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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JACK ROMANCE

센티넬AU

PITA BREAD by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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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0 디페스타 발행

「손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희 한국항공은 여러분의 탑승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이 비행기는 샌프란시스코까지 가는 KR431편입니다. 목적지인 샌프란시스코까지 예정된 비행시간은…….」

전영중의 기분은 가히 최고였다. 공항 수속부터 출국심사까지 막힘없는 VIP 의전 서비스. 아늑하고 프라이빗한 분위기의 라운지. 칸막이로 독립된 공간의 퍼스트 클래스 좌석에, 앉자마자 준비되는 웰컴 푸드와 드링크까지.

다른 게 인생 역전인가? 들숨날숨에 샷 한 번씩 내려대던 출근 시간 메가커피 알바생이 내 돈 한 푼 안 들이고 이런 대접을 받는 게 인생 역전이지. 전영중은 부드럽게 웃으며 깔끔하게 비운 샴페인 잔을 테이블 끝으로 밀었다. 승무원이 지체 없이 자리를 정리한다.

그래, 사람이 이렇게 살아야지. 남의 눈치 보며 지킬 거 다 지키고 살다가는 배곯고 거지꼴 못 면하는 법이다. 전영중은 푹신한 시트에 파묻혀 가속하는 비행기의 압력을 만끽했다. 라면 세 개와 계란 다섯 개로 한 끼를 때우던 과거는 안녕이다.

이대로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차를 렌트하고 로드트립을 떠날 것이다. 금문교를 건너고, 요세미티를 오르고, 그랜드캐년을 가로지르고, 오대호도 보고, 나이아가라 폭포도 구경 갈 거다. 3개월 동안 미국 전역을 누비며 거지 같았던 한국 생활에 대한 보상을 받고 미국 시민권자로 새 인생을 것이다. 한국 국적? 버리지 뭐. 우리나라가 나한테 해준 게 뭐 있어? 좆같은 대한민국. 내가 다시 밟나 봐라. 어차피 한국에는 전영중의 발목을 잡을만한 종친도, 문중 소유 재산도 없다. 많은 이들이 꿈꿨던 아메리칸드림은 전영중이 미국 땅을 밟는 순간부터 이뤄지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제발 무사히 도착하기만 하자. 전영중은 멀리서부터 웅성거리는 소리를 무시하며 의자를 눕혔다. 누구는 극한의 상황에서 영웅 대접받는 걸 좋아한다지만 전영중은 아니었다. 벗어나지 않는 길에서 안정된 업무처리. 잘 정립된 매뉴얼과 예측 가능한 돌발상황. 얼마나 좋아. 어느 의사는 비행기에 탔을 때 ‘손님분들 중 의사 선생님 계십니까!’라는 말에 손을 들고 일어나는 게 꿈이라는데, 전영중은 절대 사양이었다. 만 미터 상공에서 전문직이 필요할 정도의 돌발상황 따위는 벌어지면 안 된다.

그러나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일등석으로 이어지는 통로의 커튼을 열어젖히며 전영중의 바람은 처참히 짓밟힌다.

“기내에 가이드 계십니까?”

아, 제발.

일어나야 한다. 안다. 승무원이 가이드를 찾을 정도면 진짜 비상 상황이라는 거다. 전영중은 한때 열심히 외웠던 이능력자 여객기 탑승 수칙을 떠올렸다. 일반 여객기 탑승 시 모든 센티넬과 가이드는 항공사에 미리 탑승 사실과 등급을 고지해야 한다. C등급 이상 센티넬은 비행기 탑승 시 비상 상황에 대응 가능한 가이드가 동행하고, D등급 이하는 이능력억제기를 상시 착용한다.

그러나 전영중은 오늘 업무가 아닌 일반인 자격이었으므로 담당하는 센티넬이 없다. 센티넬이 계약된 가이드 없이 비행기에 탈 수 있을 리 없으니, 가이드가 센티넬을 감당하지 못하는 등급이라는 건데 이건 규정 위반이고. 다른 경우라면…… 말도 안 되는 가능성은 머리에서 지운다.

“손님, 가이드 맞으시죠?”

그러면 대체 일이 어떻게 된 건지. 발소리가 바로 옆에서 멎고, 닫아두었던 문이 열린다. 전영중은 그제야 못마땅한 듯 안대를 들어 올리며 몸을 일으켰다. 가이드 역시 가이딩 대상이 있든 말든 필수 고지 대상이니 승무원이 저를 지목해 찾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비상시엔 높은 등급의 가이드가 대처하는 게 효율적이고.

“다른 가이드 없습니까?”

“있지만 등급이 낮습니다. 센티넬은 폭주 직전 상태고요.”

“센티넬 탑승 시 가이드는 동일 등급이거나 그 이상으로 동행해야 하는 걸로 아는데요.”

전영중이 슬리퍼를 직직 끌며 승무원을 따라나섰다. 어차피 이대로 방치하면 폭주한 센티넬에게 고스란히 떼죽음이다. 내키지 않다는 이유로 가이딩을 미룰 수는 없었다. 한국 놈인지 미국 놈인지, 누가 됐든 비용은 세게 청구할 테다.

다른 이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갤리를 지나며 승무원이 뒤늦게 덧붙였다.

“승객이 아닙니다.”

“네?”

“해당 센티넬은 저희 탑승자 명단에 없습니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탑승자 명단에 없는 사람이 어떻게 비행기에 타고 있어? 그 자리에 멈춰 뒤돌아본다. 승무원은 조금도 농담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럼 밀항…….”

“모든 항공기는 이륙 전 능력파장스캔을 실시합니다. 감지된 센티넬은 명단과 동일하게 셋이었습니다.”

지금은 다섯이구요. 말하면서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건 전영중도 마찬가지고. 은신 능력이라 하더라도 파장 스캔을 하면 무조건 걸리게 돼있다. 그런데 센티넬이 둘이나 추가됐다고? 하늘 한가운데서 갑자기 생겨나기라도 했다는 거야?

설마. 전영중이 달리기 시작했다. 비즈니스 클래스를 지나, 다시 커튼을 걷는다. 빼곡히 들어찬 사람들의 소란이 눈앞에 펼쳐졌다.

승객들을 진정시키며 자리에 앉히는 승무원. 웅성거리며 목을 길게 빼고 무슨 일인지 구경하는 가운데 못 참고 가이드는 뭐 하는 거냐며 분개하며 소리 지르는 사람. 조용히 하라는 공포에 질린 비명이 뒤섞인다.

“햄! 햄, 정신 놓음 안 돼요!”

목에 찬 초커가 붉게 깜빡였다. 폭주 전조증상, 혹은 돌입 상태. 다 죽어가는 센티넬 하나가 금방이라도 눈이 넘어갈 것처럼 헐떡이다 다시 부릅뜬다. 온몸을 비틀며 괴로워하면서도 저를 살려줄 사람을 알아보고 손을 뻗었다. 가이딩하라는 거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길 바랐는데. 전영중은 마른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다 손을 잡았다. 가이드를 잡아먹으려 드는 사나운 파장이 느껴졌다.

“소속이랑 이름, 등급.”

“네?”

“너랑 이 사람. 소속, 이름, 등급 뭐야. 내가 누굴 가이딩하는지 알아야지.”

“저는 지상 소속 B… A급 센티넬 기상호고요, 이 사람은…….”

“성준수, S급.”

다 갈라진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초커의 붉은 점멸이 점점 빨라지는데도 아쉬운 것 없다는 듯 느긋한 말투로 맞잡은 손에 힘을 더했다. 딱 으스러뜨리기 직전의 악력에 전영중도 지기 싫어 이를 악물고 손을 세게 쥐었다.

“—인데 지금 S급이 힘을 숨김 상태라 B급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경쟁하듯 서로를 쥐어짜던 손아귀에 힘이 빠진다. 성준수가 제 동행인을 노려보다 한숨을 뱉고는 바로 누웠다. 몸에 힘을 빼고 입을 살짝 벌린 의도가 선명했다.

정말 싫다. 만 미터 상공에서 400명의 목숨이 달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게 저밖에 없다는 현실이 끔찍했다. 그러나 해야만 하는 일이기에, 전영중은 붙잡은 손으로 가이딩을 흘려보내며 몸을 숙였다.

“무소속 S급 가이드 전영중, 비상 상황으로 인한 인도적 목적으로 가이딩 실시합니다.”

가이딩은 인공호흡과 다르지 않다는 지침서를 떠올리며 일부러 덤덤하게 입술을 겹친다. 그러나 기다린 것처럼 침범해 들어오는 혀가 괘씸해 피가 날 정도로 콱 씹었다.

 

“Hands up! I’m Sergeant Evans, United States Army. You are under arrest…….”

“뭐라는 거야 씨발놈아. 한국 국적기니까 한국어로 씨부려라. 니 어학병인거 다 알아.”

완전히 컨디션을 회복한 센티넬, 성준수가 눈 앞에 총구가 겨누어진 상황에서도 조금도 겁먹지 않고 쏘아붙였다. 적반하장인 발언에 기상호를 가이딩하던 전영중이 고개를 들어 성준수를 보았다. 왜, 뭐. 여전히 흉흉한 기세로 전영중을 노려보고는 다시 머리 짧은 남자와 대치했다.

“……항공보안법 위반으로 지금부터 두 사람의 신병을 구속한다.”

“너 그거 진짜 총이냐? 미국 놈들은 법 위에 있나, 총을 막 들고 타네?”

“미국을 경유하는 모든 항공기는 미연방법에 의거하여 무장 요원이 탑승 가능하다.”

“존나 꼬투리 잡는다? 그럼 나도 법적으로 얘기하는데, 남의 나라 S급 가이드 유출은 국제법에 걸리는 거 알지?”

다시 시선이 제게 꽂힌다. 전영중에게 잡혀있던 손이 슬그머니 빠져나갔다. 햄, 이제 된 거 같아요. 얘는 왜 나를 햄으로 부르지? 의아했으나 전영중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만 주물렀다.

“나요?”

“그럼 여기 전영중 씨 말고 S급 가이드가 또 있습니까?”

묘하게 재수 없는 말투에 전영중의 눈썹이 구겨졌다. 당혹을 숨기려고 일부러 기분 나쁜 척한 것도 있고. 아, 눈치 빠르네. 취업 이민인 거 어떻게 알았지? 그러나 일단 잡아뗀다.

“저야 모르죠? 그리고 전 그냥 여행가는 건데요.”

“여행 좋아하네. 여행비자로 입국해서 여기저기 헤집고 다니다 여행금지 지역 일부러 가서 납치, 억류된 척 연기할 거잖아요. 놀다가 엘파소로 갈 생각이었겠지. 거기 요새 멕시코 마피아랑 전쟁이라던데. 형식적으로 영사관에 도움 한번 요청하고, 제대로 응답하기도 전에 나라가 자길 버렸다며 미국으로 망명하는 시나리오인 거 누가 몰라? 미국이 그런 식으로 빼돌린 센티넬이랑 가이드가 몇인데. 내 말이 틀렸습니까?”

목숨과 자존심이 오가는 대화 속에서 승객들은 이륙 후에 받아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땅콩 봉지를 깠다.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규모의 재난을 만나면 목숨 걱정은 잊고 구경하게 되는 법이다. 게다가 어디서 돈 주고도 못 볼 귀한 센티넬과 군인의 국가적 자존심이 걸린 싸움 아닌가. 두려움이 거세된 현장에는 이능력과 정치적 사정이 뒤섞여 흥미진진하게 굴러가고 있었다. 일단은 천조국 공권력을 농락하며 쌍욕을 박는 센티넬의 기상에 1점. 사정 상 미국이 잘못했으니 1점 추가. 그게 아니더라도 일단 우리나라 이겨라! 올림픽 편 가르기 같은 응원을 마음 속으로 한다.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말고 손 들어!”

“너네 그 짜치는 대본 다 털렸다고. 너 말고 저기 일등석에 탄 양반, CIA 위장신분이잖아. 이코노미에도 더 있고. 전영중 가이드 보디가드로 온 거지?”

“손 들지 않으면 발포한다!”

“어, 쏴봐. 미리 말해두는데 난 공간이동 능력이고, 발포하는 순간 경로 왜곡시켜서 니 배에 구멍 내줄 테니.”

“……너희 둘은 밀항자다. 안전을 위해 구속할 의무가 있어.”

센티넬이 패기 넘치게 반사를 선언하자 미군이 한 수 접는다. 국산 센티넬에 1점 추가. 역시 목소리 큰 쪽이 이기는 나라에서 단련된 성질머리는 못 당하는 법이다. 3:0. 한국의 승리였다.

“좋아, 밀항. 그건 내 잘못이 맞으니 여기서 사라져 줄게. 쟤만 데리고.”

‘쟤’라는 말과 함께 손가락질받은 건 당연히 전영중이었다.

“나는 왜? 센티넬이면 사람 함부로 납치해도 됩니까?”

“센티넬과 가이드는 귀중한 재원으로 유출이 엄격하게 금지돼 있습니다.”

“사람 물건 취급하지 마요. 열받으니까. 그리고 여행이라고 이미 말했습니다.”

“여행은 무슨, 그쪽 비행기 티켓 결제한 게 시카고에 위치한 페이퍼 컴퍼니던데. 제대로 위장하려는 성의도 없지?”

“이거 사찰입니다, 성준수 씨.”

“대한민국 센티넬로서 가이드 유출은 두고볼 수 없는 사안입니다.”

“직업정신 투철해서 눈물이 다 나네요.”

“그런 말 많이 듣습니다.”

성준수가 팔짱을 끼고 아예 몸을 전영중에게 돌렸다. 어라. 몇몇 기민한 승객이 이상 기류를 감지한다. 이 싸움, 이능력정치액션물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어느 부분에서 도발 당했는지 모르겠지만, 가이드는 잔뜩 낮춘 목소리로 이를 갈며 말했다.

“당신, 이 비행기에는 어떻게 탄 겁니까?”

“어떻게 탄 거 같은데?”

“……숨어있었다고 해. 화물칸이든 어디든.”

31D 좌석 승객의 증언에 의하면 한창 식사를 하던 도중 대각선 방향, 출입문 쪽에서 소음이 들렸다고 한다. 쿵!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 햄, 괜찮아요? 묻는 소리. 그리고 당시 갤리에 물건을 가지러 왔던 승무원의 증언은 이랬다. ‘출입문 앞 공간에 갑자기 사람이 나타났어요.’

“내 능력이 뭐라고 생각합니까, 전영중 가이드.”

이죽이는 대답과 동시에 남자가 달려들었다. 빡! 사람이 날아가고 턱뼈가 부서져도 이상하지 않을 소리였는데 얻어맞은 센티넬은 고개만 돌아간 게 다였다. 분을 못이겨 씩씩대는 모습에 기상호가 전영중을 붙잡았다. 햄! 가이드 님! 한 번만 봐줍시다. 네? 딱 한 번만!

갑작스러운 한국인끼리의 내전에 일부는 숨을 삼켰고, 누군가는 드디어 동영상을 촬영버튼을 눌렀다.

“순항 중인 비행기에 능력으로 올라타? 미쳤어? 조금만 어긋나도 사지가 분해될 수 있는 거 몰라?”

말하면서도 화가 나는지 몸을 뒤틀었지만 아무리 체격이 좋다 하더라도 일반인이나 다름없는 가이드의 힘으로는 센티넬을 뿌리칠 수 없었다. 얻어맞은 뺨을 만지던 성준수가 기상호의 어깨를 친다. 진짜요? 비키라는 신호에 성준수의 눈치를 보면서 기상호가 떨어진다. 바로 앞에 선 성준수가 때리기 좋도록 몸을 숙이며 반대쪽을 내밀었다.

“더 칠래?”

분한 듯 핏줄이 불거지도록 말아 쥔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와, 얄밉다. 더 치려나? 모두가 궁금해하는 와중에 눈을 감은 전영중이 길게 숨을 뱉는다. 에이, 안 치겠네. 울컥해서 안 쳤으면 끝난 거지. 그러나 안심한 순간에, 퍽! 다시 타격음이 들렸다. 이번엔 성준수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오, 시간차 공격.

“내가 말했지. 죽을 거면 제발 내가 모르는 곳에서 죽으라고.”

“그것 때문에 왔어.”

“뭐?”

얻어맞은 턱을 만지며 그가 말했다. 날 선 표정을 누그러뜨리고 긴 속눈썹을 깜빡이는 모습이 군인을 잡아먹을 듯 굴던 때와 사뭇 달랐다. 와, 얼굴 미쳤네. 누군가 감탄한다. 빈말이 아니라, 성질을 걷어낸 센티넬의 얼굴은 요새 훈남으로 격상된 애매한 얼굴의 연예인들을 흔남으로 원위치시켜 버리는 파괴력이 있었다.

“영중아. 네가 나 좀 살려주라.”

모두가 숨죽이고 그들을 지켜봤다. 상공 만 킬로미터 위에서 벌어지는 이 싸움의 장르는 이능력정치액션이 아니라 로맨스였다.


지구사에 커다란 재해를 일으켰던 사건은 많았다. 공룡이 멸종당한 아마겟돈이라든가, 지진, 화산폭발 따위의 것들. 이런 건 충분한 지식과 기술만 있다면 예측할 수 있고 피해를 없애지는 못하더라도 줄일 수 있는 부류다.

그러나 크리쳐라는 괴물의 등장에는 전조증상이나 읽어낼 수 있는 지표가 없었다. 센티넬의 등장 역시 마찬가지다. 몰살하거나, 살아남거나. 말이 안 통하니 타협불가능한 인류와 크리쳐 간 싸움은 백 년이 넘어가며 위대한 수호 전쟁, 줄여서 수호전쟁이라는 명칭이 붙지만 역사 이야기는 미뤄두자. 중요한 건 결국 인류가 승리했다는 사실이다.

지난한 싸움 끝에 크리쳐가 넘어왔다는 모든 문이 닫히고 세계는 안정을 되찾는다. 한때 인류를 지켰던 센티넬들은 하나둘 실직자가 된다. 그렇게 인력이 남아돌고, 공통의 적이 사라지면 어떻게 되느냐? 자기들끼리 싸운다.

다시 센티넬에 대한 수요가 생겼다. 이능력이 얽힌 범죄는 규모와 방식이 상식적이지 않은 선이었고, 그들을 막을 방법 또한 상식적이어선 안됐다. 실직자들에게 재취업의 길이 열린 셈이다. 문이 열리고 크리쳐가 쳐들어오던 시대만큼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센티넬은 위험부담이 높은 직군에서 환영받았다.

전영중과 성준수는 그런 세상에서 이능력을 꿈꿨다. 선생님, 저는 커서 영웅이 될래요! 수호전쟁의 역사에 깊게 감명받은 어느 어린아이가 외쳤다. 영웅. 얼마나 울림이 좋은 말인가. 그러나 평화를 되찾은 시대에 영웅이 되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용감한 시민이라면 모를까.

그걸 성준수는 해냈다. 저도 열한 살짜리 꼬맹이인 주제에 고장 나 열려있던 스크린도어 너머로 일곱 살 어린아이가 떨어진 걸 보고 몸을 날렸다. 제게 맡겨진 성준수 몫의 델리만쥬 봉지를 꼭 쥐고 전영중이 발을 동동 굴리며 소리 질렀다.

“준수야! 차! 기차 들어와! 빨리 올라와!”

빠앙! 경적과 함께 기관차의 빛이 가까워진다. 다급히 속도를 줄이는 쇠의 마찰음이 들렸다. “성준수, 빨리!” 전영중이 델리만쥬 두 봉지를 던져버리고 스크린도어 아래로 손을 뻗었다. 일곱 살의 몸뚱이는 열한 살 아이 둘이 밀고 당겨 끌어올리기에는 너무 무거웠고 요령도 없었다. 땀에 젖은 손이 잡히는 족족 미끄러졌다. 달려온 어른들이 전영중을 끌어당기자 겨우 손목을 틀어쥐었던 손이 무게를 못 이기고 풀어진다. 떨어지는 아이의 몸을 받으며 성준수가 뒤로 넘어졌다. 준수야아! 겨우 어른들 손아귀에서 벗어난 전영중이 허둥지둥 선로로 달려가는데,

쾅!

압축된 공기가 폭탄 터지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열차가 눈앞을 지나갔다. 스크린도어가 덜덜 떨렸다. 열린 스크린도어 너머로 스치는 열차 안, 어른들의 놀란 눈이 이상하게도 뚜렷이 보였다. 전영중은 자리에 주저앉았다. 저기, 준수가 있었는데. 도움을 구하듯 사방을 둘러봐도 겨우 멈춰 서는 열차를 응시할 뿐, 저를 보는 어른은 없었다. 준수가……. 열차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쏟아져나온다. 인파 속에서 전영중은 혼자 시간이 멈춘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

비상 상황을 알리는 방송 속에서 등에 묵직한 무게가 실렸다.

“야… 안 다쳤냐?”

점심시간 내내 축구를 해도 지치지 않던 녀석이 꼭 독감에 이틀을 앓은 듯 기운 없이 말했다. 전영중이 뒤를 돌아 성준수를 끌어안았다. 진짜였다. 유령이 아닌, 만져도 사라지지 않는 살아있는 성준수였다. 제게 기대오는 무게를 느끼며 전영중은 뒤로 넘어졌다. 열병을 앓는 것처럼 성준수의 몸은 뜨끈하기 그지없었다.

죽을 뻔했으면서 지금 누굴 걱정해? 쏘아붙이려는데 목이 콱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흐으으……. 전영중이 아랫입술을 구기며 울음을 삼켰다.

“시원하다, 영중아.”

제 머리와 몸을 감싼 손에 얼굴을 비비며 성준수가 말했다. 그 접촉이 가이딩을 갈구하는 센티넬의 본능이라는 걸 당시에는 몰랐다. 그 와중에도 제가 구하려던 일곱 살 아이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성준수는 열한 살에 그렇게 원하던 영웅이 됐다. 용감한 시민도 됐다. 어린아이를 구한 열한 살의 작은 영웅. 그게 기사 제목이었다. 단정한 피케셔츠에 베이지색 면바지를 입고 경찰청장과 나란히 브이 한 사진도 찍었다. 전영중은 초대석에 앉아 카메라 플래시 속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성준수를 보며 박수치다 어린 영웅을 지켜준 가이드로 소개되었다. 그다음에는 경찰청장과 성준수, 전영중 셋이 사진을 찍었다.

성준수는 그 일을 4학년 반 친구들에게 자랑스레 말했다. 5학년 때도, 6학년 때도, 중학교에 가서도 물어보는 애가 있으면 귀찮은 기색 하나 없이 말했다. 당연히 고등학교 때도 말했고, 국가직 센티넬 시험볼 때도 자기소개서 첫 줄에 들어갔다.

저는 영웅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놈의 영웅. 이 미친 영웅병자 새끼는 뇌가 도파민에 절여진 게 틀림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시작을 잘못 끊었어. 센티넬로서의 첫 업적이 공영방송 8시 뉴스에 방송된 인명구조라니, 이걸 어떻게 이겨? 게다가 11살에? 이건 추억 보정까지 들어간다. 감당 안 된다고.

그럼에도 성준수는 더 해낼 수 있는 것처럼 굴었다.

무기물과 유기물을 가리지 않는 성준수의 능력은 시대를 불문하고 유용했다. 직간접적으로 접촉된 대상의 일부 혹은 전체를 원하는 지점에 옮길 수 있는데, 능력을 키울수록 한 번에 옮길 수 있는 규모와 거리가 늘어났다. 그중에서도 다른 공간이동 능력자보다 뛰어난 부분이 정확성이었다. 성준수는 시야에 의존한 이동만이 아니라 위도와 경도, 고도가 실존하는 것처럼 좌표만으로 정확히 대상을 이동시킬 수 있었다.

화재 현장 옥상에 갇힌 사람을 구해 돌아오고, 무너진 건물 잔해를 통째로 치워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사람들이, 그들을 구하지 못해 안타까워하던 이들이 성준수와 전영중의 손을 잡았다. 네 덕분에 살았다. 너희가 살린 거다. 영웅의 노력은 생존자 수라는 흔적으로 남았다.

그런 것들이 성준수를 중독시켰다. 전영중은 그렇게 생각했다.

솔직히 말하겠다. 전영중 역시 성준수의 이상에 매료되었던 시기가 분명히 있었다. 능력을 사용하고 지친 성준수를 대신해 가이드인 전영중이 인사를 받을 때면 뿌듯함이 차올랐다. 기분 나쁠 수 없는 일이다.

재난 현장에 국한되었던 업무는 점점 범위가 넓어졌다. 범죄현장 습격, VIP 호위, 해외 파병.

스물아홉, 그들은 어느새 군복을 입고 총을 쏘고 있었다. 권총이나 소총이 아닌 저격총을.

이유는 간단했다. 성준수가 능력을 이용해 지속적으로 위치를 바꿔가며 지원사격을 하면 작전이 수월하니까. 작전지 내부 구조나 상황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으니 홀로 외부 지원을 하는 쪽이 위험도가 낮고 효율이 좋아서였다.

“겁 안 나냐?”

능력을 바닥까지 끌어 쓴 탓에 성준수는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었다. 가이딩이 채워지는 속도가 너무 뎌뎠다. 센티넬로서의 단점이었다. 성준수의 능력은 정확성이 높은 대신 소모되는 비율이 높았다. 평소라면 가이딩이 동시에 들어가니 괜찮은데, 작전 중에는 가이드의 안전 때문에 동행할 수 없었다. 전영중은 뜨끈하게 열이 오른 뺨을 감싸고 가이딩하다 결국 입을 맞췄다.

“겁나면 뭐 어쩌게. 내가 움직여야 피해가 적잖아.”

성준수가 헐떡이며 대답했다. 그게 키스로 숨이 부족한 탓인지, 가이딩이 부족해서인지 알 수 없었다.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불편하면서도 어쩐지 정념이 피어올랐다. 이럴 때가 아닌데. 그러면서도 전영중은 다시 얼굴을 내렸다. 누가 보더라도 순수하게 가이딩만이 목적이 아닌 걸 알 수 있는 질척한 입맞춤이었다.

“각인할까?”

“아예 배터리로 쪽쪽 빨아먹으려고?”

“쪽쪽 빨아먹은 건 너고.”

웃어넘기면서도 전영중은 쉽게 답하지 못했다. 어느 순간 길이 엇나간 느낌을 받았다. 능력을 한계까지 끌어다 쓰고 제 몸 하나 못 가누면서도 사람들의 고맙다는 말에 기뻐하던 모습을 본 게 언제가 마지막이었더라. 적어도 총을 든 이후로는 없었다.

“넌 아직도 영웅이 되고 싶어?”

“글쎄. 그래도 내 능력이 사람들을 구할 수 있다면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봐야지.”

만화에 나오는 영웅을 꿈꿀 나이는 지났다. 캡틴 아메리카도, 슈퍼맨도 모두를 구하지는 못했다. 사람을 죽여서 사람을 구한다는 현실을 살고 있었다. 전쟁은 끝났다는데 왜 아직도 전쟁이 남았는지.

그럼에도 성준수는 여전히 사람들을 구하고 싶어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전영중은 성준수의 길을 응원했고.

“하자, 각인.”

그러지 말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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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요한 페가수스 구매자

    정말 최고의 작품입니다 영화 한 편을 보는 것 같았어요 너무 재밌어요 ㅠㅠㅠㅠㅠ 후일담도 넘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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