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준] Anti-inertia

영중->준수->농구 (날조많음)

Europa by 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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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1)


너는 관성을 거스른다.

나는 이곳에 정지해 있고, 너는 가속도를 받으며 앞으로 나아간다. 클러치 샷에 자원하며 손을 든 그날로부터, 부산을 지나, 3점슛 라인 밖으로, 그리고 결승전까지.

그렇게 우리 사이의 거리는 점점 벌어지기만 한다.

Anti-inertia

in·er·tia [ ɪ|nɜːrʃə ] 1. 무력; 타성 2. 관성

0.

전영중은 여름에 하는 농구를 좋아했다. 거창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그저 농구는 실내 스포츠이기 때문에 다른 스포츠들에 비해 여름을 훨씬 쾌적하게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기내초·중학교는 명성에 걸맞게 체육관에 냉방을 빵빵하게 켜주기를 마다하지 않았고, 덕분에 야외에서 체력 훈련을 하는 날이 아닌 이상 땡볕에서 뛰어 땀에 절은 야구부 녀석들보다는 훨씬 뽀송뽀송한 상태로 숙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연습이 아니라 경기에 임할 때라면 얘기가 다르다. 고작 40분의 경기 시간, 전체 러닝타임은 아무리 길어도 두 시간을 넘기지 않지만 농구는 상상 이상으로 체력 소모가 크다. 냉방이 잘 되어도 한 시간만에 푹 젖어 버리고 마는 것이 일상이다. 경기 때문에 타교를 방문했는데 냉방이 잘 되지 않기라도 하면 삼십 분도 걸리지 않는다. 그런 경기에서 3, 4쿼터까지 갈 때쯤이면 이러다가 더위에 익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들게 되는데, 그럴 때 전영중은 속으로 기존의 입장을 손쉽게 뒤집곤 했다. 아, 여름 농구 존나 최악이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자주 이긴다는 것이었다. 어쩌다 경기를 지게 되면 진 데다가 녹초가 되기까지 해 기분이 더럽기 그지없겠지만, 중학교 때까지의 전영중은 그런 경험이 별로 없었다. 백전백승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기내중학교는 실력이 매우 좋은 편이었으니까. 땀범벅이 되어 숙소로 돌아가더라도 이겼다면 마냥 즐거웠다. 다음 경기도 얼른 하고 싶었다.

1.

고등학생이 되던 해, 전영중은 이번 여름이 유난히 덜 덥다고 생각했다.

“준수야, 올해 여름은 좀 덜 덥지 않냐?”

“뭔 소리야? 존나 더운데.”

”야, 올해 28년만에 오는 폭염이라던데? 농구도 좋지만 뉴스 좀 봐라 영중아~”

영민이 저 자식이. 평소엔 저랑 똑같이 뉴스도 안 보는 게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지껄이기에 헤드락을 한 번 걸어주고선 다시 농구공을 집어들었다. 덥다고? 심지어 폭염이라고? 그럼 왜 이렇게 안 더운 느낌인 거지? 혹시 재수없게 여름 감기라도 걸려서 컨디션이 나쁜 건가, 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연습이 끝났다. 벗어뒀던 반팔 져지를 주워입고 터덜터덜 숙소로 돌아가면서 전영중은 성준수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준수야. 나 열 있나 한번 재줘봐.”

“뭐야 씨발. 니가 알아서 해. 숙소에 체온계 있잖아.”

“아니, 나 컨디션 안 좋은 것 같아서 그래. 친구 이마에 손 한번 못 대주냐?”

“어. 숙소까지 1분도 안 걸리니까 가서 니 손으로 재라.”

덥다는 게 거짓말은 아니었는지 성준수는 아예 져지 지퍼를 연 채로 펄럭거리면서 빠른 걸음으로 숙소를 향해 사라졌다. 하여간 치덕거릴 틈을 안 주는 놈. 전영중은 싱글싱글 웃으며 숙소로 들어가 체온계를 귀에 꽂았다. 36도. 존나 정상인데?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그해 여름이 서늘하게 느껴졌던 이유를, 전영중은 다음 해가 되어서야 깨달았다.

2.

고등학교 2학년의 여름은 작년보다 더운 것 같았다. 숙소 침대에 멍하니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작년 이맘때쯤의 일이 떠올라 누구를 붙잡고 덥지 않냐고 물어보기 전에 전영중은 스마트폰 화면부터 켰다. ‘올해 여름’, ‘올해 여름 더위’, ‘폭염’ 등을 검색해 보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전년도에 비해 시원한 여름이 될 것이라는 예보 뿐이었다.

“영중아. 나갈 준비 해라.”

감독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행히도 감상에 젖었던 것은 몇 초 되지 않아 금방 경기 흐름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이 타이밍에서 자신을 교체 선수로 내보내겠다면, 저 까다로운 상대 팀 선수를 마크하기 위해서일 터다. 올해 들어서 세 번째 출전. 전영중은 기꺼운 마음으로 져지를 벗고 가볍게 몸을 풀었다. 그날 경기는 이겼다. 상대팀 에이스를 전영중이 완벽하게 틀어막으면서 흐름이 뒤집힌 덕분이었다. 중간 교체로 들어간 거긴 하지만, 간만에 여름 경기를 2쿼터 뛰었더니 제법 더웠다.

아, 그래서 더운 거구나.

숙소에 누워 그날의 경기를 머릿속으로 복기하면서 뒤늦게 찾아온 깨달음이었다. 당연한 거였다. 작년에 그는 경기에 제대로 출전하지 못했다. 딱 한번 나간 것도 가비지 타임에 교체로 들어간 것뿐. 쟁쟁한 실력자들이 넘쳐나는 원중고등학교 농구부, 농구부 중에서도 신입생, 그리고 신입생 중에서도 실력이 떨어져 전학 권유까지 받았던 자신이다. 작년에 이곳에서 자신이 부여받은 역할은 벤치 워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니 덥지가 않을 수밖에. 뛰지 않고, 한 자리에 가만히 멈춰 있는데 어떻게 더위를 느낄 수 있다는 말인가.

무언가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전영중은 아무런 노력 없이 그 변화를 얻어냈다. 2학년 들어서 4cm나 자란 키, 더욱 예리해진 반사신경과 탄력. 성장이 멈춰버린 많은 동기들이 그를 부러워했고, 올해 새로 들어온 신입생들은 약간의 선망 섞인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썩 내키지만은 않는 시선들이었지만 어쨌든 좋은 게 좋은 것이다. 그 덕분에 한 해 건너 뛴 여름 더위에 발끝이나마 담글 수 있었으니, 당연히 좋은 일이지. 이대로 잘만 흘러간다면 내년엔 주전으로 발탁되는 것도 꿈이 아닐 것 같았다.

하지만 어딘가 찜찜했다. 더위 탓인가? 그럴 지도 모른다. 여름 농구는 최악이었다.

3.

보지 않으려고 했던 경기였다. 어느 쪽이 이기든 기분이 더러울 것이 뻔했으니까. 지상고가 이긴다면 속이 뒤틀릴 것 같았다. 하지만 장도고가 이긴다면 심장이 철렁 내려앉을 것 같았다. 무슨 차이인지 정확히 구분내릴 수는 없었지만 비유하자면 그랬다.

하지만 결승전, 그것도 성준수가 뛰는 경기였다. 관심을 꺼버리는 것조차 마음대로 되지가 않았다. 씨발, 성준수 재수 없는 자식……. 시야에 없으니까 더 신경 쓰이는 것이 딱 재작년에 전학을 가고 연락이 두절됐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성준수가 원래 남에게 먼저 연락을 하는 타입이 아니라는 것은 어려서부터 같이 지낸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래도 뭐, 가끔 안부 정도는 전해줄 수 있는 거 아니냐? 넌 어떻게 그런 것도 없냐? 우리가 몇 년을 같이 했는데? 속이 쓰렸다. 자신이 먼저 문자를 보내도 좀처럼 돌아올 생각이 없는 답신이 짜증나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체육관 바닥에 엎드려서 온라인 중계를 보고 있는 놈들의 대화를 귀동냥만 하고 있었다. 감독님이 들어와 큰 화면으로 함께 경기를 보자고 하기 전까지는. 전영중은 내심 기뻐하면서 차가운 체육관 바닥에 주저앉아 그 자리의 누구보다 집중한 채로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예상대로 경기는 지상고에게 어려운 국면이었다. 최종수라는 인간 태풍으로 인해 꽉 막혀버린 상태. 그 벽을 진재유가 막 돌파해보려 하는 상황이었다. 윤경택 감독이 마치 해설자처럼 건네는 말들을 들으며 전영중은 공의 움직임을 쫓아가려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태풍처럼 모든 것을 휩쓸어버리는 최종수를 상대로, 감히 아이솔레이션을 시도하는 진재유.

“영중이.”

전영중은 돌아보지 않고 가만히 화면만 응시했다.

“이 정도면 충분한 설명이 됐겠지.”

감독님이 하시려는 말씀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패스를 뿌리고, 상대 수비를 자신에게 집중시키고, 돌파를 해내기 위해선 볼을 잡은 선수의 기술이 충분한지, 슈팅 성공률이 충분한지도 중요하다만 그전에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또 '하나'의 조건이 있다. 볼을 잡은 선수가, 상대에게 슛을 던지겠다는 의사를 보이는가. 즉,”

자신보다 강한 상대를 앞에 두고, 슛을 던질 수 있는 ‘용기’를 지녔는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감독님, 최종수는 괴물이에요. 놈을 직접 상대해 본 제가 가장 잘 압니다. 감독님도 알고 계시잖아요. 저는 장도고와의 경기에서 최종수를 한 번도 억제한 적이 없어요. 그런 놈들 앞에서 어떻게 용기를 내라는 겁니까? 저한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자신에게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 또한, 전영중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특별히 자존감이 낮다거나 한 건 아니다. 그냥 사실만을 이야기할 뿐. 그는 평생을 관성적으로 살아왔다. 하던 것을 계속해서 했다. 잘 하는가? 못 하는가? 사실 그런 것도 별로 중요하지는 않았다. 중학교 때까지는 농구를 잘 해서 계속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입학해서는 잘 하지 못하는데도 계속하기로 했다. 그 후 주전이 되기 위해서는 무언가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때도 그냥 하던 대로 계속했을 뿐이다. 왜? 변화가 두려웠으니까. 선택하는 게 무서웠으니까.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순전히 운이 좋아서다. 우연히 키가 더 컸고, 우연히 신체능력이 좀 더 좋아졌을 뿐. 그런 타고나는 것들을 내 노력이라고, 내가 의도한 변화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저는 항상 제자리였어요.

진재유의 롱 투 샷이 깔끔하게 그물을 갈랐다.

그리고 그 순간, 전영중의 머리에 떠오른 것은 우습게도 성준수였다.

‘이길 거다. 우리는.’

현실감 없는 새끼. 뭐? 이길 거라고? 저 최종수를, 장도고등학교를 상대로? 얼마 전까진 전국 최약체였던 게? 웃기지 마.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성준수. 하지만 전영중은 그 말을 하던 성준수의 얼굴을 기억한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태도. 포기하겠다는 선택지는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듯 단정적인 어조와, 마음이 꺾여본 적이라곤 단 한 번도 없음을 증명하듯이, 올곧기 그지없던 눈빛. 그 순간 녀석이 부러워서 미칠 것 같았다. 동시에 스스로가 한심해서 죽을 것 같았다.

성준수. 너는 무섭지도 않냐? 어떻게 그렇게 매번 관성을 거스를 수가 있는 거야?

성준수는 한 자리에 멈춰 있는 법이 없다. 앞으로 나아가든, 뒤로 후퇴하든. 한때는 성준수의 전학이 후퇴의 한 발짝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건 두 발짝, 아니, 세 발짝은 앞으로 나아가는 선택이었다. 마치 스텝백 3점 슛처럼.

전영중은 성준수를 질투했다. 그리고 꼭 그만큼 동경했다.

그는 성준수처럼, 관성을 벗어나 보고 싶었다.

하,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서였구나. 장도고가 이기면 심장이 내려앉을 지도 모른다고 느꼈던 건. 전영중은 성준수가 자신처럼 최종수라는 벽에 부딪쳐 마음이 꺾이지 않길 원했다. 동시에, 이런 시련에조차 꺾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 버린다면 멈춰서 있는 저로부터 얼마나 더 멀어질지 두려워 속이 뒤틀렸다.

전영중은 화면 속에서 바쁘게 뛰어다니는 성준수를 바라보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는지를 갈망하고 있을 녀석을.

그러니까 이번에는, 역시…… 네가 이겼으면 좋겠다.

나는 네가 그리는 슛의 궤적을 따라가 보고 싶으니까.

31.

전영중이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은 결코 운이 좋았기 때문만이 아니다. 관성적으로 행해온 노력이 그것을 뒷받침해준 덕분이라는 것을 본인이 깨닫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잠깐 물리법칙을 부수고 관성을 거슬러보고자 주먹을 쥐는 것도 절대 나쁜 선택은 아닐 것이다.

성준수는 한점 두려움 없는 풀업 3점 슛을 던졌다. 한여름처럼 파란 포물선이었다.

4.

생각해보면 전영중이 여름 농구를 좋아하기 시작한 데는 계기가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 봄, 농구를 시작하고, 이듬해 여름에 처음으로 우승을 했다. 성준수와 함께 승리를 거머쥔 날이었다. 그리고, 성준수의 클러치 샷이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그물을 때린 바로 그날이기도 했다. 저 어정쩡한 폼에서 어떻게 저렇게 깔끔한 슛이 나오는 걸까? 그것은 얼마 전까지도 풀리지 않던 미스테리였다.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았다. 그건, 흔들리고 넘어져도 결코 꺾이는 법 없는 성준수 그 자체인 슛이었으니까. 그날을 떠올리자 문득 손바닥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최종수의 슈팅을 블락했던 오른손.

19살의 여름, 전영중은 한번 더 여름 농구를 좋아하게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은처럼 나를 비춰줘

금처럼 나를 비춰줘

내 영혼의 다이아몬드처럼 나를 비춰줘

어둠을 벗어나 항해할 때 내 얼굴을 빛으로 바꿔줘

네가 나의 이정표가 되어 준다면 멋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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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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