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GHT or FLIGHT

FIGHT or FLIGHT 03

센티넬X센티넬 빵준

"준수야, 지쳤어? 대체 왜?"

"씨발, 니는 S급이고."

또다시 전영중이 성준수의 속을 대차게 긁었다. 그 와중에도 훈련장에는 여기저기서 탄환이 발사되는 소리가 연신 들려왔다. 이능력 사용에 제한이 걸렸을 때를 대비한 모의 훈련이었다. 탕, 탕. 조준경을 바라보며 연달아 방아쇠를 당긴 전영중이 은폐물 뒤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도심 한복판에 세워진 센터 내 훈련소에서의 총기 난사라니. 말도 안 되는 문장이지만 증강 현실이라 가능했다. 실제 같은 현실감에 전영중은 괜히 손을 털었다. 총기의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주변은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저 너머에서 싸우고 있는 지국민 쪽 등 뒤에 누군가 다가가는 게 보여 다시 조준경에 눈을 가져다 댔다. 바람이 불지 않는 실내라 풍향을 계산할 필요는 없었다. 조준경 유리 십자가 안에 타의 머리통을 집어넣었다. 움직임을 따라 총구를 겨눴다. 그리고 다시 탕. 아마 실전이었다면 피가 낭자하게 터져 나왔겠지. 하지만 이번에는 아웃으로 그쳤다. 아마 조재석이었다면 영점이 잡혔느니 마니 하며 요란을 떨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곁에 선 성준수는 말없이 다른 목표물을 찾고 있었다.

엄호해. 총을 들고 털썩 주저앉길래 지친 건가 했는데 또 그건 아니었나 보다. 전영중에게 명령 같은 짧은 문장을 던지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소리 하려다가 짬밥으로 치면 성준수가 자기보다 5년은 더 상관이었으니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다. 전영중은 누울 자리 보고 발 뻗기의 대가였다.

그 사이에 연신 방아쇠 소리가 들렸다. 상대 팀 두 명이 즉시 죽어 나가는 것이 보였다. 오늘따라 성준수의 성공률이 높았다. 꽤 먼 거리였는데도 쏘는 족족 원샷원킬이었다.

"준수 오늘 좀 되는 날인가 봐?"

"시끄러."

"이러다가 내일은 한 놈도 못 맞추는 거 아니야?"

"닥쳐라. 너랑 다른 팀 되는 날에는 너부터 죽일 거니까."

둘 다 한마디를 안 졌다. 그러면서도 곳곳에서 날아드는 탄환들은 잘도 피했다. 성준수는 오랫동안 센터에서 지내온 경험 덕분이었고 전영중은 그냥 운동 신경이 좋았다. 성준수 입장에서는 배알 꼴릴 법도 한데 정작 본인은 별생각 없었다. 사람마다 다른 건데 부러워한다고 뭐가 바뀌나. 그 시간에 내 훈련에나 집중해야지. 그게 끝. 처음부터 끝까지 정말 성준수다웠다.

오늘의 총기 모의 훈련에는 월에 한 번씩 주기적으로 참여해야 했다. 상부에서는 훈련 텀을 줄여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왔지만 현장 곳곳으로 파견 나가는 센티넬들의 수를 생각하면 어려운 일이었다. 되도록 많은 센티넬이 단체 훈련에 참여해야 하는데, 그 말은 곳 현장의 빈 구멍이 많아진다는 뜻이니까. 그 기간은 최대한 줄이는 것이 좋았다.

이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센티넬이 총기까지 잘 다뤄야 할 필요가 있나 싶었겠지만, 센티넬이기에 더욱 필요한 소양이었다. 어쨌거나 가장 최전방에서 적과 대치해야 하는 입장이었으니까. 준비는 철저할수록 좋았다. 능력 하나만 믿고 나대다가는 단명하기 십상이었다. 제힘을 과신하며 무모하게 뛰어들다가 예기치 못한 상황에 휩쓸려 목숨을 잃은 센티넬들도 더러 있었다. 그 일들을 반면교사 삼아 센터에서는 일반 군인들의 훈련 프로그램 중 일부를 차용했다. 센터에 머무는 센티넬 모두는 능력을 사용하지 않을 때도 어느 정도 싸울 수 있어야만 했다. 그게 아니라면 훈련실에 처박혀 토나올 때까지 반복적인 단련을 해야만 했다. 무의식중에라도 능력을 사용하면 처음부터 다시. 이능력 사용이 숨 쉬는 것과같이 자연스러운 일반적인 센티넬에게는 이능력 제한 훈련이 그 어느 것들보다도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달에 한 번 있는 총기 모의 훈련은 말하자면 이능력 제한 훈련을 통해 익힌 것들을 전방향적으로 사용해야 하는 종합 테스트와도 같았다.

전영중으로서는 처음 참여하는 훈련이었다. 이제 센터에 들어온 지 한 달이 겨우 넘어가고 있었으니까. 그런데도 여러 번 해본 것처럼 익숙하게 적응했다. 능숙하게 주변 사물이나 지형을 이용하면서 사격 범위를 넓히는 것이 큰 장점이었다. 이 훈련 때마다 성준수의 조준 실력이 크게 오락가락한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오늘 전영중이 본 성준수는 MVP감이었다. 덕분에 어렵지 않게 승리를 가져올 수 있었다. 조재석이 자기가 아웃되어서 진 것이라면서 멀리서 투덜대는 것이 들려왔다. 픽,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이 훈련마다 날고 긴다는 소문이 자자한 조재석을 맞춘 이는 성준수인 것 같았다.

"준수, 먼저 씻을 거야?"

"어. 나 먼저 들어간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익숙하게 씻는 순서를 정했다. 당장에 침대에 눕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바닥을 잔뜩 구른 탓에 지저분해진 몸을 보며 겨우 참았다. 멀리서 들려오는 물소리를 듣고 있자니 나른하니 졸음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 씻고 낮잠이라도 잘까. 훈련에 참여할까 했지만 피로감에 나태한 생각이 밀려왔다. 원래라면 현장 지원 없이 센터에 있는 경우, 오전과 오후 훈련에 모두 참여해야했지만 총기 모의 훈련이 있는 경우는 예외였다. 오전 중으로 진행된 모의 훈련 이후에는 원하는 사람들만 개인 훈련에 참여할 수 있도록 자율성을 부여해 주었다. 훈련 시간이 일반 군인보다 짧고 느슨한 이유는 하나였다. 센티넬이기 때문에. 이능력을 극도로 억제하는 것은 스트레스가 되고, 이능력의 지속적 사용은 몸을 닳게 한다. 그것이 센티넬 훈련의 딜레마였다. 훈련을 할수록 센티넬의 정신이 소모된다. 결국 센티넬을 전방에서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그 외의 환경에서 소모되는 것을 막아야 했다.

"야, 일어나. 자냐, 전영중?"

깜빡 잠이 들었는지 성준수가 부르는 목소리에 퍼뜩 눈을 떴다. 머리칼의 축축한 물기를 털어내며 전영중을 내려다보는 성준수가 보였다. 너 그렇게 잠들면 목 안 아프냐. 바닥에 앉아 소파에 머리만 기댄 꼴이 전형적인 한국인이었다. 목을 돌리자 뚜두두둑 꺾이는 소리가 났다.

"점심 먹고 어떡할 거야?"

"뭘?"

"오후 훈련 갈 거냐고."

성준수는 뭘 그런 걸 묻냐는 표정으로 전영중을 쳐다봤다. 성준수의 대답은 뻔했다. 가야지. 시간도 남는데 뭘 아깝게 안 가고 그래. 그 말에 전영중은 의아함을 가졌다.

"준수 너 내일 또 지원 나가야 하는 거 아냐? 그런데도 안 쉬어?"

"나 내일 안 나가."

"엥?"

"좀 더 쉬려고."

"왜?"

"씨발, 쉬어도 왜 지랄이야. 니가 쉬라며. 자꾸 임무 나가는 거 부당하다며."

빨리 씻으러 가기나 해, 씨발. 성준수는 그렇게 말하며 전영중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그런데도 전영중의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았다. 이제야 성준수가 좀 사람 대접을 받고 살겠구나 싶어서. 그게 왜 저한테 기쁜 일인지는 본인도 채 몰랐다.

성준수는 본인의 목숨을 본인의 정의보다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몇 개월을 옆에서 지켜보며 전영중이 내린 결론이었다. 지금의 성준수에게 있어서 정의란 정부에 대한 충성이었다. 그것 하나밖에 모르는 것처럼 굴었다. 다른 일에서는 뭐든 상관없다는 듯이 무신경하게 굴면서도, 꼭 임무에 관한 것에 한해서는 한사코 고집을 부렸다. 다른 센티넬보다 잦은 현장 지원이 부당하다는 이야기를 전달한 것 같으나 큰 효과는 없었다. 이전보다 출동하는 빈도는 줄었으나 전영중이나 다른 센티넬들과 비교했을 때는 여전히 잦았다. 그런데도 불만 없이 까라면 까고 구르라면 굴렀다. 전영중은 그때마다 성준수에게 목숨 좀 아끼라는 말을 돌려 돌려 말했다. 준수야, 앞날을 좀 생각해. 황천길 가는 속도로라도 나를 이기고 싶어? 전영중은 부질없는 잔소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입 밖으로 구구절절 내뱉었다. 성준수의 반응은 늘 같았다. 나 아니면 누가 하는데. 그러더니 같은 말이 반복될수록 성질을 냈다. 씨발, 그 말 좀 그만하라고. 나 죽으라고 고사 지내냐? 일부러 속을 긁어대는 전영중 마음도 불편했다. 쓸모없는 말을 입 아프게 배설하는 쪽 마음이라고 편할 리 없었다. 그렇지만 그렇게라도 성준수가 제 목숨에 대해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보게 만들어야 했다. 전영중이 성준수를 구할 방법은 그런 것밖에 없었으니까. 알면서도 듣기 싫은 소리를 늘어놓는 것은, 악인이 되길 자처하는 것은 그런 기대에서부터였다. 정의를 관철하는 것도 좋지만, 제발 제 안위 좀 걱정하라는 경고. 네 신념 지키겠다고 목숨 내버리는 짓 따위 하지 말라고. 그렇게라도 해야 성준수가 조금이라도 고민해 볼 것을 알아서 하는 것이다. 당장에는 들어먹진 않아도 조금이라도 주춤거려 보라고.

너무 성준수만 영웅 만들어주려는 거 아니에요? 전영중은 이주원을 볼 때면 그렇게 말했다. 걱정하지 않는 척. 사이가 나쁜 척. 은근히 견제하는 척. 상부에까지 그 이야기가 흘러 들어가길 바라면서. 그 이야기를 들을 적이면 이주원은 씁쓸하게 웃었다. 무언가를 알지만 말하지 못하는 것 같은 표정이라 전영중은 괜히 심기가 불편했다. 이주원은 별다른 대답이 없었고, 그러면 전영중은 한 번 더 덧붙였다. 차라리 나한테 일 더 넘겨요. 아무래도 성준수보다는 내가 낫지 않나? 저도 전쟁 영웅 좀 해보고 싶은데. 이주원이 곧장 대답을 하지 않자 전영중은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갔다. 네? 부탁 좀 드릴게요.

 매번 이주원을 쪼아댔던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다행히도 성준수의 파견 횟수는 조금씩 줄어들었다. 휴식 기간이 이전보다 길어짐에 따라 능력도 조금은 안정되는 것 같아 보였다. 전영중은 냉기에 눈을 뜨는 날이 적어진 것으로 그것을 실감했다. 가이딩 안 받겠다고 버티는 놈인 걸 뻔히 알면서도 충분한 휴식을 주지도 않는 상부의 선택이 의아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조금만 더 쉬어도 나아질 것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

"뭔 생각을 또 그렇게 하냐?"

"준수는 몰라도 돼."

그렇게 이야기하며 전영중은 익숙한 복도를 걸었다. 그새 또 키가 컸는지 마지막으로 이곳을 떠났을 때보다 시야가 높아져 있었다. 어느새 겨울이 가고 여름이 훌쩍 다가왔으니 그리 놀랍지는 않은 얘기였다. 전영중은 성장할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열아홉이었으니까. 고작 열아홉. 몇 달 전 겨울의 초입까지 지내던 곳. 복도 양옆으로 늘어진 문들이 보였다. 그 수가 제법 되었다. 이렇게나 많았었나. 밖으로 꺼내져야지만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면 상자 밖의 모습 따위들. 괜히 익숙한 복도 끝을 바라보았다. 가이딩을 거부하는 성준수를 뭐라 할 처지가 아니었다. 번듯이 닦인 긴 복도는 끈질기게 전영중을 따라다니는 악몽이었다. 그 사실을 이제야 뒤늦게 자각했다. 옆에서 이휘성이 괜찮냐며 전영중의 상태를 물었다. 전영중은 걱정하지 말라며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웃었다. 비번인 원중 프로젝트 대상자 세 명이 다시 찾은 곳. 이곳은 WPC다.

센티넬 관리 센터로 이관된 이후에 이곳에 다시 찾아오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어릴 적 주렁주렁 바늘을 온몸에 꽂아대던 기억이 등 뒤로 오소소 따라붙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다른 둘의 상태도 썩 좋아 보이진 않았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바짝 긴장해 있는 것이 보였다.

너희 고생 꽤나 했으니 좀 쉬게 해주겠다며 상부에서 언질이 떨어졌을 때는 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구르기 탑티어인 성준수. 그 일 나눠 받는 전영중. 그리고 매우 드문 정신 계열 능력이라 여기저기 불려다니는 이휘성까지. 휴가를 주는 건가 싶었는데 막상 떨어진 것은 WPC 파견 임무였다. 전쟁터보다 몸이야 편하겠지만 글쎄, 마음까지 편안할까. 전영중은 배정된 임무를 보자마자 내뱉었다. 하하, 이거 완전 싸이코 새끼들 아니야. 성준수는 욕 한번 하고 말았다. 에라이 씨발. 결국 결론은 하나였다. 가라면 가야지.

WPC에서 이 주 정도 머물며 레우논 이식자들의 훈련을 돕는 게 이번 파견의 목적이었다. 결국 명령을 외면하지 못한 자들은 어린 나이에 죽어버린 눈을 한 이들을 마주하러 왔다. 그게 자꾸만 묘한 감정이 들게 했다. 센티넬 발현에 성공하길 바라야 할지, 센터로 이관되어 전장으로 떠밀려 나가야할 미래를 안타까워해야 할지. 결국 너희들은 자라서 우리가 되겠구나. 그 기분을 무어라 정의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문 너머에 있을 어린 이들의 안위를 걱정했다. 얼마 전까지 사람을 죽였던 이들이. 그 역설이 기이했다. 하지만 망해가는 세상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 누구도 센티넬에게 도덕적 잣대를 들이댈 수 없었다. 그들을 도덕을 비껴가는 살상 무기로 키워낸 것은 도덕을 구축해 낸 일반 사람들이었으니까. 사람들은 그들에게 인간이길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쉬엄쉬엄하는 임무랍시고 이런 곳에 다시 발 디디게 할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어릴 적부터 철저하게 훈련받아 온 그들은 최대한의 냉정과 최소한의 인정만을 갖고 살아갔다. 센티넬들을 움직이게 하는 건 각자의 정의뿐이었다. 문 너머의 이들을 연민하는 것은 그저 동질감 때문일지도 몰랐다. 과거의 자신을 겹쳐보며 느끼는 자신을 향한 연민.

이따 보자. 그렇게 이야기하며 각자 처음에 배정받은 훈련실 문을 열었다. 이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 피실험자의 훈련을 도운 뒤, 일정 기간이 지나면 전영중은 또 다른 방으로 이동하게 될 것이었다. 일종의 로테이션이었다. 성준수와 이휘성이 함께 온 이유이기도 했다. 자연 계열인 엘리멘트, 정신 계열인 힙노타이즈, 그리고 정신 계열과 물리 계열 그 어딘가에 있는 사이코메트리까지. 전영중의 중력은 가장 후자에 속했다.

얼추 듣기로는 레우논과 뉴런의 시접 부분의 변화를 통해 어떤 계열의 센티넬로 발현할지를 예측하는 연구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것을 미리 알 수 있다면 동화의 경험을 제공함으로써 보다 효율적으로 센티넬 발현 성공률을 높일 수 있을 테니까. 굳이 따지자면 이것은 예비 센티넬들의 능력 개화를 돕는 임무임과 동시에 실험의 연장선이었다. 실험자도 피실험자도 아닌, 도구로서 참여하는 실험. 결국 어딜 가도 그들은 연구실 안에 있다. 원중 프로젝트에 몸담게 된 모든 이들의 숙명일 것이었다.

아랑(睋朗)이라 이름붙인 이 연구 일종의 프라이밍 효과에 기반한 연구였다. 시간적으로 먼저 제시된 자극이 나중에 제시된 자극의 처리에 영향을 주는 현상을 통해 연구의 큰 틀을 잡았다. 프레이밍 효과에서는 냄새, 광경, 소리 또는 몸짓 등 새로운 인상들은 어떤 연상을 불러일으키고 이는 현실을 기억의 혼합체이자 그와 관련된 감정으로 만들어버린다고 얘기한다. 이러한 연상의 고리는 계속해서 뇌에 떠오르게 되고, 타인은 의식하지 못하지만 자신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결국 말하자면 체화된 인지였다. 지속적으로 피실험자들을 센티넬의 이능력에 노출시켰을 때, 해당 자극이 레우논의 이능력 발현과 관련된 중요한 단서가 되리라 기대했다. 더 나아가 이능력 발현의 촉진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을 것이라 예측했다.

이는 더 나아가 자기 실현적 예언에서 뒷받침 근거를 찾을 수 있었다. 미래에 일어날 어떤 일에 대해 확신하고 있을 때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나는 경우를 일컫는 자기 실현적 예언. 미래의 사건들은 인간의 통제력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모든 것을 예측하고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다. 이 예시는 멀리 나갈 필요도 없이 원중 프로젝트와 아랑 연구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본인의 생각은 본인의 행동을 지배하고, 본인의 행동이 본인 미래의 일부를 지배한다. 자기 실현적 예언은 틀릴 수도 있지만 행동에 옮김으로써 실제로 일어날 수도 있는 생각과 기대에 토대를 둔다. 결과적으로 이 연구는 성공적인 원중 프로젝트 피실험자의 예시를 제시함으로써 레우논 이식자들 본인도 이능력 개화가 가능할 것이라는 자기 인식을 심어주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말하자면 인지의 동화를 통해 실험 성공률을 예측가능하면서도 효과적으로 끌어올리고자 한 것이다.

"안녕."

오후 훈련마다 쭈뼛대며 저에게 다가오는 소년에게 인사를 하는 것도 일주일이 다 되어갔다. 열댓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의 이름이 하경민이었나 하경인이었나.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소년의 동작은 작아도 전영중을 바라보는 시선만은 올곧았다. 사실 말이 좋아 훈련이지 죽지 않을 정도의 자극을 주는 고문과 다름없었다. 그런데도 저 소년은 불평 하나 없었다. 그래도 전영중 자신이 이곳을 먼저 거쳐 갔으니, 이것저것 알려주고 사이좋게 지내고 싶은 마음도 있었으나 관뒀다. 괜히 정을 주어봤자 괜히 미안해지기만 할 것 같았다. 소년도 그것을 알았는지 데면데면 굴었다. 아마 본인을 지키는 방법 중 하나일 것이다. 마치 매일 밤 쏟던 전영중의 눈물이나, 여동생이 준 성준수의 젠가 같은 것이겠지.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자 전영중은 미세하게 능력을 조절했다. 커진 중력으로 인해 일렁이는 공간들을 소년은 잘도 피해 다녔다. 감각 정보가 많아진다는 것은 그에 따른 반응도 빨라진다는 뜻이었다. 한마디로 레우논이 있는 자들은 이능력 이전에 일반인의 그것을 훌쩍 뛰어넘는 신체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것은 어린아이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직 체력이 부족한 터라 얼마 가지 못해 그 전과 같이 전영중의 중력장에 붙잡혀 눌렸다. 커헉, 윽. 장기가 비틀리는 생경한 느낌이 제법 고통스러울 만도 한데 그걸 또 악바리처럼 견뎠다. 전영중은 그런 모습에 약하다. 어쩌면 성준수 때문인지도 모른다.

"여기까지만 하자. 마지막까지 수고했어."

전영중은 담백한 인사를 건넸다. 그 말에 답인사가 따라붙었다. 감사했습니다. 전영중은 그 상황이 조금 어이가 없었다. 자신에게 감사해야 할 상황이 맞는가. 답을 찾을 수 없는 상황에 전영중은 입안에 맴도는 의문을 속으로만 삼켰다. 소년의 표정에서는 여전히 감정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이정도의 정 없는 거리감이 피차 서로에게 도움이 될지도 몰랐다. 고생했고, 언젠가 센터에서 보자. 그 말에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망설임 없는 모습에 조금이나마 마음이 가벼워졌다.

파견 기간 동안 사용할 수 있도록 배정받은 방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마지막이라고 조금 가볍게 끝낸 건 저뿐만이 아닌지 이미 들어와 있는 이휘성을 마주했다.

"잘 끝냈어?"

"어. 여자애던데 반란군도 아닌 어린애한테 능력을 쓰려니 좀 그렇긴 해서…."

"마음이 썩 좋진 않더라."

"그래서 마지막이라 좀 쉬엄쉬엄했어. 영중이 너도 그런가 보네. 일찍 온 거 보면."

"그렇지, 뭐. 준수는 아직이야?"

"응. 아직 안 왔어."

성준수는 예상한 시각보다는 이르게 돌아왔다. 성준수는 봐주지 않고 훈련 시간 꽉꽉 채운 뒤 돌아올 것 같았는데. 약 5분이 비었다. 일찍 끝냈네, 너도. 이휘성의 말에 성준수는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영중은 그것을 놓치지 않고 물었다.

"준수야, 불쌍해?"

"뭐가."

"그 애들."

전영중 자신도 무슨 답을 원하는지 모른 채로 물었다. 불쌍하다 대답하면 과거의 제가 비참하게 느껴질 것 같아 싫었고, 불쌍하지 않다 대답하면 과거를 매몰차게 외면하는 것 같아 싫었다. 어떤 대답을 들어도 기분 나쁠 것을 알면서도 생각보다 말이 앞섰다. 성준수는 고민도 하지 않고 답했다.

불쌍하냐고? 전혀.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할 처지냐.

다음날까지 전영중은 성준수의 말을 계속 곱씹었다. 성준수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정답을 찾은 것 같았다. 그래, 누가 누굴 안쓰러워하겠어. 그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센티넬들에겐 도덕이니 규범이니 하는 것들은 애초에 의미가 없었다. 그들을은 온전히 스스로의 판단과 결정으로 행동해야 했다. 전영중은 센터 이관 직전 지겹도록 읊었던 센티넬 행동 강령 선서가 문득 떠올렸다.

나 센티넬 2290506-04호는 다음을 지킬 것을 선서한다.

하나, 국가와 정부에 절대 충성한다.

하나, 부여받은 능력은 국가와 정부를 위해서만 사용한다.

하나, 어떠한 상황에서도 국가와 정부를 우선시한다.

하나, 행동 강령과….

결국 센티넬들의 정의는 행동 강령 위에 뿌리내리고 있었다. 그것은 전영중과 성준수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루가 멀다하고 듣던 이야기들이었으니까. 국가, 센터, 평화. 그따위 것들에 의탁한 인생이라 한다면 할 말이 없겠지만, 그것을 빼고서는 논할 수 없는 인생이었다.

국가가 시킨 일이다. 명령에는 의문을 품지 않는 것이 나았다. 늘 그러했듯이.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다. 이전과는 다른 훈련실에 들어가 또 다른 소년을 마주했다. 이휘성이 처음에 맡았던 피실험자는 여자애랬으니 아마 전영중 이전에는 성준수를 만났을 것이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었지만 기가 잔뜩 죽은 것이 보였다. 성준수 성격에 저보다 조금 어리다고 봐주지는 않았을 테니까 더더욱 그럴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대충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전에도 연민이 조금 들었다 뿐이지 설렁설렁하지는 않았으니까. 무미건조한 인사를 건넨 뒤 훈련이 시작됐다. 성준수와는 완전히 다른 결의 능력이라 처음에는 헤매는 것처럼 보였다. 바들바들 떠는 게 눈에 보였다. 그럼에도 눈은 살아있었다. 전영중은 이전에 만났던 소년을 떠올렸다. 두려워하지 않지만 죽은 눈을 하고 있던 소년과, 떨고 있지만 살아있는 눈을 하고 있는 소년. 둘 중 어떤 것이 맞는지는 전영중 자신도 알지 못했다.

센터로 복귀한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이 훌쩍 지난 뒤였다. 저보다 어린애들의 훈련을 매일같이 도와주고 왔더니 이제는 본인 훈련에 참여하랬다. 쉴 틈도 안 주냐고 불만을 입으로 내뱉으면서도 성준수는 이미 옷을 갈아입은 뒤였다. 전영중도 거실에 널부러져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래, 하라면 또 해야지. 그러면서 찬장을 뒤져 가루 커피를 탔다. 고상하게 원두커피 내려 먹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 시국에 그런 행위는 사치였다. 준수도 마실래? 묽게 탄 커피를 내밀었더니 순순히 받아들였다. 카페인의 도움을 받아 피로를 애써 이겨냈다. 시간 남았는데 너는 그냥 가이딩 받으러 가면 되지, 뭘 커피를 처마셔. 성준수의 말에 전영중은 그저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 심각한 것도 아닌데 이게 편하잖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냥 뭐랄까. 가이딩 안 받겠다고 버티는 성준수의 마음을 한 번쯤은 이해해 보고 싶었다. 성준수가 그 마음을 알았다면 별 지랄을 다 떤다고 했겠지만.

훈련은 다행히도 그리 빡세지 않았다. 파견 나갔다가 바로 돌아온 걸 감안한 강도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고되지 않은 것은 아니라서 저녁을 고봉밥으로 퍼담아 먹었다. 방으로 들어갈 기력도 없이 거실 소파에 쓰러진 건 덤이었다. 성준수는 그런 전영중을 보고 쯧, 짧게 혀를 찼다.

"준수야, 다 들려."

"체력 하나는 자신 있다는 듯이 굴던 사람 어디 갔냐."

"내가 누구 때문에 피곤해 죽으려 하는데."

"누구 때문인데?"

"……."

성준수 너 때문이잖아. 그렇게 말하려다 겨우 참아냈다. 성준수는 평생 모르고 살길 바라기 때문이다. 파견 근무 내내 다크써클이 눈 밑에 자리 잡았던 이유. 체력에 자신있는 전영중이 죽도록 피곤해하는 이유. 지금도 당장에 잠들 것 같은 피로를 느끼는 이유. 그 모든게 성준수 때문이라는 것을.

WPC에서 심리적 불안을 느끼는 건 전영중 혼자만이 아니었다. 성준수 또한 그랬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휘성도. 하지만 성준수의 문제는 자면서 능력 조절이 잘 안될 때가 잦았다는 것이었다. 전영중은 이휘성이 그 사실을 모르길 바랐다. 어디가서 이야기를 퍼뜨리고 다닐 사람이 아니란 걸 알지만, 그냥 성준수의 약점이 여기저기 까발려진다는 사실 자체가 꺼려졌다. 그래서 이휘성이 소문의 실체를 확인하지 않았으면 했다. 단순히 떠도는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벌어지는 일이라는 것을 몰랐으면 했다.

그러한 이유로 전영중은 깊게 잠들지 못했다. 그것도 이주일이 다 되어가도록. 겨우 선잠이 든 상태로 냉기가 느껴질 때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곤 했다. 이럴 거면 각방 좀 쓰게 해주면 좋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투덜거리면서도 전영중은 착실히 뒷수습을 했다. 이휘성이 뒤척거릴 때면 깬 줄 알고 놀라서 흠칫거렸다. 그 노력 덕분인지 파견 임무가 끝날 때까지 이휘성은 간밤에 일어난 일을 전혀 몰랐다. 그건 성준수도 마찬가지였다. 요새는 조금 잘 자는 것 같다며 의문을 표하는 게 고작이었다. WPC에서 잘 잘 수 있을 리가 없다는 것이 요지였다. 다행히도 거기까지였다. 생각은 그보다 더 나아가지 않았다. 항상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으니 쉽게 피로한 것이 분명하다 여기고 넘겼다. 준수는 별 생각 없이 잘 자서 좋겠다. 왜 또 시비야, 씨발, 꺼져. 전영중은 또 웃고 말았다. 웃음 아래로 다크써클이 진하게 번졌다.

센터로 복귀한 뒤로 계속 피곤해하는 전영중을 보고 의아해하는 성준수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것은 그 때문이다. 그 와중에 훈련도 빼지 않고 참여했으니 피로감은 말할 것도 없었다. 씻고 침대에 눕자마자 졸음이 한 번에 쏟아졌다. 오늘은 성준수가 별 탈 없이 자야 할 텐데. 그 생각에 문득 의문이 들었다. 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성준수를 신경 쓰고 걱정하는지. 단순히 친구라기에는 지나치게 염려했고, 룸메이트로서 느끼는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서라기엔 방을 옮길 생각은 전혀 없었다. 전영중에게 성준수는 무슨 존재인가. 요 몇 달간 주위를 돌며 속을 긁어대고, 반응을 보며 웃고, 그러면서도 밤새 상태를 걱정하고. 그 모든 행동들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밀려오는 피곤함에 휩쓸려 멀리멀리 사라졌다.

"형, 준수 형이랑 지내는 거 어때요?"

"갑자기?"

베이스캠프 막사에서 몸 상태를 확인하며 가이딩이 필요할지 생각해 보고 있던 차에 조재석이 물었다. 그게 왜 궁금한데. 그렇게 돌려 말해도 조재석은 여전히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우지 않았다. 에이, 그렇게 보지 마시구용. 진짜 의외라서 그래요. 조재석은 전영중의 경계에도 아무렇지 않게 너스레를 떨었다.

"준수 형이 누구랑 방 같이 쓰는 건 처음 보거든요. 아, 처음은 아니다."

"……?"

"와 이제야 관심 보이네요. 쪼금 상처."

"예전에도 룸메 있었어?"

그걸 룸메라고 해야 하나? 암튼 제가 센터 들어왔을 때에 준수 형은 아마 2년 정도 있었을걸요. 그때 상부에서는 어떻게든 가이드 붙여놓으려고 잊을만하면 하나씩 방에 밀어 넣고 그랬던 걸로 기억해요. 그런데 준수 형도 한 성깔 하잖아요. 상부 명령이니 대놓고 싫다고는 못해도 룸메로 들어온 가이드한테 제법 성질을 부렸나 봐요. 어떻게 했는지 그것까지는 저도 잘 모르는 일이구요. 얼마 안 지나서 가이드들이 벌벌 떨면서 자기는 거기서 못 지내겠다고 도망쳐 나왔어요. 그런데도 꾸준히 사람을 들이밀고 준수 형은 싫다고 하고.

"그런데 나 들어가기 전까지는 혼자 지내고 있던데."

"마지막으로 들어갔던 가이드랑 엄청 큰 마찰이 있었던 것 같더라구요. 능력 제어가 잘 안됐는지 숙소 다 얼어붙고 난리였어요. 아마 그때부터 준수 형 잘 때도 능력 제어가 되니마니 소문이 돌았을걸요."

싫다는데 위에서는 왜 자꾸 사람을 붙이고 난리야. 이야기를 듣던 전영중이 중얼거렸다. 그 말에 조재석이 웃으면서 동의했다. 그러게요, 가끔 이해가 안 될 때가 있어요. 그러다가 조재석이 한 가지 의문이라는 듯이 물었다. 그런데 형은 어쩌다가 룸메 배정 받은 거예요? 그 물음에 전영중은 대답을 얼버무렸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조재석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별로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시키는 대로 살아가야 하는 센티넬에게 특별한 이유가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다행이에요. 잘 지내는 것 같던데요, 형이랑."

"나랑? 사이 되게 안 좋아. 맨날 나 보면 욕만 해."

"형이니까 그 정도로 끝나는 걸지도 몰라요. 다른 사람이었으면 진작에 쫓겨났을걸요."

전영중도 그 말에는 어느 정도 동의하는 터라 피식 웃고 말았다. 준수 형 여전히 가이딩 안 받죠? 전영중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이딩 안 받겠다고 하는 이유도 좀 궁금하긴 해요. 그 말에는 대답을 못했다. 굳이 밝히지 않은 성준수의 트라우마를 제멋대로 떠들어대고 싶지는 않았다. 조재석은 자신의 이야기를 잠자코 들어주는 전영중의 태도에 신이 났는지 전영중은 몰랐을 성준수의 이야기들을 늘어놨다. 3년을 센터에서 구른 조재석은 들어온 지 이제 고작 반년이 지난 전영중에게 쉽게 마음을 연 것 같았다. 그 성준수와 가까워 보이는 사람이니 적어도 믿을만하다고 생각한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요새 준수 형은 괜찮아요? 예전에 진짜 상태 심각했을 때가 있었거든요.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신경안정제만 투여해서는 눈가는 까맣게 내려앉고 제대로 뜬 것 같지도 않았고요. 불러도 못 들었는지 비척비척 걷고, 밥도 제대로 안 먹고 잠도 안 자서 송장인지 사람인지 모를 만큼이었거든요. 그땐 진짜 무서웠는데.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우리끼리는 악귀 아니냐고도 했었어요. 마지막 가이드랑 부딪친 거랑 극도로 스트레스받는 모습 때문에 그 이후로는 무조건 혼자 숙소를 다 썼던 걸로 알아요. 근데 요새는 잘 지내길래 신기해서 물어봤어요. 영중이 형이 워낙 좀 괜찮은 사람이라 그런가? 제가 보기에도 형 진짜 멋있는 것 같거든요. 형도 원중이잖아요. 와, 그런데 어떻게 WPC에서 한 번을 못 마주쳤을까요? 준수 형도 원중 출신이었던 걸로 아는데. 혹시 형은 준수 형 WPC에서 본 적 있어요? 저는 국민이 형이랑 알던 사이였거든요.

전영중은 조재석의 이야기를 지그시 듣기만 했다. 분명 반년을 같이 살았는데 성준수는 뭐 이리 숨기는 게 많은지. 숨기는 게 아니라 드러내지 않는 쪽에 가깝겠지만. 조재석의 이야기에는 제가 모르는 성준수가 너무나 많았다. 그 생각에 어쩐지 입 안이 잔뜩 썼다.

누구도 갖지 못한 강함을 지니고 살아간다는 것은 생각보다 고달팠다. 꼭 이 나라가 아니라 어디에서 태어났더라도 그것은 변하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일거수일투족을 관리받고 통제받는 곳에는 특히나 그랬다. 인공적으로 능력을 갖게 된 원중 아이들은 더더욱. 그럼에도 안타까운 점은 그것에 대한 반감은 없었다. 어릴 적부터 훌륭히 교육된 탓일까. 그저 그렇게 살았다. 하나의 큰 세포 속 소기관이 되어 제 소명을 다하며. 이것보다 더 나은 삶이 있다거나, 더 나은 곳이 있다는 확신이 없어서 그랬다. 그래서 그냥 그렇게 살았다. 이 나라의 센티넬로서. 묵묵하게. 결국 삶은 본질적으로 비극성을 띠고 있다.

막사 바닥에서 자는 건 제법 익숙해졌다. 뻐근한 통증이 아직 살아있음을 알려주었다. 다음날에도 여전히 해는 떴다. 전장으로 나가야 할 시간이었다. 밖으로 나가자 후덥지근한 여름 공기가 둘을 반겼다. 와 진짜 덥네요. 조재석이 손부채질을 하며 얘기했다. 말마따나 여름은 여름인지라 땅에서는 아지랑이가 어른거렸다. 보이지 않는 것들의 그림자. 매일같이 반복되는 삶의 고단함도 보이지 않는 그림자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전영중은 이내 생각의 꼬리를 잘라냈다. 뭐든 깊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편리했다. 가자, 대열 맞춰야지. 이런 형식적인 건 좀 안 하면 안 되려나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조재석은 전영중의 뒤를 잘도 따라왔다.

전방은 언제나 그렇듯이 아수라장이었다. 전영중이 중력장으로 조재석을 엄호하면 공중에서 조재석이 공기포를 쏴댔다. 여기저기 총기 난사가 이루어졌지만 센티넬 둘의 힘이 더 강했다. 심지어 S급이 둘. 그 둘의 존재 자체가 정부와 반란군 양측이 센티넬 확보에 목매다는 이유를 보여주었다. 조재석 엄호에 정신이 팔려있던 전영중의 팔뚝에 총알이 스쳤다. 조금만 삐끗했으면 관통이었다. 아무리 가이드가 있다 한들 응급처치는 필요했다. 울컥 피가 터져 나오는 곳을 옷을 찢어 지혈하며 말했다. 야, 난 괜찮으니까 계속해! 조재석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제 할 일에 집중했다. 서로에 대한 걱정은 사치였다. 제 몸은 제가 건사해야 했다. 그게 전쟁이니까. 제아무리 강한 센티넬이라봤자 결국 본질은 인간이니까. 어딘가가 반드시 약할 수밖에 없는 인간.

"영중이 형, 몸은 괜찮아요?"

"어. 별거 아냐. 약간 좀 스쳤어."

꽤 오래 지속된 교전이 끝나자마자 조재석이 전영중에게 달려왔다. 말은 괜찮다고 했지만 상태가 썩 좋은 것은 아니었는지 전영중의 눈이 시뻘겋게 빛났다. 이미 지혈한 옷은 새어 나온 피로 흥건했다. 그 와중에도 전영중은 분위기를 풀겠다고 적당한 농담을 던졌다. 야, 과다출혈로 죽는 센티넬이 어디있겠냐. 이 정도는 가이딩 받으며 금방 나아. 조재석도 전영중이 그런 개죽음을 당할 사람이 아님을 알기에 금방 걱정을 털어내고는 조잘거렸다. 형, 근데 저희 아까 콤비 개쩔지 않았어요? 그 말에 전영중은 아픈 팔을 애써 무시하며 웃는다. 곧 성인을 앞둔 자신보다는 약간 더 어린 조재석이 조금 더 편하게 숨 쉬고 살아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굳이 따지자면 조재석이 한참 선배임에도 불구하고.

전영중은 베이스캠프에 도착하자마자 한곳에 마련된 임시 가이딩실로 향했다. 옷이었는지조차 알 수 없을 만큼 피로 흥건히 물든 넝마쪼가리를 본 막사 전체가 술렁였다. 안으로 들어온 것이 전영중이라서 더욱 그랬다. 전영중은 이미 가이드들 사이에서 정중하기로 소문이 나있었다. 손 잡는 것 이상으로 가이딩을 요구하지 않는 것이 특히 그랬다. 전영중 또한 피치 못할 상황이 아니면 방사형 가이딩을 선호했다. 개중에는 제 힘 조절 못하고 덥석덥석 잡아채거나 입술부터 들이대는 놈들도 있었다. 솔직히 성격 이상하고 능력도 없는 센티넬을 만나면 가이드들도 개고생도 그런 개고생이 없었다. 그 많은 센티넬 중에서 손버릇이 나쁜 놈들은 차고 넘쳤다. 아무리 가이드가 가이딩을 거부하면 된다고 하지만 그건 허울 좋은 이야기일 뿐이었다. 센티넬 쪽이 힘으로 누르면 끝이었다. 그러다 보니 남녀를 떠나 전영중의 인기가 많은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전영중은 그러한 것들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아직까지 감응하는 페어가 없는 것도 그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것은 성준수와 비슷하면서도 이유는 완전히 달랐다. 매번 감응하는 가이드를 전장에 데리고 다닐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번거로운데, 그때그때 아무한테나 가이딩 받는 게 효율이 좋지. 그 정도의 생각을 갖고 살았다. 결국 전영중을 보면서 감응하는 가이드가 되길 바라는 사람들만 남몰래 많아졌다.

"와 진짜 여름이다, 준수야. 그치?"

"그러게."

지나치게 싱싱한 여름은 여전히 몸집을 불려 갔다. 때아닌 열대야가 지속됐다. 후덥지근한 날씨 속에서도 성준수는 태연했다. 더위를 많이 타는 것 같은데도 전혀 내색을 하지 않았다. 얼마 전 성준수는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전영중에게 물었다. 야, 너 총 맞았냐? 그 말에 전영중은 그냥 웃으면서 대답했다. 오~ 준수, 어떻게 알았대? 그 장난스러운 대답에 성준수는 말을 툭 던졌다. 조심 좀 하고 살아. 우리라고 방탄 몸 가진 거 아니니까.

그 말이 뭐라고 전영중은 찰나의 순간을 계속해서 곱씹었다. 성준수가 저를 걱정해 준 것이 감동인 탓도 있었으나 자꾸 마음에 걸려서 그랬다. 성준수의 말 중에 틀린 것은 없었다. 센티넬이라고 해서 무적은 아니었으니까. 잊을만하면 센터에는 시신이 도착했으며 동료의 죽음을 두 눈으로 맞이해야 했다. 그런데도 센티넬은 지속적인 가이딩을 받으며 전장으로 향해야 했다. 그게 가끔은, 아주 가끔은 신물이 났다.

"준수야, 나도 가이딩 받지 말까."

뭔 개소리야. 성준수의 표정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전영중을 쥐어패도 이상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아니, 준수야. 비꼬는 거 아니니까 들어봐봐. 황급하게 얼버무리자 무슨 말인지 들어는 보자는 낯을 했다.

"그냥 가이드가 날 살리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싶어서."

아프지 않아도 되고, 싸우지 않아도 되잖아. 매일 반복되는 하루를 살 필요도 없고. 성준수는 말이 없었다. 전영중의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하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고통을 겪고, 그 고통을 알면서도 매번 그것을 향해 뛰어들어야 하는 처지의 센티넬. 신체 부위가 날아가더라도 가이딩 받으면 그만이라 얘기하며 그 순간을 감내하는 이들. 하지만 그 어떤 가이드도 센티넬들의 두려움까지 보살피지는 못했다. 센티넬들은 매 순간이 전쟁이었다. 자신의 두려움을 이겨내는 전쟁. 그들이 가장 나약해질 수밖에 없는 전장.

불행 중 다행으로 밥은 잘 나왔다. 입 안에 밥을 한가득 욱여넣은 전영중이 고개를 들었다. 창 사이로 햇빛이 길게 늘어졌다. 식당은 지상에 있었기에 센티넬들이 전장을 제외하고 햇빛을 볼 수 없는 몇 없는 장소였다. 따가운 햇빛 너머로 나무들이 보였다. 센터 건물에 가까울수록 더 많은 가지들이 잘려있는 나무들. 어떤 나무는 전봇대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성준수는 언젠가 지나가면서 나무들이 불구자 같다고 말했다. 센터 조경을 관리하는 자들이 전정 작업을 위해 나무를 불구자와 다름없이 만들어버린다고. 그렇게 말했다. 전영중 또한 그들이 나무를 죽이고 있다고 느꼈다. 나무 또한 생명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행위들. 어찌 보면 당연했다. 높으신 분들은 센터 내에 지내는 사람조차 하나의 도구로 보니까. 자신들을 위해 움직일 몸만 남겨두고 의지와 사지를 잘라버리는 이들. 그들에게 센티넬은 도구이자 자신들이 영웅으로 만들고자 하는 존재였다. 동시에 그들이 평범한 인간과 별다를 바 없는 존재임을 인식하지 못햇다. 무거운 짐을 지게 한 존재들이 겨우 열아홉도 되지 않은 어린애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들은 그런 식으로 센티넬들이 망가지는 것에 대한 책임에서 어물쩍 벗어났다. 언제나 그랬다.

하지만 모든 문제는 센티넬들이 문제 상황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정부에게 충성을 바치는 것이 당연한 그들. 자기 통제권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 현실. 본인의 생명이 본인에게 없는 작금의 현실. 하지만 센티넬들에게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애초에 문제 삼지 않았으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들에겐 그들의 생명이 정부에게 있는 것은 당연했다. 특히나 원중 프로젝트 출신 센티넬들은 더더욱 그랬다. 그들은 자다가도 센티넬 행동 강령을 외울 수 있는 자들이었으니까.

"영중이 형, 저 옆에 앉아도 돼요?"

고개를 들어보니 조재석이 보였다. 그동안 별 접점도 없었던 조재석은 함께 현장 지원을 다녀온 후 부쩍 친근하게 굴었다. 부상을 입은 와중에도 주어진 임무를 다하는 모습에서 제법 큰 감명을 받은 것이 분명했다. 조재석의 뒤로는 지국민을 비롯한 다른 센티넬들이 보였다. 다들 머뭇거리는 모습이 성준수의 눈치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전영중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조재석은 전영중의 옆에 앉았다. 대각선으로는 성준수를 마주하는 위치였다. 준수 형, 저랑은 인사 종종 했었죠? 저 여기 좀 앉을게요. 넉살 좋게 말을 늘어놓는 걸 보면 쟤도 참 난 놈이다 싶었다.

"전영중, 너 다 먹었냐?"

"어? 나 아직."

"나 그럼 먼저 내려간다."

성준수는 그러거나 말거나 식판을 마저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헐, 제가 말실수 했나여? 조재석만 멀어져가는 뒷모습만을 보며 중얼거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센티넬들도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더니 전영중에게 온갖 말들을 쏟아냈다. 너 성준수랑 친해? 아냐, 쟤네 보면 맨날 싸우고 있어. 그런데 같이 밥 먹잖아. 야, 그냥 두고 가는 거 못 봤냐. 자기들끼리 묻더니 자기들끼리 대답하는 모습을 보며 전영중은 남은 밥을 묵묵히 먹다가 수저를 내려놨다. 일어나면서 툭 대답했다. 그냥 저들끼리 내뱉는 비슷한 질문들에 신물이 나서 그랬다. 준수가 나 괴롭히냐고? 어. 우리 사이 안 좋아. 근데 룸메라서 어쩔 수 없이 같이 살아. 숙소로 내려가며 전영중은 그 대답을 솔직히 후회했다. 많이는 말고 아주 조금.

숙소에 들어가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한 낯을 하고 있는 성준수가 있었다. 조금 전 식당에서 저 혼자 쌩하니 가버린 일이 전영중 혼자만의 착각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왜 먼저 내려갔어? 그렇게 묻자 그냥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성준수는 항상 그런 식으로 살았다. 센터에서 다시 마주한 날부터 그랬다. 외로움이라는 것이 인간 삶의 기본 명제라는 듯이 굴었다.

"원중 애들 좀 소개해 줄까? 친해지면 좋잖아."

"됐어. 필요 없어."

"왜?"

전영중은 가끔 그 태도가 이해가 가질 않았다. 혼자가 편하다는 듯이 구는 성준수의 모습이. 전영중은 그 이유를 물었다. 성준수를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라도 타인이라는 벽의 간극을 극복해 보고 싶었다. 성준수는 오랫동안 대답이 없었다. 대답하고 싶지 않은 것이 표정에서부터 티가 났다. 전영중은 결국 캐묻는 것을 포기했다. 언젠가는 말해주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준수가 자신에게는 가이딩을 받지 않은 이유를 이야기해주었던 것처럼. 모든 것은 기다리면 때가 온다고 생각했다. 기다리면 시간이 답을 주는 것들이 있었다. 실패라고 생각했던 제가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능력을 갖게 된 것 같이. 그래서 전영중은 이번에도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성준수의 성격은 쿨하고 투박해 보이지만, 제법 섬세한 측면이 있었으므로.

그 이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오전 훈련이 끝나고 식당으로 올라가던 도중 센터 내에서 비상벨이 울렸다. 가이드들의 긴급 소집 명령이 떨어졌다. 현장에 나갔다가 크게 다쳐서 오는 경우도 적지 않았으니 가이딩실에 비상이 걸리는 건 숟하게 봐왔지만, 이정도로 긴박한 센터 내의 모습은 센터 이관 후 처음 겪는 광경이었다. 호버레처(hover stretcher) 위로 검붉게 변한 천이 덮여 있었다. 죽었어? 모르겠어요. 살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죽었으면 가이딩 안 듣는 거 알잖아. 그래도 해봐야죠. 난잡한 대화들이 그 위로 흩어졌다. 전영중은 통로 가장자리로 비켜나면서 성준수를 살폈다. 안 그래도 하얀 성준수의 낯빛이 시허옇게 질려 있었다. 그 순간 전영중은 깨달았다. 성준수가 그 누구도 가까이하지 않으려 했던 이유를. 성준수는 더 이상 누구도 잃고 싶지 않은 것이다. 가까워진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행위를 더 이상 겪고 싶지 않은 것이다.

전영중은 안타까움과 동시에 의문을 가졌다. 그렇다면 자신은 성준수에게 어떤 존재인가. 누구도 옆에 두지 않는 성준수가 유일하게 곁을 내주는 전영중이란. 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은 돌이킬 수 없다.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었던 때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친구, 동료, 전우. 여러 가지 이름으로 얽힌 관계를 백지로 돌이킬 방법이 존재할 리가.

그것은 성준수뿐만이 아니라 전영중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조금은 슬퍼졌다. 이 사실을 깨달은 순간부터 전영중은 현장에 나가는 성준수가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빌게 될 것이었으므로. 센터의 비상벨 소리가 아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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