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noon tea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주전자에 물을 올린다.

창밖에서 흰 용이 날개를 펼쳤다. 미지근한 빗물이 피막을 두드리는 소리가 집 안까지 나직하게 울렸다. 용은 곧장 날아오르지 않고 한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비늘 골을 따라 물줄기가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동안 나는 창가에 앉아서 머그 손잡이를 쥔 채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마침내 용이 거대한 날개를 크게 펄럭여 몸을 띄웠을 때, 나는 찻잎이 말라붙은 컵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창문이 일제히 부르르 떨며 집 전체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화분 옆에 놓아둔 바구니에서 몸을 말고 잠들어있던 제스가 털을 한껏 곤두세우고 불만스럽게 울었다. 와오오오오. 누군가 말하기를 고양이는 날개를 팔아 털을 얻은 용이라던데, 어쩌면 정말 그런지도 몰랐다. 불그스름한 털을 가진 그 작은 용은 마루에 내려서서 앞발을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켜더니 무시무시한 이빨을 드러내며 길게 하품했다. 내가 빈 컵에 차를 더 따라 창가로 돌아왔을 때 흰 용은 이미 구름 사이로 숨어 보이지 않았다. 용을 삼킨 하늘에서는 계속해서 비가 쏟아질 뿐이었다. 나는 뜨거운 차를 한 모금 마시고 테이블에 컵을 내려놓았다. 김이 서린 안경을 잠시 벗어둔 채 의자에 몸을 파묻자 제스가 어디선가 나타나 팔걸이 위로 뛰어올랐다. 털이 조금 눌린 작고 붉은 머리통이 어깨에 툭 부딪혔다. 곱슬곱슬하고 부드러운 털을 가졌지만 지나치게 막무가내인 용은 내 옆구리와 의자 사이로 물처럼 비집고 들어와 어딘가 깊은 곳으로부터 연신 그릉그릉 울리는 소리를 냈다.

칠월에는 거의 매일같이 비가 내렸다. 어느 날부터 목초지를 차지한 흰 용은 비를 좋아하는지 하늘이 흐린 날이면 어김없이 날아들어 언덕 아래 자리를 잡곤 했다. 그쪽에서도 아는지 모르겠지만 내 작은 거실에서는 그 방향이 무척 잘 보였던 탓에 용이 처음 이곳에 찾아온 날에도 나는 어렵지 않게 그 소동을 지켜볼 수 있었다. 그날 나는 용이 무너트린 울타리와 혼비백산 도망가는 내 양떼를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고, 빗속에서 사방으로 흩어진 양들을 해가 지기 전에 되찾아와야 했다. 언제나 기대 이상으로 큰 힘이 되어주는 잭이 없었더라면 꼼짝없이 양들을 잃어버렸을 터였다. 나와 마찬가지로 기진맥진한 채 털이 흠뻑 젖어 돌아온 잭은 다행히도 저녁으로 큼지막한 고깃덩이를 받고 만족한 것 같았다. 다음 날, 나는 우리 문을 열어 양들을 풀어놓는 대신 창고에서 눅눅한 건초를 꺼내다 주었고 양들은 떨리는 울음소리로 미약한 불만을 표시했다. 테라스 난간에 걸터앉아 울타리를 보수할 자재를 가늠해 보던 차에 흰 용은 두 번째로 내 목장에 찾아왔다. 곧장 용을 쫓아내려 소리를 쳐 보았지만 막 날개를 접던 용은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부서진 울타리 곁에 자리를 잡고 앉아 뻔뻔할 정도로 표정을 알 수 없는 시선만을 돌려주었다. 갈퀴 따위를 들고 용에게 맞서는 무모한 짓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지 않았던 것은 겁을 먹은 탓이라기보다는 어쩌면 그 무심한 눈길에 질려버렸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하여간 며칠을 두고 보았으나 용은 나와 내 양들을 해치지 않았고, 용맹한 잭마저도 용에게는 결코 가까이 다가가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결국 그 흰 용에게 내 공간의 일부를 내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맑은 날을 골라 울타리를 고쳐지으며 흰 용이 좋아하는 자리를 비워두었다. 타협은 나쁘지 않게 성사되었다. 처음 얼마 동안 용이 내려앉으면 양들은 울타리 저편으로 몰려가곤 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 가엾은 동물들도 공존이라는 운명에 대해 이해한 것 같았다.

한 달 정도를 함께 보내며 깨달은 것이 있다면 흰 용은 매일 비슷한 시간에 목장을 찾아온다는 사실이었다. 비가 오는 날, 오후 세시를 넘어가면 용은 늘 같은 방향에서 날아왔다. 조금 늦거나 이른 날도 있었지만 용에게는 시계가 없다는 것을 감안하면 퍽 놀라울 정도였다. 오래지 않아 나는 비 내리는 정오를 맞으면 나도 모르는 새 용을 기다리게 되었다. 어느 날 창가에 기대어 창틀 위의 제스를 쓰다듬던 나는 그것을 깨닫고 다락의 먼지 속에서 안락의자를 구해내 그 자리에 두었다. 곧 의자 곁에는 작은 테이블이 눌러앉았고 나와 제스는 흰 용이 비를 즐기는 동안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마음먹은 것처럼 굴기 시작했다. 용은 매번 같은 시간에, 같은 방향에서 날아왔고 날이 저물기 전에 떠났다. 양떼와 용이 자아내는 분위기에 영향을 받은 탓일까, 나는 자연히 그 한적한 시간 동안 티타임을 즐기게 되었다.

시곗바늘이 두시 반을 가리킬 때 빗물이 여전히 지붕을 두드리고 있는 날이면 나는 구리 주전자에 물을 받아 불 위에 올려두고 제스가 기다리는 창가로 돌아왔다. 용의 날갯짓 소리를 먼저 듣는 것은 언제나 잭이었고, 불쌍한 개는 절대로 용과 같은 공간에 있고 싶어 하지 않았으므로 부리나케 테라스 아래로 줄행랑치는 잭을 통해 흰 용이 도착했음을 알 수 있었다. 잭이 꽁무니를 뺄 때 찻주전자와 찻잔에 끓인 물을 부어두면 창밖으로 용의 모습이 보일 때쯤엔 차를 우리기에 딱 알맞을 정도로 데워지곤 했다. 찻주전자의 물을 버리고 찻잎을 스푼으로 덜어 넣는 사이에 창문이 약하게 떨리며 용이 내려앉았음을 알렸다. 나는 찻주전자에 끓는 물을 따르며 흰 날개가 우아하게 접히는 광경을 감상했다. 차가 우러나길 기다리는 몇 분 정도의 여유시간 동안 용은 긴 꼬리를 천천히 휘저으며 제자리에서 몇 바퀴를 서성이거나 웃자란 풀 가까이에 코를 들이대고 무언가를 살폈다. 아마도 나름대로 마음에 드는 자리나 편한 자세를 따지고 있는 것이 아닐지 나로서는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마침내 용이 자리를 잡고 앉아 거대한 몸에 꼬리를 말아 붙이면 나는 김이 무럭무럭 솟는 뜨거운 차를 찻잔에 가득 따라 안락의자에 앉았다. 내가 각설탕을 찻잔에 빠트릴 때 제스는 늘 테이블 위에서 설탕 통 뚜껑을 노렸다. 평범한 양철 뚜껑의 무엇이 고양이의 흥미를 끌었는지는 언제나 모를 일이었다. 제스에게서 설탕 통을 지켜낸 후 고개를 돌리면 흰 용이 양 앞발을 가지런히 포갠 채 유연한 목을 하늘로 향하고 비를 맞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용은 대체로 내 목장을 떠나기 위해 몸을 일으킬 때가 아니면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숨을 쉬는지조차 의심스러울 만큼 느리게 오르내리는 옆구리를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면 새하얀 용은 생물보다는 거대한 대리석 조각처럼 느껴졌다. 그때부터 나와 제스는 안락의자에 푹 파묻힌 채로 은은한 홍차 향을 곁들여 그 경이로운 조각상을 감상하는 시간을 만끽했다.

용이 떠난 후에는 더 이상 남은 여유가 많지 않았다. 늘 그렇듯 테라스 아래 틀어박혀 있던 잭이 슬그머니 기어 나오는 것을 지켜보며 나는 아직 식지 않은 차를 천천히 모두 들이켰다. 빈 찻잔을 들고 일어나 부엌으로 향하는 길에 돌아본 풍경은 거짓말처럼 용과 무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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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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