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렉 2차 창작 단편 모음

[커크스팍] 누구나 한 번쯤은

USS 엔터프라이즈 호의 항해는 순조로웠다. 너무 평화로워서 오히려 지루할 정도로 말이다.

“…술루, 레이더에 뭔가 잡히는 것 좀 없나?”

“전혀 없습니다, 캡틴. 항해는 순조롭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문제란 거야. 지나치게 평온하니까 다들 나태해졌잖아. 체코프, 너 방금 졸았지!”

“아, 아님미다! 캡띤!”

“모니터에 침이나 닦고 말하지 그래? 다들 주목해봐! 지금부터 모든 대원들에게 중대한 발표를 하나 할 테니 잘 들어두라고. 우후라, 함선 전체에 모니터 띄우고 통신 준비해.”

커크가 보기 드문 진지한 얼굴로 명령했다. 우후라는 명령대로 함선에 음성과 영상이 나오도록 준비했고, 브릿지의 대원들은 늘어져 있던 몸을 빳빳하게 긴장시키며 함장의 중대 발표를 기다렸다. 스팍은 자신의 논리로는 지금 상황에서 중대한 발표를 하겠다는 커크의 의중이 무엇인지 도출해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생각을 그만두었다. 커크의 행동은 항상 스팍의 논리를 벗어나는 것이어서 예측 자체가 불가능하니까.

우후라가 모든 준비를 마쳤다고 보고하자 커크가 목을 몇 번 가다듬더니 입을 열었다.

“USS 엔터프라이즈 함장 제임스 T. 커크가 전 대원들에게 알린다. 지금부터 나는 식당에서 디저트 타임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함장이 오래 자리를 비울 수 없는 노릇이니 내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 엔터프라이즈 호를 지휘할 임시 함장을 임명하겠다. 지금부터 임시 함장은 파벨 체코프 소위가 맡는다. 이상으로 통신을 마친다. 다들 수고!”

“네?! 제가요?!! 캐, 캡띤!!”

“그래, 체코프 너 말이야. 지금부터 네가 함장이야. 엔터프라이즈를 잘 부탁해.”

사색이 된 체코프는 아랑곳 않고 커크가 키득거리며 말했다. 재밌어 죽겠다는 듯 커크는 입이 찢어져라 웃고 있었다. 브릿지의 모든 대원들이 벙쪄있는 가운데 스팍만이 표정 변화 없이 커크에게 말했다.

“캡틴, 방금 하신 명령은 논리적이지 못 합니다. 스타플릿 규정상 임시 함장을 임명할 때는 함장이 함선을 직접 지휘하지 못 할 상황에 처해있거나….”

“어허, 스팍! 함장은 내가 아니라 체코프라니까? 그건 그렇고….”

커크가 스팍의 말을 막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곧장 체코프에게로 가 그를 일으켜 세우더니 억지로 함장의 자리에 앉혔다. 얼떨떨해하는 체코프의 어깨를 몇 번 두드리곤 얼빠진 얼굴을 한 대원들을 돌아보더니 커크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나랑 디저트 먹으러 갈 사람?”


“짐! 방금 그 통신은 대체 뭐야?”

“닥터 맥코이, 캡틴 커크는 여기 안 계십니다.”

“뭐야, 그럼 진짜 디저트 먹으러 간 거야?!”

브릿지 문을 박차고 들어온 본즈가 커크를 찾자 스팍이 그쪽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함장석을 바라본 본즈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설마 했는데 정말로, 함장의 자리엔 체코프가 앉아있었다.

“그 통신이 진짜였다니…. 커크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스팍, 이 사태를 어떻게 생각해?”

“제 관점에선 비논리적이며 비상식적인 행동입니다. 하지만 닥터, 지금까지 겪어온 캡틴 커크의 행동을 참고해보면 이는 이상(異常)행동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캡틴 커크에겐 충동적이고 감정적인 행동이 오히려 정상적인 반응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정상적이라는 거야 아님 비정상적이라는 거…, 아니, 됐다. 커크는 인간들도 이해 못할 놈인데 벌칸인에게 물어본 내 잘못이지….”

본즈가 한숨을 쉬곤 빈자리에 앉아 브릿지를 쓱 둘러보았다. 의외로 대원들은 평소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다들 지금 이 상황이 이상하다는 자각이 없는 건가? 본즈는 함장석에 앉은 체코프를 보았다. 앳된 러시아 청년의 얼굴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임시 함장이라고 해봤자 딱히 어떤 명령을 내리거나 지휘를 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 자리에 앉아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들떠보였다. 본즈의 얼굴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체코프, 함장이 되어 본 기분이 어떤가? 함장 자리가 마음에 드나?”

“네? 아, 뭐…. 솔직히 설렙미다. 스타플릿에 몸담은 교육생이라면 누구나 함장의 자리를 꿈꾸지 않슴미까. 제가 이 자리에 앉아볼 줄이야….”

본즈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역시도 스타플릿의 교육생이었으니까. 비록 의학 장교로서 엔터프라이즈 호에 탑승하고 있지만 함장의 자리는 영원한 선망의 대상이었다. 본즈는 그제야 함선 전체에 퍼져있는 묘하게 들뜬 분위기를 알아차렸다. 함장은 위에서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뜻인지, 함장을 꿈꾸는 이들에게 주는 작은 격려인지, 그저 지루한 항해에 지친 이들을 위한 즐거운 이벤트인지 정확한 의도는 모르지만 확실한 건 모두가 이를 즐겁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커크는 철없어 보이다가도 가끔 이렇게 놀랄 만큼 속 깊은 행동을 보여주곤 했다. 그래서 모두가 커크를 함장으로서 믿고 따르는 것이리라.

“여어, 캡틴 체코프. 별일 없지? 함장으로서 첫 항해는 어땠어?”

그때, 브릿지 문이 열리고 커크가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들어왔다. 체코프가 밝게 미소 지으며 함장석에서 일어나 커크에게 자리를 돌려주었다. 커크가 기분 좋게 웃으며 함장석에 앉았고 본즈를 비롯한 브릿지의 모든 사람들이 즐겁게 웃었다. 오직 스팍만이 조금의 미동도 없이 이를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체코프, 기껏 임시 함장을 시켜줬는데 아무 명령도 내리지 않은 거야? 쉽게 오는 기회가 아닌데 맘에 안 드는 장교가 있었으면 이참에 복수나 하지 그랬…, 이봐, 본즈! 내 얼굴에 뭘 갖다 대는 거야!”

“가만히 있어, 짐. 열이 있나 체크하는 거야. 지금 넌 제정신이 아닌 것 같으니까.”

“난 항상 멀쩡해, 본즈. 그러니까 이것 좀 치우지?”

“넌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함장 자리가 그렇게 쉽게 내려왔다 올라갔다 해도 되는 자리가 아니잖아?”

“아하, 알았다! 본즈, 너도 함장 자리에 앉아보고 싶었으면 말을 하지 그랬어. 난 그렇게 빡빡한 사람 아니야. 원한다면 누구나 임시 함장으로 임명해 줄 수 있다고.”

“뭐? 난 그저….”

“우후라, 다시 통신 준비해. 이번엔 새 임시 함장으로 본즈를….”

“잠깐, 그게 무슨 소리야! 설마 또 그 이상한 발표를 하려는 거야?! 그만둬, 짐! 난 함장 따위 하고 싶지 않다고!!”

“함장 따위라니, 이게 얼마나 명예로운 자리인데 그러실까? 이 자리에 앉길 꿈꾸는 수많은 스타플릿 교육생들에게 부끄럽지도 않나? 그냥 얌전히 받아들여! 우후라, 준비 다 됐어? 오케이, 좋아. USS 엔터프라이즈 함장 제임스 T. 커크가 전 대원들에게 알린다. 디저트 타임을 성공적으로 마쳤으니 나는 이제 양치질을 하러 가야겠다. 그러니 지금부터 내가 복귀할 때까지 엔터프라이즈 호를 지휘할 임시 함장을 임명하겠다. 임시 함장은 닥터 레너드 맥코이….”

“닥쳐! 너 이 자식! 날 공개적으로 망신시키려는 속셈이지!!”

본즈가 날뛰건 말건 커크는 그를 임시 함장으로 임명시키더니 강제로 함장석에 앉힌 후 이를 닦고 오겠다며 순식간에 밖으로 사라졌다. 남은 건 굴욕적인 표정으로 함장석에 앉아 있는 본즈와 웃음을 참고 있는 대원들 그리고 여전히 아무 표정 없는 스팍이었다.

잠시 후 커크가 다시 돌아오자마자 본즈는 번개처럼 튀어 나가 커크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커크는 켁켁 거리면서도 눈물이 나도록 웃어댔다.

“으흐흐흐…, 자, 잠깐! 이거 내려놓고 얘기하자고. 그나저나 캡틴 맥코이, 함장이 된 기분이 어때?”

“나한테 그딴 이상한 호칭 붙이지 마! 어떤 기분이었냐고? 내 생애 최고로 굴욕적인 5분이었어.”

“좋았으면서 튕기기는! 아무튼 이제 진짜 함장님이 돌아왔으니 그 자리는 돌려받아야겠어. 어디 보자, 다음엔 누굴 이 자리에 앉혀줄까?”

“아주 신나셨군! 스코티에게도 한 번 기회를 주는 게 어때, 자비로운 함장님?”

“안 그래도 아까 식당에서 만났을 때 물어봤는데 스코티는 그런 하찮은 자리에 앉기 싫대. 이 자리가 하찮다니, 대체 함장인 날 뭘로 보는 거야?”

“…짐, 함장 자리를 하찮게 만들고 있는 게 누군지 정말 모르는 거야?”

“그딴 거 알 게 뭐야. 그나저나 배가 슬슬 아픈 걸 보니 신호가 오는 것 같아…. 내가 화장실 다녀올 동안 내 자리를 지킬 임시 함장이 또 필요하겠는데? 어디 보자, 이번엔 매력적인 여성 함장님이 좋겠어. 우후라, 어때? …뭐야, 이 엄청난 함성은! 너희들 이러면 나 좀 서운하다. 알았어, 알았어! 어차피 이번 볼일은 오래 걸릴 것 같으니 다들 충분히 즐기라고! 술루, 그렇게 간절한 눈빛으로 보지 않아도 돼. 다음은 네 차례니까!”

결국 커크는 이 우스꽝스러운 함장 임명식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이젠 본즈마저도 두 손 두 발 다 들고 지루한 항해 중 신선한 이벤트를 즐겼다. 브릿지에 모든 대원들이 한 번쯤 함장의 자리에 앉아봤을 즈음, 커크는 더 시켜줄 사람이 없나 두리번거리다 스팍과 눈이 마주쳤다. 스팍은 언뜻 보기에 평소와 다를 바 없어 보였지만 커크는 그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눈치챌 수 있었다. 커크가 씨익 웃으며 열다섯번째 임시 함장 임명식을 시작했다.

“USS 엔터프라이즈 함장 제임스 T. 커크가 전 대원들에게 알린다. 디저트도 먹고 화장실도 다녀오고 충분히 돌아다녔으니 이제 나는 좀 쉬어야겠다. 내가 낮잠 자고 일어날 때까지 엔터프라이즈 호를 지휘할 임시 함장을 임명하겠다. 지금부터 임시 함장은 캐롤 마커스 장교가 맡는다. 마커스 장교는 이 통신을 듣는 즉시 브릿지로 와주길 바란다, 이상!”

통신을 마친 커크가 함장석에서 일어나더니 곧장 스팍에게로 향했다. 가만히 커크를 바라보던 스팍은 다가온 커크가 자신의 팔을 잡고 밖으로 이끌자 그제야 입을 열었다.

“캡틴,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생각해봤는데 너 오늘 교대도 한 번 안 하고 온종일 여기 있었잖아. 피곤하지 않아? 나랑 낮잠이나 자러 가자. 다들 들었지? 함장님이랑 부함장님 주무시고 올 테니 그때까지 임시 함장님 말 잘 듣고 있어! 그럼 우린 자러 간다!”

커크가 기어코 스팍을 브릿지 밖으로 끌고 나왔다. 두 사람이 아무도 없는 조용한 복도에 들어섰을 때 커크가 갑자기 멈추어 서선 스팍을 향해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스팍, 나한테 할 말 있지? 어서 말해 봐.”

“…무슨 말씀하시는 겁니까, 캡틴.”

“벌칸인은 거짓말을 안 한다던 스팍은 어디 갔을까나? 너 나한테 사적으로 할 말 있거나 묻고 싶은 게 있을 땐 뭐 마려운 강아지마냥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잖아. 다 알고 있으니까 얼른 말해 봐.”

스팍은 그저 시선을 잠시 아래로 뒀다가 금방 다시 위로 올린 것 뿐이지만 커크는 스팍이 당황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커크에겐 그저 재밌는 일이었지만 스팍은 이 상황이 곤혹스러웠다. 어째서인지 커크 앞에선 종종 감정 억제가 완벽하질 못 했다. 살짝 뜸을 들이더니 스팍이 말을 꺼냈다.

“어째서 저만 임시 함장을 시켜주시지 않는 겁니까?”

“…뭐? 푸하하하-! 나한테 할 말이 그거였어? 우리 부함장님 그게 그렇게 서운했구나!”

“제 감정을 멋대로 판단하지 말아주십시오. 저는 그저 이해가 가질 않아서 묻는 것뿐입니다.”

“네 눈에 ‘나 엄청 서운해요.’라고 쓰여 있는데? 하여간 솔직하지 못 하다니까. …알았어, 그만 놀릴 테니 그렇게 험악하게 보지 마. 으음, 네 질문에 대한 답이라면…. 스팍, 너한테는 함부로 임시 함장 자리를 맡기지 않을 거야.”

장난스럽던 커크가 진지하게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스팍은 울렁거리며 무언가 올라오려는 것을 간신히 막았다. 또다시 감정 제어가 뜻대로 되지 않으려 했다. 커크의 말대로 나는 서운했던 걸까? 그렇다면 어째서? 스팍은 인간들의 감정에 대한 정의 중 ‘서운하다’라는 말의 뜻을 떠올렸다. 서운함, 마음에 모자라 아쉽거나 섭섭한 느낌. 흔히 기대에 못 미칠 때 느끼는 감정. 나는 커크에게 무얼 기대하고 또 실망하고 있는 것일까.

“내가 너에게 임시 함장을 맡길 때는 정말 네가 필요한 때일 거야. 너는 내가 믿고 USS 엔터프라이즈를 맡길 수 있는 유일한 대원이니까.”

그리고 스팍은 또다시 급격한 감정 변화를 억제해야 했다. 방금 전까지 서운함을 억누르고 있었는데 이젠 순식간에 솟아나는 정체 모를 두근거림을 억누르려니 힘이 들었다. 커크의 말 한 마디에 이렇게나 감정적으로 휘둘리는 자신이 부끄러웠지만 이상하게도 그리 싫지는 않았다.

“네 질문에 대한 답이 마음에 들어? 그럼 이제 잠이나 자러 가자. 나 농담 아니라 진짜로 피곤해. 오후 내내 별 이상한 핑계를 대면서 브릿지 들락날락 하려니까 죽겠다, 아주! 근데 스팍, 너 귀 끝이 녹색으로 물든 것 같은데. 어디 아픈 거야? 본즈를 부를까?”

“아닙니다, 캡틴. 잘못 보셨겠죠.”

스팍이 단호하게 대답하고 서둘러 앞장섰다. 피곤해서 잘못 본 건가 싶어, 커크가 한 차례 눈을 비빈 다음 다시 앞장 선 스팍의 뒤통수 양옆에 붙은 뾰족한 귀를 유심히 바라보았지만 귀 끝은 아까보다 더 녹빛을 띠었다. 역시 내가 제대로 본 게 맞지? 하여간 벌칸인은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커크가 궁시렁거리며 스팍을 뒤따라 걸었다.

USS 엔터프라이즈 호는 오늘도 평화로웠다. 한 벌칸인만 빼고 말이다.

- 2013. 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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