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각맨틀외핵내핵
가비지타임 준쟁 쟁준
30.
지금이 며칠이지. 진재유는 우주복도 헬멧도 없이 혈혈단신으로 빠르게 우주를 통과하며 생각한다. 제 주변에 살아있는 무언가가 있을까. 알 수 없다. 진재유는 홀로 우주를 통과한다. 텅빈 눈에는 우주가 반사된다. 계속 마음 속에 꺼끌하게 굴러다니는 질문 하나를 건져올린다.
왜 나만 이 모양이 되었는가.
4월. 이제는 봄도 여름도 아닌 애매한 계절에 지구는 확실히 망해가고 있다. 아주 작은 소행성 하나가 믿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지구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는데 발견이 늦었다. 바로 한 달 뒤면 지구와 충돌한다고. 인류가 종말 소식에 들썩였다. 어떤 사람들은 차를 타고 어딘가로 떠났고 어떤 사람들은 길거리에 나와 신을 믿으라고 소리를 질렀고 어떤 사람들은 시끄럽다며 소리 지르는 사람들을 찔러 죽였다. 진재유는 창문을 넘어 들려오는 고함 소리와 비명 소리, 간헐적인 클락션 소리를 들으며 세상이 망한다는 소식에 세상을 더 망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성준수는 말 없이 창문을 닫았다.
영원할 것 같던 난리통도 일주일이 지나니 사그라들었다. 마트 계산원이 없어 훔쳐버린 식량들을 까먹으며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살 수 있는가, 드디어 그것에 이목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하루에 2시간 방송되는 뉴스는 역대 최고 시청률을 경신했다. 사실은 경쟁 프로그램이 없었고 볼 것이 그것뿐이었으니 당연했지만.
진재유의 옆에서 생라면을 까먹던 성준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방송하는 사람들은 저것만을 위해 출근을 한 거냐며 경악했다. 가만히 듣던 진재유도 경악한다. 진짜가… 언론인들 진짜 직업 윤리 장난 아이네…. 그래도 너라면 가겠냐? 모르제…. 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너도 미쳤구나…. 화면 너머의 아나운서들은 미치지 않았고 차분하다. 그 옆으로는 지구가 가진 마지막 우주선에 대한 영상이 반복된다. 그 우주선은 1시간 전에 출발했다.
사람들은 기다린다. 우주선이 무사히 혜성을 쪼갰다는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1시간 전 출발한 우주선 ‘라스트 호프’가 방금 기체 이상으로 폭발했다는…
성준수는 소파에 털썩 기대 눈을 감는다. 이제 남은 것은 2주 뒤 소행성이 지구와 크게 충돌해 모두 한날한시에 죽는 것 뿐이다. 눈을 감은 채 미동도 없는 성준수를 바라보던 진재유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부산스럽게 이리저리 움직이며 LP를 틀고 양주를 깠다. 더 살까봐 아껴두던 건데, 이제 다 죽는다니까. 두 잔을 따라 성준수에게 한 잔을 건넨다. 성준수는 잔을 받아들며 이 시끄러운 노래는 뭐냐고 물었다.
모든 생명체가 시한부 선언을 받았어도 밥은 잘 넘어갔고 잠도 잘 왔다. 라면은 평소랑 똑같은 맛이었고 성준수는 여전히 요리를 못했다. 가만히 있어도 먼지는 계속 쌓이고 가만히 두면 개수대의 그릇은 그대로 지저분했다. 종말이 코앞인데 집안일이 산더미였다.
성준수는 밀걸레질을 하며 먼지 이 씨바꺼 밀다가 죽겠다고 투덜댔다. 진재유는 설거지를 하면서 니 말 좀 예쁘게 하라고 답했다. 정말로 평소와 똑같았다. 성준수의 가르마 방향이 바뀌거나 진재유의 주근깨가 사라지는 일 같은 건 일어나지도 않았다.
잠깐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낮잠을 자고 일어난 것 같은데 왜인지 벌써 남은 2주가 다 지났다. 오늘로 마지막 날이었다. 진재유는 소행성이 충돌하기 한 시간 전 침대에 앉아있는 성준수에게 약 두 알을 쓱 내밀었다.
이거 뭔데.
수면제.
왜.
눈 뜬 채로 몸 갈라져 죽는 것보단 이게 낫지 않나 해서.
넌 말을...
진재유는 별 표정 없이 성준수에게 빨리 약을 받으라고 손을 흔든다. 성준수는 미간을 찌푸린 채 진재유를 쳐다보다 곧 약을 집어들고 꿀꺽 삼킨다. 약을 삼키자마자 참았던 말을 쏟아낸다.
너 이건 왜 갖고 있어?
접때 마트 갈 때 약국에서 훔쳐왔다.
그래.
성준수는 그럼 됐다며 침대 위로 털썩 누웠다. 진재유도 그 옆에 나란히 누웠다. 보통 종말에는 노을이 지던데 해가 쨍해서 블라인드를 쳤다.
성준수와 진재유는 나란히 약을 삼키고 약 기운에 취해 이 말 저 말하다가 까무룩 잠들었다. 진재유는 잠들기 직전 성준수를 한번 꾹 끌어안았다.
눈이 떠졌다.
성준수도 침대도 지구도 없었다.
다만 별과 공허와 철근.
진재유는 우주에 있었다. 배에 철근이 박힌 채 전투기보다 빠르게 날고 있었다. 배가 뚫렸는데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이 정도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면 피부가 불타고 있거나 바람이라도 느껴져야 했는데 진재유는 멀쩡했다. 멀쩡한 게 아니라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봐도 알 수가 없었다. 너무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탓에 별들이 광선검처럼 보인다. 꿈이라면 진작 깨야했는데 깨질 않았다. 진재유는 제 상상력이 이 정도가 아님을 안다. 그러므로 지금 겪는 모든 상황은 꿈이 아니다.
그럼 대체 뭔가?
이게 진짜 현실이기라도 한단 말인가….
사실은 이게 진짜 현실이고 지구에서의 일이 꿈이었던건가? 평생 배에 철근이 박힌 채로 농구하는 꿈을 꾸고 있었던건가?
진재유는 허탈한 채로 우주를 가로지른다. 믿을 수 없을만큼 빠른 속도로 우주를 통과하고 통과한다. 손발을 휘저어 궤도를 바꿔보려고 하지만 바뀌지 않는다. 달리고 통과한다. 그저 이동할 뿐이다. 주위의 무엇이라도 잡고 싶어 손을 뻗어보지만 어느 것에도 닿지 않는다. 모든 것이 스치지도 않고 지나간다.
너무 빠르게 우주를 통과하는 혜성은 고립된 것과 같다.
47.
성준수는 어떻게 됐을까. 성준수도 죽지 않고 우주를 날고 있을까? 왜 이렇게 됐는지 생각하면서? 성준수라면 씨발씨발하면서 어떻게든 어딘가에 착지했을 것 같기도 하다.
진재유는 킥킥 웃는다. 빠른 속도로 우주를 통과하며 킥킥 웃는다. 웃으니 철근이 꽂힌 배에서 피가 죽 배어나오는 것 같았다. 뽑으면 죽으려나. 진재유는 몇 번의 시도 끝에 철근을 뽑아낸다. 속도 때문에 철근에서 피가 죽 늘어진다. 뒤돌아보니 제 등에서 난 피와 철근에서 떨어진 피가 리본처럼 궤도를 그린다. 하나도 아프지 않았고 죽을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진재유는 이 순간에도 우주를 통과한다. 어디를 가는지도 모르고 우주를 통과하고 통과한다. 진재유는 그것이 좀 슬펐다. 왜 나는 계속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채로 삶을 떠도는 것 같지. 농구를 해서 대학에 갈 수 있을거란 생각도 없으면서 그게 가능한 선택이라 지상에 남았고… 운이 좋아서 잘 풀렸지만 안 풀렸으면? 이현성이 없었으면? 쭉 서인진 뿐이었다면? 진재유는 이도저도 아닌 대학에서 이도저도 아니게 농구하다 그만두고 이도저도 아닌 곳에서 이도저도 아닌 일을 하며 이도저도 아닌 것이…
그만하자.
이현성. 그래 이현성은 뭘 하고 있을까. 죽었을까? 모두 죽었을까? 이현성 김다은 서인진 공태성 정희찬 기상호 성준수 우수진 조재석 이초원 박병찬 임승대 황보석 고상언 조신우 김기정 허창현... 이름을 나열하기도 힘들만큼 많은 그 모든 사람들은. 이제 죽었을까?
나만 살았을까?
나만 이 지옥도를 떠돌고 있는건가?
진재유는 이전처럼 외로워진다.
진재유는 모두가 가는 쪽으로 가고 싶었다. 다수에 섞여 제 존재를 희미하게 만들고 싶었다. 모두가 한 쪽으로 갈 때 혼자 이쪽에 있고 싶지 않았다. 허나 돌이켜보면 자주 그랬다. 자꾸 오답을 골랐다.
넌 좀 이상하네. 그런 말을 계속 듣고 있으면 진짜 나한테 무슨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문제가 있는 진재유는 우주를 떠돌며 중얼거린다. 니들이 더 이상해. 니가 더. 니가 더 이상해. 어느 새 눈물이 눈꼬리를 따라 등 뒤로 늘어진다. 니가 제일 이상해. 나를 이상하다고 하는 니들이 진짜 이상한거야. 모든 것을 정답과 오답으로 채점하는 니들이 제일 이상해.
진재유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다시 친구들을 떠올린다. 나와 같이 떠돌고 있을지도 모르는 친구들을. 혹은 한날 한시에 죽어버렸을지도 모르는 친구들을.
진재유는 소행성이 충돌하기 일주일 전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소행성이 충돌할 때 뭘 하고 있을지 물어봤다. 친했든 친하지 않았든 전화번호부에 있으면 전부 전화했다. 황보석은 김기정이랑 옥상에서 비눗방울 불거랬고 이초원은 박병찬이랑 춤 출거랬다. 비보잉이라도 하려나. 얼마 전에 면허를 딴 정희찬은 기상호랑 드라이브 할 거랬나? 임승대는 뭘 할지 모르겠다고 했고 최종수는 전화를 안 받았으며 우수진은 가족이랑 있을 거라고 했다. 조재석은 자긴 지구가 멸망하는 날에도 사과나무를 심겠다며 평소와 같이 슛 1080개 던질 거라고 했다가 웃으면서 뻥이랬다. 그리고 줄줄 이상한 얘기만 하다 끊었다. 진재유는 전화를 끊고 나서야 조재석이 소행성이 충돌할 때 뭘 할지 알려주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이런 게 사회 생활 스킬이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진재유는 성준수와 수면제를 먹고 모르는 사이에 죽으려고 했다. 죽는지도 모르고 죽고 싶었다.
61.
천국 지옥. 그건 존재했다. 여기는 지옥이 아니라면 설명되지 않는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설명이 왜 안 되는가. 소행성이 부딪혔고 진재유는 빠른 속도로 지구에서부터 튕겨져 나갔다. 여전히 잠든 상태로 성준수와 떨어지고 이리저리 휘날리는 과정에서 배에 철근이 꽂혔으며 부서져가는 대기권을 뚫고 나와 지금까지 빠른 속도로 우주를… 우주에 나오면 기압이 다르고 온도가 낮아 사람이 부서진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왜 아직도 부서지지 않았는가, 그것이 의아하긴 했지만 아무튼 그럴 수 있었다.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할 수 있는 게 없다. 이 상황을 부정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진재유는 최선을 다해 지금의 일을 가능성 안에 집어넣으려고 노력한다.
그래. 그래서.
이렇게 살아야 한다면. 이게 현실이라 계속계속 이렇게 살아야 한다면. 그러니까 정말로, 정말로 영원히 백년 천년이 지나고 오만년이 지나야 어딘가에 닿을 수 있다면 그 때까지 미쳐버리지 않을 수 있을까? 버틸 수 있을까? 미쳐버린 혜성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 미치기 전에 어딘가에 닿을 수 있을까? 닿을 수는 있는 걸까?
77.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이런 생각을 할 수록 시간은 더 느리게 가는 것 같다. 진재유는 상대성 이론을 떠올린다. 그것은... 그것이 뭐였더라. 빠르게 움직이는 것은 시간이 느리게 간다는 거였나.
진재유는 조금 억울해졌다. 나는 지금 모든 것을 스쳐지나가며 말도 안 되게 빠른 속도로 우주를 통과하고 있는데. 얼마나 오래 이러고 있었는지 가늠도 되지 않는데. 어딘가에 도착했을 땐 거기 기준으로 겨우 10분이 지나있을지도 모른단 소리 아닌가. 근데 이런 계산이 가능한가. 진재유는 책을 조금 더 읽을 걸 생각한다. 좀 더 많은 걸 알았으면 혼자 생각하는 것이 조금은 더 즐거웠을지도 모른다.
진재유는 생각을 중단하고 좋아하는 노래를 머릿속으로 재생하기로 한다. Today is gonna be the day… That they're gonna throw it back to you… …이 노래가 끝나면 4분 20초가 지난 것이겠지. 이런 식으로 시간을 측정할 수도 있겠다. 딱 5분에 맞춘 노래를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떠오르질 않는다. 조금 이따가는 떠오를 수도 있으니 진재유는 기다리기로 한다. 어차피 시간은 많다.
…많은가? 인생은 생각보다 짧다. 이번 끝도 생각보다 일찍 찾아올지도 모른다. 이렇게 빠른 속도로 우주를 통과하고 있으니 어딘가에 부딪힌다는 걸 인지하기도 전에 부딪힐지도 모른다. 부딪히면서 아, 지금 내가 어딘가에 부딪히고 있구나. 그런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부딪히고 나면 끝일까? 부딪히고 나면 나는 멈출 수 있을까? 우주를 그만 통과할 수 있을까? 땅을 디딜 수 있을까? 천천히 멈춰 내가 어디에 부딪혔는지 확인하고 주변의 모든 것을 천천히 뜯어볼 수 있을까?
허나 확인이고 뭐고 그렇게 부딪히는 순간 죽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재유가 생각하기로 가장 좋은 결말은 그것이다. 진재유는 모든 것에 질렸다. 진재유는 점점 미쳐가는 혜성이 되어 우주를 통과하고 통과하고 통과한다.
78.
어디론가 가기 위한 이동이 아닌 이동을 위한 이동. 진재유는 이동 속에 갇혔다. 진재유는 제 궤도가 진공 포장 속인 것 같다고 생각한다. 이렇게까지 단절된 적이 있었나. 대학교를 다니며 잠깐 크게 휘청거려 한동안 밖에도 나가지 않고 누구와도 연락하지 않으며 살던 한 달도 이것보다는 세상과 연결되어 있었던 것 같다.
0.
진재유는 텅빈 눈으로 허공을 바라본다. 그의 눈에는 우주가 반사된다. 스쳐지나가는 막대기로만 보이는 별을 바라본다. 얼마를 달려도 똑같은 장면이 나온다. 그래도 바라본다. 바라보고 바라보다가 진재유는 어떤 사실을 깨닫는다. 막대기가 아닌 별이 하나 있었다. 시야 한가운데 놓인 딱 하나의 조그만 행성만이 유일하게 점으로 존재했다. 그건 천천히 커지고 있었다.
설마 내가 지금 저 별에 다가가고 있는건가? 다시 제대로 살펴보아도 확실히 그랬다. 진재유는 얼이 빠진 채 저 멀리 있는 행성을 마주한다. 그 순간에도 행성과 점점 가까워진다. 분명히 가까워지고 있다. 진재유는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다. 아니 끝에 다가가고 있음을, 혹은 끝이 아니더라도 반드시 중요한 분기점이 될 어떤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행성을 바라본다. 푸르고 창백했다.
푸르고 창백하다고?
진재유는 사색이 되어 행성을 뜯어본다. 행성은 살펴보기에 충분히 크다. 간간히 초록빛이나 황토빛이 비쳤지만 대부분 푸르고 흐렸다. 그 때 행성에서 무언가 작게 폭발하는 것이 보인다. 진재유의 기억이 맞다면 저것은 인류의 마지막 희망…. 개박살난 마지막 희망이었다. 진재유는 이를 악물고 궤도를 바꿔보려하지만 여태 그래왔던 것처럼 바꿀 수 없다. 가까워진다. 속절없이 가까워진다. 지구가 빠르게 커져 시야에 가득찬다. 진재유는 몸을 웅크린다. 온몸이 덜덜 떨린다. 무섭다.
언제 지구와 닿았는지 모르겠다. 아픔은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제 어깨가, 제 몸이 지구를 가르고 있음을 이해한다. 눈 앞에서 행성이 쪼개지는 광경이 드문드문 보인다. 그 뒤로 죽 굉음이 들린다. 진재유는 과학 시간에 졸면서 들었던 말을 속으로 왼다. 지각맨틀외핵내핵 지각맨틀외핵내핵…
지각 맨틀 외핵 내핵이 차례로 박살난다. 그 모든 것들을 뚫으면서도 아프거나 뜨겁지 않았다. 지구를 죽여놓고 하나도 아프지 않다니 모두에게 미안했다. 빠르게 지구를 박살낸 진재유는 몹시 느려진 속력으로 잔해를 사이를 빠져나온다. 진재유는 슬며시 눈을 뜨고 우주 쓰레기가 된 지구의 모든 것들을 마주한다. 그 사이에서 발견한다.
성준수를.
진재유는 궤도를 바꾸려 팔다리를 허우적거린다. 전과 다르게 손짓하는 대로 제 몸이 움직였다. 지옥은 끝났나보다. 이게 새로운 지옥일지도 모르지만, 지옥이고 뭐고 눈 앞엔 성준수가 있었다. 성준수와 닿을 수 있었다. 진재유는 그것만으로도 이제 어디에 있든 상관없다.
진재유는 성준수에게로 날아가 성준수의 얼굴을 살핀다. 성준수는 잠들어있다. 적어도 그렇게 보이므로 진재유는 그렇게 믿는다. 성준수를 끌어안는다. 진재유의 심장이 점점 느려진다. 그 박동으로 진재유의 끝이 다가옴을 느낀다. 마지막 말을 고르고 고른다.
준수. 준수야. 나 사실 고백할 게 있다.
내가 니를 좋아했을 때. 그니까 내 혼자 니를 좋아했을 때. 우리가 같은 유니폼을 입고 같이 살 때 그리고 다른 유니폼을 입고 같이 살 때도. 나는 매일매일… 그 숙소에서 내 자취방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이를테면 우주 같은 곳으로…. 이왕이면 지구도 아닌 곳으로. 몸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 안 하나.
그 땐 지구를 떠나면 니 생각을 안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니 옆만 아니면 될 줄 알았다. 근데 우주로 나와보니까 알겠데. 우주는 너무 광활하고, 고요하고, 정말 나 혼자 뿐이라
너무 외로워져서….
니 생각을 했어.
…후회했어.
우승하기 전에 고백 한번 해볼걸. 우승하고 나서라도 고백해볼걸. 아니면 졸업할 때라도. 아니면 대학 입학했을 때라든가 드래프트 지명됐을 때라든가… 아무튼 더 일찍 고백해볼걸. 그래서 마음 편하게 니 앞머리 한번 더 쓸어볼걸 그랬다. 내 허벅지 베고 누운 니 옆얼굴을 더 유심히 쳐다볼걸 그랬어. 수면제 같은 거 먹지 말고 잠든 너를 보면서 죽을 걸….
그래 지금 니 죽었다는 거 내도 안다. 니 등판이 피로 축축한데. 하하 근데 내도 똑같다…. 여 볼래 내 등판도 축축하제…. 내는 일어나보니까 파이프가 배에 꽂혀있데. 근데 하나도 안 아팠다. 진짜다. 내 진짜 강하제. 다음 번에는 내 강함 반절 뚝 떼서 니 줄게.
진재유는 개박살난 지구의 파편 속에서 성준수를 껴안고 눈을 감는다. 심장은 충분히 느려졌다.
내가… 다음 번에는 초코파이도 많이많이 사줄게. 뽈도 다 니 줄게. 무서워서 사랑한다는 말 아끼지 않을게. 너한테 제일 먼저 달려갈게. 니 먼저 살필게. 다음 번에는 정말로… 내가 더 잘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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