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비지타임

고백 안 하면 죽는 병 걸림

PITA BREAD by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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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29-30 빵준카페 '좋아해줘' 무료배포

어느 날 세계가 뒤집혔다. 2D와 3D, 혹은 현실과 판타지 차원을 넘나드는 그 세계가 아니라 월드와이드, 실존하는 현재의 전 세계가. 고작 숫자 7개에.

사람의 몸에 떠오른 167:59:59의 숫자는 명백한 7일의 유예였다. 숫자 위치는 모두 달랐고, 기계로 찍은 듯 반듯할 때도, 자다 쓴 것처럼 엉망인 경우도 있었다. 나이, 인종, 성별, 국가를 가리지 않는 그것은 질병처럼 주변인에게 전염시키는 형태도 아니었다. 마치 신벌처럼 조용히 찾아와 몸 어딘가에서 매초 숫자를 줄여나갔다.

그렇게 0이 되면? 그것이 신벌이라 불린 이유가 여깄다. 반드시 죽으니까.

뭣도 모르고 최초의 형벌을 받은 인간은 자기 몸에 이상한 게 생겼다며 유투브로 7일간 생방송 하며 적당히 도네를 받다 실시간으로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도네이션이 노잣돈이 된 셈이다. 그리고 방송을 보던 외국인이 번역기를 돌려 더듬더듬 채팅한다.

그 숫자 내 몸에도 있는데. 야너두? 야나두! 지구촌 대통합의 순간이었다.

사실 세계가 계속 뒤집힌 건 아니다. 불시에 이유 없이 벌을 받게 된 이들 중에서 마침내 7일이 지나고도 생존한 사람이 나타났다. 손등의 숫자가 줄어드는 녹화 영상으로 인증한 그는 깨끗해진 손등을 보이며 인류애 넘치게도 자신의 생존 방법을 무료로 공개했다.

고백해.

무사히 숫자를 지우고 반년의 짝사랑도 끝냈다는 TMI를 수줍게 알린 그가 다시 말했다. 고백해. 숫자 봤을 때 떠오른 그 사람에게. 그것만이 당신들을 구원할 테니. 영상은 넉넉한 웃음을 지은 그가 연인을 껴안으며 끝난다. (현재 이 영상 고정 댓글은 출산 소식이다.)

당연하게도 조작이니 합성이니 악플이 달렸지만 절실한 사람들은 비용도 필요 없는 방법을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미 그들은 기도, 기부, 퇴마를 비롯한 온갖 비과학적 방법과 레이저시술 따위의 기술적 도움에 주머니를 털었으니까.

그렇게 한 개의 영상에서부터 시작된 전 세계적 고백 붐은 전부 커플 양산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으나 어쨌든 인류의 사망율 감소에는 크게 기여했다.

신벌로 여겨졌던 초자연적 현상이 10년 넘게 이어지면서 거짓말 같게도 세계보건기구는 해당 현상을 병으로 명명한다. Profess or Die. 줄여서 PoD. 한국어로 포드. 그러나 서술형 제목 붐인 한국 웹소계에서 지은 별명이 엄청난 어그로를 끌어 포드보다 더 많이 불리는 이름이 있었으니.

고백 안 하면 죽는 병 걸림

                             └ ㄹㅇ임?

일련의 정보를 훑은 전영중의 감상은 '외국 애들은 이름 진짜 대충 짓네'와 '한국인은 역시 드립에 미쳐있구나'였다.

괴현상은 괴질로 격하되었고, 완치법이 분명한 괴질은 이제 공중파 드라마 소재로나 쓰일 쉰 떡밥이었다. 예전에는 사고친 연예인의 배역이 뺑소니, 유학, 입대를 이유로 사라졌다면 이제는 포드로 깔끔하게 저승행이었다. 잘나가는 연예인조차 포드에 걸린 건 이제 기삿거리도 안 되는 시대다.

초등학교 때부터 포드를 접해 독감이나 포드나 별반 차이 없이 여기는 전영중이 새삼스레 정보를 찾아본 이유야 간단하다. 문제의 일곱 자리 숫자가 팔에 나타났으니까.

막 깊은 잠에 빠져들던 찰나, 왼쪽 팔에서 느껴지는 뜨끔한 감각에 비상사태를 직감한 본능이 뇌를 두드려 깨운다. 자연스레 팔을 들었고, 발광기관이 없는 사람의 몸에서 숫자가 희미하게 빛을 발하며 수를 줄였다. 167:59:54, 53, 52…….

막 자정을 넘긴 시점이었다. 날짜 교체와 동시에 찾아온 죽음에 전영중은 침착하게 팔로 눈을 덮었다.

처음 든 생각은 '죽을까?'였다가, 일단 진정했다. 쌍용기 중인데 주전이 죽으면 아무래도 실례니까……. 슬그머니 고개를 든 생존 욕구에 자기도 모르는 정보가 있나 검색했다. 그러나 독감? 병원 가세요. 포드? 고백하세요—수준의 알고 있던 내용만 재확인하고 핸드폰을 엎는다.

168시간이었던 숫자를 마주한 순간 떠오른 사람은 성준수였다.

역시 죽어야겠다. 고백? 무슨 고백? 준수한테? 뭘 고백해? 거기서 준수가 왜 떠올라? 하하, 진짜 웃긴다. 좋아, 죽자. 유서에 성준수 세 글자만 써놓고 죽어야지. 죽기로 정했으니 일단 잠이나 자자. 전영중이 빙긋 웃으며 눈을 감았다.

오전 7시 기상으로 시작되는 고교 농구선수의 하루에서 그날 전영중의 수면은 단 3시간이었다.

“너 괜찮냐?”

양손에 몬스터와 핫식스를 들고 나타난 이의 안색을 살핀 박교진이 묻는다.

“응, 괜찮아.”

성격 나쁜 준수는 여기서 아니라고 답했겠지만 성격 좋은 영중이는 괜찮다고 말할 줄 아니까.

거기까지 생각하고 핫식스 뚜껑으로 제 이마를 찍는다. 콱! 여기서 성준수를 왜 떠올려? 이마 한가운데 동그랗게 찍힌 도장에 박교진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다시 묻는다. 너 괜찮냐? 응, 괜찮아.

시합은 5시인데 전영중은 오전 10시부터 암슬리브를 하고 있었다. 경건하게 결전을 준비하는 마음가짐…은 아니고, 빌어먹을 숫자 때문에.

팔꿈치 안쪽 바로 아래, 어두운 곳에서 어렴풋이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만 빛나는 숫자는 오히려 밝은 곳에서 알아보기 어렵게 희미했다. 잘 보이는 건 아니고, 안 보인다 하기도 애매했다. 뭐 이따위야? 그래도 살펴보면 포드에 걸렸다는 건 알아볼 수 있을 정도라 의용밴드로 가렸더니 지금 이게 무슨 짓이냐고 항의하듯 밴드 밖으로 보일 정도로 빛이 강해졌다.

숫자를 가리려 이것저것 시도해 본 결과 빛은 암슬리브와 저지 안에서만 잠잠했다. 부자연스럽게 가리는 건 안 되고 평소 입던 것들은 괜찮은 모양이었다. 고백해야 하는 대상처럼 지랄맞기 그지없었다. 이 날씨에 긴팔을 입을 수 없으니 암슬리브를 할 수밖에.

가뜩이나 졸린데 아침부터 숫자를 가린다고 별짓 다 하느라 진이 빠진 머리로 생각한다. 고백 까짓거 그냥 아무한테나 하면 안 되나?

“교진아.”

“응?”

“사랑한다.”

오답이라는 듯 숫자가 새겨진 왼쪽 팔에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갑작스레 고백 공격을 받은 박교진은, 음.

“오늘 지상고라 어렵진 않을 텐데, 너무 정신 놓진 마라.”

수면 부족으로 정신 나간 친구를 어여삐 여기기로 했다.

공이 튀기 전 그보다 빨리 시선을 읽고 몸을 움직인다. 통. 타우린과 카페인의 과다 주입에 강제로 정신이 맑아지고 심장이 평소보다 빠르게 뛰었다. 영중아, 도핑 걸리겠다. 몬스터와 핫식스를 차례로 들이키는 모습에 놀란 이휘성의 모습이 떠오르고, 빠르게 지운다. 공 소유권은 고작 24초. 그러나 28미터 코트 끝에서 끝을 달리는 데는 5초도 걸리지 않는다. 농구는 집중하지 않으면 일 분 만에 몇 점이고 내줄 수 있는 운동이다. 지상고가 쉬운 팀이라 해서 대충 할 생각은 없었다.

한 달여 남짓한 기간 동안 죽어라 연습했는지 전보다는 경기력이 좋아졌다. 신유고를 이겼다는 게 마냥 요행은 아닌가 보지. 아니면 내 상태가 정상이 아니든가. 전영중은 예상보다 적은 점수 차를 초조하게 보다 슬쩍 지상고 벤치를 흘긴다. 2쿼터부터 분위기가 좋지 않더니 기어코 큰 소리로 싸우고 부상당한 선수 교체로 들어왔던 일 학년은 울고 있었다.

끝났네. 벤치멤버도 없는 팀이 주전끼리 싸움 났으면 경기는 던진 거나 마찬가지다. 초보자들에게 질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은 일단 내려놓는다. 그런데도 마음 한구석의 초조함은 가시질 않았다.

전영중은 암슬리브 아래, 숫자가 빛나고 있을 곳을 보았다.

농구한다는 건 저보다 잘 하는 사람을 인정하고 그들과 합을 맞추며 성장하는 과정이라고 누가 말했다. 아니다. 주전에서 밀리고, 경기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하면서 드는 감정은 그보다 어둡고 무기력한 것이었다. 그저 제가 가지지 못한 재능에 대한 질투를 추하다 여기며 꾹꾹 눌러 삼켰을 뿐이다.

그걸 인격적 성장이라 할 수 없다. 좌절하지 않기 위한 방어기제였지.

단지 키가 크다는 이유로 대학이 걸린 고교리그에 1년 경력으로 주전 단 녀석들을 부러워하지 않을 방법이 없다. 농구? 그거 그냥 키 큰 애들이 뛰어서 대충 공 집어넣으면 끝 아냐? 아무것도 모르고 하는 소리를 웃어넘기고, 그렇지 않다는 걸 증명하려고 이를 악물고 뛰어도 말도 안 되는 높이에서 블락이 들어온다. 그러면 마구 내뱉던 말들이 맞구나. 내 노력은 타고난 것 앞에 소용없구나 또 체념하게 되는 지긋지긋한 반복.

성준수의 팀이 그랬다. 기존에 있던 빅맨은 서울의 좋은 학교로 떠나고 길거리에서 어중이떠중이 모아 겨우 다섯 명 채워 코트에 올라온 밑바닥 팀. 키가 커서 넣은 1년 유급생 둘에 슛 없는 슈팅가드. 파울 전략은커녕 제 파울 관리도 못 하는 초보자들에게서 무슨 가능성을 봤는데? 그런 학교가 아니면 네가 주전될 가능성이 없어 보였어? 그렇게 떠난 네게 무슨 말을 해?

전영중이 팔을 뻗으며 높게 뛴다. 자세가 무너지며 쏜 슛이 다시 림을 통과한다. 삐거덕거리던 팀웍이 살아나고, 성준수의 투지가 불타오르는 게 보였다. 방법이 없다 생각한 순간에 기어코 답을 찾아내던 눈이다.

버틴다는 어중간함을 견디지 못한, 승리에 대한 갈망이 가득 서린 시선.

전영중은 제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이가 부러웠다. 시작은 질투가 아닌 동경이었다. 그때는 재능이란 걸 생각하지 않고 공을 튕겼으니까.

신나서 뛰다 곧잘 울기도 했다. 별거 아닌 게임에도 지면 분해서 씩씩거리던 어린애는 승패를 결정짓는 공이 제게 주어지는 게 무서웠다. 공 하나 못 넣으면 모든 게 잘못될까 봐. 나 때문에 지는 게 싫어서. 분할 것 같아서.

그래서 저 대신 거침없이 클러치 슛을 던지는 팔을 좇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던 시기였다. 길게 뻗은 팔은 중압감 따위 모르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지금처럼.

하프타임까지만 해도 성준수와 싸우던 23번과 엉켜 뒹굴면서도 둥글게 감기는 손끝을 본다. 확신에 찬 시선이 3미터 위의 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성준수가 떠올랐던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경기장 계단에 앉은 전영중이 다리를 달달 떨었다. 경기도 없는 날인데 저지를 껴입고는 더운지 목덜미에 땀이 맺혔다. 벗으라는 데도 팀복이니까—라며 느닷없이 늑대정신을 발휘하며 죽어도 안 벗는다. 어휴, 쫌. 보다 못한 지국민이 허벅지를 걷어찼다.

“다리 작작 떨어라. 복 나간다.”

“지금 복이 중요한 게 아냐…….”

“꼴보기 싫다고.”

꼴 보기 싫어도 네가 참아. 127시간 후에는 보고 싶어도 못 보게 될 수 있거든. 걷어 올린 소매 안쪽 아슬아슬하게 가려진 숫자는 전영중만 알 수 있을 정도로 흐리게 빛났다. 빌어먹을 숫자 때문에 여름에 저지도 못 벗고. 빌어먹을 포드. 빌어먹을 성준수.

더운 숨을 길게 뱉고 꺼진 화면에 엄지를 댄다. 잠금이 풀리고 준수 두 글자만 박힌 채팅창이 나타났다. 작년 말 [생일 축하해] [ㄳ] 한 문장씩―성준수는 문장조차 아니었다― 주고받은 게 마지막인 채팅방에 새로운 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해 전영중이 '준수야' 세 글자만 입력해 둔 지 벌써 10분이다. 그 뒤를 뭐라고 채워야 할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카카오톡이 입력 중이라고 표시해 주는 간악한 어플이 아니라 다행이었다.

사실 뒤 문장을 고민할 차례도 아니었다. 그래도 '준수야'는 간지럽지. 걔는 날 야, 새끼야, 그렇게 부르는데. '준수야'에서 '야'만 남겼다가 마저 지운다. 그래도 친구 사이에 '야'는 아니지. 내가 준수만큼 싸가지 없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성준수'를 썼다가, 친구 사이에 너무 딱딱한 것 같아 삭제. 역시 무난하게 '준수'가…….

“전영중 여자친구 생겼냐?”

“뭐?”

“아까부터 폰만 쳐다보네. 너 그러다 국민이 꼴 난다?”

“뭔 소리야. 내가 뭐? 뭔 꼴인데?”

제풀에 찔려 화면을 끄고 어색하게 웃었다. 여자가 아니라 성준수라고는 입이 찢어져도 말할 수 없었다. 걔한테 널 동경했다고 고백해야 한다는 것도. 아, 그냥 죽을까. 역시 성준수한테 그런 말을 하느니 혀를 끊어버리는 게 나을지도. 목숨과 자존심이 막상막하의 줄다리기를 하는데 핸드폰이 우웅 우웅, 두 번 울린다.

[존나?]

존나 이게 뭔 소리야. 성준수의 이름으로 떠오른 미리보기에 놀라 톡을 키자 제가 발송한 [ㅈ ㄴ]라는 메시지가 보였다. 아니 이게 뭐야? 왜 이딴 게 갔어? 이어지는 메시지를 보면 당황스러운 건 성준수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뭐지? 왜 갔지? 아, 준수라고 치던 게 오타가? 그게 또 보내졌어? 맙소사. 기가 막힌 우연의 산물에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준수야 그게 아니라 네 이름 치다 오타가 났는데…… 핸드폰 위를 토도독 움직이던 손가락이 멎는다.

오타 좀 날 수 있지. 다짜고짜 욕부터 박는 애가 잘못 아니야? 하필 네 이름이 준수인걸 어떡해? 그러니까 그따위로 오타 나지.

코첩국 선언에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이내 우우우웅, 핸드폰이 길게 울린다. 준수라는 이름의 전화 수신화면을 뒤집어 무시했다. 3학년은 어느새 지국민 여자친구 이슈로 한창 토론 중이었다. 청춘이네. 쓸모없는 데에 기운 빼고. 전영중도 청춘인 주제에 그런 생각을 했다. 물론 곧 죽으니까… 라는 궁극의 가드기로 정신 승리 중이긴 했다. 그러다 3학년을 흥미롭게 보는 조재석을 발끝으로 건드린다.

“재석아, 너는 누구한테 동경한다던가 그런 말 쉽게 할 수 있어?”

“음, 네.”

조재석은 별 고민도 하지 않고 선뜻 대답했다. 얘는 생각을… 안 하나? 전영중이 실망한 표정을 짓자 조재석이 덧붙인다.

“저야 집에 형 있잖아요. '존경하는 농구 천재 조형석 님, 저한테 미친 센스와 근육 좀 내려주세요' 하고 납작 엎드리면 근육은 못 받아도 노란 거 두 장은 뚝 떨어지는데.”

상대를 잘못 잡은 게 맞네. 우우우웅. 성급하게 끊겼다 다시 울리는 전화를 주머니에 넣는다. 조재석은 시큰둥한 반응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아예 전영중을 보고 돌아앉았다.

“뭐에요? 고등부에 갑자기 꽂힌 사람 생겼어요?”

그건 아니고, 동경했다고 말해야 하는 사람은 생겼어. 안 하면 죽거든. 조금 전까지는 포드 때문에 죽을 거 같았는데, 이제 준수도 날 죽일 것 같아. 고백하든 안 하든 죽는 거 아냐? 시시각각 조여오는 예리한 사망각에 전영중이 쓸쓸한 표정을 짓는다.

“설마 최종수?”

“미쳤어?”

“아니면 강인석?”

“아니니까 그만하자. 내가 실언했다.”

“디펜더라면 이규도 괜찮고, 슈터 중에는 성준수도 괜찮…….”

“준수가 네 친구야?”

“잉? 죄송합…….”

“그리고 걔가 뭐가 괜찮아. 손목으로 던져서 경기 후반에 비리비리한 거 못 봤어? 걔 그리고 슈팅 원툴이라 디펜스 제대로 붙으면 득점 바닥 치잖아. 돌파는 발 느려서 맨날 막히는데 지상고에 준수 빼고 마땅한 득점원도 없어서 패턴도 결국 뻔한 거 몰라? 요새 맞지도 않는 포워드 들어가서 리바 따낸다고 바둥거리는 거 가당찮더라. 점프 딸리고 몸싸움은 밀리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날아가는데 무슨 포워드?”

전영중은 거의 기다렸다는 듯 말을 쏟아냈다.

입을 벌리고 잠자코 듣던 조재석이 눈을 가늘게 떴다. 다른 3학년들은 이름만 불러도 뭐라 안 하더니 왜 준수 형한테만 그러나 했네. 이 형, 그냥 필리버스터 하고 싶었구나. 그리고…….

“보통 그렇게까지 자세하게 보진 않죠.”

형, 어디 사이버렉카 버튼 있어요? 제가 누른 거 아니죠? 이어지는 말에 전영중은 할 말을 잃었다. 그렇구나. 보통 그렇게까지 살펴보진 않는구나.

착잡하게 끄덕인 전영중이 어색해진 분위기에 뒤늦게 덧붙인다.

“……사실 너야.”

“녜…?”

“널 존경했다고.”

우우우우우웅. 드물게 말이 막힌 조재석이 침묵하는 사이에도 전화가 울린다.

하나같이 끈질겼다. 빛나는 숫자도, 저 전화도. 주머니의 송곳처럼 자꾸만 튀어나와 제게 성준수를 강요하며 들쑤신다. 전영중의 우울한 낯에 조재석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키 5센치만 나눠주세요.”

“그건 좀.”

이번에도 오답이라는 듯 숫자 부근이 욱신거렸다.


원중고와 신유고의 예선 마지막 경기 당일, 상평고를 이기고 조별 예선 1위에 오른 주인공들이 관중석에 앉아 있었다. 리그가 끝날 때까지는 경기장 근처 숙소를 대관하니 시합 없는 날이면 어느 학교든 으레 보러온다. 원중고든 신유고든 본선 갈 확률이 높으니 전력 분석이라 해도 별난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멀리서 성준수를 보자 꼭 저를 만나러 온 것처럼 가슴이 뛰었다.

빤히 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신유고 쪽을 보던 성준수가 고개를 돌려 눈이 마주친다. 평소보다 온화하게 풀어진 얼굴이 대놓고 구겨졌다. 뭐지? 전영중은 심사가 꼬이는 것을 느끼며 숫자가 위치한 곳을 손으로 덮었다.

아, 인사도 안 해준다?

물론 어제 어그로를 끌긴 했지. 근데 그게 내 잘못이야? 준수가 다짜고짜 카톡으로 욕했잖아. 쟤가 저러는데 무슨 말을 해. '존경하는 성준수 님, 사실 초등학교 때부터 냅다 클러치 슛을 던지는 담력을 동경했습니다. 제게도 블락당할 걸 알면서 망설이지 않고 슛할 용기를 주세요.' 생각해 보니 웃기다. 협회장기 내내 운영 말아먹고 심리전도 다 걸려들었으면서 이번 예선 한 번 겨우 이겼다고 기다렸다는 듯 훈수 두더라? 준수 훈수충이었어?

이쪽을 흘끔 봤다가 아예 턱을 괴고 반대쪽으로 돌린 녀석을 보며 이제 104로 줄어든 숫자를 터트릴 기세로 쥐었다.

죽어도 말 못 하지. 어차피 한 번 죽는 인생, 땡겨서 화끈하게 가보자고.

한동안 합이 잘 안 맞던 신유고 포인트가드와 센터 콤비가 지상고와의 경기를 기점으로 부활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과할 정도로 잘 뛰어다니는 파워포워드가 하나 들어왔다는 것도.

전영중의 컨디션은 평소와 같았다. 지상고 때와 달리 푹 잤고 몸도 적당히 풀려 가뿐하게 코트를 달렸다. 그저 원중고의 사인이 안 맞고, 신유고는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 리바운드 하나 뺏기고, 들어가야 하는 공이 안 들어가고. 마음을 잡아보려 해도 간단한 심리전에 견제를 놓친다.

“다시! 받아가!”

공을 받으러 달리는 조신우를 맹추격한다. 마크하기 위해 달려간 전영중과 이휘성의 사인이 엇갈린 잠깐의 틈에 강인석이 돌파한다. 당황한 건 두 사람뿐, 조신우는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빠른 투맨게임 이 둘의 특기였다. 공은 어김없이 림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그물을 지나 힘없이 흘러내리는 것을 받아 조재석에게 넘긴다.

“뭐 저리 빨라? 패턴은 아닌 거 같고, 사인?”

“사인 아니야. 그냥 아는 거지.”

이휘성의 혼잣말에 답한 전영중의 기분이 끝없이 가라앉았다. 저건 오랜 기간 함께 뛰었기에 나올 수 있는 플레이다. 경험적으로 체득한 습관, 포지셔닝 그런 것들. 너라면 그렇게 움직일 거라는 신뢰.

처음 농구를 시작했다 한들 끝까지 함께하는 경우는 드물다. 같은 농구 교실로 시작해도 학교는 갈릴 수 있고,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의 진학은 실적과 실력에 따라 갈린다. 농구부가 있는 기내초에서 시작해 자연스레 원중고까지 진학했던 준수와 제가 특이 케이스라는 건 안다. 대학교, 프로, 앞으로 농구를 계속한다 한들 아무리 노력해도 함께 뛸 가능성보다 갈라질 확률이 더 높다는 것도.

그런데 우리는 같이 했잖아. 내가 안쪽에 갇히면 누구보다 먼저 패스 경로를 찾아 3점 라인에 서 있었잖아. 보지도 않고 공을 던져도 분명 네가 받아줬으니까. 너라면 수비를 달고서라도 몸을 던져 가며 슛할 거라는 믿음. 내가 그 수비를 온몸으로 막아줄 거라는 너의 신뢰. 끝내 전광판에 3점을 더하고 넘어진 녀석을 일으켜 주면 고맙다는 말 대신 뒤통수를 치고 가는 일련의 흐름에 가쁘게 쉬는 숨마저 달게 느껴지던 시기가 실존했다.

“야, 야! 마지막 기회야! 한 번만 좀 막아봐 새끼들아!”

그럼 너도 날 응원해야 하는 거 아냐? 이게 나 혼자만의 추억이야? 아득바득 추격한 경기 막바지, 원중고가 아닌 신유고를 응원하는 목소리에 목덜미가 뻐근해졌다.

“조재석! 대충 높이 던져!”

내가 성준수 좋은 짓 해줄 줄 알고? 포드 때문에 죽더라도 너 신나는 꼴은 못 보지. 전영중이 수비가 빈 곳을 향해 질주한다.

“무조건 잡아줄게!”

왼 팔꿈치 안쪽이 아려왔지만 경기를 6초 남긴 시점에는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림 안쪽을 가볍게 스친 공이 그대로 통과한다.

원중고의 두 번째 예선 승리였다.


아침햇살이 드리우며 밝아진 덕에 숫자는 반대로 흐릿했다. 팔을 가까이 두고 눈을 찌푸려 보았다가 던지듯 내려놓는다. 숫자는 65로 줄어있었다.

준수. 검색하지 않아도 이름 두 글자가 첫 화면에 보였다. 카카오톡 즐겨찾기에 설정해놓은 이름은 연락이 드물어져도 풀지 않았으니. 손수 재첩국을 대접해 주겠다는 성준수의 따스한 대답을 마지막으로 이어진 대화는 없었다.

포드가 발병한 이후 전영중의 매일 아침이었다. 숫자를 확인하고, 카톡을 키고, 결심한다. 그냥 죽어야지. 그리고 꼬리를 무는 상념.

너를 동경했어. 네가 부러웠어. 함께 뛰었던 시절이 그리웠어. 네 슛이 내 패배를 암시한다는 게 싫었어. 감정의 부스러기가 아무렇게나 나뒹군다. 그런 말을 하는 자신과, 고백을 듣는 녀석의 반응을 예상해 본다.

그러냐.

조금 당황할지도 모르겠으나 결국엔 그런 식으로 대답할 것이다. 전영중이 아는 성준수라면 그랬다. 성준수는 대체로 타인의 생각과 흘러간 일에 큰 의미를 두지 않으므로.

그럼 나의 고백은 네게 아무 의미 없는 게 아닌가.

떠오르는 말들은 하나같이 과거지향적이었다. 그런데도 빌어먹을 숫자는 왜 자꾸 내 시선을 붙잡고 뭐라도 말하라고 종용할까. 컴컴한 어둠 속에서도 외면할 수 없게 분명한 존재감을 드러내며.

학교와 계약한 식당에서 단체로 밥을 먹고 나온 전영중은 멀리서 열 명도 안 되는 단출한 무리를 발견한다. 예의 촌스러운 파란색 저지를 입지 않았어도 한 명만은 반드시 알아볼 수 있기에 지상고라는 걸 알았다. 성준수와 대화할 기회였다. 4강 전날이라 훈련도 시합도 없으니 잠시 이탈한들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전영중은 물끄러미 보다 먼저 버스에 올랐다. 아직도 해야 할 말을 알 수 없어서.


숨 막히게 잡힌 경기 일정만큼이나 시간도 빠르게 흘렀다. 걷어 올린 암슬리브 안쪽, 30시간대로 떨어진 포드는 오늘 4강전을 마치면 앞자리가 2로 바뀔 예정이었다.

목숨이 30여 시간밖에 남지 않은 심정은 어떠신가요? 머릿속에서 누군가 묻는다. 실감 안 나네요. 전영중이 덤덤히 답한다. 이렇게나 건강한데 어느 날 갑자기 몸에 나타난 숫자가 0이 된다고 죽는다는 게 말이 되나. 그러나 포드로 인한 급사는 분명한 현실이었다.

성준수에게 뭐라도 고백하는 것보다 결승 끝나고 집에 가 책상에 앉아 유서 쓰는 모습이 더 떠올리기 쉬웠다. 걔가 얌전히 들어주기는 할까? 오늘도 만나자마자 물 부족 국가 소리나 지껄이면서 속을 박박 긁어놨는데. 그 생각에 틀어놨던 물을 잠근다. 신나게 입 털고나면 드는 감정은 후회뿐이다. 아무도 없는 화장실에서 길게 한숨을 뱉는다.

짜증 난 기색이 역력한데도 끝내 욕 대신 음료수를 뽑아 내밀던 지상고 주장. 앞의 도발은 못 들은 척 최종수 막을 방법이나 묻던 녀석. 자존심보다 다음 상대를 이기는 게 더 중요한 성준수. 그래서 뭐라고 했더라. 죽기 살기로 쫓아다니며 컨테스트한다. 그 녀석 슛이 빗나가기를 기도한다. 간절히… 기도한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데, 다시 생각해도 그보다 나은 답을 도출할 수 없었다. 그게 전영중의 최선이었다. 오늘도 그러할 테고.

죽기 살기로 코트를 뛴다. 그뿐이다.

마냥 재밌었던 농구가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올라올수록 처음과 같은 마음일 수 없었다. 어느새 눈앞에 놓인 길은 농구 하나뿐이었고, 함께 하던 친구들은 '더 늦기 전에'라는 말로 한 명씩 사라졌다. 키가 크지 않아서. 운동신경이 없어서. 실력이 늘지 않아서. 변명 같다 생각했지만 무슨 심정인지 알았다.

재능있는 사람이 너무나 많았다. 반사신경이 좋은 사람, 공 몇 번 던지더니 림 안에 턱턱 집어넣은 사람,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사람. 하다못해 이 판은 키가 큰 것만으로도 재능이다. 그에 비에 자신은 또래보다 비교적 커서 농구를 시작하게 됐을 뿐이다. 근데 키 큰 놈들이 하는 운동이다 보니 다들 저만큼 크더라.

나도 노력하면 따라갈 수 있어. 뛰어넘을 수 없어도 매치업 가능하도록 몸을 키우면 돼. 그러다 안되면, 안 되는 거지. 쟤는 1군짜리 천재. 나는 2군짜리 범재. 연습하지 않는 천재는 어떻게든 따라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주전으로 출전한 첫 리그에서 노력하는 천재를 만나고 진짜 벽을 느끼고 만다.

그게 최종수였다. 무슨 수를 써도 막을 수 없다는 무력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의자에 앉아있는 동안 감독님과 코치님이 하는 말 대부분은 '최종수는 막을 수 없으니까'였다. 막을 수 없으니 더블팀으로. 직접 득점하지 않도록. 그리고 늘어뜨린 어깨를 툭툭 친다. 영중아, 네 잘못 아니다.

그게 최선의 위로였다. 네 잘못 아니다. 잘하고 있다. 저 녀석은 고등부 수준이 아니다. 그럼 전영중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최종수는 막을 수 없다. 최종수를 최대한 자극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슛하도록 만든다. 체념이라 해야 할지, 인정이라 해야 할지, 그것도 아니면 비겁한 자기 위로라 해야 할지. 적어도 스스로를 연민하려 하지는 않았다. 그런 감정에 빠졌다가 슬럼프라도 올까봐.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야지. 가까스로 도출한 답이 성준수 앞에서는 부끄러운 것이 되어버린다. 장도고의 슛감 난조와 원중고의 운 따위로 점쳐보던 승리는 결국 최종수가 있는 장도고의 차지였다.

비웃겠지. 그딴 것도 전략이라고 떠들었냐고. 그러나 경기 끝나고 찾아와서 한다는 말이 너 개못하더라, 그뿐이었다. 여전히 담백하게 가차 없었다.

어차피 성준수에게는 타인의 승패가 중요하지 않았다. 수고했다는 인사치레도 없이 이것저것 캐묻고 하는 말이라는 게,

“이길 거다, 우리는.”

—이었으니까.

직전까지 예선 탈락을 못 벗어나던 팀의 주장이 하는 말이라기엔 지나치게 확신에 차 있어 전영중은 웃고 말았다.

그마저도 성준수다웠다.


12:54:32

“영중이 형은 결승전 안 봐요?”

12:54:29

“왜 봐? 어차피 장도고가 이삼십 점 차로 이길 텐데.”

12:54:24

“만에 하나라는 게 있잖아요.”

12:54:20

통. 림을 통과한 공이 탄성을 잃기 전에 달려가 받는다. 스핀을 먹여 앞으로 던지자 바닥을 튕기고 다시 빨려 들어온다. 그대로 손을 뻗어 슛. 12:54:13. 24시간도 남지 않아서일까, 암슬리브 없이 반소매 셔츠 아래 드러난 숫자는 한낮인데도 쉽게 읽을 수 있을 만큼 밝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누구는 세계가 멸망하는 전날까지 사과나무를 심는다는데, 나는 그냥 죽기 전까지 슛하는 거지. 전영중은 강원도에서 결승전 중인 제 고백 상대를 애써 떨쳐냈다. 마지막까지 미련 맞게 걔 플레이를 눈에 새기고 싶지 않아서.

숫자가 다시금 밝아진다. 외면하지 말라는 듯.

“영중이 형, 팔 왜 그래요?”

“왜?”

“여기 하얀데……. 빛나는 거예요?”

눈썰미 좋은 우수진은 잠깐 사이에 놓치지 않고 그걸 봤다. 정확히 왼쪽 팔 안쪽을 두드리며 하는 말에 전영중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다시 공을 던졌다.

“포드.”

“……아, 고백 안 하면 죽는 병이요?”

“진짜요? 형 고안죽 걸렸어요? 와, 숫자 빛나는 건 처음 봐요! 몇 시간대에요? 함 봐요.”

당장에라도 일어나려는 녀석의 머리를 꾹 눌렀다. 아잇, 혀엉! 키 줄어들면 책임질 거예요? 조재석의 투정은 못 들은 척했다. 그걸 줄여 말할 거면 그냥 포드라고 부르는 게 낫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하며.

“얼른 나으세요.”

전영중의 안색을 살피던 우수진은 그렇게 말하고 만다. 별로 얘기하고 싶어 하지 않은 기색이니 남은 말은 상투적인 걱정뿐이다.

현대 질병에서 포드는 그 정도 취급이었다. 감기나 위염이나 포드나. 치료법을 따르면 바로 낫고 신체적 고통이 없으니 포드가 나을지도.

결국 결승전을 보긴 했다. 체육관에 나타난 윤경택 감독의 명령이나 다름없는 권유에 전영중은 얌전히 조재석과 우수진 옆에 앉았다. 그새 눈을 굴려 제 팔을 살피는 녀석 때문에 일부러 왼편에 앉아 팔짱을 낀다.

“이번 경기는 분명 너에게도 많은 도움이 될 거다.”

저한테 다음 경기가 있을까요…….

3쿼터 시작하자마자 몇 번이고 아이솔레이션하는 지상 4번. 계속 블락당해도 공을 던지는 성준수. 제힘으로 해내야만 만족하던 녀석이 그렇게 무시하던 23번에게 공을 넘긴다. 2점도 따내기 힘들어하던 지상고의 득점이 이어졌다. 지저분한 화질 속 길쭉한 녀석들이 부지런하게 코트를 뛰어다닌다.

직접 득점한 것도 아니면서 자신만만하게 지상 유니폼을 들어 올려 도발하는 모습에 머리 한구석이 찌릿 울렸다. 작은 노트북 안, 이목구비가 흐릿한 얼굴에 4쿼터를 내리뛰었다고 믿기지 않을 만큼 생기가 흘러넘쳤다.

문득, 전영중은 계속 농구가 하고 싶어졌다.

쌍용기를 마치고 휴식이 주어진 원중고 농구부원은 대부분 집으로 돌아갔다. 오랜만에 제 방 침대에 누운 전영중은 팔을 들어 숫자를 본다. 어느덧 숫자는 네 자리다. 오늘 남은 하루도, 제 목숨도 채 한 시간이 안 되었다.

유서나 쓸 거란 다짐은 잊힌 지 오래다. 제 주변에 포드가 발병했다는 사람만 있었지 사망한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진짜 죽긴 하나, 그런 의심이 들었다. 내가 함 저질러봐?

물론 치료법을 따르지 않을 시 치사율 100%인 질병에 괜한 객기 부릴 생각은 없었다. 전영중은 핸드폰을 들고 연락처에 준수, 두 글자를 검색한다. 사실 이쯤 되니 모든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제가 조만간 죽는다는 것도, 준수에게 아무렇지 않게 전화를 거는 것도. 컬러링 없이 기본 발신음으로 걸리는 전화에 잠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11시면 잘 때 됐지. 그럼 고백도 못 해보고 죽나?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상념이 끊어진다.

-뭐냐?

이걸 받아? 전영중이 후다닥 침대에서 일어난다. 긴장 없이 풀어져 있던 정신이 돌아왔다. 어, 그러니까…….

“안 잤네? 애들 다 자는 거 아냐? 전화 받아도 돼?”

-애들…… 아.

전화 받았으니 빨리 말하고 끊을게. 준수야, 사실 나 포드 걸렸어. 근데 너 생각나더라. 너 많이 동경했다. 그럼 안녕! 빠르게 문장을 만드는 머리와 달리 입은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나 집이야. 감독님이 경기 끝났고 주말이니까 그냥 서울 가서 쉬고 오라 하시더라고.

“서울이라고?”

되묻는 목소리가 뒤집어졌다. 미친. 전영중의 헛기침에 전화 너머에서 잘게 웃는다.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이냐.

-너 지금 안 잘 거지?

“어… 아직은.”

-나와. 공원에서 보자.

분명 전화는 전영중이 걸었는데 성준수가 먼저 용건을 말하고 끊어버렸다. 당연히 나올 거라 생각하는지 대답은 듣지도 않고. 빨갛게 변한 화면을 보다, 전영중이 후다닥 몸을 일으켰다.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방을 나서다 도로 들어가 서랍을 뒤진다.

“엄마, 나 잠깐 준수 만나고 올게!”

성준수가 말하는 공원이야 뻔했다. 누구의 집에서 출발해도 공평하게 10분 걸리는 시민 공원 안 농구코트 근처 벤치.

기내초부터 원중고까지, 오랫동안 함께 시간을 보내던 자리였다.

도심의 공원은 늦은 시간에도 제법 사람이 있었다. 농구하기에는 어둡고 음침하다기에는 밝은, 적당한 빛 아래서 제 또래의 아이들이 개의치 않고 코트를 달린다. 가로등 불빛 가장자리에서 성준수가 그 모습을 보며 앉아있었다.

“왔냐.”

쉽게 전영중을 발견한 성준수가 먼저 인사했다. 시선이 자연스레 손으로 내려간다. 가방도 없이 덜렁 들고 온 것들을 이제와 숨길 수도 없어 그냥 내민다. 붙이는 파스와 가장자리가 일어난 손목 보호대였다.

“결승 봤나 보네.”

“당연히 봐야지. 넌 예선 탈락하면 애들 잡느라 이후 경기 안 봤나 봐?”

“아, 바로 지랄이냐? 그래 내가 잘못 말했다.”

습관적인 욕설이었지 기분 나쁜 기색은 아니었다. 순순히 제가 내민 것들을 받아 가는 걸 보면. 뒤늦게 사용감 있는 보호대를 내민 게 멋쩍었다. 아까워서 그런 게 아니라 마음이 급해서, 이 시간에 약국이 문을 열었을 리도 없고…….

“새거 없어서 쓰던 거라도 갖고 왔어.”

“경기 끝나고 처치 받았는데.”

“아…….”

내가 그 생각은 못 했네. 그렇지. 부상당한 선수를 그냥 둘 리 없지. 그제야 제가 내민 것보다 튼튼한, 손바닥부터 팔목까지 길게 이어진 보호대가 보였다.

“잘 쓸게. 이거 풀고 나서 차면 되겠다.”

“……손은 괜찮대?”

“일단은. 뼈는 멀쩡하니까 물리치료 잘 받으라더라.”

“다행이네.”

전영중이 옆에 앉는다. 적당히 팔을 걸쳐둘 수 있는 한 뼘의 거리감이 익숙했다. 예전엔 하루 종일 얼굴을 맞대는데도 뭐 그리 할 말이 많았는지, 숙소에 들어가지 않는 날이면 이러고 앉아 족히 한 시간은 떠들었다. 대부분 농구에 관한 것들이었고.

“할 말 없냐?”

“나?”

“그럼 여기 너 말고 누구 있냐? 할 말 있으니까 전화했을 거 아냐.”

감상에 빠져있을 틈도 없이 성준수가 몰아친다. 하여간 귀신같이. 둔한 것 같으면서도 쓸데없는 데서 예리하고 난리지. 슬그머니 그대로 드러난 왼팔을 본다. 그렇게 빛나던 숫자는 성준수 앞에서 숨죽이듯 잠잠했다.

“우승 축하한다고.”

“구라치지 마라. 내가 전영중 모르냐? 고작 그거 한 마디 할거였으면 카톡 보내고 말았지.”

“진짠데.”

“너 이럴 때마다 진짜 찢어버리고 싶다.”

“너야말로 할 말 있으니까 나오라고 한 거 아냐?”

화제를 돌리자 지끈, 왼쪽 팔이 아팠다. 알아. 지금 성준수가 친절하게 기회를 준다는 것도. 근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어떡해. 전영중이 괜히 공원의 시계를 쳐다봤다. 분침이 41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럼 내가 먼저 말하고. 주전 된 거 축하한다.”

“엥?”

“왜?”

“이제 와서?”

“이제 와서는 시발, 지금이라도 축하해 주면 안 되냐?”

아, 말이 빨라졌다. 부끄러운가 보네. 괜히 턱을 괴어 얼굴 가리는 것도 여전하고. 친구의 오래된 습관을 발견할 때마다 마음 어딘가가 자꾸 녹아내린다.

“협회장기 때는 그거, 팀웍, 그런 거 전부 개판이었잖아. 나도 정신적으로 좀 그랬지. 너 주전 된 거 보니까 그냥 나도 버틸걸 그랬나 후회도 드는데 시바, 넌 좆같은 소리만 지껄이고. 다른 새끼들도 1년 같이 보낸 의리는 싹 잊은 듯 굴었잖아.”

연습도 안 하는 게 혀는 길어서 변명만 늘어놓지, 한 소리 하면 왜 애들 갈구냐 혼내지. 빅맨이란 것들이 스크린도 못 하고. 스크린은 무슨, 파울 관리도 못 하는데. 다 찢어 죽이고 싶고, 농구는 재미없고. 게임은 이기는데 나는 한 게 없고. 사실 내가 잘못한 거 아닐까, 그딴 생각도 들더라. 더듬더듬 시작한 말은 물꼬가 트이자 자연스레 깊게 감춰둔 속내까지 드러낸다. 우승으로 누그러진 성질 때문만은 아니다. 분명 듣는 이가 소꿉친구여서인 이유도 있었다.

“그래도 네가 거기서 버텼으니까 나도 할 수 있다 생각하고 참았어. 어차피 다른 방법도 없었잖아. 농구 계속하려면 시발 이겨내야지.”

“운 좋게 키 커서 주전 단 건데 뭐.”

“운은 무슨, 밥 처먹고 키 크면 실력도 알아서 느냐?”

“그래도.”

“아, 쫌! 축하해 주면 곧이곧대로 들어, 이 답답한 새끼야. 코트에서는 있는 대로 지랄하면서 왜 같잖게 내숭 떨지? 니 이중인격이냐?”

“키 안 컸으면 여전히 벤치였을 거 아냐.”

“몰라 시발아.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니 키가 크든 말든 달았겠거니 해야지. 궁금하면 도로 잘라보든가.”

키가 커도 지랄, 안 커도 지랄. 존나 쓸데없이 생각만 많아가지고. 이어지는 투덜거림에 전영중이 작게 웃었다.

“내 주전 소식이 위안이 됐어?”

“……그랬나봐. 널 원중고에 남았을 때의 내 앞날이라 생각했나 보지.”

그러니 네 성공이 기꺼웠다. 질투하지 않았다면 거짓이겠지만, 내가 선택하지 않은 길의 결과였으니 탐낼 수도 없었다.

키가 4센치 더 크든 말든 전영중은 전영중이었다. 기내초부터 함께 농구하고, 버림받고도 끝까지 농구하겠다 버틴 녀석. 전학 가야겠다고 생각한 날, 전영중에게서 들었던 대답이 '그만두겠다'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그날 성준수는 일방적인 유대라 할지라도 포기 못 한 자들끼리의 무언가가 이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낯선 곳에서 출전금지로 경기에 못 나가 답답해하다가도 저 위쪽에서 체육관을 달리고 있을 전영중을 떠올렸다.

너도 꾸역꾸역 버티고 있겠지. 그럼 나도 여기서 어떻게든 해내야 하지 않겠냐.

“솔직히 농구하는 거 힘들지.”

“힘들지. 잘하는 새끼들이 좀 많냐.”

“최종수 보면 질투도 나고.”

“씨발, 그게 사람 새끼냐?”

“괜히 인간 태풍이 아니라니까?”

“그러니까. 존나 잘하더라. 그래도 니 말대로 죽기 살기로 쫓아다니니까 어떻게든 되던데.”

“그건 누구나 해줄 수 있는 말이었고.”

“근데 다른 방법 있냐? 초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새끼 지칠 때까지 계속 들이박아야지.”

그렇지. 그것밖에 없지. 대화가 물 흐르듯 이어진다. 옛날에는 자주 이랬다. 그날 힘들었던 일, 잘 안되던 거, 누구는 잘하더라. 하루의 감상을 공유하며 수다 떨었다. 수치심 없이 밑바닥을 드러내고 위로나 격려, 칭찬 따위를 주고받았다. “고맙다.” 과거와 현재를 겹치는 사이 지나가듯 내뱉어 놓칠뻔한 말이었다. 뒤늦게 의미를 이해한 전영중이 성준수를 보았다. 코트를 빤히 보며 멋쩍게 뺨을 긁적인다.

“흔한 말이라도 조언 해주는 거 쉽지 않잖아. 고마웠다고.”

하, 하하. 진짜 못 당하겠다. 이렇게 갑자기 치고 들어온다고. 그러는 너도 망설이지 말라고 해줬으면서.

“…그렇게 힘들어도 농구 재밌지.”

“어. 재미없으면 포기라도 하는데.”

왜 포드가 발병한 날 성준수와의 경기가 잡혀있었을까. 하필 결승까지 남은 기간은 알맞게 7일이었을까. 나타난 숫자는 숨길 수도, 외면할 수도 없게 빛났을까. 우연의 산물일 수 있으나 쓸데없이 생각하기 좋아하는 전영중은 의미를 부여해 본다.

네게 반드시 하고 싶은 말이 있었나봐.

“계속 같이 농구하고 싶었어.”

우리가 함께 뛰었던 경기를 기억한다. 코너에 갇혀 허둥대다 겨우 벌어진 틈으로 무작정 공을 던졌다. 당황해서 턴오버 따위를 계산할 여유도 없이 공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뒤늦게 마구잡이로 던진 공을 좇으면 시선 끝에 어느새 달려온 빨간 농구화가 있었다. 상대팀 어깨 사이로 성준수가 날아온 공을 받아 무릎을 굽히는게 보였다. 높이 뛰어오르고, 팔을 길게 뻗고, 가볍게 착지한 그가 크게 들이마신 숨을 터트리며 자신을 보고 웃었다.

“너랑 농구하는 게 제일 재밌더라.”

그 시선을 마주하면 머리꼭지가 짜릿하고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이 조금도 가쁘지 않았다. 도파민이 분비된다는 게 분명 이런 느낌일 거라 생각했다. 말하지 않아도 제 몸처럼 움직여 줄 때의 일체감. 당연히 그리하리란 신뢰. 그런 것들로 충만하던 시기였다.

“나도.”

그리고 상대 역시 같은 마음이라면. 여전히 멋쩍어하는 얼굴로 이번에는 이쪽을 본다.

“너 존나 든든했어. 스크린 잘 서고, 필요한데 먼저 가 있잖아. 네가 아쉬웠던 적 한두 번이 아니었어.”

이상하다. 전영중은 가슴 한구석이 간질거리는 느낌이었다. 이거 설마 죽기 전 증상인가? 아, 그렇지만 준수랑 농구 하고 싶은데. 여느 때보다 강한 생존 욕구에 고개를 들어 시계를 본다.

시곗바늘은 두 개 모두 어느새 12에 걸쳐져있었다.

[아들 언제 들어와?] 때마침 도착한 문자의 시간을 본다. 12:02. 자정을 넘었다. 팔의 흐릿하던 숫자도 사라졌다. 전영중은 기대한 적 없는 내일에 도착해 있었다. 진짜?

계속 농구할 수 있게 됐는데 생각보다 큰 감흥은 없었다. 마치 새해에 제야의 종이 울리는 걸 보고 티비를 끈 기분이랄까……. 너무 당연해서 아무렇지 않은 느낌. 사실 그게 맞지. 포드에 걸리든 말든 하루는 가고 또 오니까.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묘하게 붕 뜬 느낌을 받으며 전영중은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내일 같이 조깅할래?”

“그래. 7시 반?”

“응. 너네집 앞으로 갈게.”

“뭔, 됐어. 여기서 봐.”

1년의 부재를 넘어 성준수가 지금 이 순간 서울, 전영중 바로 옆에 있었다. 기대 없이 내뱉은 말을 받아준다. 고1 때처럼 함께 조깅하기로 약속한다.

많이 변했다 생각한 것들이 사실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그제야 전영중은 성준수 역시 저만큼이나 멈출 줄 모르고 관성으로 살아가던 녀석이라는 걸 깨닫는다. 길을 찾는 방법만 달랐지.

가자. 늦었다. 습관처럼 오른손으로 짚으려다 팔을 바꾼다. 일어날 생각도 없이 빤히 저를 쳐다보는 녀석의 다리를 발끝으로 친다. 뭐해? 일어나. 전영중은 그 뒤에 '먼저 간다'가 따라붙지 않는데 안심했다. 짧은 인내심으로나마 기다려 준다는 게 얼마나 기특한지.

“주익대 써.”

뜬금없이 튀어나온 말에 성준수는 인상을 찌푸렸다가 한 박자 늦게 이해한다. 아, 아하. 새끼, 눈 높네.

“너도 준향대 원서 넣어라. 난 거기는 무조건 쓸 거니까.”

얼핏 거래처럼 보이는 대화는 사실 성준수에게 불리하기 그지없었다. 저보다 높게 쳐주는 선수가 같은 학교에 지원하면 어떻게 될지 알고 있으면서.

그러나 성준수는 어떠한 거절 의사도 내보이지 않았다. 그 또한 바랐다는 듯 함께 할 가능성을 제시할 뿐.

공원을 나오고 길이 갈라지는 곳에서 익숙한 인사를 한다. 잘 가. 내일 봐. 아무렇지 않게 다음을 약속한다는 게 이상했다. 가로등 아래를 걷는 걸음이 점점 빨라지고, 기분 좋게 바닥을 구른다. 가슴이 벅차 무작정 달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순식간에 도착한 집 앞 공동현관에서 전영중은 성준수와 같은 유니폼을 입고 코트에서 눈이 마주치던 감각을 상기했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대학, 프로리그, 혹은 그 이후 언제여도 괜찮으니까.

너와 함께 있고 싶어. 진심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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