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비지타임 2차 창작

[승재승] 맡겨둔 것

가비지타임 / 승대재유 / 재유승대

진재유에겐 사람을 볼 때 제일 먼저 얼굴 표정과 입 모양을 보는 습관이 있었다. 이건 코트 위에서 공을 운반하는 포인트 가드 역할을 하면서 몸에 익은 습관이었다. 같은 유니폼을 입은 4명의 선수들, 그 중 누구한테 공을 줘야 하는지는 그들의 위치나 상황도 중요했지만 본인의 의사 표현도 못지않게 중요했다. 좋은 기회를 만들어 내는 선수들은 핸들러에게 적극적으로 패스를 요구한다. 그건 소리보다도 몸짓이나 표정에서 먼저 읽히곤 했다.

같은 팀의 막내들이 '한 게임 뛰면 다 친구~!'라고 말하고 다닐 땐 웃어 넘겼지만 진재유도 그 말엔 어느 정도 동의하는 편이었다. 친구까진 아니어도 한 게임 뛰고 패스 몇 번 주고받으면 그 사람의 성향이 눈에 보였다. 이 사람이 자기 의견을 적극적으로 피력할 땐 어떤 표정과 어떤 말을 하는지, 망설이고 있을 땐 어떤 얼굴을 하는지. 그래서 상대방이 나한테 보내는 비언어적 메시지를 읽고 그가 내게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건 진재유에게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정말 재미있는 사실은, 이러한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은 코트 위에서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진재유는 지금 임승대의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일정 거리를 두고 재유의 주변을 계속 맴돌면서도 좀처럼 가까이 오질 않았다. 시선은 재유에게서 떼지 않으면서,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가 했다. 저건 임승대가 뭔가 할 말이 있다는 신호였다. 그런데 지금 그 말을 해도 되나 확신이 안 서는 상태다. 그래서 저렇게 뭐 마려운 강아지 마냥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거다. 재유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쌍용기 결승 전에 이현성 감독이 재유에게 물었었다. 임승대 달라진 점이 없냐고. 그때 진재유는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2년이라는 그들 사이의 공백이 만든 거리감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던 파트너조차 낯설게 만들었다. 그러나 경기가 끝난 지금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달라진 점은 없다. 임승대는 진재유가 잘 알고 있는 그대로였다.

자신에게 집요하게 따라붙는 시선을 느끼며 진재유가 힐끗 임승대를 보았다. 여전히 망설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재유는 순간 떠올릴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 표정을 본 게 언제였는지를.


그 날은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진 가을날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날의 임승대는 조금 이상했다. 평소보다 유독 말수가 적고 기운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눈에 띄는 변화는 그게 다였기에, 오늘따라 컨디션이 좀 안 좋은가보다 하고 말았다. 그래서 그날 갑자기 승대가 본가에 올라간다고 했을 때도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쉬고 싶어서 그런가 보다 하고. 지금껏 승대가 본가에 간다는 말을 당일에 갑작스럽게 통보한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도.

그랬다. 나는 그날 승대가 나한테 보내고 있는 메시지들을 알아차리지 못 했다.

해가 지기 시작한 체육관엔 농구공이 코트 바닥에 부딪혔다가 튀어 오르는 소리만 울리고 있었다. 어째선지 홀로 남은 코트 위가 유달리 고요했다. 그 순간 체육관 문이 열리는 소리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묵직한 발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승대였다.

"재유, 인제 그만 가자."

익숙한 목소리에 돌아보자 문 앞에 서 있는 승대가 보였다. 사복을 입고 있는 승대는 커다란 가방을 양쪽 어깨에 하나씩 메고 있었다. 가방의 무게 탓인지 유독 어깨가 축 처져 보였다.

"승대 니 바로 올라가나?"

"어. 가기 전에 니한테 인사하려고 왔다."

고개를 끄덕이며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훔쳤다. 들고 있던 농구공을 보관함에 넣어두고 뒷정리를 하다가 승대 쪽을 힐끔 보았다. 가만히 서서 발 끝으로 바닥이나 두드리고 있는 모습이 왠지 낯설게 느껴졌다. 보통은 대충 하고 나오라며 칭얼거리거나, 역시 내가 없으면 안 된다는 둥 못 이기는 척 와서 도와주곤 했으니까. 그제서야 승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내리 깐 눈과 앙다문 입술. 그건 가라앉아 보인다는 표현이 맞았다. 단순히 기분만이 아니라 그 커다랗던 승대가 작아 보일 정도로 그는 가라앉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묻지 못 했다. 승대가 만들어낸 무거운 공기는 나조차도 가라앉게 만들었다. 망설이는 사이 승대가 먼저 입을 뗐다. 다 했으면 가자. 그리곤 내 답을 듣기도 전에 먼저 문밖을 나섰다. 엉겁결에 따라나서느라 결국 하고 싶었던 말은 하지 못했다. 앞서가던 승대를 따라잡느라 살짝 뛰는데 바깥의 찬 공기에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옆에서 추위에 드러난 팔을 문지르고 있으니 승대가 물었다.

"니 겉옷 안 가져왔나?"

"어. 갑자기 이래 추워질 줄 몰랐네."

"있어봐라."

한 쪽 어깨에 맨 더플백을 열더니 무언가 찾는 듯 뒤적였다. 잠시 후 손에 잡혀 나온 건 승대가 입던 지상고 농구부의 저지였다.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그 저지는 내 어깨에 둘러싸이고 있었다. 가만히 두 눈만 끔뻑이는 나를 보며 승대가 뭐하냐는 듯 턱을 까닥였다. 그제야 승대가 옷깃을 펼쳐주고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커다란 구멍에 서둘러 양팔을 끼워 넣고 나니 한술 더 떠서 여며주기까지 했다. 야가 오늘 와이리 친절하노. 낯선 친구의 모습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 하고 있는데 승대는 갑자기 내 앞에서 무릎까지 꿇었다. 그러더니 열려 있는 저지 맨 아래에 있는 지퍼의 짝을 맞추더니 위로 끌어올렸다.

지이익. 지퍼가 서로 맞물리는 소리가 들리고 마침내 다 잠겨서 끝까지 올라 왔을 때 승대와 눈이 마주쳤다. 내 숨결이 승대의 콧대에 부딪힐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참 이상한 느낌이었다. 수년간 가까이서 수도 없이 봤던 승대의 얼굴이 그날따라 달라 보였다. 내가 눈을 피하지 않자 승대의 눈빛이 먼저 흔들렸다. 결국 먼저 시선을 피한 건 승대였다. 웅크렸던 몸을 일으키자 순식간에 위로 솟았다. 내 시선은 승대의 얼굴을 따라갔지만 승대는 이미 고개를 돌려서 나를 피하고 있었다.

"내가 아도 아니고.... 이래 해줄 필욘 없는데. 암튼 고맙디."

민망함에 나도 모르게 말이 주절주절 나왔다. 승대가 고개만 살짝 돌려서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애써 모르는 척 딴청을 부렸다. 그러자 커다란 저지 탓에 손이 조금도 삐져나오지 못해 팔랑이는 소매 끝이 보였다. 일부러 양팔을 들어서 위아래로 흔들었더니 무슨 탈춤 추는 사람 마냥 빈 소매가 공중에서 나풀나풀 거렸다. 마치 어른 옷을 뺏어 입은 어린애 같은 모양새라 스스로 봐도 웃겼다. 그 꼴이 나만큼이나 승대도 우스웠는지 위에서 승대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푸흡. 아, 니 진짜 잼민이다."

"내가 봐도 좀 웃기긴 하다. 니 옷이 내한테 이래 클 줄은 몰랐네."

"딱 봐도 안다. 인제 가자. 춥다."

우리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운동장을 가로질러서 학교 교문을 통과하는데 어느새 내가 승대보다 살짝 앞서서 걷고 있었다. 승대의 걸음이 조금 느려진 탓이었다. 살짝 돌아보자 한 발자국 뒤에서 나를 보고 있는 승대가 보였다. 그러나 그건 나를 보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는 내가 입고 있는, 자신의 것이었던 파란색 저지를 보고 있었다.

그때는 몰랐다. 이 모든 것이 승대가 내게 보내고 있는 메시지였는데도.

교문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버스 정류장 앞에서 우리는 멈추어 섰다. 부산역에 가려면 여기서 버스를 타고 가야 했다. 정류장 앞에 서서 우물쭈물하는 승대를 지나쳐서 내가 먼저 벤치에 앉았다. 그리고 옆자리를 톡톡 치며 말했다.

"앉아라. 가방도 무거운데."

"숙소로 바로 안 가나?"

"응. 니 가는 거 보고."

승대가 내 옆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는 말없이 버스 도착 시간을 안내하는 전광판만 보고 있었다. 일부러 의식해서 내 시선을 피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승대의 옆얼굴을 가만히 보았다. 무슨 말이라도 꺼내야 했다.

"이 옷은 안 가져가도 되나? 가방에 넣어뒀으면 가져가려고 한 거 아이가?"

"안 가져가도 된다."

"이제 개안타. 땀 다 식어서 안 춥다."

"진짜 안 줘도 된다. 니 입어라."

옷을 벗어주러 잠긴 지퍼로 향하던 내 손을 승대가 붙잡아 저지했다. 그때의 나는 눈치 없이 승대의 물건을 돌려줘야 한다는 생각 밖에 하지 못 했고, 그런 나를 승대는 필사적으로 막으려 했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잠시 옥신각신했다. 결국 먼저 백기를 든 건 나였다. 내가 얌전해지자 승대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내가 나중에 달라고 할 게. 그때까지 니 가지고 있어라."

"알았다."

내 대답을 듣자 승대는 다시 시선을 피했다. 마침 기다리던 버스가 골목 끝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승대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나도 따라 일어섰다. 나는 늘 그렇듯 승대에게 인사를 건넸다.

"승대. 집 잘 다녀와라. 올 때 연락하고."

"응."

승대는 짧게 대답하고 고개만 까닥였다. 잠시 무언가 고민하는 듯했다. 날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가 했다. 그러나 망설이는 사이 버스는 정류장에 도착했고 어서 타라는 듯 문이 열렸다. 승대는 결국 시선을 거두었다.

"...니도 잘 있어라."

버스에 오르면서 승대가 내게 건넨 마지막 말이었다. 나는 그런 승대에게 웃으면서 손이나 흔들어주었다. 승대는 묵묵히 버스에 올라 빈 자리에 앉았다. 인도 반대편 창가 쪽 자리였다. 버스가 출발해서 멀어지는 동안, 승대는 내 쪽을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승대를 싣고 떠나가는 버스를 정류장에 서서 멀거니 바라보았다. 버스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그제서야 발을 떼었다. 숙소로 향하는 발걸음이 이상하게 무거웠다. 나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어떤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날의 내가 승대에게 꼭 해야 하는 말이 있었다.

'승대, 니 내한테 무슨 할 말 있나?'

한 마디면 됐었다. 그 한마디만 물었으면 됐는데.

나는 확신한다. 내가 먼저 물었다면, 승대는 분명 내게 숨기는 것 없이 말했을 것이라고. 그날의 승대는 겁을 먹고 있었다. 잘못한 게 하나도 없는데도, 마치 자신이 큰 죄를 지은 것 마냥 나를 피했다. 그러면서도 피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내게 말하고 싶어서 몇 번이나 입을 열어보려 했었다. 단지 그가 이겨내기엔 두려움이 너무나 컸을 뿐이다.

우리의 플레이는 늘 내가 시작하고 네가 마무리를 했었다. 그러니 내가 먼저 운을 떼었다면, 우리의 관계는 단절되지 않고 흘러갔을 것이다.

숙소에 도착하자 코치님께서 조용히 나를 비롯한 1학년들을 불러 말씀하셨다. 승대가 다른 학교 농구부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고. 나는 잠들기 전까지 그날 보았던 승대의 얼굴을 떠올렸다. 겁 먹고 망설이던 그 얼굴을.

며칠 뒤, 고민 끝에 내가 먼저 문자 메시지를 보냈지만 승대는 끝내 읽고도 답이 없었다.


지상고 농구부는 적은 인원에 비해 늘 소란스러웠다. 경기장을 벗어나 주차장으로 향하는 짧은 거리에서도 누구 하나 입이 멈추질 않았다. 진재유는 그중 제일 조용한 편이었다.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그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지상고와 장도고가 치열하게 우승컵을 두고 다퉜던 그 코트 위에서, 임승대와 진재유는 해묵은 앙금을 모두 털어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진재유는 아직도 그들 사이가 단절되어 있다고 느꼈다. 그들 사이엔 아직 벽이 남아 있었다. 이 벽을 뚫지 않으면 그들은 다시 흐르지 못할 것이다.

지상고 농구부의 승합차 뒤쪽으로 장도고 농구부의 버스가 보였다. 차량으로 향하는 검은 옷의 장도고 농구부 학생들 사이로 삐죽 솟아오른 임승대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순간 진재유는 자신이 마치 그날의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 것만 같았다. 저 버스에 이대로 승대를 태워보내면 안 된다. 승대에게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승대야!"

진재유의 외침에 임승대가 가던 걸음을 멈추었다. 임승대와 진재유 뿐만이 아니었다. 그곳에 있던 두 학교의 모든 학생들이 전부 그들을 돌아보았다. 그 안에서도 진재유와 임승대는 서로만 보고 있었다. 임승대의 얼떨떨한 얼굴을 보며 진재유는 활짝 웃었다.

"니 내한테 맡겨둔 거 있제. 그거 내는 아직 가지고 있으니까."

진재유는 입고 있던 저지의 앞자락을 손끝으로 살짝 잡아 당기며 말했다. 현재 지상고 농구부원 중에서 이 디자인의 저지를 입고 있는 사람은 진재유 하나 뿐이었다. 그리고 숙소에 있는 진재유의 옷장 한편엔 같은 디자인의 저지가 하나 더 있었다. 진재유가 입기엔 너무 큰 사이즈의, 누군가가 맡겨두고 갔던 것.

"언제든 가지러 온나. 내 기다리고 있다."

이번엔 임승대의 비언어적 메시지를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진재유가 먼저 언어적 메시지를 보냈다. 임승대는 과연 답장을 할까?

"알았다."

닫힌 벽을 뚫고 임승대의 답이 들려왔다. 무너진 벽의 틈 사이로 환하게 웃는 얼굴이 보였다. 단절 된 관계가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더 이상 그들 사이엔 벽이 없었다.


부산으로 내려가는 좁은 승합차 안에서 지상고 농구부원들은 서로 어깨가 닿은 채로 여전히 왁자지껄했다. 진재유는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창밖을 보고 있었다. 차창에 비친 그의 얼굴은 어쩐지 후련해 보였다. 그때 진재유의 휴대전화 불빛이 반짝였다. 그는 화면 속 메시지를 확인하고 미소 지었다. 2년 만에 온 답장이었다.

-fin.


* 재유한테 자기 저지를 입혀주는 승대를 상상하다가 쓴 글입니다. 둘의 관계가 전처럼 돌아가려면 한 번은 대화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먼저 손을 내미는 건 재유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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