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ll the Love

Mean the Love

7년 후

PITA BREAD by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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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2 빵준온 무료배포 

굴곡 없는 하루였다. 베테랑 S급 센티넬의 전담 가이드라는 자리가 그랬다. 각인까지 한 그들의 관계는 매일이 무난했고, 말을 나누지 않아도 안정감과 애정을 느낀다. 이제 성준수의 관심사는 개 같은 임무 조율과 작전회의가 아니라 싸가지 없는 후배들의 정신머리를 올바로 세우는 데 치중돼 있었다. 누군가의 핸드폰에 성꼰대로 저장됐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 흰머리도. 무심결에 넘긴 머리카락 사이로 빼꼼히 드러낸 새하얀 머리카락 한 가닥에 놀라 키스하던 것도 잊고 동그란 머리통을 움켜쥐었더랬다.

그렇게 평범한 날인 줄 알았다. 이변을 눈치챈 건 그의 센티넬이 소파에 앉으면서다. 막 씻고 나온 전영중이 살짝 덜 마른 머리를 기대고 늘어뜨린 손을 마주 잡는다. 가이딩을 조르는 습관이었다. 새끼, 가이딩이 부족한 것도 아니면서 애교는. 가만히 그의 호수를 들여다보던 성준수가 멱살을 잡았다. 놀라 벌어진 입술이 잡아먹히듯 덮이고, 따끈한 살덩이가 툭 치고 달아나기까지 순식간이었다.

도망쳤다기에는 거리가 너무 가깝다. 키스보다는 도발에 가까운 행위였다. 저를 잡아당겨 알아서 아래 깔린 모양새가 된 성준수가 아직도 옷을 단단히 틀어쥐고 있었다. 이래서야 싫다고 빼지도 못하네. 쪽 소리가 나게 입술을 부딪친 전영중은 숨결이 닿을 거리에서 잘게 웃었다.

“웬일로 서비스가 후하지?”

“그래서 싫어?”

싫을 리가. 그의 가이드의 말은 언제나 절대적이었다. 하자면 언제든지 하고, 그만두라면 당장 그만둔다. 십여 년을 그렇게 길들여졌으니까.

달아나지 못하도록 등과 허벅지를 끌어안고 이번에야말로 진득한 입맞춤을 나눈다. 충만하게 채우는 가이딩이 기꺼웠다. 애정을 주체하지 못해 입에서 뺨으로, 귀로, 목으로 흘러내리는 감각에 성준수가 그의 머리를 세게 당겼다. 평범한 사람의 힘 따위 얼마든지 뿌리칠 수 있는 센티넬은 그가 바라는 대로 얌전히 얼굴을 묻고 어깨를 아프지 않게 잘근거렸다.

아랫입술을 깨물고 조용히 한숨 쉰다. 예민한 녀석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혀만 달싹여 습관이 된 욕을 뱉었다.

시발.

커리어가 명확한 끝을 보였다. 이제 가이딩할 수 없을 거란 본능적인 확신이었다.

가이딩 불가. 가이드 재활. 가이드 치료. 가이드 은퇴. 완전 소진. 방전. 그런 키워드로 서가 번호를 몇 개 뽑고 서둘러 검색어를 밀어낸다. ㅁ. ㄴ. ㅇ. ㅂ. ㅈ. ㄷ. 이게 무슨 짓이야. 누가 봐도 검색어를 숨기려는 목적의 글자들에 자괴감이 들었지만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제가 찾는 것과 애매하게 주제가 벗어난 논문일지라도 일단 꺼낸다. 대강 둘러보고, 그중 쓸모 있을 만한 것들을 골라내 무인대여기에 찍었다.

“책은 다 골랐어?”

“응. 넌?”

누가 봐도 수상할 정도로 급하게 책을 밀어 넣는데 전영중은 별말 없었다. 논문 다섯 권을 넣은 가방이 묵직하게 늘어졌다.

“나도 뭐 새로 온 애들한테 얼굴이나 비추러 온 거였는데. 가방 나 줘. 내가 들게.”

“됐어. 별로 안 무거워.”

 자연스레 가방을 들어주려는 호의를 쳐낸다. 혹여라도 전영중이 제목을 볼까 방어기제로 튀어나온 반응이었다. 매정한 손짓에 뒤늦게 후회가 들었다.

“……미안.”

“뭘.”

어깨를 으쓱이고 엄지로 미간을 문질러 피는 게 다였다. 서른 중반을 접어들며 전영중은 부쩍 마음이 여유로워졌다.

“무슨 걱정 있어? 요새 기분 안 좋아 보여.”

“별일 없어. 그냥 가라앉네.”

“가는 길에 단 거라도 사 갈까?”

“냉동실에 생초콜릿 있잖아. 그거 먹어.”

“그거 냉동실 냄새 밸까 봐 다 먹어버렸는데.”

어처구니없어 쳐다보자 전영중이 빙글빙글 웃었다. 내가 좋아하는 준수 표정이네. 두 판을 혼자 다 처먹었냐? 핀잔에 대답 대신 콧잔등에 입을 맞춘다. 그러면 옆구리에 힘이 실리지 않은 주먹이 꽂힌다. 내가 밖에서 하지 말랬지. 전영중은 미안하다면서도 안 그러겠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익숙한 흐름은 어렴풋이 떠오르는 불안감을 잠시나마 덮는다.

정말 아무 문제 없었다. 성준수가 가이딩할 수 없다 해도 전영중을 맡을 가이드는 줄을 세울 수 있을 테니까.

문제는 나지.

성준수는 전영중의 신경이 최대한 누그러지도록 가이딩을 쥐어짜고 조용히 침대를 나왔다.

내 등급이 뭐였더라. A? B? 가이딩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전영중의 전담이 되었기에 이후로 등급을 신경 쓰지 않았다. 확실한 S등급 판정을 받은 전영중과 달리 성준수는 A와 B를 오가는 수치가 나와 확정받기까지 잡음이 길었다. A라기엔 부족하고 B라기에는 뛰어난 애매한 수치. 성준수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부러 더 전영중의 담당이 되길 원했다. 마음대로 나눈 등급에 굴하지 않겠다는 항의였다. 애초에 전영중을 최초로 가이딩해 준 건 자신이 아니던가. 책임감과 소유욕을 구분 짓지 못해 코피 터지고 기절하면서도 전영중의 손을 놓지 않던 치기 어린 시기였다.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원래 센티넬과 가이드의 페어 매칭은 사람끼리 엮이는 일이다보니 말도 탈도 많다지만 전영중과 성준수라는 이름을 들으면 누구나 혀를 내둘렀다. 싸우고, 각인하고, 싸우고, 풀고, 싸우고, 각인하고. 저 새끼를 죽이네 살리네 걸핏하면 본부 복도에서 드잡이질했으니. 오죽하면 매칭팀이 두 사람만 봤다 하면 슬그머니 화장실이며 탕비실로 사라졌을까.

지금이야 추억이라고 웃지만 그때엔 정말 심각했다. 서로 오기밖에 내세울 줄 몰랐으니까. S급인 전영중의 가이딩은 성준수 자존심이 걸린 일이기도 했다.

한 번이라도 전영중의 안을 들여다본 가이드라면 안다. 그 녀석의 능력이 얼마나 깊은지. 블루홀이라 불릴 만큼 깊이가 가늠되지 않는 능력샘은 가이드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함부로 손대기 꺼려지는 본능적인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성준수는 한 번도 망설인 적 없었다. 그래봤자 전영중인데.

S급 외의 가이드는 전영중을 케어할 수 없을 거라고 모두가 말했다. S급 센티넬의 소모량을 따라갈 수 없고, 가이딩 능력이 금방 소진될 거라며. 물론 성준수는 한 번도 귀 기울인 적 없었다. 가이드의 능력 고갈에는 뚜렷한 이유가 없었고, 지껄이는 말들은 증명되지 않은 가설뿐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문제는 각인으로 해결되지 않던가.

그래도 그네들이 주워섬기던 말의 일부는 맞았나 보지. 이제야 조금 동의해 본다. 성준수는 자신이 방전된 배터리 같다 느꼈다. 전원을 켜자마자 모터 한번 돌리고 꺼지는 장난감 같은 상태. 점막접촉으로 효율을 올리고 밑바닥까지 박박 긁어야만 겨우 가이딩이 가능한 주제에 애써 멀쩡한척했다. 아직도 아득바득 자존심을 지키려는 자신이 웃겼다.

가이드에 대한 연구는 센티넬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었다. 능력 사용을 못 하는 센티넬에 대한 재활 연구는 있어도 소진된 가이드에 대한 재활 연구는 없었다. 충전지에는 그만한 가치가 없으니까. 센티넬같은 괴물들과 계속 얽히느니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게 나을 수도 있고. 길게 생각을 이어가던 성준수는 논문을 정리해 가방에 담고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밀어두었다.

인정해야 한다. 자신은 더 이상 전영중을 가이딩할 수 없다. 운 좋게 요새 잠잠했다지만 언제 고위험군 악몽이 나타날지 모르고, 가이딩을 받지 못하면 전영중은 죽는다. 제 자존심이 연인의 목숨보다 중요하지는 않다. 그럼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각인 끊자.”

전담 가이드로서 마지막 임무였다. 한참이나 얼굴을 들여다보던 전영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가이드의 말을 따르도록 길들여졌으므로.

“그래.”

이번 역시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이거, 예지의 스페셜리스트 기상호가 준수 형 올 거라고 딱 내다봤다 아닙니까.”

웬일로 문을 열어놓고 있다 했더니, 기상호가 거실 테이블에 팔을 걸치고 의미심장하게 웃고 있었다.

“까불지 말고 표정 원상복구 해라.”

“넵.”

형, 유자차 드실래요? 미리 타놨는데. 기상호가 부산떨며 테이블 밑에 숨겨두었던 잔 두 개를 올려놓는다. 거절하지 않고 소파에 앉아 잔을 든다. 적절한 온도의 유자차가 속을 데웠다.

“좋네.”

“그쵸? 아이스로 탔다가 유자차 아이스로 처먹는 놈이 어딨냐고 한 번, 뜨겁게 탔다가 입천장 다 벗겨 먹으려 작정했냐고 도합 두 번 혼나고 맞춘 온도거든요.”

“쓰잘머리 없는 데 능력 쓰지 말랬지.”

“에이, 이 정도는 이제 쓴 축에도 안 속해요.”

기상호도 이제 경력 15년이 다 되어가는 베테랑 센티넬이다. 본부 전속에서 벗어나 필요할 때마다 능력을 제공하는 프리랜서 계약 후 자유의 몸이 되었다. 한 따까리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얼마나 눈치 보이던지. 본부를 떠나던 날, 기상호가 후련하게 말했다. 말만 프리랜서지 센티넬은 모두 국가 공무원이라 부르면 부르는 대로 달려와야 하는 신세인데 매일 출근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좋았단다. 어차피 그 연차 베테랑이면 본부에 상주하지 않아도 되는데. 이건 전영중이 S급이라 봐준 건가? 성준수는 다시금 그들이 누리던 특혜를 가늠해 본다.

“그럼 어디, 미래를 내다보는 기 도령에게 무엇이 궁금하셨길래?”

“너 신들린 척 사기 치는 거 본부에서는 아냐?”

“없는 말로 등쳐먹지 말고, 로또 번호 누설하지만 말라던데요.”

에휴. 한심하다는 표정이 제게 향했지만 기상호는 능청스레 넘겼다. 하여간 본부도 대충이었다. 본부가 허락했다는데 제가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는가.

“전영중이랑 각인 끊었다.”

“알아요. 그 일로 본부 단톡 터졌어요. 형들 갈라섰냐고.”

“아니 씨… 소문이 왜 그렇게 나?”

“뿌린 대로 거두는 거 아니겠습니까.”

깐족거리던 기상호가 이번엔 입을 다물었다. 욕하는 성준수? 이건 일상이니 안 무섭다. 무표정하게 쳐다보는 성준수? 이게 진짜 공포지.

호록. 시선을 피하고 얌전히 유자차만 넘기는 모습에 성준수가 혀만 차고 말았다. 둥근 잔 밑을 매만지다 천천히 숨겨둔 속내를 드러낸다.

“……내가 옳은 결정을 했는지 모르겠어. 자꾸 미련이 남아.”

전영중에게도 하지 못한 말이었다. 전영중만이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못할 말. 그나마 기상호가 두 사람의 피 터지는 각인 해제와 재각인을 제일 가까이서 본 사람이라 털어놓을 수 있었다—기상호 본인은 해당 사건에 낀 것을 불행으로 여겼더라도.

두 번째 각인 해제는 최초의 경험과 달랐다. 감각을 박탈당했던 처음과 달리 치유 센티넬이 동행한 각인 해제 절차는 조용하고 신속했다. 손을 맞잡고 두 사람의 자율적이고 확실한 의사로 각인 해제에 동의한다는 짧은 선언이 끝이었다. 멀쩡했던 전영중과 달리 성준수는 직후 코피를 흘렸다. 그나마도 치유 센티넬의 도움으로 금방 멎었지만.

선언 과정 중 가이딩을 하지 않아도 성준수의 시야에 능력샘의 형태가 그려졌다. 덩굴처럼 전영중의 샘을 단단히 휘감고 뿌리내린 제 각인이 선언과 동시에 시들고,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결정의 결과가 눈앞에 선연히 펼쳐진다. 동시에 바닥난 줄 알았던 가이딩 능력이 조금 돌아온 걸 느꼈다. 혹시 내가 성급한 결정으로 전영중을 버린 건 아닐까, 덜컥 겁이 났다. 그러자 코피가 흘렀다. 각인에 미련이 있으면 육체적 데미지로 나타난다던가. 뒤늦게 각인 해제 전 들었던 경고가 생각났다. 제가 반응하는 것보다도 빠르게 전영중이 떨어지는 핏물을 받고 콧대를 눌렀다.

걔 표정은 어땠지?

“형. 솔직히 형이나 영중이 형이나 똑같은 거 알죠?”

“무슨 소리야?”

“쓸만한 미래 몇 개 건져보는 거, 형 스타일 아니잖아요.”

그렇지. 성준수에게 기상호는 지상고 후배이자 전략 세우는 데 유용한 센티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사적인 일에 미래를 엿보는 힘을 동원하고 싶지 않았고, 개인적인 문제는 알아서 해결한다는 주의였으니. 원래 성준수는 점이니 사주니 하는 것에 의지하지 않았다. 그러니 기상호가 되먹지 못한 기 도령 노릇을 한다는 소식에 혀부터 찼지.

“그렇긴 한데, 이번 결정이 단순히 내 거취 문제로 끝나는 게 아니잖아.”

그래도 지금만큼은 미래에 대한 확신이 필요했다. 제 실수로 전영중이 잘못되면 견디지 못할 것 같아서.

“형들 재각인했던 날 기억해요? 부식성 악몽 나타난 날.”

“기억하지.”

“그때 형 미대 옥상에 도착하기 전, 영중이 형한테 했던 말이 있어요.”

“뭔데.”

흠, 큼. 목을 가다듬은 기상호가 눈을 마주치며 제법 진중하게 말한다.

“제가 대답한다고 해서 형이 납득할까요?”

답은 쉽게 나온다. 아니. 기상호가 옳은 미래를 보고 답을 내려준다 한들 제가 한 결정이 아니면 성준수는 끊임없이 의심할 것이다. 답안지를 훔쳐보고 선택한 미래가 마음에 들 리가.

그러니 방법은 하나다. 매번 그랬던 것처럼 전력으로 들이박고, 후회된다면 최선을 다해 해결책을 찾는다.

“이거 면피하려는 수작 아니야?”

“제가 그렇게까지 비겁한 놈은 아닌데요…….”

복슬거리는 뒤통수에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그마저도 머리를 숙여 피한 탓에 손끝만 스치고 만다. 어쭈? 돌아보자 기상호가 모른척하며 유자차나 마셨다.

결국 각인을 해제한 제 결정이 옳았기를 바랄 수밖에. 남은 유자차 덩어리가 식도를 긁으며 내려간다. 기상호의 도움에도 여전히 속은 꽉 틀어막힌 기분이었다. 최근 들어 종종 느끼는 이것은 무력감과 불안을 닮아있었다. …아마도.

새카만 감정이 신경 한 구석을 좀먹는다.

대외적으로 은퇴 대신 가이딩 휴식기라고 알려졌지만 가이드의 능력소진으로 인한 은퇴는 제법 있었기에 다들 짐작했을 것이다. 아마 전영중도. 그러나 전영중은 각인해제 때와 같이 휴식 선언에도 별말 없었다.

은퇴 후에도 본부에 남기로 결정하면서 성준수는 제가 S급 센티넬의 전담 가이드 특혜를 누렸다는 걸 여실히 느꼈다. 일주일에 이틀 출근이면 족하던 느슨한 회사 생활이 주 5일 9to6에 꼭 맞춰 돌아간다. 운동할 땐 매일 새벽에 일어났던 거 같은데. 죽을 거 같다. 사람을 어떻게 9시간이나 회사에 가두지? 이거 공무원 학대 아니야? 침대에 파묻혀 중얼거리는 성준수를 붙잡아 일으키고 출근 준비시키는 건 전영중의 몫이었다. 차에 태워 모셔다드리고 그 김에 저도 본부에 눌러앉는다. 종일 바쁜 성준수와 달리 전영중은 가끔 있는 교육이나 회의 참석 외에는 휴게실에 누워 자거나 핸드폰 하며 놀았다. 원래 정규 업무는 주 2일 출근이면 족했으니까. 센티넬 교육생 몇 모아 농구코트에서 공을 튀기고 땀범벅인 채로 성준수에게 치대다 욕을 먹는 모습도 자주 보였다. 그러다 매일 본부에 얼굴도장 찍는 S급 센티넬에게 뭐 하나 부탁하려 찾으면 귀신같이 눈치채고는 흔적도 안 남기고 사라졌다. 과연 S급 소멸 센티넬은 뭔가 달랐다.

그사이 전영중에게는 새로운 가이드가 배정됐다. 각인을 거절하고 능력 한계치가 커 홀로 커버하기 힘들다는 판단에 A급과 S급 두 명이 동시에 담당하게 됐단다. 괜찮겠어요? 매칭팀이 성준수에게 물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 자신은 전영중의 가이드가 아니었으니 그의 거취에 의견을 낼 자격 따위 없다. 전영중이 괜찮다면야 나도 괜찮지. 새로운 가이드와의 관계를 물었을 때 그냥저냥 괜찮다고 말하는 전영중의 얼굴도 딱히 거짓말하는 거 같지 않았고.

정말 괜찮나?

성준수는 답답한 느낌을 받았다. 스스로 내린 결정인데 하루하루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다. 전영중은 새 가이드에게 적응했고, 상태도 나쁘지 않다. 복귀한 녀석을 마중 나가면 흙먼지로 지저분할지언정 가이딩이 부족하지는 않았으니. 살갑게 웃으며 다가온 녀석이 손을 잡으면 그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전영중은 아직도 제가 전담이던 시절처럼 임무에서 복귀하면 가이딩을 조르듯 손을 잡고 이마를 맞댄다. 손을 뿌리치고 먼저 들어가면 같이 가자고 새끼 오리처럼 뒤를 졸졸 쫓아오는 게 다였다.

아무리 바라도 가이딩해 주지 않는데. 가이딩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 언제까지고 모르는 척하며.

“왜 아무것도 안 물어?”

꾹꾹 누르던 속마음이 결국 터져 나온다. 전영중이 폭주해도 목숨 걸고 구하러 갈 수 있는 사람은 이제 성준수가 아니다. 가이딩 능력이 거의 소진된 자신은 폭주하는 전영중에게 다가간다 한들 그를 진정시킬 능력이 없으니까.

성준수는 전영중의 천칭에 올라 균형을 맞출 자격을 잃었다. 악마에게서 전영중을 구한 것도 한낱 과거에 불과했다. 화려했던 지난날을 뒤로 하고 전영중의 목숨줄을 타인에게 맡겨야 했다. 사무직으로나마 본부에 남는 게 전영중과 가까이 있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차라리 예전처럼 제게 시비 걸었으면. 그럼 나도 빌어먹을 네 유능함과 거지 같은 균형을 탓하기라도 할 텐데. 왜 내게 널 줬으면서 마지막까지 함께할 수 없는지. 전영중의 잘못이 아닌데도 투정처럼 그에게 화내고 싶었다. 옛날같이 밑바닥까지 드러내고 누가 옳냐고 싸워서 해결될 일도 아니건만.

“…물으면 죽여버린다는 표정인데 내가 어떻게 물어.”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돌아보자 전영중이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참는 표정이다.

“너 요새 계속 기분 안 좋았잖아. 내가 잘못한 거면 진작 화냈을 테니 그건 아니고, 나한테 털어놓지도 않는 거 보면 말 못 할 사정 있겠구나 싶어 기다렸어.”

“나 이제 가이딩 못 해.”

내내 고민한 것 치고 말은 쉽게 나왔다. 심장이 떨어지는 충격도,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도 없었다. 명백한 사실을 덤덤하게 고하는 행위였다.

“그런 거 같더라.”

“너 버렸다고.”

“그건 아니지.”

“이제 나 말고 다른 가이드랑 입술 비비고 몸 섞어야 해.”

“결핍 아니면 점막접촉 가이딩은 안 하기로 했어. 그래서 S급과 A급 둘이 담당하는 거야.”

“미안. 방금은 실언이다. 가이딩인데 뭘 하든 신경 안 써. 괜찮아.”

“이참에 같이 은퇴할까?”

“야, 말이 되는 소릴 해. 최세종 아저씨도 수시로 불려 다니는데 새파랗게 어린놈을 놔주겠냐?”

“준수야.”

빠르게 이어지는 대화를 끊는다. 한참이나 말이 없는 와중에 그제야 제 숨이 거친 걸 알았다. 꼴사납다. 이게 뭐라고. 깊게 숨을 고르던 성준수가 이마를 짚었다.

호흡이 진정되고 나서야 전영중은 마저 말을 이었다.

“왜 화났어.”

뜨끔했다. 아니라는 말이 바로 튀어 나가야 하는데 이상하게 껄끄러웠다. 내가 화났어? 아냐, 이건 화라기보다 우울 같은 거지. 그래야 해.

“화 안 났어.”

“화났잖아.”

“안 났다니까?”

“너 지금 화내고 있어.”

“진짜 화내기 전에 다물어라.”

“후회하고 있잖아.”

“씨발 후회가 뭐. 내가 후회하면 너 가이딩 안 받아도 되냐? 능력이 후달려서 이제 S급이신 잘난 애인 못 도와주겠다잖아. 내가 덜떨어져서 이렇게 된 건데 화내고 후회해서 뭐 해?”

“네 기분은.”

“그딴 건 좆도 안 중요해!”

끊임없이 나불대는 전영중이 성가시다고 생각했으나 이제 보니 아니다. 진짜는 다 알고 있는 말로 침착하게 사람 속 뒤집어 놓는 저 모습이었다. 말 한마디 없이 빤히 쳐다보는 눈. 속에 있는 걸 모조리 토해내라 종용하는 시선이 거북했다.

신입 가이드 교육 중에도 전영중의 임무 출발 시간이 되면 양해를 구하고 나와 배웅했다. 지금 제게 가능한 건 그 정도니까. 딱 거기까지지. 전영중에게 배정된 가이드 둘은 출력이 안정적이었고, 고립되지만 않는다면 외부접촉만으로도 가이딩이 부족하지 않다는 예측이다.

그럼 됐지. 가이딩은 일일 뿐이고, 손을 잡든 키스하든 전영중은 어차피 제게만 마음을 줄 테니까. 아무 문제 없어. 그냥, 성숙하지 못한 내 정신머리만 문제야. 그것만 고치면 돼.

“이게 최선이잖아.”

우울이어야 했다. 무력감이어야만 한다. 내 무능에 대한 명백한 분노여야지. 그렇지 않으면 이 같잖은 소유욕이 너무 추악하게 느껴지니까.

네 명줄을 쥐지 못해 애새끼처럼 화내는 이딴 게 사랑이면 안 되잖아.

“정말 그렇게 생각해?”

옳은 일에 감정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성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최선이고, 전영중을 살게 하는 방법이다.

원대한 인류 구원의 현장에 이제 자신의 자리는 없다.


전영중의 복귀가 늦었다. 헬기 소리는 놓칠 수 없는데도 성준수는 본부의 헬리포트까지 올라와 앉아있었다. 남청색 하늘을 채운 고층빌딩의 불빛 사이로 헬기의 신호를 찾는다. 여차하면 ‘오늘 야근’이라며 가볍게 알려줄 수 있는 직장이 아니라는 게 아쉬웠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핸드폰을 들여다본다. 오전에 도착한 [다녀올게]라는 메시지 이후로 새로 도착한 건 없었다. 뭐라도 보내볼까, 생각하다 그만둔다. 연락할 수 있는 상황이면 먼저 연락했을 녀석이니.

연락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무상성에 가깝다는 소멸 능력 S급 센티넬이 위급할 상황이 얼마나 있다고. 이레귤러적인 악몽은 악마를 제거하면서 출현 빈도가 극히 희박해졌고, 그날 이후 전영중은 가이딩이 결핍까지 떨어진 횟수가 손에 꼽았다.

멀리서 적색의 불빛이 빠르게 점멸했다. 하늘이 아니라 도로 쪽이었다. 뒤늦게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은 성준수가 난간으로 달려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소리 없이 들어오는 앰뷸런스. 씨발. 엘리베이터를 탄다는 생각도 못 하고 10층 높이를 뛰어 내려간다.

“전…!”

이름을 외치려던 입을 다문다. 사이렌도 꺼야 할 상황이면 결핍으로 감각이 평소의 배는 민감할 테니. 앰뷸런스에 걸터앉아 가이드에게 손을 맡기고 있던 녀석이 고개를 들었다. 단 외자가 불린 것만으로도 뭐가 그리 좋은지 웃었다. 얼굴에 피곤을 덕지덕지 달고서.

“준수야.”

“전영중 센티넬.”

“미안. 나 기다린다고 야근했어?”

“아직 가이딩 안 끝났어요.”

“집에 가자. 나 맛있는 거 먹고 싶어.”

비척거리며 오는 녀석의 눈에 실핏줄이 다 터져있었다. 상태를 보려고 얼굴을 붙잡는데 억지로 파고들어 무거운 몸을 늘어뜨린다. 심장박동이 쉬지 않고 달린 사람처럼 지나치게 빨랐다.

“이 수준이면 점막접촉 진행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센티넬의 거부가 완강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럼 강제로라도……!”

“괜찮아. 나 결핍 아니야. 점막은 위급 상황에만 하기로 했잖아. 그렇죠?”

담당 가이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피곤하기는 그도 마찬가지였으니. 점막접촉이면 훨씬 빠르고 효율적으로 끝낼 수 있었을 텐데 본부로 복귀하는 내내 외부접촉만으로 회복시키느라 고생했을 테고. 능력 보유치도 높은 센티넬이니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느낌이었을 거다. A급 가이드가 이송해 오는 내내 달라붙었는데도 아직도 정상이 아닌 전영중의 상태를 보면 그랬다.

“뭐 먹을래? 귀찮은데 오늘은 배달시킬까?”

“지랄 말고 회복실이나 가. 가서 키스든 섹스든 하라고.”

“준수, 가이딩 쉰다고 막말하네? 센티넬이랑 가이드 비하야 그거.”

“닥치고 가서 받아. 너 누가 봐도 가이딩 부족이야 지금.”

“괜찮아.”

“야!”

“나 진짜 괜찮아. 견딜만해.”

보지 않으려 해도 찌꺼기처럼 남은 가이딩 능력이 전영중의 상태를 그려낸다. 수년간 제가 가꾼 전영중의 정원이 진탕 처져 있었다. 씨발 진짜. 지난번 싸운 이래 전영중은 온몸으로 항의 중이었다. 그 새끼 능력도 제 주인을 닮아 엉망인 모습을 보란 듯이 전시하면서 성준수의 속을 살살 긁었다.

이런 꼴로 만족하느냐고.

견딜만하다고? 만족하냐고? 어떤 것 같은데? 못 참고 제게 매달린 머리를 떼어내 후려친다. “성준수 씨!” 들려? 이제 난 가이드조차 아니야. 내 이름 뒤에 이제 가이드란 말이 안 붙는다고. 할 수 있으면 너랑 진작 입술 비비고 가이딩해 줬다는 거 다들 아니까. 그냥 여기서 너 기다리는 것밖에 못 하는 병신이라고.

증폭된 감각이 충격을 소화하지 못하고 몸을 무너뜨렸다. 전영중은 주저앉아 입을 열고 밭은 숨을 내쉬었다. 맞은 건 관자놀이인데 꼭 명치를 걷어차인 것처럼 산소가 부족했다. 귀 안쪽에서 기어이 피가 터져 흘렀다.

“전영중. 원하는 게 있으면 똑바로 말해.”

멱살을 틀어 당기자 마침내 사람들이 달려들어 둘을 떼어냈다. 어차피 더 때릴 생각도 없었기에 순순히 끌려간다. 반항하지 않는 걸 알고 저를 붙잡는 힘이 느슨해졌다. 가이드에게 부축받으며 일어나는 와중에도 전영중은 눈을 감고 제게 안길 때처럼 웃고 있었다.

“너는, 정말 이대로 괜찮아?”

성준수가 짐승처럼 달려들었다. 그의 손이 다시 멱살을 잡기 직전 겨우 붙잡아 건물 안으로 끌고 들어간다. 분노로 이성을 잃은 폭언이 쏟아졌다.

그럼에도 전영중은 여전히 웃었다.

S급 센티넬이 본부에 상주해서 좋다던 의견은 이 주도 못 갔다. 입사한 지 한두 해를 갓 넘긴 신입들이 특히 충격받았다. 그들에게 전영중과 성준수의 소싯적 사랑싸움은 민담과 같았으므로—적당히 왜곡되고 잘려나가 제법 듣기 좋은 말들만 골라낸 얘기를 들었다는 뜻이다. 그러니 온갖 짐승의 새끼를 찾아대며 살벌하게 싸우는 모습은 그들의 예상에 없었다.

사실 일방적으로 욕하는 건 그의 전 가이드였다. 퇴근도 거부하고 사무실 수면실 샤워장을 로테이션 도느라 버린 성질 대신 다크서클을 얻은 이가 내뱉는 폭언은 너무하다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 솔직한 의견은 말하면 윗 연차들은 고개를 저었다. 너희 눈엔 욕을 처먹고도 엉겨 붙는 놈이 정상으로 보이냐.

준수야아. 전영중의 하루 시작은 식당이었다. 파리한 낯으로 밥 먹는 성준수의 앞에 앉아 싱글벙글 웃으며 쇼핑백을 펼친다. 팬티 다 떨어졌지? 내가 빨아왔어. 너 앞에 오픈되는 드로즈만 입잖아. 잠옷도 빨 때 됐지? 길 가다 우리 자기 닮은 고양이 잠옷 있어서 사 왔다? 귀엽지? 샤워실에 린스 없는 거 같아서 그것도 샀어. 이건 사은품으로 받은 샤워바.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정보가 난무하는 일방적인 수다가 시작되면 식당에 있던 직원들은 황급히 식판을 정리해 일어났다. 말없이 우적거리는 성준수가 언제 폭발해서 저 머리를 후려칠지 모르니까.

그래도 오늘은 밥을 다 먹도록 용케 참았다. 애써 무시하고 마지막으로 국을 뜨려는데 제 손에 쥐어져 있던 숟가락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아무 데서나 능력 쓰고 지랄…. 입술을 씹어 욕을 한 번 참고 고개를 든다. 내내 무시당하다 마침내 저를 쳐다보자 전영중이 무슨 일 있냐는 듯 본다. 이 씹새끼…. 이번에도 욕을 겨우 삼킨다. 끝내 제게 아무 말 않고 일어나는 성준수에게 다가가 허리를 감쌌다.

“업무 시작까지 시간 남았는데, 수면실 갈래? 독수공방이 너무 길어서 콘돔 사 왔는데.”

당연히 다 들으라는 듯 충분히 큰 목소리였다. 빡! 못 참고 제게 휘둘러지는 주먹을 고스란히 맞은 전영중이 웃었다.

“솔직히 네가 가출한 이유를 모르겠어.”

“너 보기 꼴받아서.”

“준수 예전에 니 대가리에 뭐가 들었는지 모르겠단 소리 많이 했잖아. 지금 내가 딱 그 기분이야.”

“너 보기 꼴받아서 가출했다고.”

“근데 이러니까 연애 초기 같다. 우리 요새 싸운 적도 없고 너무 안정적이었잖아. 이것도 자극적이어서 좋아.”

“이 씨발 이러는 니가 존나 꼴받는다고! 니 대가리에 뭐가 들었는지 여전히 모르겠고!”

“하하하, 우리 준수도 짜릿한가 보네. 오래 사귀면 이런 이벤트가 한 번씩 필요하다더니 그게 맞나봐.”

아아아아, 씨발아 좀! 오늘 교육이 잡혀있던 신입 가이드들이 성준수의 분노를 목격하고 그의 시야에 잡히지 않도록 사라졌다. 성 교관님 오늘도 기분 안 좋으시겠네. 좆됐다 진짜…….

“너 뭐 잘못 처먹었냐? 왜 지랄이 낫질 않지?”

“내가 나 좋자고 이러나. 너도 이런 거 좋아하잖아.”

“뭔 시발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지금. 내가 그딴 걸 왜 좋아하는데, 이 역귀같은 새끼야.”

“준수야, 자기야. 나 요새 네 말 잘 들었잖아.”

“요새 빼고겠지.”

“그래, 그럼. 요새 빼고 잘 들었잖아.”

“아이 씨발… 근데 뭐.”

빙긋 웃은 전영중이 휴게실로 들어간다. 이른 시간이라 아직 아무도 없었다.

그의 말을 따른다는 게 생각 없이 산다는 말이 아니다. 아무렇게나 내뱉는 듯한 그의 결정이 충분한 고민 끝에 나왔다는 걸 알기에 믿고 따를 뿐이지. 처음엔 그걸 몰랐으니 생각이 있네 없네 수시로 싸웠다. 그의 결정 프로세스를 이해한 건 사귀고도 한참이 지나서다.

성준수는 문제의 본질과 해결 방법을 두고 잔가지를 모두 쳐낸다. 그렇게 남은 방법 중 가장 성공 확률이 높은 길을 택하는 것이다. 함께 농구를 시작했던 초등학교 때부터, 원중고를 떠나고, 가이드가 되고, 전영중에게 깃든 악마를 없애기까지 모두.

“그러니까 말해봐.”

그의 결정이 성의 없다 느꼈던 건 쳐낸 가지가 지극히 감정적인 부분이어서다. 두려움, 미련 따위의 것들. 확률만 높다면 성준수는 자신이 입게 될지도 모르는 상처를 돌보지 않으니까.

그러니 내가 대신 준수를 보살펴야지. 준수는 제 마음이 다치는 줄도 모르니까. 아무리 옳은 길이라도 네가 꺾이면 그게 무슨 소용인데.

“너는 후회 안 해?”

전영중은 성준수가 화내는 이유를 모른다. 알 것 같지만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이제 그의 생각을 짐작해 떠보는 건 그만두기로 했으니까. 그러니까 성준수가 말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이건 뭐, 기다리다 지쳐서 옛날처럼 속 좀 긁는 거고. 성격 급한 녀석이 이렇게까지 버틸 줄은 몰랐기에 나온 심술이었다.

그리고 성준수는 이 상황에 질렸다. 새삼 반복되는 질문에 해줄 말은 늘 같다. 원하는 게 있으면 시원하게 말하든가. 후회해? 후회해? 내내 이 지랄이지. 잘 정리한 머리를 짜증스레 쥐어뜯고 전영중을 노려본다.

“제 후회는 존나 가치가 없어요, 전영중 센티넬. 이게 최선이니까 그만 처 물으세요.”

“어떻게 하고 싶은데.”

“너 씨발 존나 은퇴시키고 집에 가둬서 내 거라고 잇자국 내고 싶다. 됐냐? 근데 니는 어차피 은퇴를 못 한다고!”

“노력할게.”

“뭘 노력해 미친 새끼야. 너 은퇴하면 사람들은 누가 지키고?”

“알 바?”

“이게 돌았나.”

“너 본부장님 닮아간다. 벌써부터 꼰대같이 구네. 근데 대의니 국익이니 하는 것들 너랑 진짜 안 어울려.”

“그러는 너는 시발, 그 몸뚱아리 갈아 넣지 못해 안달이던 게 하지도 못할 은퇴를 하겠다 이 지랄이냐?”

“그러게. 준수 닮아가나 보지.”

제가 앉은 소파에 올라타 몸을 겹친다. 내볼래? 뜬금없는 말에 뭐냐고 묻기도 전에 제 셔츠를 풀어 어깨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아, 잇자국? 발랑 까진 새끼. 임자 있는 게 공공장소에서 웃통을 홀라당 까고 있네. 괘씸해서 어깨를 잘근거리며 아프게 씹는다. 여유롭게 웃는 녀석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나올 때까지.

“준수야.”

죽어도 안 놓을 것 같더니 밀어내자 의외로 순순히 떨어진다. 시선이 마주할 수 있는 거리감이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안는다. 뭐 하는 거지… 싶었지만 성준수가 하고 싶은 대로 놔둔다.

선명한 이빨 자국 위에 입을 맞추자 전영중이 입을 열었다. 과장되게 들떴던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았다.

“난 이게 최선이 아닌 것 같아.”

너와 나 누구도 기쁘지 않은 이게 최선일 리 없다. 전영중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냥 매일을 버티며 소모되는 과정이지.

네가 내게 의지할 곳이 되었듯 나도 네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어. 내가 바란 서로를 닮아가는 모습은 그런 거였지. 그런데 너는 나처럼 마음을 숨기는 법을 알았고, 나는 네가 그랬듯 진심을 캐내려 들쑤시잖아. 우리 둘 다 겁쟁이가 되어버린 것 같아. 그러니 숨겨둔 속마음은 차마 건드리지 못하고 겉도는 싸움만 하지.

준수야. 나도 잊고 있었는데 얼마 전에 기억나더라.

“난 너만 믿고 목숨을 몇 번이나 버리는 놈이었잖아.”

생각해 보니 그리 오래전도 아니었다. 고작 칠 년 전인데. 그때나 지금이나 죽음이 무섭지 않은 적은 없다. 그저 네가 날 믿었듯 나도 널 믿었지. 네가 그랬잖아. 존나 버티면 어떻게든 명줄은 붙여주겠다고. 그 선언에는 대의 같은 거대한 포부 대신 너를 살리고 싶다는 맹목만 있었다.

“우리 고작 서른여섯이야. 낡아빠진 늙은이처럼 굴지 말고 솔직해져.”

우리의 판돈은 늘 무거웠지. 센티넬과 가이드라는 막중한 임무 때문만은 아닐 거야. 우리는 그 방법밖에 없다는 것처럼, 투신하지 않으면 안 되는 미친놈들처럼 굴었잖아.

“너는 정말 어떻게 하고 싶은데.”

전영중은 이번에도 기꺼이 자신을 배팅했다. 어떠한 게임도 걸리지 않은 테이블 위에, 손만 뻗으면 가져갈 수 있는 거리에서, 눈속임이나 함정도 없이 그저 무방비하게.

그리고 성준수는 제게 바쳐진 것을 내버리는 머저리가 아니었다.


본부가 조용히 부산스러워졌다. 대낮부터 붉게 번쩍이는 경광등에 교육하다 말고 밖을 내다본다. 강의 중단을 알리고 성준수가 밖으로 나왔다. 저 앰뷸런스에 탄 게 누군지 명확했다.

이동식 침대 하나가 막 회복실에 들어가고 있었다. 회복실이라는 우아한 이름이 붙여진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은 실상 그리 우아하지 않다. 센티넬의 회복을 위해 마련된 폐쇄 공간에서 하는 일이야 뻔하지.

“전영중 센티넬은 제가 가이딩하겠습니다.”

뒤따르는 가이드의 진입을 막는다. 전영중의 담당 중 S급인 사람이었다. 지친 기색의 그가 얼굴을 구겼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비켜요. 가이딩도 못 하면서.”

“가능합니다. 저 아직 가이드고요. 자격은 됩니다.”

“지금 전영중 센티넬 담당은 접니다. 고집부리다 S급 센티넬 죽일 겁니까?”

“영중이 지금 감각에 문제 있는 거 알죠.”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댄다. 무슨 대화를 나누든 전영중에게는 고막이 터질 것 같은 소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얼굴을 가리고 있던 커다란 손이 목소리가 들린 곳을 더듬는다. 손을 내어주자 약지를 만져 반지를 확인한 그가 힘을 거의 주지 않고 손가락만 걸어왔다. 실수로 부러트리기라도 할까 봐 조심스러운 동작이었다.

전영중이 누구를 선택했는지 결과는 명백했다. 가이드는 한숨을 쉬고 이동식 침대에서 손을 뗐다.

“밖에서 대기하겠습니다.”

“기다리지 마세요. 문제없을 테니까.”

“대기하겠습니다.”

“그러시든가요.”

방음을 위해 두껍게 설계된 문이 닫힌다. 푹신한 침대가 있지만 지금 전영중은 제 몸 하나 옮기는 것도 부담일 것이다. 구석에 이동식 침대를 고정하고 올라탄다. 그 감각도 버거운지 전영중이 이를 악물었다.

“전영중. 눈 떠.”

인간에게 주어진 최후의 힘? 세상을 뒤엎는 이능력도, 악의에 저항하는 균형도 아니다. 오로지 생각이었지. 불가해한 현상을 낱낱이 쪼개 이해하고 불합리를 박살 내기 위해 틈을 찾던, 태곳적부터 부단히 이어진 사고, 생각, 사유.

왜 각인을 끊자 능력이 일부 회수됐을까. 왜 하필 전영중에게 악마가 숨어들었을까. 왜 최세종은 기다렸다는 듯 제 추측을 친절히 알려주었고. 우리의 재각인을 종용하듯 학교 위로 쏟아지던 검은 비. 하필 우리가 놀러 나갔을 때 나타난 악몽. 생존을 위해 이능력이 발현한 너. 그런 널 도울 수 있게 가이딩 능력이 주어졌던 나. 약속이라도 한 듯 농구를 포기하고 택한 길은 여전히 함께였다.

우연의 일치라 생각한 것들이 일련의 방향성을 가진 필연이 되고, 지나친 의미 부여라 여긴 것들은 가설이 된다.

우리의 길이 처음부터 함께였으니 마지막도 당연히 내가 가져가야지.

눈을 반도 채 뜨지 못한 흐린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성준수는 제 마음과 함께 쳐냈던 선택지를 꺼냈다. 책임감이라는 이유로 외면했던 바람이었다.

“내가 어떻게 하고 싶냐고 물었지?”

여기서 널 끝장낼 거야.

“나랑 은퇴해, 이 새끼야.”

나는 네 인생의 한 톨까지 남김없이 갖고 싶으니까.

멱살을 쥐고 우득, 엄지를 씹는다. 다 터진 손가락으로 볼 안쪽 살을 짓누르며 살벌하게 통보했다.

“야, 뒤질 거 같으면 말해라.”

“그럼 멈추게?”

“씨발 당연히 아니지. 이 악물고 버텨.”

성준수가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이건 솔직히 균형이 잘못했지. 왜 가이딩 능력을 돌려줘? 그러니 내가 못돼 처먹은 생각이나 하는 거 아냐. 말라비틀어진 전영중의 능력에 파고든다. 깊이가 짐작도 안 되는 싱크홀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곳곳에 균열이 일었다.

될까?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가설을 세웠으니 실행할 뿐이다. 센티넬이 가장 취약한 폭주 직전의 상태에서 그의 능력에 생긴 균열을 가속화하고 붕괴시킨다. 아끼고 아껴둔 한 줌의 가이딩을 쏟아부었다. 치유가 아닌 파괴에. 그저 심상만 옮겨갔을 뿐인데 발밑이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진동했다. 켁, 쿨럭! 질척한 기침 소리가 들렸다. 제가 올라탄 전영중이 경련하듯 숨을 토해냈다. 입안에 파고든 손가락이 끈적하게 젖는다. 흐윽, 끅! 콜록! 컥! 토해낸 피가 기도로 넘어가지 않게 옆으로 뉘이는 손짓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덜덜 떨면서도 제 입 안에 침범한 것이 달아나지 못하게 겹쳐 누른다.

계속해.

제 몸이 망가지는 걸 느끼면서도 부추긴다. 내가 뭘 하는 줄 알고 계속하래? 성준수가 입꼬리만 올려 웃었다. 너도나도 제정신은 아니다. 제정신이면 이런 짓 못 하지. 이미 바닥난 능력을 억지로 쥐어짠다. 더 뽑아낼 수 없으면 다른 걸 써서라도. 가슴을 짓누르는 통증에 숨이 막혔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시야가 붉다. 코에서 흘러내려 입안으로 들어오던 뜨끈한 것이 거친 숨에 부서진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전영중이 다시는 능력을 쓸 수 없도록, 아무것도 고이지 않게 완전히 그의 샘을 무너뜨릴 때까지. 진짜 균형이라는 게 있으면 여기까지만 해. 우리가 악마라는 놈도 없애줬잖아. 뒈질 만큼 고생했다고.

나 이 새끼 못 두고 가니까 네가 양보해.

마침내 두 발이 추락한다. 절벽이 부서지며 토사와 바위가 말라붙은 싱크홀로 무너져 내린다. 몸은 현실에 있음에도 곤두박질치는 감각이 선명했다. 더, 범위를 넓게. 다시는 센티넬이라 부를 수 없도록 아예 박살 낼 거니까. 추락하는 와중에도 능력을 무너뜨리는 데만 집중한다. 마침내 팔이 잡혀 끌어올려질 때까지.

“준, 허억, 욱… 수야, 케헥! 헥, 우웩…….”

눈을 뜨니 전영중 위에 쓰러져있었다. 얼굴이 축축한 느낌에 문지르자 눈과 코에서 흘러내린 것들로 셔츠가 붉게 젖었다. 핏덩이를 뱉어내느라 꿀렁이는 가슴을 짚고 일어난다. 팔은 손자국이 남을 정도로 세게 잡힌 채였다.

“야, 헉, 괜찮냐?”

“하, 니……. 죽을… 흑, 가타…….”

제 몰골도 꽤나 엉망일 거라 생각했는데 진짜 심각한 건 전영중이었다. 실핏줄 터진 눈, 성준수가 불어낸 피와 제가 뱉어낸 것들이 얼굴에 온통 엉겨 붙어 숨을 쉬지 않았다면 흡사 난자당한 시체 꼴이었다. 소매로 코를 훔치다 말고 전영중부터 문질러 닦던 성준수가 비실비실 웃으며 다시 엎어졌다. 하, 흑, 시발, 꼬라지 개웃기네. 웃을 힘도 없어 늘어져 있던 전영중이 겨우 팔만 들어 등을 감쌌다.

“성준, 수흑, 존나… 무거워…….”

“뭔 당연한 소릴, 하, 고 자빠졌어….”

“무겁다, 고, 헉… 준수야…….”

얼굴을 마저 닦으려 일어나는 몸을 깍지 껴 막는다. 성준수도 기운이 빠져 별 반항 없이 그대로 몸을 기댔다. 꼭, 센티넬이 되기 전 느꼈던 무게 같았다.

그래서 좋아.

숨도 못 쉬게 짓누르는 오래된 기억의 무게였다.


“사고라고.”

“네.”

“이게 사고로 넘어갈 수 있는 문제 같나.”

“사고인 걸 어떡합니까.”

어깨를 으쓱이며 능청스레 답한다. 긴급하게 소집된 임원급 회의에서 성준수는 홀로 맞은편에 앉은 일곱 사람을 견뎌냈다.

“지금 전영중 센티넬이 어떤 상황인지 아나.”

“모릅니다. 저 이제 가이딩 못 하는 거 아시잖습니까.”

“등급 판정 불가야.”

좋은 의미가 아니라 나쁜 의미로 말이지. 다 알면서도 성준수는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다.

뒤늦게 응급호출버튼을 누르자 밖에서 대기하던 가이드와 의료진이 들이닥쳤고, 두 사람의 몰골에 아주 기함했더랬다. 성준수를 끌어내리고 다짜고짜 전영중과 입을 맞춘 S급 가이드가 이내 경악해 소리를 질렀다. 대체 무슨 짓을 했냐고.

“E등급조차 안 나오는 열외대상이야. 회복실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가이딩 사고입니다.”

“가이딩으로 센티넬의 등급이 하락하는 사고는 보고된 적 없어.”

“그럼 저희가 최초네요.”

“성준수.”

좋네. 이름 세 자만 불리는 기분, 나쁘지 않아. 가이드 직함을 박탈당한 게 꼭 세상이 무너진 기분이던 얼마 전과 달리 지금은 후련하기만 했다.

“사고입니다.”

“능력이 재기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된 게?”

“사고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증명할 방법은 없다. 그리고 이 사고는 어쩌다 일어났는지 어디에도 알려져서는 안 된다. 그게 성준수가 당당할 수 있는 이유였다. 센티넬을 일반인으로 추락시키는 방법 같은 게 존재하면 안 되니까.

“S급 센티넬이 얼마나 귀중한 재원인지 알지.”

“그래서 저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전혀 그렇지 않은 얼굴로 대답한다. 반성의 조각조차 보이지 않는 태도였다.

“전영중은 대체 불가능한 전력이었어.”

“이로 인해 전력에 구멍이 생긴다면 영중이만큼 대단한 센티넬이 나타나지 않겠습니까? 균형의 논리에 따른다면요.”

모든 짐을 전영중이 떠안을 필요는 없다. 그러게 작작 굴리지 그랬어. 오죽하면 천칭이 옜다 가져가라 하고 전영중을 내어줬을까.

공개되어서는 안 되는 방법.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가이딩. 무엇보다 저 반성 없는 태도에 더 이상의 회의는 무의미하다고 여긴 본부장이 손을 내저었다. 나가보라는 표시다. 성준수는 일어나는 대신 입을 열었다.

“하나만 여쭙겠습니다.”

“해봐.”

비집고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꾹 눌러 참는다. 크흠.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고 덤덤하게 말했다.

“저희 공무원 연금 나옵니까?”

“너도 진짜 제정신은 아냐.”

원래 공무원은 업무 스트레스로 제정신인 사람이 적다잖냐. 성준수는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쿵! 끝내 성질을 이기지 못한 누군가가 닫힌 문 너머에서 물건을 집어 던졌다. 저 미친 새끼! 퇴사 기념 덕담 삼으며 한 귀로 흘린다.

“치료는 안 해줘?”

“이제 S급도 아닌 게 무슨 치료냐던데.”

“야박하네. 같이 일한 세월이 얼마인데.”

등급은 핑계지, 실상 밉보인 거다. 본부의 쪼잔한 복수에 항의할 생각은 없었다. 현대 의학으로 해결되는 일은 현대 의학으로. 처음부터 성준수의 방침이었으니.

엄지에 거즈를 감은 손이 전영중의 주머니를 침범해 깍지 낀다. 이제 온기 외의 것은 느껴지지 않는 손이었다. 한쪽 눈에 안대를 하고 반대쪽은 실핏줄이 터져 보기 흉한 모습으로 전영중이 샐쭉 웃었다.

“안과 들렀다 갈까?”

“눈 멀쩡하다며. 실직한 게 무슨 안과야? 돈 아끼게 인공눈물약 넣고 잠이나 푹 자.”

“백수 생활 시작부터 너무 긴축 아냐?”

“그래서, 아쉽냐?”

곧장 아니라 대답할 줄 알았던 녀석이 목을 길게 울렸다. 어쭈? 아쉬운가 보지? 어쩌냐? 인제 와서 후회해도 못 무르는데? 삐딱한 마음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데 만족할 만큼 뜸을 들인 전영중이 씨익 웃었다.

“가는 길에 종량제 봉투 사 가자. 이제까진 능력으로 해결했잖아. 그게 아쉽네.”

능구렁이 같은 새끼. 내심 긴장했던 속이 녹아내리며 웃음이 터졌다. 하여간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고. 네 인생 끝장났는데 쓰레기 어떻게 버릴지 고민할 때냐.

“이제 뭐 해먹고 살지.”

“퇴직금 모아서 치킨집 할까?”

“안돼. 니가 다 처먹어서 적자 날 것 같아.”

“가게 차리면 원가에 먹을 수 있잖아.”

“설득력 미쳤네.”

성준수는 보조석에 앉고 나서야 대답했다. “생각해 보자.” 긍정적인 대답에 꼭 허락받은 것처럼 전영중이 웃었다. 치킨이 그렇게 좋냐? 나보다? 아니, 너랑 같이할 거니까 좋은 거지. 치킨집 하나로 애교를 떠는 것도 재주였다.

“퇴역 축하한다.”

“너도.”

기어 레버에 올린 손을 겹쳐 잡는다. 손을 빼낸 전영중이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어 네 번째에 자리한 반지를 문질렀다. 칠 년째 같은 자리에 있어 이제는 광택을 잃고 흠집 난 반지였다. 상처 입었으나 의연하고, 손가락 모양대로 휘어 오히려 제 몸과 하나같아진 것. 꼭 저와 성준수처럼.

뭐든 괜찮겠지. 계속 같이 있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확신을 주듯 하얀 손가락이 힘을 주어 마주 잡았다.

분명한 사랑이었다.


영중이가 세 이야기 모두에서 얻어터질 줄은 몰랐습니다. 의도한 건 아닙니다. 정말로. 준수가 입은 거칠어도 폭력적인 사람은 아니라 생각하는데…. 아무래도 (구차한 변명) 하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다 준수의 애정이 담긴 펀치리라 믿습니다.

단편이었던 이야기에 외전이 두 개나 나왔네요. 첫 이야기가 두 사람의 이야기였고, 7년 전 이야기는 영중이의 이야기였으니 7년 후는 준수의 이야기로 계획해봤습니다.

시퀄 외전에 대한 생각은 프리퀄이 나온 시점부터 있었는데, 전편이랑 다르게 우울할 것 같아 쓸지 말지 계속 고민했습니다. 이전 두 편이랑 분위기가 너무 다를까 봐요. 처음 생각한 결말은 둘이 더 이상 함께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서로의 길을 응원하는 방향이었거든요. 그런데 준수가 영중이를 퇴역시켜버렸네요. 역시 상남자. 그럴 수도 있지! 평생 함께해라! 응원한다!

소장본을 문의해주신 분들 덕에 용기 내서 세 번째 이야기를 쓰고 책도 무사히 나왔습니다. 그분들을 위해 Kill the Love는 무료로 바칩니다. 뻥이고 웹공개하고 싶어서입니다. 제가 쏘는 회지니 모쪼록 즐겨주시길… Enjoy….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하세요.

+

여기까지는 소장본 후기였고, 지면 제한이 없어졌으니 더 주절거려볼까요?

킬더럽은 영중이 생일에 맞춰 무료배포하려던 책이었습니다......라는 결심을 한 당시 여행 중이었고, 생일까지는 1주일 남았었죠. 1주일 내에 본편 분량을 다 쓰고 출력해서 배송까지? 손도 느린 주제에? 미친 사람인가? 뭐 결국 이런저런 이유로 불발됐습니다.

처음 생각한 제목은 조금 더 길었어요. 원제는 How to kill my love였습니다. 영중이 생일에 맞춰 올릴 생각에 신나서 퇴근하는 길이었는데 불현듯... 떠오른 거에요... 비슷한 제목의 글이 연재 중이라는 걸.... ㅎㅇ ㅌ 플레이 바스켓볼... 명작이니까 안보셨으면 빨리 ㄱㄱ

아무튼 어?쩌?지? 하고 퇴근길 내내 두뇌 풀가동하다 싹둑 자른 제목으로 바꿨습니다. 나름의 해피 액시던트였네요. 제목을 바꾸지 않았다면 프리퀄과 시퀄도 쓰지 않았을 거라 생각해요.

킬더럽은 my love라는 말로 장난치고 싶다는 데서 시작됐습니다. 영중이의 사랑이라는 감정과, 영중이가 사랑하는 사람.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 대신 제 감정을 죽인 영중이가 준수를 다시 사랑할 수 있느냐? 답이 쉽게 나오더라고요. 아 가능이지! 영중이의 사랑은 준수와 함께한 오랜 시간 동안 견고하게 쌓아 올린 결과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만약 준수가 훈이의 얼굴이라면? 그건 안 가능이지 않을까? 첫 데스 이후 짱친으로 남았을지도?

그래서 제 세계관에서 영중이는 얼빠입니다. 자각 못한 얼빠. 갑작스러운 결론인가요? 그렇지만 도최쿨미의 얼굴을 어떻게 안 사랑하죠?

—라는 생각을 한 적 있는데, 그새 영중이가 갑탐 5대 미남이 되어버렸어요. 그래서 상호얼빠커플 삼기로 했습니다. 행복해라 미남들아. 평생 얼굴 핥아먹으며 살렴. 미모가 시들때까지 사랑해라....

본편의 제일 큰 문제는 사실 액션감이었습니다. 이능력물이면 좀 콰광! 하고 와장창! 하는 화려한 이펙트와 이것저것 박살나는 그런 게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영중이를 오버밸런스 사기캐로 만드느라 소멸능력을 줬더니... 액션감이 없다... 부서지는 소리도... 무너지는 것도...! 내가 지금 액션을 쓰긴 하는 건가? 노잼인데? 하는 심각한 고민....

그걸 또 준수가 해결하더라구요. 그렇게 찰지게 패줄 줄은 몰랐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저는 정말 세 편 내내 영중이를 때릴 생각이 없었어요. 아니 근데 영중이가 입으로 매를 벌잖아....... 없는 타격감을 자가생산해준 빵준부부에게 감사드립니다.

무계획으로 시작한 이야기였지만 마무리할 수 있어서 후련하네요. 이전까지는 후기에 감사합니다만 적었는데 빵준 파면서 처음으로 길게 적어봅니다. 재밌네요. 마감 후엔 와 다썼다... 라는 생각밖에 안 드는데 써둔지 오래 돼서 그런가 하고 싶은 말이 많았어요.

그리고 진짜 비밀인데, 솜깅이 갖고 싶어서 솜깅이 출연시켰습니다. 제가 괜히 준수 손에 인형 쥐여준 것 같나요? 간증하자면, 이후 저는 15깅 빵준 오너가 되었습니다. 님들도 기원의 마음을 담아 연성해보세요. (아니어도 빵준 보여주세요 제발)

......차단하지 말아주세요. 행복하시구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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