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비지타임

여우신랑뎐 中

구미호 박병찬 × 인간 진재유 1편


푸른 초목들이 가득한 산등성이 사이에는 아무도 찾지 못하는 집이 한 채 있다. 그것도 일반 주택도 아니고, 추리소설에 흔히 나올 법한 산장도 아니고, 마치 옛날 사람이 살 것 같은 한옥집이었다. 집 뒤로는 병풍 같은 산이 펼쳐져 있었고, 앞으로는 저 아래에 흐르는 계곡물이 어렴풋이 보이는 것이 그야말로 배산임수의 정형화. 딱 명당의 자리였다.

이런 자연물에 파묻힌 집 근처에는 특이하게도 길이 없었다. 자주 드나드는 길목만 좀 흙길이 날 뿐이었지, 그렇게 많이 돌아다니는 것도 아니라서 며칠 지나면 자란 풀들에 길이 곧잘 사라지곤 했다.

그것 말고도 이상하다고 느낀 건.......

"재유야, 뭐해?"

"아...."

"또 멍때리고 있었지! 나 온 줄도 모르고!"

그랬나 봐요. 여기 경치는 늘 봐도 좋아서... 재유가 얼버무리듯 운을 떼자 농담조로 타박한 그가 마루에 걸터앉았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재유의 옆구리 사이로 살랑살랑 털 뭉치가 기어들어 왔다.

"안 피곤해? 피곤할 텐데."

"...견딜 만 해요."

"견디지 말고 그냥 기대. 푹신푹신하니, 좋아하잖아."

"...아 진짜로...."

너무 양아치 같아요. 재유는 한껏 힘을 빼며 그의 어깨에 기댔다. 거절 못 하게. 푹신하면서도 윤기가 흐르는 털이 몸을 덮어오니 포근한 기분과 함께 마음이 붕 떴다. 재유 좋아하는 건 다 알지. 그가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기댄 재유의 머리통 위에 제 머리를 얹었다. 재유도 딱히 말리진 않았다. 이렇게 꼭 붙어 있는 날은 셀 수가 없을 정도로 익숙해졌다. 오히려 없는 날을 세어보는 게 더 빠를 터였다.

그러나 머리 회전이 점점 멈추는 것 같았다. 몸을 덮은 체온에 점점 나른해져만 갔다. 나 혼자 두고... 소박 맞히면 안 된다고 했잖아... 다른 생각 한 거 아니지? 점점 감기는 눈과 귀 사이로 궁시렁대는 그의 목소리가 띄엄띄엄 들린다. 그러고 보니 아까까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지... 분명······.

"행복한 꿈 꿔, 재유야."

그는 가볍게 제 수족이라도 되는 듯 꼬리로 재유를 다독이다 안았다. 품 안에 안긴 작은 인간은 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말해도 듣지 못 할 이에게 그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사랑스러운 내 아이.

여우신랑뎐

여기에서 산지는 좀 된 것 같았다. 정확하게 말할 수 없는 게, 몇 밤을 자고 났는지,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는지 도통 기억이 안 났기 때문이다. 그래도 기억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재유에게도 다른 사람처럼 으레 부모님이 있었고 더 해서 조모님도 기억하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재유가 기억하기 어려운 나이었을 때 돌아가신 지 좀 되었지만 어쨌거나 천애 고아는 아니었다.

분명 대중적인 가족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던 것은 기억한다. 대한민국의 교육과정을 차근차근 밟아왔다는 것도 기억하고 있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여기서 살고 있었다. 그리 오래 살지 않았건만 제 나이도 가물가물한 기분이 든다. 시계라곤 하늘을 벽 삼아 걸어둔 해와 달이 있고, 날짜는 피어나거나 떨어지는 꽃잎으로 파악한다. 시간의 흐름을 알아차리기엔 현대인인 재유에게는 모든 게 다 어색하고 느렸다. 그래도 조금 익숙해져서 최근에는 바람으로 일기 예보를 맞추는 게 큰 관심사다. 물론 정답률이 좋지 않긴 하지만 말이다.

"자자, 오늘도 틀렸지? 이리 대."

따닥! 앞머리에 가려진 이마를 시원하게 까자 화끈한 통증이 미간부터 시작해서 퍼졌다. 진재유는 억울했다. 분명 어제는 결과를 바꿨단 말이다! 억울한 눈빛으로 딱밤을 때린 이를 보니 뭐가 신나는지 싱글벙글 웃으면서 또 하자며 내일 일기를 점치고 있다. 야속한 마음에 재유는 그를 타박했다.

"이럴려고 어제 바꾸라고 부추겼죠?"

"무슨 소리야~ 바꾼 건 너잖아~"

"어제는 먼저 골랐잖아요. 맨날 나만 틀리니까··· 바꾸게."

거의 매일 같이 틀리는 일기 예보에 어제는 그가 먼저 고른 일기로 바꿨다. 그리고 이렇게 쨍쨍한 하루가 시작 되었다... 바꾸지 말 걸. 이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상하게도 내기를 하지 않으면 정답률이 좀 괜찮은데 꼭 내기만 하면 죄다 틀리는 것이었다.

"말해 봐요. 그 요상한 신통력 같은 걸로 막, 막 이렇게 날씨 바꾸고 그런 거죠?"

"······."

"···진짜예요?"

"아니지, 재유야. 내가 언제 거짓말 한 적 있어?"

그렇기엔 꼬리가 가만있질 않는데요. 푸닥푸닥 가만히 있질 못하고 여기저기 휘날리는 꼬리는 마치 고양이의 꼬리가 펑 터진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당황한 기색을 조금이라도 티 내고 싶지 않아 보였지만 표정만 그러할 뿐, 몸은 솔직했다. 사소한 건 넘기자구~ 그가 재유의 몸을 돌려 뒤에 자리하곤 재유를 밀며 마당으로 끌고 나왔다. 날씨 좋잖아? 놀러 가야지! 해맑게 웃는 것도 그 요상한 신통력 중 하나에 해당할 거다. 항상 보면 너그럽게 넘어가는 자신만이 남을 뿐이었으니까. 기억 저편에서 학교 반 친구 중 여자애가 아이돌을 보면서 한 소리가 스치듯 지나갔다...

'알았어? 얼굴이 복지라고! 얼굴이!!!'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야 이해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이제는 정말로 상관 없어졌다. 아무렴 뭐 어떠한지. 내기는 내리 지지만 아쉬울 건 하나도 없었다. 그와 함께 있는 건 늘 행복했다. 어느 전래동화 속 이야기같이 고난 끝에 봄이 오는 것처럼 말이다.


박병찬.

그 ■■은 자신을 박병찬이라 소개했다. 이것 또한 어렴풋이 지난 날의 기억. 정정하자, ■ㅁ이 아니지. 신령님이라고 하는 게 더 맞는 표현일지도 모른다. 병찬 님···, 병찬 씨···. 신령님은 자신을 형이라고 부르라고 했다. 병찬이 형? 이상하게도 저는 병찬이 형을 부를 때는 햄이라는 단어가 입에 붙질 않았다. 김해에서 서울로 전학 와 부모님의 말씨를 배운 저는 다른 사람에게는 햄을 참 잘 썼으나 유독 그에게만은 어려웠다. 병찬 형, 병찬 햄······. 특히나 이름과 같이 부르면 낯간지러운 느낌이 가득한데, 형은 애정을 담아서 불러달라고 요구했다.

그런 부끄러운 요구에도 자신은 못한다며 거부하질 않았다. 그냥 처음부터 그가 좋았다. 첫눈에 사랑에 빠진 소녀 같은 호감이라기보다 친한 이나 가족에게 느끼는 애정이었다. 초면이라면 보통은 그리 친밀한 감정을 느낄 수가 없었을 텐데 희한하게도 그에게 느끼는 감정은 거짓이 아니었다.

"정했어?"

병찬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그의 어깻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집에서 좀 떨어진 곳 중에서는 특이하게도 나무 말고 억새풀이 가득한 초원이 있다. 여기서 길을 잃어버렸던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익숙해져서 눈 감고도 다닐 정도였다. 웬만한 주변을 메운 들판에서 보는 풍경은 가을인지는 모르겠으나 하늘은 높았고, 더위를 한껏 먹은 바람이 아닌 시원함을 몰고 온 바람이 제가 가을이란 티를 내는 것만 같아 가을이라 칭했다. 그 가을바람을 타고 억새풀은 신나게 앞뒤로 응원하듯 물결쳤다. 제 고향의 낙동강에서 볼 법했던 물살을, 진재유는 물이라곤 아래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계곡 외에는 없는 메마른 산에서 본다. 황토색의 잔물결은 텁텁하단 느낌보다는 풍년의 느낌을 주었다.

"비가 올 것 같아요."

"바람이 불어서?"

"일단은요. 세게 안 불어서 내일도 맑을 것 같지만."

"그럼 바꾸면 되잖아?"

병찬은 이해가 잘 안된다는 식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재유는 드물게 까칠거리는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골라도 바꿀 거잖아요. 무슨 소리야~ 재유야! 내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한껏 당황한 병찬이 변명을 늘어놓았으나 팔짱을 낀 채로 꼼짝하지 않는 재유의 반응에 바로 꼬리를 말았다. 이내 미안하다고 재유를 뒤에서 끌어안아 한품에 안으며 매달렸다.

그냥, 난 장난 좀 칠려구...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바로 뒤에서 흘려왔다. 이런 거에 한 두 번 넘어가나. 이미 수십 번 넘어갔고, 이번에도 별 다를 바가 없었다. 이미 이렇게 같이 나와서 좋았고 애초에 화는 나지도 않았다. 하지만 입을 열면 바로 풀린 것 같으니 최대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자 더 끙끙대며 저를 꼭 붙들어놓곤 놔주질 않았다. 그에 진재유는 알았다며 병찬의 손등을 툭툭 쳤다. 재유 어깨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병찬이 슬그머니 들어 보였다. 그새 운 건지 눈가가 촉촉하다.

"장난이 뭐 맨날 잠도 안 재우고 그래요?"

그 말을 들은 병찬의 얼굴이 금새 저녁 노을처럼 푹 익어버렸다. 그는 당황한 채로 말을 그대로 절었다. 힘, 힘들었어? 미안해. 그래도 오늘은 틀렸으니까··· 오늘은 하구... 내일은 내가 진짜 안 바꿀게. 약속! 그동안 날씨를 제멋대로 바꾼 건 고사하고, 죽어도 안 한다는 소리는 안 하는 게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꼬롬하게 다시금 올라오는 성에 핀잔 좀 주려 했으나 형을 보자 이내 또 잠잠해진다. 이것도 중증이야. 어디서 이런 여우한테 홀려가지곤.

"아, 몰라요."

"알았어, 미안해. 재유야."

"무조건 내일 비가 올 거예요."

"응, 내일은 비가 올 거야."

"아니, 내일은 비가 와야 한다고요."

"응. 내일은 꼭 비가 올 거야."

두 번이나 말했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걸 보면 그렇게 요물도 아니다. 꼬리도 여럿 달려선 요물 중에 요물로 구미호인 줄 알았건만. 이렇게 보니 도통 속세에 찌들지 않은 신령님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아니면 굳이 이걸 제 입으로 듣고 싶은 건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건 그것대로 요물이 맞는 것 같기도 했다. 재유는 몸을 아예 돌려 병찬을 마주 보았다.

"바람이 세게 안 불어요."

"응, 시원한 바람이지."

"형은 내일 날씨 어떨 것 같아요?"

"나는······ 어, 내 꺼랑 바꿀래? 난 맑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

병찬이 날씨를 바꾸는 것보다 선택지를 바꾸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는지 제 선택을 권유했다. 재유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못을 박았다.

"전 비가 올 것 같아요. 그니까, ······싫은 게 아니라구요."

"······에?"

"···계속 그러면 저 바꿀래요."

재유는 그 말을 끝으로 병찬을 벗어나 혼자 뚜벅뚜벅 되돌아갔다. 그제야 모든 걸 알았다는 듯이 정신 차린 병찬이 헐레벌떡 재유 뒤를 쫓았다. 

재유야! 길 잃어버려! 나랑 같이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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