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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뭐가 없었다. 뭐가 없는 연유로 유일한 분께서 미감을 발휘하여 이것저것 만드셨다. 아들딸이며 날아다니는 것들도 만들고, 날지 못하는 것도 만들었고, 컨펌받을 필요 없으니 취향대로 많이도 만드셨다. 다만 유일한 분께서는 그 무렵엔 꽤나 컨트롤 프릭이라, 제 말을 따르지 않는 것들 불구덩이로 내치고, 낙원에서 쫓아내기도 했다. 개중에 불지옥에 떨어진 게
쫄딱 젖은 모양새로 나타난 둘에 성준수는 사정없이 얼굴을 구겼다. "다 큰 새끼들이 물장난하고 자빠졌냐?" "아니 임마가......." 뭐라 변명하기도 전에 성준수는 대충 손을 더듬어 잡히는 대로 천 쪼가리를 던졌다. 퍽퍽퍽 정확히 가슴에 하나씩 명중하는 것들을 들춰보니 딱 수건, 상의, 하의, 속옷의 조합이었다. 비록 색과 스타일이 자유분방했지만. 흘
"언제 복귀라고?" "내일." 시큰둥하게 대답하며 수플레 팬케이크에 나이프를 갖다 댄다. 퉁명스러운 대답과 달리 정성스러운 손짓이었다. 먹기 좋게 자른 조각에 무화과를 올리고 포크를 내민다. "내가 손이 없나 발이 없나." 그러면서도 조막만 한 입을 벌려 받아먹는 게 좋았다. "맛있나." "응. 맛있네." "담에 집에서 해줄까?" "얼마나 자주 먹는다고
24.04.20 디페스타 발행 「손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희 한국항공은 여러분의 탑승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이 비행기는 샌프란시스코까지 가는 KR431편입니다. 목적지인 샌프란시스코까지 예정된 비행시간은…….」 전영중의 기분은 가히 최고였다. 공항 수속부터 출국심사까지 막힘없는 VIP 의전 서비스. 아늑하고 프라이빗한 분위기의 라운지. 칸막이
24.07.28 제9회 대운동회 발행 오컬트물 트윈지 첫 번째 이야기: 연緣(링크) | 김수박 두 번째 이야기: 귀향歸鄕 | 22 내가 예전에 땅을 하나 샀는데 말이야. 남자의 의뢰는 그런 말로 시작됐다. 그게 문중 땅이었거든? 문중도 아니긴 해. 원래는 어디 좋은 양반가였다는데, 거기 엮인 사람들이 옛날에 싹 죽고 제정신 아닌 노인 하나
이혼 사유 1위, 성격이 안 맞아서. 그 한마디에 기저에 깔린 좆같음을 읽어낸 이들은 누구나 고개를 끄덕였다. 나고 자란 게 다른 완전한 타인끼리 어떻게 쿵 하면 탁 하고 성격이 맞을까. 맞추면서 사는 거지. 성격이 안 맞다는 건 그거다. 저 새끼의 좆같음이 차곡히 적립돼 돌아보니 도저히 참고 살아주지 못 하겠다는 거지. 그리고 연인의 결별 사유 1위, 성
돛님의 <마법소년 탈출조건> 제목 패러디. 내용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정말로) 허락은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내용일 줄은 몰랐겠지! DO NOT BLOCK ME 우리가 사는 지구를 제1지구라 가정하고, 그들이 사는 곳을 제3지구라 명명해 보자. 둘 사이에 어느 정도 간극이 있냐 하면, 제1지구 1호선에서 취객과 스님이 철권을 할 때 제3지구
23.02.23 포타온 <4랑말고 3점슛 1개 더> 참가 강남 어느 학구열 높은 학군에는 고공으로 치솟는 땅값에 연간 몇 번이나 매각하라는 수많은 로비에도 불구하고 100년여 남짓한 세월 동안 꿋꿋이 자리를 지킨 사단법인 원중의 사립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기내초, 기내중, 원중여고와 남고로 이어지는 일명 원중학원. 100% 기숙사제로 정치인, 연예인을
성준수가 전영중을 잘 아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전영중은 제가 6학년 때 농구를 시작했고, 중3일 때 기내중에 입학했고, 고3일 때...... 부산에 내려와 지랄했다. 형 왜 전학 갔어요? 당연히 원중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자랑스럽게 빨간색 저지를 입고 찾아온 새끼가 축축하게 젖은 눈으로 저를 꼬나보며 하는 소리에 성준수는 뭐, 코웃음이나 쳤다.
* 고어 표현 주의 살갗이 찢기는 소리가 들렸다. 독에 마비된 듯 옴짝할 수 없는 몸과 그럼에도 구속하듯 짓누르는 무게가 기껍다. 제 위에 올라탄 짐승을 안아주고 싶은데 손끝조차 의지대로 되지 않았다. 더 깊이 이빨을 박아넣도록 상체를 안아 올린다. 전영중은 멍한 눈으로 제 생명이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갈급하게 움직이는 목울대 아래로 맞닿은 두 개의
시즌 시작 전 마지막 휴식을 즐기고 첫 훈련에 참여한 성준수의 모습이 처참했다. 턱에 커다랗게 거즈를 붙이고 오른팔은 손부터 팔꿈치 직전까지 퍼렇게 멍이 들어 한가운데에 붕대를 감았다. 미리 연락받은 스태프진은 이마만 짚었고, 들은 바 없는 선수들이 우르르 입구로 몰려들었다. 가장 먼저 달려간 건 전영중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는 듯 뭐라 묻기도 전에 빠져나
서른두 살의 크리스마스였다. 서양 명절이니 아침 식사는 계란 토스트에 의성마늘소세지, 찐감자, 땅콩으로 해결하고 (전영중은 K-브랙퍼스트라고 주장했다) 후식으로 매실차를 나눠마셨다. 습관대로 NBA 경기 채널로 착실히 움직이는 손아귀에서 리모컨을 뺏어 영국 마법사들의 이야기를 1편부터 튼다. 매년 보는 거 안 질리냐? 차라리 나 홀로 집에를 틀어. 준수 고
먼저 씻고 나온 전영중이 침대에 걸터앉았다. 제 원나잇 파트너는 씻으러 들어갔고, 좁은 모텔은 침대 외에 마땅히 앉아 머리 말릴 공간이 부족했다. 드라이기를 베드 테이블 밑 콘센트에 끼우려 큰 몸을 납작하게 접자 무게가 쏠린 메트리스에 구슬 몇 알이 도르르 굴러왔다. 크고 작은 은색 구슬들이 제게 쏟아지는 걸 보고 처음엔 은단인가? 생각했다. 싸구려 모텔이
23.09.29-30 빵준카페 '좋아해줘' 무료배포 어느 날 세계가 뒤집혔다. 2D와 3D, 혹은 현실과 판타지 차원을 넘나드는 그 세계가 아니라 월드와이드, 실존하는 현재의 전 세계가. 고작 숫자 7개에. 사람의 몸에 떠오른 167:59:59의 숫자는 명백한 7일의 유예였다. 숫자 위치는 모두 달랐고, 기계로 찍은 듯 반듯할 때도, 자다 쓴 것처럼
코팅이 벗겨진 야구방망이에서는 쇠 비린내가 났다. 킁. 잠깐 잡았다고 그새 손바닥에는 본능적인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냄새가 스몄다. 가방에서 청테이프를 꺼내려다 도로 집어넣는다. 문명이 무너진 시대에는 다 갈라진 청테이프 하나도 아쉬웠다. 길가에 무성히 자란 넝쿨을 잡아당기고 이파리를 정리해 칼등으로 쳐 짓이긴다. 시팔. 바빠 죽겠는데 이게 맞나. 대강 섬
졸던 사이에 많은 일이 있던 모양이다. 네 사람이 적당한 거리에서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 인원이 이야기하는데 전혀 모르고 잠만 잤다고? 전영중의 꼬장이 어지간히 피곤했나. 한 시간도 안 잔 것 같은데 이야기의 진척이 3시간은 훌쩍 넘긴 수준이었다. "저희 캠프에 전영중 씨 같은 사람들이 몇 있거든요. 비슷한 친구들이 있으니 지내기 나쁘지 않을 거예요.
23.12.02 빵준온 발행 일련번호: SCP-0031 등급: 안전(Safe) 특수격리절차: SCP-0031은 제 ■■기지 일반생활구역 내 표준규격에 준하는 설비가 갖춰진 1실을 제공하고 항상 장갑을 착용한 상태로 자유롭게 활동한다. 2등급 이상의 직원과 접촉 가능하고 담당 연구자 1인을 설정하여 관리하나 지나친 애착관계 형성을 방지하기 위해 1년
23.12.02 빵준온 발행 전영중의 생각에 자신의 인생은 꽤나 평탄했다. 운동계고 경기에 나가는 걸 제외하면—모든 경기에 자신만의 하이라이트를 말하느라 며칠이고 밤을 지새울 수 있지만 일단은— 자소서를 적을 때 인생 역경과 극복 방법 같은 어필할 무언가가 없었다. 갓 스물밖에 안 된 녀석이 남에게 말해줄 만한 인생 역경이 있으면 그것도 큰일 아니
전편: https://pnxl.me/za5yrx 대학 생활은 고등학교 때와 또 달랐다. 엉덩이 붙이면 자고 일어나면 공 튀기던 때와 달리 수업은 실전이고 시험은 심판이다. 그렇다고 본업인 농구까지 놓칠 수는 없기에 머리 깨지게 공부하고 몸이 박살 나도록 운동해야 했다. 그리고 집에 가면 꿀잠자느냐? 당연히 아니다. 갓 성인이 된 그들은 성인의 특권을
"오늘도 그 햄 만나겠지?" "준무새?" "응." "안 만났음 좋겠다. 배탈 나서 화장실에 처박혔으면." "하 씨, 그 자판기는 왜 맨날 가만있질 못하고 지랄이고." "좋아해서 그러는 거 아님?" "니는 말이 되는 소릴 해라! 그 햄 준무새 될 때면 눈깔부터 돌아있는데." 저들끼리 수군거린다고 목소리를 낮췄나 본데 다 들렸다. 벌써부터 관자놀이에 핏줄이
채널을 돌리자 은색 냄비 안에서 자글자글 갈비찜이 끓는다. 맛있겠네. 짧은 감상을 남기고 채널 버튼을 하나 더 아래로. 이번엔 광활한 바다에서 낚시가 한창이다. 한번도 해 본 적 없어서 재밌으려나 모르겠다. 또 아래로 옮기자 이번엔 바지다. 홈쇼핑 바지는 사서 길이가 맞은 적이 없다. 하나 더 아래로. 이번엔 카메라가 분주히 시장 골목을 헤치고 나아간다.
한바탕 뛰고 오자 파르스름한 새벽빛이 내려앉았다. 일주일 전만 해도 꽤 밝았는데 아직 새벽이다. 하루가 다르게 낮이 짧아진다. 나이 먹으면 시간 가는 게 빠르게 느껴진다더니 그런 건가? 근데 오늘도 나 혼자잖아? 요즘 애들은 기초체력 훈련을 너무 안 해. 팀의 고참 라인에 들어가게 되고부터 제법 꼰대 같은 생각도 한다. 샤워하고 일등으로 밥 먹어야지. 콧노
사람의 인생이라는 게 큰 줄기에서 보면 생각보다 단순하다. 태어나고, 자라고, 고통받고, 고민하고, 극복하고, 사귀고, 헤어지고, 종내엔 죽는다. 굴곡의 크기와 원인만 다를 뿐. 이겨내면 되는 거고, 못 하면 죽는 거지. 제법 늙은이 같은 생각을 하며 눈앞의 (나이 대비) 키만 멀거니 큰 놈을 쳐다본다. "에이 씨......."갑자기 이런 생각을 하게 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