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비지타임

해후 上

PITA BREAD by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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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인생이라는 게 큰 줄기에서 보면 생각보다 단순하다. 태어나고, 자라고, 고통받고, 고민하고, 극복하고, 사귀고, 헤어지고, 종내엔 죽는다. 굴곡의 크기와 원인만 다를 뿐. 이겨내면 되는 거고, 못 하면 죽는 거지. 제법 늙은이 같은 생각을 하며 눈앞의 (나이 대비) 키만 멀거니 큰 놈을 쳐다본다.

"에이 씨......."갑자기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야 뻔했다. 이번에도 전영중이 서 있었다. 얼빵한 표정으로, 다짜고짜 욕을 하는 제 눈치를 보며.

 

 

 

 

 

농구는 재밌어? 엄마가 물으면 영중은 곧잘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재밌어! 준수도 생각보다 착하고. 나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래. 그냥, 놀라서 그런 거였대.

처음에는 정말 싫어하는 줄 알았다. 그야 준수는 첫 만남에 눈을 마주치자마자 다짜고짜 욕했으니까. 코치님들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다른 애들도 아니고 똑바로 내 쪽을 보며. 씨이발. 그때는 뭐, 왜 욕하냐고 물어보거나 싸울 생각도 못 하고 조용히 눈만 깔았다. 제법 사나운 인상에 덩치는 자기만큼 큰 애가 어디 흔했나.

망한 첫 만남 치고 준수와는 금방 친해졌다. 원래 애들은 같이 피시방 몇 번 가고, 좋아하는 농구선수 영상 돌려보고, 운동장에서 구르면서 친해지는 법이다. 그즈음 준수는 입이 조금 험한 좋은 친구가 되었다.

에이 씨이발. 단거리 달리기를 하다 넘어진 날이었다. 화려하게 구르는 모습에 준수는 달리다 말고 돌아와 손을 내밀었다. 쪽팔리고, 아프기도 하고. 손을 잡고 일어나면서 내뱉은 말에 준수는 처음 보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앵무새에게 욕을 가르친 주인 같은 반응이었다.

너는 그런 말 쓰지 마라. 자기도 초등학생인 주제에 어른같이 말하는 게 웃겨 한참을 웃었다. 씨발. 쓰든가 말든가. 금세 얼굴이 빨개져 가버리는 준수의 뒤를 따라갔다. 안 쓸게. 같이 가.

하긴, 준수가 애답지 굴지 않은 게 한두 번이었나. 첫 연습경기에서 마지막 슛을 쏠 기회가 주어졌을 때, 무서워서 엉엉 우는 내 손을 꼭 잡더니 준수가 손을 들었다.

제가 던질게요. 저 잘할 수 있어요!

그전까지는 관심 없다는 듯 뒤에 있었으면서. 내가 할 테니까 울지마, 멍청아. 뭐가 무섭다고. 위로인지 뭔지, 주먹으로 어깨를 퍽 치고. 그리고 제 손에 볼이 돌아왔을 때 준수는 망설임 없이 공을 던졌다. 퉁. 백보드를 튕긴 공이 림 안으로 쏙 들어간다. 시합 종료를 알리는 버저가 울린다. 우와아아아아악!

와아아아악! 봤냐, 전영중!

와악! 와아아아악!

아닌가. 평범한 어린애 같았나. 달려와 제게 올라타 소리 지르는 준수를 꽉 끌어안았다. 우와아! 와아아아아악!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이상하게 하나도 무겁지 않았다. 머리 하나는 위에 있는 준수가 밀러만큼, 맥그레이디만큼 멋있어 보였다.

근데 준수한테 무섭다고 말한 적 있던가?

 

 

 

"니가 질질 짜는 이유가 그것밖에 더 있어?"

"내가 언제 또 울었다고? 많이 본 것처럼 말하네?"

"왜 없냐? 아파트 현관 전등 나가서 컴컴하다고 엘리베이터 못 타겠다며 울었지, 중학교 배정 때도 울었지. 우리는 연계 학교로 같이 갈 거라 말했는데도."

 

니 설마 고등학교 배정 때도 우나 했다. 준수는 그렇게 말하며 바밤바를 깨물었다.

 

"준수는 나한테 관심이 많은가 봐? 그런 걸 다 기억하네?"

"덩치는 산만한 게 매달려 우는데 그럼 기억에 안 남아?"

 

줄줄 읊는 말에 열이 올랐다. 하여간 한 마디도 안 지지. 에이 씨바. 여름은 갈수록 더워지냐. 개 같은 온난화. 성준수는 그 화제에 질렸는지 영감님처럼 투덜거렸다. 빠삐코를 입에 물고 아이스박스의 얼음을 한 움큼 잡아 영감님의 뒷덜미 안쪽에 와르르 쏟아버린다. "아, 차! 씨바! 개새끼야!" 벌떡 일어나는 준수를 피해 달린다. 와하하! 재밌다! 반쯤 먹은 빠삐코가 얼굴을 때렸다.

그래도 준수가 자신을 버리고 간 적은 없었다. 어휴, 씨바 거. 하고 욕 한번 하고는 눈 감은 자기 손을 잡아끌어 엘리베이터에 태워 올려보내 줬다. 나 혼자 다른 학교 가면 어떡하냐고 우는 내내 옆에 앉아 그칠 때까지 등을 토닥였다. 병신아, 다 같이 기내중 간다고! 특기생 연계라고 몇 번을 말하냐고! 다정한 손길에 그렇지 못한 말투였다.

그런 점이 멋있었다. 막연한 불안감에 울어버리던 자신과 달리 준수는 덤덤히 문제를 풀었다. 어둠이 무서우면 눈을 감고 밝은 곳까지 인도해준다. 안심할 때까지 옆에 있어 준다. 넌 무서운 게 없냐는 물음에 준수는 뭐어, 하고 말꼬리를 끌었다.

있어도 어쩌겠어. 무서워만 해 봤자 아무것도 안 변하는데.

그렇게 말하는 준수는 진짜, 엄청, 대박 멋있었다. 기억해뒀다 엄마에게 똑같이 말했더니 자지러지게 웃으셨다. 우리 영중이, 준수랑 다니더니 애늙은이가 다 됐네! 그래서 두 번 다시 그런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그냥 영중이고, 쟤는 애늙은이 성준수니까. 무서운 일이 있으면 그냥 애늙은이 준수한테 의지해야지, 하며.

 

 

 

전학 가는 게 어떠냐는 말에 준수 쪽을 쳐다본 건 그래서였다. 잘하는 애들이 신입생으로 워낙 많이 들어와서 너희가 3학년이 되어도 출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5년이 넘는 기간, 학교라는 말은 농구로 대체할 수 있었는데 그 시간이 부정당했다. 다들 조용히 시선을 내리는 와중에 준수만은 똑바로 코치님들을 보고 있었다.

 

"어떡할 거야?"

 

몰라. 이제 뭐 하지? 무책임한 대답.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체념 섞인 포기.

 

"어디 가는 게 좋을지 알아봐야지 뭐."

 

준수는 수긍이었다. 그러게 왜 신입생을 많이 받아서, 그런 말로 한 번쯤은 코치님을 욕할 줄 알았는데 그러지도 않았다. 다들 담담하게 답을 내놨다.

 

"어디 가든지 똑같아. 나는 여기서 살아남을 거야."

 

가시 같은 말들이 가슴에 박히고 눈을 가렸다. 불 꺼진 아파트 현관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목표는 분명한데 잘 알고 있던 길이 사라졌다. 눈물이 났다. 준수 말대로 나는 겁쟁이였다. 눈을 감고 언제나처럼 준수가 손을 잡아주길 기다렸다.

 

"그래. 영중이 너는 손발도 크니까 더 클 거야. 잘 해봐."

 

같이 전학 갈 학교를 알아보자거나 네가 남으면 나도 남겠다는 말이 아니었다. 산뜻한 작별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농구 명문고를 두고 어디에서 어떻게 운동하게? 잘 될 자신은 있어? 나는 여기에 두고? 준수 너 혼자만? 와르르 쏟아져 나오려는 말 중 입 밖으로 튀어나온 건 제일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였다.

 

"손발이 큰 거랑 덩치가 무슨 상관인데?"

"원래 강아지는 손발이 두툼해야 덩치가 커지거든?"

"준수, 내가 개야?"

"개새끼 소리는 많이 들었지?"

 

그러니까 그만 짜, 개새끼야. 뒷모습만 보였을 텐데 어떻게 알았는지 정강이로 등을 찼다. 안 울었어. 그러시겠지. 들어오기 전에 세수나 해라. 기숙사 문이 닫히고 나서야 옷깃으로 눈물을 눌러 닦았다.

준수는 더 이상 내 손을 잡아주지 않는구나.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은 채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가만히 서서 불이 들어오기를. 아침이 오기를. 그랬더니 정말로 길이 밝아졌다. 성장이 끝날 시기인데도 키가 4센치나 커지고 운동신경은 더 좋아졌다. 2학년부터 조금씩 경기에 들어가다 3학년이 되어서는 주전으로 뛸 수 있었다.

그동안 준수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전학 후 1년간은 출전 금지여서가 아니라 지상고 자체를 경기장에서 보지 못했다. 8강에는 올라오지도 못하는 팀. 조별 예선에서나 만날 수 있는 팀.

성준수는 그런 학교로 전학 갔다.

그게 제일 확률 높은 슈팅이라고 했으면서. 계산을 잘못했나보다, 준수야. 아니면 네 슈팅 성공률이 떨어졌거나. 출전 금지가 풀리고 마침내 지상고와 조별 예선에서 만났을 때 가슴 속 울렁거림은 커졌다.

고작 그딴 학교에 가려고. 스크린 하나 제대로 못 걸어주는 초보자들이랑 아등바등하는 게 네가 낸 최선의 결론이라서. 여전히 떨어지는 운동능력으로 볼 한 번이라도 더 집어넣으려 애쓰는 네가…

네가.......

 

 

 

 

 

"준수 학식이 입에 안 맞아? 갈수록 힘을 못 쓰네. 오늘 슛 한 번도 못 하면 어떡하지?"

"좆 까는 소리 말고 경기에 집중해."

 

3쿼터에서야 겨우 출전한 준수는 너무 가벼웠다. 미는 대로 밀리고, 구석에 틀어박혔다. 이, 씨바거, 밀리지도, 않네, 뭘, 얼마나, 처먹어서, 아,

 

"꺼져봐!"

"꺼지라고 꺼지면 내가 선수야? 촛불이지. 10초 남았다. 8, 7......."

"씨발, 진짜. 형, 여기!"

 

갈 곳 잃은 볼을 눈으로 좇더니 기어이 틈을 비집고 나와서는 공을 받고 두 손으로 꽉 누른다. 4, 3. 폭탄 처리법이야 뻔하지. 스텝백 점퍼. 아니면 페이드어웨이. 2, 1. 역시나 뒤로 점프하며 손을 드는 그에게 향해 손가락 끝까지 쭉 펼친다. 빙글. 민첩하게 몸을 돌려 한 걸음 옆에서 다시 슛. 철썩. 샷클락 0초. 3점이 더해진다. 나이스 성준수! 소리 지르는 팀원들에게 손가락 세 개로 경례한다.

 

"집중 안 하면 끝날 때까지 쳐맞는다?"

"딥쓰리 한번 했다고 내 걱정 해주는 거야?

"씨, 별......."

 

준수는 제대로 대꾸하지도 않고 제가 맡은 9번에게 달려갔다. 순식간에 준수는 지워졌다. 저를 막는 23번과 몸싸움. 백코트. 31번 컨테스트. 몸싸움. 스틸. 관성을 이기지 못하고 성준수가 나가떨어져도 몸은 공을 향해 달린다. 2점을 얻어내고 백코트 하는 삼두가 벌겠다. 아까 넘어지면서 쓸렸나 보다. 공이 돈다. 패스가 잘리고 속공. 가까스로 13번이 슛을 쳐낸다. 코트를 질주하자 멀리서 공이 날아온다. 영중아! 그대로 뛰어 온몸으로 림을 들이박는다. 쾅! 부서질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숨소리가 너무 컸다. 바닥에 내려서자 시리도록 까만 눈이 날 흘기며 공을 받는다.

준수는 한 쿼터 동안 11점을 넣고 다시 벤치에 앉았다. 경기 하나를 다 뛴 것처럼 땀을 흘렸다. 그날따라 득점은 지지부진했고, 느리게 추격하던 우리는 결국 5점 차로 졌다.

 

"내가 집중하랬지?"

 

의자에 앉을 기운도 없어 바닥에 누워있는데 배 위로 묵직한 것이 튕겼다. 억. 몸을 웅크리자 머리 위에서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준수야. 언제 편입했어? 하도 잔소리해서 우리 팀인 줄 알았잖아."

"지랄. 우리 팀이었으면 쌍욕 했어."

"이미 많이 들은 거 같은데."

 

더듬거리며 바닥을 짚으니 얼음장같이 차가운 페트병이 만져졌다. 상체만 들고 파워에이드를 따 단번에 반을 들이켰다.

 

"나 파란색 음료 싫어해."

"반이나 처마시고 무슨 소리야. 그럼 뱉든가."

 

무슨 그런 소릴. 손 뻗는 게 보여 뺏길세라 남은 음료를 털어 마셨다. 이게 사람 새끼야, 하마 새끼야. 텅 비어버린 600밀리 페트병을 건네자 준수가 손을 쳐냈다.

 

"니가 정신만 차렸어도 이길 게임이었어."

"성 코치님, 저 집중 잘했어요. 오늘 컨디션도 좋았고. 그냥 그 이상으로 네가 잘...... 운이 좋았던 거지."

"무슨. 니 눈깔 굴리는 소리가 주차장까지 들리겠던데."

 

파워에이드가 몸속에서 울렁이는 느낌이었다. 몸을 일으켜 앉고 준수를 올려다본다.

 

"준수야. 이제 우리 같이 운동한 시간보다 따로 운동한 시간이 더 길어. 벤치에서 계속 나 쳐다보느라 가깝게 느껴지나 본데, 습관이나 루틴도 다 바뀐 지 오래야. 날 얼마나 잘 안다고?"

 

누구에게 말하지 못하고 혼자 세어보던 시간이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고등학교 1학년까지. 그때부터 대학교 4년. 계산도 없이 튀어 나간 소리에 준수가 꼬투리 잡을까 두근거렸다. 넌 징그럽게 그런 걸 계산했냐고 하면 어쩌지?

 

"전영중 대가리에 든 거 바뀌냐? 니 생각이야 뻔하지. 어깨 멀쩡하고, 근육통도 없어. 피부만 좀 쓸렸는데 냉찜질 해줬더니 안 아파. 후시딘 바를 필요도 없을 거다."

 

그러니까 집중하랬잖아, 병신아. 내 어깨 쳐다보느라 놓친 게 몇 개야? 준수는 부어오른 어깨를 붕붕 휘둘렀다. 알았으면 라커룸으로 꺼져. 1부 끄트머리 대학에 처발린 새끼야. 빈 파워에이드 병을 집어 들고 등을 퍽 친다.

"우리 처음 만났을 때 왜 나한테 욕했어?"

"뭐?"

"초등학교 때. 코치님이 우리 인사시키고 피시방 데려가 준 날 말이야."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이지. 맥락 없이 한 말은 아닌데, 정말 뇌를 거치지 않고 튀어 나간 소리였다. 준수와 운동을 시작한 초등학교 4학년, 준수의 자리에서 보았던 티맥타임 영상, 그리고 처음 만났을 때. 흘러간 생각이 문득 해묵은 의문을 뱉었다. "그게 뭔? 갑자기 그걸? 여기서? 아니 근데?" 준수가 더듬거리며, 어, 당황했다.

 

"내가 언제 욕했어?"

"했잖아. 나 보고 '에이 씨이발.' 하고."

"에이 씨였어! 씨발, 욕 안 했거든?"

 

얘는 왜 그걸 기억하지? 이번엔 내가 당황할 차례였다. 진짜 안 했다고. 게다가 두 번이나 부정했다. 어. 알았어. 떨떠름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서, 왜 한 건데?"

"안 했다니까."

"씨든 씨발이든 어쨌든 욕...... 짜증냈잖아. 내가 뭐 화나게 한 거 있었어?"

"아니, 하....... 그냥 너 보고 놀라서 그랬어."

"뭐가?"

 

초면에 놀랄 일이 뭐 있다고. 묻는 말에 준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죽어도 대답해 줄 생각이 없다는 태도다. 그러더니 휙 가버린다. 준수야, 잘 가. 인사에 가운데 손가락만 들어 보였다.

오래된 의문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작은 의문을 얹었다. 왜 당황했냐고 다음에 만나면 물어봐야지. 귀찮다고 질색하며 돌아다닐 준수를 생각하면 벌써 재밌었다.

 

 

 

원래도 개인적인 연락은 잘 안 하던 사이다. 경기장에서 만나면, 같은 팀이 되면. 차일피일 미루던 장난 위로 다시 십 년의 세월이 쌓였다.

서른둘. 선수 생활의 막바지에 감액 계약. 굴욕적 이적. 그런 뉴스가 나간 바로 다음 날 성준수는 태연한 얼굴로 캐리어를 끌고 숙소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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