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비지타임

악마는 락앤롤하지 않는다

악마천사

PITA BREAD by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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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뭐가 없었다.

뭐가 없는 연유로 유일한 분께서 미감을 발휘하여 이것저것 만드셨다. 아들딸이며 날아다니는 것들도 만들고, 날지 못하는 것도 만들었고, 컨펌받을 필요 없으니 취향대로 많이도 만드셨다. 다만 유일한 분께서는 그 무렵엔 꽤나 컨트롤 프릭이라, 제 말을 따르지 않는 것들 불구덩이로 내치고, 낙원에서 쫓아내기도 했다.

개중에 불지옥에 떨어진 게 전영중이었다. 정확히는, 직접 떨어진 건 아니고 떨어진 것들끼리 방탕하고 방종하게 기쁨을 나누다 보니 생겨난 사랑의 결실이었을 뿐이다. 그렇게 전영중은 지옥 태생으로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탄, 악마, 시련, 유혹 등 제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더랬다.

첫 세대는 아니나 창세를 막 마친 무렵 태어난 탓에 전영중은 오래도 살았다. 현대로 치면 영업사원 노릇을 하며 지옥을 비옥게 할 인간들을 수없이 유혹하고 왜 우리 애한테 못된 짓 알려주냐며 쫓아온 천사들이랑 드잡이질도 하고, 머리털 뽑고, 날개깃 뽑히고, 칼로 찌르고, 돌에 짜부되고....... 별짓을 다 하고 별 꼴을 다 당했다.

그렇게 열심히 살았더니 어느 순간 세상이 기울어지더라. 전영중은 길게 담배 연기를 뿜으며 제 발밑에 인사불성이 된 어린 양을 보았다. 술, 담배, 매춘, 마약. 누가 보아도 훌륭한 타락의 현장이었지만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전영중은 구석에서 술만 홀짝였는데, 인간들은 알아서 팔뚝에 주사기를 꽂고 바지도 깠다. 나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지들끼리 타락해 버렸다고.

보람이 없어, 보람이.

다시 깊게 숨을 마시자 남은 연초가 싹 타올랐다. 하아. 연기가 짙게 서린 한숨을 뱉으며 손가락을 튕기자 잔불이 남은 꽁초는 누군가의 알궁둥이에 안착했다.

태초의 지옥은 사방을 둘러봐도 365일 불타기만 하던 척박한 땅이었다. 그곳에 토대를 올리고 위엄있는 성을 세운 건 다 그의 형제들의 꾐에 빠진 가여운 인간들을 착취한 결과고.

그렇다고 착취할 인간들이 알아서 생겨나던가? 달콤한 말을 혀가 마르도록 속삭이고 그들을 현혹할 황금을 마련하기 위해 뒤로는 쌔가 빠지도록 돈을 모았다. 지금의 지옥은 피땀눈물 흘려가며 일구어 낸 인고의 결과물이니, 전영중은 제 일에 나름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단 말이다.

그런데 요새는 일을 너무 쉽단 말이지. 그냥 길가던 약쟁이한테 돈다발 살살 흔들고 약 할 돈 줄테니 네 영혼이랑 딜? 하면 지옥행 티켓 발급 완료다. 쉽고 빠른 거? 좋지. 근데 일하는 기분이 안 나잖아. 그깟 방식에는 악마로 쌓아온 노하우가 전혀 필요하지 않다고. 그렇게 값싸게 넘어간 영혼들 덕에 지옥은 포화상태다. 마땅히 시킬 일도 없어 졸지에 타락한 영혼들만 취업난이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자아실현에 집착하는 악마였나? 악마의 본질은 본능이니, 워커홀릭인 자신을 인정하는 것도 어쩌면 악마다운 일이리라. 너무 성실하게 일하디 천국에서 스카웃 제의라도 들어오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며 편의점 문을 열었다. 다 떨어진 담배나 살 생각이었는데.

귓가에 꽂히는 디스토션이 잔뜩 들어간 일렉사운드. 매대가 흔들릴 정도의 빠르고 강렬한 비트.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저를 못마땅하게 쳐다보는 알바생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세상에, 모든 시간이 멈췄고, 할렐루야, 전영중은 다짐한다.

그냥 회개나 해야겠다.

어떤 운명처럼, 데스메탈과 함께 전영중에게 천사가 찾아왔다.


그럼 알바생이 어쩌다 알바를 하고 있는지 알아보자.

어느날 아버지께서 아주 오랜만에 아들을 찾았다. 그의 아버지께서 직접 의무를 내리는 일은 드물었기에 성준수는 드디어 때가 왔구나 싶었다. 줄기차게 싸워대던 천-악 대전 끝에 맺어진 휴전과 천-악 협정: 인간 세상에 직접 권능을 사용하면 안 된다는 규정 탓에 신벌을 받아 마땅한 인간을 단죄하지 못한 지 오래다. 드디어 협정을 깨고 사탄 새끼들과 그 추종자들의 귓구멍에 아버지의 성스러운 가르침을 물리적으로 꽂아줄 수 있기를 기대했건만.

너, 락스타가 되어야겠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귓구멍에 꽂힐 게 주먹이 아니라 다른 거였다니. 게다가 락? 그거 악마 숭배자들이나 하는 거 아닌가? 성준수가 반발심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들자 성스럽게 빛나는 그분의 품에 아직 지상의 냄새가 가시지 않은 어린양이 안겨 복복복 쓰다듬 당하고 있었다.

이 어린양의 소원이라잖니.

걔가 뭐라고 갑자기 천사한테 딴따라를 시킨답니까. 그거 특별대우입니다.

얘 할머니가 자기는 2평 방에 살았으면서 겨우 모은 전 재산 학교에 기부하고 여기 온 거 아니?

벌에 연좌제가 금지면 선행 역시 금지 아닐까요. 어린양의 할머니는 어린양의 할머니고, 어린양은 어린양이죠.

어렸을 때부터 봉사활동 다니고, 어린이복지회에 기부금도 꼬박꼬박 냈댄다.

그 정도야 흔한데 왜 자꾸 싸고도신담. 성준수는 반항하듯 대답 대신 입술만 비죽였다.

어린 나이에 죽은 게 가엾지도 않아? 취업 합격 문자 받은 날 밤 음주 운전 차량에 치여 죽었다는데.

그거야 인간들이 심판할 일이고. 세상에 가엾이 죽은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어떻게 하나하나 가엾이 여긴단 말인가.

얘 죽고 나서 열심히 알바해 모은 돈 제 할머니처럼 기부도 했고.

할머니 얘기 왜 하나 했더니, 설마 밑밥이었냐구요. 성준수는 그제야 사태가 심상찮게 굴러가는 걸 느꼈다. 번거롭게 왜 부르나 했더니, 아주 작정을 한 게 틀림없다.

장기기증도 했단다. 얘가 살린 사람이 다섯이라지?

"아니, 근데 왜 접니까? 다른 애들도 많은데."

네가 가장 한가하잖니.

아니, 하고 다시 반박하려다 사실인지라 입을 다문다. 무력, 천박하게 말하자면 쌈박질이 특기니 휴전협정이 맺어진 이래로 성준수가 할 일이랄 게 마땅히 없었다. 가끔 협정을 무시하고 치기 어린, 혹은 멍청한 악마들이 천계에 발 한번 들여놓고 인증샷마냥 흔적 남기고 튀려는 걸 잡아다 족치는 것 외엔 한가했으니. 인세에 내려가 봐야 악인을 함부로 벌할 수도 없으니 속만 터지고. 동네 백수 신세가 된 지 오래란 소리다.

그래도 딴따라는 좀...... 아니지.......

"근데 왜 딴... 락스타입니까?"

이 어린양의 픽이란다.

그러니까 왜. 노곤하게 쓰다듬 당하던 어린양이 저를 빤히 보는 시선이 부끄러운지 아버지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웅얼거리는 소리가 조그맣게 새어 나온다.

"노래로 사랑과 평화를 전하는 게 제 꿈이었어요."

삐익― 경기 종료음이 들리는 것 같 같았다. 접전이 이어지던 경기, 2점차로 지던 상황에 종료 1초를 남기고 공격권이 돌아오자마자 코트 반대편에서 던진 공이 버저비터로 깔끔하게 림에 빨려들어가는 소리였다. 눈 앞의 어린양은 연민과 동정을 거의 느끼지 못하는 천사조차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녀석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몸소 품에 안고 기특하다 박박 긁어줄 만큼.

그런 녀석의 꿈을 대신 이뤄달라니. 이걸 거절하면 천사도 아니지.

그러나 흔쾌히 수락하기에는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아버지.

"저 다룰 수 있는 악기가 없는데요."

성준수는 태생이 적을 배척하기 위한 사도였기에 평생을 물리적 회개와 갱생 외길만 걸어왔다. 천계에서도 하프니 반도네온이니 하는 것들이 유행했지만 성준수는 그런 여가와 자기 계발적 취미에 도통 관심이 가지 않았다. 그의 유일한 연주는 사탄의 머리를 두들기면 나오는 비명의 화음뿐이었으니.

하나도 없니?

"......진군할 때 나팔은 불어봤습니다."

따지자면 관악기? 근데 악마 숭배자들이 관악기도 씁니까? 두개골 피리 그런 거? 어느 천사의 무심하고 잔혹한 대답에 어린양만 뜨악한 표정을 지었더랬다.

어쨌든 마땅이 할 일이 없던 천사는 기꺼이 락스타가 되어주기로 한다. 밴드? 어린양이 기타리스트로 속해있던 밴드의 빈자리를 그대로 채우고. 악기? 까짓 기타 연습하면 된다. 그렇게 열심히 밴드 활동을 하고 유명해지기만 하면 될 줄 알았으나, 생각한 대로 풀리기만 한다면 인생은 실전이라는 말이 왜 있겠는가.

지상에서 인간을 대상으로 권능 사용 금지.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모든 물리적, 정신적 권능 행사는 불법이 된다. 육신을 가지고 몸소 강림한 천사가 인간으로 성공하려면 인간답게 살아야 하는데, 그 '인간으로 살기'에는 생각보다 많은 비용을 소모한다 이 말이다. 먹는 거야 홀로 있을 때는 천사답게 안 먹어서 해결할 수 있는데, 그 나머지는 모두 돈을 내야 했다. 악기와 음향기기 구매, 작업실 겸 자취방 임대료, 유투브에 찍어 올릴 카메라, 그걸 편집할 컴퓨터, 작업에 쓰일 프로그램 뭐 그런 자잘한 것들까지 전부 다.

그런 이유로 성준수는 강남대로의 어느 편의점에서, 만취한 손님들이 자주 찾는 시간대에 개꿀 알바를 하게 되었다. 월세 못 내면 연습실로 삼고 있는 자취방에서 쫓겨난다고. 천사는 잠을 잘 필요 역시 없으니 남들보다 돈을 더 받고 야간 알바 하는 게 개꿀이라지만 글쎄.

한참이나 어린 양새끼가 어이, 담배. 아니 저거 빨간거. 그거 말고 인마. 옆에 빨간거 있잖아! 폐암 말고 후두암으로―따위의 말인지 똥인지 모를 것을 내뱉는데 심기가 편할 리 없었다.

천사가 사람 패면 안 돼. 심판 금지. 아버지의 어린양이잖아. 그렇지만...... 씨발, 나도 아버지의 자식인데? 계급장 떼고 사람 대 사람으로 강냉이 털고 인간의 법대로 처벌받음 되는 거 아냐? 그런 생각을 하다 두 주먹에 꼬옥 쥐었던 힘을 풀고 바코드를 찍는다. 카드 앞에 꽂아주시겠어요? 너 이 새끼, 받아서 긁는 것도 귀찮아 이걸 손님한테 시키냐?

아, 이 쉽새끼.......

오늘도 살생을 겨우 참고 무사히 손님을 내보낸 성준수의 머리에 퍼뜩 동료의 추천이 떠오른다. 니 지상에 메탈... 그, 노래하러 간다매. 가서 스트레스받으면 함 들어봐라. 장르는 다른데 공부는 될끼다. 그러며 소중히 아끼던 도토리를 털어주듯 조곤히 알려주던 제목.

Demolisher.

매장 스피커와 연결된 핸드폰에서 곡을 찾아 튼다. 썸네일이 이상했지만 요새 애들은 개성이 강하니까 그러려니 했다. 다짜고짜 치고 들어오는 빠른 드럼의 비트에 순간 이게 맞나? 싶었지만 그래도 진재유가 알려준 노래니 믿었다. 믿었는데.

목이 불편한지 잔뜩 긁힌 목소리로 사회 붕괴를 종용하는 듯한 가사를 내뱉더니 널 살육으로 지배하겠단다. 아니, 이게 무슨... 뭔 가사가 이래? 성준수가 놀라든 말든 멜론은 워어억 둬어어억에 가까운 소리로 녹음된 노래를 착실히 내뱉는다. 아무리 봐도 편의점에서 나오면 안 되는 노래인지라 허둥지둥 끄려는데 그마저도 다급한 손놀림은 헛손질만 반복하고 딸랑, 타이밍 좋게도 편의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난다.

하필 지금... 씹... 개같은 세상....... 민원 넣고 싶으면 넣든가 니 맘대로 해라 그래....... 성준수는 체념한 채 뜻대로 되지 않는 핸드폰을 아무렇게나 던졌다.

그러나 들어온 손님은 만취한 진상도, 노래에 화가 난 손님도 아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제 속을 뒤집어 놓은―물리적, 정신적 둘 다에 해당한다― 악마 새끼가 멀뚱히 서 있었다. 과자봉지가 튀어 오르는 강렬한 드럼 비트 사이에서 저를 응시하더니, 이내 만면에 웃음을 띄웠다.

"요, 준수."

저 새끼, 이번엔 또 무슨 소리를 지껄이려고. 성준수는 속으로 이를 간다.

제 배에 구멍이 열 번 뚫렸다면 아홉 번은 전영중이 낸 것이리라. 오랜 숙적, 합법적 상호 샌드백, 아치에너미 등등....... 전영중과 성준수의 관계를 정의하는 말은 많았다. 휴전협정이 이루어진 이후로도 틈만 나면 시비를 걸고, 참지 않고 죽빵을 날리는 사이인 덕에 둘의 싸움은 흰눈으로 보게 된 지 오래다. 잘못 키운 자식들끼리의 싸움, 혹은 잘 키운 자식들의 유일한 지랄 버튼, 뭐 그런 취급이었달까.

그래도 성준수는 한 번 참기로 했다. 요 준수, 하고 시비에 시동을 거는 그 추임새 말이다. 이후 제게 한마디라도 하는 순간 죽빵을 날릴 것이다. 사실, 조금 기대한 것도 있다. 태어나면서 부여받은 사명을 달성할 수 있다는 생각에 상상만으로도 충만함이 차올랐으니까. 마침내 전영중이 걸어오고, 그 가증스러운 입이 속삭인다.

"팔리아멘트 멘솔 하나 주라."

그리고 새카만 블랙카드를 제게 내밀었다. ......뭐지? 순간 당황했으나 수만 번을 거듭한 알바생의 자아가 몸을 움직인다. 순순히 담배를 꺼내 올려두고 언제나처럼 말했다. 카드 앞에 꽂아주세... 아니, 꽂아라. 존대와 버벅임에 분명 비웃겠거니 했는데.......

전영중은 순순히 까만 카드를 단말기에 꽂았다. 담배를 가져가고, 다 출력되기도 전에 찢어 너덜한 영수증을 말없이 받았다. 진짜 뭐지? 전영중이 이렇게 조용하다고?

전영중은, 그 긴 세월 동안 저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던 악마 녀석은 숫제 수줍은 표정까지 지어 보이며 지갑 안에서 카드 사이즈의 종이를 꺼내 건넸다.

전영중. 그 아래 숫자 11자리만 적힌 명함.

"이런 데서 만난 것도 인연인데, 연락하면서 지내자."

Freak, similitude of God

It looks like he was sick

It looks like he got shot

모독적이고 파괴적인 노래를 들으며 이 모든 게 사실은 아버지가 내리신 시련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사실 내가 통 속의 뇌라면? 통 속에서 아버지에게 시험을 받는 중이라면?

아무리 그래도 아버지께서 전영중같은 놈을 불러다 시련을 줄리가. 우리 아버지 그 정도 아닙니다. 겨우 현실로 돌아온 성준수가 어금니를 짓씹으며 마지막 남은 아량을 베풀었다..

"그냥 가라."

그 반응의 어디가 마음에 들었는지 악마는 활짝 웃었다.


악마는 미쳤나요?

성준수는 아주 오래전, 그렇다고 결론을 내렸다. 제정신인 새끼면 알아서 지옥으로 걸러질 영혼들을 받아먹기만 할 것이다. 그러나 미친 악마 새끼들은 사탕발림으로 인간을 꼬셔 그렇지 않아도 짧은 인간의 생을 더 짧게 종쳐버리고 지옥 개간 사업에 투입했다. 그러면 얼마나 미쳤나요? 이에 대해서도 제법 적잖이, 로 결론 내렸으나 이번엔 수정이 들어간다.

악마들은, 특히 전영중은 감히 범인의 개념으로는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미친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천사가 알바하는 편의점에 매일 같이 찾아올 리 없으니까.

팔리아멘트 멘솔 하나. 성준수가 일하는 날이면 찾아와 딱 그거 하나만 샀다. 다른 알바생이 봤다면 편의점 들어오기 100미터 전부터 '저기 팔리아멘솔 온다'라고 할지 모르겠으나 야간 알바는 애석하게도 성준수 한 명이었다. 이쯤 되면 미리 담배를 꺼내놓을만도 하건만, 전영중의 정기적이고 끈질긴 방문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성준수는 늘 팔리아멘트 멘솔을 달라고 말해야만 담배를 꺼내주었다.

전영중의 기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거기서 끝났다면 제가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미쳤다고 말하지도 않았겠지.

"이제 끝났어?"

새벽녘 편의점에 들른 전영중은 아침 해가 떠올라 마침내 성준수가 퇴근할 때까지 매일 편의점 앞에서 기다렸다. 막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제 옆에 슬그머니 달라붙는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들숨에 시비, 날숨에 도발을 걸지도 않았다. 오늘 어땠어? 손님 평소보다 많은 것 같은데. 난 요새 백수로 지내서. 천사들은 사유재산 소유 금지지? 하긴, 일 있을 때만 가끔 내려오는데 어떻게 사유재산 같은 걸 만들어두겠어. 그래도 네가 지상에 이렇게 오래 머무르는 건 간만이네. 성준수가 대답하거나 말거나 혼자 종알거리며 자취방까지 함께 가는 것이다. 꼭...... 호감있는 사람을 바래다 주는 것처럼.

제가 떠올린 끔찍한 가설에 성준수가 몸서리치며 걸음을 멈췄다. 무슨 미친 소리야. 약마가 호감을 가져? 그런 일은 없다. 인간의 영혼을 탐내서라면 모를까, 왜 천사인 제게.

"너 대체 무슨 꿍꿍이냐?"

장장 1개월 하고도 4일 만에 '카드 꽂아주세요' 외 처음으로 내뱉는 말이었다. 대답하리라고는 생각 못 했는지 전영중은 잠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내 씨익 웃었다.

"이제야 말 걸어주네."

"인간한테 작업이나 치지, 왜 매일 와서 귀찮게 굴어?"

"뭘 귀찮게 굴어? 내가 시간 뺏은 것도 아니고, 집에 가는 길에 얘기만 했을 뿐인데."

그러니까 그게 이상하다고. 평소의 전영중이 아니었다. 사실 진짜 전영중은 죽고 전영중 MK.2로 다시 태어났다던가, 아님 다른 악마가 전영중의 이름과 가죽을 뒤집어쓴 게 아닐까 싶었으니까.

성준수가 미심쩍게 쳐다봐도 전영중은 으쓱이고 말았다.

"그냥, 오랜 친구를 봐서 반갑기도 하고. 세상이 좁다더니, 틀린 말은 아닌가 봐?"

"좁으니까 만났겠지."

"준수, 감정도 없고 폭력밖에 모르는 줄 알았는데 유머 감각이 늘었네?"

그러더니 정말 웃기다는 듯 허리를 접고 웃었다. 제 감정이 분노 외에는 희미하다는 걸 인정하지만 성준수 생각에는 악마야말로 감정 과잉이다. 세상이 좁다길래 긍정했을 뿐인데, 그게 그렇게 웃긴 말인가?

"꿍꿍이는 없고, 나 이직하려고."

"하든가. 그걸 왜 나한테 말하냐?"

"그나마 친하게 가깝게 지내던 천사는 너밖에 없어서."

우리, 속살까지 본 사이잖아. 그렇게 말하며 전영중이 제 몸 어드메를 훑는다. 또라이 새끼. 성준수가 혀를 찼다. 그래, 보긴 했지. 베이고 찔린 상처 너머로 줄줄 흐르는 피와 벌어진 상처들 말이지. 누가 그걸 그딴 식으로 말하냐.

"그래서 뭐, 편의점 알바에 꽂아달라고?"

"아니, 나 전향하려고. 요새 일하는 게 너무 재미없어서 소멸할 지경이라."

그다음부터는 성준수도 깊이 공감하는 투정이 이어졌다. 요즘 애들은 너무 쉽게 살려고 한단 말이야. 제대로 작업 치기도 전에 냅다 영혼이랑 딜 걸어버린다고. 얼마 전에는 일자로 선 척추랑 영혼을 교환했다니까? 난 뭐 한 것도 없는데 알아서 술 담배 마약 하지 않나. 실적에 쪼여가며 일하는 게 얼마나 짜릿한지 알아? 근데 영업하지 않아도 알아서 지옥 오겠다는 영혼들이 줄을 섰어. 요즘 태어난 것들은 그냥 그 영혼에 번호표 붙여 줄 세우는 게 다라고. 그렇게 일하는 것들이 계약이 얼마나 힘든 건지 알기나 하겠어? 나 너무 우울해서 빵 사 먹었잖아. 알아서 타락하는 인간들이 너무 많아.

"나 생각보다 일하는 데에 보람을 찾는 착실한 타입이더라고. 그래서 회개시키는 쪽으로 일해보려는데. 어때, 인재 영업 혹하지 않아? 나 일 잘하는 거 알지?"

여기는 공감 못 했다. 끄덕이며 전영중이 하는 말을 듣던 성준수가 단번에 얼굴을 구겼다. 듣자 듣자 하니 선 넘네?

"니는 뭔, 천국으로 가는 문이 적당한 영업과 기도로 열리는 줄 아냐?"

"아냐?"

"겠냐? 신의 말씀을 따르고 이웃을 사랑한 어린양들에게 열리는 건데. 세 치 혀 놀림으로 천국행이 열릴 거면 사람 패고 회개 기도만 하면 아무나 가겠다?"

"너도 악마는 보이는 대로 줘팼지만 아직 타락 안 했잖아."

이게 그거랑 같나. 아니, 근데 잠잠하나 싶더니 긁네? 그럼 악마가 사람을 유혹하는데 그걸 놔두면 천사냐? 당연히 때려잡아서 근절시켜야지. 금방이라도 욕을 내뱉을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내뱉어지는 말은 없었다.

"그리고 널 어떻게 믿어."

냉정한 대답이었으나 전영중은 제법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비즈니스적으로 볼 때 오랜 적이었으니 함부로 믿지 못하는 것도 이해한다. 오랜 사상적 차이도 있을 테고. 원래 회사를 옮기면 사상교육부터 다시 들어가야 하는 법이지.

"그럼 거래를 하자. 내가 네 사명을 도울게."

내 도움으로 사명을 마치면 너희 아버지께 잘 말해주는 걸로. 콜? 성준수는 껄끄러운 표정을 짓다,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콜.


성준수에게 사명이 있을 거라는 짐작은 그리 어려운 게 아니었다.

애초에 성준수는 지상에 풀어놓을 수 있는 부류가 아니었으니까.

초기에 태어난 천사들이 그랬다. 컨트롤 프릭이던 시절, 정성스레 빚은 아담과 이브가 에덴을 탈주한 이후로 유일한 분의 병증은 한동안 정점에 달했는데, 그의 다른 아들딸들이 시키는 일만 잘하도록 감정을 제한했다. 보살피는 것들에게는 연민을, 심판하는 것들에게는 분노만을 허락했다. 그 기간에 태어난 게 성준수였다.

한창 지옥에 떨어진 것들과 치고받을 때는 유용했으나, 할 말이 있으면 인간들로 승부를 보는 현세에 성준수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1호선의 광인들처럼 라떼를 들먹거리며 화내는 것뿐이다. 가엾게도. 그런 성준수가 갑자기 온갖 진상이 밀려드는 강남역 편의점에서 알바를? 다 찢어 죽이고 싶다는 표정을 하고서? 이건 사명을 받은 게 아니면 말이 안 된다. 전영중의 오랜 촉이 말했다.

"사랑? 과 평화? 를 노래해? 네가?"

근데 이럴 줄은 몰랐지. 대답을 들은 전영중은 성준수의 자취방에 맥없이 쓰러져 웃었다. 사랑과 평화란다. 그 성준수가! 사랑과 평화의 사전적 의미조차 모를 애한테!

전영중이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웃어도 성준수는 가만히 있었다. 말도 안 되는 거래를 들먹여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이유가 있으니까. 성준수는 정말 사랑이 무엇인지, 평화가 무엇인지 몰랐다. 성준수가 아는 평화는 엄격한 규율과 철퇴에서 오는 것이었으니까.

"준수야. 성준수. 사랑도 모르는 게 무슨 사랑을 노래해. 인간들이 어리석어 보여도 감정만큼은 누구보다 민감한데. 대중들이 대충 흉내만 내는 노래에 반응할 거 같아?"

"그러니까 너랑 거래하겠다 한 거 아냐."

"뭐, 그래. 마침 엔터사도 있으니까 아이돌 하면 되겠다. 빠르게 끝내려면 메이저가 좋겠지? 얼굴이야 합격이고, 몸 쓰는 건 잘하니까 연습생부터 시작해서......."

전영중이 품에서 명함첩을 꺼냈다. JY엔터. 이건 지하돌 용으로 만든 엔터사니까 패스. YJ엔터. 중소로 알려졌지만 WJ의 자회사 취급이었다. 어차피 전부 전영중이 운영중이었고. YJ로 데뷔시켜서 WJ로 옮겨주면 되겠지. 그런 생각을 하는데.

"아이돌은 안돼. 장르 정해져 있어서."

장르. 성준수의 입으로는 들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적 없는 단어라 전영중은 잠시 충격에 빠졌다. 쟤 지금 장르라 한 거야? 노래에 장르가 있다는 것도 알아? 클래식과 그 외(사탄 음악)로 나누는 게 아니라?

"락으로 성공해야 해."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 전영중은 진심으로 웃지 못했다. 계산을 굴려볼 것도 없었지만 전영중은 침착하게 물었다.

"......성공의 기준이 뭔데?"

"유투브 천만 뷰?"

"유투브 천만 뷰는 개나 소나 찍는 줄 알아!?"

서울 시민이 천만이 안 되는데 뭐, 천만? 영화 천만 관객이 괜히 난리인 줄 아나? 그걸, 뭐? 락? 지금 사랑도, 평화도, 노래도 아무것도 안 되는 주제에 락으로 하겠다고?

"준수는 지금이 00년대인 줄 알아? 음악캠프에서 낭만고양이랑 진달래길 나오던 시대인 줄 아냐고! 러브홀릭은 교수 됐고 아직도 말달리자만큼 대중적인 노래가 없어! 카우치가 공중파에서 고추 까고 문차일드는 성범죄자 낙인찍히면서 밴드뮤직은 죽었어! 다이라고! 밴드의 마지막 부흥기는 슈퍼밴드였어! 천만 뷰 좋지. 천만 뷰 찍고 싶으면 지금 남은 희망은 싱어게인뿐인데 준수네 밴드는 싱어게인 나갈 짬도 안 되잖아. 혹시 사명은 핑계고 평생 지상에 눌러앉을 생각이야? 심심하다 보니 미쳐버렸어?"

엔터사를 하고 있다는 말이 허언은 아닌지 전영중이 절망적으로 내뱉었다. 겸사 버릇처럼 성준수를 긁은 것도 같지만...... 성준수는 내심 동의했기에 전영중이 알아서 조용해질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씩씩거리다 이내 맙소사, 하고 머리를 쥐어뜯는 모습에 성준수가 가만히 내뱉었다.

"왜, 조건 들으니까 쫄려? 계약 물려줘?"

그러나 전영중 역시 자부심으로 사는 악마였다(곧 버릴 아이덴티티긴 하지만). 못할 것 같으면 그만둘래? 아쉬운 것 없다는 태도에 전영중이 발끈한다. 이 바닥 고인물이 되어 어지간한 계약에는 흥미조차 느끼지 못했는데, 난이도: 하드코어에 해당하는 건을 두고 포기하는 건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무슨 소리야? 준수야말로 각오해야할 걸? 내가 사랑도, 평화도, 노래도 전부 알려줄 거니까."

악마가 알려주는 사랑과 평화라. 성준수는 그게 웃기다고 생각했다―지금 느끼는 이 감정이 '웃기다'는 게 맞다면.

그래서, 아주 옅게 웃음같은 걸 지어보이며 답했다.

"나 일렉이라 노래는 안 하는데."

"천만 뷰 찍고싶으면 좀 해. 그 얼굴 안 쓰는 것도 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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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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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


  • 놀라는 백조

    설정도 너무 좋고...정말 재밌어요...악마천사 진짜 너무 좋아하는데...이렇게 재밌는 글로 보니까 마음이 더 풍족해지네요...후편도 있다고 믿을게요

  • 잠자는 토끼

    제발 속편도 있다고 해주세요 설정도 너무 좋네요...한 십만자 써주시고 회지도 내주시면 좋겠다...빵준온도 곧인데...

  • 용기있는 해달

    설정이 너무 귀엽고 재밌어요... 22님의 상상력 가득한 로코고 정말정말 좋아요. 준수가 유튜브 1000만뷰 찍고 영중이랑 러브러브할 때까지 숨 참아요. 흐읍.

  • 어둠의 뱁새

    넘 재밌어요... 롹 네버다이라 그랬죠 슈밴의 물결이 지나갔지만 요즘 다시 데6이 차트를 먹고있잖아요...? WJ사장님의 기획력을 믿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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