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의 도서관

[HL]최종화(最終話)

1차 HL 자캐 페어 : ㄱㅅ님 커미션 샘플

눈은 하늘이 내리는 기적이라 했던가. 신이 인간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기적이 무자비하게 쏟아지던 날이었다. 하늘 위의 존재가 누군가를 애정하는 만치 차갑게, 눈송이가 대기를 얼렸다. 세계가 잿빛에 잠겼다.

그러나 세상에 유일한 것 하나는 온전히 제 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바다. 만물의 어머니이자 위대한 자연. 시린 계절이 굽이치는 세월까지 얼리지는 못했나 보다. 지금 제 앞에 서 있는 존재를 집어삼킬 듯 파도가 휘몰아치는 것을 보니.

르완은 무채색 시계(視界) 가운데 유일하게 푸른 것을 눈에 담았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부두에는 자신 이외에 아무도 없었다. 습관적으로 약지에 낀 은색 반지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안쪽에 친우의 이름이 각인된 우정 반지였다. 입을 벌려 짧게 한숨을 내쉬자 순식간에 공기가 하얗게 얼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르완이라는 사람은 굳이 따지자면 봄과 닮은 사람이었다. 시릴 듯 새하얀 외모와는 달리 온화하고 이타적인 태도가 사람을 그렇게 만들었다. 한없는 다정함은 그녀가 일궈낸 노력의 결과물이었다.

사연 없는 사람 하나 없다고 하던가. 다정함의 이면에는 방어적 기재와 내면의 상처가 묻혀 있었다. 속내를 아는 사람은 단 한명을 제외하곤 지금껏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 이외에는 없을 것이다.

제 이야기를 함으로써 그 한 명과의 관계에 영향을 받게 되면서 그녀가 한 다짐이 있었다. 좋은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 굳이 자신을 내보일 필요는 없었다.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공감해주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쉽게 마음을 열었다. 그걸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겨울 바다의 앞에 선 그녀는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 회피하며 미뤄오던 것에 대한 여파가 순식간에 밀어닥쳤다. 미련과 애증으로 유지해오던 관계가 다시 틀어졌다. 사소한 마찰이 나비효과가 되어 돌아왔다. 후회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었고, 이제 제게 남은 건 관계의 종말에 관한 것이었다.

‘─르완. 이제 나는 내 죄책감을 이용하면서 너를 감수하지 않을 거야.’

머리와 어깨에 눈이 소복이 쌓인다. 하지만 털어낼 생각조차 없었기에, 그저 가만히 서서 겨울 바다에 시선을 고정했다. 때가 다가왔음을 느낀다. 너의 그 말로 인해 우리의 관계를 정리해볼 시간이 주어졌다. 이게 마지막 기회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시간이 무심히 지나가고 밤이 찾아왔다. 겨울밤은 오롯이 홀로 서 있는 여성에게 너무나 잔인한 계절이었다. 르완은 아침과는 달리 폭력적인 온도로 세상을 감싼 풍경을 눈에 담았다.

그녀는 미래가 아닌 현재를 위한 삶을 사는 자였다. 그렇기에 완벽함을 추구했고 불완전함을 멀리했다. 누군가가 말했다. 삶은 부서짐과 깨어짐의 연속이라고. 그것을 수복시켜 나가는 과정이 바로 인생이라고.

하지만 르완은 선함에 있어서 강박을 추구했다. 자신보다는 타인을 우선시했다. 그 결과는 자아의 상실과 불안정함만을 가득 낳았다. 더 이상 ‘나’를 알 수가, 없었다. 르완이 한참을 밤바다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을 무렵, 그림자 하나가 그녀에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르완은 딱히 옆을 바라보지 않았다. 여전히 정면에 시선을 둔 채, 다가온 인기척에게 말을 걸었다.

“...늦었네.”

“...”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개의치 않는 태도로 르완이 몸을 돌려 상대를 마주보았다. ─발레리 러셀. 남자의 이름이었다. 그가 어두운 표정으로 지근거리에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발레리는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따스한 미소를 희미하게 매단 채 올려다보는 시선을, 무겁게 마주했다.

르완의 코끝과 뺨이 발갛게 얼어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새하얗게 드러난 목이 얼음장 같이 차가운 온도일 것만 같았다. 그는 저도 모르게 손에 끼고 있던 검은 장갑을 벗고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었다. 그리고 르완의 양쪽 뺨에 부드럽게 손을 올렸다.

르완은 그런 그의 손길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짧은 침묵 끝에 발레리의 입이 느리게 벌어졌다. 새하얀 입김이 공중에서 얼어붙었다.

“추워 보여.”

“...”

이번에는 르완이 대답이 없었다. 푸른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눈가에 여전한 미소를 유지할 뿐이었다. 그런 그녀의 반응이 시리게 심장을 저몄다. 마지막을 고하고 대화를 나누고자 만난 자리였는데도 어떠한 대화도 제대로 오고 가지 않았다. 발레리는 왠지 모르게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느껴지는 이 상황이 달갑지 않았다.

“...일단, 안에 들어가서 얘기하자. 오늘 밤 날씨가 궂을 거라던데, 여기 있다간 둘 다 조난이라도 당하겠어.”

“레리.”

이름이 불렸다. 저도 모르게 움찔한 발레리는 손을 거두고 그녀의 동태를 살폈다. 눈가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입은 여전히 호선을 그리고 있는데 눈이 웃고 있지 않았다.

“더 이상 도망치지 말자.”

오늘 밤은 만월이었다. 만월 아래 흩날리는 눈발이 조금씩 거세지기 시작했다. 시린 장면 가운데 달빛이 내려앉은 르완은, 눈부시기 그지없는 순백을 온몸에 두르고 있었다. 마치 성스러운 어느 명화 속 주인공이라도 만난 듯한 기분이었다.

밤의 천사가 존재한다면 이런 모습일까. 하늘이 내린 새하얀 기적이 사방에 흩날렸다. 르완은 고아한 자태로 그의 대답을 그저 가만히 기다렸다. 발레리는 대답하지 못하고 침묵을 택했다.

“어영부영 미뤄오던 것이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애초에 시작조차 하지 않았을 텐데. 그치?”

“......”

르완은 자신이 반지를 더듬는 습관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너도, 나도.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아파왔어. 이제 무의미한 고통은 끝내는 게 낫지 않을까.”

그녀 딴에는 꽤 용기를 내서 선택한 단어들이었고, 말이었다. 물론 발레리 또한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 또한 신중해질 필요가 있었다. 르완을 위해서.

“...란.”

“응.”

“너에게 전해주고 싶은 게 있었어.”

과거형으로 말한다. 그는 항상 그랬다. 전엔 그랬는데, 지금은 아니야. 괜찮아. 이젠 상관없어. 그럼 과거에 너는 대체 어땠는데? 왜 내게 그런 식으로 말해서 신경 쓰이게 만드는 건데...

“이젠 소용없는 짓이라는 걸 알아서 가져오진 않았어.”

“...”

“너에 대한 내 마지막 미련은 내 손이 닿는 곳에 두고 싶어서.”

그래, 사실 그 편지를 가져오지 않은 건 발레리 러셀이라는 남자의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르완은 조용한 시선으로 발레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느새 반지를 더듬던 손가락의 움직임이 멎어 있었다.

“...응. 알겠어. 레리, 사실 나도 하나 고백하고 싶은 게 있어.”

르완이 아주 힘든 말을 꺼내려는 것처럼 머뭇거리다, 결심이 섰는지 그의 소맷자락을 조심히 잡아끌었다. 발레리는 습관적으로 르완의 손을 깍지 껴 잡다가 자기 행동에 놀라 순간 멈칫했다. 그런 그의 행동에 얕게 미소 지은 르완은 돌연 사과를 입에 담았다.

“거짓말해서 미안해.”

“...”

“그리고 나, 알고 있었어. 네 상황과 대비되는 내 주변 상황을 보면서 네가 힘들어했던 걸.”

담담한 고백이 쉴 새 없이 이어졌다.

“그런데 그거 알아? 나도... 나도, 순탄한 삶만을 살아온 건 아니야... 네게 비해선 부족하겠지만.”

마주 잡은 손이 떨렸다. 누가 동요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르완이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불행을 안고 있고, 삶의 부서짐과 깨어짐을 반복하면서 경험해. 그리고... 그것을 수복시켜 나가는 과정이 인생이라고.”

르완은 마주 잡은 손을 천천히 풀었다. 발레리는 저항 없이 그녀를 놔 주었다. 그리고 르완은 곧 손에서 천천히 은색 반지를 빼내었다. 발레리는 그 장면을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빼낸 반지를 손안에 꼭 쥔 르완이 돌연 그를 향해 웃었다. 무언의 감정이 언뜻 보이는, 애매하고 미묘한 웃음이었다.

“레리. 나는 역시 네가 좋아.”

“...르완.”

“그래서 너를 위한 선택을 할 거야. 아니. 너를 위한 선택을 한 거야. 이게 내 선택이자 고백이야.”

르완은 다시 발레리의 손을 이끌어 잡고는 그의 손바닥 위에 꼭 쥐고 있던 은색 반지를 놓아주었다. 그녀의 온기로 인해 반지는 따스한 온기를 품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까치발을 들어 그의 귓가에 한 마디를 남겼다.

“내 심장을 네게 줄게. 그러니 이제... 안녕.”

눈은 하늘이 내리는 기적이라 했던가. 신이 인간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기적이 무자비하게 쏟아지던 날이었다. 신의 자비로움 한 가운데 작별 인사를 고하는 그녀는 천사 같은 자태로 그렇게 몸을 돌렸다.

아, 천사는 신의 대리인이라 하던가. 그녀를 포함해 온 사방이 신이 빚어낸 삼라만상이었다. 무자비하게 쏟아지는 눈은 마지막 모습마저 가려주지 못했다. 저 멀리, 떠나가는 네가 보였다.

[일반 글 커미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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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워드 : 마지막 / 작별 / 겨울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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