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믿는 진실

2021.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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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전설이 있다. 바다 깊은 곳에는 기묘한 생물이 살고 있다던,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모를,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혹자는 이를 헛된 망상이라 비난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이는 진실로 존재하는 생물의 이야기임을 모두가 믿고 있다. 이 글을 읽는 자여, 그대는 부디 거짓에 현혹되지 말라. 이는 현실이며, 그대가 언젠간 마주할 순간이다. 진실을 받아들여라. 그것이 어떠할지라도 수용하라. 그리하면 믿음이 그대를 이끌 것이다.

잊지 말라. 우리는 현실이다. 우리는 믿음이다. 우리는 그대이다.


영월 영일.

기묘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하늘에는 물고기가 날아다니고, 땅에는 구름이 박혀있으며, 바다에서는 불이 솟아오르는 광경이었습니다. 감히 이 광경을 마주한 대가로 앞이 보이지 않게 되었으나 저는 만족합니다. 영영 보지 못할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인간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었습니다. 저는 그곳에 발을 딛음에 두려워하면서도 벅차오르는 감동을 억누를 수 없었습니다. 그래요, 저는 그곳에 반했습니다.

붉게 타오르는 용오름에서는 우레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는 저에게 속죄하라고 말했습니다. 그에 저는, 어찌하면 되오리까, 답했습니다. 그는 저에게 씨앗을 주었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색도 물들지 않은 새하얀 씨앗이었습니다. 그는 제게 씨앗을 품으라 말했습니다. 씨앗을 품어 무언가를 싹 틔우라 하였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으나, 저는 그리하겠다 약조하였습니다. 용오름은 재차 강조했습니다. 씨앗을 품어라, 결코 잃어서도 잊어서도 안 될 것이다. 너의 죄는 깊고 진하여 쉬이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저는 절을 하며 뒷걸음질로 그곳을 빠져나왔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저는 당신이 그리도 찾던 씨앗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매일 밤 휘황찬란한 달빛을 먹어치우고, 고운 흙을 이불 삼아 잠들며, 나비조차 방해할 수 없는 시간을 보내는 씨앗 말입니다. 그것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자라지 않은 채 멈춰 있으나,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살아있으며, 저의 죄를 사하고 있다는 것을요.

당신은 씨앗을 가져갈 수 없습니다. 이는 하늘이 제게 맡긴 사명입니다. 제가 죽어서도 보호해야 하는 선한 것입니다. 그러니 물러가소서. 정 원하시거든 이 노인이 숨을 거둔 뒤, 달빛조차 들지 않는 때 숨겨가소서.

허나 명심하소서. 이것은 나의 유일한 희망이었으나 그대에겐 그렇지 않을 것이오. 그대는 결코 하늘을 피할 수 없소. 그대의 삶은 헛된 것으로 변하고, 그대의 빛나던 미래도 색을 잃을 것이니. 결국 그대는 운명에서 벗어나 길을 찾지 못할 것이오.

 

영월 영일.

또 오셨군요. 지난번의 경고는 잊으신 모양입니다. 허나 적절한 때에 오셨습니다. 저는 숨이 멎어가고, 마침 오늘은 달도 눈 감는 날이니 말입니다. 그리 쳐다보지 마시지요. 당신이 씨앗을 훔치러 오지 않았다는 것을 압니다. 그저 이야기를 듣고 싶던 것이 아닙니까? 그래요, 오늘은 무엇을 얘기해볼까요. 씨앗을 받은 직후의 이야기를 원하십니까?

제가 몇 걸음 물러서니, 방금까지의 광경은 온대도 없고 그저 평범한 바다만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푸른 하늘을 누비는 하얀 구름과 갈매기 떼, 햇빛을 반짝이며 파도치는 바다, 그나마 평범치 않은 게 있었다면 돌덩이였을까요. 하늘이 조각한 듯 거대하고 구불거리는 바위가 있었습니다.

서둘러 마을로 돌아오니, 사람들은 하나같이 검푸른 옷을 입고 있더군요. 그들은 용신님께 감사 인사를 전하러 간다고 하더이다. 한 해 동안 저들을 보살펴주어 감읍하다고 전한 뒤, 다음 해에도 그리할 것을 부탁드린다고. 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죠. 당시의 저도 그랬습니다. 용은 신의 반열에 들었으나 믿음의 대상이 되기에는 부족하지 않습니까? 예?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요? 당신은 저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용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라니, 그런 것은 미물조차 상상하지 않는 하찮은 생각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그리 말하면 바다 깊은 곳에 내던져질 겁니다.

각설하고, 저는 그들을 따라갔습니다. 어느샌가 저도 검푸른 옷을 입고 있더군요. 어두운 밤하늘이 땅 위로 수 놓였습니다. 부드러운 비단이 펼쳐지고 기나긴 행렬을 이루었습니다. 곧 도달한 바다에는 범상치 않은 존재가 있었습니다. 그는 우리를 굽어보았고, 우리는 감히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며 땅을 기었습니다. 그의 전신은 푸른 비늘로 덮여있었는데, 바다 전체가 그의 비늘로 빛날 정도였습니다. 위대하신 존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안겨주었습니다. 우리의 안온한 미래를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그에게 모든 것을 바치기로 하였습니다.

...자꾸 제 회상을 방해하시는군요. 믿지 않을 것이라면 그만 돌아가시지요. 마침 태양이 떠오르니, 이야기는 그만하겠습니다. 원하신다면, 제가 땅의 일부가 되기 전 다시 방문하시길.

영월 영일.

늦으셨습니다. 저는 곧 용신님께 떠날 것이고, 당신께 들려드릴 이야기는 없습니다. 당신이 품은 의문은 제게 닿지 않습니다. 당신의 감정은 직접 해소하셔야 합니다. 이제는 여정을 떠날 시간입니다. 하늘의 자비가 그대와 함께하길. 그대의 운명이 부서지지 않길. 이 노인의 마지막 속죄는 이로써 마치겠습니다.

영월 영일.

노인은 죽었다. 그가 품고 있다던 하얀 씨앗도 사라졌다. 아니, 애초에 그가 가진 것을 확인한 적도 없었지만. 그러나 나는 그가 씨앗의 주인임을 확신했다. 그의 이야기는 허황되지만 그렇기에 가치 있는 것이었다. 나는 씨앗을 찾으러 가야 한다. 내 죄를 면죄 받기 위함이 아니다. 그저 무언가 확인해야 할 것이 있을 뿐이다. 나의 기록은 이제야 시작되었다.

 


입춘. 봄이 올 것이라 기대하는 어느 날.

아직은 서늘한 날씨이다. 추위를 가볍게 여겨 앓을 수도 있는 날이지만, 무언가를 시작하기에는 좋은 날이다. 나는 오늘 머나먼 여정을 떠날 것이다. 그 노인의 말을 신경 쓰는 건 아니다. 하늘과 땅이 뒤바뀌고 바다에서 불길이 솟아오른다는, 미치광이나 할 법한 이야기를 믿는 것도 아니다. 그런 것을 믿기엔 경험한 것이 너무 많다. 다만 그는 씨앗의 소유자였고, 그의 죽음과 동시에 씨앗은 사라졌다. 그 씨앗이 필요한 까닭에 이리 여정을 떠나려 하는 것이다.

노인의 이야기를 많이 듣진 않았지만, 그 모든 이야기에는 용과 바다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저 노망난 자의 헛소리일 수도 있으나 계속해 반복되는 단어는 분명 단서가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전국의 바다를 떠돌 수는 없으니, 용과 관련된 전설이 남아있는 지역을 조사하려 한다. 우선 동쪽의 무덤, 바람이 다스리는 영역으로 갈 것이다. 바람이 나를 반길지는 모르겠다. 반기지 않는다면 꿰뚫고 가야 할 텐데, 이는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다. 모쪼록 쉬이 접근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역시 나의 바람은 이뤄지질 않았다. 거센 피리 소리가 날을 세운 채 달려드는 모습에 이를 악물고 빠져나왔다. 망할 피리 같으니. 세상을 평안하게 한다면서 나를 공격하네. 피리를 부술 수는 없으니 배려심 깊은 내가 참기로 했다. 근처에 있는 대나무를 베어 움켜쥐고, 반발하는 음파를 쳐내며 영역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피리도 지친 것인지 조용해졌다. 음, 만족스럽군. 다시 기운을 찾은 녀석이 소리 지르기 전에 서둘러 조사해야 한다.

우수. 여전히 서늘한 어느 날.

보름이 지나도록 진척이 없다. 성가신 피리 녀석을 처리하며 바다를 둘러보았지만, 외관은 그저 평범한 마을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일까? 마을 사람들은 용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더 정확히는 용이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외진 곳이라 그렇다기에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사고이다. 아무리 상상의 산물이라지만, 그 개념은 인간 대다수가 이해하고 있지 않았던가? 역시 무언가 숨겨져 있다. 마을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으니, 열쇠는 피리가 갖고 있을 것이다. 보름 동안 헤매는 나를 보며 얼마나 우스웠을까. 망할 자식. 힘 조절에 실패해 부서진 대나무를 버리고 새로운 대나무를 들었다. 이번에는 양손에 든 상태이다. 영역의 중심으로 가 피리 녀석을 족칠 것이다.

경칩. 생명이 깨어나는 어느 날.

날이 풀리기 시작하는데 피리 자식은 오히려 날 세우며 달려들고 있다. 내가 중심으로 가는 걸 온 힘을 다해 막고 있는 듯하다. 슬슬 화가 치밀어 오른다. 얌전히 길을 열어주었다면 몇 번 흙투성이로 만든 뒤 끝내려 했는데, 이리도 날 방해하니 어쩌겠는가. 염원대로 땅에 묻어버려야지. 아, 바로 앞이 중심이다. 바다가 두 갈래로 나뉘어 길을 열 때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정말 조금만 더 있으면 된다. 셋, 둘, 하나, 바로 지금.

피리가 방해하기 전에 달려갔다. 피리의 구멍마다 대나무 잎을 꽂아버리고, 갯벌의 흙을 퍼내 발라주었다. 피리가 소리 질렀지만, 꽉 막힌 구멍으로 인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비웃음을 날리며 피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니, 피리는 잠시 떨다가 얌전해졌다. 진작 그럴 것이지.

 

춘분. 봄이 온 어느 날.

나에게 한참을 시달린 끝에 피리는 내가 원하던 답을 내놓았다. 피리의 말에 따르면, 이 마을은 용이 다스릴 뻔한 마을이라고 한다. 신으로서 추앙받을 자격이 있던 청룡이 묻힌 곳으로, 청룡의 사후 마을 내 모든 인간의 기억이 바뀌었다. 청룡의 무덤은 그저 작은 섬으로, 청룡이 아끼던 피리는 그저 바닷바람으로 여기게 되었다.

잘은 모르겠다. 용이 실재한다는 것부터 혼란스러웠다. 그저 개념에 불과한 존재가 아니었던가? 허나 피리가 거짓을 말할 수는 없으니 진실일 것이다. 청룡이 존재한다는 가정하에, 청룡의 죽음에 얽힌 무언가가 있을 것 같은데 피리는 그 이상 아는 것이 없다고 했다. 이는 진실이었다. 피리는 그저 청룡의 유언에 따라 마을을 보호했을 뿐, 그 이상의 일을 벌일 힘은 없었다. 그 배후에는 누가 있는 것일까.

피리를 조금 더 털어보았다. 피리는 검게 물든 대나무 조각을 내밀었다. 청룡이 죽고 난 뒤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라 한다. 어째서인지 끔찍한 기운에 묶여 있는 조각이다. 누군가의 몸에 박힌다면, 그 어떤 가시보다도 잔혹하게 기능할 것 같다. 이 조각이 청룡의 몸에 박혔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누가 이 조각을 만들었을까? 청룡, 그러니까 나름 신만큼의 힘을 가진 존재를 죽음으로 몰고 갈 정도의 조각을 인위적으로 만들 수 있을까? 그런 것이 가능할까? 그저 혼란뿐이다.

 

청명. 하늘이 맑게 갠 어느 날.

얻을 건 다 얻었으니 피리의 영역 밖으로 향했다. 피리는 소리를 꽥꽥 지르며 다시는 오지 말라고 했다. 언젠간 이 영역에 들릴 일이 있다면 다시 한번 갯벌에 파묻어야 할 것 같다.

검은 대나무 조각은 성스러운 기운으로 감싸놓은 상태이다. 피리 주변에 있던 대나무 잎을 꺾어 신성한 바다에 보름간 적신 뒤, 창백한 달빛에 말리고 피리의 기운을 담았다. 그리하여 만들어진 신성한 대나무 잎은 악한 조각을 봉인하기에 적합했다. 언뜻 보기에는 자연의 기운으로 가득 찬 대나무 잎 뭉치에 불과하지만, 봉인이 풀린다면 그 어둠은 분명 위험을 불러올 것이니 주의해야 한다.

다음으로 향할 곳은 남쪽의 무덤, 불이 수호하는 영역이다. 노인은 용오름이 붉다고 했으니, 용이 아닌 불에 주목하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다만 이번에는 또 얼마나 방해를 받을지가 문제이다. 참 골치 아프다. 사령들은 나와 상성이 안 맞을지도 모르겠다.

 

곡우. 비가 내려 세상이 윤택해진 어느 날.

남쪽으로 향하던 중 문제가 생겼다. 강을 건너야 했는데, 쏟아진 빗물로 인해 강이 범람한 것이다. 뱃사공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고, 강가에는 나 홀로 남았다. 어찌해야 할까. 한참을 고민한 끝에 기운을 쓰기로 했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사방을 돌아다니기 전까지는 감춰두려 한 기운인데, 고작해야 두 번째 방위로 향하는 길에 드러내다니. 비가 내리는 날 이동을 결정한 것이 잘못이었다.

소매를 걷어 드러난 손목에 입술을 붙인 뒤, 숨을 내쉬며 혈관의 맥동에 집중했다. 눈을 감고, 주위의 그 어떤 것도 지각하지 않게 될 때까지 기다렸다. 마침내 사위가 어두워지고 빗소리마저 사라졌을 때, 나는 언어로 정의할 수 없는 속삭임을 내뱉었다. 어딘가 뱀의 소리를 닮기도 했고, 풀잎이 스치는 소리와 닮기도 한 숨결이었다. 그에 맞춰 몸 안 깊숙한 곳에서 간지러운 따스함이 움직였고, 맥동을 따라 손끝에 모였다. 손가락이 금빛으로 물들다 못해 빛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끝을 모르고 펼쳐진 실타래가 눈앞에 펼쳐졌다. 익숙하되 낯선 광경을 보며 강가의 실 가닥을 건드리자, 실은 둥글게 뭉쳐 징검다리를 만들었다. 손목을 다시 소매 안으로 감추고, 실뭉치 위를 걸어 반대편 강가에 도착했다. 이제 곧 있으면 불의 영역이다.

 

입하. 여름을 기다리는 어느 날.

무척 덥다. 비가 내린 지 얼마나 지났다고 땅이 이리도 뜨거운지 모르겠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불씨가 튄다. 온 산맥이 진동하며 증기를 내뿜는다. 아무래도 불은 내 앞길을 막으려나 보다. 허나 바람을 뚫고 들어갔듯, 나는 이 불길 사이로 들어갈 것이다. 괜히 잿더미가 되지 않도록 대나무 조각을 깊숙이 숨긴 뒤, 주위를 휘 둘러보았다. 온통 바위투성이이다. 바위를 쪼개어 들고 다니기엔 불편할 터. 불길을 헤집을 무언가를 찾아보아야 한다. 불과 가깝고 불을 방해할 수 있는, 그러나 불을 완전히 꺼트리지는 않는 것. 예컨대 철과 같은 금속 말이다.

잠시 산에서 내려왔다. 산속에 금속이 있을 가능성은 크지 않으니 근처의 다른 마을에서 검을 살까 한다. 마지막으로 들린 마을까지는 나흘이 걸린다. 그곳까지 걸어가기엔 너무나도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고, 나는 이 이상 시간을 빼앗겨서는 안 되므로, 땅을 움직이기로 했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화산 근처에서의 지진이니 익숙히 대처하리라 생각한다.

 

소만. 만물이 탄생하여 세상을 밝힌 어느 날.

마을에서 검을 구매할 때 들은 소식이 있다. 근래 들어 작은 참새들이 하늘을 선회한다는 이야기이다. 까치도 까마귀도 아니고 참새라니, 무척 의아한 일이다. 마을 사람들은 불안한 듯 계속해 하늘에 시선을 두었지만, 나는 마을을 돌아다니는 동안 단 한 마리의 참새도 보지 못했다. 다른 새들도 보이지 않았다. 불이 나를 배척하거나 감시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상당히 떨어진 마을까지 불의 영향권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걸린다. 본래라면 산맥과 산맥 내의 마을만이 그의 영역이었을 터. 이곳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검을 휘두르며 시야를 방해하는 불씨를 튕겨내고, 산맥 곳곳을 수색하고 있다. 중심으로 곧바로 가려 했으나 불의 영역이 달라진 것은 중대한 사유였고, 원인을 알기 전까지는 섣불리 접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은빛으로 빛나던 검은 점차 무뎌지고 있다. 어쩌면 검이 아닌 다른 것을 사용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망종. 보리가 익은 어느 날.

검이 녹슬어 마을로 다시 향하던 길이었다. 인위적으로 생겨난 듯 반듯한 동굴을 발견하여 그 안으로 향했다. 동굴 내부는 일자로 길게 뚫려 있었고, 그 끝에는 거대한 방과 초라해 보이는 작은 알이 있었다. 알을 제외하고는 텅 빈 방을 보니 의문이 생겼다. 이곳은 무어를 위한 장소일까? 이 알은 누구의 알일까? 달걀보다도 작은 크기의 알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손끝에 기운을 모아 알을 건드려 보았지만, 알에는 아무 변화도 없었다. 특별한 무언가가 있지도 않았다. 미약한 박동만이 느껴지는 평범한 알이었다. 그렇다면 이 방이 특별한 것일까? 기운을 달리 움직이며 눈을 느리게 감았다. 범인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기 위해 황금빛 눈을 떴다. 그리고 발견했다. 천장을 가득 채운 기이한 문양과 나를 노려보는 불씨들. 내 기운에 반응하여 움찔거리는 한 벽면까지. 이곳은 성소 중 하나였다.

하지. 낮이 끝나지 않은 어느 날.

보름 전의 동굴에선 얼어붙은 날붙이를 얻을 수 있었다. 동굴의 벽에 기운을 한가득 불어넣었을 때, 막혀 있던 길이 열리며 알이 깨졌다. 깨진 알에서는 붉은 깃털이 나왔는데, 아직은 나와 소통이 되지 않는 어린 개체였다. 그 깃털은 알 조각을 물고 나를 따라오더니, 이내 지친 듯 내 머리카락 속에 숨었다. 무척 맹랑한 녀석이다.

새로 생긴 길을 걷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화들짝 놀라며 벽면에 붙어 버리는 불씨들이 보였다. 나에게 겁을 먹은 것일까? 어처구니없다는 듯 바라보고 있으니, 깃털이 삑삑거리며 알 조각으로 불씨들을 때렸다. 불씨들은 몸을 수그리며 알 조각에 다닥다닥 붙었다. 붉다 못해 푸르게 빛나게 된 알 조각. 깃털은 그것을 자랑하듯 내밀었다. 정말이지, 어린놈들이었다.

길의 끝에는 거대한 얼음 조각이 있었다. 마치 주작처럼 드넓은 날개를 펼친 채 부리를 벌리고 있는 용감한 조각이었다. 깃털은 그것의 부리에 알 조각을 물려주었고, 곧 얼음은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 발견한 것이 바로 얼어붙은 검이다. 위험하진 않을지 고민하다가 기운을 흘리며 검을 뽑아보았다. 붉은 칼집에 꽂혀 있던 검은 시퍼렇게 날이 서 있었다. 검날에 내 얼굴이 비칠 정도였다.

이 검은 방금까지 얼음 속에 있었다는 걸 증명하듯, 얼음알갱이들이 붙어있는 상태였다. 깃털에게 이를 녹일 수 없냐 물으니, 깃털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삑삑댔다. 다만 검은 보기와는 다르게 뜨거웠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붙잡자마자 손이 녹아내렸을 것이다. 높은 온도와 차가운 알갱이. 그 모순점이야말로 이 검이 특이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소서. 더위가 시작된 어느 날.

짐이 늘었다. 따라오지 말라고 그리도 당부했는데, 깃털은 옷자락 사이에 숨어 따라오고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불씨들은 따라오지 않았다. 그 녀석들도 함께였다면 무척 정신없었을 것이다. 깃털도 두고 가고 싶은데, 참 끈질기게도 숨어있다.

깃털을 떼어놓는 걸 포기하고 향한 영역의 중심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투명한 호수가 자리 잡고 있었다. 화산 한가운데의 호수라. 풍경은 아름다웠으나 이해하긴 어려운 모습이었다. 불의 영역은 확산되었는데 정작 중앙에는 물이 있다니. 예전에는 새까맣게 녹은 금속 덩어리가 불과 함께 흘러 다녔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사이의 시간 동안 기이한 일이 일어났음이 분명하다. 묻고 싶은 것이 많았으나 갓 태어난 깃털은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기에 한숨만이 나왔다. 차라리 좀 덤비더라도 의사소통은 가능한 피리가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대서. 더위가 기승을 부린 어느 날.

이제 서쪽의 무덤, 대지가 다스리는 영역으로 가야 한다. 나와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깃털을 설득하는 데 실패하여, 지금도 내 정수리에는 깃털이 꽂혀 있다. 불의 영역을 보호하기 위해, 알 조각에 기운을 가득 불어넣은 뒤 불씨들에게 지키라고 명했다. 수호자인 깃털이 직접 남는 것이 최선의 방도인데, 이 어린 녀석은 도무지 말을 듣지 않으려 한다. 서둘러 여정을 마치고 이곳에 다시 방문해야 할 것 같다.

화산에서 벗어나 작은 숲을 지나고, 마침내 녹색 빛의 마을에 도착했다. 이 마을은 광산으로 인해 먹고 사는 곳으로, 이곳에선 꽤나 질 좋은 금속들을 거래할 수 있다. 대지가 나를 막더라도 중심으로 향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를 준비하려 한다. 겸사겸사, 깃털의 성장을 도울 수 있는 금속도 찾으면 좋겠지.

 

입추. 가을을 기다리는 어느 날.

황호를 만났다. 산맥에 들어서지도 않았는데 나를 마중 나온 듯 목을 울리는 범이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답한 뒤 돌려보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재회했다. 그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도 작은 돌덩이를 물고 있는 상태였다. 이쯤 되니 모른 척할 수가 없어, 슬쩍 다가가 돌덩이를 관찰했다. 울퉁불퉁한 검은 표면은 별 가루가 뿌려진 듯 빛났다. 이 범이 물고 온 것은 금강석이었다.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금강석을 매만졌다. 황호는 눈치를 보더니, 내 기분이 나쁘지 않다고 판단한 것인지 이내 어디론가 달려가 새로운 돌을 물고 왔다. 또 금강석이었다. 이 녀석은 왜 나에게 이런 것을 선물하는 것일까?

허탈한 숨을 내쉰 뒤, 황호에게 길을 안내하라 명했다. 황호는 뛸 듯이 기뻐했다. 아니, 실제로도 껑충 뛰며 내 주위를 빙빙 돌았다. 정신없다며 따끔하게 혼내려 했으나 꼬리를 살랑이는 모습에 포기했다. 황호는 내 걸음에 맞추어 느릿하게 걸었고, 나는 걸어가는 이 땅의 맥을 파악하려 했다. 기묘하게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 황호는 눈치채지 못한 것일까? 수백 리 바깥의 내 기운은 쉬이 알아차렸으면서, 영역 안쪽의 이질적인 기운을 모를 수가 있나? 제아무리 미약하다고는 하나 영역 내의 존재인데?

 

처서. 더위가 마지막 발악을 한 어느 날.

여전히 기묘한 기운의 정체는 파악하지 못했다. 땅의 맥은 정상적이었고, 어느 하나 끊긴 곳도 없었다. 황호에게 넌지시 말을 꺼내었으나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모르는 눈치였다. 영역의 주인이 아니어서 그런 탓이라고 넘기기엔 걸리는 것이 많다. 허나 우선은 조금 더 탐색하려 한다.

중심으로 향하는 동안, 황호는 많은 광석을 물어왔다. 그중에는 흑요석도 있었는데, 이는 깃털에게 먹이로 주었다. 깃털은 기뻐하며 흑요석을 녹여 삼켰다. 그 모습을 본 황호는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온종일 흑요석만을 물어왔다. 잔뜩 쌓인 흑요석에 깃털은 행복해했고, 황호 역시 만족스러운 낯이었다. 나만이 고민거리가 늘어나 안색이 좋지 못했다. 흑요석은 화산 근처, 주로 불의 영역에서 생산되는 광석이다. 헌데 어찌하여 화산과 동떨어진 이곳에서 발견되었을까?

 

백로. 나뭇잎에 이슬이 맺힌 어느 날.

산속에 머무는 동안, 깃털은 흑요석을 먹고 성장하여 윤택해진 모습을 자랑했다. 이제는 서로 말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아직 어리기에 사고수준이 맞지 않고, 서로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는 편이긴 하다. 앞으로 달포가 지나면 얼추 파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황호는 부드럽고 유연한 깃털을 마음에 들어 했다. 매일 깃털과 함께 놀며 바람을 탔고, 이슬에 젖지 않도록 깃털을 훌륭히 보호했다. 과하게 보호하는 감이 없잖아 있지만, 나로선 편한 일이니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다만 의아한 것은 아직도 중심 근처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황호를 만난 지도 어느새 달포, 보통의 경우 방해받지 않는 한 중심에 도착하고도 남는 시간이었다. 황호의 안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우리는 분명 중심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그러나 조금도 가까워지지 않는, 마치 중심이 스스로 멀어지는 듯한 상황이었다. 나는 시간이 촉박함을 느꼈고, 무리한 수를 두기로 결정했다.

 

추분. 밤과 낮이 같아진 어느 날.

황호와 깃털이 지쳐 잠든 늦은 밤이다. 황호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모든 기운을 숨긴 뒤 산맥을 탐색하기로 했다. 홀로 떠나는 것을 고려해 보았으나 내 예상이 맞았다면 깃털이 위험해질 수 있으므로, 깃털을 숨긴 뒤 함께 움직일 것이다. 깃털에게 미리 언질을 주기에는 시간이 없었다. 아마 잠에서 깬 깃털은 나에게 쓴소리하겠지만, 하는 수 없었다.

깃털의 기운은 금강석으로 뒤덮었다. 흑요석을 흡수한 깃털은 이전보다 기운이 강해졌으나 아직 기운을 다루는 법을 몰랐다. 내 기운으로 덮기엔 이질적일 것이 분명하여, 금강석을 다듬어 깃털의 끝에 달아주었다. 또한, 이전에 황호가 물고 왔던 월장석을 녹여 깃털을 물들였다. 혹여 뜨거울까 걱정했는데, 화산 태생의 깃털은 오히려 편안함을 느끼는 듯했다.

깃털을 달빛에 적시고 자연의 기운에 어우러지게 만드니, 붉은 깃털은 마치 바다 깊은 곳에 묻힌 진주와도 같은 빛이 되었다. 불의 수호자에게 이래도 되는지, 개념 간의 부조화로 인해 잠시 혼란스럽긴 했으나 묻어두기로 했다.

 

한로. 새벽녘 공기가 차가워진 어느 날.

기운을 숨기고 이동하니 빠른 속도로 중심에 가까워졌다. 우리를 찾는 듯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지만, 황호는 결코 우리를 찾을 수 없을 것이었다. 깨어난 깃털은 상황을 이해한 뒤 조용히 옷자락에 숨었고, 나는 기운이 드러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의 속도로 땅을 접어 달렸다. 보름간 이동한 결과, 대지의 영역 중심에 도착했다.

온통 나무와 바위로 무성하던 산은 점차 새하얘지더니, 중심에 도달해서는 눈으로 뒤덮인 듯한 공터가 나타났다. 이곳 역시 불의 영역처럼 이질적으로 변한 것이다. 불로 가득해야 할 곳에는 물과 얼음이 존재했고, 흙과 나무, 광석으로 가득해야 할 곳은 색 없이 고요한 눈밭이 되었다. 이곳의 수호자에게도 이변이 생겼음이 분명하다.

한참 동안 숨죽이고 있던 깃털은 옷자락에서 슬쩍 빠져나오더니 눈밭을 헤집고 다녔다. 나의 기운을 흘린다면 수호자의 흔적을 더 빨리 찾을 수는 있겠지만 황호에게 발각될 것이므로, 차라리 느리더라도 안전한 방식을 취하기로 했다. 깃털은 수색하는 것인지 노는 것인지 모를 움직임으로 눈밭에 자국을 남겼다. 평평하게 쌓여 있던 눈은 뒤섞인 지 오래였다.

문득 깃털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깃털은 길을 헤매듯 갸우뚱거리며 허공을 맴돌았고, 이내 나에게 날아왔다. 아마 저곳이 수상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나는 기운이 차단된 것을 느낀 뒤 서서히 다가갔다. 그곳에 가까워질수록 깃털의 의미 모를 행동이 반복되었다. 내 볼을 찌르고 간지럽히며 옷자락을 드나들고, 대나무 조각을 숨겨둔 가슴팍을 이리저리 오가고, 얼어붙은 검을 쓸어내리는, 무척이나 부산한 행동이었다.

 

상강. 서리가 내린 어느 날.

마침내 그곳이었다. 눈더미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나는 망설임 없이 손을 뻗었다. 냉기가 팔을 타고 올라왔지만 크게 방해될 정도는 아니었다. 무겁게 짓누르는 무게 속에서 가벼운 덩어리가 손에 잡혔다. 그것은 내 손가락을 감싸 안으며 파르르 몸을 떨었다. 힘주어 잡지 않으려 애쓰며 바깥으로 손을 꺼내니, 그것의 정체를 알 수 있게 되었다. 흔히 육출화라 부르는 작은 눈 결정이었다.

눈 결정은 주변을 살피듯 빙글 돌다가 깃털을 마주하곤 포롱 소리를 내었다. 동지를 만난 사람처럼 기뻐 보였다. 눈 결정은 포로롱거리며 깃털에게 달라붙었고, 깃털도 눈 결정을 반가이 맞아주었다. 온기와 냉기가 함께해도 되는 것인가, 하는 쓸데없는 걱정이 들었다.

 

입동. 겨울을 기다리는 어느 날.

눈 결정은 대지의 영역과 상성이 맞지 않았다. 대지의 영역을 보호하기에 적합한 존재를 찾아야 했는데, 때마침 찾아온 황호에게 이 역할을 부여했다. 눈 결정이 말하길, 자신은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존재인데, 이질적인 기운을 느낀 뒤 황호에게 보호를 청했다고 한다. 황호는 흔쾌히 수락한 뒤 많은 광석을 이용하여 그를 위한 작은 눈밭을 만들었는데, 그 과정에서 알 수 없는 존재의 개입으로 인해 눈밭이 점차 확대되어 지금의 사달이 난 것이다. 또한, 황호의 안내에도 불구하고 중심이 점차 멀어진 것은 이질적인 기운의 방해로 인함이었다. 우리가 기운을 숨긴 뒤, 이질적인 기운은 황호 주변을 맴돌며 우리를 찾다가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눈 결정은, 아마 황호는 이질감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라며 황호를 변호했다. 황호는 조금 뛰어날 뿐 다른 범들과 같다고 했다.

각설하고, 우리는 떠나기 직전 황호에게 많은 기운을 불어넣었다. 눈밭을 유지하던 광석은 전부 황호에게 흡수되었고, 미물이 감당할 수 없는 힘을 얻은 황호는 털이 하얗게 세어 백호가 되었다. 백호는 우리의 편의를 봐주고 싶어 했고, 우리에게 많은 광석을 선물했다. 깃털은 흑요석을 과식하여 여러 개로 분화했는데, 금강석과 월장석의 영향으로 인해 오색찬란한 빛을 자랑하게 되었다. 때때로 푸른 불꽃을 뿜어낼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 눈 결정은 호안석을 잔뜩 흡수하여 투명하던 색이 적갈색으로 바뀌었는데, 황호의 눈과 같은 색이라며 즐거워했다.

나는 푸른 기가 도는 월장석을 녹여 실처럼 늘인 뒤, 술을 만들어 허리에 고정했다. 여러모로 유용히 쓰이는 달빛인지라 가능한 많은 월장석을 이용했더니, 장신구 하나 없던 차림새는 무척이나 화려해졌다. 또한, 석영과 일장석을 잘게 부수어 섞은 물에 얼어붙은 검을 담가 강도를 높이고 기운을 숨겼다. 그 결과 붉은 검은 새파랗게 타올랐고, 검에 붙은 얼음 조각은 매섭게 냉기를 뿜어냈다. 음양의 부조화가 더욱 심해진 탓에 헛웃음이 나왔다. 내 속을 모르는 깃털과 눈 결정, 백호는 신나게 뛰놀며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소설. 추위가 찾아온 어느 날.

곧 북쪽의 무덤, 물의 영역이다. 백호의 도움으로 이동시간이 단축되었으나 이전에 너무 많은 시간을 소요한 탓에, 여전히 촉박하다고 느껴졌다. 기운을 최소화하며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는데, 기이하게도 아무런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영역의 중심이라는 감각만이 느껴질 뿐, 중심 특유의 기운은 온데간데없었다. 깃털과 눈 결정도 이를 알아챈 것인지 삑삑, 포로롱 하며 소란스럽다.

마을도 폐쇄된 듯 척박하고, 인기척 하나 나지 않는다. 화산에서도 모여 사는 인간들이 고작 추위 하나 때문에 마을을 포기할 리는 없다. 중심의 기운이 사라진 것과 저들이 떠난 것에는 연결점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내가 가진 의문을 해결할 열쇠일지도 모른다.

 

대설. 눈이 앞을 가린 어느 날.

폭설이 내렸다. 중심으로 가는 길은 모두 막혔고, 우리는 폐쇄된 마을에 고립되었다. 가져온 광석이 많으니 한동안은 괜찮겠지만, 이 상황이 보름이 넘도록 해결되지 않는다면 위험할지도 모른다.

내 불안은 깃털과 눈 결정에게 전파되었다. 언제나 활기차던 그들은 침묵하며 느리게 움직였다. 광석을 흡수할 때마다 온몸으로 행복을 표출하던 그들은 더 이상 기쁨을 느끼지 않는다. 그저 고독뿐이다. 우리는 함께였지만, 서로를 의지하기에는 너무나도 독립적인 존재들이었다. 앞이 어둡다.

 

동지. 밤이 끝나지 않은 어느 날.

다행히 광석이 다 떨어지기 전 눈이 그쳤다. 우리는 굳은 몸을 풀며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황폐한 마을을 넘고 산처럼 쌓인 눈을 지나 미끄러운 길을 걸었다. 주변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 그리고 마침내 중심에 도착했다.

어릴 적 와보았던 물의 영역은 눈부셨다. 중심에서 흘러나오는 따뜻한 물은 온 마을을 적셨고, 모든 사람의 기운은 햇볕만큼 따스했다. 마을은 활기찼으며 평화로 가득했다. 그러나 지금 이곳은 예전의 풍경이 떠오르지 않을 만큼, 같은 장소라고 판단하기 어려울 만큼 황량하다. 모든 것은 얼어붙었고, 온기를 지닌 생명체 하나 존재하지 않으며, 영역을 지정하기 어려울 만큼 미약한 기운만이 남아있다.

 

소한. 세상이 얼어붙은 어느 날.

먹구름이 몰려왔다. 겨울밤보다도 시리고 어두운 기운이 우리를 덮쳤다. 그것은 뱀처럼 기어왔다. 거북처럼 느리지만 확실하게 다가왔다. 그것은 시커먼 용이었다. 그것은 수호의 역할을 잊은 존재였다. 인간에 대한 연민을 버린, 염세적이고 암울한 무언가였다.

그것은 죽음이었다. 그것은 절망이었다. 그것은 무가치한 것들의 집합체였다. 그것은 우리의 고통을 원했다. 무질서를 원했다. 세상이 빛나지 않길 염원했다. 모든 것의 맥을 끊고자 했다. 하여 그것은 강철이라 불렸다.

우리는 그것 앞에 얼어붙었다. 그것은 불을 뿜어내었지만, 굳어버린 우리의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동안 흡수한 광석들만이 움직이며 그를 막아설 수 있었다. 얼어붙은 검은 스스로 움직여 불길을 베어내고, 그 주위의 냉기를 찢어 부쉈다. 깃털의 끝에 달린 금강석은 잠시간 떨더니, 깃털에서 분리되어 그것의 시퍼런 눈동자를 향해 날아갔다. 그것이 고통에 울부짖을 때, 눈 결정에서 흘러나온 적갈색 기운은 그것을 묶었다. 깃털의 푸르른 불꽃은 그것의 어둠을 태웠다. 술에서 빠져나온 달빛은 그것을 환히 밝혔다. 허나 그것은 스러지지 않았다.

우리는 절망하지 않았다. 우리의 절망은 그것을 성장시킬 것이었다. 우리는 절망하지도, 원망하지도, 공포에 떨지도 않았다. 다만 그것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지만, 우리가 가진 것들은 분명 그것에게 위협적이었고, 그것은 조금 겁을 먹은 듯싶었다. 그것은 여전히 우리의 죽음을 원했지만, 빛에 대한 두려움을 익혔다. 그것과 우리는 대치 상태로 몇 날 며칠을 보냈다.

 

대한. 세상이 녹기 시작한 어느 날.

우리의 싸움은 고요했다. 서로 몸을 굳힌 채 바라보기만 했다. 우리는 쉬이 움직이지 않았고, 그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허나 우리와 그것이 품은 감정은 상반될 것이었다. 그것을 막아야 한다는 우리의 절박함은 여전했으나, 더 이상 그것이 거대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그저 기운일 뿐. 현재로선 세상에 영향을 미치지 못할 개념적인 것에 불과했다. 반면 그것은 초조해 보였다. 대치 상태가 길어질수록 그것은 어둠을 잃어갔다. 그것은 절망을 섭취할 수 없었고, 점차 죽음을 잊어갔다. 하여, 그것은 우리에게 강철조차 될 수 없었다.

그것은 끈질겼다. 한참을 흔들리면서도 절대 사멸하지 않는 존재였다. 보름이 지나는 동안, 그것과 우리는 많은 것을 잃고 지쳐 있었다. 서둘러 모든 것을 끝내고 싶다는 마음도 들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보다 촉박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것에게 있어 우위에 있는 존재여야 한다. 우리는 고요히 숨을 내쉬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기나긴 겨울이 끝났다.

 


영월 영일.

나는 여전히 씨앗을 찾지 못했다. 노인이 말했던 운명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다. 내가 가진 의문도 풀지 못했다. 온통 허황된 것투성이다. 나는 변하지 않았고, 세상도 변하지 않았다.

허나 분명 많은 것이 변했다. 여정의 시작에 만난 피리는 낡아 땅에 묻혔고, 웅대한 숲을 이루었다. 그곳은 이제 나무의 영역이라 불린다.

계속해 나를 따라다녔던 깃털은 흑요석을 먹지 않고도 성장하더니, 거대한 새로 변모했다. 태양보다 붉은빛에 휘감긴 채 하늘을 자유로이 누비는 모습을 보고, 혹자는 또 하나의 태양이라며 숭배한다. 때때로 깃털은 나에게로 와 오색 빛의 기운을 뽐내곤 하는데, 무척 따스하여 안정적이었다. 깃털이 사는 곳의 호수는 인간들에게 온천이라 불리며 평온함을 안겨주고 있다. 깃털은 화산이 폭발하지 않도록 관리하며, 호수 온도를 조절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백호가 된 범은 온 산맥을 통치하는 산군이 되었다. 광석으로 유명하던 마을은 이제 수호의 마을로 불린다. 신성한 산군께서 안겨준 광석은 다시 없을 영광이라며, 마을 밖으로 유출되지 않고 대대로 물려 내려오고 있다. 그 광석을 가진 자에게는 산군의 영원한 수호가 이어질 것이라는 말도 있는 듯하다. 그러나 범의 실제 모습은 다르다. 범은 깃털에게 놀러 가 흑요석을 선물하지만, 매번 거절당해 시무룩한 상태로 날 찾아오곤 한다. 어릴 땐 흑요석이 전부였는데 이제는 아니라며 투덜거리기도 하고, 같이 놀 상대가 없다며 늘어지기도 한다. 그러면 나는 수호자로서 역할을 다 하라며, 그를 열심히 달래어 보내곤 하는 것이다.

눈 결정은 대지의 영역에서 벗어나 물의 영역에서 살고 있다. 얼어붙은 땅을 녹이고 황폐한 마을을 복구하고 있다. 이에 깃털이 많은 도움을 주고 있는데, 또 하나의 태양이 강림하신 곳이라며 숭배자들이 따라붙었다. 그로 인해 마을은 예상보다 빨리 회복되고 있으며, 곧 원래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 한다.

강철, 개념에 불과한 그것은 죽지 않았다. 눈 결정과 깃털이 녹인 물의 영역 중심에 잠들어 있다. 겨울이 끝난 날, 달빛 아래에서 상처 입은 그것은 괴로워했다. 고통을 우리에게 옮기지 못해 분에 겨워 날뛰고 싶어 했다. 허나 그러지 못했고, 그것의 속만 새까맣게 타며 기운을 소진했다.

그것의 눈이 감겼을 때, 우리는 그것을 어찌하면 좋을지를 오랫동안 의논했다. 애당초 죽일 수는 없는 존재였으니 봉인함이 마땅한데, 사방 중 어느 영역에 봉인하느냐의 문제가 남아있었다. 그것은 불타는 존재였으므로 대지의 영역에 가서는 안 되었고, 나무의 영역도 같은 이유에서 기각되었다. 불의 영역과 물의 영역 중 선택해야 했다. 그것을 불의 영역에 데려간다면, 화산의 활동은 더 심해질 것이고, 그것이 깨어날 시기도 앞당겨질 것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물의 영역에서 영영 잠들어야 했다.

눈 결정은 영역 전반을 복구하며, 다른 기운을 정화하는 힘을 얻었다. 더 정확히는 남의 기운을 자신의 것으로 바꾸어 흡수하고, 자신의 기운을 남의 기운으로 바꾸어 나누어줄 수 있는 능력이었다. 눈 결정은 이 힘으로 그것의 기운을 빼앗았다. 죽음은 삶으로, 절망은 희망으로, 증오는 연민으로, 무감은 사랑으로. 그리하여 눈 결정은 질서를 세우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눈 결정의 모습은 뱀에 휘감긴 거북으로 바뀌었다. 사람들은 그를 현무라며 칭송한다.

사방의 수호자들은 성장했다. 각 영역은 무덤이 아닌 성소로 불리게 되었다. 동쪽의 청룡은 죽었지만, 언젠간 새 수호자가 태어난다면 그곳도 무덤이 아닌 성소가 될 것이다. 아마 머지않을 때에 그리될 것이다.

나는 여전히 용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용은 허황된, 개념적인 존재에 불과할 뿐이다. 강철이라 불리는 그것이 개념에 불과했듯 말이다. 그러나 깃털이 주작이 되고, 황호가 백호가 되고, 눈 결정이 현무가 되었듯, 동쪽에서도 무언가가 수호자를 맡게 될 것이다. 어쩌면 청룡이라 불릴지도 모른다. 그러니 나는, 수호자가 될 자질이 있는 존재가 태어나 성장하고, 수호자로서 역할을 할 때까지는 용의 존재를 믿지 않으려 한다. 실제 청룡이 나타날 때까지는 믿지 않을 것이다.

또한, 청룡이 나타나기 전까지 새로운 여정을 떠나려 한다. 아직 노인의 씨앗을 찾지 못했고, 내 운명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다. 노인이 말했던, 하늘과 땅이 뒤바뀌고 바다에서 불이 솟아오르는 곳 또한 찾지 못했다. 따라서 이젠 알려지지 않은 존재들의 무덤을 찾으려 한다. 언젠간 성소가 될 가능성이 있는 그 모든 곳을 둘러보며, 죄를 사하는 선한 존재를 찾아 물을 것이다.

당신은 세계의 진실을 알고 있습니까? 당신은 그것을 믿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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