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이에게 상처 주기 위하여

종뱅. 종수병찬. 둘 다 프로. 28x30

샤워를 마친 종수가 욕실에서 나왔을 때에도 병찬은 침대에 누운 채였다. 깨끗한 등을 내보인 채 허리 아래로 이불을 감고 모로 누워 웅크리고 있다. 종수는 허리에 감은 수건을 고치며 침대 곁으로 다가가 섰다.

“박병찬. 자는 거야?”

“아니.”

조금 허스키하게 잠겨 있지만, 잠기운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럼 일어나. 언제까지 퍼져 있을 거야?”

병찬이 꾸물꾸물 종수를 향해 돌아 누웠다. 살짝 찌푸린 단정한 이마 위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흘러내린다.

“허리 아파서 못 일어나겠어…. 그렇게 다리 막 누르지 말라고 했잖아.”

“너 유연성 떨어진 거 아니야? 좋다고 울 때는 언제고.”

병찬의 목소리에는 드물게도 응석부리는 티가 배어났지만, 종수는 싸늘한 대답으로 응수했다. 침대에 누운 채 가만히 올려다보던 병찬이 나직이 불렀다.

“최종수.”

“왜?”

“키스해주면 일어날게.”

“…미쳤냐? 난데없이 무슨 개소리를 해?”

“할 때는 온갖 곳을 다 물고 빨면서 끝나면 손가락 하나 안 대려고 하네.”

여전히 일어날 기색을 보이지 않는 병찬이 기지개를 켜며 실실 웃었다.

“우리는 섹파일 뿐이라 이거지?”

“씨발, 헛소리 좀 그만 하고 얼른 일어나라니까. 나 약속 있어서 나가야 돼.”

종수는 침대에서 물러나 침실에 붙은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옷장 문에 달린 전신거울을 향해 서서 젖은 머리에 남은 물기를 수건으로 닦아 낸다.

문득 거울 속의 제 모습 뒤로 움직이는 것이 나타났다. 침대에서 일어난 박병찬이 드레스룸 문가에 기대어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거울 앞에 선 종수 자신의 몸에 가려져 있지만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알몸인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종수는 돌아보지 않고 옷장을 열어 거울에 비친 병찬의 모습을 치워버렸다. 잘 정돈된 옷장 안에서 검은 셔츠를 골라내 걸치며 종수는 엄한 목소리를 내었다.

“박병찬. 나 나가야 한다고 말 했다. 빨리 씻고 가. 꾸물거리면 그 꼴 그대로 내쫓을 테니까.”

“누굴 만나는데 이 더위에 긴 소매 셔츠야? 정장 입게? 전에 말한 그 아가씨? 부모님이 소개했다는?”

병찬은 거듭되는 재촉은 못들은 척 흘려버리고 줄줄이 질문만 던진다. 종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동안 기다리던 병찬이 들으라는 듯 소리 내어 픽 웃었다.

묵묵히 셔츠 단추를 채우고 있으니 병찬이 떠나는 기척이 들렸다. 곧 멀리 욕실 문 닫히는 소리가 울린다. 그제야 종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침대에서 한참 미적거린 주제에 병찬은 샤워를 순식간에 마쳤다. 그러고는 젖은 머리를 말리지도 않고 입고 온 티셔츠와 트레이닝 팬츠를 걸치는 것으로 떠날 준비를 끝낸다.

넥타이를 단정하게 매고 길어진 앞머리를 반쯤 넘긴 헤어 세팅까지 끝낸 채 거실 소파에 앉아 기다리고 있던 종수는 현관으로 향하는 병찬을 뒤따랐다.

“박병찬. 다음주에는….”

“소개받은 아가씨랑 잘 되나 본데, 나랑 다음주에도 만날 수 있겠어?”

어깨 너머로 흘끗 돌아보며 병찬이 큭큭 웃었다. 그러면서도 그 시선은 종수의 눈에 와닿지 못하고 불안하게 흔들린다. 그게 몹시 만족스러웠지만, 종수는 그 감정을 얼굴에 일절 드러내지 않았다.

“다음주는 평소보다 한시간 늦게 만나자고. 트레이너 사정 때문에 개인 트레이닝 시간을 좀 조정했거든.”

“…흥.”

“야, 박병찬. 듣고 있어?”

느릿느릿 운동화를 신은 병찬이 허리를 폈다. 뒤에서 지켜보고 있으니 고개가 살짝 수그러든다.

“들었어. 한시간 늦게. 알았어.”

병찬은 그대로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아파트 현관문이 묵직한 금속성을 내며 닫힌 후에야 종수는 굳어 있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을 띄웠다.

일주일에 한 번, 최종수의 아파트에서 은밀히 만나는 파트너. 대낮부터 한데 얽혀 뒹구는 사이. 아무런 교감도 친밀함도 없이 그저 붙어먹기만 하는 관계. 그것이 지금 최종수와 박병찬의 모습이다.

박병찬과 다시 만난 것은 9년 만이었다. 종수가 대학과 NBA로 이어진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바로 한국 프로 리그에서 첫 시즌을 보낸 후의 일이다.

처음 한국에서 받은 시즌 오프 휴가가 시작되자 다른 팀 소속의 고등학교 동기 선수가 연락을 해왔다. 프로 선수가 되는데 성공한 동기들끼리 술 한 잔하자는 거였다. 거기서 종수는 서른 살이 된 박병찬을 만났다.

오랜만에 마셔 훅 올라온 술기운에 기대어 던진 도발 몇 마디에 박병찬은 쉽게도 넘어왔고, 그날 밤 종수는 제 아파트로 끌어들인 그를 품을 수 있었다. 그에게 마음을 털어 놓고 9년이 지나서야 겨우.

박병찬은 씨발, 9년 동안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늦은 아침, 종수의 팔 안에서 깨어난 그는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곤란한 표정으로 눈을 굴렸다. 숙취가 남은 머리로 도망칠 핑계부터 짜내고 있었다. 지난밤의 행위를, 달뜬 신음을, 애타는 속삭임을, 매달려오던 팔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려 했다. 9년 전에 보았던 것과 똑같은 얼굴로.

내가 종수 너 얼마나 좋아하는데. 내가 여자였으면 너랑 사귀었다. 아니 아니지. 농구 잘하지 잘 생겼지 몸 좋지, 너랑 사귈 수 있다면 내가 그냥 세상이랑 싸워야겠다. 9년 전의 박병찬은 제가 먼저 온갖 듣기 좋은 소리로 사람을 뒤흔들어 놓고는, 종수가 고백하자 슬그머니 발을 빼 버렸었다. 야야, 그냥 웃자고 농담한 거지. 그걸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어떡하냐. 곤란한 표정으로 눈을 굴리며 그 따위 소리를 지껄였었다.

그래서 종수는 9년만큼 나이가 들어놓고도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박병찬이 잔뜩 헝클어진 머리칼을 초조하게 쓸어 넘기며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이미 예상할 수 있었다.

“야, 박병찬. 뭘 그렇게 쫄아? 둘 다 성인인데 하룻밤 즐길 수도 있지.”

앞질러 터뜨린 종수의 말에 병찬은 갸름한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곤 이내 반색을 한다.

“우와. 최종수. 너 미국 생활 오래하더니 엄청 프리해졌다? 맞지 맞지.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웃음을 되찾은 박병찬은 침대 아래 흩어진 제 옷가지를 주워 모으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을 향해 던진 제안은 분명 충동적인 것이었다.

“가끔 이렇게 만날래? 구질구질하고 귀찮은 건 집어치우고 그냥 딱 어젯밤처럼.”

박병찬은 금방 돌아보지 않았다. 순간 움츠러드는 어깨, 긴장하는 곧은 척추. 박병찬이 망설인다.

9년 전의 박병찬은 고백 이후로도 몇 번이나 이어진 종수의 분노도, 애원도 모두 난처한 웃음으로 밀쳐내 버렸었다. 도망치는 데에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박병찬이지만 지금 눈에 띄게 동요하고 있다. 그래서 종수는 충동적으로 던진 말을 좀 더 밀어붙여 보기로 했다.

“어젯밤에 둘 다 꽤 즐겼잖아? 그리고 너도 지금 만나는 사람 없다며.”

“그렇…긴 한데. 하긴 뭐, 둘 다 충분히 선 지킬 수 있는 어른이고. 엉뚱한 데서 사고치는 것보다는 낫고. 그렇지?”

그렇게 시작된 관계는 3개월째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제 종수는 박병찬을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밀어붙일수록 도망쳐버리는 사람. 잡으려고 하면 바람처럼 빠져나가 사라지는 사람. 많은 이들에게 인기가 있는 탓인지 이 따위 인간이 되어버린 박병찬이지만, 반대 상황에는 꽤 서툴다. 이쪽이 물러서거나 발을 빼면 시원하게 떠나버릴 줄 알았는데 오히려 주저하고 머뭇거린다.

9년 전에는 조금도 알 수 없었던 박병찬의 흔들리는 모습들. 그걸 보는 것이 솔직히 흥미롭다. 상처주는 말과 태도에 움찔하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그가 안타깝고, 즐겁다. 차츰 매달려오는 것을 보는 것이 기쁘다.

티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핸드폰이 울렸다. 종수는 한 손으로 넥타이를 잡아 풀며 발신자를 확인하고 전화를 받았다.

“예, 엄마. 저예요.”

엄마는 오늘 함께 전시회 보러 가기로 한 약속을 잊지 않았는지 확인 전화를 한 거였다. 종수는 지금 나갈 준비를 거의 마쳤다고 대답하고,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하기로 한 것도 잊지 않았다고 선제적으로 답했다.

수화기 너머에서 엄마는 아쉬운 한숨을 쉬었다. 그 식당은 너랑 그 아가씨가 잘 되면 함께 보낼 생각으로 예약해 둔 거였는데.

“죄송해요. 좋은 분일 것 같지만… 저 지금은 한국 생활에 익숙해지는 게 먼저인 거 같아요.”

길어질 것 같은 엄마와의 통화를 이따 만나서 말씀하시라며 끊었다. 드레스룸으로 돌아간 종수는 옷장 안에 푼 넥타이와 재킷을 던져두고 셔츠 단추를 두개 풀었다. 소매 단추도 풀고 자연스럽게 걷어 올린다. 아직 어색한 사이인 누군가와의 데이트가 아니라, 엄마와 오후를 함께 보내기 위한 적당히 편안한 차림이 완성된다.

박병찬은 모르는 것이 많다. 부모님이 소개한 아가씨와 만남 자리에 종수가 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그는 모른다. 박병찬이 살짝 쉰 목소리로 이름을 부를 때마다 종수가 얼마나 동요하는지도 모른다. 연인 사이 같은 행동을 그가 요구할 때마다 종수가 얼마나 그의 바람을 들어주고 싶어하는지 전혀 모른다.

하지만 종수가 지금의 이 가식을 벗어 던지고 진심을 보이는 순간, 그는 또 손가락 사이로 흘러 나가 도망쳐버리고 말 것이다. 사뭇 곤란한 표정으로 실실 웃으면서.

그러니 최종수는 박병찬에게 계속해서 상처를 입힐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른 사람과 만나고 있다고 오해하면서도 박병찬은 도망치지 못한다. 등 뒤에서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상처의 고통을 내보이면서도, 다음주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한다. 무정하게 대할수록, 그는 최종수에게 이끌려오고 만다.

거짓말로 쌓아 올린 이 불안정한 탑이 얼마나 버텨줄 수 있을지는 종수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그로서는 바람 같은 그 사람을 붙잡을 방법을 이것 외에는 알지 못하는 것이다.

(end)

————

가끔은 종수쪽이 병찬이를 휘두르는 걸 보고 싶어서.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죠. 장도조형전에서 종수는 병찬이를 모두 간파했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캐해에 완전 실패 했었다는 걸.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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