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렉 2차 창작 단편 모음

[커크스팍] Motherland

“전 대원 탑승 완료했슴미다, 캡띤.”

“워프 준비도 마쳤습니다, 캡틴.”

체코프와 술루가 연달아 보고했다. 길었던 탐사가 드디어 끝나 이제 귀환만을 앞두고 엔터프라이즈는 자신의 승무원들을 고향으로 인도할 준비를 마친 채 함장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든 대원들의 시선이 집중 된 가운데 커크가 입을 열었다.

“좋아. 먼저 다들 수고 많았다. USS 엔터프라이즈는 이번 탐사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제군들의 노고가 행성 연방의 발전과 번영에 기여할 것이다. 형식적인 인사는 이 정도로 하고, 이제 집으로 가자! 술루, 워프 코어 작동시켜.”

“Aye, Captain.”

엔터프라이즈가 워프 드라이브를 시작했다. 빛보다 빠르게 이동하는 함선 안에서 모든 이들이 집으로 돌아갈 생각에 들떠있었다. 주로 집으로 돌아가면 무엇을 할 것인지 이야기하거나 가족들에게 사 갈 선물을 고민하거나 했다. 커크 역시 귀환하면 유니폼부터 벗어던지고 어느 술집으로 직행할지 즐거운 고민을 시작했다. 이윽고 엔터프라이즈가 대기권에 다다르자 워프에서 벗어나 스타플릿을 향해 천천히 착륙했다. 완전히 착륙했을 때 게이트의 문이 열리자 시원한 공기가 함선 안으로 들어왔다. 그제야 지구에 온 실감이 나서 커크는 묘한 안도와 편안함을 느꼈다.

승무원들이 하나둘씩 함장인 커크에게 하선한다는 보고를 하고 빠르게 함선을 벗어났다. 모든 승무원들이 나가고 엔터프라이즈에는 커크와 스팍만이 남았다. 스팍이 완전히 전원을 내리자 불이 일제히 꺼지고 엔진은 잠잠해졌다. 스팍이 경례를 하며 커크에게 마지막 보고를 올렸다.

“USS 엔터프라이즈 호의 부함장 겸 일등항해사 스팍, 함장님께 하선을 보고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캡틴.”

“수고 많았어, 스팍. 다음 탐사 때 보자!”

커크가 스팍의 어깨를 두드리며 인사하곤 서둘러 게이트로 향했다. 계단을 내려가는 발걸음이 무척 가벼웠다. 이게 대체 얼마 만에 밟아보는 지구의 땅인지! 커크가 막 땅에 발을 내딛던 참이었다.

“캡틴.”

커크를 부르는 스팍의 목소리가 들렸다. 커크가 뒤를 돌아보자 아직 게이트에 서 있는 스팍의 모습이 보였다. 더 할 말이 있냐고 물으려는 찰나, 스팍이 먼저 말했다.

“…잘 다녀오세요.”

심각하던 얼굴과는 다르게 스팍이 한 말은 가벼운 인사였다. 생각보다 싱거운 녀석일세, 라고 생각하며 커크가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뒤돌아서 빠르게 착륙장을 벗어났다. 그래서 커크는 스팍이 그 후로도 한참 동안 엔터프라이즈를 벗어나지 못 했단 사실을 알지 못 했다.


음악은 귀가 울릴 정도로 시끄럽고, 사람은 발에 치일 정도로 많았다. 흥겨운 술집에서 커크는 어김없이 하룻밤 상대를 물색하고 있었다. 마침 바에 앉아 있던 커크의 옆자리를 하나 건너서 잘 빠진 여자가 앉아있었다. 속으로 ‘빙고!’를 외치며 커크가 그쪽으로 몸을 기울인 순간 불쑥 그 사이로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화들짝 놀란 커크가 뒤로 몸을 빼면서 불청객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 불청객은 스콧이었다. 왠지 데자뷰 같다는 생각을 하며, 커크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스코티! 여기서 우연히 만날 줄은 몰랐는데? 어쨌든 반가워.”

“우연이 아닙니다. 캡틴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일부러 닥터 맥코이에게 부탁해 평소 자주 다니는 술집을 알아내 그 곳들을 다 뒤져서 겨우 당신을 찾은 겁니다! 대체 평소에 어딜 그리 싸돌아다니는 겁니까?”

“이런 스코티, 아무리 내가 좋다고 해도 이런 식의 스토킹은 곤란한데…. 알았어, 농담 그만할게. 뭔데 그리 심각한 얼굴이야? 나한테 할 말이 뭔데? 설마 엔터프라이즈에 무슨 문제라도 생겼어?”

“엔터프라이즈엔 전혀 이상이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엔터프라이즈의 수석기관사로서 비행이 없더라도 그녀의 상태를 정기적으로 점검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녀가 아니라 우리 커맨더입니다.”

“스팍?”

“네, 커맨더 스팍 말입니다. 캡틴, 탐사가 없을 때 평소 커맨더가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 있습니까?”

전혀 예상치 못 한 질문에 커크가 사뭇 당황했다. 호출을 받거나 볼일이 있을 때를 제외하면 스타플릿엔 좀처럼 발을 들이지 않는 커크였기에, 휴식 기간엔 스팍과 거의 마주칠 일이 없었다. 그렇다고 성격상 살갑게 연락을 하는 사이도 못 됐다.

“설마 스팍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때마침 바텐더가 주문했던 술을 가져왔다. 커크가 고맙다는 말을 하고 술을 받아들기도 전에 스콧이 술병을 가로채더니 술잔에 따르곤 벌컥벌컥 마셨다. 그 광경을 멍청하게 보던 커크가 눈치를 보며 입맛만 다시다가 결국 같은 술을 하나 더 주문했다.

“함장의 잔을 가로채다니, 위계질서가 아주 엉망인데?”

“여기가 함선이나 스타플릿도 아니지 않습니까. 게다가 제가 캡틴보다 나이가 많으니 사석에선 어느 정도 대우는 받아도 된다고 보는데요? 아무튼 서로 비긴 걸로 칩시다. 그보다는 스팍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커크가 고개를 끄덕이고 헝클어진 자세를 바로 해서 앉았다. 진지하게 듣겠다는 의사표시였다. 스콧이 손에 들린 잔을 몇 번 빙빙 돌리다가 한 모금 마시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딱 일주일 전입니다. 엔터프라이즈를 점검하러 갔는데 뒤쪽 게이트가 열려있더군요. 캡틴도 아시다시피 제 허가 없이 함선에 출입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지 않습니까. 아무튼 놀라서 들어갔는데 의외로 조용했습니다. 전부 불이 꺼져 있는데 한 곳에만 빛이 나오길래 가봤더니, 커맨더의 개인실에서 나오는 불빛이었습니다. 노크를 하자 문을 열어주셨는데 방 안에 책을 가득 쌓아놓고 읽고 계시더군요. 대부분 스타플릿 중앙도서관에서 빌린 책들이었습니다. 왜 도서관에서 읽거나 자택에서 읽지 않고 번거롭게 여기까지 가져오셨냐고 물으니 이곳이 더 편하다고 하더군요. 그날은 그렇게 서로 인사만 하고 헤어졌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또다시 점검 차 엔터프라이즈를 방문했더니 또 스팍이 거기 있었습니다. 이번엔 브릿지에서 다음 탐사의 경로를 구상하고 계시더군요. 누구와는 다르게 참 성실하게도 말입니다. -“내가 뭘! 그건 원래 스팍이 해야 하는 일이잖….”- 시끄럽습니다. 아무튼 어쩌다 보니 커맨더와 이야기를 좀 나누게 됐는데 엔터프라이즈에 자주 들리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거기서 주무신다더군요.”

“아니, 대체 왜? 장교급이면 스타플릿에서 무상으로 주거 지역을 마련해주고 있잖아? 게다가 스팍은 벌칸 대사의 아들로 벌칸족 전체 대표나 마찬가지라 대우도 훨씬 좋은 걸로 알고 있는데?”

“집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모르시겠습니까, 캡틴? 스팍에겐 스타플릿에서 마련해준 집보다 엔터프라이즈가 훨씬 편안하다는 겁니다. 그 넓은 함선에 아무도 없어도 최소한의 전원만 켜놓고 난방도 제대로 틀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그러니까 왜 멀쩡한 집은 내버려 두고 거기서 지내는 거냐고. 설마 가족도 없는 집에 혼자 있기 싫어서 그러는 거야? 그렇게 따지면 나도 가족도 없이 혼자 산다고! 나도 거의 집에선 잠만 자서 솔직히 집보단 여관이나 다름없어.”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듯 커크가 잔뜩 미간을 찌푸렸다. 어느새 바텐더가 새로 술을 내왔고 커크는 잔에 따르지도 않고 술병 채로 뚜껑만 따서 벌컥벌컥 들이부었다. 맨날 논리 밖에 모르던 벌칸인 주제에 그런 비논리적인 짓을 하고 있단 말이야? 커크는 스팍이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런 커크를 스콧이 새우눈을 하고 쳐다보다가 다시 말을 꺼냈다.

“캡틴, 잘 생각해보세요. 이 땅은 우리에겐 돌아갈 곳이고 고향입니다. 하지만 스팍에겐 아니지 않습니까. 그는 눈앞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보았고 고향 행성을 잃었습니다. 그가 절반은 인간의 핏줄이라고는 하나 고향에서 벌칸인들과 자란 엄연한 벌칸인 입니다. 단순히 어머니의 행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이곳이 고향으로 느껴지진 않을 겁니다. 우리가 오랜 항해를 하더라도 정신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건 언젠간 돌아갈 고향 땅이 있어서인데, 스팍은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스콧의 말에 커크는 그제야 스팍과 마지막 인사를 나눴던 때를 떠올렸다. 너는 그때 왜 나에게 잘 다녀오라고 했던 거지? 내가 떠나고 나서 혼자 엔터프라이즈에 남아서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우리가 귀환하며 즐거워 할 동안 너는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커크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동안 스팍에게 감정 표현을 하지 않는다고 툴툴댔었는데, 오히려 스팍의 감정을 먼저 헤아려보지 않은 자신이 너무 한심했다. 2주간의 짧은 휴가가 끝나가고 내일 아침이면 새로운 탐사가 시작 될 것이다. 그러니 그 전에 확인해야 했다.

“스코티, 스팍이 지금 엔터프라이즈에 있나?”

“아마 있을 겁니다. 제가 오늘 출항 전 마지막 점검을 다녀왔을 때도 거기 계셨거든요.”

“당장 스팍을 만나야겠어. 술값은 내가 내고 갈게. 일부러 말해주러 와서 고마워, 스코티!”

“이게 다 커맨더를 위해서 그런 겁니다. 그러니까 평소에 신경 좀 쓰지 그러셨습니까! 스팍도 엄연히 우리 크루인데 함장님이 너무 무심하신 거 아닙니까? 여자 꼬실 시간에 본인 크루부터 좀 챙기십쇼!”

“왜 내 사생활까지 걸고넘어지는 건데? 알았어, 지금 바로 간다니까! 내 발로 간다는데 왜 남의 등을 떠밀고 그래!!”

결국 커크는 술값을 계산하자마자 거의 쫓겨나다시피 술집에서 나왔다. 투덜거리며 주차해놓은 바이크에 올라타서는 바로 스타플릿으로 향했다. 시간이 꽤 늦어서 11시를 넘어 12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혹시 스팍이 잠들어버리지 않을까 싶어 조급해진 마음에 더욱 속력을 높였다. 그렇게 달린 결과 30분 걸릴 거리를 15분 만에 도착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왕년의 실력이 아직 죽지 않은 것 같다며 내심 뿌듯해하던 것도 잠시, 엔터프라이즈가 있는 이륙장 내부 격납고로 커크가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보안 시스템이 커크를 확인하고 출입을 허가하자 안으로 들어간 커크는 스콧의 말대로 게이트가 열려있는 엔터프라이즈를 발견했다. 열린 문으로 들어가 제일 먼저 스팍이 있을 만한 개인실로 향했지만 그곳은 잠겨있었다. 설마 브릿지에 있는 걸까 싶어 그쪽으로 이동했다. 불이 전혀 들어오지 않아서 어두컴컴한 복도는 벽에 손을 짚어야만 겨우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난방도 틀지 않았는지 쌀쌀한 공기에 커크가 살짝 몸을 떨었다. 야밤에 이게 무슨 고생인 건지, 궁시렁거리며 걷던 커크는 브릿지 문틈으로 희미하게 빛이 새어 나오는 걸 발견했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커크가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브릿지 안에서 스팍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스팍은 자신이 늘 앉던 자리 근처의 벽에 손가락을 뻗어 닿은 채로 눈을 감고 서 있었다. 그 행위가 너무나 경건하면서 아름다워 보여서 커크는 넋을 놓고 바라보다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청각이 예민한 스팍이지만 굉장히 집중하고 있는지 커크가 들어왔단 사실도 모르는 것 같았다. 결국 먼저 말 걸은 건 커크였다.

“벌칸인은 함선하고도 교감할 수 있는 거야?”

커크의 목소리에 스팍이 아무런 미동도 없이 조용히 눈꺼풀만 들어 올렸다. 몸은 전혀 놀란 티를 내지 않았지만 뒤돌아본 커크의 눈에서 흔들리는 시선이 느껴졌기에 커크는 스팍이 감정을 내비칠 정도로 놀랐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간 스팍을 놀라게 해보려고 온갖 장난을 쳤던 커크였기에, 의도치 않게 스팍을 놀라게 했단 사실은 그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

“캡틴,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너야 말로 여기서 왜 혼자 궁상떨고 있는 거야? 너 그동안 집에도 잘 안 가고 주로 여기서 지냈다면서. 스콧한테 다 들었어.”

“그렇습니까? 괜한 걱정을 하게 만든 것 같군요. 저는 그저 이곳이 더 편해서 그런 것일 뿐이니 염려치 마십시오.”

신기하게도, 스팍의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말투와 목소리는 커크를 편안하게 했다. 예전엔 저 변함없는 말투가 참 맘에 들지 않았었는데, 이젠 익숙하고 편안하게 느껴지는 만큼 우리가 가까워진 거겠지. 하지만 이 정도 가까워진 것으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최소한 이번만큼은 스팍이 감정을 표현해주기를, 그래서 그에게 상처와 외로움이 있다면 자신이 조금이라도 그걸 이해할 수 있길 바랐다.

“너 여기서 잘 거지? 이미 시간도 늦은 것 같고 어차피 내일이면 출항이니까 나도 자고 가야겠다. 어디서 자는 거야? 개인실? 아님 브릿지에서?”

“저는 브릿지에서 잘 계획이었습니다만, 함장님껜 불편할 테니 개인실에서 주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 나도 여기서 잘래. 으으, 에엣취! 스팍, 춥지 않아? 우리 난방 좀 켜는 게 어때?”

스팍이 조용히 일어서더니 조종석으로 가서 난방 시스템을 돌리고 와서 말했다.

“브릿지에만 난방을 돌렸습니다. 곧 따뜻해질 겁니다.”

“고마워. 그나저나 너도 참 대단하다? 이렇게 찬 바닥에서 그동안 어떻게 잔 거야?”

“벌칸인은 인간보다 체온이 낮습니다. 저에겐 그다지 춥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스팍이 침낭을 하나 더 꺼내서 커크에게 건네며 대답했다. 침낭에 몸을 구겨 넣으면서 브릿지가 아니라 야외라면 왠지 캠핑 온 것 같은 기분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커크는 어린 시절 방황했기에 친구와 함께 야외에서 놀면서 밤을 새운 기억이 없었다. 친한 친구라곤 본즈 하나였지만 본즈는 스타플릿에서 만나기도 했고 친구라기 보단 사실 형 같았다. 생각해보니 자기 또래의 인간…은 아니라 외계인이지만, 아무튼 또래의 친구와 놀러 온 것 같아서 괜스레 마음이 들떴다. 커크가 침낭에서 키득거리며 꼼지락거리든 말든 스팍도 브릿지의 불을 끄고 침낭에 들어왔다. 완전히 깜깜해져서 바로 옆에 누운 스팍의 얼굴 마져도 흐릿하게 보였다. 커크가 속삭이듯 조용히 말을 걸었다.

“있잖아, 스팍. 아까 내가 들어오기 전까지 브릿지에서 뭘 하고 있었어? 정말 엔터프라이즈랑 마인드 멜드(Mind Meld)라도 하고 있던 거야?”

“비논리적인 질문입니다. 마인드 멜드는 지성을 가진 생명체하고만 가능합니다.”

“내 질문이 비논리적이라고? 그럼 그 비논리적인 행동을 하고 있던 너는 뭔데? 평소엔 나보고 논리적이지 못하다고 하더니만.”

커크의 비꼬는 말에 스팍은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설마 화났나 싶어 뜨끔한 커크가 눈치를 보고 있는데, 옆에서 스팍이 다시 말했다.

“…비논리적이긴 합니다만, 왠지 엔터프라이즈와 손을 맞대고 있으면 그녀와 교감하고 있다는 기분이 듭니다. 워낙 불확실한 감정이라 저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네 입에서 그런 감성적인 말이 나올 줄은 몰랐는데? 아무튼 함선이랑 교감해 본 기분이 어때? ‘그녀’가 너에게 뭐라고 하는데?”

스팍이 선뜻 대답하지 못 하고 뜸을 들였다. 생각을 정리하는 건지 대답하고 싶지 않은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커크는 그저 기다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슬슬 눈꺼풀이 무거워질 무렵에야 스팍이 입을 열었다.

“저는 그녀에게 부탁했습니다. 이번에도 모두가 무사히 귀환할 수 있게 해달라고. 그리고 그녀 역시 어느 곳 하나 망가지는 일 없이 무사했으면 좋겠다고. 그녀가 제게 대답을 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최선을 다하겠다고 제게 말한 것 같습니다. 저는 그렇게 느꼈습니다. 이런 행동과 생각이 비논리적이란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저는 그녀에게 기대게 됩니다. 저는 그녀와 함께 있을 때 안심이 되고 편안합니다. 마치 집에 온 것처럼.”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 이해해.”

어느새 어둠에 익숙해진 눈은 점점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다. 익숙한 브릿지의 천장이 보였다. 엔터프라이즈는 모두에게 훌륭한 동료이자 동반자였다. 모두를 어머니의 땅으로 돌려보내 주는 친절한 인도자. 그리고 기댈 곳 없던 스팍에게 기꺼이 자신을 열어 준 상냥한 보호자. 커크는 비로소 스팍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스팍, 돌아올 곳이 꼭 ‘장소’일 필요는 없잖아? 내가 너의 돌아올 장소가 되어주고 싶어. 물론 넌 내가 마음에 안 들겠지만 그건 상관없어. 그리고 너도 알다시피, 나도 지금 가족이 없거든. 하지만 엔터프라이즈가 네 가족이듯 엔터프라이즈는 내 가족이기도 하고 그럼 너랑 나도 서로 가족이니까. 그러니까 내 말은 네가 외롭거나 기댈 곳이 없다고 느낄 때면 나한테 기대도 된다는 소리야. 나도 너에게 기대도 될까? 우리가 서로에게 돌아올 장소가 되어주자. 그럼 나는 네가 이 땅이 너의 땅이라고 느껴질 때까지 곁에서 도와줄게.”

스팍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지만 커크는 상관없었다. 애초에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니니까. 설사 스팍이 싫다고 하더라도 커크는 이미 그러겠다고 생각했으니 이걸로 된 것이다. 이후로는 커크도 스팍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조용한 브릿지 안에서 두 사람은 누가 먼저인지도 모르게 어느새 잠이 들었다. 딱딱한 바닥인데도 이상하게 포근하고 따뜻했다.


가슴에 무언가 올라온 듯 묵직한 느낌이 들었다. 답답함에 커크가 설핏 잠에서 깼지만 쉽게 눈을 뜨지 못 했다. 그 순간 커크의 얼굴로 퍽 소리가 나며 무언가 떨어지자 커크는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온갖 욕을 하며 일어선 커크의 몸에서 커다란 가방과 옷가지 등이 우수수 떨어졌다. 그리고 범인은 바로 옆에 서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본즈.”

“그러는 너야 말로 왜 여기서 노숙하고 있는 거야, 짐?”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캡틴!”

“좋은 아침입니다, 캡틴!”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커크가 눈을 비비면서 침낭에서 완전히 일어났다.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팔짱을 낀 본즈를 비롯해서 많은 대원들이 동물원 원숭이를 보듯이 신기한 눈빛으로 커크를 둥글게 둘러싸고 있었다. 괜히 민망해진 커크가 무슨 구경거리라도 났냐며 짜증을 냈지만 누가 그 함장에 그 대원들 아니랄까 봐 다들 능청스럽게 승선 보고를 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다며 둘러댔다. 커크가 한숨을 쉬곤 오늘 승선 보고는 안 해도 된다고 하자 그제야 모두들 키득거리며 물러났다. 그렇게 둘만 남게 되자 본즈가 본격적으로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맨날 늦는다 구박했더니만, 이젠 아예 함선 안에서 자는 거냐? 하여간 네 녀석 잔머리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시끄러. 이게 다 스팍 때문…, 잠깐 그러고 보니 이 자식이?! 치사하게 난 안 깨우고 혼자만 일어나서 날 망신 준 거야? 이 망할 벌칸인이!”

“그게 무슨 소리야? 설마 스팍도 여기서 같이 잔 거야?”

“말하자면 기니까 그냥 넘어가주라. 근데 어떻게 알고 내 짐을 챙겨온 거야?”

“스콧이 어제 저녁에 갑자기 전화해서 알려줬어. 네가 엔터프라이즈로 바로 갈 것 같으니까 아침에 집에 들러서 네가 없다면 짐을 좀 대신 챙겨서 가져와 달라고 말이야. 대체 어제저녁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나중에 말해 줄게, 나중에! 스팍은 지금 어딨어?”

“저기, 지금 들어오네.”

“저 자식! 어이, 스팍!”

정말로 문이 열리며 스팍이 브릿지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커크가 당장 그쪽으로 달려가 스팍을 불렀다. 커크를 발견한 스팍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대답했다.

“캡틴, 일어나셨습니까?”

순간 커크는 입을 다물었다. 막상 스팍을 마주하자 쏘아붙이려던 말들이 쏙 들어가고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 출항하는 날이면 스팍은 항상 제일 먼저 엔터프라이즈에 도착해 있었다. 워낙 부지런해서 그런 거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출항 전날 엔터프라이즈와 함께 평온한 항해를 기원하며 밤을 보낼 줄은 몰랐다. 평소의 이성적인 스팍을 생각해보면 전혀 상상도 할 수 없었지만 진실은 그러했다. 아마 스콧이 귀띔해주지 않았다면 나 역시 알지 못 했겠지.

스팍은 분주히 돌아다니며 이륙할 준비를 돕고 있었다. 아마 오늘 아침에도 자신보다 일찍 일어나서 부지런히 일했을 것이다. 엔터프라이즈가 무사히 날아오를 수 있도록. 스팍은 엔터프라이즈를 돌아갈 집으로 생각하고 있고 또한 그녀를 무척 아끼고 있었다. 커크는 어젯밤 스팍이 했던 것처럼 브릿지의 벽면에 손을 가져다 대며 속삭였다. 엔터프라이즈, 우리가 무사히 탐사를 마칠 수 있게 도와줘. 그리고 모두가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올 수 있기를. 나도, 스팍도.

“짐! 뭐 하는 거야! 거기서 궁상떨지 말고 얼른 가서 유니폼 갈아입고 작업하는 거나 좀 도와!”

“악! 왜 등을 때리고 난리야! 안 그래도 가려고 했어!”

본즈에게 등 떠밀려 브릿지 밖으로 쫓겨난 커크가 투덜거리며 개인실로 향했다. 유니폼을 갈아입고 서서 거울을 보던 커크는 갑자기 착륙하던 날 자신을 배웅했던 스팍을 떠올렸다. 그리고 허겁지겁 다시 브릿지로 달려갔다. 브릿지에 들어가자 이번에도 어렵지 않게 그를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지정석에 앉아있었다. 커크가 성큼성큼 걸어가 허리를 숙여 스팍과 얼굴을 마주하며 말했다.

“스팍, 나 다녀왔어.”

뜬금없는 커크의 말에 스팍이 잠시 갸우뚱하며 생각하더니 곧 조용히 대답했다.

“…어서오세요, 캡틴.”

- 2013. 6. 8.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BL
추가태그
#단편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