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뱅]The Label
가비지타임 최종수X박병찬 _ 장도IF 종뱅
※ 장도IF 종뱅
※ 둘이 사이 좋았다가 안 좋아짐(?). 안 사귐.
※ #종뱅_전력60분 49회 주제 : 미필적 고의
※ 공백포함 약 22,000자
종수가 기억하는 박병찬은 변태 같은 부분이 있었다.
뻑하면 일학년 후배들-그 중에서도 종수를-을 그렇게 쪼물딱거렸다. 가장 많이 하는 건 어깨동무다. 어느 순간부터라고 딱 집어 말하기 어렵지만 박병찬은 말을 걸 때 종수의 어깨에 부드럽게 손을 얹었다. 검지부터 소지까지는 어깨에, 엄지는 등이나 날개뼈 부근에서 은근슬쩍 문질문질. 자기가 그런 걸 한다는 인식도 없다. 박병찬은 중학교에서 막 올라와 아직 어린 태가 나는 종수의 뺨을 마트에 내놓은 곰인형 견본품 만지듯 꾹꾹 누르고 쪼물댄다. 이발을 미뤄 덥수룩한 종수의 머리카락을 뒤에서 쓰다듬거나, 느슨하게 품이 남는 종수의 져지를 뺏어 입었다. 자기 건 삼년 내내 입었더니 보풀이 일었다며. 박병찬은 키가 엇비슷한 종수의 허리를 껴안았고, 웃을 때는 제가 억지로 옆자리에 앉힌 종수의 허벅지를 찰싹찰싹 때린다. 둘은 꽤 많이 붙어 다닌다. 박병찬이 퍼스널 스페이스라는 단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 정도였다. 팀 스포츠인 농구는 신체접촉이 많은 운동이며 피부 스치는 걸 싫어하면 경기 뛰는 것도 어렵다. 그런 이유를 핑계 삼는 박병찬의 개수작이라고 느낀다. 그럼에도 누구도 감히 박병찬선배에 대한 불만을 터트리지 못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모두가 말을 삼켰다.
학기 초의 종수도 다른 부원들처럼 박병찬에게 아무 말도 못하고 입만 댓발 나왔다. 그러다 박병찬이 자신에게 기대어 이온음료를 빨대로 쪽쪽 빨아대는 모습이 점점 참을만 했다.
어쩌면 박병찬이 농구를 잘해서-종수가 볼 때 막 그렇게 엄청나게 대단히 잘하는 것 같지는 않다- 종수의 불쾌함이 줄어든 것일지도 모르겠다. 현 대한민국 고교농구부에서 박병찬만큼 잘하는 사람이 없다. 물론 종수도 박병찬 하는 만큼은 한다. 그리고 박병찬이 하루에 소화해 내는 연습량을 보니 곧 종수가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박병찬이 농구 잘해서…… 그래서 괜찮나? 왜 괜찮아졌지? 그 마음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나. 종수는 그것에 이름 붙이지 못했다. 그냥, 괜찮아진 것이다. 여전히 박병찬은 도발적이고 짜증스럽긴 하지만. 서열정리 한답시고 무식하게 때리는 것보다는 이게 차라리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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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구도 잘하고 존나 달라붙는 박병찬. 박병찬은 예뻐하는 일학년 누구에게나 엉덩이를 두드려주고, 팔을 주물러 주고, 슛 자세를 봐주고, 연속 슛 성공하면 머리카락을 손으로 헝클이고, 맞잡은 손바닥을 짝짝 쳐주고, 자연스럽게 팔을 둘러 어깨 동무를 한다. 팀으로 경기하는 농구부에서는 굉장히 흔한 응원과 칭찬이었지만 박병찬도 상대도 아무 생각 없는 피부의 접촉이라고 하기엔 박병찬이 너무…… 하여간 뭔가 좀 달랐다. 장도고 에이스 박병찬 앞에서 얼굴을 붉히는 부원은 한둘이 아니다. 십대 남자애들을 모아두고 땀 빼는 운동만 좆 빠지게 시키는데 타인의 다정한 손길에 음침한 기분이 드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종수 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랬다.
빡센 훈련이 끝난 밤. 종수는 잠들려고 침대에 누우면 박병찬이 절로 떠올라 미간이 찌푸려졌다. 기분이 묘했다. 그 인간은 왜 그렇게 치대는 거야? 애정결핍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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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찬이 존나 대가리 돌아가지고 후배들에게 선 넘는 행동을 강요하는 건 또 아니었다. 하늘 같은 운동부 선배가 직접 다가오는 친근함의 표현이자 장도고 농구부 에이스인 자신을 너무 어려워하지는 말라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 것 치고는 종수가 보기에 박병찬은 너무너무 재수 없게 굴었다.
후배가 불편한 표정을 숨기든 말든 상관 없이 박병찬은 종수를 핸드백처럼 옆구리에 끼고 돌아다녔다. 매점 같이 갈래? 단 거 잘 먹어? 장도중에서 네가 에이스였으니까 내년부터 에이스 타이틀은 네 거겠네. 아 그래. 나도 전에 너 경기하는 거 봤어. 너 진짜 잘 하더라. 네가 딴 데 안 가고 여기 와서 우리 감독님이 얼마나 든든해 하시는데. 종수 너 농구 잘하고 잘생겨서 어딜 가나 인기 많지? 박병찬은 여유롭고 친절하며 종수에게 듣기 좋은 말만 했다. 옆으로 넓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보이는 혀가 매끄러웠다.
입학과 함께 박병찬에게 존나 시달린 종수는 박병찬이 남자를 좋아하는 변태게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일학년들끼리는 그런 이야기를 선배들 몰래 떠들기도 했었다. 기본적으로 평온하고 무던한 이규마저 박병찬의 손길을 거북해 했으니 말 다했다. 봄이 끝나 여름이 되어가는데 아직도 박병찬이 어깨를 두드리면 규는 눈에 띄게 경직했다. 그 손길에 어찌저찌 익숙해진 종수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농구할 때는 제외하고는 박병찬은 손을 쓰면 안 된다. 탈의실에서 불거진 일학년들의 박병찬 야썰 비스무리한 험담에 규가 말을 얹었다. 저번에 여기, 점혈 자리 짚는 은둔고수처럼 목 뒤를 엄지로 문지르면서 만지던데. 비명인지 감탄인지 알기 어려운 쇳소리가 얇고 길게 공간을 울렸다. 종수 또한 박병찬이 규가 쓴 헤어밴드를 슬슬 만지는 걸 본 적 있었다. 잠깐이었지만 주황색 헤어밴드를 쓴 규의 귓바퀴에 박병찬의 손끝이 닿았었다. 순간적으로 규는 겁에 질린 얼굴이었던가. 박병찬은 그걸 보고 또 규의 어깨를 때리며 박박 웃었을 테고.
박병찬은 규도 티 나게 아꼈다. 직접 들었으면 퍽 섭섭했을 것이다.
친구처럼 지내자고-운동부에서 감히 허용되지 않는 분위기였기에 그럴 수가 없음에도- 말할 땐 언제고 일학년들이 자신의 눈치를 볼 때면 박병찬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변태 같다. 아무리 봐도 삼학년이 일학년 끼고 돌아다니는 것도 부원과의 친분 쌓기, 끈끈한 우정 그런 게 아니라 뭣도 아닌 권력놀이에 취해서 벌이는 장난처럼 느껴졌다. 썩 재미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 것과 상관없이 농구부원들은 박병찬에게 잘했다. 감독님이 박병찬을 아끼고, 부연중 때부터 박병찬만한 농구선수가 지금껏 없었기 -비교대상이 뚜렷한 탓에 주변의 전반적인 평가가 박하기는 하나 종수도 농구를 잘한다.-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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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찬은 기본적으로 사람을 좋아하고 친절한데 어딘가 무심한 편이었다. 이기적이라고 말하는 게 낫겠다. 능력 있고 재능 넘쳐서 곧잘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해.’ 라고 말하고 다녔다. 그렇게 오만한데도 농구부원들과의 관계가 어그러질 일이 한 번도 없었다. 운이 좋았다. 일학년 종수도 박병찬과의 관계가 불편하긴 해도 깔아뭉개고 싶지는 않았다. 박병찬 성격을 봤을 때 하극상을 견뎌줄 리더가 아니었다. 존나 귀찮아질 게 뻔했다.
박병찬은 힘이 있으면 휘두루고 싶은 애새끼였다. 고삼이라 더욱 제정신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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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댓글에는 박병찬과 최종수가 얼른 프로로 데뷔해서 한 판 붙길 바라는 사람도 한둘이 아니다. 최종수가 아직 어리니까 앞으로 성장 기회가 많다, 박병찬 고1 때는 최종수보다 한 수 위 아니었던가, 종수가 더 잘하지, 뭐래 농구로 붙으면 박병찬이 최종수 조져버릴걸?, 중3 때보다 키 큰 거 아닌가? 최세종 아들이니까 고3 되면 키도 몸도 더 커질 테고, 박병찬 키는 다 자랐지. 몸 더 안 키우려나?, 걔는 스피드 빼면 시체인데 몸 키울 필요 없을 듯, 박병찬이 스피드 빼면 시체라니 말넘심 걔 두루두루 잘하잖음, 최종수는 제너럴리스트고 박병찬은 스페셜리스트, 난 위 댓글이랑 반대의견임 최종수한테 박병찬은 안 돼, 아니 둘 다 대한민국 국대 될 인재들인데 팀가르기를 왜 함 쟤들끼리, 최종수가 더 재능있는 것 같은데, 뭔소리임 지금 국내고교팀에서 박병찬만큼 하는 애 없지 않나, 최종수는 딱봐도 멘탈존니약해보임ㅋㅋㅋ, 박병찬이랑 최종수 데리고 있으면 장도고는 5년 내내 우승만 하겠네, 최종수는 중학생 때 그렇게 잘했으면 앞으로도 정말 기대된다, 둘 다 뼈대가 존나 얇은 것 같아, 혹시 몰라 박씨 집안에 거인 유전자가 있어서 겨울 쯤엔 박병찬이……. 그런 걸 하나하나 읽어보면 눈꺼풀이 금방 뻐근해진다. 종수는 지쳐서 핸드폰을 덮어두고 이불을 끌어안았다.
그러면 종수의 꿈에는 박병찬이 짜잔하고 등장한다. 장도고 삼학년 박병찬은 종수에게 아빠 최세종 보다 가깝고도 멀었다. 그야 물리적으로도 박병찬은 종수의 가까운 곳에 있었으니까. 꿈속 박병찬은 어째서인지 학교 체육관 건물보다 크다. 거대 박병찬은 장도고 유니폼을 입고 빛나는 형광색 운동화를 신었다. 종수에게 낯설지 않은 모습으로 꿈에 찾아왔다. 박병찬은 움직이면 민폐라는 듯 최소 면적으로만 땅에 닿을 수 있게 몸을 가득 웅크렸다. 오른쪽 무릎에 뺨을 대고 울적하게 앉아 있다. 종수는 꿈속의 거대한 박병찬에게서 몇 걸음 물러선다.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박병찬이 맞다. 종수는 일렁이는 햇볕에 눈을 비볐다.
‘정말이지…… 더는 자라고 싶지 않았는데.’
꿈속 박병찬이 중얼거렸다. 종수는 그게 무슨 말인지 알지 못했다. 농구할 때 키가 크면 좋은 것 아닌가. 물론 이렇게 거대한 사이즈로는 팀에 낄 수 없겠지만. 종수네 할머니가 갖고 있는 빌라아파트보다 훨씬 큰 박병찬이 입을 열면 공기가 진동했다. 박병찬의 목소리는 무거웠다. 종수의 몸 구석구석에 박병찬의 목소리가 스몄다가 빠져나왔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일까, 종수야.’
박병찬이 무슨 대답을 원하는지 종수는 알기 어렵다. 아주아주 커다란 박병찬은 눈도 코도 입도 커서 종수를 단숨에 삼켜버릴 것 같았다. 어라? 이런 거 어디서 본 적 있지 않았던가. 종수는 거대한 박병찬을 보며 골똘히 생각했다.
한 자세로 서서 박병찬을 보고 있으니 종수의 몸이 둥실둥실 떠올랐다. 맥락 없고 형용하기 어려운 꿈이다. 꿈이 다 그렇지 뭐. 몸이 계속 높이 올라간다. 바닥에 발이 닿지 않는데도 무섭지가 않았다. 이 위치라면 골을 몇 점이나 넣을 수 있을까. 종수는 번뜩 떠올렸지만 손에서 농구공이 솟아나지 않는다. 종수는 유니폼도 없고 공도 없고 운동화도 안 신고 그냥 알몸이다. 박병찬 앞에서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친 나체여도 종수는 부끄럽지 않다. 계속 농구공을 찾았다. 공이 없으면 점수를 낼 수 없다. 농구라는 스포츠에는 사람도, 공도, 골대도, 심판도, 점수판도 필요하다. 종수는 큼지막한 박병찬을 올려다본다. 무언가를 놓고 와버린 사람처럼 박병찬은 초조하게 어깨를 안으로 모으고 작게 우그렸다. 큰 몸뚱이가 버거워 보였다. 허공을 날아오르던 종수는 끈이 떨어지듯 박병찬의 이마에서 콧등으로 미끄러졌다. 넓은 손바닥의 도톰한 부분에 힘 없이 떨어졌다. 통증도 없는 짧은 추락이다. 어릴 적 서유기에서 이런 대목을 읽은 기억도 난다. 깨달음이 없으니 뛰어봤자 부처님의 손바닥 안이로다.
종수는 박병찬의 손바닥에 누워서 자연의 일부 같은 박병찬의 얼굴을 본다. 박병찬은 손바닥 위의 종수를 보며 눈을 감았다가 뜬다.
‘이제 그만 할래.’
치솟는 피로함을 삼켜내며 중얼거렸다. 종수는 여전히 박병찬의 손바닥에 몸을 뉘고 박병찬의 턱끝과 하늘을 보고 있었다. 그만 하겠다는 말이 마법의 주문처럼 박병찬을 감싼다. 거인 박병찬은 어깨가 오그라들어 점점 작아진다. 뼈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거야. 그만하고 싶다는 건 또 뭘까. 몸이 너무 커져서 그런 말을 한 걸까. 종수는 묻고 싶었지만 박병찬은 작심한 듯 작아지고 작아진다. 손바닥에 얹어두었던 종수도 안전하게 땅으로 내려왔다. 장도고 삼학년 박병찬은 이윽고 종수와 비슷한 크기가 되더니, 더 작아지고 더 작아졌다.
‘사이즈 달라도 괜찮으니까 선배가 입은 장도고 유니폼이랑 신고 있는 운동화는 나한테 주면 안 돼요?’
종수가 물어도 박병찬은 아득하게 작아지기만 한다. 이번에는 종수의 손바닥에 박병찬이 내려앉았다. 핸드폰처럼 가벼웠다. 그래도 점점 줄어든다. 공주가 갇힌 고대의 성처럼 커다랬던 박병찬이 모래알로 변해버렸다. 모래알 박병찬이 종수에게 속삭였다. 태초의 박병찬이다.
‘종수야. 정말로 이게 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질문의 의중을 모르니 대답도 할 수 없다. 종수는 작은 모래알을 소금 맛 보듯 손끝으로 찍어서 입에 넣었다. 꿈이어서 박병찬은 아무 맛이 안 난다. 혀에 녹아내리는지 어떤지도 모른다. 너무 작아서 모래알이 느껴지지 않았다. 꿀꺽 삼켰다. 드디어 종수는 혼자다. 침대에서 눈 뜨면 기억도 못할 허무한 꿈이다.
그러게. 이게 다 무슨 소용일까.
*
초여름. 박병찬은 감독에게 한 소리라도 들었는지 다른 일학년에게 관심을 거두고 종수만 찾았다. 멀리서 보면 두 사람은 애인처럼 보였다. 봄밤 내내 무릎 뒤가 아프다고 칭얼대더니 종수가 박병찬의 키를 따라 잡았다. 따로따로 떼어놓고 보면 비율 좋은 종수가 박병찬보다 훨씬 더 커보였다. 대놓고 부러워하던 박병찬은 히죽거리며 축복처럼 예언했다.
“예쁘고 착한 우리 최종수는 앞으로 십센티미터는 더 커질 것이니라. 그리고 그 모든 것은 다 개쎄게 물려받은 대박 잘난 유전자와 점프 오백 번씩 하는 너의 미미한 노력이 아닌 나 박병찬의 덕분일 테니 이 예언을 들은 최종수는 나를 주인으로 모시고 섬기거라.”
축복인 줄 알았는데 별 시덥잖은 소리였다. 마술적 힘은 좆도 없을 박병찬의 예언에 종수는 콧방귀만 꼈다. 신발끈을 풀었다가 단단하게 조으며 박병찬은 혼자서 킬킬거렸다.
이제 종수는 박병찬의 어깨동무가 싫지 않았다. 박병찬이 다른 부원들이랑 몸 부대끼고 놀고 있으면 빤히 본다. 시선에는 감정도 색깔도 없이 무심했다. 분명히 종수도 박병찬이 다치는 건 싫은데, 가끔은 샤워실에서 비누라도 밟고 넘어져 뒤통수가 깨지면 좋겠다. 종수가 생각하는 박병찬은 어디가 아프면 아끼는 일학년 후배한테 와서 징징댈 것-ex. 종수야. 내가 아까 샤워하다가 비누 밟아서 뒤로 슬라이딩 했는데, 와 진짜 대박 존나 아퍼. 여기 봐. 혹 났지. 엉덩이도 미친 씨바, 꼬리뼈 박살난 것 같아. 내 엉덩이 볼래? (종수의 반응 : <박병찬 너무 싫어> 표정)- 같았다.
종수는 박병찬이 자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안다. 종수는 이해하지도 못할 무슨 감정을 어떻게 느껴도 결과적으로는 호감으로 표현하는 박병찬이었다. 하나부터 아홉까지 이기적이면서도 겉으론 위선 떠는 이중적인 꼴이 유감스러웠지만 일관적인 태도로 종수를 대할 때는 연상 같았다. 워낙 종수에게 질척거리는 애들이 많아서 더욱 그렇다. 농구 못하고 발전도 없고 기량도 갈고 닦지 않으면서 열등감만 폭발하는 놈들이 껄적지근하게 자신을 자극하는 것보다 박병찬의 쪼물거림을 선택하는 것이다. 게다가 박병찬은 농구도 꽤 잘하잖아. 종수는 자신이 꽤 합리적인 선택을 했다고 여겼다.
*
더는 헤어밴드 안쪽으로 길죽한 손가락이 들어올 일 없어서 몸도 마음도 편안한 규만이 종수와 박병찬의 관계에 불만족했다. 종수가 귀찮아하는 것을 억지로 참는다고 생각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기로 한 거야? 규의 염려스러운 물음에 종수는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일대일 해준대.”
“언제?”
“자기 시간 날 때.”
종수의 대답에, 규는 박병찬이 못마땅한지 고개를 가로로 살살 저었다.
*
종수는 장도고 박병찬에 대해 은근한 기대가 있었다. 만나본 적은 없었지만 부연중 시절부터 시작된 박병찬의 영상은 최근 것까지 꼼꼼하게 유튜브에 올라와 있었다. 종수 나이에 농구하는 애들 중에서 박병찬 영상을 안 본 선수는 없을 것이다. 과거 박병찬의 영상 댓글에는 박병찬 이야기 밖에 없었다. 아니면 아예 외국 농구선수들, 이름 날린 프로의 19세 시절과 박병찬은 비교 당했다. 한국인들은 존나리 긴 세월 동안 똑같이 머리털 검은 인간이라는 이유로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비교하길 좋아했다. 그만한 유잼 컨텐츠가 없었다. 사람들은 서서히 세뇌 당했다. 종수도 자신의 실력과 박병찬의 능력을 비교했다. 만연한 사회적 분위기였다.
종수는 부연중 박병찬 영상부터 장도고 박병찬의 영상까지, 밑에 달린 댓글을 전부 읽었다. 종수도 박병찬과 주전으로 뛰었던 장도고vsJ고 경기 영상을 다 보고 화면을 내리는데, 최신 댓글 중 하나가 종수의 눈에 띈다. 나 저번에 정형외과에서 박병찬 본 적 있는데. 여전히 경기 잘 뛰네?
*
박병찬은 종수의 에너지를 빨아먹는다. 종수 뿐 아니라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며 에너지를 얻는 타입이었다. 혼자 있으면 외롭잖아. 애교스러운 말투에 사랑스럽지 않은 남고생 목소리가 이질적이다. 반대로 종수는 가능하다면 혼자 있고 싶었다. 안 그래도 고등학교 입학한 후 머리가 복잡하고, 자꾸만 딴 생각이 침습적으로 밀려오고, 밤에는 찾아오지 않는 졸음이 낮에 밀려왔다. 졸음이 뚝뚝 떨어지는 종수를 보며 박병찬은 일주일 동안 ‘약 먹은 병아리’라고 불렀다. 자꾸만 이상한 별명이 늘어났다. 박병찬은 종수의 수면에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존재였다. 전에 약속했던 것처럼 훈련이 끝난 종수를 불러 일대일도 해주지 않았고, 요즘 식단하느라 과일을 제외한 단 음식은 안 먹는 중인데 급식에 바나나맛 우유가 나오면 종수만 하나 더 챙겨주고, 자꾸만.
“쫑수야.”
“네.”
“넌 이 형아의 단점이 뭐라고 생각하냐.”
이상한 소리를 해댔다. 형아? 알아먹기 힘든 단어가 종수의 입안에서 물밖으로 건진 금붕어처럼 펄떡거렸다. 침과 함께 꼴깍 삼켜버려 입밖으로 새어나오지는 않는다. 박병찬의 질문에 적당한 답변을 하지 않으면 스무고개가 시작된다. 종수도 장도고에 오기 전까지 단체 생활을 길게 해서 눈치가 있다. 박병찬의 패턴을 알게 되었기에 깊게 고민하지 않았다.
“성격.”
“성격 빼고.”
“지금 이런 행동들…….”
박병찬이 한숨을 존나 크게 쉰다. 이야, 최종수 이 싸가지를 어쩌면 좋지. 너 싸가지랑 정신머리 어머님 뱃속에 두고 나왔지? 박병찬은 하나도 화나지 않은 말투로 종수를 갈군다. 눈과 입이 웃고 있었다.
*
늦게까지 체육관에 남아 훈련한 종수와 규와 함께 공을 주우러 다니며 박병찬이 말했다. 종수야. 너는 네 아빠보다 더 잘할 테니까 벌써부터 너무 초조해 하지 마. 동기 부여 하는 방식을 다른 걸로 해야 해. 너 아빠랑 사이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니라며. 두 살 많은 게 뭐 그리 대단한 어른이라고 구구절절 늘어놓는 말은 잔소리처럼 들렸다. 종수는 박병찬의 말을 씹고 공을 묵묵히 주워 캐리어에 담았다. 종수가 대답이 없으니 박병찬은 공 줍다 말고 갑자기 오줌 마렵다며 화장실을 가버린다. 종수는 남의 집안 사정까지 파헤쳐서 오지랖 떨어대는 박병찬이 주제 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대단히 위로가 되는 건 또 아니다. 열어놓은 창으로 밤바람이 휭 불어온다. 박병찬은 화장실에 가서 안 돌아왔다. 그대로 기숙사에 간 모양이었다. 종수는 규와 함께 마지막 공을 캐리어에 넣는다. 이마가 서늘하다. 공기 중에 남겨진 박병찬의 목소리가 종수의 뒷목에 내려앉았다. 너는 네 아빠보다 더 잘할 테니까. 너는 네 아빠보다 더. 너는 네 아빠보다 더…….
*
규가 빠질 수 없는 가족 연례행사에 참여한 저녁. 일대일 파트너의 부재를 확인한 박병찬이 종수의 옆에 슬그머니 다가왔다. 종수는 박병찬과 30점 내기로 일대일을 했다.
“이긴 사람 소원 들어주기!”
박병찬이 후딱 외친 말에 종수는 가볍게 어깨를 떨어트리며 한숨을 쉬었다. 어쭈, 형님 앞에서 한숨을 다 쉬네 어린 놈이. 선공 순서를 정하지도 않은 박병찬이 공을 튀기며 종수에게 휙 다가왔다. 허리를 아래로 숙이며 종수를 제치고 단숨에 골대 밑으로 뛰어갔다. 종수의 옆으로 바람이 불었다. 눈으로 겨우 따라간 종수도 정신을 차리고 달린다. 박병찬이 쥔 볼을 뺏으려고 시도했다. 서로에게 집중한다. 몇 번씩 눈이 마주친다. 박병찬은 확실히 변태같은 부분이 있었다. 집요하고 치열하게 공에 집착했다. 공을 오래 쥐고 있을 수록 박병찬은 빛난다, 라고 스포츠 기사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 종수는 박병찬의 몸짓을 읽어냈다. 못 따라잡을 정도는 아니었다. 박병찬도 종수를 읽는다. 종수가 몇 점을 따내도록 내버려두기도 했다. 박병찬의 태도에 종수는 신경질이 났다. 서로 부딪치고 넘어진다. 밀치고 붙잡고 빼앗고 돌파하고 다시 잡아내서 끝내 점수를 낸다.
그날의 일대일은 박병찬이 이겼으나 종수에게 유의미한 순간으로 남는다. 박병찬도 아슬아슬했다. 다음에 한다면 종수가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박병찬은 앓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주저앉았고 종수는 숨을 쌕쌕거리며 말했다.
“다음에 또 해요.”
“응? 글쎄. 최종수가 나한테 하는 거 봐서-.”
뭘 본다는 말일까. 종수는 같은 한국말인데도 박병찬의 언어를 알아먹는 데에 시간이 걸렸다. 대답을 하기 전에 농구가 가득 찬 머릿속으로 박병찬의 말을 해석했다. 종수가 공을 잡고 망설이는 사이 박병찬은 셔츠를 아래에서 걷어올려 이마의 땀을 건성으로 닦았다. 종수는 호흡을 고르며 이래저래 약속에서 빠져나가는 박병찬을 노려봤다. 그 눈을 본 박병찬이 헛웃으면서 엉덩이를 털고 일어난다. 으쌰. 입으로 기운도 좀 넣은 박병찬은 종수에게 다가온다. 박병찬과 종수는 서로의 앞에 나란히 서서 잠깐 마주 보았다. 종수가 무슨 말이라도 하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목소리가 물거품처럼 녹아내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박병찬은 후배의 말을 알아듣기 전에 먼저 손을 뻗어 종수의 따뜻한 뺨을 쓸어내렸다. 종수는 예상했다는 듯 코로 숨 쉬었다. 흠칫거리지도 않는다. 박병찬은 손으로 종수의 얼굴을 만진다. 누군가에게는 전혀 익숙해지지 못해 불편할 만한 일이다. 종수는 박병찬에게서 눈을 떼어내지 못하고 가만히 있는다. 인간의 손길을 좋아하는 커다란 동물처럼. 박병찬의 미지근한 손이 종수의 뺨에서 턱으로, 턱에서 두근거리는 목빗근을 거쳐 툭 떨어져 나갔다. 계속 뛰었던 탓에 종수의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두피에 고인 땀이 결이 정돈 된 눈썹 옆으로 흘러내렸다. 이마에 머리카락이 달라붙어서 종수는 손으로 털어냈다. 후배들이 제 눈치 보는 걸 흡족해 하는 건 알겠는데, 무엇을 어떻게 해달라는 건지 박병찬이 말해주면 좋겠다. 박병찬에게 잘한다는 건 뭘까. 무엇을 어떻게 잘 해야 언제 또 일대일을 해주는 걸까. 종수는 박병찬이 구체적인 약속을 정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빤히 본다. 그 눈을 알면서도 박병찬은 딴소리를 한다.
“나 먼저 들어갈게. 우리 쫑수는 자유투 연습하고 들어갈 거지?”
박병찬이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종수가 선배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소심하게 박병찬의 반팔을 잡았던 손은 금방 다시 자신의 허벅지 옆으로 떨어진다. 다행이도 사라졌던 목소리가 돌아왔다.
“내기.”
“응?”
“내기에서 졌으니까 소원 들어줘야 하잖아요.”
“아, 그렇지. 내가 이겼으니까……”
어어, 생각 안 해뒀는데. 종수한테 뭐 시키지? 아 갑자기 생각하려니까 안 떠올라. 시작하기 전부터 뭐 할지 정해둘 걸 그랬다, 그치. 혼자 뭐라뭐라 열라 중얼거리던 박병찬이 종수에게 바싹 다가왔다. 어차피 누군가의 의견을 물어볼 정도의 관대함도 없는 주제에 박병찬이 종수의 이름을 불렀다. 종수가 무엇을 원하는지 단 한 번도 고민해본 적 없는, 해맑게 짓궂은 얼굴이었다.
“종수야.”
“네.”
“싫으면 피해라.”
“뭘요.”
“난 말했다?”
종수는 궁금해졌다.
우리가 왜 입을 맞추는 걸까.
정말 박병찬은 변태게이인걸까.
눈을 감았던 박병찬이 눈을 뜨며 두 걸음 물러났다. 종수는 손목으로 입술을 문질러 닦아냈다. 뺨과 귀가 조금씩 발갛게 달아오르는 걸 박병찬은 아는데 종수만 몰랐다. 시선이 방황한다. 종수는 식은땀을 흘렸다.
“…… 더러워요.”
“아하하. 그러게. 종수 입에 더러운 거 묻었네.”
종수의 말에 박병찬은 허파에 바람 든 사람처럼 꺼림칙하게 웃어댔다. 박병찬은 종수가 무슨 말을 하든 진지하게 듣지 않는다. 뒤돌아서 종수에게 예쁜 척 윙크를 하며 박병찬은 헐렁헐렁한 걸음걸이로 체육관을 나섰다. 이 밤의 일을 종수가 어떻게 간직하게 되는지, 박병찬이 몰랐을 리가 없다.
“무릎이 쑤셔서 형아는 이만 들어간다. 쫌만 하고 일찍 들어가서 자라, 종수 너도.”
누구에게나 다정한 목소리만 덜렁 남겨놓고 박병찬은 가버린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
스스로 복기해 볼 만한 일대일과 황당하기만 하고 감흥 없던-종수의 주관적 기억이다- 뽀뽀 이후에도 변함 없이 박병찬은 종수랑 붙어다녔다. 아주 찰떡이다. 애정인지 구박인지 경계가 애매했다. 쫑수야. 쫑쫑쫑쫑쫑 쫑수야. 별명도 해괴해졌다. 보다 못한 같은 삼학년 M선배가 박병찬에게 말했다.
“야, 박병찬. 너 일학년 괴롭히는 거 그만 좀 해라 진짜.”
혼내키는 말에 박병찬은 어처구니 없어 하는 기색도 없이 바로 대꾸했다.
“아닌데? 안 괴롭히는데? 종수야, 내가 너 괴롭혀?”
“그만하라고, 미친놈아.”
농구부 내의 연습경기 중 쉬는 시간이었다. 박병찬이 종수를 옆에서 꾸욱 끌어안았다. 네가 나랑 종수 얼마나 친한지 몰라서 그래. 애들한테 다 물어봐라. 나 종수랑 진짜 친해. 친해서 우린 괜찮아. 그치, 종수야. 너 형아랑 친하지? 대답 잘 해라. 종수가 박병찬의 물음인지 협박인지에 입을 열기 전에 M선배가 몇 마디 더 거들었다. M선배는 오늘 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노골적으로 장도고 농구부 주장인 박병찬을 싫어하는 탓에 종수도 규도 민망할 지경이었으나.
“어우, 저 미친새끼. 머리는 무슨 양아치 같이 길러서는.”
“……외모만 보고 내가 날라리 같대요♬”
쏘왓? 신경 안 써. 암쏘리 아 돈 케, 돈 케, 릴리 돈 케-*. 1절만 할 줄 모르고 박병찬은 요즘 가장 인기 많은 여자아이돌 노래를 불러댄다. 박병찬은 누가 지랄을 해도 타격이 없었다.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율동인지 커버댄스인지 하여간 주먹도 휘두르고 점프도 했다. 왼손으로 꽃받침까지 했다. 박병찬이 잽싸게 몸을 움직일 때마다 긴 뒷머리가 허공에서 팔락팔락 움직였다. 자기 혼자 푸하하 웃고는 모여있는 삼학년들 틈으로 휙 들어간다. 계속 그들과 대화하던 척한다. 응 맞아, 저번에 그랬지. 옆사람 말을 거들며 또 몸을 왼쪽으로 기댔다. 삐뚜름하게 섰다. 거들먹거리는 태도가 미움 받기 딱 좋았다. 서 있는 폼에서 성격이 보였다. 남겨진 종수와 규는 박병찬의 형광 연두색 운동화를 흘깃거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코치가 림 아래에서 호루라기를 삑 분다. 종수는 편히 쉬지도 못했는데 쉬는 시간이 끝났다. 생수병을 열어 물 한 모금 급하게 마셨다. 구석에서 다른 삼학년들이랑 킬킬대던 박병찬이 훌쩍 뛰어가서 가장 먼저 코치 앞에 섰다. 종수의 머릿속에서 박병찬이라는 항목에 라벨지가 붙었다. 사냥개. 썰매개. 양치기개. 그런 수식어가 주렁주렁 떠올랐다가 천천히 사라진다. 종수가 보기에도 박병찬이 개새끼 같은 건 어쩔 수 없었다.
까고 말해서 종수는 일대일 이후 박병찬이 마음에 안 든다. 후배들 굽어살피는 박병찬의 태도를 머릿속으로 떠올리면 종수는 입맛이 뚝 떨어졌다. 입만 살아서 잔소리 농구를 해댔다. 바다에 던져도 입만 동동 뜰 것 같은 박병찬. 요즘은 연습도 딱 남들 하는 만큼만 하던데. 아니, 그것도 안 하는 것 같아. 옆구리에 박병찬이 엉기는 건 이제 참겠는데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허여멀건 얼굴을 보고 있으면 뱃속 아래에서부터 짜증이 났다. 그날 이후로 일대일도 안 해주고. 제대로 경기 참가도 안 하고. 심지어 주전 아닌 삼학년들이랑 연습도 땡땡이 치고. 주장이면서 정신머리 빠져가지고는. 종수는 날 선 눈으로 박병찬의 넓은 등을 본다. 얼마 전부터 박병찬은 마음에 안 드는 것 투성이다. 박병찬이라는 자극을 받으면 종수는 가슴 아래 옆구리가 파르르 떨린다. 사람 마음이 휙휙 변한다. 어제는 좀 봐줄만 했다가, 오늘은 뒤통수라도 한 대 갈기고 싶다.
뭘 해도 그냥 되는 만큼만 하는 것 같던데.
돌이켜 보면 저 인간이 죽어라 노력하는 모습은 또 손에 꼽는다. 그런데 이게 또 굳이 엄청나게 노력하지 않아도 경기를 뛰는 데에 무리가 없을 만큼 박병찬은 타고난 운동 센스가 있었다. 경기도 잘 읽고 머리도 좋고 패싱센스도 있고. 아마도 세간에서는 그런 능력을 재능이라고 부르는 것일 테고. 종수도 그정도는 할 수 있다. 박병찬이 종수 자신보다 압도적으로 잘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이 들었다. 다음에는 반드시 종수가 이길 테다. 박병찬이 깨갱해서 종수를 남다르게 볼 수 있도록. 이겨도 져도 박병찬은 환하게 웃으면서 종수와 또 실없이 어깨동무 할 테지만.
종수의 눈에 박병찬은 아무 것도 간절해 보이지가 않았다.
종수는 박병찬의 뒤통수를 노려본다. 눈앞이 어질어질 하다. 까무룩 눈을 까뒤집고 뒈질 것만 같다. 박병찬 농구 존나 편하게 하네. 눈 마주칠 때마다 쪼개는 것도 꼴보기 싫어. 존나 나대. 저런 인간이 어떻게 장도고에 입학했지. 보면 볼 수록 미스터리다. 종수는 슛 연습을 하는 박병찬만, 볼 잡고 있는 박병찬만, 자신과 일대일 해주는 박병찬만 좋았다.
“M선배도 병찬선배 때문에 진짜 힘들겠네.”
규가 뒤에서 중얼거렸고 종수도 똑같이 생각했다. 응. 진짜 개빡치겠다.
*
종수는 박병찬을 오래 생각했다. 왜 나한테 뽀뽀했지. 왜 요즘 농구에 시들해졌지? 그때 뭐라고 했더라. 기억이 안 나. 일찍 들어가서 자라고 했던 것만 기억 나. 뽀뽀 때문에 머리가 새하얗게 날아가 버려서. 아니 근데 다 같이 해야 하는 훈련인데 박병찬은 왜 자꾸 대충 하려고 하냐고. 여태까지의 우승 성적 있으니까 농구로 대학은 알아서 간다 이거야? 어째서 더 잘하려고 노력 안 하지? 무슨 자격으로? 왜 저래? 그럼 그날 나한테 뽀뽀는 왜 했지. 그날 우리 일대일만 했잖아. 내가 잘못한 거 없잖아. 하는 거 봐서 일대일 해준다는 말에 말대꾸도 안하고 계속 잘해줬잖아. 그래, 나 정도면 잘했지. 연습도 잘 하고 슛도 안 놓치고. 단점도 커버하려고 계속 체크하고 있다고. 그런데 박병찬은 나한테 왜 뽀뽀했지. 그게 어떻게 소원이야. 웃기고 있어. 우리가 대체 왜…….
종수는 결국 열쇠를 쥐고 빈 체육관으로 돌아갔다. 어둠 속에서 아주 잠깐 박병찬을 본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착각이었다. 건조한 공기 탓에 기침이 새어나온다. 온기가 남지 않은 체육관에서 종수는 혼자 골대 앞에 섰다. 혼자서 자유투 연습을 하다 보면 잠이 올 테다. 종수는 입고 나온 져지를 벗어 멀리 던져두었다. 반팔만 입고 서 있으려니 체육관은 소름 돋게 추웠다. 종수가 애써 몸을 덥혀도 금방 싸늘하게 식었다. 수를 세다가 몇 번씩 박병찬의 이름으로 잘못 불렀다.
*
가장 먼저 박병찬의 소식을 알게 된 건 규였다. 자판기에서 음료를 뽑고 돌아오는 길에 학생 수행평가로 낸 수기노트를 걷어가던 교사가 비틀거리며 규를 불렀다. 너 농구부지. 이것 좀 교무실까지 옮기는 거 도와줄래? 규는 흔쾌히 옆으로 다가와 교사의 노트를 번쩍 안아들었다. 전혀 무겁지 않았다.
도착한 교무실에서는 박병찬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검정색에 밝은 주황색 라인이 들어간 농구부 져지를 입고 있는 박병찬은 눈에 튀었다. 삼학년 담임교사랑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아직 감독님이랑 이야기한 건 아닌데요. 부모님께 말씀 드렸더니 엄마가 농구부 그만두기 전에 담임선생님이랑 먼저 이야기해보자고 하셔서요. 이건 병원 진단서구요. 나긋나긋하게 말을 이어가던 박병찬은 뚫어지게 달라붙는 시선에 의아한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담임과의 대화가 고스란히 들릴 만큼 가까이에 규가 서 있었다. 긴 팔로 노트를 안고 멈춰서서 박병찬을 바라보았다. 박병찬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우고 검지손가락을 입술 위에 댔다. 준비한 장난을 들킨 사람처럼 눈이 웃었다. 규를 향한 몸짓이었다. 병원 진단서를 보던 교사가 종이 너머로 박병찬을 보며 물었다. 너 뭐하냐. 박병찬은 다시 교사 앞에서 자세를 고쳐 앉으며 히죽댔다. 아, 저랑 친한 농구부 후배라서요. 아직 아무한테도 말 못했는데 방금 쌤이랑 나눈 이야기 들은 것 같길래. 박병찬네 담임이 규를 흘깃 보고는 다시 박병찬을 본다. 그래도 감독님이랑 코치님이랑 먼저 말해보는 게 좋지 않겠니. 대학도 네가 이제 와서 준비하는 건 너무 늦었고. 병찬이 네가 운동부 치고는 성적 나쁜 편이 아니긴 한데…….
규는 무상한 얼굴로 묵직한 노트를 좁은 책상 위에 간신히 내려놓았다. 교사가 안경을 고쳐 올리며 고맙다고 말한다. 책상 서랍 두번째 칸에서 가나밀크초콜렛을 꺼내 규에게 주었다. 규는 허리 숙여 초콜렛을 받으며 교사에게 인사하고는 교무실을 성큼성큼 빠져나왔다. 박병찬 쪽으로 눈길을 주지 않으려고 했을 뿐인데 어금니에 힘이 들었다.
규에게는 딱히 박병찬과의 의리를 지킬 이유가 없었지만 괜히 함부로 입을 열었다가는 박병찬이 따로 규를 체육관 뒤편으로 불러낼 게 분명하다. 조근조근하고 상냥한 목소리로 규에게 쌍욕을 섞어서, 씨발아 너는 존나 내가 하는 말이 말 같지가 않냐? 뭐 그런 소리를 하겠지. 생각만으로도 규는 언짢은 기분이 되어버린다. 애초에 떠벌리고 다닐 의향도 없었지만 다시 한 번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기로 마음먹는다.
그날 저녁에 감독이 규를 불렀다. 감독은 두시간 전보다 15년은 더 늙어보였다. 병찬이가 교무실에서 너랑 마주쳤다고 해서 불렀다. 어…… 규 네가 입 가벼운 놈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데, 어디서 괜히 말이 새어나갔다간 다른 일학년이나 이학년들이 동요할까 걱정이 되어서 말이다. 너도 알다시피 준비하던 대회가 얼마 안 남았잖니. 등 뒤에서 맞잡은 규의 손바닥이 차가워졌다. 감독도 이마를 짚으며 횡설수설한다. 자기가 뱉으면서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감독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본인도 갑갑한지 손바닥으로 눈썹을 꾹꾹 눌렀다. 규는 감독이 저에게 할 말이 없다는 걸 알아챘다. 감독은 규에게 훈련 빠지지 말고 열심히 하라고, 다른 애들을 잘 좀 챙겨달라고 말하며 어깨를 두드렸다. 대화는 애매하게 끝난다. 감독의 손바닥에 무게가 실려 괜히 규만 아팠다.
장도고 주장이자 에이스인 박병찬이 농구를 그만둔다.
*
불성실한 박병찬이 자꾸 훈련에 빠져서 종수는 낮이고 밤이고 신경이 예민했다. 밤을 뜬 눈으로 새니 낮에는 정신을 못 차리고 꾸벅꾸벅 졸았다. 보다 못한 규가 매점에서 사온 레쓰비를 두 모금만에 털어 마시다가 잠깐 공을 튀겼다. 종수는 발목이 휘청거렸다. 박병찬은 사흘 째 체육관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종수는 화가 났다. 장도고 농구부 주장이자 에이스라는 놈이 싸가지도 정신머리도 없다. 종수는 코치가 앉는 접이식 의자를 꺼내 등을 기대 앉아서 또 졸았다. 현실과 꿈, 불분명한 세상 속에서 종수의 머릿속엔 농구를 열심히 안 하는 박병찬에 대한 분노 -어쩌자고 자꾸 연습을 안 나오지. 무슨 일이 있나. 아, 집에 큰일이 생겼나. 그렇구나. 집안 사정이 안 좋아져서 잠깐 일상에 균열이 생긴 거야. 그래서 종수의 머릿속에서 박병찬은 큰 사고로 줄줄이 가족 초상을 당한 소년가장이 되어 있었다.- 아니면 이번 대회 뿐이다.
규는 의자에 앉아 불안정한 자세로 눈을 감고 있는 종수를 본다. 체육관 코트에 공을 퉁퉁 튕기던 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제 농구부 내에서 박병찬 소식을 모르는 사람은 종수 하나 뿐이었다.
“종수야. 얘기 들었어?”
“어떤 거.”
“병찬선배.”
“박병찬 뭐.”
“병찬선배 농구 그만둔대.”
미간을 찡그리고 있던 종수는 눈을 뜬다. 앞머리가 길어서 눈 앞이 잠깐 흐릿했다. 종수는 말을 더듬지 않으려고 입술을 짧게 달싹이며 숨을 골랐다.
“왜?”
건조하게 박병찬의 소식을 전했던 규는 이번에도 목소리의 어조가 낮았다.
“병원 다녀왔는데 무릎이 많이 아프다는 것 같아.”
규의 말에 한참을 조용히 앉아 있던 종수는 다시 눈을 감았다. 다리를 오므렸다가 펼치고 팔짱을 풀었다가 꼈다. 30분 정도 자다 깨다 하더니 종수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안 되겠어.”
“응? 뭐가?”
공을 쥐고 있던 규는 조마조마했다. 종수는 앞머리가 거슬려서 안 되겠다며, 체육관 비품 관리실로 갔다. 관리실에 있는 서랍을 거칠게 열었다. 첫번째 칸 깊숙이 손을 넣어서 더듬었다. 안쪽에서 끝이 녹슨 가위 한 자루를 찾아 꺼내들었다. 종수는 바닥이 무너지게끔 쾅쾅 걸었다. 체육관 복도 끝에 위치한 화장실로 들어갔다. 규가 공을 내버려두고 허겁지겁 종수의 뒤를 따랐다. 종수는 날카롭지도 않은 문구용 가위를 들었다. 공용 화장실 세면대에서 앞머리를 잡고 한움큼을 잘라냈다. 규가 말릴 틈도 없었다. 결 좋은 곱슬머리가 우수수 떨어졌다. 흰 세면대와 종수의 뺨 위로 검은 머리카락이 가닥가닥 묻었다. 볼 잡는 것 말고는 더럽게 손재주가 없다.
종수의 앞머리는 존나 개병신처럼 웃기게 잘렸다.
*
이틀 만에 체육관에 나타난 박병찬은 눈썹과 이마가 훤히 드러나는 종수의 앞머리를 보자마자 배를 잡고 깔깔댔다. 얼마나 크게 웃었는지 체육관이 쩌렁쩌렁 울렸다. 종수야. 안 본 사이에 앞머리 누가 잘라줬냐. 쥐가 파먹었어? 이마 보이니까 더 미남이네, 우리 종수. 박병찬은 한 걸음에 다가와 종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종수는 매사에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정승처럼 그 자리에 서서 박병찬의 연두색 신발만 내려다보았다.
어느 대학에서 무릎 재활을 기다려준다며 입학 제의가 왔는데 박병찬이 끝까지 거절했다고 한다. 고집불통 또라이 관심종자 변태 새끼. 종수는 박병찬이 미워 죽겠다.
동급생과 후배들 사이에 선 박병찬은 언제나처럼 대수롭지 않은 듯 가벼운 걸음으로 락커룸을 향했다. 부원들이 한마디씩 얹었다. 많이 심각한 거예요? 무릎 아픈 거 그냥 재활하면 되는 거 아니야? 병찬아 진짜 서운하다. 그래도 일찍 말을 했어야지. 언제부터 아팠어요? 지금은 좀 괜찮아요? 지금까지 커리어 아깝지도 않어? 야 그냥 딱 모른 척하고 이번만 대회까지만 뛰자. 너 정말로 농구 그만두는 거야? 네가 안 가면 누가 프로를 가고 누가 국대를 가냐. 그래, 국대 가야지 병찬아.
종수는 박병찬이 무슨 변명을 할지 듣기 위해 부원들과 함께 락커룸으로 따라 들어갔다. 다른 부원들이 락커의 짐을 빼는 박병찬을 둘러싸고 끊임 없이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 종수가 듣기에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물음이었다. 지금 박병찬이 농구를 그만둔다는데 다들 헛소리를 하고 있었다. 부원 모두의 목소리가 종수의 귀에는 속내를 숨긴 채 겉으로만 아쉬워하는 것만 같았다. 모르겠다. 종수의 작은 머리통에는 입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물음이 연기처럼 솟아나고 명치 아래가 들끓 듯이 갑갑했다. 박병찬은 짐을 정리한 텅 빈 락커문을 탕 소리 나게 닫았다.
“그래, 요것만 말해주마. 나 M이 입학하는 J대학에 들어간다-?”
그래서 농구부 아예 나가는 건 아니고. 농구부에 이름만 남겨놓는 거지. 솔직히 농구 아니면 누가 날 대학 보내주겠냐. 담임도 성적 보더니 농구부 탈퇴하지 마래.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던진 무리수였음에도 듣고 있는 부원들은 입안에서 침이 싹 마른다. M선배가 그저께 아침부터 기분 더러워 보이던 이유가 이거였구나. 락커룸에서 유일하게 박병찬만 호쾌하게 웃었다. 후배들 표정을 보니 이 상황이 머쓱한 듯 말이 속사포처럼 쏟아졌다.
“재수하기 싫어서 올해 무조건 대학가야 한다 싶으니까 이래저래 너무 신경 쓰이는 거야. 어딜 가든 상관없겠다 싶었는데 J대학은 인서울이라 우리 엄마가 좋아하실 것 같더라고? M 덕분에 나도 잘 됐지, 뭐.”
분위기가 좆창이 난다. 아무도 웃지 않았다. 장도고에 입학한 첫날부터 박병찬은 언제나 종수를 보며 해사하게 웃어주었지만, 그 웃는 면상을 주먹으로 쳐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종수의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바닥이 옆으로 기운다. 당장이라도 마신 레쓰비를 위액과 함께 토해낼 것 같았다. 메스껍고 어지럽다. 여기에 더는 못 있겠다. 코트로 돌아가야 한다. 이 시간에 자유투 연습을 한 번 더 하고 왼쪽 돌파 훈련을 하는 게 낫겠다. 시간 아까워. 못 박힌 듯 락커룸에 서 있다가 종수는 몸을 돌렸다. 가방을 어깨에 걸친 박병찬은 락커룸을 나서는 종수의 뒤통수를 봤으면서도 말을 아꼈다. 물에 빠진 듯 종수의 귀에는 사람들 목소리가 웅웅 거리는 소음으로 변했다. 그 와중에 박병찬은 크게 웃는다. 진짜 끝까지 재수 없어. 비척비척 걸음을 옮기며 박병찬에게서 멀어지던 종수의 입이 겨우 열렸다.
“뭐가 좋다고 웃지. 병신인가…….”
작은 목소리였지만 박병찬의 귀에 똑똑히 들릴 크기의 소리였다. 박병찬이 하고 싶은 것만 하듯이 종수도 하고 싶은 말을 참지 않는다.
“…… 종수야 너 지금 그거 나한테 말하는 거냐?”
박병찬 들으라고 말한 게 맞다. 부원들 모두 조용해진다. 종수는 뒤돌아 보지 않고 저벅저벅 걸어 나갔다. 종수를 보며 부원들이 혀를 찼다. 병찬이한테 그만큼 예쁨 받았으면서 질질 짜지도 않네, 저 놈은. 종수에게 들으라는 듯 부원 하나가 다른 부원의 귀에 속닥거렸다. 덧붙는 웃음은 또 여럿이었다. 비꼬는 목소리가 종수의 등에 날아와 부서졌다. 종수와 박병찬은 언성을 높이지도, 더 말을 섞지도, 멱살 붙들고 얼굴에 침 뱉으며 싸우지 않는다. 락커룸을 빠져나가는 머리카락 끝에 저 새끼는 선배를 좆밥으로 안다고 누군가 말하자 박병찬이 픽 웃으며 중얼거렸다.
“어휴. 저 애새끼를 어떡하냐, 진짜. 너희가 종수 데리고 고생 좀 해라.”
종수는 체육관으로 돌아간다. 박병찬은 아마 삼학년 교실로 올라갈 것이다. 종수만 현실에서 붕 떠 있다. 다 거짓말 같다고 생각하는 건 정말로 자기 뿐인가. 화장실에 가서 변기를 붙잡고 토하고 싶다. 속이 안 좋다. 종수는 멀쩡히 걷고 있음에도 비틀거렸다. 박병찬은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을까. 그렇다면 종수는 정말 몰랐을까. 언젠가의 꿈에서 나누었던 둘의 대화는 종수에게 기억될 리 없다.
정말로, 아무 소용이 없었다.
*
박병찬이 떠난 다음주에 J고등학교 농구부에서 1학년이 전학을 왔다. 종수는 전학생을 농구로 반쯤 조져놨다. 박병찬이 봤으면 ‘농구로 전쟁할 거냐 종수야. 살살해라-’ 하고 핀잔을 줬을 지도 모른다. 그래도 박병찬은 흐뭇하게 웃었겠지. 종수는 박병찬의 편애가 좋았다. 슛 잘 던질 때마다 엄지도 척 올려주고 개인 매니저처럼 컨디션도 살펴봐주고. 누군가에게 특별하다는 감각은 종수를 가슴 뛰게 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충동적으로 집어든 가위로 앞머리를 잘라버렸듯이 종수는 일반 고교 남학생 박병찬도 마음 속에서 사각사각 잘라냈다. 어쩌다 교내에서 교복 입고 어슬렁거리는 삼학년 박병찬을 만나도 일학년 종수는 몇 초 동안 상대가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다.
이학년으로 올라가는 겨울에 종수는 이틀 정도 끙끙 앓았다. 연습이 없는 주말이었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그냥 밤낮으로 기온 차가 심해져서, 땀 흘리고 찬 바람 맞아서, 잠을 잘 못 잔 탓에 면역력이 약해져서, 머릿속이 복잡해서, 어제 먹은 급식이 속을 버려놔서, 그런 이유 아닌 이유들만 종수의 곁을 맴돌았다. 너무 아파서 잘 수가 없었다. 종수는 헐떡이면서 거의 울었다. 이틀 간 종수의 곁을 지키던 규가 감독의 허락 하에 외출증을 끊고 약을 사왔다. 약국에서 제일 센 약으로 달래서 사왔는데 이거 먹으면 통증도 줄고 많이 졸리대. 종수는 물과 함께 약을 삼켰다.
박병찬은 농구부를 떠났고 곧 장도고를 졸업한다. 종수는 이불 속에서 몸을 둥글고 작게, 더 작게, 더더욱 작게 말았다. 끌어안은 무릎에 뺨과 이마가 닿았다. 박병찬이 입으로 뱉은 말 중에 그 무엇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철석같이 믿었는데.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이 믿어버렸는데. 종수는 속았다. 그래서 종수는 더 자라지 않고 영원히 188cm이다.
*
‘그냥 박병찬’은 장도고 삼학년 교실 책상에 앉아서 남들처럼 핸드폰을 만지거나 눈여겨 본 적도 없는 모의고사 기출문제를 심심풀이로 풀고 있겠지만 ‘종수의 박병찬’은 미국에 갔다.
그는 고교 졸업을 앞두고 비행기를 타고 저 먼 북미의 어딘가로 날아갔다. 자기는 영어도 못하는데 어떡하냐고 호들갑을 떨면서도 별로 고민이 없어 보였다. 쿠크다스 같던 무릎은 종수에게 욕을 존나 개같이 처먹고 싹 나았다. 와, 종수야 고마워! 나 농구 계속 하고 싶었는데 네 덕분이야. 종수가 고쳐줘서 이제 하나도 안 아파! 박병찬은 이제 건강하고 튼튼하다. 박병찬은 종수가 잘 아는 유쾌한 얼굴로 좋아하는 후배의 옆구리에 파고 들었다. 미국? 종수 네가 간대서 나도 그냥 얼레벌레 가는 거지. 영어가 제일 노답이긴 한데. 그래도 뭐. 사람들이랑 말하는 걸 좋아하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한국에서도 농구 관련 용어는 다 영어로 말하니까 대충은 알아 들을 거고. 참, 종수 너도 영어 잘하지? 형아 과외 좀 해주라. 박병찬의 부탁에 종수는 눈을 깜박이며 새침하게 코로 웃었다. 그 정도 영어는 누구나 다 하는데…….
종수의 박병찬은 NCAA 디비전1에서 농구를 했다. 대한민국 농구계에서 가장 많은 관심이 쏟아진다. 혼자서 상대 팀을 제치고 코트를 날아다녔다. 역시 종수의 박병찬이다. 종수가 기억하는, 어딘가 변태같은 플레이였다. 그 플레이를 보고 있으면 종수는 귀 끝까지 화끈거린다. 종수의 박병찬은 멀리 서 있는 종수에게 장난스러운 윙크를 하며 천장 저 높이 뛰어 오른다. 박병찬의 농구화가 종수의 눈을 사로잡는다. 장도고에서 신던 형광 연두색 운동화를 신고 미국까지 갔다. 그 신발은 어디에서나 박병찬을 돋보이게 한다. 박병찬은 팀을 위해 덩크를 했다. 큰 소리로 웃으며 코트 위로 쿵 내려온다. 예쓰-.
박병찬의 주위로는 뜨거운 바람이 불었다. 미국에서 농구하는 박병찬의 주변으로 부는 바람. 종수가 아는 그 바람이다. 바람이 종수의 코앞까지 밀려왔다. 어느새 박병찬의 얼굴이 아주 가깝다. 뺨을 붙잡고 훅 다가오는 박병찬이 눈을 감아서 종수도 스르르 눈을 감았다. 미국에 가더니 덩크 하나에 세리머니가 지랄 맞고 요란하다. 변태같은 박병찬과 나누는 변태같은 뽀뽀다.
그러니까, 대체 왜? 종수의 박병찬이 멀어진다.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흔들리던 종수는 혼자 묻는다. 종수의 박병찬은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어째서? 최종수 너도 알잖아. 걔는 대답할 수가 없대도. 또 한 번 날개짓처럼 바람이 일어난다. 종수의 박병찬이 귓가에 속삭였다. 미국에서 기다릴 테니까 너도 여기로 꼬옥 와야 해. 종수는 또 입만 뻐금거리고 대답을 못했다. 상상 속 미국에 있는 박병찬이 일으킨 바람은 대한민국에 있는 종수에게로 와, 거대한 태풍이 된다.
끝
* 있지ITZY - 달라달라(2019) ㅈㅅ합니다 저 입덕한 지 얼마 안 돼서 쟤네들 00년생 02년생 뭐 이런 건 줄 알고
* 연성 속 일부 대화 아래에서 영감 받았습니다
-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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