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렉 2차 창작 단편 모음

[커크스팍] 그대, 모든 짐을 내게

그것은 스팍이 살면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 한 기이한 느낌이었다. 온몸이 무언가에 짓눌리는 듯 묵직했고 실내가 적정온도로 유지됨이 분명한데도 오한이 들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끼며, 스팍은 뻣뻣해진 몸을 어떻게든 움직여보려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눈꺼풀 역시 무척 무거웠으나 온 신경을 눈에 집중한 덕에 간신히 눈을 뜰 수 있었다. 그리고 스팍의 눈에 처음으로 보인 것은 자신을 향해 미소 짓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방 안은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새까만 어둠으로 뒤덮여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어머니의 모습만큼은 어둠 속에서도 똑똑히 보였다. 벌칸식 여성 복식을 갖춘 우아한 자태는 살아생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스팍은 어머니를 부르려 했으나 입에서 소리가 나질 않았고 손을 뻗고 싶었지만 손가락조차 움직여지지 않았다. 애처로운 목소리는 밖으로 나가지 못 하고 목 안에서만 계속해서 맴돌았다. 어머니, 어머니….

소리를 내지 않아도 들리는 걸까? 그녀가 조용히 다가오더니 손을 뻗어 땀에 젖은 스팍의 앞머리를 넘기며 이마를 쓸어주었다. 불안감에 허덕이던 마음이 손짓 몇 번으로 너무나 간단히 가라앉아버렸다. 손끝에서 전해져 오는 시원함에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낄 때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스팍,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지요? 무엇이 힘든 가요? 무엇 때문에 그렇게 아파하나요?’

어머니의 물음에 답하려는 듯 스팍의 입술이 달싹였지만 여전히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그리고 무척 이상하게도, 바로 옆에 바짝 붙어있는데도 어머니의 얼굴이 흐릿해서 잘 보이질 않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선명히 보였었는데, 어째서?

‘스팍은 자랑스러운 제 아드님입니다. 비록 벌칸은 고향을 잃었지만 아드님 덕분에 멸망의 위기에서 벗어나 새로운 싹을 틔웠잖아요. 스팍은 모두를 구한 영웅입니다.’

자신을 안심시키려는 듯 속삭이는 목소리는 어머니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었지만 그 속에서 스팍은 무언가 이질적인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걸 깨닫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인간은 벌칸인보다 체온이 높았기에 항상 어머니의 손길은 스팍에겐 따스했었는데, 지금 자신의 이마에 닿은 손은 너무나도 차가웠다. 스팍이 그 차가움을 감지하자, 척추를 따라 소름이 쫙 끼쳤고 몸은 더욱 심하게 짓눌렸다. 헐떡이는 스팍의 귓가에 어머니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그런데 스팍, 왜 나는 구해주지 않았나요?’

그 순간 어머니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스팍은 홀로 절벽 위에 서 있었다. 그곳이 벌칸 행성임을 깨닫기가 무섭게, 발아래부터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스팍이 딛고 있던 절벽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고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으로 그는 추락하고 말았다.

스팍이 정신을 차렸을 땐 자신의 침대 위였고, 온몸에 땀이 비 오듯 흘러 침대 시트를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벽면의 시계는 새벽 3시를 가리켰다.


“USS 엔터프라이즈 소속 캡틴 제임스 T. 커크, 파이크 제독님께 승선을 보고합니다.”

“그래, 준비는 잘 마쳤나?”

“순조롭습니다. 이제 출항만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부함장과 함께 보고하러 오지 않은 거지?”

출항 보고를 올리는 자리에 함장과 부함장이 함께 참석하는 게 관례이긴 했지만 사정이 있을 경우 둘 중 한 사람만 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들에겐 이상한 일이었다. 스팍이 자신에게 주어진 업무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더라도 결코 소홀히 하지 않는다는 걸, 두 사람 모두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난감해하는 커크의 얼굴로 미루어보아 스팍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하다고 파이크는 생각했다.

“그게…, 함께 오려고 했지만 부함장이 몸이 좋지 않아서 저만 오게 되었습니다.”

“몸이 좋지 않다고? 스팍이?”

파이크의 표정이 ‘너 지금 농담하는 거지?’라고 말하는 듯 일그러졌다. 커크가 잠시 머리를 긁적이더니 본인조차 얼떨떨해하며 말했다.

“네, 오늘 아침에 봤는데 안색이 좋지 않았습니다. 물론 본인은 극구 참석하겠다고 했습니다만, 저와 메디컬 치프가 말려서 쉬도록 조처를 했습니다. 지금쯤 닥터 맥코이에게 붙들려 이것저것 검사 받고 있을 겁니다.”

“이런, 많이 심각한가?”

“잘은 모르지만 탐사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닐 겁니다. 함장님도 잘 아시다시피, 워낙 튼튼하잖아요?”

스팍의 몸에 큰 이상이 있지는 않을 거란 점은 파이크 역시 동의하는 바였지만 그래도 걱정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오히려 신체적으로 이상이 있다면 스팍이 알아서 해결하겠지만, 반대로 다른 쪽의 문제라면…. 짐작 가는 부분이 있었다. 스팍은 내보이는 것에도 서툴렀지만 숨기는 것에도 서툴렀다.

“커크, 이번 탐사 때 스팍을 주시해보게. 내 생각에 지금 그에겐 도움이 필요할 지도 몰라. 자기 크루들의 문제에 신경을 쓰는 것 또한….”

“좋은 함장이라면 해야 할 필수 조건 중에 하나라고요? 그거라면 귀가 간지럽도록 들었으니 걱정 마시죠. 그리고 전 항상 제 크루들을 신경 쓰고 있으니까요.”

지겹다는 표정으로 응수하는 커크를 보자, 파이크는 자신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여전히 진심 어린 조언을 잔소리로 받아들이는 철없는 아들 같은 녀석이지만, 그 속에서 이젠 제법 믿을만한 함장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커크라면 어떤 문제라도 자신만의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으리라.

파이크의 조언이 없더라도 커크는 스팍과 따로 얘기를 나눠 볼 작정이긴 했다. 보고를 올리기 전 잠깐 만난 스팍은 한눈에 봐도 안색이 안 좋은 데다가 나사가 하나 빠진 듯한 모습이었으니까.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스팍을 지켜봤지만 이토록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은 단언컨대 한 번도 없었다. 물론 커크가 잠시나마 죽어있었을 때 스팍이 이성을 잃었던 적이 있지만 커크는 직접 보지도 못 했을 뿐더러 그때와 느낌이 많이 달랐다. 커크의 눈에 지금의 스팍은 손대면 부서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USS 엔터프라이즈가 대기 중인 격납고에선 막바지 출항 준비가 한창이었다. 커크는 게이트 근처에서 의료 장비를 체크 중인 본즈를 발견하고 빠르게 다가갔다.

“본즈, 스팍의 검진은 끝난 거야? 상태가 어때?”

본즈가 힐끗 커크를 한 번 쳐다보더니 패드를 몇 번 두드렸다. 패드엔 오전에 진행했던 스팍의 건강 검진 기록이 나타났고 본즈는 패드를 커크 쪽으로 내밀며 설명했다.

“보다시피 특별히 심각한 증상은 없지만 체온과 혈압이 평소보다 조금 높고 약간의 두통과 피로감을 느끼는 듯해. 평소 자기관리를 잘 하는 녀석 답지 않아서 이유를 물었더니 요즘 잠을 통 못 잔다고 하더군.”

“그럼 불면증이란 소리야?”

“아마도. 더불어 수면장애로 인한 호흡 질환이 동반되는 걸로 예상되고, 초기 우울증 증세도 있는 것 같군. 내가 정신과 전문의는 아니라서 확실한 판단을 내릴 수는 없지만. 아무튼 탐사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라서 승선 허가는 내려두었어. 임시방편으로 수면제와 항우울제 처방을 내리긴 했는데, 무엇보다 일상생활에서 안정을 취하는 게 중요하니까 스트레스 안 받게 신경 좀 써 줘. 절대 무리시키지 마!”

“그러니까 불면증을 동반한 우울증세라 이거지? 벌칸인에게 우울증이라니, 상상도 못 한 병명인데…. 아니, 멀쩡하던 녀석이 갑자기 대체 왜? 뭐 짐작 가는 거라도 있어?”

“몰라. 안 그래도 왜 잠을 못 자는 건지 이유를 물었는데, 속 터지게 입만 꾹 다물고 있으니 난들 알겠냐? 그 녀석 성격상 거짓말은 못 할 테니 말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겠지. 이래서 고집 센 환자는 질색이야! 무슨 말을 해야 도와줄 거 아냐!”

“워워, 그렇다고 너무 몰아붙이진 마. 내가 따로 불러내서 한 번 알아볼게. 아무튼 일등 항해사 업무엔 지장이 없다는 거지?”

“장담 못 해. 그 녀석 아까 승선할 때는 게이트에 머리를 부딪치기도 했다고.”

“…그게 왜?”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겠어? 제임스 커크나 할 법한 짓을 스팍이 하고 있잖아! 그 자식 어딘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된 게 분명해.”

“갑자기 왜 날 걸고넘어지는 거…, 잠깐! 평소에 내가 그런 이미지냐?!”

커크가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지만 본즈는 아랑곳 않고 다시 의료 장비를 체크하는 일에 몰두했다. 잠시 투덜거리더니 커크도 제 할 일을 하러 자리를 떴다.

이후 엔터프라이즈의 항해는 순조로웠지만 날이 갈수록 창백해지는 스팍의 얼굴과 마주칠 때 마다 커크는 마음이 불편해졌다. 다른 일을 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 늘 몸이 좋지 않은 스팍이 신경 쓰였다. 게다가 스팍의 평소답지 않은 모습은 커크 뿐만 아니라 모두를 불안하게 하는 건지 함선 내부는 눈에 띄게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물론 스팍은 몸이 좋지 않다고 해서 결코 맡은 일을 소홀히 처리하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히 전에 비해 커크를 비롯한 다른 크루들의 작업을 지적하는 횟수가 점점 줄더니 이젠 업무상 꼭 필요한 말이 아니고서야 말 한 마디 꺼내질 않았다. 다른 크루들 역시 스팍에게 무언가 조언을 구하려다가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머뭇거리다 그만두기 일쑤였다. 참다못한 체코프가 확신 없이 일을 진행하는 것 같아 요즘 부담이 너무 크다며 커크에게 징징거리기도 했었다. 그 점엔 커크 역시 동감하는 바였다. 본즈가 나름 애써주고 있었지만 스팍의 상태는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고 다들 스팍을 걱정하면서도 막상 다가가진 못 하고 어물쩍거리기만 했다. 천장을 든든하게 받쳐주던 기둥 하나가 곧 무너질 것처럼 흔들리는 걸 보고 다들 불안해하면서도 누구 하나 손 써볼 생각도 하지 못 하는 꼴이었다. 불안감은 순식간에 전염되어 온 함선에 퍼져 있었다. 커크는 정말 이런 분위기는 딱 질색이었다. 이젠 더 이상 미룰 수만은 없었다.

엔터프라이즈는 탐사 목표 행성으로 항행하던 중 휴식차 안전지대의 행성에 잠시 착륙했다. 우주 공간을 배회하는 것이 아닌 직접 땅을 밟고 공기를 마시는 행위는 별거 아닌 것 같아도 안정감을 주었다. 그리고 이건 커크가 의도한 바이기도 했다. 커크는 안전한 행성에 착륙 후 자유 시간을 갖도록 지시를 내린 다음 스팍만 조용히 따로 불러내었다. 스팍은 별다른 불만 없이 커크를 따라 나왔지만 어딘가에 정신이 팔린 듯 시선은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간 수없이 함내에서 스팍에게 친근하게 다가가 대화를 시도했지만 성과가 없었기에 오늘은 좀 강압적으로 나가볼 생각이었다. 파리해진 스팍을 다그치는 건 꽤 마음 아픈 일이었지만 이대로 뒀다간 일이 더 커질 게 분명했다.

“커맨더, 나한테 집중해.”

“…무슨 용건이십니까, 캡틴?”

“지금 네 상태에 대해서 정확히 알아야겠어. 닥터 맥코이는 네가 불면증을 비롯한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하던데 너는 원인을 알고 있으면서도 말을 안 하잖아. 요즘 네 태도에 문제가 많다는 걸 스스로 잘 알고 있겠지? 네가 자꾸 이런다면 나도 강압적으로 나갈 수밖에 없어. 이건 함장으로서 명령이야. 대답하지 않는다면 명령 불복종으로 간주하겠어. 무슨 문제가 있는 건지 솔직하게 말해.”

상하관계를 확실히 인지시킨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전과 다르게 스팍이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여전히 쉽게 입을 열지 못 하고 머뭇거리기만 했다. 커크가 잠자코 기다렸지만 스팍은 끝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스팍의 눈동자가 점차 불안으로 물들어 흔들렸고 양손은 아프도록 주먹만 꽉 쥐고 있었다. 제기랄, 커크가 결국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한 손으로 눈을 가렸다. 정말이지 이런 방식은 못 해 먹겠어! 커크가 스팍에게 성큼 다가서서 양손으로 어깨를 강하게 붙들며 억지로 눈을 맞췄다. 스팍이 깊게 숨을 들이쉬며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커크가 달래듯 자상하게 속삭였다.

“스팍, 말을 해야 널 도와주지. 네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든 절대 아무한테도 발설하지 않겠다고 약속할게. 네가 원한다면 본즈에게도 비밀로 하겠어. 그러니 무슨 말이라도 좀 해 봐, 제발. 난 널 돕고 싶어.”

“실은, 어머니가….”

“캡띤, 캡띤!”

스팍이 입을 달싹이며 막 말을 꺼내던 참이었다. 커크와 스팍이 서 있던 곳으로 체코프가 다급하게 뛰어오며 커크를 불렀다. 스팍은 도로 입을 닫았고 커크는 한숨을 쉬며 스팍의 어깨를 붙잡은 손을 떼고 체코프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야? 시답잖은 이유로 내 휴식을 방해했다면 체코프, 넌 오늘 밤 당직을 서게 될 거야.”

“네?! 그게 무슨 부당한…. 아니, 그것보다 이것 좀 봐주세요! 긴급 상황입미다!”

“대체 뭔데 그러는….”

체코프가 내민 패드를 건네받은 커크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이 행성에 ‘이것’이 있다는 정보는 분명히 없었는데…!

“체코프, 이걸 어디서 찾았지? 자세히 설명해 봐!”

“원래 어떤 행성이든 착륙 시 행성의 대기 상태를 체크하는 게 규칙이기에, 제가 체크를 하고 있었습미다. 그런데 결과를 보니 그 물질이 포함됐다고 나와서…. 이게 사실이라면 비상 상황입미다, 캡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졌다. 패드 화면에 떠오른 원소 기호 중 어느 하나가 불길한 붉은 글씨로 번쩍이고 있었다.

“스팍, 당장 비상 회의 소집해. 단, 비밀리에 조용히 각 부서 책임자들만 불러 모아. 체코프는 정말 이 행성에 오메가 분자가 있는 게 확실한 건지, 만약 그렇다면 주요 분포 위치가 어디인지 알아보고 다시 연락하도록. 어서, 빨리 움직여!”

오메가 분자(Omega Molecule). 존재하는 물질 중 가장 강력하다고 알려진 매우 불안정한 분자이며, 만약 적절하지 못 하게 배열된다면 공간을 파괴하고 워프 항행을 불가능하게 만들 수도 있는 매우 위험한 물질이다. 스타플릿 규정 중 하나인 오메가 디렉티브(Omega Directive)는 오메가 분자를 감지하게 되면 최우선 규정이 되는데, 이 오메가 디렉티브를 받은 함장은 어떤 수단이든 동원하여 오메가 분자를 모두 파괴해야만 한다.

한마디로 USS 엔터프라이즈는 비상사태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메인 브릿지의 주요 장교와 각 부서의 최고 책임자만이 모인 엔터프라이즈의 회의실엔 엄숙함이 감돌았다. 오메가 분자 감지로 인한 갑작스러운 비상사태에 다들 긴장을 감추지 못 했다. 사실 이 회의는 형식적인 자리일 뿐, 앞으로의 행동은 명확했다. 이유를 불문하고 오메가 분자를 남김없이 파괴하는 것.

“스팍,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지침에 대해 브리핑해 봐.”

“알겠습니다, 캡틴. 모두 주목해주시길 바랍니다. 탐사 중 오메가 분자가 감지될 경우 즉각 스타플릿 본부에 연락을 취해야 하며 이때 자동으로 오메가 디렉티브가 발동 됩니다. 이 경우 프라임 디렉티브를 제치고 오메가 디렉티브가 최우선 규정이 되며, 오메가 분자가 모두 파괴되었음이 확인될 경우 오메가 디렉티브는 해제되며 다시 프라임 디렉티브가 최우선 규정이 됩니다.”

“파괴 도중 오메가 분자가 폭발할 수도 있습니까? 이 경우 파괴력은 어느 정도죠?”

“끔찍한 소리 말아요! 잘못 건드려 폭발할 시 행성이 통째로 날아가 버리는 것은 당연하고 공간까지 파괴해서 주변이 몽땅 워프 항행 불가능 지역이 되어버립니다. 최악의 경우 폭발에 휘말려 소멸하거나 살아남더라도 주변 우주를 배회하며 구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러니 최대한 신속하고 신중하게 처리해야 합니다!”

스팍의 간단한 브리핑이 끝난 후 어느 장교의 질문에 스코티가 질색하며 대답했다. 회의실 안엔 다시 불길한 침묵이 감돌았다. 이를 지켜보던 스팍이 차분히 말했다.

“일단 체코프 소위가 조사 결과를 가져올 때까지 대기해야 합니다. 행성 대기(大氣) 입자 검사 결과, 오메가 분자의 비율이 높지 않았으니 다른 오메가 분자가 더 이상 발견되지 않는다면 비교적 간단하게 임무를 수행할 수 있습니다. 만약 오메가 분자가 과도하게 밀집된 장소가 존재한다면 좀 더 복잡해지겠지만 이 역시 과학적으로 안전하게 파괴할 수 있는 장비를 갖추고 있으니 무리 없이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스팍의 말에 과열됐던 분위기는 조금 진정되었다. 다들 불안해하는 상황에서 유일하게 차분해 보이는 스팍의 존재는 다른 사람들을 안도하게 했다. 위급한 상황이 닥치니 스팍은 오히려 잡생각을 잊은 듯 평소와 같이 논리적인 모습을 보였다. 물론 여전히 안색이 파리하긴 했지만 불면증이 오기 전 본래의 스팍으로 돌아온 것처럼 느껴졌다. 커크는 저도 모르게 안도하며 미소 지었다.

그때였다. 탐사를 나갔던 체코프와 술루가 회의실에 도착했다는 알림이 스피커를 통해 흘러 나왔다. 일순간 회의실의 사람들은 모두 긴장한 채로 문을 주시했다. 커크의 들어와도 된다는 허가가 떨어지자 조심스럽게 문이 열리더니 체코프와 술루가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을 본 순간, 회의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림과 불안한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술루의 표정은 굳어있었으며, 체코프는 하얗게 질려 있었다. 딱 봐도 결과는 뻔했다.

“술루 대위, 체코프 소위, 탐사 결과를 보고하도록.”

“Aye, 캡틴. 먼저 저와 체코프 소위는 오메가 분자 탐지기를 통해 해당 행성에 위치한 오메가 분자의 근원지를 알아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메가 분자의 근원지는 행성 지표면에서도 깊숙이 위치한 핵에서 흘러나오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술루의 설명에 몇몇 과학 장교의 안색이 급격히 창백해졌다. 커크는 반사적으로 스팍의 상태를 먼저 확인하고는 입을 다물지 못 했다. 스팍이 지금과 비슷한 얼굴을 하는 걸, 커크는 예전에 본 적이 있었다. 벌칸 행성이 소멸하는 걸 목격했던 바로 그때와 똑같은 표정이었다. 영문을 모르는 다른 장교들마저 불안함에 웅성거렸다. 커크가 회의실 테이블을 주먹으로 쿵 소리가 나게 내려치며 소리쳤다.

“그게 무슨 소리지? 누가 자세히 설명해 봐!”

“제가 하겠습니다, 캡띤. 그러니까…, 핵에서 감지 된 오메가 분자는 위험수치가 상당히 높긴 하지만 다행히 엔터프라이즈가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을 넘지는 않았습미다. 따라서 물리적으로 제거가 가능합미다. 하지만 핵에 너무 가까이 위치해이써서, 핵의 손상을 피할 쑤는 없게 되었습미다. 최악의 경우…, 아니, 상당히 높은 확률로 행성의 소멸이 예상됩미다. 제 소견은 여기까지입미다….”

체코프의 설명이 끝나자 회의실은 마치 폭풍전야처럼 불길한 침묵만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침묵은 길지 않았다. 이후 한 장교가 말을 꺼내기 시작하면서 모두 정신없이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럼 이러나저러나 행성의 소멸을 피할 수는 없다는 겁니까? 엔터프라이즈가 무사할 확률은 어떻게 되는 거죠?”

“이 정도로 위험한 작업이라면 본부에 연락해서 다른 전문 함선에 임무를 양도할 수는 없습니까?”

“대체 뭘 들은 겁니까? 아까 체코프 소위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오메가 분자가 위험 수준이긴 하지만 엔터프라이즈가 충분히 처리할 만하다고요! 어차피 오메가 분자가 발견된 이상 본부에 보고를 올려야 하는데 엔터프라이즈가 처리 가능한 수준이라면 당연히 오메가 디렉티브가 발동될 겁니다.”

“그럼 선택의 여지가 없군요. 오메가 분자 파괴 작업을 실행해야….”

“안 됩니다!!”

스팍의 다급한 외침에 모든 장교들은 일제히 말을 멈추고 어리둥절한 얼굴로 스팍을 쳐다보았다. 모두의 주목을 받으며 스팍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행성은 토착민을 비롯한 지성체들이 많이 공존하고 있는 행성입니다. 이대로 오메가 분자를 파괴해서 행성이 소멸해버리면 이들은 모두 멸망하게 됩니다. 이는 도덕적으로 매우 부당합니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제야 모든 장교들은 이것이 단순히 엔터프라이즈가 안전하게 오메가 디렉티브를 무사히 수행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한 행성 내 모든 생명체의 생존 여부가 달려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평소의 냉철한 부함장답지 않게 간절한 스팍의 목소리는 모두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다들 스팍이 어째서 이렇게까지 행성의 멸망에 집착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이 사태의 무게가 더욱 피부로 느껴졌다.

“그렇다면 토착민과 생명체들을 다른 행성으로 옮기는 게 어떻습니까? 그럼 작업 도중 행성이 소멸하더라도 희생을 줄일 수 있을 겁니다.”

“안 됩니다. 이곳 토착민들을 이주시키려면 함선을 드러내는 것이 불가피한데, 이 행성은 아직 문명 수준이 미개한 M급 행성입니다. 이 경우 프라임 디렉티브를 어기게 됩니다. 아무리 오메가 디렉티브가 최우선이라지만 프라임 디렉티브를 어겨서도 안 됩니다.”

“그럼 이대로 생명체들이 행성과 함께 소멸하는 걸 눈 뜨고 볼 수밖에 없습니까? 심지어 우리가 직접 소멸시키는 거나 마찬가지잖습니까!”

“그렇다고 오메가 디렉티브를 어길 겁니까? 오메가 분자는 행성 연합에서 가장 민감한 사안입니다! 이를 어겼다간 저번 프라임 디렉티브를 어긴 사태와는 후폭풍이 차원이 다를 겁니다.”

“그만! 다들 진정해! 지금 너무 과열되어 있잖아! 모두 의견이 갈린다는 건 잘 알겠어. 지금부터 자기 의견을 피력하고 싶다면 나한테 먼저 발언권을 얻도록 해. 좋아, 스콧 소령, 발언하도록.”

“어차피 이 문제는 뜨거운 감자입니다. 어떤 선택을 하든 도덕적으로 혹은 논리적으로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으니 이 이상 논쟁은 무의미합니다. 어쨌거나 최종 결정을 내리는 것은 함장님이 하셔야 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 전에 꼭 거쳐야 할 과정이 있습니다.”

회의실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스콧에게 꽂혀 있었다. 다들 한껏 긴장한 상태로 스콧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스콧이 한 번 숨을 고르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원칙적으로 오메가 디렉티브를 수행하기 전 해당 함선 소속의 과학 장교의 최종 허가가 필요합니다. 엔터프라이즈에서 가장 계급이 높은 과학 장교는….”

스콧이 차마 말을 끝마치지 못 하고 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회의실에 있는 모든 이가 한 사람을 돌아보았다. 커크는 테이블에 팔을 괸 채로 이마를 짚고 중얼거렸다. 맙소사…!

모두의 시선이 향한 곳엔 망연자실한 표정의 스팍이 앉아있었다.


현재 상황에서 커크가 스팍에게 해줄 수 있는 건 그저 시간을 조금 벌어주는 것뿐이었다. 커크는 스팍이 최종 결정을 내릴 시간을 주겠다고 하며 회의를 중단했고, 오늘 회의에 참석했던 모든 장교들에게 입단속을 철저히 시켰다. 괜히 함선 내의 다른 대원들까지 사태를 알게 되면 불안감을 조성할 수 있다는 이유였다. 사실 커크는 스팍이 오메가 분자 파괴를 승인하지 않더라도 뒷말이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기도 했다. 스팍에게 조금이라도 부담을 덜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그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지게 한 것 같아 커크는 속이 쓰렸다.

스팍이 어떤 결정을 할지는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평소의 논리적인 스팍이라면 지체 없이 규정을 따라 오메가 디렉티브를 발동시킬 것 같았지만 이건 스팍에겐 무척 예민한 행성의 존망이 달린 문제였다. 커크는 몇 해 전, 니비루 행성의 멸망을 막았을 때 스팍이 위험한 역할을 자처하면서까지 어떻게든 행성을 살리려 하는 걸 떠올렸다. 분명 아무 상관이 없는 행성인데도 스팍은 그토록 민감히 반응했었다. 하지만 이번엔 그때와는 급이 달랐다. 과학 장교인 그가 오메가 분자의 위험성을 모르지는 않으리라.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였다. 커크 조차도 그러한데, 스팍에게 결정을 맡겨야 하다니. 운명이란 이렇게나 잔혹했다.

그날, 커크는 밤늦게 스팍의 개인실로 향했다. 가뜩이나 몸이 좋지 않은 스팍인데, 정신적으로 큰 충격까지 받았으니 상태가 몹시 걱정돼서 견딜 수가 없었다. 커크 역시 밤새 고민했지만 답은 쉽게 나오질 않았고 이는 스팍 역시 마찬가지일 테니, 그렇다면 짐을 나누고 싶었다. 어떤 결정이든지 함께 내린다면 스팍의 죄책감이 조금은 덜할 지도 모르니.

마침내 스팍의 개인실 문 앞에 도착한 커크가 잠시 심호흡을 하고는 자신의 방문을 알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방 안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불이 켜져 있는 것으로 보아 스팍이 있는 건 분명한데, 대답이 없으니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싶어 초조해졌다. 결국 커크는 안 된다면 문이라도 부술 요량으로 손잡이를 잡았는데 어째서인지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커크가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갔다.

“스팍? 왜 그러고 있는 거야?”

스팍은 방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무언가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스팍이 안고 있는 건 오메가 분자 탐지기였다. 스팍은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서는 초점 없이 멍하니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커크가 방 안으로 들어왔는데도 모르는 것 같았다.

“스팍?”

커크가 다시 한 번 불렀지만, 스팍은 여전히 한 곳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커크가 스팍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따라갔지만 그곳은 아무 것도 없는 하얀 벽면이었다. 하지만 무엇이 있기라도 한 듯 스팍은 그곳에서 시선을 떼질 못 했다. 커크는 순식간에 소름이 끼쳤지만 애써 찝찝한 기분을 떨쳐내려 성큼성큼 스팍에게로 걸어갔다. 스팍의 바로 앞에서 커크가 몸을 수그리고 앉았지만 스팍은 여전히 커크가 보이지 않는 듯, 한곳만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가까이 다가가자 커크는 스팍이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어머니…. 어머니, 그러지 마세요….”

“스팍,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어머니라니!”

“제가 잘못했어요, 어머니…. 그러니까 이제 그만….”

“너 지금 뭐 하는 거냐고! 여긴 너랑 나 밖에 없어!!”

커크가 스팍의 어깨를 붙잡고 강하게 흔들었지만 스팍은 고개가 흔들리는 와중에도 한쪽만을 쳐다보았다. 스팍의 어깨를 붙잡은 손에서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대체 뭘 보고 있는 건데. 뭘 그렇게 무서워하는 건데! 커크가 스팍을 미친 듯이 흔들어대고 양손으로 얼굴을 붙잡아 자신의 얼굴로 바짝 가져다 댔지만 여전히 스팍은 초점 없이 멍한 눈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빌어먹을, 커크가 스팍의 얼굴을 놓고 중얼거리더니 한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힘껏 스팍의 뺨을 후려쳤다.

손바닥이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그렇게 힘껏 내리쳤는데도 스팍은 고개가 살짝 돌아갔을 뿐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 했다. 커크는 이를 악물며 주먹으로 스팍의 얼굴을 강타했다. 벽에 주먹질을 하는 것 마냥 양손이 욱신거렸지만 그래도 쉬지 않고 주먹질했다. 몇 번이나 내리쳤을까, 맞을 때마다 좌우로 휘둘리던 스팍이 움찔하더니 이내 눈을 깜빡였다. 커크가 내리꽂으려던 주먹을 멈추자 스팍이 삐걱거리던 고개를 돌려 커크를 바라보았다. 처음으로 스팍과 시선이 얽혀들었다. 커크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주먹을 내려놓았다.

“짐….”

“그래, 이제야 내가 보이냐?”

초록색 피가 맺힌 스팍의 입술 사이로 자신의 이름이 흘러나오자 커크가 안도하며 웃었다. 그리고는 스팍의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무래도 손가락뼈에 금이라도 간 건지 통증이 느껴졌다. 커크가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양손을 살피고 있는 걸 스팍은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그 광경을 힐끔 본 커크가 말했다.

“네가 그렇게 멍청한 얼굴을 할 수 있을지는 몰랐는데. 기념으로 사진이라도 찍어두고 싶은 걸. 두고두고 놀려먹을 수 있게.”

습관처럼 농담을 걸었지만 딱히 어떤 반응을 기대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커크의 예상과는 다르게, 스팍의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조금씩 눈물이 차올랐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커크가 무척 당황하며 더듬거렸다.

“아, 아니, 그냥 농담이었어! 내가 뭘 어쨌다고 갑자기 울고 그래. 혹시 내가 때린 게 아팠냐? 아씨, 그래도 이건 나도 아팠으니까 비긴 걸로 치면…. 알았어, 내가 미안해! 그러니까 울지 마. 왜 울고 그러냐….”

“짐, 저는 못 하겠습니다.”

“…뭐?”

스팍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고개를 들며 말했다. 여전히 불안한 듯 흔들리는 눈동자였지만 커크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스팍이 정신없이 중얼거렸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원칙대로라면 오메가 디렉티브를 따라야 하지만 그럼 행성이 소멸하고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됩니다. 저는 다시는 어떤 행성이든 소멸하는 걸 보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메가 디렉티브를 무시한다면 저는 처벌받을 것이고 이는 불명예스러운 일입니다. 저는 새로운 벌칸 행성과 모든 벌칸인을 대표해서 지구에 와 있는데 문제를 일으켰다간 벌칸인들에게 불이익이 갈 것입니다. 이대로는 아버지와 다른 벌칸 장로들을 뵐 면목이 없습니다.”

“…스팍, 진정해.”

“하지만 오메가 디렉티브를 실행한다면 전 제 손으로 한 행성을 소멸시키게 됩니다. 저는…! 또다시 그런 일을 저지르고도 아무렇지 않게 살 수 없습니다. 어머니…, 어머니께서 절 원망하실 겁니다. 어머니를 구하지 못 했는데…, 절 원망하고 계세요. 이대로는 눈을 감아도 어머니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볼 자신이…, 저는 어떡해야…. 짐, 저는 어떡하면 좋습니까? 어떻게 하면 어머니가 저를 용서해 주실까요? 제가 어떻게 해야…!”

“스팍! 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어머니가…, 절 원망하셔서…. 제가 잠들면 항상…, 어머니가 저를 데려가려 해요…! 지금도 저기서 저를…!”

“그만해! 네 어머니는 죽었어!!”

커크의 외침에 스팍이 중얼거림을 멈추고 움찔거렸다. 스팍의 겁에 질린 눈동자가 커크를 향했다. 커크는 씩씩거리면서 스팍의 얼굴을 붙들고 계속해서 소리쳤다.

“네 어머니는 돌아가셨어! 죽은 사람은 다시 돌아오지 않아! 네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네 눈으로 직접 확인했잖아. 어머니는 돌아가셨어!”

“하지만 저기에…, 계속 저기에….”

“그건 네 어머니가 아니야! 너 뭘 보고 있는 건데, 이 멍청아! 그렇게 똑똑하던 녀석이 왜 이러고 있어! 네 어머니가 널 원망할 리가 없잖아! 너를 죽이려 하는 건 네 어머니가 아니야! 네가 뭘 보든 그건 진짜가 아니라고! 지금부턴 나만 봐!”

커크가 분에 못 이겨 소리치다 숨이 차는지 이내 헐떡거렸다. 스팍은 물기 가득한 눈으로 커크를 똑바로 마주했다. 아직도 분이 안 풀렸는지 커크가 스팍의 얼굴을 바짝 당기더니 또다시 악을 썼다.

“너 왜 그런 생각하는 거야! 네가 왜 벌칸인을 책임지고 있어! 누가 너한테 그러라고 했어?! 너 혼자 멋대로 왜 그러는 건데! 아무도 너한테 벌칸의 운명을 맡기지 않아, 탓하지도 않고! 너는 지금 살아있는 벌칸인들을 구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할 만큼 했어, 이 멍청아! 그리고 넌 내 부함장이잖아! 너는 내 부하잖아! 그러니까 넌 나만 신경 쓰면 돼! 나랑 엔터프라이즈만 신경 쓰고 벌칸 행성은 거기 벌칸인들이 알아서 하라고 해! 네가 왜 거기까지 책임을 느끼는 건데! 네가 책임져야 할 건 나 밖에 없다고, 바보 같은 자식! 넌 나만 생각하면 돼, 알았어?”

“짐…, 저는….”

“그리고 너 왜 나한테 아무 말도 안 하는 건데…. 그렇게 힘들었으면 나한테 힘들다고 얘기하면 좋았잖아. 내가 너 힘들다고 하면 잡아먹기라도 하냐? 혼자 잠도 제대로 못 자고 환영이 보일 정도로 힘들어했으면서 나한테 한마디도 안 하고…. 너한테 내가 그거 밖에 안 돼? 나쁜 자식…! 날 부하가 우울증에 걸리도록 내버려 둔 무능력한 함장으로 만들지 마! 하여간 넌 정말 다루기 어려운 부하야. 벌칸인 주제에 귀신을 보질 않나 우울증에 걸리질 않나, 사람들이 알면 다 비웃을 거야.”

“미안합니다, 짐.”

스팍이 눈물범벅인 고개를 푹 숙이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커크에겐 충분히 진심이 전해져서 커크는 그제야 배시시 웃었다. 그러던 중 잠시 곰곰이 생각하더니 커크가 스팍의 품에 들려있던 오메가 분자 탐지기를 뺏어 들고 그대로 힘껏 바닥으로 던져버렸다. 말릴 새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스팍이 얼떨떨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자 커크가 씨익 웃어 보이고는 부서진 기계를 신나게 밟아버리기 시작했다.

“캡틴! 뭐 하시는 겁니까!”

“우린 오늘 아무 것도 못 본 거야.”

“…네?”

“내가 오메가 분자 탐지기를 부숴버렸어. 그래서 우린 오늘 이 행성의 대기 중 입자 성분을 조사하지 못 했고, 아무 것도 알아내지 못 했어. 새롭게 알아낸 것이 없으니 본부에 보고할 것도 없어. 따라서, 우린 아무런 명령도 받지 않았어. 오늘 밤까지 푹 쉬고 내일이면 다시 목적지를 향해 항해할 거야. 그러니까 지금은…, 일단 푹 자면 돼.”

스팍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얻어맞아서 입술은 터지고 뺨은 붓고, 얼굴은 온통 눈물범벅에 땀에 젖어서 앞머리도 엉망이었지만 바보같이 웃음이 나왔다. 사실 웃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서 자신이 지금 웃고 있는 건지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이렇게 웃는 게 맞는 건가 싶었지만 앞에서 밝게 웃고 있는 커크의 표정을 최대한 따라서 웃어 보았다. 어째서인지 올라간 입꼬리가 떨리고 눈에서 다시 눈물이 차올랐지만 웃고 싶은 기분이었다. 지금이라면 감정이 흘러넘치게 내버려 두어도 괜찮을 것이다.

커크가 우는 건지 웃는 건지 모를 얼굴을 하는 스팍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서툴지만 열심히 등을 토닥여주었다. 커크가 귓가에 중얼거린 말을 마지막으로 스팍은 서서히 잠에 빠져 들었다.

“스팍, 네 어머니는 너를 자랑스러워하셨을 거야.”


어린 스팍은 오늘도 또래의 벌칸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았다. 인간의 피가 섞였다고, 인간의 눈을 하고 있다고 하면서 놀리고 폭력을 휘둘렀다. 스팍은 부당하다며 맞서고 싶었지만 여기서 감정을 내보였다간 역시 인간의 아이라 그렇다며 또다시 놀림당할까 봐 꾹 참았다. 하지만 억울함은 어쩔 수가 없어서, 참다 참다 결국 어머니에게 달려갔다. 어머니는 그런 저를 안쓰럽게 보면서도 따뜻하게 안아주셨다.

‘스팍,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지요? 무엇이 힘든 가요? 무엇 때문에 그렇게 아파하나요?’

‘어머니, 다른 아이들이 제가 인간의 핏줄이라고 오늘도 저를 괴롭혔습니다. 매우 부당하지만 저는 이를 반박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피가 천한 것입니까?’

‘그럴 리가요. 스팍은 엄연히 벌칸인이고 인간의 핏줄 또한 천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저는 매우 자랑스럽습니다. 스팍은 전 우주를 통틀어 하나뿐인 벌칸과 인간의 혼혈이고 존재 자체만으로 평화와 화합의 상징인 걸요. 전 그런 아드님이 무척 자랑스럽습니다.’

‘정말 저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십니까?’

‘그럼요. 스팍은 자랑스러운 제 아드님이십니다. 언젠간 벌칸을 위해 큰일을 하실 거예요. 모두에게 존경받고 사랑받으실 겁니다.’

어린 스팍은 어머니의 품에 더욱 파고들었다. 어머니는 그런 스팍을 따스하게 안아주셨다. 벌칸인보다 따뜻한 인간의 체온은 언제나 스팍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어머니가 스팍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속삭여 주셨다.

‘스팍, 자랑스러운 제 아드님. 사랑받으실 겁니다. 행복하실 겁니다.’


스팍이 눈을 떴을 땐 자신의 침대 위에 얌전히 이불을 덮은 채였다. 잠시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가지고 멍하니 천장을 향해 눈을 끔벅이다가 순식간에 잠이 확 깨며 벌떡 일어났다. 시계는 이미 오전 11시를 넘어있었다. 허둥지둥 일어나 순식간에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스팍은 브릿지로 달려가면서 자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각이라니! 내가, 내가 지각이라니!

브릿지로 들어가는 문 앞에 멈춰서 스팍은 잠시 앞머리와 옷매무새를 정돈하고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Commander on the bridge!”

스팍이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체코프가 기다렸다는 듯 소리쳤고, 브릿지의 모든 이들이 일제히 그쪽을 돌아보았다. 커크가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지각생이 드디어 도착했네. 이럴 줄 알았으면 벌칙을 정해놓을 걸 그랬어. 지각하면 앞머리 자르기나 눈썹 밀기, 뭐 이런 것들. 지금부터라도 시작할까?”

“제 의견을 물으시는 거라면, 저는 상관없습니다, 캡틴. 두 번 다시 제가 지각할 일은 없을 테니까요.”

“그건 모르는 일이지. 제 아무리 벌칸인이라도 알람을 꺼두고 수면제를 잔뜩 맞춰놓으면….”

“…캡틴, 간밤에 저한테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스팍이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런 스팍을 보고 재밌다는 듯 키득키득 웃으며 커크가 말했다.

“불면증을 앓고 있다는 부하의 깊은 수면을 위해 이 몸이 힘 좀 써봤지. 그래봤자, 네 방의 알람을 꺼둔 것뿐이지만. 아, 참고로 체코프가 네 알람 프로그램 해킹하는 거 도와줬어.”

“캐, 캡띤! 비밀로 해주신다고 하셔노코…! 아, 아니, 커맨더…. 저는 그냥 캡띤이 시켜서 한 것 뿐입미다….”

“참고로 공범이 하나 더 있어. 수면제는 본즈가 놓은 거야.”

“난 의사로서 적절한 처방을 내린 것뿐이야. 상대가 벌칸인이다보니 적정량을 가늠하기가 어려워서 좀 과하게 놨던 건 사실이지만, 네가 지각하는 것까진 내 계산에 없었어.”

“그동안 제게 꾸준히 수면제를 처방해주셨던 걸로 압니다만? 설마 본인 말씀이 논리적이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닥터?”

스팍의 입에서 익숙한 단어가 튀어나오자 브릿지에 있던 모든 이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영문을 모르는 스팍만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스팍, 그 말이 너무 그리웠어요! 로-지컬! 오랜만에 듣는데 다행히 그 억양 그대로네요.”

“그 말을 들으니까 이제야 엔터프라이즈의 브릿지 같아요. 이제 아프지 마세요, 스팍.”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지만 스팍은 여전히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제 자리로 가서 앉았다. 하지만 브릿지의 크루들은 스팍이 무표정한 것까지 무척이나 반가워했다. 몇몇은 스팍의 뾰족한 귀 끝이 초록빛으로 물든 걸 보고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잠깐, 난 반박을 좀 해야겠어. 여태껏 내가 내린 수면제 처방을 제대로 복용하지 않은 게 누구더라? 내 앞에 있는 우울증 걸리고 귀신을 보며 심지어 지각까지 하는 벌칸인이 그랬던 것 같은데?”

본즈의 깐죽거리는 시비에 스팍이 인신공격은 부당하다며 반박하려던 참이었다. 어느새 두 사람 곁으로 불쑥 다가온 커크가 본즈와 스팍에게 나란히 어깨동무를 하며 말했다.

“맞아, 그래서 특별하잖아? 세상에서 하나 뿐인 벌칸인이지. 바로 우리 자랑스러운 부함장님.”

커크는 시원하게 입을 벌려가며 밝게 웃었고, 본즈 역시 못 이기는 척 피식 웃었다. 스팍은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지만 가슴 속에선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넘치는 행복함을.

- 2013. 7. 13.


* 주석

  1. 위키피디아 'Omega Molecule' 항목을 참고로 작성하였음. 이하 원문.

    'The Omega Molecule is a highly unstable molecule believed to be the most powerful substance known to exist. If not properly disposed of, it may destroy subspace and render warp travel impossible. In Star Trek: Voyager, during the episode The Omega Directive, Voyager encounters Omega particles and Captain Janeway must comply with the Omega Directive and destroy the particles. Later in the episode, they spontaneously stabilize for a brief moment before they are destroyed.'

  2. 위키피디아 정보 참고. 이하 원문.

    '일반 명령 0호 : 오메가 디렉티브. 이것은 오메가 분자가 감지되었을 경우 프라임 디렉티브를 대신하여 최우선 명령이 된다. 더 이상 감지되는 오메가 분자가 없으면 다시 프라임 디렉티브가 최우선 명령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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