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버넘에게 주어진 한 가지 사건

스타트렉 참수앤솔 참여작 / DIS 릴락&버넘, DS9 개랙바시어

마이클 버넘에게 주어진 한 가지 사건

어느 날 대통령 집무실에 홀로 남겨진 마이클 버넘에게 환청이 들리기 시작했다.

“마이클…” 환청이 속삭였다. “마이클 버넘… 여깁니다.” 

소름 끼치는 속삭임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버넘은 바지춤을 뒤져 페이저를 꺼내 쥘 뻔했다. 그 행동은 제대로 실행되지 못했는데, 버넘이 입은 27세기 복고풍 청바지에는 페이저가 꽂혀 있지 않은 데다가 쿠데타를 각오하지 않고서야 무기를 드는 건 이 방에서 절대로 하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1

USS 디스커버리가 정기 점검에 들어간 날 버넘 선장이 당면한 문제는 종일 수행할 공식적인 일정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영리하고 음흉한 릴락 대통령은 그 틈을 노려 버넘을 자신의 집무실에 초대했다. 통신으로 전해 온 대통령의 요구사항은 “와서 차나 한잔하죠?”였고, 근거는 “선원들도 전원 휴가고 애인도 고향 갔다며, 선장이 혼자 있으면 내가 불편해.” 였다. 버넘은 내키지 않았지만 거절하지 못했다. 디스커버리와 클리블랜드 부커를 제외하면 버넘에겐 정말로 친구가 없었다.

물론 릴락 대통령은 버넘의 친구가 아니었다. 그는 스타플릿이 아닌 행성연방의 정치가이니 직속상관도 아니고(통수권을 가지고 있으므로 명령권자이긴 했다), 동료라고 하기에도 민망스러웠다. 버넘에게 행성연방 대통령은 그저 대통령이었다. 살면서 운이 좋아 한두 번 볼 법한 사람이어야 됐던 것이다. 그런데도 대통령 자신의 지위는 고려하지도 않는다는 듯이, 친근한 이웃집 사람처럼 ‘와서 차나 한잔하죠’라니. 

공적인 장소에서 이뤄지는 사적인 회동에는 뭐라고 이름 붙여야 할까? 평상복을 걸친 버넘이 길고 멋들어진 소파에 엉덩이를 푹 담그며 생각했다. 한가롭게 차를 권하던 당초의 말과 다르게 대통령은 30분째 집무실 건너편 회의실에서 나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버넘은 멋들어진 소파 정 가운데에 앉아 지루한 정 자세로 시간을 보냈다. 집무실은 상상했던 모습보다는 아늑했다. 대통령실을 상징하는 깃발과 행성연방기가 걸린 두 깃대가 양옆을 장식한 전면 창문의 우주 밖 풍경만 빼면 제법 전통적이고 고풍스러운 풍경이라고 할 수 있었다. 대통령의 책상은 역사 깊어 보이는 가구 중 하나였다. 버넘이 떠나왔던 그의 시대에 통용되던 고급 가구의 생김새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책상 표면은 오래도록 기름을 먹여 반지르르했고, 여러 주인을 거친 탓에 독특한 손길이 남아 있었다. 전임 대통령 중에는 빨판을 가진 인물이 있었던 것 같다. 다른 사람은 손톱이 굉장히 날카로웠나 보다. 그런 생각을 하니 버넘의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그러던 중 환청이 들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하도 쉿쉿 거리는 통에 창문이 덜 닫힌 줄로 알았다(그랬더라면 집무실은 이미 폭발했을 테다). 그런데 소리는 곧 사람 말이 되었고, 또렷하게 버넘의 이름을 읊기 시작했다.

“마이클….”

누가 이렇게 남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댄단 말이야? 버넘은 소리의 근원을 찾아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마이클… 여깁니다…. 대통령 책상….” 

기분 나쁘게 들떠있는 속삭임에 버넘은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유서 깊은 책상은 사실 귀신 들린 책상인 듯싶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책상이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대통령의 집무실을 반 바퀴 돌아 책상 앞에 도착하니, 목소리가 만족스럽게 응답했다. 

“서랍을 열어보세요….” 마치 깜짝 선물을 준비했다는 듯이.

“만약 이게 장난이거나, 함정이거나, 정치적 계략이라면 내 함장 경력은 끝장이야.” 

버넘이 중얼거리며 서랍 손잡이를 당겼다. 잠기지 않은 서랍이 묵직하게 끌려왔다. 안에는 머리가 있었다. 인간의 잘린 머리였다. 원형 납작한 바닥에 목 아래 절단면을 붙여놓고, 원통의 유리 덮개를 씌워 밀폐한 둥그렇고 매끈하고 흠집 하나 없는 유리병에 든 머리가 버넘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드디어!” 머리가 말했다. “서랍에 갇혀있는 것도, 미동도 없이 앉은 당신을 보는 것도 어찌나 지루하던지! 이제 살 것 같네요. 나를 들어서 책상에 올려주세요. 당신과 눈을 맞출 수 있도록 말예요. 얼마 만에 보는 스타플릿 선장이야. 진심으로 반가워요.” 

버넘이 유리병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책상 위에 바로 세웠다. 잘 보니 유리병은 정체 모를 액체로 가득 차 있어서 머리가 말하면 기포가 보글거리며 올라왔다. 게다가 우습게도 기포가 생길 때마다 그의 어두운 갈색 빛깔 머리카락이 액체 안에서 부드럽게 물결치고 있었다. 신비롭고 울렁거리고 다소 역겨운 광경이었다. 

“누구신데 대통령 집무실 책상 서랍에 머리만 들어 있으신 거죠?”

“내 이름은 줄리안 바시어예요.” 머리가 자랑스레 자신을 소개했다.

“…그게 누구신지.” 버넘은 무감동했다.

“날 몰라요?”

머리는 진심으로 놀라며 핀잔을 줬다. “버넘 선장, 여기 오고 나서는 역사 공부에 소홀했나 보군요.”

“했는데요. 23세기 이후 알려진 사건은 전부 배웠어요. 당신은 역사적으로 별로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나 봐요.” 

버넘이 맞받아쳤다. 그러자 머리가 조심스럽게 웃었다. 아마도 유리병의 부피가 넉넉하지 않아서 박장대소할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내 이름은 줄리안 바시어, 2341년 지구 출생, 올해로 849살인 인간이죠.” 그렇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줄리안 바시어의 이야기

나는 심우주 9라는 스타플릿 정거장에서 수석 의료 장교로 일하고 있었어요. 선장도 구시대 출신이니 심우주 개념에 대해선 익숙하겠지요? 연방 사람들은 지구나 벌칸과 멀리 떨어져서 중립 구역에 가까운 정거장을 심우주 1, 2, 3… 이렇게 매겨 부르곤 했었는데 심우주 9는 그러한 입지 중 하나였죠. 그때의 습관이 몇 세기 동안 굳어졌지만 요새는 의미가 옅어지고 명칭만 남아 버렸다고 해야겠어요. 그도 그럴 것이 숫자가 100단위를 넘어가는 작금의 광활한 활동 구역에서 심우주라는 말뜻은 더 이상 들어맞지 않는걸요. 당시 심우주 9는 내 첫 발령지인 데다 새로운 모험이 시작되는 개척지였어요. 카다시아의 베이조 점령기가 끝나고, 베이조의 독립 지원을 위해 스타플릿이 주둔하게 된 정거장이라는 지정학적 요충지였기 때문이죠. 심우주 9는 베이조 본성 궤도에 있었고, 아직 연방에 가입하지 않은 베이조 정부가 정거장과 웜홀을—감마 분면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고정된 웜홀 말이에요—소유하고 있었죠. 가령 심우주 253은 현재 에메랄드 체인이 운영 중인 것처럼, 정확히 들어맞진 않더라도 심우주 9도 비슷한 상황이었던 거죠. 

테록 노르가 심우주 9로 명칭이 변경되고 관리 주체가 바뀔 동안 정거장을 떠나지 않은 유일한 카다시아인 한 명이 있었어요. 카다시아 군이 철수하는 길에 내다버린 추방자였죠. 베이조 민병대와 스타플릿은 위협적일 정도로 커다랗고 강건한 신체를 타고난 카다시아인을 거주민으로 받아줄 도리밖에 없었어요. 이 자가 감시와 감독을 벗어나 베이조 본성으로 향하기라도 한다면 큰일이니까요. 정거장 수석 의료 장교가 된 지 한 달째에 그 카다시아인을 만났고 금세 호감을 가지게 됐어요. 난 27살밖에 되지 않은 신입 장교에 불과했고 그는 노련미가 넘치는 적군이었으니까요. 그 카다시아인도 내게 호감 이상으로 불붙었다고 단언해요. 만남을 거듭할수록 그는 내 젊음과 열의를 착취하고 애정을 유린하면서 나를 점점 옭아맸어요. 나는 한동안 그의 관심이 황홀했지만 짧게 타오르던 흥미가 꺼지고 나자 불쾌해졌고 용납 못 할 정도로 느껴지기까지 했기에 끝내는 도망치려고 했어요. 그러자 내 카다시아인 연인의 인내심은 열화된 다일리튬처럼 폭발했습니다. 한밤중에 그는 선박용 레이저 절단기를 양손으로 들고서 선실에 침입해 일격에 내 목을 베어 버렸어요. 거대한 레이저 톱날로 나를 두 동강 낸 뒤에는 내 배지를 이용해 우리—부연컨대, 그와 내 신체 일부—를 의무실로 전송했는데, 이후 유능한 동료들이 증언하길, 내 머리는 의학적으로 검증된 보존 통에 절이고, 전신에 피를 뒤집어쓴 카다시아인은 감옥에 집어넣었어요. 내 사지와 몸통은 싸늘하게 식은 채로 너무 오랜 시간 방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머리와 다시 연결하는 건 불가능했고 보존 통에 들어간 나로선 뇌와 남은 골격과 피부가 썩지 않게끔 영양분을 공급받는 것만이 최선이었죠. 다행스러운 점은 그런데도 내가 살아있을 수 있었다는 것이었어요. 한동안 나는 매우 흥분해 있었어요. 일생의 장기 연구 과제로 삼을 만한 가능성이 눈앞에 펼쳐졌으니까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수백 년간 활동하는 뇌를 연구한다는 누구도 시도하지 못할 업적을 나는 살아있기만 해도 달성할 수가 있는 것이었으니까요……. 

실제로 나를 뜯어보고 싶어 하는 연구자들이 찾아오기도 했는데 일단은 머리통이 살아있는 상태로 유리병을 열려는 엄두를 아무도 못 냈기에, 게다가 내 살인자 연인이 생존해 있는 동안 나는 줄곧 사랑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연구를 계속하기가 어려웠어요. 놀라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가 내 목을 동강 낸 순간부터 나는 그를 마음 다해 사랑하게 되고 말았어요. 내 연인은 얼마간의 수감 생활에서 풀려난 뒤 나를 데리고 전쟁이 끝난 카다시아로 돌아갔어요. 우린 거기서 둘만의 행복한 삶을 살았죠. 세월이 흐르고 그가 나이 들어 죽으면서 내 머리는 비공식적으로 카다시아 연구소에 이관됐어요. 그때부터 연구진과 동고동락하며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유능한 연구진은 바닥의 기계 장치에서 출발해 머리통 구석구석 순환하는 혈류를 관리할 줄 알았고, 날 죽이지 않고도 병을 여는 방법을 찾아냈어요. 그래서 표피를 들어낸 뒤 죽은 세포를 걷어내고, 남은 뇌에 밥을 먹여 살뜰히 키우고, 삭아서 없어진 머리카락 대신 인공 머리털을 심고, 눈썹과 솜털을 그럴싸하게 재창조하고, 망막 안쪽에 실리콘 기름을 주입한 다음 각막을 매끄럽게 깎고, 무너진 코를 재건하고, 입술을 다시 만들고, 젊은 날의 날렵한 턱선을 되살려주고, 피부를 복원하기 위해 놀랍도록 과학적인 재생 약으로 병 속을 가득 채워주었어요. 내가 웃고 떠드는 동안 늘 나를 돌보고 함께 구술로 작성한 일지를 검토하고 말벗이 되어주는 것이 연구소 직원들의 일과였으며, 수년간의 감정적 유대와 진지하거나 장난스러운 실험들의 결과값이 우리의 비밀 성과였죠. 한데 즐거운 날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끝내는 카다시아의 정권이 바뀌며 연구 시설도 폐쇄 수순을 밟았어요. 나는 젊은 시절 얼굴로 완벽하게 박제된 채 새로운 정부의 손길에 의해 옮겨져서 박물관에 전시되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죠. 하루하루 전시관 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다양한 사람들을 마주하면서 나는 정말이지 말로는 다 설명하지 못할 만큼 외로웠어요. 그들의 인생은 매일 다채롭게 분열하고 또 변화하는 가능성으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나는 오늘도 내일도 십 년 뒤에도 똑같이 전시용 유리 속에 진열된 살아있는 통조림 머리로써의 하루를 보낼 테니까요. 헤아리지 않고 기억하지 못하는 무수히 긴 세월이 흘러 박물관이 문을 닫고 나서도 누구 하나 기억하는 자가 없었기에 잊힌 나는 정적과 어둠과 죽은 이들에 둘러싸인 지옥 구덩이에 갇혀 있었을 수밖에요. 

2

유리병에 든 줄리안 바시어 박사의 머리가 조용히 버넘의 반응을 기다렸다. 머리는 감정 표현에 있어 제약이 거의 없는 듯이 보였는데, 지금처럼 버넘이 박사의 으쓱거리는 어깨라든가 힘이 가득 들어간 손끝 같은 몸짓 언어를 읽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박사는 거들먹거리는 것처럼 보일 수가 있었다. 마이클 버넘은 벌칸 본성에서 공교육을 수료한 인간답게 예의를 차리는 동시에 상대의 헛소리를 차단하고 자리를 떠나는 방법을 알았지만, 불법 배달업을 꾸렸던 최근 직업의 영향으로 저급한 호기심이 동하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하여간에 특이한 물건만 발견하면(그게 무생물이든 생물이든 간에) 발동하는 분석과 수집 욕구가 통조림 된 박사 앞에 버넘을 인내심 있게 못 박아두는 동력으로 작동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끝내 마이클 버넘이 입을 열었다. “릴락 대통령이 집무실 책상 서랍에 살아있는 머리를 보관하고 있는 이유에 대한 답은 언제 들을 수 있는 거죠?”

그러자 좀 전보다 기력을 잃어버린 머리가 토라진 말투로 대꾸를 시작했다. 

“바로 그걸 설명하는 중이었습니다. 나름대로의 이야기 구조를 통해서요. 버넘 선장, 계속 들어보세요. 그렇게 하면 반드시 전말을 알게 될 테니까요. 고백하건대 조금 전 이야기에는 다소 부풀린 면이 있어요. 서사적인 전개라든가 내밀한 감정 표현이라든가 기타 등등. 선장은 정돈된 재미보다는 너저분한 사실을 알고 싶은 부류인 듯하니 나의 이야기도 이제부터 건조한 고백으로 이어지겠다고 생각됩니다.

라일라 릴락 대통령이 나를 소유하게 된 경위에는 내가 박물관에서 탈출한 계기와 연관된 진실이 운명적으로 양립하고 있습니다. 오래전 죽어버린 모든 골동품의 자리였던 박물관을 개방하고 무덤 안에서 나를 찾아낸 사람에 관해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그이는 아주 날렵한 체형의 청년이었는데 목에는 카다시아인의 개성적인 두꺼운 비늘이 하나도 덮여있지 않았어요. 대신에 나와 똑같이 매끈하고 연약해 보이는 목선을 가지고 있었죠. 머리카락 또한 검고 곱슬거렸고요. 그러나 안와를 감싸고 도는 독특한 비늘 모양과 강인한 턱, 단단한 뼈가 도드라지는 미간, 둥글넢적하게 패인 이마 한가운데를 보면 영락없는 카다시아인이었어요. 유전자 검사를 하지 않아도 그이가 나와 내 연인의 직계 자손이라는 사실은 명백했어요. 그런데도 내 확신을 증명하기 위해 검사를 하긴 했죠! 그이에게는 카다시아인의 유전자와 더불어 조작된 인간 유전자가 발견됐어요. 내가 알기로 후천적으로 조작된 유전자를 가지고 카다시아인과 재생산한 인간은 나로 유일했습니다.”

“박사님과 그 카다시아인 사이에 자식이 있었다고요?” 버넘이 성급하게 질문했다. “아니, 제 말은, 박사님한테는 머리밖에 남은 게 없는데요!”

“물론 머리만 있기 전에 내 정자는 냉동 보관 중이었죠. 심우주 9에 발령가고 나서 먼저 몰두한 업무 중 하나가 정액 채취였거든요. 난 항상 자손을 남기려는 열망에 가득했었고, 한 살이라도 더 젊고 건강할 때 다양한 대상에게 씨를 퍼트리려고 노력했으니까요…….”

“그것참 추접스러운 욕망이네요.” 

버넘이 중얼거리는데 머리는 오히려 즐거워하며 보글거렸다.

“하지만 나의 연인은 인공수정으로 아이를 가진 게 아니에요. 나중에 알았는데 내 목을 자를 때 그는 이미 몸속에 유정란을 품고 있었어요. 목을 잘리고 난 뒤에도 죽지 않았던 덕택에 그 애가 태어나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죠.”

‘그러니까 바람기에 분노한 임신부의 손에 죽임을 당한 거로군.’ 버넘이 생각했다.

“박사님은 왜 죽지 않았을까요? 그것도 강화된 유전자 덕분인가요?”

“선장의 의문 또한 당초부터 규명하려고 애썼지만, 나와 같은 인간은 둘도 없었기 때문에 진상을 영영 알지 못한다는 것이 연구자로서의 부끄러운 사견이에요. 산소를 녹인 방부액으로 채운 유리병에 잘린 머리를 산 채로 담가 밀봉하기로 한 건 물론 내 지시였어요. 당시 의무실에서 가장 권위 있는 의사가 나였기 때문에요. 나를 포함한 누구도 정확히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규명하기 어렵지만, 어쨌든 간에 지금까지 살아서 선장과 얘기하고 있으니 처치는 썩 잘 됐다고 봐야겠지요. 이제 이야기를 계속합시다. 절망에서 나를 구한 청년은 생물학적으로 내 손주의 손주의 손주인 거로 밝혀졌어요. 그이는 나의 직계비속이기에 나를 소유할 권리가 있었고 당국은 얼마간 겪은 내 정신적 고통에 대한 배상을 포함하여 합가를 허가했습니다. 

2603년에 법적으로도 행정적으로도 나는 카다시아 시민이 됐습니다. 이후에 벌어진 역사적 사건은 선장도 대강 눈치채겠지요. 카다시아가 연방에 편입하자 스타플릿에 장교 임관하는 유행이 전 행성으로 번지면서 내 손주의 손주의 손주의 손주 중에서도 스타플릿 아카데미에 지원하려는 아이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나는 그들에게 더없이 좋은 교본이 되어줄 수 있었죠. 그 시절은 정말이지 행복으로 충만한 나날들이었어요. 만약 분노한 연인의 손으로 머리가 날아가는 일 없이 제명에 죽었다면 이러한 만족감은 절대로 경험하지 못했을 테죠. 스타플릿 의학 아카데미의 명예 교수직을 제안받고 지구까지 날아간 적도 있었어요. 스타플릿 본부 땅을 다시 밟는 게 얼마 만이었는지—엄연히 밟은 거라곤 할 수 없지만—. 많은 것이 변했더군요. 아니 모든 게 변해 있었어요. 나는 시대의 흐름을 따라잡기 어렵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명예 교수직을 거절한 대신 공부에 매진했어요. 사학, 의학, 약학, 생물학, 천체물리학, 외계생명학, 인류학, 고대 철학, 종교학, 군사학, 언어학, 사회학, (…계속해서 이어지는 학문의 나열…), 이들을 모조리 습득하는 작업은 어느새 강화 통조림 두뇌의 한계를 측정하기 위한 또 하나의 연구 과제가 되고 말았습니다. 다시금 세월이 와르르 흐르고 났더니 한때 나의 절친한 친우였던 숭 타입 안드로이드가 목격했다면 분명 놀라워했을 만큼 고도로 분류된 색인을 머릿속에 구축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대대손손 나를 물려받은 가문의 자손들은 사회에서 존경받는 지도자가 되어 세상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었습니다. 내 자손의 뛰어난 업적 중 하나는 베이조와 카다시아 간의 정치적, 사회적, 외교적, 동시에 가정적으로 완전한 화해를 이룩했다는 점이지요. 그 역사적인 화해의 산물이자 내게 남은 유일한 혈육이 바로 이 집무실과 책상과 머리가 든 유리병의 주인인 라이라 릴락인 것이고요.” 

열린 문으로 라이라 릴락 대통령이 양손에 머그잔을 쥔 채 입장했다.

“하, 미치겠군.” 릴락은 집무실을 가로질러 걸어오면서 말했다. “저거 건드리지만 말았으면 했는데.”

“대통령님의 물건에 손댄 점…” 버넘이 소명하는데 머그잔 한 개가 건네졌다. 갓 내린 따뜻한 락타지노였다.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대통령께서는 지성이 있는 머리를 서랍에 넣어두셨으며, 그것이 직접 제게 꺼내달라고 요구했다는 사실을 고려하셔야 합니다.”

릴락이 소파 팔걸이에 걸터앉아 락타지노를 마시고 윗입술에 남은 거품을 혀로 닦았다. 버넘도 머그잔을 후후 불어 한 모금 마셨다. 바시어 박사의 머리는 하는 일 없이 보글거렸다.

릴락이 대답했다. “불가피한 상황에서 행한 선장의 행동을 탓할 생각은 없어요. 저건 훨씬 골치 아픈 짓도 많이 저질렀으니까요.”

“다 들려요!” 바시어 박사가 외쳤다.

“저건 줄리안 수바토이 바시어 박사예요.” 릴락이 말했다. “24세기부터 현재까지 대통령실에 보관된 연방의 자산이죠. 선장도 겪은 바 있으니 섹션 31이 연방의 유구하고 비밀스러운 정치 공작 부서였다는 것은 알고 있겠죠. 역대 연방 대통령은 섹션 31의 최고 소유권자로서 취임 첫날 해당 부서의 존재를 알게 돼요. 한데 섹션 31의 활동 방향에 관해서는 대통령이 직접 명령할 수 없어요. 작전 실행력도 조직원의 운용력도 주어지지 않아요. 대통령이 갖는 유일한 권한은 섹션 31을 살리느냐 죽이느냐예요. 오로지 조직의 존폐만이 대통령 손에 달린 것이에요. 그건 내 경우에도 마찬가지였죠. 취임식 직후 대통령실에 입성하자마자 나는 섹션 31 부서 양수와 소유권 취득 서류에 서명했고, 그 결과로 바시어 박사의 머리를 수령했어요. 이 머리는 섹션 31이 실재했다는 증거이며 유일하게 생존한 조직의 증인이자, 생김새 때문에 부르는 별명 같은 게 아니라 의미 그대로 우두머리예요. 그리고 우리 대통령들은 임기 동안 이걸 책상 서랍에 넣어두고는 했죠. 우리 중 누구도 섹션 31을 죽이자고 결정 내리지 못했으니까요. 생각하기로는 구시대적이며 문제적인 부패한 비밀 부서를 없애버려야 함이 옳지만, 막상 머리를 보게 되면, 그리고 이 머리가 멀쩡히 살아서 입을 놀리고 있는 모습을 보면 말이죠, 과학인이자 지성인의 입장에서 도저히 900년 산 사람을 내 손으로 죽게 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여기게 된다고요. 이런 사유로 내 책상 서랍에 살아있는 머리가 들어 있었던 겁니다.”

버넘이 당황하여 물었다.

“그럼 바시어 박사가 대통령님의 직계 조상이라는 둥 했던 이야기는 다 뭐죠?”

“박사가 또 우스개소리를 나불거렸나 보군요.” 릴락이 보글거리는 머리에 대고 촌평했다.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박사가 마지막으로 사귄 상대가 카다시아인이었다는 이야기도 하던가요? 그 사람이 박사를 이렇게 만든 장본인이긴 하죠. 이종 간 전염성 질환 치료법이 그다지 발전하지 않은 시대였거든요. 성병이 옮아서 괴사한 몸을 조금씩 잘라내야 했다더군요. 본인은 후회 없었던 것 같아요. 관련 논문을 7개나 발표하고 연구에 매진한 덕에 카다시아인과 인간이 질병의 염려 없이 재생산하는 성취를 이룩했으니까요. 나도 그러한 의학적 혜택을 받은 아이 중의 하나일 뿐이에요. 이야기에 비해 진상은 허무하고 짜증을 돋울 뿐이죠. 하지만 어쩌겠어요. 이게 전부예요.” 릴락이 말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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