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뱅]그 두사람은 왜 연락이 안 될까?

가비지타임 최종수X박병찬 _ 둘 다 국내 프로선수

※ 국내 프로선수 종뱅

※ #종뱅전력_60분 52회 주제 : 연락

※ 공백포함 약 14,000자


아주 가끔 최종수와 연락이 안 될 때. 그때마다 최종수는 높은 확률로 박병찬과 함께 있었다. 장도고 농구부 시절에는 체육관에 핸드폰 반입이 금지 되어 있어서 연락이 안 되면 훈련 중이구나 싶었는데 이제는 왜? 아니 뭐 지금은 선수니까 더 빡세게 훈련하겠지만. 그런데 박병찬이랑은 또 왜? 심지어 박병찬은 같은 구단도 아닌데. 박병찬이 최종수에게 온 전화를 대신 받아주는 날도 종종 있었다. 순진하고 투박하고 무심한 박병찬 때문에 최종수가 임승대 폰 번호를 저장도 안 해놨다는 사실을 본인이 알게 되기도 했다. 죄송해요. 지금 폰 주인이 핸드폰 두고 잠시 자리를 비운 상황이라. 아 그리고 이거 번호를 저장 안 해둬서 그런데, 누구라고 전해드릴까요? 임승대 대가리 뚜껑 열려서 어처구니 빠지는 소리가 한반도를 울렸다. (병찬 : 왔냐 종수야. 아까 너 없는 동안 핸드폰 진동 많이 울려서 내가 전화 받았어. 종수 : 누구였는데? 병찬 : 임승대. 너 근데 왜 승대 번호를 저장 안 해뒀어? 종수 : 카톡으로 연락하면 되는데 굳이 왜?)

이쯤 되니 어라 종수가 전화 안 받네. 얘 또 박병찬이랑 있는 거 아니야? 그런 말이 나오는 수준이었다.

박병찬의 경우에는 연락이 안 될 때 최종수와 같이 있을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 시기 이후로는 거의 최종수와 함께였다. 누군가 박병찬을 찾는 전화는 누군가 최종수를 찾는 전화보다 다섯 배쯤은 잦았고, 그로 인해 딱 한 번 박병찬의 아버님 전화를 최종수가 대신 받은 경우가 생겼는데. 아…… 저 이거 박병…… 병찬이 형 핸드폰 맞아요. 지금 바쁜 것 같아서 제가 잠깐 받았어요. 아뇨 별일이 있는 건 아니고…… 잠시만요. 음소거 후 2분이 지나서야 박병찬이 일부러 과장 되고 심술 궂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아이고, 이게 누구야. 오랜만에 가족모임에 온 하나뿐인 아들한테 똑같은 잔소리 백번 하신 박영감님 아니세요. 뭔 일인데요? 엄마요? 모르지 나야. 엄마 어디 있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요. 엄마가 내 마누라인가? 박병찬은 이 날 낮에 아버님이랑 싸웠고 밤에는 최종수랑 싸웠다. 두 싸움 모두 심각한 건 아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종수 : 너는 어떻게 그 전화를 나더러 대신 받으라고 할 수 있어? 넌 진짜 또라이야. 병찬 : 어어 그래그래. 그 또라이가 니 애인.)

이쯤 되니 어라 병찬이가 핸드폰을 안 보네. 얘 또 최종수랑 같이 있는 것 같은데 그쪽으로 연락 해보자. 그런 말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따로 말하지 않아서 두 사람이 사귀는 중이라는 걸 주변에서 몰랐다. 몇몇 눈치 빠르고 감 좋은 사람들이 ‘어쩐지 두 사람은 그럴 것 같다’ 라고 확신 비스무리한 짐작만 하고 있을 뿐이다.

아래는 그 두 사람과 연락이 안 되던 날의 사유이다.

최종수1

박병찬이랑 농구했다. 최종수는 가져온 페트병 물이 있었는데 박병찬이 아이스크림 사준다고 했다. 다 두고 와. 내가 사줄게. 최종수는 갈등하다가 저 멀리 걸어가는 박병찬의 등을 보고 맨손으로 벌떡 일어났다. 핸드폰과 가방을 다 벤치에 내버려둔다. 박병찬, 같이 가. 최종수는 성큼성큼 걸어서 박병찬을 따라 잡는다. 함께 횡단보도 건너편의 편의점에 갔다. 뭐 먹을래, 종수야? 형아가 쏜다. 최종수는 계속 편의점 바깥을 바라보며 건성으로 에너지바 하나 내밀었다. 나는 쿠크다스 먹을까나. 박병찬이 놀렸고 최종수는 코웃음을 쳤다. 박병찬과 최종수는 편의점 앞에서 서서 짧게 투닥거렸다. 벤치에 내버려 뒀던 핸드폰이 떠올라 빠른 걸음으로 돌아오니 누가 최종수의 핸드폰과 케이스에 넣어둔 카드까지 홀라당 훔쳐 갔다. (병찬 : 와 진짜 잠깐 자리 비웠는데. 살면서 이런 일을 다 겪네. 내가 다 미안하다 야. 너 그거 얼마 전에 산 아이폰 아니야? 우리 종수 어떡해. 그거 누가 가져가면 쓰던 번호는 못 살리나? 어이구 큰일이네. 너 나중에 집 갈 때는 형아가 교통카드 찍을 수 있는 카드 빌려주마. 일단 내 폰으로 전화해서 카드 분실신고 먼저 하고. 종수 : 박병찬 통화 소리 안 들리니까 입 좀 다물어…….)

박병찬1

최종수랑 잤다.

최종수2

박병찬이랑 가지런히 누워서 영화를 연달아 두 편이나 봤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쯤엔 너무 졸려서 맨정신이 아니었다. 마지막에 본 영화가 너무 지루했던 탓이 크다. 어디선가 들어본 적은 있는데 어느 나라 말인지는 단숨에 알아채기 어려운 수준의 낯선 언어였다. 귀에 익지 않은 대화들이 간헐적으로 화면에서 흘러나왔고 화면 전환이 말도 안 되게 느리며 흥미로운 사건 하나 일어나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의미가 압축되어 상징적인 요소들이 많아 장면마다 해석이 고민스러웠다. 박병찬. 이거 재미 없어. 딴 거 봐. 최종수는 이미 졸린 목소리였다. 박병찬은 코로 웃기만 하고 최종수의 눈가에 짧게 입맞췄다. 불만 접고 그냥 영화나 마저 보자는 뜻이었다. 박병찬의 입술 끝에서 화면으로 시선이 미끄러진다. 재미없다니까. 영화 속 배우의 입을 응시하던 최종수는 눈꺼풀이 꿈벅꿈벅 감겼다. 나중에는 화면 밑에 제대로 번역되고 있는지도 확인할 수 없는 한글자막이 흐물흐물 흩어져 알아볼 수가 없었다. 최종수는 눈꺼풀이 푹 닫힌다. 핸드폰에 온 다른 연락을 못 보고 그대로 박병찬 옆구리에 머리를 처박고 동글동글 안겨서 자버렸다. (병찬 : 오, 역시 해외독립영화제 출품작은 졸린 맛에 보는 거지. 형아의 이 깊은 뜻을 잘 알겠냐? 우리 꼬맹이 종수 잘 자라. 쪽쪽. 종수 : (으 박병찬 시끄러워. 근데 뽀뽀 좋아. 따뜻해. 졸려.)…….)

최종수3

박병찬이랑 싸워서 하루 동안 핸드폰 전원을 꺼뒀다. 최종수가 자신의 농구 실력을 걸고 맹세하는데 이 날은 진짜 박병찬이 잘못했다.

박병찬2

최종수랑 싸웠는데 화해 하려고 겸사겸사 잤다. 박병찬이 최종수한테 쫌 많이 잘못했다. 무조건 형아가 미안하다고 하고 기분 풀어주느라 제 핸드폰을 들여다 볼 시간이 없었다.

최종수4

박병찬이랑 농구했다. 이번에는 누가 핸드폰 가져갈 생각도 못하게 아예 일대일 시작 전부터 메고 온 가방 안쪽 깊은 곳에 있는 주머니에 핸드폰을 숨겨두었다. 새 핸드폰을 가방 안에 안전하게 집어넣은 최종수는 오예인간 박병찬이 자신과 같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하고 싶었다. 박병찬 핸드폰 어디 뒀지. 살펴 보니 저번과 똑같은 위치의 벤치에 제 회색 후드 집엎과 같이 놓아뒀다. 하여간 제 몸뚱이 외에는 조심성 없는 박병찬. 흥. 최종수는 박병찬 핸드폰도 제 가방 안쪽에 꼭꼭 넣어둔다. 잊지 말고 집에 갈 때 돌려줘야지. (병찬 : 최종수 뭐해? 빨리 와. 종수 : 너 먼저 10점 넣어고 시작해. 병찬 : 어쭈, 형아한테 이길 자신 있냐? 종수 : 응. 그리고 노인공경 해야지. 병찬 : 뭐라고?)

박병찬3

최종수랑 농구하고 집에 와서 씻었는데 생각해보니까 제 핸드폰이 최종수 가방 안에 있었다. 하, 내가 이런 데에 둔하다니까. 저녁밥을 최종수가 샀고, 계속 둘이서 도란도란 대화했고, 내일도 각자 할일이 있었기에 곧장 집에 왔다. 편의점이라도 들릴걸. 먹는 걸 안 좋아하니까 습관처럼 다른 데에 돈 쓸 일이 적다. 박병찬은 몸을 구석구석 닦았다. 아주 가끔 이런 일이 일어난다. 각자의 집으로 헤어지기 전에 박병찬이 최종수한테 뽀뽀를 너무 열렬히 했던 탓이려니. 아직도 그 나이 먹고 뽀뽀에 얼굴이 새빨개지는 게 웃기고 귀여웠다. 그렇게 최종수의 정신이 쏙 빠져나가 자기가 박병찬 대신 가방 속에 꼭꼭 숨겨둔 핸드폰은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박병찬은 벽에 걸린 달력을 보면서 내일과 모레 일정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카카오톡 PC버전 병찬 : 쫑수야 너 내 폰 안 주고 갔음ㅋㅋㅋ 내가 내일 핸드폰 받으러 갈게. 내일 점심 쯤 가도 돼? 카카오톡 종수 : 아 깜빡 잊어버렸어. 미안. 응. 그럼 저번에 너랑 먹기로 한 그 식당 가볼래. 카카오톡 PC버전 병찬 : 너 지금 하나도 안 미안하지? 영혼이 없는데??? 카카오톡 종수 : (미안 이모티콘) 미안. 카카오톡 PC버전 병찬 : (오예 이모티콘) 오냐, 그럼 내일 1시까지 용산역 1번출구로 갈게. 형아 핸드폰 잘 모시고 있다가 내일 들고 나와. 카카오톡 종수 : 왜 내가 니 핸드폰을 모셔???? 카카오톡 PC버전 병찬 : 그려 농담도 모르는 종수야. 그냥 내 폰 퀵으로 보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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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놀러온 박병찬이 제 왼손으로 최종수의 오른손을 꼭 붙들고 놓아주지를 않았다. 와, 어떡하지 종수야. 우리 손 붙어버렸다!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는 장난이 길고 집요하다. 자기는 오른손으로 다 하면서 나는 손 못 쓰게 하네. 처음에는 짓궂게 얽힌 손가락이 나중에 박병찬의 끈질긴 애정처럼 엉겨 붙었다. 이제 놔. 손바닥 더워. 땀 나. 박병찬은 최종수의 말을 콧등으로도 안 들었다. 최종수도 박병찬에게 영문 모르게 괴롭힘 당하는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결코 기분 나쁜 건 아니었다. 최종수는 자신보다 작은 박병찬에게 몸을 들이민다. 박병찬은 파란 물감처럼 웃었다. 최종수는 자신을 놓아주지 않는 박병찬의 곁에서 멀어지지 못하고 이리저리 뱅글뱅글 곁을 돌았다. 최종수도 박병찬에게 꾹 안겨있거나 피부가 스치고 닿는 걸 좋아했다. 최종수는 어설프게 왼손으로 배달음식을 먹고 손 끝으로만 톡톡 핸드폰을 만졌다. 종수야. 핸드폰 하지 말고 저거 보자. 소파에 기대 누운 박병찬의 말에 최종수는 심드렁한 얼굴로 핸드폰을 충전기에 꽂아두려고 일어난다. 폰 충전기에 꽂고 올테니까 손 좀 놔. 박병찬은 최종수 쪽으로 팔을 곧게 뻗어주며 짧게 대답한다. 응, 싫어. 최종수는 가까스로 핸드폰을 충전기에 꽂아두고 박병찬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박병찬이 심심하다고 틀어놓은 스마트TV 화면을 채우는 건 경악스러울 만큼 자극적인 실제 사건을 소개하는 종편 예능 프로그램이었다. 이런 거 보지도 않으면서 괜히. 소파에 앉아있다가 반쯤 누워버리는 박병찬을 따라 최종수도 형아를 베개 삼는다. 손이 연결 된 두 사람은 소파에 녹아내린 치즈처럼 늘어진다. 예능은 재미 없었다. 배경음악도 희한하게 쓰고 넓게 둘러 앉은 패널들의 놀란 얼굴을 자주 비췄다. 최종수의 핸드폰이 몇 번 짧게 진동했지만 확인하지 않는다. 최종수는 박병찬과 맞잡은 손의 미적지근한 온도가 점점 비슷해져 가는 감각을 느꼈다. (병찬 : 와 어떻게 애 아빠가 자식을 저렇게 학대할 수가 있냐. 너무 무섭다, 그치 종수야. 종수 : 박병찬 네가 지금 몇 시간 째 내 손 안 놓고 있는 것도 학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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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랑 잤다. 기온차가 큰 환절기. 최종수랑 놀고 한숨 푹 자고 같이 밥 먹으러 가는 도중, 데이트하기 위해 얇게 입고 나온 최종수가 푹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박병찬 나 추워. 으흠 밤바람이 시원하네, 콧노래를 부르며 아무 생각 없던 박병찬이 놀라서 최종수와 눈을 마주친다. 많이 추워? 머리 감고 덜 말리고 나와서 그런가. 우리 종수 감기 걸리면 안 되지. 박병찬은 방해금지 모드로 변경해뒀던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어둔 걸 잊고, 입고 있던 제 재킷을 최종수에게 벗어준다. 박병찬이 넉넉하게 입으려고 산 살짝 품 넓은 재킷이었는데 최종수의 어깨에 딱 맞았다. (병찬 : 어때. 이제 안 춥지? 종수 : 지퍼 안 올라가서 그저 그래. 병찬 : 차가운 봄바람에 선뜻 재킷도 양보해주는 형아의 마음이 따뜻하잖냐. 종수 : 그게 대체 내가 추운 거랑 무슨 상관인데? 병찬 : 어휴 싸가지 없는 애새끼는 혼자 밥 먹으라고 하고 난 이대로 집 가서 엄마 밥이나 먹을까. 종수 : 너 혼자 가면 안 반겨주실 걸. 너희 어머님은 나를 더 좋아하시잖아. 병찬 : 종수야. 너 나랑 같이 다니니까 사람이 좀 뻔뻔해진 것 같다. 종수 : ? 사실인데 대체 뭐가 뻔뻔해,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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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이랑 약속 있는 거 깜박하고 최종수랑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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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찬이 자꾸 전화로 헛소리 해서 신경질이 났다. 연락 받기가 싫어서 핸드폰을 꺼두려다가, 저번에 박병찬이 ‘우리가 싸운 건 싸운 건데 전화기 꺼져 있다는 안내음성 들으면 너무 걱정되니까 핸드폰 전원을 꺼두지는 말라’고 말했던 게 퍼뜩 생각이 났다. 속이 부글부글 끓는데도 핸드폰 전원을 누르는 손가락 끝에 힘이 빠졌다. 백번 양보해서 최종수는 핸드폰 알림설정을 무음으로 변경 해뒀다. 나는 이렇게 지 생각 많이 하는데. 끌 수 있는 핸드폰도 안 꺼두는데. 박병찬은 대체 뭐야? 이 날 최종수는 하루종일 속이 불편하고 식은땀이 흘러 침대에 누워 있었다. 누워서 계속 박병찬만 생각했다. 박병찬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지. 짜증스럽고 화가 치밀었다. 입맛이 없어서 아무 것도 안 먹고 물만 마셨다. 운동 못 할 거면 런닝이라도 뛰어야 하고 식사 제때 챙기기 어려우면 가볍게 단백질쉐이크라도 먹어야 하는데. 정말 아무 것도 못하겠다. 가만히 있어도 입안에 쓴맛이 올라오고 혀 끝이 쓰라려 아플 지경이다. 잠깐 화장실에 들어갔을 때 거울에 비친 얼굴이 스스로도 황당할 만큼 창백했다. 박병찬이 열받게 굴 때마다 이렇게 휘청휘청 흔들리는 자신이 제일 싫었다.

한참 자고 일어난 뒤에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들었 때, 박병찬에게서 부재중 전화와 수십 통의 카카오톡 메시지가 와 있었다. 구단에서도 뭔가 연락이 오긴 했는데. 기운이 없어 확인하지 않고 핸드폰만 엎어두었다. 나쁜 박병찬. 무조건 이겨 먹으려고 하는 박병찬. 멍청이 박병찬. 병신 같은 박병찬. 최종수는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 썼다. 졸린 게 아니다. 이런 기분으로는 절대 잘 수 없다. 어쩐지 박병찬의 웃음기 머금은 목소리가 머리맡에서 들리는 느낌이 든다. 종수야. 너 사춘기 끝나려면 멀었어? 다 커가지고 꼴 사납게 이게 뭐야. 침대 옆 탁상에 엎어둔 핸드폰 액정이 환하게 켜졌다가 다시 어두워졌다. 박병찬의 연락이었다.

박병찬6

최종수랑 자고 일어나서 대실 시간 끝날 때까지 책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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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찬이랑 하루종일 같이 농구했다. 동네 농구 코트에 오래 머물렀다. 포카리스웨트도 두 병이나 비웠다. 해가 뉘엿뉘엿 질 즈음에 근처에서 일 마치고 온 회사원 네 명이 다가왔다. 두 사람에게 삼대삼으로 농구하자고 했다. 박병찬이 시원하게 웃으며 흔쾌히 오케이 했다. 최종수는 다른 사람들이랑 길거리 농구하는 건 좋은데 오랜만의 데이트에 괜히 방해꾼이 낀 것 같아서 기분이 상했다. 박병찬 뒤에 서서 대답 않고 머뭇댔다. 최종수는 키가 커서 박병찬 뒤에 몸을 숨는다고 한들 티가 안 난다.

셔츠 소매를 걷어올리던 사람 중 하나가 박병찬한테 키가 그렇게 크고 잘생겼는데 혹시 아이돌연습생이냐고 물어봤다. 여기 근처에 연예인 기획사가 좀 있으니까요. 혹시나 해서. 박병찬은 싱글벙글 웃었다. 본인 잘생겼다는 말을 들으면 저렇게나 좋아한다. 최종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박병찬은 코트에서 공을 퉁퉁 튕기며 땀을 식혔다. 와 말씀 감사해요. 그런데 저희 아이돌은 아니에요. 낮에는 바람 한 점 없었는데 저녁이 되니 시원해졌다. 그러면 혹시 뭐 수영이나 농구 같은 운동하세요? 피지컬이 장난 아니신데. 그 질문에 박병찬은 웃기만 하고 최종수도 딱히 부정하지 않자 분위기가 살짝 묘해졌다. 그 중 한 명이 뭔가 깨달은 사람처럼 입을 털었다. 야야야야야 저 사람들 농구선수들이잖아. 그그그 나 스포츠 뉴스에서 본 적 있는 것 같아. 그 말을 듣고 박병찬이 왕하하하 웃었다. 하필 웃음도 최종수가 좋아하는 왕하하하, 였다. 박병찬 왜이렇게 쪼개? 미쳤나. 최종수의 눈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종수팀 병찬팀으로 나누었다. 딱 삼십분 동안 이루어진 삼대삼 농구의 득점왕은 최종수였다. 편의점에서 얻어먹은 탱크보이를 빨던 박병찬이 최종수에게 너는 진짜 회사원들을 상대로 길거리 농구하면서 양심이 없어도 너무 없다고 타박했다. 최종수는 대꾸도 없이 돼지바를 두 입만에 먹어치웠다. (종수 : 너나 잘해 박병찬. 병찬 : 응 난 잘해. 너한테도 끝내주게 잘해주고 농구도 끝내주게 잘함. 종수 : 아닌데. 박병찬 농구 나보다 못하는데. 너 솔직히 나보다 농구 잘한다고 절대 말할 수 없. 병찬 : 으응-? 어디서 개소리가 들리나? 어우 종수야. 진짜 너무너무 피곤하다. 들어가서 얼른 씻고 빨리 자자.)

박병찬7

최종수가 너무너무 애새끼처럼 굴어서 너랑 내일까지 연락 안 한다고 카톡 보내놓고 잠수 탔다. 어차피 박병찬은 최종수와 개판 싸운 그날 오후부터 다음날 오전까지 계속 훈련으로 바빴다. 하루 정도는 핸드폰 안 들여다 봐도 괜찮다고 스스로 장담을 했는데. 다음날 아침 식사하기 전, 박병찬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알림창을 쓱 확인했다. 한숨을 푹 쉬고 어깨를 툭 내려놓는다. 어제 낮부터 밤까지 쌓인 연락에 착실하게 답변을 보냈다. 물론 목이 빠져라 박병찬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을 최종수에게 가장 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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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찬이랑 뭔 놈의 바다를 갔다. 최종수는 아늑하고 따뜻한 박병찬 집을 선호한다. 각자 할 일 하다가 텔레파시라도 찌르르 통한 듯 동시에 눈 마주치면 슥 다가와 몸을 겹칠 수 있는 그런 공간이 좋은데. 박병찬이 요 며칠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는 몰라도 어디 산, 글램핑, 차박 어쩌고 하더니 갑자기 안 가본 곳을 가보자고 했다. 최종수는 거실바닥에 드러누워서 버티다가 박병찬이 너무 귀찮게 굴어서 겨우 따라 나갔다.

운전은 박병찬이 했고 최종수는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차창 밖 풍경을 보았다.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고 핸드폰 블루투스로 연결하여 노래도 들었다. 날이 흐렸지만 이마를 스치는 바람은 산뜻했다. 오랜만에 이렇게 드라이브 하는 것도 좋네에. 안 그러냐, 종수야아아. 신이 난 듯 말꼬리가 늘어진다. 박병찬은 노래를 따라 부르며 왼손으로 핸들을 잡고 오른손으로 조수석에 앉은 최종수의 손을 더듬더듬 찾았다. 그 손을 떨떠름하게 보던 최종수가 슬쩍 내민 손을 박병찬이 허공에서 꼭 잡았다. 노래 부르는 목소리가 한 톤 높아진다.

박병찬이 한 시간 넘게 달려 도착한 곳은 인천 어디의 섬이었다. 분명 이때까지만 해도 다른 사람들한테 카톡도 보내고 근처 맛집 검색도 할 수 있었는데 섬마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는 동안 뿌옇게 안개가 끼고 공기 마저 축축하고 묵직해졌다. 최종수가 불안한 눈으로 어플을 켜서 날씨를 확인해도 이 동네에 비가 온다는 소식이 없었다. 박병찬은 인적 드문 어느 골목에서 최종수랑 입술을 부볐다. 그냥 흐리다 말 것 같으니까 걱정말래도. 박병찬이 걱정 말라는데도 하늘은 차츰 암울하게 어두워졌다. 두 사람은 늦은 점심을 먹으러 가게에 들어왔다. 햇볕이 사라진 회색빛 하늘에 불안해진 최종수는 눈으로 열심히 칼국수 가게 바깥을 흘끗거렸다. 섬이어서 물냄새가 가득한 건지 아니면 날씨가 흐린 탓인지 알 수가 없다. 여기서 국수 다 먹으면 차 트렁크에서 우산을 꺼내오자고 박병찬에게 말했다. 엉, 그러자-. 그러나 박병찬이 칼국수 면발을 다 먹고 국물까지 들이켠 후 보리차를 마시는 동안 어마어마한 비가 쏟아졌다. 누가 버튼이라도 누른 것 같은 비였다. 예보에도 없는 폭우였고 두 사람은 멍하니 가게에서 바깥만 바라보았다. 아무리 보고 있어도…… 5분 내외로 그칠 것 같지 않았다. 박병찬은 시퍼렇게 웃었고 최종수는 새파랗게 질려서 비를 뚫고 달렸다. 가게 옆 빈 공터에 주차해놓은 차에 도착하니 두 사람의 옷은 이미 다 젖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느닷없이 핸드폰도 통화권 이탈이었다. 계속 실없이 미소 짓고 있던 박병찬도 통화권 이탈 신호를 보자 웃음이 뚝 멎었다. 핸드폰을 껐다켰다껐다켰다 하던 최종수는 멘탈이 붕괴되었다. 박병찬이 차가운 빗물만 뚝뚝 떨어트리는 최종수의 머리카락을 티슈로 닦아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세차게 내리는 비의 영향에 기온이 떨어져 공기가 차갑다. 박병찬은 숙박어플도 못 뒤지고 네비 안 터져서 곤란한 듯이 이마를 긁었다. 진짜진짜 미안한데 종수야. 나, 이 비에 운전해서 집까지 못 가겠어. 말하면서도 희미하게 미소짓는 얼굴이 최종수 눈에는 또 태평해 보였다. 속이 타들어간다. 최종수는 박병찬이 그렇게 굴 때마다 미칠 것 같았다. 창밖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해 떨어지니까 주변은 금방 캄캄해졌다. 만조가 된 인천 바다가 이토록 두려운 건 살면서 처음이었다.

박병찬은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빗속에서 차를 끌고 질질질질 운전했다. 와이퍼가 퍼붓는 비를 닦아내는 그 사이에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오, 입밖으로 내뱉는다. 박병찬은 운전대를 옆으로 꺾는다. 눈에 보이는 대로 낡은 모텔 주차장으로 쑥 들어갔다. 뭐야 박병찬? 눈에 띄게 당황한 최종수에게 박병찬이 안전벨트를 푸르며 말했다. 좁은 차에서 자는 것보다 발 뻗고 자는 모텔이 낫지 않아? 최종수는 다 허물어져 가는 모텔에서 숙박을 하느니 꽉 끼는 이 차에서 자다가 비에 떠밀려 가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다. 최대한 버텨봤지만 최종수의 저항은 힘없이 끝났다. 기어이 박병찬의 손에 끌려들어갔다. 다행인지 당연한 것인지 모텔에는 빈 방이 있었다.

핸드폰은 여전히 먹통이고 그 모텔에는 인터넷 연결이 되어 있지 않아서 와이파이도 없었다. 근처의 무료 와이파이도 안 잡힌다. 건물과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가 사나웠다. 끔찍했다. 최악이야. 이건 꿈이야. 박병찬이 등장하는 개같은 꿈을 꾸는 일은 한 두번이 아니었다. 최종수는 눅눅해진 얼굴을 감싸 쥐었다. 언제부터 이 모텔 욕실에 있었는지 알기도 어려운 도브 샴푸로 비 맞은 머리를 깨끗이 씻어낸 박병찬은 누구보다 상쾌해 보였다. 이 공간에서 유일하게 다른 색깔과 채도를 띤 존재 박병찬. 최종수의 기분 탓인지 진짜인지, 공간에서는 오래 된 냄새가 쿰쿰하게 풍겼다. 박병찬은 최종수보다 먼저 이불에 털썩 드러누웠다. 그래도 이불은 도톰하고 괜찮네. 종수야 내일 아침까지 비 안 멎으면 어떡하지. 우리 여기서 조난 당하면 진짜 큰일이겠다, 하고 농담하며 박병찬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해맑게 웃었다. 최종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웃지. 지금 웃음이 처 나오나. 박병찬 진짜 미친놈. 분명 집에서 출발할 땐 즐거웠는데. 고약한 장난에 걸린 느낌이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휘말려 버린 최종수에게만 이 모든 게 악몽이었다.(병찬 : 다음엔 내가 날씨도 잘 알아보고 숙소도 잘 예약할게. 내가 미안하다. 잘 때 형아가 우리 쫑수 꼬옥 안아줄 테니까 이제 씻고 와. 아까 보니까 바닥은 쫌 지저분해서 내가 대충 치워놨거든? 샤워기는 안 더러워서 괜찮아. 종수 : …… 박병찬 너는 위기의식이라는 게 없어? 병찬 : 종수야. 비 오는 날 너랑 개후진 모텔 들어왔다고 내가 위기의식까지 생겨야 돼?)

박병찬8

최종수랑 바다 보러 갔는데 비 와서 하룻밤 모텔에서 잤다. 와이파이 설치 안 된 곳은 진짜 오랜만에 봐서 신기하기도 하고 쪼금 두근거리기도 했다. 추리소설 보면 이런 모텔에서 밀실 살인사건 같은 게 일어났던 것 같아 은근한 기대감도 있었다. 핸드폰으로 인터넷이 안 돼서 좀 불편하긴 했지만 일기예보를 보기 위해 모텔에 설치된 TV로 뉴스를 시청했다. 아싸. 들었냐, 종수야. 내일은 비 안 온대.

밤새 네모 반듯한 돌멩이였던 핸드폰은 다음날 아침이 되니 문제 없이 전화도 잘 되고 인터넷도 쓸 수 있었다. 이것 봐 역시 인간은 너무 많은 것을 인터넷에 의존하고 있다니까. 이러다가 AI가 인간을 지배하는 시대가 오는 것은 금방일 텐데……. (종수 : 박병찬. 여기 모텔 근처에 백반 잘나오고 맛있는 기사식당 있대. 너 그런 집밥 느낌 좋아하잖아. 병찬 : 어디 봐봐. 종수 : 여기. 반찬 메뉴는 식당 가면 알 수 있다는데. 리뷰도 많고 점수도 괜찮아 보여서. 병찬 : 종수 너 배고파? 종수 : 응. 병찬 : 그래. 그러면 우리 여기서 아침밥 먹고 출발할까? 종수 : 응. 그리고 너 맨날 뭐 안 먹고 싶다, 배 안 고프다, 먹는 거 귀찮다 그래놓고 배고프면 말도 짜증 나게 하고 성격도 더러워지잖아. 병찬 : 와아…… 날씨 죽인다, 종수야! 역시 너랑 같이 바다 보러 오길 잘 한 것 같애!!! 종수 : 야 박병찬 속도 줄여.)

최종수9

박병찬이 때마다 빠지지 않고 오는 대학병원에 최종수가 따라 왔다. 중학생에서 고등학생으로 올라갈 때 이 병원에서 무릎재활을 했다고 한다. 지금 국내에서 선수로 활동 중인 박병찬은 아무리 바빠도 정기 검진을 받았고 의사의 입에서 별 문제 없다는 말을 확인 받아야 안심하는 듯했다. 무릎이 말썽을 부리는 건 순식간이라 정기검진 시기가 되면 박병찬은 부쩍 말수가 줄어들고는 했다.

종수야. 아무리 예약하고 왔어도 대학병원은 외래 진료 대기 시간이 진짜 오래 걸리거든. 내 이름 불릴 때까지 눈 좀 붙일 건데 넌 어디 딴 데서 놀고 있어. 어휴. 혼자 와도 된다니까 굳이 따라와서는 형아를 귀찮게 하네. 그렇게 말하면서 혼자 웃는 박병찬의 옆얼굴을 보면 최종수 마음 한 켠 어딘가가 뻐근하게 좋았다. 피곤하면서도 긴장한 듯 박병찬은 팔짱을 끼고 눈을 감으며 호명되기를 기다렸다. 최종수는 옆구리를 꾸겨서 제 머리를 박병찬의 어깨에 기댄다. 두 사람은 누가 봐도 다정했다. 박병찬과 최종수는 딱딱하고 넓은 병원 의자에 나란히 앉아 진료를 기다렸다. 몇 분 지나지도 않았는데 박병찬이 최종수의 무릎을 살살 흔들었다. 박병찬 따라 눈을 감고 있던 최종수의 앞에는 노인이 서 있었다. 다리를 절뚝이거나 휠체어를 탄 대기 환자가 많아져서 박병찬과 최종수는 그들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예약된 시간보다 한참 전에 도착했는데도 도저히 박병찬의 이름이 불릴 낌새가 없었다. 그제야 박병찬이 한 번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최종수에게 말한다. 종수야. 딴 데서 시간 보내고 오라니까. 박병찬 나름의 배려였다. 최종수는 더 고집 부리지 않고 혼자 환자 및 보호자 전용 엘리베이터 앞으로 걸어갔다. 뒷모습이 쓸쓸해 보였다. 졸졸 따라나오던 박병찬이 최종수의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종수야 내가 끝나고 전화할게.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최종수가 짧게 대답했다. 어.

최종수는 음료라도 마시려고 프랜차이즈 커피숍이 붙어 있는 병원건물 지하의 휴게공간에 간다. 포스기 앞에 선 아르바이트생에게 따뜻한 음료를 주문하며 휴게공간을 둘러 본다. 환자와 보호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고 한쪽 벽면에 설치된 100인치 TV에서 얼마전에 진행했던 농구 경기가 재방송되고 있었다. 눈이 번쩍 뜨인다. 아직 1쿼터였다. 최종수와 박병찬이 카메라에 한 번씩 얼굴이 비춰진다. 서로 유니폼이 다르다. 이 경기 모니터링 못했는데. 최종수는 음료를 받고 휴게공간 끄트머리에서 의자를 끌어와 앉는다. 잘됐다 싶었다. 최종수의 의자 옆에는 소아병동과 환자복을 입고 있는 아이가 있었다. TV 앞에 꼭 붙어 있다가 보호자가 이름을 부르니 화면에서 멀찍이 앉아 의자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앞니가 빠져 발음이 샜다. 엄마, 우리 이거 다 보고 들어가야 해. 병실에서는 애들이 딴 거 틀어서 농구 못 보게 한다고. 아이는 흥분한 목소리로 호들갑을 떨어대며 가만히 앉아 화면을 보지 못했다. 최종수는 손에 든 종이컵을 손바닥으로 주물렀다. 그 아이를 신경 쓰지 않으려고 애썼다. 눈을 가늘게 뜨고 영상으로 담긴 경기를 보고 해설에 귀를 기울였다. 드문드문 휴게공간에서 들리는 말소리가 섞이고 옆자리 아이가 거참! 그게 아니지! 따위의 아저씨같은 추임새를 넣어서 듣는 귀가 번잡스러웠다. 볼을 잡은 박병찬의 레이업 슛에 원통해 하는 아이는 신경 쓰기 싫어도 엄청나게 신경 쓰인다. 최종수는 종이컵을 덮은 플라스틱 리드를 열었다. 딱 알맞게 식은 음료를 또 입으로 후후 불어 마셨다. 최종수와 일정한 거리를 사이에 두고 간이의자에 앉아 TV를 보던 아이가 문득 옆을 본다. 제 옆에 앉은 위협적일 만큼 커다란 성인 남성의 얼굴을 자세히 보고자 고개를 앞뒤로 산만하게 움직인다. 아이는 어느 각도에서 몸을 멈추고는 어어, 하고 놀란 소리를 낸다. 입을 어, 벌린 채 정지된 것처럼 최종수에게서 시선을 떼어내지 못하는 것이다. 반사적으로 최종수도 아이를 본다. 아이와 눈이 마주친다. 아이의 얼굴은 농구공보다 작아서 몸 전체적 윤곽과 앞니 빠진 입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이의 까만 눈동자에 무수히 빛나는 별이 차오른다. 허어어어. 최종수 선수다…….

소아병동과에서 온 아이들은 링거대를 밀고 와서 간격 맞춰 줄을 섰다. 스물일곱 번째 남자 어린이는 사진촬영까지 요청했다. 나랑 같이 이렇게 엄지 척 해줘요! 최종수는 테이블 의자에서 내려와 한쪽 무릎을 세우고, 다른쪽 무릎은 바닥에 대고 구체적으로 요구한 자세를 취한다. 아이와 가까이 붙어서 카메라를 든 보호자를 향해 엄지를 들었다. 찰칵.

스물여덟 번째 싸인을 끝내는데 최종수의 등 뒤로 누군가의 손바닥이 매섭게 꽂혔다. 깜짝 놀라 뒤돌아 보니 박병찬이다. 최종수의 귀 옆에서 쫑알대는 어린이의 수다스러운 목소리에 박병찬이 바로 뒤에 온 줄도 몰랐다. 야, 최종수. 너 진짜 왜 핸드폰을 안 봐? 전화를 몇 번이나 했는데. 내가 너 얼마나 찾아다녔는 줄 알아? 병원 지하에 있는 카페에서 농구선수가 애기들 싸인해주고 있다고 해서 찾았지, 안 그랬으면……. 그리고 휴게공간을 쓱 둘러본 박병찬 선수까지 테이블에 의자를 끌어와 앉게 된다. (병찬 : 으응, 그래서 어린이 이름이 뭐라고 했지요? 하민이? 종수 : 하빈이. 병찬 : 응 우리 하빈이도 씩씩하게 퇴원해서 형아랑 같이 농구하자. 자, 하이파이브-! 오예-!)

박병찬9

최종수랑 잤다. 평소에는 칼로리 소모한 만큼 밥이나 먹으러 가는데, 오늘따라 최종수가 이상한 소리를 해대서 잠시 올스톱이 된다. 박병찬은 이불 밖을 나가려는 최종수를 붙잡았다. 정돈 안 된 이불 위에서 박병찬과 최종수는 길고 진솔한 대화의 시간을 가져야만 했다. (종수 : 야, 너 핸드폰에 전화 왔어. 병찬 : 급한 거 아니야. 나중에 받아도 돼. 아니이,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종수야 너 내가 할 말 있을 때 꿍하게 있는 거 하지 말자고 했지. 빨리 말해. 너 대체 왜 삐졌냐고. 종수 : …… 박병찬 너 왜 딴 사람들한테도 형아라고 해? 병찬 : 뭔 소리야? 내가 언제. 종수 : 네가 하빈이한테 그랬잖아. 병찬 : 하빈이가 누군데?)

최종수10

오랜만에 박병찬이랑 농구했다. 500mL 토레타 한 병을 나눠서 마셨다. 박병찬이 우리는 일도 농구, 취미도 농구, 데이트도 농구라고 말하며 웃었다. 최종수는 흘러가는 잔잔하게 구름을 보면서 발바닥과 어깨의 피로함을 느꼈다. 너랑 나 보면 농구선수 사생활이란 것도 별 거 없지 않냐. 우리 진짜 대박 건전한 듯. 기사 나올 것도 없다. 박병찬의 몇 마디에 최종수는 애인에게도 말 못할 생각이 길어진다. 아마 최종수의 마음을 건드린 단어는 ‘사생활’이었을 테다.

최근에 모 구단 선수의 사생활 문제로 여기저기서 말이 많았다. 그쪽 구단이나 선수와 별 다른 연고도 없고 딱히 구설수에 오르내리는 일과 두 사람이 비슷한 상황도 아니었지만 최종수와 박병찬은 만남도 대화도 조심스러운 시기를 보냈다. 최종수 자신의 사생활. 최종수 선수와 박병찬 선수의 사생활. 최종수는 박병찬과의 농구와, 농구하는 미래와, 박병찬과 미래의 농구를 꼼꼼하게 더듬어 하나하나 이어붙였다. 박병찬과 같이 있는 내일과 모레, 일년 뒤, 삼년 뒤…… 그런 건 어렵지 않게 상상이 되는데 자꾸만 중간에서 돌부리에 걸린 듯 최종수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바보가 된 것 같았다. 뭐 대단히 엄청난 생각을 한 것도 아니다. 최종수 혼자 생각하고 내리는 결론을 박병찬이 썩 좋아하지 않아서 입으로 꺼내지 않는다. 끝없는 생각이 불쑥불쑥 최종수를 찾아왔다. 결론이 맺어지지 않아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심호흡을 길게 했다. 질린 표정의 최종수는 이마를 짚었다. 공원 너머 멀리서 들려오는 아이돌 노래 맞춰 박병찬은 농구화 신은 발을 달싹거렸다. 최종수는 그 발을 보다가 벤치 아래에 내려놓은 더플 백을 끄집어 올렸다. 지퍼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안쪽 주머니에 넣어둔 자신의 핸드폰 전원을 끈다. 응? 핸드폰 전원을 왜 꺼? 연인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 박병찬이 의아해 했다. 최종수는 ‘이 세상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그냥 너랑 계속 이렇게 농구하고 싶어’ 라고 차마 말하지 못하고 미적지근하게 대답했다. 그냥.

박병찬10

집에서 최종수랑 잤다. 주말 내내 함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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