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녹음의 속삭임

2022.01.25

비우기 by BI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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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런스게임을 통해 얻은 랜덤 키워드: 동양, 인간, 정령, 마법, 검, 나무, 나비, 산, 밤, 모닥불, 노력, 진실, 사소한 행복, 독립, 저음, 눈물, 성장, 꽃

18개의 키워드 중 18개 사용, 0개 제외.

약 4시간 40분 소요. 총합 9149자.


‘그리운 자여. 우리의 노래가 들린다면 대답해다오. 그대에게 내재한 꽃을 피워다오. 우리는 그대에게 화답하여 녹음 가득한 숲의 속삭임을 일러줄 터이니, 부디 우리를 만나러 와다오.’

낮은 속삭임이 들린 듯했다. 희는 잠에서 깨어나 기억나지 않는 음성을 되짚고자 했다. 그러나 수많은 존재의 소란스러움으로 인해 집중할 수 없었고, 한숨을 내쉬며 이부자리를 정리했다.

“지금은 새벽이야, 얘들아. 아직 해가 뜨지 않았다고.”

‘으응, 아니야. 네가 우리의 태양이니, 지금은 아침인 거야!’

누군가 보았다면 눈과 귀를 의심했을 것이다. 근처에는 사람이 없었고, 희가 말을 걸 만한 인격체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작은 꽃잎 몇 장이 떠다녔는데, 그들은 바람이 불지 않음에도 희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꽃의 정령. 희는 그들을 그리 칭했다. 처음 만났을 적, 그들은 스스로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까르륵 웃어대기만 했다. 희는 그들 개인에게 이름 붙일 수 없어, 모두를 뭉뚱그려 표현하기로 했다. 꽃잎들은 그의 단어가 너무 직관적이라며 웃었지만, 희 스스로는 만족하는 명칭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이야? 굳이 찾아온 걸 보면, 내가 도와줄 일이라도 있어?”

‘움… 이걸 있다고 해야 하나?’

‘글쎄! 나는 모르겠어!’

‘응응, 우리는 모르겠어!’

희는 금세 소란스러워진 귓가를 매만지며 꽃잎들을 훑었다.

“…장난치지 말고. 정말로 뭐 없어?”

‘앗, 있다, 있어!’

‘응? 있었나?’

‘그래, 우리 아름다운 숲으로 떠나자고 했잖아!’

‘앗, 맞아, 맞아! 우리의 숲으로 가자!’

“너희들의 숲이라고? 어디에 있는 건데?”

문득 흥미가 생겼다. 희는 온 세상의 숲을 가보는 것이 꿈일 정도로 자연을 아끼며 사랑했다. 평범한 숲조차도 그에게는 황홀할 지경인데, 하물며 정령들의 숲이라면 얼마나 감격스럽겠는가. 희는 머릿속으로 앞으로의 일정을 수정하며 물었다.

“거기까진 얼마나 걸릴까?”

‘우리의 숲은 아주 멀리 있어!’

‘나비들이 길을 알려줄 거야!’

나비들이라. 꽃의 정령과 같은 아이들일지, 혹은 말 그대로 곤충을 말하는 것일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꽃과 나비라니, 무척 어울리는 조합이라고 희는 생각했다.

그리하여 희는 멀다면 먼 여정을 떠났다. 현재 살던 집은 임시거처에 불과했으므로, 짐을 꾸리는 데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새벽에 출발하여 꼬박 하루를 걸은 뒤의 밤. 희는 익숙한 자세로 모닥불을 피웠다. 깊은 산속이었지만, 희는 언제나 산짐승들의 보호를 받아왔으므로 큰 걱정이 들지 않았다. 조금 싸늘하다 싶을 땐 거대한 범이 나타나 품을 내주었고, 배고플 때는 다람쥐들이 나무 열매를 떨궈주었다.

그렇게 아늑한 밤을 몇 차례 보내다 보니, 어느샌가 작은 마을 어귀에 도착해있었다. 희는 토끼가 건넸던 약초를 팔아 약간의 식량을 얻었다. 편안한 마음으로 마을을 구경한 뒤 떠나려는데, 작은 아이들이 웃으며 뛰어다니는 광경이 걸음을 멈추게 했다.

희는 회상했다. 나 또한 저리 뛰어놀 때가 있었지. 남들과 다르지 않은 생을 살며, 누구나 그렇듯 가족을 꾸리고 여생을 보내리라 생각했었는데.

잠시간 씁쓸한 미소를 베어 문 희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생각을 떨쳐냈다. 평범한 생과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그의 곁에는 여러 정령과 동물들이 함께하고 있으므로. 희는 행복했다.

 

마을에서 벗어난 희는 거대한 꽃밭에 들어섰다. 노란빛의 유채로 가득한 장소는 희의 취향에 부합했다. 정령들도 신난 듯 유채 꽃 위에 앉았다가 뛰어오르길 반복했다. 그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평화로운 장소. 사람들이 모인 장소의 북적거림과는 정반대되는 분위기였다.

희는 꽃밭에 누워, 옅은 구름이 떠다니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건… 너희를 닮았네.”

‘응? 우리를 닮았다고?’

‘어디, 어디 있어? 앗, 찾았다!’

꽃잎들이 주변을 떠다닐 때처럼, 작고 귀여운 구름 조각들이 하늘 한편을 모험하고 있었다. 희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않았다. 달콤한 과실을 맛보았을 때처럼 속이 간지러웠고, 입가는 기다랗게 늘어졌다. 희는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눈을 감았다. 얇은 눈꺼풀이 채 막아내지 못한 빛마저도 기꺼웠다.

얼마 동안 잠든 것일까. 희는 깜깜해진 사위를 훑으며 깨어났다. 푸르던 하늘은 검은 비단을 펼쳐놓은 듯 어두워졌고, 작은 구름은 휴식을 취하는 건지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비단 위에는 은가루가 뿌려져 있었고, 붉고 노르스름한 실이 수 놓여 있었다. 샛노란 빛깔로 가득하던 꽃밭은 모든 것이 저문 듯 침묵했지만, 주위에는 작은 빛 알갱이들이 떠다녀 아늑한 분위기를 형성했다.

아, 썩은 풀은 빛이 없지만, 반딧불이 되어 여름 달밤에 그 빛을 밝히나니(腐草無光化爲螢而耀采於夏月), 밝은 것은 언제나 어둠에서 생겨남을 알 수 있으리라(明每從晦生也). 이 어찌나 평화로운 광경인가. 희는 여러 번 감탄사를 내뱉었다. 빛도 어둠도 자연의 일부이니,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희는 자연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 푸르른 숲과 화사한 꽃, 얼핏 지나치면 모를 작은 풀 한 포기까지도. 그에게는 모든 것이 생명으로 가득 찬 공간으로 다가왔다. 드넓은 평원도, 높이 솟은 산악도. 희는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방대한 생명력을 사랑했다. 정령들의 숲에 달하지 못할지라도 지금 본 광경만으로 평생을 추억하며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희는 생각했다.

밤이 되어 꽃잎들은 사라졌지만, 희는 반딧불을 벗 삼아 걸어가기 시작했다. 명확한 길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희는 그리 생각하면서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자신의 걸음이 옳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그렇기에 희는 꽃밭을 지나 어둑한 숲으로 들어갔다.

키가 큰 나무들 사이로 빛무리가 쏟아져 내렸다. 세상의 모든 존재 중에서도 특출날 정도로 곧게 뻗은 빛줄기였다. 희는 빛에 적응하기 위해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검은 그림자만 가득하던 숲은 아름다운 녹색 빛깔로 가득 차오르며 생을 뽐냈고, 이를 지켜보던 희의 얼굴에도 활력이 돌았다. 희는 나무들이 안겨준 서늘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팔을 쭉 뻗어 굳은 몸을 풀어주었다. 입꼬리를 늘이며 작은 노래를 흥얼거릴 때 즈음 꽃잎들도 돌아왔다. 숲은 더이상 고요하지 않았다.

‘우와, 우리가 없는데도 잘 가고 있었구나!’

‘역시 희는 대단해!’

‘누가 키웠는지 참~’

희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웃음기 가득한 숨을 내쉬었다.

“누가 날 키웠다는 거야. 내가 너희를 키웠다면 모를까.”

‘아앗, 그런 거야?’

‘아냐, 우리가 널 키운 거라고!’

“그래, 그래. 그런 거로 치자.”

꽃잎들은 희의 머리카락을 응징하듯 헤집었고, 희는 엉망이 된 머리를 정리하며 숲을 떠났다. 가벼운 꽃향기가 남은 그의 발자국만이 숲을 지켰다.

 

‘희야, 희야! 저쪽이야!’

‘맞아, 저기에 나비들이 살아!’

희는 꽃잎들의 안내에 따라 복잡한 길을 걸어갔다. 허리춤까지 올라오는 기다란 수풀도 헤치며 지나갔고, 돌다리 하나 없는 계곡을 건너기도 했으며, 발을 잘못 딛는 순간 추락해버리는 높고 좁은 절벽도 올랐다.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진작 포기하고 돌아갔을 테지만, 정령들의 숲을 보겠다는 희의 의지는 결코 꺼지지 않았다. 오히려 가는 길이 어려울수록 불타올랐다.

험준한 바위 절벽 위에는 광활한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나무는 한 그루도 보이지 않았지만, 수많은 꽃과 풀이 바람에 따라 흔들거리고 있었다. 조금 희박해진 공기에, 희는 큰 숨을 내쉬었다. 조금 어지러운 것 같기도 했다. 꽃잎들은 이를 눈치채지 못한 채, 희를 이끌고 들판 한가운데로 향했다. 잠시 멈춰달라고 요청하기 직전, 저 멀리에서 하얀 날개를 가진 형체들이 날아왔다.

“…나비인가?”

‘응, 나비 일족이야!’

‘저 날개 좀 봐, 너무 멋있어!’

성인 인간보다는 작지만 어린아이들보다는 큰 존재였다. 인간의 형태를 갖추고는 있지만, 인간과는 달리 검은 피부가 딱딱한 뼈대처럼 굳어있었고, 사지는 무척 길고 가늘었다. 손가락은 다섯 갈래로 나뭇가지처럼 얇게 찢어져 있었으며, 발가락도 마찬가지였다. 눈이 있어야 할 부위에는 오색 빛의 단백석 두 알이 박혀있어 기이한 신비로움을 더했다.

“인간. 어떤 용무로 찾아온 거지?”

‘접아 님! 저희예요!’

‘당신들의 꽃이 왔어요!’

희를 위협하듯 다가온 나비는 꽃잎들을 보며 멈춰 섰다. 그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하며 꽃잎과 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영아들이 지키는 인간이라. 너는 천위구나.”

“천위(天爲)?”

“그래. 인간의 몸을 빌려 태어난 세계수의 가지 말이다. 너에게선 낯익은 향이 풍긴다.”

천위라 함은, 세계의 중심에 존재하는 거대한 생명의 나무가 빚어낸 존재이다. 세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태어난다고 하더군. 우리는 그 균형을 이해할 수 없지만 말이다. 나비는 멋쩍은 듯 웃었다.

“내가 세계수의 가지라면, 무언가 사명을 안고 있다는 뜻입니까?”

“접아로선 알 수 없다. 태어남으로써 사명을 다한 천위도 있고, 죽음이 다가와서야 사명을 다하는 천위도 있으니. 지금의 네게 사명이 존재하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

희는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이 평범하지 않음은 알고 있었지만, 세계수이니 천위이니 하는 것들은 너무 갑작스러웠다. 그저 자연을 구경하며 떠돌고 싶을 뿐, 다른 무언가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생각에 잠긴 희를 보며, 나비는 문득 생각난 문장을 꺼냈다.

“접아의 마을로 와라. 너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다.”

어쩌면 네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이어진 문장에, 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비를 따라갔다.

 

“한데, 당신의 이름이 접아(蝶兒)입니까?”

“흠… 네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를 거다. 우리에겐 이름이 없어. 일족의 수장에게만 ‘접아’라는 호칭이 부여된다.”

희는 수긍했다. 꽃잎들도 개인의 이름이 없었으니, 나비 일족이라 하여 다를 바는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궁금한 것은, 저들에게 ‘나비’라는 명칭과 ‘접아’라는 호칭을 부여한 것이 누구냐는 사실이다.

“우리가 나비인 이유가 궁금한 모양인데.”

“…예. 수장의 호칭이 그리된 연유도 궁금합니다.”

“솔직하니 좋군. 나비라는 명칭은 인간들이 붙여주었고, 접아는 세계수가 부여한 이름이다.”

“인간들의 작명을 이어간 이유가 있습니까?”

“없다. 그저 제일 먼저 들은 명칭이기에 우리는 나비인 거다.”

본래 최초라는 것은 존재를 규명하는 행위니까. 나비는 덧붙였다.

희는 생각했다. 꽃잎들을 ‘꽃의 정령’이라 부른 것도 그들의 존재를 규명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이를 미리 알았다면 더 좋은 이름을 지어주었을 것이라며 약하게 자책했다.

“우리의 존재가 정해진 뒤, 세계수는 그를 참고하여 이름을 부여했다. 뭐, 일반적으로 세계수는 인간의 편을 들어주니까.”

나비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너무나도 당연한 진리를 말하듯, 세계수의 불공정함을 이야기했다. 희는 멈칫하며 조심스레 물었다.

“세계수를 원망한 적은 없습니까?”

햇빛을 반사하며 새하얗게 빛나는 날개의 떨림이 느껴졌다. 인분이 땅에 떨어지려 할 때, 나비는 뒤를 돌며 시리게 웃었다.

“자, 접아의 마을에 온 것을 환영한다, 천위여.”

 

접아의 마을은 인간의 것과 확연히 달랐다. 인간의 마을 근처에 있던 숲과는 달리 더욱 거대하고 밀집된 나무들이 존재했고, 공기는 굉장히 눅눅하여 숨쉬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땅은 어둠으로 가득했으며, 군데군데 흙으로 더럽혀진 물웅덩이가 보였다.

희는 당황했다. 일반적으로 나비는 햇살 가득한 화사한 꽃밭을 여유로이 누비는 존재가 아니던가. 지금 이곳은 빛이 들지 않았으며 꽃은 흔적조차 찾기 힘들었다.

“네가 상상한 것과는 많이 다른가 보군. 우리는 어둠에 살며 빛을 내는 일족이다. 미물과는 달라.”

“…아무래도 인간이 지은 명칭이 잘못된 것 같습니다.”

“하하, 하는 수 없지 않나. 이미 지어진 이름인 것을.”

게다가 깨끗한 것은 언제나 더러움에서 나오고(固知潔常自汚出), 밝은 것은 언제나 어둠에서 생겨난다고 하지 않던가(明每從晦生也).

나비는 호탕하게 웃으며 마을 소개를 이어나갔다. 나무의 위쪽에 가득한 집들은 거주지역이며, 두꺼운 나무의 안쪽은 식당으로 사용하는 중이라고 한다. 그 나무는 장정 열댓 명이 팔을 벌려 둘러싸야 할 정도로 거대했기에, 희는 눈을 반짝이며 나뭇결까지 외울 기세로 바라보았다.

조금 더 걸어가자 높은 산이 나타났다. 나비는 잠시 망설이는 듯싶더니, 희에게 여러 가지를 물었다.

“높은 곳을 무서워하나?”

“발이 땅에 닿지 않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나?”

희는 모든 질문에 부정했다. 동시에 깨달았다. 산으로 날아가려는 셈이라고 말이다.

그의 예상대로 나비는 희를 안은 채 높이 날아올랐다. 매서운 바람이 희의 몸을 꿰뚫고 지나갔다. 희는 움찔거리며 밑을 바라보지 않으려 노력했다.

 

마침내 산의 정상에 도착했을 때, 희는 착시라고 느껴질 만큼 현실성 없는 장면을 목격했다. 자신과 닮은 사내가 검을 휘두르며 하얀 대국을 피워내고 있던 것이다. 기실, 마법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가 밟은 땅에 서리가 내린 것과는 반대로, 그의 옷깃에는 따스한 햇볕이 얽혀 있었다. 그는 은일화(隱逸花)이자 오상고절(傲霜高節)이었다.

희는 우아한 검무를 홀린 듯 바라보았다. 어느샌가 나비와 꽃잎이 사라지고 사내와 둘만 남게 되었지만, 그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빠져 있었다.

사내는 검을 정리한 뒤 희를 보며 싱긋 웃었다. 그는 하얀 꽃봉오리를 건네며 속삭였다.

“천위라는 것에 얽매일 필요 없어. 내가 그러하듯, 너 또한 원하는 대로 살면 돼. 그리하여 명을 잇고 꽃을 피워내는 날, 너는 더 높은 곳을 바라보며 날 수 있을 거야.”

그는 너무나도 소중해 감히 건드릴 수 없는 것을 만지듯, 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희는 그 무엇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째서인지 익숙한 감촉을 받아들이며 눈을 감았다. 한 사람의 뺨에 옅은 눈물 자국이 남았다.

 

꽃잎들은 말했다.

‘우리는 너를 따라갈 거야!’

나비는 말했다.

“세계수까지 안내하마.”

희는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감정을 억누르며, 떨리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사내가 건네준 하얀 꽃봉오리를 껴안고, 그의 속삭임을 떠올렸다.

알 수 없는 것투성이지만, 희는 늘 그렇듯 나아가기로 했다.

 

세계수로 가는 길. 나비는 희가 불편해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고, 꽃잎들은 여느 때와 같이 희의 주변에서 떠들었다. 희는 그들을 보며 웃었다.

희는 자신의 감정을 알고 있었다. 평범한 인간으로 살지 못한다는 소외감과 외로움은, 꽃잎들이 곁에 있더라도 쉬이 지워지는 것이 아니었다. 동물들은 자신을 잘 따르고, 자신도 그들을 귀히 여기지만. 그들과는 말이 통하지 않기에 쓸쓸했다. 동족인 인간은 자신을 모른 체하고, 자신은 그들에게 남은 미련을 버리지 못해 괴로워했다. 왜 자신만이 이런 삶을 살아야 하는지 한탄한 적도 많다.

또한, 희는 자연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비정상적임을 알고 있었다. 인간에게 받지 못한 사랑으로 인해, 인간이 만든 것들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도. 인간이 관심을 가지는 물건들에 시기심이 들었고, 그런 추악한 감정에 충격받아 인간을 멀리하려 했다는 것도. 그에 대한 반발로 자연을 사랑하게 되었으며, 어쩌면 자연에 집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까지, 전부. 희는 전부 알고 있었다.

그저 모르는 것처럼 행동했을 뿐이다. 그 모든 번뇌를 묻어두고, 없는 것마냥 취급했을 뿐이다.

 

희는 많은 자연경관을 보면서 황홀해 했지만, 그러한 긍정적인 감정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했다.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 때문에 희는 계속해 떠돌아야만 했다. 몇 번이고 비슷해 보이는 숲을 지나야 했고, 산을 넘어야 했으며, 때로는 강을 건너거나 절벽을 넘는 일도 많았다. 그 과정에서 심한 부상을 입은 적도 있지만, 희는 계속해 걸어갔다. 희의 부상은 달빛을 쬐면 흔적도 없이 나았고, 희의 피로는 물을 한 모금 마시면 사라졌다. 희는 자신의 괴이함을 ‘산 것이 아닌 상태’로 정의했다.

허나 지금의 희는 기존의 정의에 혼란을 느끼고 있다. 태생부터 인간이 아닌 존재였다면, 희가 인간답게 살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인간들이 자신을 멀리하고 동물들이 자신을 가까이하는 것도 당연했으며, 인간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정령이 자신의 주위를 맴도는 것도 의아할 일이 아니었다. 그저 희는 그렇게 태어났으므로, 그렇게 사는 것이 마땅했다.

그렇기에 희는 웃었다. 지금까지의 삶에 위안을 보내듯, 새로운 생을 염원하듯. 희는 말갛게 웃었다.

 

마침내 희는 세계수에 도달했다. 꽃잎들과 나비는 안내를 마친 뒤 사라졌다. 오직 희만이 세계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세계수는 거대한 가지 하나를 뻗어왔다. 그것은 희의 볼을 쓸어내렸다. 희는 눈을 감은 채, 세계수 안쪽에서 느껴지는 생명의 고동을 느꼈다.

“나는… 이곳을 본 적 있어요. 꿈속에서 몇 번이고 보아왔던 장면이에요. 나는, 당신을 만났어요.”

희는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희의 투명한 눈망울에선 빛을 품은 물길이 만들어졌고, 혈색이 돌지 않던 눈시울은 붉게 변했다. 누군가 목을 조른 듯 목 안쪽이 따끔거려 한마디를 내뱉는 것조차 힘겨웠지만, 희는 애써 목을 울렸다.

“당신은 나에게 말했어요. ‘우리의 노래가 들린다면, 우리를 만나러 와달라’고. 하지만 나는 대답할 수 없었어요. 나는 당신을 몰랐고, 내가 누구인지도 몰랐는걸요.”

바람이 불었다. 세계수의 수많은 가지는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사실은, 나는 아직도 내가 누구인지 몰라요. 나는 아는 것이 없어요. 이곳에 온 것도, 당신의 노래 때문이 아니에요. 그저 정령들의 숲을 보고 싶어서, 그래서 온 거였어요.”

햇살이 희의 콧잔등에 앉았다. 희는 시선을 내렸다. 세계수가 얼마나 깊고 넓은 곳에 뿌리내리고 있을지를 가늠하듯, 잠시간 침묵했다. 세계수는 희를 기다려주었다.

“당신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겠죠. 나와 닮은 자와 나비, 꽃의 정령들이 그러했듯, 당신도 그럴 거예요. 나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방치하겠죠.”

하지만, 원망스럽지는 않아요. 희는 덧붙였다. 내가 그동안 느꼈던 고독함은 보상받을 수 없지만, 아직 나의 생은 길고, 나의 끝은 머니까요.

세계수는 희를 만지던 가지를 회수했다. 대신, 수천 갈래로 뻗어진 가지들을 흔들어 잎사귀를 떨구었다. 잎은 바람을 타고 머나먼 하늘로 날아갔다.

“내가 진실을 알게 되는 날이 올까요? 이 공허함에서 벗어나, 스스로 설 수 있게 되는 날이 올까요?”

나의 꽃도 피어날 수 있을까요? 희는 하얀 꽃봉오리를 내려다보았다. 사내가 피워내던 것에 비하면 작고 볼품없는 꽃이지만, 언젠간 그의 것처럼 크고 따스한 기운을 가진 꽃으로 개화할 수 있을까요.

희는 감정을 갈무리하며 입가를 매만졌다.

“괜찮아요. 나도 알고 있어요. 천위나 사명 같은 건 모르겠지만, 그래도 괜찮으리란 걸 알아요.”

눈물에 젖은 희의 뺨은 햇살보다도 반짝였다. 희는 처음으로 환히 웃었다. 눈꼬리를 접으며, 새하얀 이가 보일 정도로 맑게 웃었다.

어디선가 낮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세계수의 가지들이 부르는, 희를 사랑하는 자연이 속삭이는, 오직 희를 위한 노래였다.


1) 채근담(菜根譚) 전집 24장 中.

糞蟲至穢, 變爲蟬 而飮露於秋風, 腐草 無光, 化爲螢 而耀采於夏月, 固知潔常自汚出, 明每從晦生也.

굼벵이는 지극히 더럽지만, 매미로 변하여 가을바람에 이슬을 마신다. 썩은 풀은 빛이 없지만, 반딧불이 되어 여름 달밤에 그 빛을 밝힌다. 그러므로 깨끗한 것은 언제나 더러움에서 나오고, 밝은 것은 언제나 어둠에서 생겨남은 알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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