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GHT or FLIGHT 04
센티넬X센티넬 빵준
REPORT C2281224-31
성준수
만 11세 168cm 50kg
가족관계 여동생
레우논 이식 매우 적합 판정
특이사항 부모 사망
성준수에 대해서.
어느 2217년에 태어나 대차게 울었다. 날 때부터 별 탈 없이 건강했다는 소리다. 부모 모두 센티넬이라 아들 또한 센티넬일 것이라 생각했으나 그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ESPT 검사 결과 레우논이 존재하지 않는 일반인으로 나왔다. 검사 결과에 부모는 안도했다. 아들까지 억지로 전장에 끌려가는 것만큼은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어린 센티넬이어봤자 좋을 것은 없었다. 지척에서 번지는 전쟁으로 끌려 나가는 것은 본인들 세대로 족했다.
성준수네 가족은 센터가 아닌 근처 기숙사 단지에 따로 숙소를 배정받아 살았다. 센티넬을 향한 지원은 차고 넘쳤기에 부족하지는 않게 살았다. 다만 혼자 지내야 하는 경우가 더러 생겼다. 웬만하면 부모 중 한 명씩 파견을 나갔겠지만, 센티넬과 가이드 페어였기에 둘이 함께 움직이는 일이 잦았다. 그 덕에 성준수는 일찍 철이 들었다. 다섯 살에 여동생이 태어나자마자 알아서 챙길 정도로 어른스러웠다. 날 때부터 성격이 둥글지는 않았으나 엄격한 교육으로 예의바르게 컸다. 부모님 속 썩이는 일도 크게 없었다.
도심 중앙에 사는 성준수에게 전쟁은 먼 이야기였다. 집을 비우는 일이 잦은 부모님도 언제나 멀쩡하게 돌아오셨다. 센티넬 자녀 전용으로 설립된 작은 학교에도 다니며 평화로운 삶을 살았다. 열한 살까지도 그랬다. 학교의 육 학년이랑 시비 붙어도 이겨서 돌아왔다. 전장에서 돌아온 부모님이 그 소식을 듣더니 놀라며 물었다. 왜 싸웠어? 걔네…, 아니 그 형들이 지수 울렸어요 먼저. 준수가 더 많이 때렸어? 혼날까 봐 잔뜩 쫄아있던 성준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오는 대답은 단순했다. 그럼 됐다. 성준수의 기개가 남다른 건 집안 환경 탓도 컸다. 쟤는 센티넬이었으면 어땠을지…. 주변에서는 종종 안도인지 안타까움인지 모를 말을 내뱉었다.
사실 그렇게 인생이 평탄하게 흘러갔으면 참 좋았으련만, 삶이란 건 참으로 녹록지 않았다. 전쟁 중에도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다가 평화를 맞이했습니다, 라는 이야기는 현실에 존재할 수가 없었다. 결국 성준수는 열두 살에 부모님의 유골함을 받아들어야 했다. 이유는 뻔하디뻔했다. 전사였다. 상황이 좋지 않아 가이드였던 아버지까지도 휩쓸렸다고 들었다. 이제 여덟 살 된 여동생은 상황을 겨우 이해하고는 실신할 정도로 울었다. 성준수만 전사자 장례식에서 꿋꿋하게 서 있었다.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저까지 울어버리면 여동생을 챙길 사람이 없어서 그랬다.
보상금을 받았지만 그리 대단하지는 않았다. 배정된 기숙사 주택도 비워야 했다. 전쟁통에 친척들은 두 아이를 맡는 것을 기꺼워하지 않는 티가 났다. 일찍 철이 든 성준수가 그 상황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니까, 성준수는 때아닌 의젓함으로 제 삶의 방향을 그려나갔다. 그는 무모하기와 확신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지킬 것이 있는 상황에서는 그 어떠한 것도 방해물이 되지 않았다. 자신의 부모가 그러했듯이. 성준수는 제 발로 WPC를 찾았다. 자신과 여동생을 지키기 위해 제 목숨을 팔았다. 12월, 추운 겨울의 일이었다.
REPORT C2290506-04
전영중
만 12세 175cm 54kg
가족관계 외동
레우논 이식 적합 판정
전영중에 대해서.
2217년 5월 6일 분만실에서 태어난 전영중은 울음소리부터 장군감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장교 집안의 외아들이었으니 그 말은 어찌 보면 최고의 칭찬이었다. 일반인 부모 아래 태어난 전영중의 ESPT 검사 결과는 당연했다. 전쟁과 거리를 멀리하고 살 수도 있었지만 전영중은 내심 아버지처럼 되고 싶었다. 말하자면 온전히 제 의지는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멋진 장교가 되어야 한다는 소리를 듣고 자라 이제는 제가 스스로 군인이 되고 싶은 것인지, 혹은 주변의 은근한 압박인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 압박에 잡아먹힌 것은 아니었다. 가정은 화목했다. 과체중으로 태어났던 전영중은 날이 갈수록 살 쑥쑥 빠지며 위로 자랐다. 튼실한 하체는 덤이었다. 부모님은 그런 전영중을 자랑스러워했다.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할 사람이라며 칭찬하기 바빴다. 생일이 언제인지도 까먹은 성준수와 달리 전영중은 여전히 제가 태어난 날이 언제인지를 기억하고 있었다. 매해 생일 때마다 부모님이 극진히 챙겨준 탓이었다. 전쟁 통에도 생일 때면 전영중의 아버지는 늘 집을 찾아왔다. 전영중은 그래서 언제나 자신의 생일을 기다렸다. 올해는 어떤 선물을 받을지 기대됐다. 남들이 들으면 다 부러워할 만한 풍요롭고도 안정적인 삶이었다.
그런 전영중의 삶에 금이 가는 건 순식간이었다. 아버지가 한 번은 심각한 표정으로 집에 들어왔다. 정부 청사로 출근을 했다 돌아온 참이었다. 그는 제 아들부터 찾았다. 그러더니 앞에 선 전영중에게 말했다. 영중아, 원중 프로젝트에 참여해라. 인간을 대상으로 한, 심지어 아동들이 대상인 원중 프로젝트에 대한 반발이 심해지던 참이었다. 요지는 단순했다. 노블리스 오블리주. 현재 높디높으신 장교의 아이들까지 원중 프로젝트에 참여시킴으로써 정부에서는 실험 전 과정을 안전하게 관리·감독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재수 없게도 전영중은 가장 적합한 나이대에 있었다. 한평생 정부에 충성하던 그로서는 이번 명령 또한 거부할 수 없었다. 절대복종을 통해 유지되는 내부 질서였으니까. 걱정스럽긴 하지만 제 아들이 센티넬 발현만 된다면 전쟁 영웅이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분명 제 아들은 그런 큰 재목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린 전영중 또한 원중 프로젝트가 무엇인지 모르지 않았다. 이야기를 듣자 덜컥 겁이 났다. 혹시나 잘못될까 봐, 영영 부모님을 보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 저 가고 싶지 않아요. 그렇게 말하며 서럽게 울었다. 그래도 변하는 건 없었다. 아들에 대한 사랑도 가득했지만, 정부에 대한 충성심은 그보다 더 차고 넘쳤다. 전영중은 등 떠밀려 원중 프로젝트 대상자가 되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전영중의 의사는 전혀 없었다. 평소에 나라를 위해 군인이 되겠다는 생각은 숱하게 했지만, 이런 상황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WPC 입소일까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전영중 인생 가장 최악의 생일 선물이었다.
그렇게 전영중은 이름을 잃었다. 대신 알 수 없는 코드 번호로 불렸다. C2290506-04. 개성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이 단순히 식별만을 위한 최소한의 정보 값. 그게 전영중의 새로운 이름이었다. 2229년 5월 6일에 입소한 자. 그리고 5월 중에서 4번째. 그 의미를 전영중은 한참이 지나서야 알 수 있었다.
매일 지겨운 검사와 실험이 반복됐다. 팔에는 주삿바늘 자국이 늘어갔다. 같은 방에 지내는 아이들은 죽은 눈을 한 채 그 누구도 전영중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전영중은 자주 울었다. 당장에라도 부모님이 후회하며 자신을 꺼내주러 올 것 같았다. 그럴 일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믿었다. 그런 작은 희망마저 없다면 전영중 자신도 다른 아이들과 같이 죽은 눈을 할 것 같았으므로. 매일 밤 엄마 아빠를 찾으며 흐느끼는 것은 내가 나로 남기 위한 최후이자 유일한 방법이었다.
반년이 넘도록 변하는 것은 주위에 있는 아이들뿐이었다. 새로운 번호를 단 아이들이 나타나기도 했고, 원래 있던 아이들이 사라지기도 했다. 기존에 있는 아이들이 사라지는 것을 '폐기'라고 부른다는 것을 오가며 주워들은 대화를 통해 알 수 있었다. WPC는 기이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도덕이 없고 욕망이 앞섰다. 그곳에서 꼬박 반 년을 지내며 전영중은 체념을 배웠다. 눈물 자국은 진작 마른 지 오래였다.
그랬던 전영중이 다시 울음을 터뜨린 것은 첫눈이 오던 밤이었다. 그날은 진절머리나는 검사도 없었다. 그저 방을 옮겼을 뿐이다. 그게 문제였다. 전영중은 제가 영영 폐기되는 줄 알았다. 쓸모를 증명하지 못해서, 아무런 필요가 없어서. 폐기 후의 미래를 그릴 수가 없어서 그랬다. 코드 번호를 정리하며 방이 재배정 되었음을 알게 되자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제야 다시 부모님이 보고 싶었다. 원망스러우면서도 애틋했다. 그 상황에서도 찾을 사람이 그들밖에 없어서 더욱 그랬다.
이름이 뭐야? 이불을 뒤집어쓰고 훌쩍이고 있을 때 누군가 말을 걸었다. 전영중은 울음을 그치고 목소리의 주인을 쳐다보았다. C2290506-04의 진짜 이름에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곳에서 유일하게 먼저 이름을 물어준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했다. WPC에서 지내며 처음으로 받아보는 호의였다.
'하얗다….'
처음 든 생각은 그랬다. 새하얀 피부에 고양이처럼 올라간 눈매. 홀린 듯이 이름을 물었다. 성준수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전영중은 몇 번이고 그 답을 곱씹다가 깨달았다. 자신의 진짜 이름을 말해준 이는 성준수가 유일했다는 것을. 그동안은 이름을 물어도 코드 번호나 무시로 돌아오곤 했으니까. 어떠한 호의는 누군가에겐 꿈이 된다. 성준수는 몰랐겠지만, 전영중에겐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남몰래 기댈 사람이 새롭게 생긴 순간이었다. 전영중은 그 작은 호의로부터 살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게 되었다.
검사, 실험, 반응 확인, 데이터 수집. 매일 똑같은 일상의 반복. 그 속에서도 전영중은 다시 눈동자의 빛을 찾았다. 실험이 계속되어도 버틸 수 있었다. 성준수와 밤에 몰래 하는 젠가 게임, 그게 뭐라고 넘치게 즐거웠다. 그 단순한 게임 하나가 삶의 희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 가정에서 평화롭게 살 때는 몰랐던 절박함이자 간절함이었다.
"준수야."
"왜."
"너 근데 생일 언제야?"
"몰라."
"왜?"
"……? 기억 안 나니까 그렇지. 그럼 넌 기억나냐? 지랄."
"난 기억하는데."
"언젠데?"
"5월 6일."
"너 생일에 여기 들어왔냐?"
"어."
"미쳤네."
"준수도 그럼 생일 12월 24일 할래?"
"너도 미쳤냐?"
"없으면 좀 그렇잖아."
"몰라 씨발. 알아서 하든가."
"그럼 준수 생일은 12월 24일~! 얼마 안 남았네."
그 말에 성준수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갑작스럽게 정해진 성준수의 생일은 삼 일도 채 남지 않았다. 성준수는 침대에 엎드린 채로 전영중에게 물었다. 그럼 생일날 뭐 챙겨줄 건데? 그 말에 전영중은 깊은 고민을 했다. 외출조차 할 수 없는 WPC에서 선물을 구할 수는 없었으니까. 장난이었다고 말하려던 순간 전영중이 입을 열었다. 나중에 준수 소원 하나 들어줄게. 성준수는 약간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 꼭 지켜라. 나 나중에 반드시 쓸 거야.
성준수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은 날이 있었다. 전영중은 비어버린 침대를 한참 동안 바라보곤 했다. 성준수의 오랜 부재의 이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드디어 레우논 이식을 받은 것이다. 다행히도 성준수는 무사히 제자리로 돌아왔다. 안 아파? 어, 아프더라. 도망치고 싶더라고. 그 말에 전영중은 섬찟 겁을 먹었다. 성준수까지 그렇게 이야기할 정도면 얼마나 아플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래도 마음을 다잡았다. 나도 할 수 있어. 준수도 했잖아. 나도 버틸 수 있어. 그렇게 또다시 성준수는 전영중의 버팀목이 된다.
그러던 어느날 성준수가 또 사라졌다. 레우논 이식 때보다 더 오랜 기간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전영중은 참지 못하고 연구원들에게 성준수의 행방을 물었다. 그들은 성준수가 떠났다고만 말했다. 그 말에 전영중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성준수가 떠났다. 저에게 말도 없이. 성준수는 결국 WPC를 벗어난 것일까. 이 지긋지긋한 곳으로부터 자유를 찾아 떠난 것일까. 전영중은 그게 못내 서운했다. 인사 정도는 해줄 수 있었잖아. 그렇게 성준수를 향한 원망이 새어나갔다. 떠나간 자의 빈자리에는 원망이 된 그리움만 남았다.
하루하루를 꾸역꾸역 살아가던 전영중에게도 드디어 레우논 이식 수술이 다가왔다. 전영중은 도망치고 싶다던 성준수의 말을 여실히 이해했다. 눈을 뜨는 것만으로도 구토감이 올라왔고, 숨을 들이쉴 때마다 코가 마비되는 것 같았다. 잔뜩 예민해진 오감이 전영중을 잠들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영중아, 너도 나중에 나처럼 이식받게 되면 말야, 여기 들어온 이유를 잊지 마. 성준수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내가 여기 들어온 이유가 뭐더라. 준수야, 나는 여기 들어온 이유 따위 없었어. 내 의지를 벗어난 채로 나는 이곳에 있었어. 필사적으로 버티는 네가 있어서 나도 버텼어. 그런데 너는 나를 버리고 떠났잖아. 인사도 없이 사라졌잖아. 네가 떠났다면 나는 너와 다르게 버틸 거야. 이곳에 남을 거야. 핑핑 도는 머릿속을 증명하듯 저절로 눈물이 샜다.
전영중에겐 오랫동안 능력 발현의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주변의 많은 아이들의 얼굴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쓰던 침대마저 새것으로 바뀌는 광경을 목도했다. 시간의 흐름은 더디지만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었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상에서 쑥쑥 크는 키로 그 진척되는 세월을 짐작했다. 이식받은 레우논에 의한 날 선 감각들에는 적응된 지 오래였는데 이능력은 잠잠했다. 사람에 따라 몇 년이 걸린다고는 하지만 첫 일이 년은 불안에 휩싸인 채 지냈다. 레우논을 무사히 이식받아도 폐기되는 아이들은 널리고 널렸다. 자신이 그중 하나가 되지 말라는 법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럼에도 전영중은 몇 년이 지나도 WPC에 머물렀다. 열일곱 정도 되었을 때는 문득 현실을 깨달았다. 고위 장교 아들인은 본인은 폐기되지 않는다. 성공작이든, 실패작이든.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찝찝함을 떨쳐낼 수 없었다. 얼마 가지 않아 눌어붙은 감정의 찌꺼기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전영중은 제 인생의 결과조차 제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뼈아팠던 것이다. 알면서도 괜히 인정하기가 싫었다. 결국 전영중이 할 수 있는 일은 WPC에서 묵묵히 살아가는 것밖에 없었다. 머무르다 보면 답이 나오리라 생각했다. 센티넬로 다시 태어나 이곳을 벗어나든, 폐기 아닌 폐기처분되어 이곳에서 쫓겨나든. 그렇게 선택을 미루니 마음이 편했다. 답이 보일 때까지 관성적으로 살아간다면 어쨌거나 끝이 보이겠지.
보고합니다. C2290506-04, 이능력발현에 성공했습니다. 중력 계열 능력이 확인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보고합니다. C2290506-04, 이능력발현에 성공했습니다. 센티넬 관리 센터로의 이관을 요청합니다.
열아홉이 된 직후의 겨울. 전영중은 드디어 WPC를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게 이관된 센티넬 관리 센터. 그곳에서 성준수를 마주했다. 키는 그때보다 훨씬 컸지만, 여전히 새하얀 성준수를 전영중이 잊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전영중은 인사를 할까 고민했으나, 성준수는 그를 모른다는 듯이 스쳐 지나갔다. 괜히 부아가 치밀었다. 저를 두고 잘 지내고 있던 것 같아서 그랬다.
하지만 며칠 센터에서 지내는 동안 마냥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른 센티넬보다 배로 현장을 구르고, 가이딩을 거부하고, 혼자서 지내기를 고집하는 독특한 성준수. 개성 넘치는 센티넬들 사이에서도 성준수는 단연 튀었다. 그런 성준수에 대한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전영중에게로 흘러들어왔다.
워낙 혼자 지내길 고수하시는 성준수였기에 전영중은 쉽게 다가갈 기회를 만들지 못했다. 문득 좋은 생각이 난 건 한 가지 소문 때문이었다. 잘 때도 능력 조절이 되지 않아 방이 다 얼어붙는다는 이야기. 전영중은 아버지와의 대화에서 그 이야기를 묘하게 흘렸다. 제가 그걸 컨트롤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이야기도. 그 뒤는 예상대로였다. 전영중은 어렵지 않게 성준수의 방으로 배정될 수 있었다. 전영중 인생에서 스스로 결정한 첫 선택이었다. 성준수는 전영중에게 그런 사람이었다. 우연히 엮이게 되는 것에 늘 마음 일부분을 걸고 살게 되는 존재.
센터에 비상벨이 울려 퍼진 다음 날. 곧바로 비보가 들려왔다. 센티넬이 죽었다. 이럴 때 보면 센티넬도 별반 다를 것 없는 보통의 사람이었다. 성준수는 사람들이 그 사실을 곧잘 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총 하나 잘못 맞거나 까딱해서 폭탄이 터지면 죽는 건 매한가지인데. 최소한의 보호장비만을 입은 채 죽음 가까이 다가가야만 하는 처지가 늘 안타까웠다.
종종 있는 일이야. 익숙해져. 소식을 듣자마자 그대로 정지한 전영중에게 성준수가 말했다. 익숙해져야 한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전영중은 남의 죽음은 숱하게 보아왔지만, 동료의 죽음을 코앞에서 마주한 건 처음이라 더욱 그랬다. 성준수는 덤덤한 낯을 하고 있었으나 전영중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일순간 하얗게 질리던 얼굴을. 익숙해져야 한다는 말은 어쩌면 성준수 본인에게 거는 최면일지도 몰랐다. 그래, 나도 익숙해져야지. 전영중은 그렇게 답한다. 성준수는 웬일로 순순히 답을 하냐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꼬투리를 잡으며 괜히 시비 트는 장난을 걸 만큼 전영중은 어리지 않았다. 그래서 성준수의 표정을 짐짓 모르는 채 굴었다.
장례는 조촐하게 치러졌다. 영정사진도 구하지 못해 빙긋이 웃고 있는 단체 사진에서 오려냈다. 그게 참 묘했다. 하필이면 왜 웃는 사진인가. 다들 그 말을 하고 싶어 하는듯 했다. 전영중은 그 사실도 이상했다. 죽음 앞에 웃음은 필요 없는가. 까맣게 타버린 시체 위에 뿌려질 웃음은 하나도 용납되지 않는가.
죽은 센티넬의 이름을 들었지만 금방 잊어버렸다. 한 번도 마주치지 못한 센티넬이었다. 그가 가진 가치는 그 정도의 무게였다. 말하자면 벌레보다 못한 목숨이었다. 벌레들은 자유의지라도 있었으니까. 가고 싶은 곳으로 날아갈 수라도 있으니까. 비록 그 끝이 하찮은 죽음이더라도. 하지만 이곳에서의 죽음은 벌레와 다름없이 하찮았으나, 자유 의지는 없었다. 삶의 목적조차 정해져있는 곳이었다. 전영중은 그 생각에 문득 슬퍼졌다.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성준수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결국 바닥은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바닥을 향해 계속해서 낙하하는 것이다. 그것을 딛고 일어날 수 있을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굳세게 딛고 일어나야 했다. 바닥에 발이 닿지 않아도 존재하지 않는 바닥을 딛고서라도. 그저 살아야 했기 때문에. 그렇기에 보이지 않아도, 닿지 않아도, 그냥 딛고 일어서야 했다. 바닥이 없는 인생이란 선택받은 소수를 제외하곤 존재할 수 없는 이야기였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그렇게 살아야 했다. 삶의 목적은 그것뿐이었으므로. 전영중은 그것에 단 한 치의 의심도 갖지 않았다.
불행 중 다행인지 시체는 멀쩡했다. 센티넬들은 먼저 떠난 전우에게 조의를 표했다. 전영중은 저 관 안에 저나 성준수가 들어있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현실이 아찔해졌다. 무사히 살아 돌아온 세월이 짧게는 반년에서 길게는 오 년이 넘어간다고 해도 결국 죽음은 지척에 번져 있었다. 전영중은 내색하진 않았으나 조금 두려운 마음이 든 것은 사실이었다. 많이는 말고 아주 조금.
장례식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허무하게 끝이 났다. 이 상황에 구색이라도 갖추는 게 어딘가 싶기도 했다. 결국 끝에 남은 것은 허무함뿐이었다. 오후의 공기가 된통 물컹했다.
센티넬들이 필수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장례 절차가 끝난 뒤 성준수는 바로 자리를 떴다. 전영중이 붙잡을 새도 없었다. 성준수를 쫓아가려는 전영중을 지국민이 붙잡았다. 휘성이 위로해 주러 가자. 그제야 죽었던 센티넬의 이름이 생각났다. 김한. 그래, 그게 떠나간 센티넬의 이름이었다. 전영중이 알기로는 이휘성과 여러 번 전투에 나가며 가깝게 지냈었다. 원중 센티넬은 아니지만, 원중 센티넬들과도 스스럼없이 지내던 사람. 모두가 시기와 동경을 함께 담은 눈으로 거리를 벌리려는 원중 센티넬들과도 언제나 가깝게 지내려던 사람. 그 생각이 들자 마음이 괜히 무거워졌다.
이휘성의 등을 몇 번 도닥여준 뒤에야 숙소로 돌아올 수 있었다. 열린 문 너머로 소파에 아무렇게나 누워버린 성준수가 보였다. 표정이 좋지 않았다. 성준수가 언제 환히 웃은 적이 있긴 하겠냐마는, 지금은 잔뜩 기분이 나쁜 상태라는 것은 그 누구라도 눈치챌 정도였다.
"김한이랑 친했어?"
"걔가 누군데."
"죽은 센티넬."
"아니."
"그런데 왜 그렇게 기분이 안 좋은데."
"그냥 장례식이니 뭐니 하는 게 같잖아서."
"……."
"씨발, 그거 결국 다 보여주기식이야. 국장이래도 그렇지, 센티넬 쭉 세워놓는 것도 웃기잖아. 그렇다고 임무 나간 애들 싸그리 모아 부르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국장인데 최대한 예우 갖추면 좋지."
"결국 언론에 내세우려는 거야. 센티넬에 대한 예우를 이렇게나 갖춘다고. 다 쓸데없는 짓에 들러리 서는 게 뭐가 좋아. 그게 예우고 애도냐? 씨발, 좆 같게."
"정부 소속인데 너무 불신하는 거 아냐?"
"꼭 모든 걸 철저히 믿어야만 하냐? 좆 같은 건 원중 애들은 안 해줘. 보통 가족 없으니까. 그걸 내가 여기서 오 년 넘게 구르면서 계속 봐왔는데 그래도 믿으면 그게 병신이지."
성준수의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전영중은 굳이 말을 더 얹지 않았다. 여기서 말을 더 꺼냈다간 정말로 싸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전영중은 성준수와 진심으로 싸우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전에도, 그리고 이번에도.
전영중이 제 방으로 들어가고 난 뒤 거실에 남은 성준수는 다시 소파에 누웠다. 눈 위로 보이는 전등이 눈이 부셨다. 팔을 들어 눈을 가리니 그제야 좀 살 것 같았다. 어제부터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 이유조차 명확하지 않아서 더욱 그랬다. 사위가 온통 고요했다. 고요함을 틈타 생각의 파도가 밀려왔다.
사 년도 넘게 지난 일이었다. 센티넬의 국장에 참여하는 것이 아직은 당연했던 시절. 맞는 가이드는 없었지만 그래도 가깝게 지내던 센티넬이 하나쯤은 있던 시절. 서현우. 그게 그의 이름이었다. 센터로 이관된 지 몇 달 만에 성질 더럽다고 소문난 성준수와도 잘 지내던 센티넬. 스스럼없이 지내던 것까진 아니었으나 같이 밥을 먹고 함께 현장 지원을 나가고 자주 이야기를 나누던 사이.
나 너 봤었어. WPC에서 종종 오가며 봤었어. 잘생겨서 기억해. 그 대화가 관계의 시작이었다. 다른 이들과 다르게 가이딩을 거부하는 성준수를 가십의 주제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가이딩 안 받아? 그렇구나. 그게 끝이었다. 성준수는 적당히 제 앞가림 할 줄 알고 거슬리게 붙어오지도 않는 서현우가 마음에 들었다.
「왔냐? 오늘은 멀쩡하네.」
「네, 형. 접전 지역은 아니라서요. 형 호출 울려요.」
「아, 나도 가봐야겠네. 너 오니까 내가 가고 둘 다 바쁘네.」
「잘 다녀오시든가요.」
「같은 말도 좀 예쁘게 해줄 줄을 몰라, 준수는. 뭐, 됐다. 나도 멀쩡히 돌아올게.」
「네. 나중에 봬요.」
멀쩡히 돌아올게. 그걸 뭐라 그러더라. 사망 플래그? 서현우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멀쩡히 돌아오지 못했다. 며칠 뒤, 성준수가 들은 것은 센터 내에 시끄럽게 울리는 비상벨 소리였다. 높은 음이 길게 반복되다 가라앉아 낮은 음이 짧게 흘러나오는 것이 반복되는 비상벨. 해당 음이 울리는 상황은 명확했다. 목숨이 위험한 센티넬이 이송되었을 때. 센티넬이 다쳐서 이송되는 경우는 현장에 함께 지원 나간 가이드가 피치 못하게 죽거나 다쳐 가이딩을 하지 못하는 상황 뿐이었다. 보호 대상 1순위인 가이드마저 죽거나 다쳤다면 센티넬의 상태도 장담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성준수는 그때까지만 해도 실려 온 대상이 서현우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날 오후가 되어서야 비보를 들을 수 있었다. 가슴이 무겁게 추락하는 기분을 느꼈다. 누군가의 죽음에는 이골이 날 정도로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가까운 이의 죽음은 또 달랐다. 부모님의 죽음을 전해 들었을 때와도 달랐다. 성준수는 더는 어리기만 한 아이가 아니며, 죽음이 무엇인지를 항상 목도했기 때문이다. 그때의 충격은 몇 번을 곱씹어도 쉬이 흐려지질 않았다.
성준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생활복을 정복으로 갈아입을 준비를 했다. 센티넬의 장례식에는 센티넬 정복을 입는 것이 의례여서 그랬다. 그런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장례식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성준수는 불안한 마음에 이주원에게 달려가 물었다. 서현우 장례식은 안 해요? 글쎄, 지금 상황이 좋지 못해서 미뤄진 것 같은데…. 이주원은 묘하게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제야 현실을 깨달았다.
서현우는 성준수가 마주한 죽은 센티넬 중 유일한 원중 센티넬이다. 서현우는 여동생이 있었던 성준수와 달리 외동이었다. 서현우는 전쟁고아로 원중 프로젝트에 자원했다. 서현우의 장례를 치르지 않더라도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사실들이 조합되자 성준수의 척추를 따라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마치 제 미래를 본 것 같기도 했다. 자신의 시신도 어딘가에 걸레짝처럼 버려지진 않을까. 힘없는 어린 성지수는 제 오빠가 죽은 것도 모르고 살아가지 않을까. 혹여나 알더라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슬퍼하기만 하진 않을까.
성준수는 한숨을 깊게 내쉬며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무기력하게 감상에 빠져있을 시기는 이미 지나있었다. 부러 가까운 사람을 만들지 않으려던 결심도 실패한 마당에 전영중에게 괜히 화풀이한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WPC에 있을 때 부모님은 있다고 들은 것 같은데, 그럼 장례식은 해주겠다는 생각에 내심 부러운 마음도 함께 생겼다. 돌이켜보니 그것 말고는 아는 게 없었다. 부모님은 무슨 일을 하시는지, 그런데도 왜 WPC에 오게 됐는지. 내일 성질 낸 거 사과하면서 물어볼까. 그렇게 생각하며 성준수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모든 방문이 닫힌 숙소가 고요했다.
성준수는 늘어지게 잠을 잤다. 늦잠을 잔 것이 언제인지도 기억이 희미할 만큼 오랜만이었다. 센티넬의 수면시간이 길어지는 것은 좋은 징조가 아니라고 했는데,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있었다. 여전히 몸 구석구석이 쑤셨지만, 일상처럼 따라붙던 피로는 많이 가라앉았다. 누워 있는데 자꾸만 서현우의 생각이 났다. 성준수는 그날을 곱씹고 있는 자신이 너무나도 염치없게 느껴졌다. 성준수는 센티넬의 장례식 때마다, 혹은 비상벨이 울릴 때마다 서현우의 생각을 했다. 전영중이 친한 척 다가왔을 때, 성준수는 지치지도 않고 그의 옛 동료를 떠올렸다. 만약, 아주 만약, 서현우의 장례식이 치뤄졌더라면. 성준수가 마지막으로 그에게 따뜻하게 말해줬더라면. 그에게 곁을 주지 않았다면. 아니면 차라리 모르는 사이였더라면….
그래서 그 누구와도 가깝게 지내지 않았다. 상실의 감정에 먹혀 무너지고 싶지 않았다. 자신에게는 아직 지켜야 할 것이 남아있었기에. 그런데 난데없이 룸메이트를 자청한 전영중이 속절없이 거리를 좁히려 할 때 덜컥 두려운 마음이 앞섰다. 가까워지려는 이유가 짐작도 가지 않아서 더욱 그랬다. 제 성질머리를 알고 거리를 두는 다른 센티넬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 의아하기도 했다. WPC에서 함께했던 것을 안 이후로 그 의문은 쉽게 풀렸지만.
결국 가까워질 사람은 필연적으로 가까워지게 된다.
장례식이 있던 날 저녁, 전영중의 방문을 두드려 불러냈다. 성질내서 미안하다. 고의는 아니었어. 전영중은 성준수가 사과할 줄 몰랐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성준수는 전영중이 또 무어라 비아냥거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괜찮아, 너도 내가 모르는 사정이 있었겠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물론 성준수를 완전히 이해한 낯빛은 아니었다. 성준수가 보기에 전영중은 센터에 합리적인 의문을 가지는 것 같으면서도 잠자코 따랐다. 그 의문들을 밖으로 표출하는 성준수와는 조금 달랐다. 성준수는 전영중의 정의가 충성 그 자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며칠 전부터는 일주일간의 휴가였다. 보통은 분기별로 꼬박꼬박 주어지는 휴가였다. 레우논도 하나의 장기이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능력을 쓰다 보면 피로가 누적되고 효율이 떨어졌다. 가이딩을 받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그렇기에 센티넬들은 거의 의무적으로 휴가 기간을 가졌다. 임무에서 돌아온 뒤에 갖는 휴식 기간과는 다르게 훈련에서도 제외되며, 능력을 사용하는 것 외에 모든 일상생활이 가능했다. 센터 밖으로의 외출도 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보장되어 있는 휴가 기간이었지만 성준수는 예외였다. 생각해 보니 외출까지 자유로운 휴가를 받는 것은 거의 일 년만의 일이었다. 지칠 정도로 굴려지는 건 이미 익숙했다. 센터 내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듣는 것보다는 전투에 임하는 게 잡생각이 들지 않아 편하기도 했다.
휴가를 받은 첫날에 여동생을 보러 갔다 온 뒤로 성준수는 외출 한 번 하지 않고 숙소에 처박혀 있었다. 그럴 때면 매번 그를 불러내어 신경 검사니 약물 의존증 검사를 해댔던 이주원도 요새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어른이라고 싫은 기색 다 내비치며 거절하지 못했던 성준수였으니 오히려 이주원의 바쁜 업무는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성준수가 하는 일이라곤 방 침대에 누워서 꾸벅꾸벅 졸다가, 일어나서 운동을 하다가, 다시 까무룩 잠드는 것뿐이었다.
"준수야."
갑자기 방문이 벌컥 열렸다. 어쩌다 보니 전영중과도 휴가 기간이 겹쳤다. 전영중 또한 숙소를 나가지 않고 남아있던 것인지 대뜸 성준수를 불렀다.
"아 씨발, 노크 좀 하라고."
"언제부터 그런 걸 하는 사이였다고."
"말 이상하게 하지 마라."
"나가자."
"뭐?"
"나가자고. 놀러."
되지도 않는 억지였다. 성준수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도 전영중은 빙글빙글 웃기나 했다. 30분 뒤에 출발할 거야. 준비해 놔라. 뻔뻔한 말을 남기며 전영중은 다시 문을 닫았다. 성준수는 여전히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 저 새끼가 뭐라고 한 거야?
무시할까 생각도 해봤지만 결국 옷을 꿰어 입었다. 레우논 감응에 문제가 생겼을 때의 초기 증상 중 하나는 늘어나는 수면 시간이라는 것이 생각나서 그랬다. 이 사실을 알면 또 이주원이 이런저런 검사로 귀찮게 할 것이 분명해서 그랬다. 수면 시간이 늘어난다고 해서 반드시 감응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적어도 전영중과 외출했다는 기록이 남으면 적어도 제가 멀쩡하게 잘 지내고 있을 것으로 알 것이었다. 그렇다면 성준수를 불러대는 횟수도 줄어들겠지. 그리고 계속해서 떠오르는 서현우에 대한 생각을 잊고 싶은 것도 있었다.
전영중은 준비를 마치고 나온 성준수를 보고 활짝 웃었다. 그 모습을 보고서야 성준수는 얼핏 깨달았다. 자신은 후회하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고. 언제가 끝이 될지 모르는 관계에서 굳이 매몰차지고 싶지 않았다. 완전히 밀어내거나 완전히 받아주거나. 성준수는 뭐든 확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도심은 지나치게 멀쩡했다. 국가의 중앙부에 살고 있는 자들은 전쟁의 그늘이라는 것을 실감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 여동생을 데리고 몇 번 구경한 적은 있으나, 성준수는 도심에 올 적이면 묘한 불쾌함을 느꼈다. 흙먼지 속에서 뒹구는 전장과 풍족한 도심의 모습 간의 괴리가 선연해서 그랬다. 성준수는 그것을 괜히 전영중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저번과같이 또다시 언쟁이 생길까 봐 그랬다. 그런 걱정 없이 함께 살 수 있는 세상이었으면 참 좋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을 할지 헤매다 향한 곳은 영화관이었다. 끌리는 것은 마땅히 없었지만, 전영중은 영화관에 온 기분이라도 내자며 다가오는 것 중 가장 이른 상영 시간의 영화를 예매했다. 한산한 영화관에서 전영중은 손쉽게 팝콘 콤보까지 구매해 왔다. 성준수는 그 모습에 피식 웃었다. 이 모든 것이 비(非)일상 같아서 그랬다.
2시 20분 영화 입장해달라는 안내음을 들으며 컴컴한 암흑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커다란 서라운드 화면이 밝아지며 영화가 시작됐다. 심해 깊숙이 위치한 해저 기지에서만 살아가던 연구원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였다. 바다는 검은색인 줄 알던 그는 바다 밖으로 나오고 나서야 다양한 색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전체적으로 고요하면서도 웅장했다. 그러면서도 잔잔했다. 요즈음 나오는 대다수의 영화는 다큐에 가까웠다. 기술이 발전하고 센티넬이 초능력을 써대고 가이드가 의료 장비 없이도 사람을 치료하는 마당에 SF며 판타지 같은 장르가 흥하기는 어려웠다. 아무리 그래봤자 현실의 연장선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대신에 인류는 복구되기 전의 광활한 자연을 그리워했다. 성준수는 영화를 보면서도 이따금 옆자리의 시선을 느꼈다. 성준수는 부러 돌아보지 않았다.
"바다 가본 적 있어?"
영화가 끝나자 전영중이 물었다. 성준수는 있겠냐는 듯한 표정으로 전영중을 쳐다보았다. 준수야, 너무 그렇게 보진 마. 나도 없어서 물어본 거야. 그 말에 성준수의 표정이 다소 누그러졌다. 바다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색빛 건물과 흙빛 혹은 핏빛 전장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은 비단 성준수뿐만 아닌 누구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 칙칙한 색 말고 강렬한 푸른색을 마주하고 싶었다. 그 생각이 저도 모르게 샌 것인지 전영중이 동의했다. 나도 너랑 가보고 싶다.
영화관을 빠져나와서는 길거리를 구경했다. 외관이 멀쩡한 것과 다르게 한산했다. 성준수는 그것이 현재 이 나라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생각했다. 그럴싸해 보이는 외관에 비해 공허한 내부. 전영중은 그런 성준수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기저기 손을 잡아끌었다. 둘의 눈길을 이끈 것은 한 옷 가게였다. 생각해 보니 옷을 산 것이 언제인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센터 내에서 사복이 불허된 건 아니었지만 검은 생활복에 큰 불만은 없었다. 그게 편하기도 했고. 그동안은 정복이나 생활복, 전투복만 지겹도록 돌려 입었으니까 오늘은 조금 소비를 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센티넬 월급이 적은 것도 아니었고. 다 쓸 데가 없어서 그랬지.
둘은 방금 산 옷으로 갈아입었다. 스타일도 상반됐다. 성준수는 여전히 깔끔하고 편한 옷. 전영중은 그에 비에 좀 더 화려한 프린팅이 된 옷. 전영중이 멋 낼 줄 모르냐며 비꼬았지만, 성준수는 센터에서 갇혀 살았는데 그럼 알겠냐며 응수했다. 그 말에 전영중도 할 말이 없었다.
좀 더 걷다 보니 공터가 보였다. 오래전부터 유행한 테니스 코트라든가 배드민턴 코트, 농구 코트까지 깔끔하게 관리가 되어있었다. 도심의 모든 것은 전부 그랬다. 깔끔하지만 사용감이 없었다. 유일하게 풀숲에 버려진 농구공만이 세월의 주름을 고스란히 갖고 있었다. 농구 규칙은 몰랐지만 어쨌거나 저 위에 매달린 골대에 공을 넣어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단순한 규칙을 갖고 있는 스포츠들이 오랜 세월이 지나더라도 명맥을 이어오는 법이다. 성준수가 멀리서 깔끔하게 공을 던져넣었다. 전영중이 그 공을 가져와 이번에는 덩크로 골대에 꽂아 넣었다. 야, 너 능력 썼지. 사람이 그렇게 점프하는 게 말이 돼냐? 반칙이야. 성준수가 투덜거렸지만 전영중은 웃었다. 준수야, 우리 아빠가 물려준 하체 덕분이야. 너도 운동 좀 해라. 그 말에 성준수가 또 욕을 했다. 하루가 멀다고 전쟁에 나가 사람을 죽이는 일상을 살았지만, 공 넣는 것 하나로 누가 더 멋이 있니 없니 싸우는 걸 보면 아직 영락없는 어린아이들이었다. 사실 어른이 된다는 것에 자신이 없었다. 전영중도, 성준수도.
간만에 즐겁다는 기분이 들었다. 여동생을 데리고 도심에 나왔을 때랑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 센터에서 전영중을 만난 이후 속절없이 가까워지는 거리감에 조금 겁이 났던 것도 사실이나, 성준수는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언제까지고 센터 내에서 고립된 채로 살 수는 없었고, 이제야 고독의 시간을 끝낼 순간이 오고야 만 것이다. 두려워도 뭐 어쩌겠어. 결국 끝까지 지켜야지. 이 망해가는 세상을. 가족을. 전영중을. 때때로 영원보다 길게 느껴지는 한순간이 있다. 성준수는 오늘이 오랫동안 그리워할 순간이 될 것이라는 점을 문득 깨달았다.
조금 이르지만 저녁을 먹으러 들어갔다. 두 테이블 정도가 더 차 있었다. 센터 밖에서 제대로 된 밥을 먹는 건 정말이지 오랜만이었다. 센터 밖이라 함은 대개 전장이었고, 그곳에서는 맛대가리 없는 보급품이 전부였으니까. 센터 내에서 나오는 밥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본디 급식이라는 건 쉽게 질리기 마련이다. 주문을 하는 것이 아니라 외는 것에 가깝게 메뉴를 줄줄 읊자, 직원은 당황하며 메모지를 급히 꺼내기도 했다. 그 모든 일들이 괜히 웃음이 났다. 당연한 수순으로 표정도 부드럽게 풀렸다. 거 봐, 재밌지? 그러니까 내가 나오자고 했잖아. 맞은편에 앉은 전영중이 생색을 내며 웃었다. 그 모습이 얄미워 무시할까 싶다가도 마음을 고쳐먹었다. 두려움에 관계를 밀어내는 건 이제 그만하기로 다짐했으므로. 그 대신에 짧게 말을 던졌다. 그래, 고맙다.
밥을 얼추 다 먹었을 때쯤 먼저 계산을 마치고 식당을 나서는 가족이 보였다. 누가 봐도 잘 사는 것 같은 부모와 가운데에서 양쪽 손을 잡은 아이까지. 이상적으로 보이는 가족의 표본. 전쟁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평화로움의 집합체. 저 아이는 어쩌면 평생 전쟁이라는 걸 모르고 살겠지. 전쟁이라는 것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망해가지 않는 세상이란 어땠을까. 그곳에서 너와 살았으면 어땠을까. 성준수는 의미 없는 가정들을 늘어놓았다.
부럽네. 멀어져가는 아이의 뒷모습에 탄식처럼 말이 샜다. 전영중은 그저 어깨를 으쓱이는 게 고작이었다. 성준수는 더는 말을 얹지 않았다. 얹지 못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었다. 그 표정을 보니 행복해 보이는 가정의 아이를 부럽다고 말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결국 말은 또 방향을 잃었다. 평범함이라는 것은 어떠한 형태로든 둘을 아프게 만든다. 그 사실이 못내 슬펐다.
"야, 사진 찍으러 갈래?"
"웬 사진?"
"오는 길에 보니까 포토 부스 보이더라. 좀 낡아 보이긴 했는데."
"……."
"원래 뭐든 머뭇거리면 안 돼."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성준수가 먼저 운을 뗐다. 결국 먼저 움직이는 건 성준수다. 포토 부스는 말 그대로 조금 오래되어 보이긴 했다. 호버가 날아다니고 이능력이 당연한 세상에서도 사람들은 아날로그 감성을 찾았다. 어쩌면 그런 세상이라 더욱. 그걸 증명하듯 이 포토 부스에서 인화되는 사진도 입체가 아닌 옛날 같은 평면이었다.
야, 진짜 오래됐긴 한가 보다. 전영중은 중얼거리며 그새 펼쳐진 홀로그램 화면을 슥슥 밀었다. 컷 종류가 다양해서 전영중은 화면을 오랫동안 쳐다보기만 했다.
"야, 제일 적은 걸로 골라."
"하나는 좀 심하지 않아?"
"포즈 뭐 하게. 찍을 것도 없잖아."
"그럼 두 컷."
"오케이."
극적인 합의 후에 결제까지 완료하자 화면에 둘의 모습이 비치며 셔터가 눌리기까지 남은 시간을 알려주었다. 야, 그래서 어떻게 찍을 건데. 성준수가 물었지만 전영중도 딱히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질 않았다. 결국 뻣뻣하게 굳은 채 브이 자세를 취했다. 화면에 비친 얼굴이 잔뜩 어색했다. 그 상태 그대로 사진이 찍히자 전영중은 깔깔 웃었고 성준수는 웃지 말라며 욕지거리를 했다. 그 모습은 두 번째 컷에 고스란히 담겼다. 인쇄된 납작한 사진을 신기해하다가 담긴 모습에 성질을 내다가 종래에는 웃었다. 하루가 온통 즐거웠다. 서현우 생각이 나지 않은 날도 생각해 보면 참 오랜만이었다. 성준수는 이제 이 가까운 거리가 기꺼웠다. 원래 삶이라는 건 두려움을 이겨내는 과정이다.
휴가 기간은 금방 지나갔다. 그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전장으로 끌려왔다는 소리였다. 접전 지역까지는 아니었으나 상황이 썩 좋지가 않았다. 물자 지원이 잘되지 않아 지원 나갔던 어떤 환경보다 열약했다. 보급되는 음식은 늘 맛대가리가 없었지만 여긴 더 했다. 뭐라도 입에 넣을 수 있으면 다행이었다. 그 와중에도 반란군의 습격은 끊이질 않았다. 아마도 날이 더 추워지기 전에 승기를 잡고자 하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은 이쪽 또한 마찬가지였다.
재빠르게 나무 위로 뛰어오르며 매복한 적들을 찾아냈다. 전영중의 서포트 덕분에 성준수는 거의 날듯이 뛰어다녔다. 왜 센터에서 다른 센티넬들이 전영중과 함께 임무를 나가고 싶어 하는지를 어렴풋이 깨달았다. 두 발이 땅에 매여있을 때와 다르게 능력을 쓰기 위한 공간적 제약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더군다나 전영중 그 자체로도 공격적인 능력이었고. 곳곳에 푸른 섬광이 일며 얼음 기둥이 꽂히고, 간헐적으로 우글거리며 공간이 일그러졌다. 선두에서 공격적으로 나서니 뒤따라오는 일반 군인들의 사기도 진전됐다. 지척에 인영이 느껴졌을 때는 손을 뻗어 발을 건 뒤 넘어뜨리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비틀거리는 틈을 놓치지 않고 목뼈를 잡아 비틀거나 심장을 얼렸다. 기괴한 모양의 시신들이 쌓여갔다.
한바탕 전투를 마치고 나서야 베이스캠프로 돌아올 수 있었다. 막사에는 램프가 고작이었다. 성준수의 능력도 전영중의 능력도 도움이 되질 않았다. 형광등 아래서 살 때는 몰랐던 빛의 그림자 같은 것이 느껴졌다. 노랗고 그늘진 빛의 아래에 더 어둡게 웅크린 둘.
며칠 전에는 정말 재밌었는데. 전영중이 나지막하게 운을 뗐다. 성준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날들을 꿈꿨다. 그날그날 하고 싶은 일을 하고, 그날그날 꾸고 싶은 꿈을 꾸는 나날을.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그런 날들을. 다시 둘 사이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너는 근데 어쩌다가 원중 대상자가 된 거야? 부모님도 있는 것 같은데. 그동안 자세히는 말 안 해줬잖아."
어색한 고요 끝에 성준수가 물었다. 이왕 가까워질 사이라면 전영중을 알고 싶었다. 곱씹어보니 자신이 전영중에 대해 모르는 것이 제법 많았기 때문이다. 전영중은 뜸을 들이다 이야기를 시작했다. 장교 아들로 태어났지만, 그 탓에 반강제로 WPC에 들어가야 했던 지난한 이야기를 최대한 압축했다. 성준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얼마 전, 지나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부러워하는자신을 보던 전영중의 얼굴이 생각났다. 그 표정을 보고 아무 말도 더 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은 길이 하나밖에 없는 인생도 고달팠지만, 정해진 길로 가야 하는 인생도 분명 서글플 것이다. 어쩌면 종종 마주하는 기괴하게 비틀린 시체가 나오는 꿈보다도 그들을 괴롭히는 건 씁쓸한 현실일지도 모른다.
성준수는 대신 잠에 대해 곱씹었다. 아주 사적인 영역의 잠에 대해서. 사적으로 이뤄지는 수많은 잠과 잠을 담은 밤에 대해서. 전영중은 모르겠지만 성준수는 가끔 소파에서 악몽을 꾸는 듯한 그의 모습을 마주할 때마다 사생활을 엿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오늘은 전영중도 불면이 아니길 바랐다. 그 염원을 담아 짧게 말했다. 잘 자. 어, 너도. 인사를 주고받는 사이 밤은 된통 차가웠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