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의 도서관

[논컾]해무(海霧)

언니는 여동생을 바르게 키워야 합니다 - 리즈 아그너스 드림 페어 : ㅇㄴ님 무료 리퀘스트 샘플

아그너스 공작저는 새벽에 잔존하는 어둠 속에 잠겨 있다. 얕게 깔린 안개 사이로 보이는 창문은 모두 커튼이 쳐진 채 굳게 닫혀있었으나, 위쪽 제일 왼쪽 끝에 있는 방만은 활짝 열린 상태로 밤을 한가득 맞이하고 있었다. 후계자의 방이었다.

고요함을, 적막함을 기꺼이 평온함으로 바꿀 수 있는 사람. 그게 바로 아그너스 공작가의 하나뿐인 후계자, 리즈 아그너스였다. 뭇사람들 앞에서는 자기 살을 내주고 상대방의 뼈를 취하는 계략가였으나. 저도 모르게 단 한 사람의 앞에서는 악인의 가면을 벗게 되고 마는 사람이기도 했다.

─제나 러이번. 소리 없이 바람처럼 다가와 선인의 탈을 쓰고 있는 소녀. 이상하게도 리즈는 그녀와 단둘이 있을 때마다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제나는 자신의 가식을 유일하게 벗길 수 있는 존재였다.

지금 그녀에 대해 이리 생각하고 있는 까닭은, 제나가 얼마 전 이상한 요청을 했기 때문이다. 제 명령이라면 무엇이든 따르는 그녀가 이렇게 먼저 무언가를 바라는 일은 굉장히 드물었기에. 리즈는 기껍게 제나의 요구를 승낙했다.

- ‘새벽 0시. 저와 같이 밤바다를 보러 가요, 리즈.’

무도회장에서 사교적인 잡담에 지쳐 벽에 기대어 쉬고 있는 자신에게 다가와 귓속말로 한 말이었다. 리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돌려 제나를 보려 했으나, 말을 마친 그녀는 도망치듯 자리를 떠나는 중이었다.

그 뒷모습을, 드레스 자락에 달린 레이스가 나풀거리는 것을 바라보며 리즈는 속으로 흥미를 느꼈다. 제나도 바랄 줄을 알았다. 제나도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 있었다. 그게 조금, 기뻤다. 그래서 도망가는 그녀를 붙잡아 긍정의 대답을 한 것은 한순간의 변덕이 아니었다. 예정된 흐름이었다.

“─바람이 더 소란스러워지기 전에 가야겠다.”

열어젖힌 발코니의 창문에서 한 발짝 멀어진다. 몸에 두꺼운 숄더를 걸치고 나갈 채비를 했다. 리즈는 리즈님이라는 호칭이 리즈로 바뀌는 순간을 좋아했다. 오전의 무도회에서 존칭을 들었으니, 이제 애칭과도 같은 이름을 불러달라고 할 차례였다.

*

새벽의 바다는 무척이나 고요했다. 칠흑 같은 비단으로 천장을 두르고 먹물과도 같은 파도를 무게감 있게 밀어낸다. 묵직한 파도 소리는 마음속에 진정을 가져왔다. 리즈는 가운 차림으로 해변에 서서 검은 물결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 뒤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리즈는 천천히 몸을 돌려 제게 다가오는 상대를 마주했다.

“...제나.”

기다란 갈색 머리칼이 달빛을 받아 붉게 빛났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만월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밝았구나. 그래서 네 표정이 이렇게 선연하구나.

“리즈, 나와줘서 고마워요.”

“...”

“사실은 오지 않을 줄 알았어요. 감히 공작가의 후계자를 오라 가라 한다는 게, 말이 되지 않죠.”

“...변덕이야.”

사실은 아니지만. 부러 그렇게 말했다. 제나 앞에서는 가면을 쓸 필요가 없는데도, 리즈는 저도 모르게 까칠하게 거짓을 입에 담았다. 괜스레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털어내듯 헛기침을 몇 번 하고, 서둘러 본론을 꺼냈다.

“무슨 일로 날 불러낸 거지? 그것도 이런 야심한 시각에, 바닷가에서.”

“고백할 게 있어요.”

달빛을 받은 비단결 같은 머리칼이 바람에 휘날렸다. 달빛이 붉게 부서져 내린다. 이어지는 말을 들은 리즈의 눈동자가 크게 벌어졌다.

“─저는 당신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예전에.”

“...”

“리즈. 제가 사람을 죽였어요.”

제나는 평온한 어조로 말을 하고 있었다. 그 증거로 파도가 잠잠했다. 물 계열의 마법을 다룰 줄 아는 그녀의 감정에 반응해 이따금 주변의 액체가 반응하는 일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까와 똑같았다. 바다는 흉포하지도, 격앙되지도 않았고 그저 느리게 물러갔다 다가올 뿐.

고요함을 삼킨 시간대 속에 선 두 소녀. 하나 그 고요함이 조금 전까지는 안온함을 의미했다면, 지금은 달랐다. 불편한 침묵을 유지하던 리즈가 미소인 듯 울음인 듯 희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제나에게로 한 걸음 다가갔다.

[일반 글 커미션]

오월의 도서관 - 하련의 시집 타입

- 키워드 : 새벽 / 바다 / 비밀스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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