으로 작별 인사를 건넸다.  

“만나서 좆같았고 다신 보지 말자.”


오늘은 수겸이 모교에 있는 고교 농구부에 감독으로 부임한 첫날이었다. 첫인상이 중요한 만큼 나름 정장으로 깔끔하게 갖춰 입었다. 이 정도면 불과 몇 시간 전 숙취에 찌든 얼굴에 츄리닝 바람으로 모텔을 나선 사람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하필이면 새 직장에 첫 출근하는 날에 그런 사고가 나다니. 액땜했다 생각해야지.

수겸은 전날 있었던 일을 떠올리기만 해도 손목이 시큰해졌다. 하필이면 지금 향하는 곳이 고등학교라서 더 그랬다. 외형이야 어찌 됐든 어린 애를 상대로 몹쓸 짓을 저질렀다는 생각에 양심에 가책이 느껴지긴 했다. 근데 요즘 애들은 왜 그렇게 노숙, 아니, 성숙한 거야?

그 생각도 교문 앞을 통과하고 나자 눈 녹듯 사라졌다. 수겸이 학교 안에서 지나가며 마주친 학생들은 전부 제 나이 또래처럼 보였다. 역시 그 녀석이 이상한 거였다.

학교 행정실에서 간단한 절차를 마친 뒤 연습장으로 자리를 옮겨 드디어 일 년 동안 함께 동고동락할 농구부원들을 만날 수 있었다. 10년도 더 전에 수겸 역시도 이 코트 위를 뛰어다녔었는데, 이렇게 다시 오니 감회가 새로웠다.

한명씩 자기소개를 마친 뒤 주장이라고 소개 받은 한 남학생이 수겸에게 다가와 제본 된 종이 뭉치를 내밀었다.

“감독님, 오시자마자 좀 갑작스럽겠지만 인근 학교와 오후에 바로 연습 경기가 잡혀 있습니다.”

“상대는?”

“해남대부속고입니다. 17년 동안 도내 챔피언이었던 농구 명문고입니다.”

수겸의 안색이 순식간에 파리해졌다. 그 모습에 덩달아 당황한 목소리로 주장이라는 학생이 되물었다.

“감독님?”  

“…홈이야? 아니면 원정?”

“홈이요.”

좋아, 하늘이 날 돕는군.

수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괜히 해남고에 원정 갔다가 우연히라도 그 녀석하고 마주치는 것만은 절대! 피하고 싶었다. 이제 수겸의 인생에서 그 녀석은 다시는 볼 일이 없어야만 했다.

그러나 인생은 결코 뜻대로 흘러가지만 않는 걸, 불과 몇시간 뒤에 깨달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전날 원나잇 한 고등학생을 몇 시간 뒤 직장에서 다시 만날 확률은?

이런 걸 계산해봤자 무의미하다는 걸 수겸 또한 잘 알고 있었으나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눈앞에 닥친 현실이 너무 버거워서 확률의 신이라도 원망해야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그 껄끄러운 대상이 상대팀 주장에 에이스라서 지금 코트 위를 날아다니고 있으며, 우리 팀의 스코어를 개박살 내고 있다는 현실까지 겹치자 이건 감독 김수겸에게도 악몽 같은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근데 저 새끼는 지금 뭐가 좋다고 실실 쪼개지?

물론 당연히 기분 좋겠지. 너네 팀이 이기고 있으니까! 근데 수상하게도 저 재수 없는 녀석은 수겸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기분 좋은 듯 웃어댔다. 반면 수겸은 지금 속이 시꺼멓게 타들어 가서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분명 오늘 새벽, 불의의 사고(?)로 마주치긴 했으나 수겸은 저 녀석을 꽤 괜찮게 평가했었다. 어쨌든 책잡힌 건 이쪽인데도 먼저 선뜻 신고하지 않겠다고 했으니까. 겉모습과는 달리 아주 선량한 고등학생이라고 생각했었지. 그러나 이제 보니 고작 연습 경기에 원정까지 와서는 홈팀을 자비 없이 개박살을 내는, 아주 피도 눈물도 없는 놈이었다.

어쩌면 이게 지난 밤의 내 업보를 되돌려 받는 것인가 싶을 때쯤, 시합 종료 휘슬이 울렸다. 힘없이 터벅터벅 벤치로 돌아오는 선수들을 다독이고 있는데 눈치 없이 등 뒤에 거대한 그림자가 졌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이렇게 또 뵙네요.”

“네, 뭐… 그렇게 됐네요.”

왜 하필이면 지금 아는 척인데?! 미친 놈아, 눈치 챙겨!!

수겸의 얼굴이 뭐 씹은 표정으로 변하든 말든, 녀석은 여전히 뭐가 그리 즐거운지 입가에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경기장 안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리고 있었다. 이제 그냥 닥치고 꺼져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무렵, 수겸의 앞에 불쑥 커다란 손이 내밀어졌다.

“이렇게 다시 만난 것도 인연인데 앞으로 잘 지내봐요, 우리.”

차마 부임 첫날부터 상대팀 주장을 걷어차는 퍼포먼스를 선보일 수 없었던 수겸은 간신히 화를 삭히며 악수를 청하는 웬수의 손을 마주 잡았다. 일부러 부서질 듯 꽉 잡고 보란 듯이 세게 흔들었는데도 저 자식은 아랑곳않고 소리 내 웃기까지 했다. 수겸의 미간에 절로 주름이 잡혔다. 

고교농구 명문 해남대부속고의 주장이자 에이스.

단 한 번도 MVP를 놓친 적이 없는 카나가와의 제왕.

그리고 잘못 건드리면 인생 좆되는 불법 고등학생.

김수겸의 인생에 덤프트럭처럼 밀고 들어온 이정환이었다.


“현준아, 들어 봐. 내가 사고가 하나 생겼는데… 아니, 아니! 일단 그… 내 과실이긴 하거든? 그쪽은 그냥 가만히 있었는데 내가 먼저 (입술을) 가져다 박긴 했어. 근데 나도 억울한 게 충분히 내가 오해하고도 남을 상황이었다고! 뭐? 침착하게 말해보라고?”

내가 지금 침착할 수 있겠냐고, 인생 좆되게 생겼는데…!

머리에 열이 오르다 못해 정수리에서 김이 펄펄 나는 것만 같았다. 잠시 이마에 손을 얹고 끓어오르는 화를 삭이던 수겸이 심호흡을 몇 번 하고선 다시 휴대전화를 고쳐 잡았다.

“어제 술 먹고 집에 가다가 그 자식하고 마주쳤는데, 아니, 잠깐,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음주 운전 아니라고! 애초에 차 사고가 아니었어! 일단 들어 봐. 우연히 길에서 그 녀석을 만나서 내가… 내가 모텔로 데려가긴 했거든? 절대 억지로 데려가진 않았어. 그쪽도 순순히 날 따라왔다고…! 아무튼 그다음에 뭘 했는진 말 안 해도 알 테니 생략하고, 근데 내가 다음 날이 되어서야 알았는데 그 상대방이…”

어느새 휴대전화를 잡은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아서 한참을 입술만 짓씹던 수겸이 두 눈을 꾹 감고선 목구멍에 걸려있던 문제의 단어를 약간의 버퍼링과 함께 뱉어냈다.

“그, 그, 그 망할 자식이 고등학생이었다고…! 여보세요…? 현준아? 여보세…? 야, 성현준!”

[뚜…뚜…뚜…]

그러나 돌아온 건 믿을만한 친구의 목소리가 아니라 야속하기만 한 통화 종료를 알리는 신호음 뿐이었다. 이 새끼가 바로 전화를 끊어…?! 친구가 지금 좆되게 생겼는데, 변호사란 자식이…! 수겸은 겨우 진정시킨 화가 다시 솟아올랐으나 이내 자신의 처지를 떠올리며 꾹꾹 눌러 담았다. 지금 수겸이 비빌 언덕이라곤 변호사인 현준 밖에 없었으니까.

최근 통화 목록에서 바로 현준의 번호를 누르고 전화를 다시 귀에 가져다 댔다. 역시나, 인생 헛살지는 않은 모양인지 신호음이 얼마 가지 않아서 현준이 전화를 받았다.

[나한테 연락하지 마라, 김수겸.]

곧바로 들려온 건 매정한 말이었으나 말투만은 그렇지 못 했다. 걱정스런 어투를 숨기지 못 하는 현준의 목소리에 수겸은 심각한 상황에서도 웃음이 나왔다. 그럼 그렇지. 현준은 어릴 적부터 수겸에게 너무 물렀다. 

[너 내가 검사 아니고 변호사인 걸 다행으로 알아. 그래도 이번엔 네 변호는 못 맡는다.]

“나 진짜 억울해, 현준아. 난 그 자식이 미성년자인 줄 몰랐다니까? 그리고 상호합의 하에 한 건데도?”

[합의가 되고 안 되고 간에 미성년자와 성관계는 걸리면 무조건 형사 처벌이야. 잘 받아서 집행유예로 끝난다쳐도 인생에서 빨간줄 그어지는 건 물론이고, 범죄 치료 프로그램 이수는 필수로 들어가고 아동청소년 관련 기관에 취업 제한도…]

“잠깐, 그 관련 기관에 고등학교도 당연히 들어가나?”

[너는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니?]

그저 막연하게 인생 말아먹었단 생각이나 했지 그게 자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칠 거라곤 세세하게 알지 못 했던 수겸은 전문가의 입에서 들려온 현실적인 내용에 큰 충격을 받았다. 마치 망치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했다. 그런 그를 제정신으로 돌려놓은 건 오늘 처음 만난 상양고 농구부 아이들이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상양고 농구부엔 근 2년 가까이 감독이 없었다. 나름 지역에서 명문으로 손꼽히는 사립고에서 매년 전국대회 진출을 이뤄내는 운동부에 그 정도도 지원을 안 해주는 건 어른들의 복잡한 사정이 있었겠지만 아이들은 그걸 알 턱이 없었고 그런 불리한 조건에서도 부 활동에 열심이었다. 그래서 자신 같이 은퇴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초짜 감독이 와도 아이들은 드디어 감독님이 오셨다면서 뛸 듯이 기뻐했었다.

근데 한 번의 실수로 학교에서 잘릴 수가 있다고? 하필 인터하이가 코 앞인 지금?

머리에 찬물을 끼얹은 듯 정신이 번뜩 들었다. 수겸은 자신을 마치 구세주라도 되는 듯 바라보던 수십명의 농구부 아이들 얼굴이 떠올랐다. 이대로 그 아이들의 간절함을 저버릴 순 없었다.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아야만 했다.

“이건 명백한 오해야. 내가 들이박긴 했지만 피해자는 나라니까?”

[법 앞에서 그렇게 말해봤자 무슨 소용이야.]

“상대가 고등학생인 이상 나한테 정상 참작될 사유가 전혀 없는 거야?”

[어, 없어.]

그 후로도 통화는 계속 이어졌지만 수겸은 마땅한 해결책을 얻지는 못 했다. 결국 깊은 한숨과 함께 현준과의 통화는 종료되었고 수겸의 머릿속은 더 복잡해졌다. 교무실 한켠에 새로 부임한 농구부 감독을 위해 마련된 자리에 앉아서 수겸은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어느덧 밖은 어두워지고 학교엔 불이 하나둘씩 꺼지고 있었다. 더 있어봤자 나아지는 건 없겠지. 결국 수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무실을 나서서 복도를 터벅터벅 걸어가는데 발걸음이 무거웠다. 지금 수겸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그 망할 고등학생이 얌전히 입 닫고 모른 척해주길 바라는 것 밖엔 없었다. 그렇지만 정말로, 남의 손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고선 언제 들키진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사는 건 도저히 수겸의 성미엔 맞지 않았다.

학교 밖으로 나와 교문을 벗어나면서도 수겸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 탓에 누군가 바로 옆으로 다가와 제 어깨를 잡자 화들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고개를 돌리자 먼저 보이는 건 어깨에 올려진 진한 피부의 커다란 손이었다. 그 손의 주인이 누구인지 확인하자마자 수겸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정작 놀래킨 당사자는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를 내보이며 말했다.

“감독님, 늦게 퇴근하시네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당당한 태도였다. 누가 보면 내가 기다리라고 한 줄 알겠어, 아주? 그러나 지금은 녀석과 실랑이할 틈도 없었다. 여기는 지금 교문 앞이고, 남들 눈에 띄기 딱 좋은 위치였다. 수겸이 다급히 주위를 둘러보다가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선 곧장 녀석의 옷자락을 잡아채곤 구석진 골목으로 끌고 갔다. 

이번에도 순순히 따라온 녀석은 막다른 골목에 들어와서야 붙잡은 옷깃을 내려놓고 그를 노려보는 수겸을 여전히 흥미롭다는 듯 보고 있었다. 그 꼴을 보니 수겸은 속이 뒤틀렸다. 

“너 정신 나갔어?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 와!”

“학생이 학교 앞에 서 있는 게 뭐가 어때서요?”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학생’ 소리만 들었을 뿐인데 수겸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런 수겸의 반응에 저 망할 고등학생은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고 있는지 입꼬리가 씰룩 거렸다. 저 영악한 자식은 본인이 유리한 상황임을 알고 일부러 저러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수겸 역시 순순히 당하고만 있을 사람은 아니었다. 

“어이, 불법 고등학생.”

“이정환이요. 이제 이름 알잖아요.”

“그래, 이정환아. 내가 어제 마지막으로 너한테 했던 말이 뭔지 기억하니?”

“ ‘만나서 좆같았고 다신 보지 말자.’ 고요?”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네. 근데 왜 자꾸 내 눈앞에서 얼쩡거리는 건데?!” 

수겸이 삿대질을 하며 열불을 토해냈지만 정환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도리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도저히 고등학생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여유로움이라 수겸은 여전히 녀석의 정체가 의심스러웠다. 

“우리가 다시 만난 게 제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잖아요? 저도 연습 경기하러 왔다가 이렇게 마주쳐서 얼마나 놀랐다고요.”

“그러니까 그건 우연이었다 치고, 이 시간까지 굳이 날 기다린 건 대체 무슨 의도인 건데?”

“아, 그건 감독님께 중요한 용건이 있어서요.”

“뭐? 무슨 용건인데?”

수겸이 의문을 표하자 정환은 넉살 좋게 웃으며 교복 재킷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수겸에게 내밀었다. 굳이 캐묻지 않아도 무슨 의중인지 뻔해서 수겸은 등골이 오싹했다.

“연락처 알려 주세요.”

“싫어. 내가 왜?”

“안 알려주시면 계속 교문 앞에서 기다릴 거예요. 누가 물어보면 김수겸 감독님 기다리고 있다고 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수겸이 얼른 정환의 휴대전화를 뺏어 들었다. 기세 좋게 움직인 것과 달리 애꿎은 전화기만 움켜쥐고선 수겸은 아무 말 없이 정환을 노려보기만 했다. 기 싸움이라면 밀리지 않는 김수겸이지만 이 상황에서도 여유로운 이정환 역시 보통내기는 아니었다. 결국 수겸이 먼저 백기를 들었다.

“번호 알려줄 테니까 다시는 우리 학교 앞에 나타나지 마.”

수겸의 말에 정환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영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수겸이 손에 든 휴대전화에 자신의 번호를 꾹꾹 눌러서 돌려주었다. 정환은 액정 화면에 찍힌 번호를 보는데 그치지 않고 통화 버튼을 눌러서 수겸의 전화벨이 울리는 것까지 확인하는 치밀함까지 보였다. 그 모습에 수겸은 아무래도 만만치 않은 녀석에게 단단히 걸려든 것만 같아서 머리가 아파왔다. 그런 수겸의 속도 모르고 정환이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미리 연락하고 오는 것도 안 되나요?”

“어, 안 돼. 넌 너무 눈에 띄게 생겼어.”

“그럼 학교 밖에서 만나는 건 되죠?”

“너 설마 나랑 계속 얼굴 볼 생각이니?”

“네, 그럴 생각인데요.”

이게 진짜, 누구 피 말라 죽는 꼴을 보려고 이러나?! 수겸이 속으로 이를 갈며 정환에게 말했다.

“난 너랑 사적으로 볼 생각이 추호도 없으니까 쓸데없는 연락 하지 마세요. 해남대부속고 농구부 주장 이정환군.”

“싫어도 계속 보게 되실 겁니다, 상양고 농구부 김수겸 감독님.”

저게 진짜 끝까지 한 마디도 안 지고…! 

일부러 속을 살살 긁는 듯한 말에 발끈한 수겸이 뭐라 대꾸하려다 이내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이 녀석하고 더 실랑이 해봤자 득이 될 게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래도 나름 저 녀석보다야 10년은 더 살았는데, 인생 경험은 수겸이 훨씬 앞섰다. 저런 상대는 무시가 답이다. 별 반응을 안 보이면 금세 제풀에 나가떨어질 테지.

냉정을 되찾은 수겸이 먼저 등을 돌리고 골목에서 벗어나자 당황한 정환이 바로 따라붙었다. 그러나 수겸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귀찮다는 듯 손만 휘휘 저었다. 꼭 주변에 들러붙은 벌레를 쫓아내는 듯한 무심한 손짓에 정환이 더는 따라가지 못 하고 멈추어 섰다. 눈치가 빠른 정환은 이 이상 했다간 수겸에게 미움을 살 거란 걸 잘 알았다. 그렇지만 이대로 헤어지기엔 조바심이 나서 멀어지는 수겸의 등 뒤에 소리쳤다.

“다음에 연락할 게요, 감독님!”

무시당할 거란 예상과는 달리 수겸은 정환의 목소리를 듣고선 가던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손까지 슬쩍 흔들어주었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긴 했지만 그에게서 긍정적인 시그널을 이끌어낸 것만으로도 정환은 만족스러웠다. 그렇게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 한 채로 자리를 뜨는 정환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수겸은 곧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제아무리 상대가 덤프트럭이어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김수겸이 아니었다.


어느 주말, 번화가에 위치한 카페엔 빈 테이블 하나 없이 손님이 꽉 차 있었다. 그 중 한 테이블엔 누가 봐도 눈에 띄는 두 남자가 앉아 있었는데, 한 명은 엄청나게 키가 크고 안경을 쓴 멀끔하게 생긴 남자였고 다른 한 명은 지나가던 사람들이 다 한 번씩은 돌아볼 정도로 잘생긴 남자였다. 그들은 누군갈 기다리고 있는지 건너편 자리는 비워둔 채 나란히 앉아서 카페 입구만 쳐다보고 있었다. 안경을 쓴 키가 큰 남자가 옆에 앉은 잘생긴 남자에게 말했다.

“네가 부탁해서 나오긴 했지만, 괜히 이 사건에 나까지 끌어들일 생각은 하지 마.”

단호한 목소리에 카페 입구를 노려보던 수겸이 고개를 돌려 현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시선이 마주치자 싱긋 웃어 보였다.

“현준아, 너 나 믿지?”

“너는 믿지만 지금 상황이…”

“일단 그 불법 고등학생 한 번만 보고 나서 판단해.”

본다고 뭐가 달라져? 현준은 끓어오르는 물음을 삼키려 테이블 위의 커피를 들어 목구멍으로 넘겼다. 평일에도 달고 사는 커피라 주말만은 자제하려고 했는데, 스트레스를 받으면 역시 카페인이 당겼다. 정작 사고 친 장본인은 주문한 음료의 얼음이 녹든 말든 신경도 안 쓰고 카페 입구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왔다.”

누군가 발견했는지 수겸이 옆에 앉은 현준을 팔꿈치로 툭 건들이며 말했다. 현준이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고 앞을 보자 카페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그 순간 당황한 현준이 수겸에게 속삭였다.

“아무래도 보호자가 같이 나온 모양인데?”

풉.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참느라 잔뜩 일그러진 수겸의 얼굴을 보자 현준의 인상이 절로 구겨졌다. 아니, 지금 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와? 벼랑 끝에 몰리니까 정신줄 놓은 거야? 현준이 뭐라 덧붙이려는데 수겸이 손을 들어 보호자로 추정되는 인물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그 남자가 반가운 얼굴로 이쪽으로 걸어 와 건너편 의자에 앉았다. 현준은 더욱 혼란스러웠다.

뭐지, 전혀 반길만한 상황이 아닌데…? 설마 보호자가 아직 사건의 전말에 대해 모르는 건가? 근데 오늘 나온다던 그 학생은 어딨지, 같이 안 왔나?

현준이 속으로 온갖 시나리오를 짜내고 있는 사이, 그 상대방도 현준을 발견하고선 고개를 갸우뚱하고 수겸에게 물었다.

“감독님, 옆에 계신 분은 누구시죠?”

“아, 여기는 내 친구 성현준이야. 좀 필요해서 불렀어. 그리고 현준아…”

수겸의 부름에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을 한 현준이 그를 쳐다보았다. 이번에도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고 수겸이 말했다.

“이쪽이 내가 말한 그 고등학생이야.”

그리고 현준의 표정이 의문에서 경악으로 바뀌는데 불과 몇초 밖에 걸리지 않았다. 수겸은 이젠 웃음을 참느라 배가 다 당길 지경이었다.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 하는 현준의 귓가에 수겸의 의기양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 봐, 내가 그랬잖아. 내가 피해자 맞다니까!”

놀랍게도 그 순간 현준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 이 정도면 해 볼 만 하겠는데…?


“꼭 이렇게까지 하셔야겠어요, 감독님?”

늘 여유만만하던 녀석의 당황한 표정을 보는 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짜릿한 일이었다. 비록 다 큰 어른이 고등학생을 상대로 이런 협박을 하는 게 양심에 찔리기는 했으나 그간 수겸이 겪어온 마음고생에 비하면 이 정도는 싸게 먹히는 거라 생각했다.

그런 수겸의 완고한 표정과 테이블 앞에 놓인 종이를 번갈아 보던 정환이 한숨을 내쉬며 되물었다. 

“신고 안 한다고 분명히 말씀 드렸는데… 제가 그렇게 못 미더우세요?”

“어. 내가 널 얼마나 봤다고 믿겠니?” 

“저 정말 믿어도 되는데… 저 한 입으로 두말하는 그런 사람 아니에요.”

“시끄러! 믿을 수 있는 건 확실한 증거 뿐이야. 원래 어른의 세계란 그런 거예요, 학생.”

전혀 봐줄 생각이 없는지 수겸이 단호하게 테이블에 놓인 종이를 정환의 앞으로 쭉 밀어 넣었다. 곤란하다는 듯 종이를 내려다보던 정환이 도움을 청하려는 듯 수겸의 옆에 앉은 현준을 쳐다보았으나 그 역시도 고개를 돌리며 딴청을 피웠다. 안타깝게도, 생판 남인 고등학생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엔 수겸과 현준은 너무 닳고 닳은 어른이었다.

그래도 변호사씩이나 돼서 어린 학생을 너무 궁지에 몰았다는 생각에 현준은 그에게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를 오늘 처음 마주했을 때 그의 외모를 보고선 이 불행한 접촉 사고의 원인(?)이 그에게도 있음은 충분히 깨달았으나 어디까지나 저 학생은 피해자에 불과했다. 물론 자신이 진짜 피해자라 강력히 주장하는 친구놈 때문에 이 자리에 앉아 있긴 했지만.

건너편에 앉은 정환의 시선을 요리조리 피하던 현준이 바로 옆에 앉은 웬수같은 의뢰인을 힐끔 쳐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수겸도 있는 힘껏 센 척하고 있었지만 테이블 밑으론 다리가 사정없이 달달 떨렸다. 그렇다. 사실 그들은 지금 명백히 불리한 상황에서 되도 않는 허세를 부리고 있었다.

현준은 그들이 저 불법 고등학생을 만나러 나오기 전, 수겸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건 별로 좋은 방법은 아니야. 자칫 잘못하면 미성년자 공갈협박죄까지 추가 된다, 너?’

수겸이 제안한 방법은 현준의 상식선에선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뭐? 누가 누구한테 지금 각서를 받아내겠다고? 차라리 그 고등학생이 수겸을 상대로 협박을 했으면 했지, 수겸은 지금 그 녀석한테 뭔갈 요구할 만한 입장은 아니었다. 그러나 수겸은 다 생각이 있다는 듯 현준의 말을 맞받아쳤다.

‘이게 통한다니까 그러네. 아무리 그 녀석이 노련해봤자 아직 고등학생이야. 이쪽에서 세게 나오면 분명 당황할 걸? 그리고 무슨 공갈협박까지야… 각서라고 해봤자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을 절대 발설하지 않겠다는 조항 정도만 넣을 건데, 뭐.’

‘세상엔 그런 걸 공갈협박이라고 한단다… 아무튼 그러다가 괜히 그 학생이 보호자에게 말하거나 공권력의 힘을 빌리거나 할 수도 있잖아. 가만히 있는 상대방을 뭐 하러 들쑤시냔 말이야. 그리고 법적으로 봤을 때 그 각서 별로 효력 없는 거 알지?’

‘내가 바보냐, 그것도 모르게! 이건 그냥 일종의 퍼포먼스야. 그 자식의 입을 좀 더 확실히 잠그는데 쓰일 부수적인 수단이라고! 딱 어린애 겁 줄 용도로만 쓰는 거야.’

좀처럼 굽힐 생각이 없어 보이는 수겸을 보던 현준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럼 굳이 내가 없어도 되잖아?’

‘야, 그래도 변호사 대동하고 가면 좀 있어 보이잖아. 초장에 기선을 제압해야 된다고!’

내가 이러려고 사법고시 패스했나 자괴감이 들 무렵, 수겸이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리고 내가 알아봤는데, 그 녀석 주변 평판이 나쁘지 않더라고. 아마 신고하지 않겠다는 말도 진심이었을 거야. 그렇다고 그 말만 믿을 순 없으니 안전장치 하나 더 채우자는 거지.’  

‘뭐야, 너 그럼 진짜 선량한 학생 상대로 공갈협박하고 있는 거잖아!’

‘아, 공갈협박 아니라고!’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현실로 복귀한 현준이 소리의 근원지를 바라보았다. 문제의 고등학생이 그들이 내민 각서를 손에 들고선 유심히 읽어보더니 다시 테이블에 내려 놓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요, 쓸 게요. 여기에 이름 쓰면 돼요?”

“진짜 쓸 거야?”

“네, 그래야 감독님이 절 믿으시겠다면, 까짓거 쓰죠. 각서.”

듣던 중 반가운 소리에 수겸의 상체는 이미 테이블에 바짝 붙을 기세로 앞으로 기울었다. 그러자 현준이 손을 뻗어서 그런 수겸을 저지했다. 노련한 변호사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아직 계약이 끝난 것도 아닌데 이런 안달 난 태도를 보이는 건 협상에 좋지 않았다.

역시나 상대방도 보통 고등학생은 아니었다. 이 기회를 놓칠세라, 정환이 재빨리 내뱉었다.

“대신 저도 조건이 있어요.”

이거 봐, 내가 뭐랬어! 현준이 나무라는 듯한 눈빛으로 수겸을 질책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수겸은 영 찝찝하다는 표정으로 정환에게 되물었다.

“네 조건은 뭔데?”

“감독님이 제 연락 피하지 않기. 그리고 가끔 사적으로도 만나자고 하면 이유 없이 거절하지 않기요.”

긴장한 것이 무색하게 들려온 대답이 두 어른들 입장에선 너무 어처구니없는 것이어서, 두 사람은 벙찔 수 밖에 없었다. 눈앞에 고등학생은 그 외관처럼 연륜 있어 보이게 어른들을 상대하다가도 불쑥 이런 어린애 같은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말로만 하는 약속은 안 돼요. 각서에 이 내용도 추가하는 걸로 하죠. 믿을 수 있는 건 확실한 증거 뿐이다, 맞죠?”

어린애 같단 말은 취소. 역시 불법 고등학생임이 분명하다. 이번 건 현준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의 언변이었다. 수겸이 답을 구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자 현준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저 고등학생 손에 놀아나는 기분이긴 했으나 상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 희생은 감수해야 했다.

곧바로 수겸의 입에서도 알겠다는 대답이 떨어지자 정환이 싱글벙글한 얼굴로 각서에 본인이 제시한 조항을 추가로 적기 시작했다. 그걸 보는 수겸은 여전히 떨떠름한 표정이었고, 현준은 그냥 빨리 이 자리를 뜨고만 싶었다. 그렇게 모든 조항이 합의되고 나서야, 지난 날 불의의 사고로 마주쳤던 양측은 각서 맨 아래에 나란히 본인들의 이름을 적으면서 극적으로 협상에 성공하였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이 작성 된 각서를 현준이 확인하자마자 이해당사자들에게 하나씩 나눠주었다. 수겸은 눈앞에 내밀어진 종이를 받아들고 대충 품속에 쑤셔 넣으면서 정환에게 제법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너 진심으로 걱정돼서 하는 말인데, 어디 가서 남의 말 듣고 함부로 아무 데나 사인하고 그러면 안 된다.”

“…방금 전까지 저한테 각서 쓰라고 으름장 놓으신 분이 할 말은 아닌 거 같은데요.”

“너 그거 꼭 내가 공갈협박이라도 했다는 것처럼 들린다?”

“무력만 안 썼지, 거의 뭐 공갈협박이나 마찬가지 아닌 가요?”

“뭐? 내가 언제!”

“이거 안 쓰면 다시는 저랑 안 만나주실 거였잖아요. 저한텐 그게 협박이죠.”

어쭈, 이 놈 봐라? 정환의 말을 들은 현준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수겸과 학창 시절부터 지겹도록 붙어 다닌 탓에 현준이 곁에서 지켜본 수겸을 짝사랑했던 놈들만 해도 한 트럭이었다. 정환의 마지막 말이나 표정에서 느껴지는 뉘앙스는 분명 그게 맞았다. 뇌리를 스치는 불길한 예감에 현준의 머릿속도 덩달아 복잡해졌다.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를 나서면서도 생각에 잠겨있던 현준의 옆구리를 누가 콕콕 찔러왔다. 돌아보니 수겸이 현준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을 걸었다.

“오늘 나와서 고생 많았다. 너 먼저 들어 가.”

“너는?”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밥은 먹여서 보내야 할 거 아냐.”

수겸이 그들 옆에 서 있는 정환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현준의 눈엔 그 말을 들은 정환의 얼굴에 화색이 도는 게 보였다. 상대방은 저렇게 숨길 생각도 안 하는데 김수겸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걸 다 받아주고 있는 건지. 평소 수겸이 관심 없는 상대에게 얼마나 냉정하게 구는지 잘 아는 현준으로선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수겸은 먼저 손을 흔들며 걸음을 옮겼고, 정환도 그 옆으로 따라붙었다. 고개를 돌려 현준에게 꾸벅, 인사하던 정환의 입이 귀에 걸려있었다. 그 모습에 현준은 혀를 끌끌 찼다. 

수겸아, 아무래도 지금 혹 떼려다 혹 붙인 것 같다. 하지만 이것도 네 팔자 네가 꼰 거니 알아서 잘 견디길 바란다. 제발 처신 잘 하고, 법정에서만 보지 말자.

그렇게 속으로 친구의 명복을 빌고선 현준도 발걸음을 옮겨 집으로 향했다. 어떤 의뢰인을 만났을 때보다 오늘이 가장 심적으로 고된 하루였다.


모양 빠지게 이게 무슨 꼴이냐…

수겸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나왔다. 도대체가 왜 이 녀석하고 있으면 자꾸 체면 구기는 일이 생기는 건지. 민망함에 괜스레 옆에 있는 정환에게 툴툴거렸다.

“너는 무슨 학생이 지갑에 현금이 그렇게 많냐?”

“만약을 대비해서죠. 칠칠맞게 지갑 두고 다니는 어른 만날까 봐?”

젠장,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호기롭게 밥 먹여서 집에 보내겠다고 해놓고선 정작 계산할 때가 되니 온 주머니를 다 뒤져도 지갑이 보이질 않았다. 분명히 아까 카페에서 나올 때 마지막으로 꺼냈으니 아마 그때 카페 카운터에 두고 온 것 같았다. 이걸 어쩌나, 얼른 뛰어갔다 와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정환이 아무렇지 않게 지갑에서 현찰을 꺼낼 땐 진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그러면서 ‘밥은 제가 사려고 했어요.’ 라고 능청스럽게 덧붙이는데 수겸은 진짜 딱 민망해서 죽고 싶었다. 아무렴 고등학생한테 밥을 얻어먹는 -심지어 내가 사겠다고 데려갔는데!- 어른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겠냐고! 분명 오늘 밤 잠들기 전에 다시 떠올리고 애꿎은 이불만 걷어찰 게 뻔했다.

아무튼 그들은 그 뒤로 다시 돌아간 카페에서 무사히 두고 온 지갑을 찾아오는 길이었다.

“하아, 이번 한 번뿐이야…”

“뭐가요?”

“너한테 얻어먹는 거. 이게 마지막이라고. 내가 아무렴 학생 용돈을 축낼까 봐?”

“그 말은, 다음에도 저 만나주신다는 뜻이죠?”

“네가 그러자며. 그래서 아까 각서에도 썼잖아!”

수겸이 등을 철썩 때리면서 말하는데도 정환은 하하하 웃기만 했다. 이쯤 되면 수겸도 의문이 들었다. 쟤는 나 만나는 게 그렇게 재미있나. 왜 저렇게 나 만나는 거에 집착하지? 내가 다신 보지 말자고 해서 그런가. 

생각에 잠겨 걷다 보니 어느새 지하철역에 다다랐다. 수겸이 힐끗 정환을 돌아보며 물었다.

“집까지 데려다줄까?”

“아뇨, 혼자 갈 수 있어요.”

“나도 예의상 물어본 거야. 잘 가라.”

“이런, 데려다 달라고 할 걸 그랬나요.”

못내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 하는 얼굴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개찰구를 통과하기 전 수겸이 정환에게 악수하듯 손을 내밀었다. 정환이 손을 잡자 지난번 연습경기에서 만났을 때 부서질 듯 움켜쥐었던 것과 달리 부드럽게 마주 잡았다. 

“잘 들어가고, 다음에 또 보자.”

다시 만나자는 인사에 고개를 끄덕이는 정환의 얼굴에 옅은 웃음이 피어올랐다. 수겸은 그 얼굴이 마음에 들었다. 저렇게 웃으니까 제법 학생 같고 좋네. 곧 마주 잡았던 손이 떨어지고 두 사람은 서로 반대편의 개찰구를 통과해 걸어갔다. 수겸이 멀어지는 정환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

“그리고 너, 앞으로 나 만나러 나올 땐 교복 금지다!” 

돌아본 정환의 모습은 수겸이 좋아하는 그 얼굴을 하고 있었다.


* 해당 글은 원래 수겸이가 전날 원나잇한 고등학생(...) 이정환을 직장에서 다시 마주치면서 ㅈ되는 걸 생각하고 쓴 단편이었습니다. 근데 재회 이후의 이야기가 조금씩 떠올라서 추가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는데.... 아무래도 이 이상 뒷이야기가 떠오르진 않는 관계로 여기서 완결 아닌 완결을 내야할 것 같습니다. 불현듯 더 이어보고 싶어지면 돌아올 수도 있지만 장담은 못 합니다. 이런 저라도.... 사랑해주실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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