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GHT or FLIGHT

FIGHT or FLIGHT 02

센티넬X센티넬 빵준

익숙한 호출음이 들렸다. 성준수는 표정의 변화 없이 센티넬용 군복을 입기 시작했다. 고작 며칠 쉬었다고 또다시 접전지로 끌려나가야하는 상황이 지겹도록 익숙했다. 방문이 열리자 거실 소파에 누워있던 전영중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전영중은 성준수의 기척에 몸을 일으켰다. 이틀 전 봤던 것과는 다르게 멀끔한 자태였다. 고작 그 이틀 만에. 비단 군복뿐만이 아니라 성준수의 존재 자체가 그랬다.

"어디 가?"

"보면 몰라? 섹터 3 지원 임무 떨어져서 가야 돼."

"벌써? 준수 임무 나갔다 온 지 얼마나 됐다고."

가이드가 있다고는 해도 언제 폭주할지 모르는 센티넬은 임무를 완수하고 오면 의무적으로 휴식 기간이 주어졌다. 그 사이에 몸과 정신을 빠르게 회복하고, 다시 전장에 뛰어들어야 했다. 센티넬에게 주어지는 휴가는 겉보기엔 특혜처럼 보일지 몰라도 실상은 달랐다. 가장 오랫동안, 그리고 효율적으로 하나의 센티넬을 이용하기 위한 안전장치였다. 그런데도 유독 성준수는 그 텀이 짧았다. 일이 주를 전장에서 구르고 와도 고작 이삼일 뒤면 또다시 다른 구역 지원을 나가야 했다. 장기간 임무 수행 시 길게는 일주일까지도 휴식 기간을 갖는 다른 센티넬과는 현저히 비교되는 취급이었다. 센터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전영중마저 한눈에 알아차릴 만큼 기이한 사이클이었다.

"몰라. 시키는데 해야지."

성준수는 별생각이 없었다. 그저 위에서 시키니까. 자신은 정부에 충성해야 하는 센티넬이니까. 그렇게 살아야 하는 인생을 스스로 선택했으니까. 성준수 또한 받는 대가가 있었으니 자신의 처우에 불만은 없었다. 모든 불행은 불평과 불만에서 시작된다. 성준수는 불행한 인생이 되지 않기 위해 자발적으로 모든 부(不)를 없앴다.

"준수야, 너는 뭐가 그렇게 겁이 없냐?"

"뭐?"

"이상하잖아. 이틀 만에 다시 파견 나가는 거."

"겁나면 뭐 어쩌게. 내 자리 대신할 사람도 없어."

"하하, 준수야. 혼자 영웅병 걸린 것도 아니고. 남들 쉬는 만큼은 쉬게 해달라고 해."

"됐어. 네가 뭘 알겠냐."

성준수는 차갑게 말하더니 빠르게 숙소를 빠져나갔다. 닫힌 문 안쪽에 전영중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준수야, 왜 그렇게 요령 없게 사냐. 성준수는 듣지 못할 중얼거림이 낮게 깔렸다.

섹터 3은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다. 푸른 휘장을 감은 반란군들이 베이스캠프 목전까지 진영을 넓힌 상태였다. 당장에 할 수 있는 것은 방어밖에 없었다. 성준수는 도착하자마자 여기저기서 지원을 요청하는 목소리에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최전선까지 나간 성준수는 손끝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공기 중의 수증기가 얼어붙으며 순식간에 길목에는 커다란 얼음 장벽이 생겼다. 코 아래로 뜨끈한 것이 흘러내렸지만 닦을 새도 없었다.

길이 차단되기 전 넘어온 반란군 하나가 총과 함께 성준수를 향해 달려들었다. 센티넬도 본질적으로는 사람이다. 그 취급은 사람 같지 않을지 몰라도, 적어도 총 맞고 칼 맞으면 죽는다는 것이다. 전쟁에서 죽지 않기 위해서는 먼저 죽여야 했다. 성준수는 너무도 어린 나이에 그 사실을 깨달아버렸다. 뾰족한 얼음 기둥이 반란군의 몸을 관통했다. 여기저기 튀는 붉은 피를 보는 것은 썩 유쾌하진 않았다. 사위가 고요했다. 성준수의 능력을 본 일반 군인들은 항상 같은 반응이었다. 놀라워하거나 두려워하거나. 대개는 후자였다. 접전 지역에 있다면 심심하지 않게 센티넬들을 보게 될 터인데도 일반인들은 여전히 센티넬을 향한 경계심을 늦추지 못했다. 성준수는 그런 눈빛을 받는 것에는 이골이 나 있었다. 생각해 보면 일반인이라는 말도 좀 웃겼다. 좀 다른 능력 좀 가졌다는 이유 하나로 사람 범주에도 제외해 버리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사람 죽이는 건 똑같으면서 유독 센티넬에게만 그러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물론 그런 것 하나하나에 꼬투리 잡기에는 피로할 정도로 지쳐있었다. 그래서 굳이 그 눈빛들에 대꾸하지 않았다. 무서워하거나 말거나, 알아서 하라지.

날이 추워서 당분간은 이쪽으로 넘어오진 못할 겁니다. 생각보다 오래갈 것 같으니까 저거. 성준수는 계급표를 확인하고는 툭 말을 던졌다. 보통은 성준수가 다가가면 큰 체격이나 분위기에 잔뜩 겁을 먹곤 하는데 짬밥이 장난으로 먹은 건 아닌지 지휘관은 흔들림이 없었다. 성준수가 재차 물었다. 저 그럼 좀 들어가서 쉬어도 되겠습니까? 그러면서 질질 흐르는 코피를 닦았다. 그가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성준수는 쌩하니 걸음을 옮겼다. 팔을 들 때 움찔거리던 모습은 못 본 척하기로 했다.

베이스캠프로 돌아와 누우니 머리가 핑 돌았다. 확인해 보니 눈의 실핏줄도 다 터진 뒤였다. 충분히 쉬지도 못하고 현장으로 끌려와 연달아 능력을 쓰니 조금만 무리해도 몸에 이상이 왔다. 눈을 감으니 머릿속에는 방금 전 이름 모를 남자의 죽음이 슬로우 모션으로 재생되었다. 붉게 물들던 얼음 조각이며 여기저기 튀어 오르던 핏방울까지. 그 모든 장면이 생생했다. 센티넬이 된 이후에는 그 모든 것들이 남들보다 더 선명하게 보였고,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 말은 전쟁터에서도 누군가의 죽음을 또렷하게 마주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 죽음이 아군의 것인지, 적군의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은 사라지지 않고 겹겹이 쌓여만 갔다.

성준수는 몸을 뒤척였다. 옅은 숨이 허공에 흩어졌다. 오래 생각하는 것은 폭주하기에 딱 좋을 뿐, 도움이 되는 것이 없었다. 센티넬로 능력이 개화하고 센터에 전입하게 된 지 어언 오 년이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오 년이면 구를 대로 굴러서 모든 것에 무뎌질 때가 됐다. 처음에야 제 손으로 사람을 죽였다는 생각에 숱하게 구역질이 났다. 매일 밤 악몽으로 끙끙 앓았고, 폭주할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도 불행인지 다행인지 성준수는 이 지긋지긋한 전쟁에 익숙해져가고 있었다. 그 탓인지 지원을 나가야 하는 텀이 점점 짧아졌다. 성준수 본인도 그것을 알았지만, 굳이 불평하지 않았다. 차라리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정을 소화해 내는 것이 나았다. 가만히 있어봤자 잡다한 생각들과 악몽 같은 기억들로 마음만 어지러웠으니 말이다. 몸이 힘들어서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것이 나았다. 이번에도 잠깐 쉬고 나면 다시 밖으로 나가 상황을 살피고 지원이 필요한 곳을 향해 나서야 할 것이었다. 섹터 3 정리가 끝나면 얼마나 쉴 수 있을지도 확신하지 못했다.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성준수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익숙한 숙소의 천장이 보였다. 성준수는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를 되짚어보았다. 여느 때처럼 기억이 조각난 것이 분명했다. 분명 섹터 3이 깔끔하게 정리된 것을 본 뒤였다. 헬기가 도착하길 기다리고 있는데 게릴라 습격이 있었다. 성준수는 침착하면서도 재빠르게 광범위한 능력을 펼쳤다. 공중에서 금세 얼어붙은 뾰족한 얼음 조각들이 우박처럼 내리기 시작했다. 아군과 적군이 뒤엉킨 상황에서 능력의 범위를 제어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최대한 범위를 좁혀보려 신경을 집중하는 순간.

거기까지가 성준수의 기억이었다. 기억이 없는 상태로 숙소까지 들어온 것이 분명했다. 침대가 굳어버린 피로 인해 갈색으로 얼룩진 것을 보니 이번에도 가이딩실에 가지 않겠다고 버텼을 것이고. 이주원은 한바탕 난리를 쳤을 것이다. 이주원은 폭주하진 않았으나 의식 없이 능력을 쓰는 상태를 CFC(Contiguous Flood Condition)라고 불렀다. 능력이 불완전한 성준수가 자주 겪는 상태이기도 했다. 그걸 보고 센터 내의 누군가는 CFC가 아닌 SJS라고 불러야 하는 것 아니냐며 비아냥거렸다가 성준수에게 목이 따일 뻔하기도 했었다.

침대에서 내려오려니 방이 한 바퀴 빙글 도는 것 같았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약이라도 먹으면 나을 것 같은데 남아 있는 게 있었는지조차 기억이 나질 않았다. 아마 다 떨어진 것 같은데. 분명 내일 자신의 상태 체크를 위해서 이주원이 방으로 뛰쳐 들어올 것이었다. 그때 처방해달라고 이야기해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눈을 감았다. 새벽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안 돼."

예상과 달리 단호한 답이 돌아왔다. 준수야, 언제까지 약으로만 버틸 거야. 그 말에 성준수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전영중은 거실로 나오다가 그 불편한 상황을 마주하게 되었다. 결국 소리를 죽인 채로 방문을 닫았다. 거실에는 이주원과 성준수만이 남았다.

"신경 안정제야, 이거. 평범한 약이라고."

"저도 알아요."

"그런데 그거 먹는다고 얼마나 가겠어. 사람 약이잖아."

저는 사람 아니에요? 성준수는 그렇게 되물으려다 말았다. 안 그래도 고생하는 이주원에게 괜히 쏘아붙이고 싶진 않았다. 자기보다 한참 어른이기도 했고. 한 번 성질을 참고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저 안 아플 수 있어요?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준수야, 가이딩 받아. 잘 안 맞는 건 알지만 그게 약보다 나아. 성준수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입술만 짓씹었다. 결국 성준수는 자신이 처한 사실에 체념하고 만다. 아무리 신인류니 뭐니 이야기해도 결국은 사람 이하의 취급이었다. 센티넬은 잘난 일반 사람들에게 있어 자아가 있는 무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잘 안 맞는 것만이 이유가 아닌 거 아시잖아요."

"그렇지만 언제까지 이러고 살 수는 없잖아. 준수야, 네가 걱정돼서 그래."

"……."

"알았어. 약 처방 받아와 줄게. 내가 어떻게 널 이기겠냐."

"죄송해요."

"나중에 위층으로 올라와서 받아 가. 그 김에 햇볕도 좀 쬐고."

이주원은 한숨을 쉬면서 나갔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원중 프로젝트 아이들에게 약하다. 어린아이들을 생체 실험대 위에 올린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그 죄책감은 언제까지고 그의 약점이 될 것이다. 그는 천재 과학자이기엔 너무나 도덕적이었고, 도덕적이 사람이라기엔 과학에 대한 열망이 강했다. 아마 이런 시대가 아니었다면, 그는 더 큰 꿈을 펼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모든 건 만약일 뿐이고, 현실에서 만약만큼 쓸모없는 말도 없었다. 그렇기에 이주원은 평생을 성준수에게 져주며 살아갈 것이다. 제 몸을 갉아가며 버텨내는 성준수를 안타까워하면서도, 스스로 망가져 가는 것을 알면서도, 결국엔 성준수가 본인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성준수는 거실에 남아 제 통증을 계산해 보았다. 어제보다는 좀 더 버틸만한 것이 약 정도로도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주변이 조용해졌다고 느꼈는지 그제야 전영중이 다시 거실로 나왔다. 요, 준수. 그 목소리에 성준수는 여전히 핑핑 도는 머리에 인상을 잔뜩 찡그리고 전영중을 노려봤다. 왜 또 시비를 거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아프면 가이딩 받아."

"네가 뭘 알아."

"아프면 아프다고 해. 미련하게 버티지 말고."

"닥쳐."

그 말에도 전영중은 웃음을 잃지 않으며 성준수에 옆에 털썩 앉았다. 엊그제 들어왔을 때 또 온갖 곳에서 피 철철 흘리면서 들어오길래 기겁했더니,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또 멀끔한 얼굴이었다. 물론 겉만 멀쩡했지 여전히 몸 상태는 엉망일 것이 분명했다. 같은 센티넬로서 능력을 쓸수록 몸에 부담이 쌓인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특히나 전선 지원을 나가면 더욱더. 그곳에서 전해지는 온갖 정보는 센티넬의 감각 기관에 한계 이상의 부담을 줬다. 능력의 사용과 과도한 감각 정보들의 잔상. 그것은 본인의 의지로 무시할 수 있는 것 따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전영중이 첫 임무를 나갔다 복귀한 지 일주일이 다 되어가도록 쉬고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센티넬은 강력한 무기임과 동시에 금방 깨어질 유리처럼 다뤄졌다.


"아파?"

"어. 존나 아파, 씨발."

"너는 가끔 아플 줄 알았어."

"뭔 개소리야."

성준수는 전영중을 남기고 방안으로 사라졌다. 또다시 거실에는 전영중 혼자 남았다. 전영중은 마른 세수를 했다. 나도 가끔 아파. 성준수는 정말로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까. 혹은 기억나지 않는 척하는 것일까. 마음이 자꾸만 답답해졌다.

낮까지는 어떻게 버텨보려 했는데 몸 상태가 나아질 생각을 하질 않았다. 결국 성준수는 방을 나와 지상으로 향했다. 아직은 새벽이라 창 너머로 보이는 바깥에는 어스름이 지척에 깔려있었다. 겨울바람과 함께 음식물 쓰레기에서 새어 나온 시큼한 냄새가 새벽 공기를 타고 날아들었다. 낮이 되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릴 냄새는 이곳을 무엇보다 잘 드러내는 단면이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구취를 뿜어내는 도시. 그 도시 구석에는 온몸으로 썩어가는 제가 있었다.

성준수는 이주원의 방문을 두드렸다. 이 양반 새벽 내내 안 자는 건 이미 알고 있는 터라 노크 소리에는 거침이 없었다. 몇 번 더 소란스럽게 문을 두드리자 조금 피곤한 표정의 이주원이 나왔다. 나 귀 안 먹었다, 라는 볼멘소리와 함께.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요. 지금 받으러 왔어요."

"맡겨놓은 것처럼 얘기하네, 이제는."

"맞긴 하잖아요."

성준수는 한 마디를 안 졌다. 그래도 자기보다 10년 이상은 많이 산 사람이라 최대한 고분고분하게 대답했다. 아마 다른 사람이었으면 욕 한 사발은 시원하게 해줬을지도 모른다. 이주원이 성준수를 많이 봐주고 있다는 사실을 성준수도 모르지 않았다. 이주원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나오더니 성준수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캡슐이 가득 든 약통이었다. 복용법은 알지? 한 번에 많이 먹지 말고 아껴 먹어. 그러다 몸 다 망가져. 체념한 듯한 목소리였다. 성준수는 고개를 꾸벅 숙여 감사 인사를 한 뒤 빠르게 몸을 돌렸다. 저렇게 말해도 그 끝에는 가이딩 이야기를 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지하에 있는 제 숙소에 돌아와서야 급히 약을 씹어 삼켰다. 가만히 누워있길 한참. 조금씩 모든 감각 정보가 흐려지는 것 같았다. 성준수는 그제야 제대로 된 잠에 들 수 있었다. 꼬박 나흘만의 일이었다.

전영중은 여전히 굳게 닫힌 성준수의 방문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온 것이 한참 전의 일인데도 성준수는 일어날 생각을 안 했다. 생각해 보니 최근에 성준수가 무엇을 제대로 먹는 것을 본 기억이 없었다. 오전 훈련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왔을 때도 방문은 여전히 닫혀있었다. 어딜 나간 흔적도 보이질 않았다. 전영중은 소파에 철퍼덕 눕듯이 앉아 한참 동안 방문을 들여다보았다. 그렇게 하면 그 너머가 보이기라도 할 듯이. 그런데 조금 뒤 스르륵 방문이 열렸다. 전영중은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것을 들키고 싶지 않아 괜히 태연한 척 웃어넘기려 했다. 하하, 준수야, 해가 중천인데 이제 일어난 거야?

지하에 뭐가 해가 보여. 지랄 좀 하지 마. 예상했던 범위의 대답이 돌아왔다. 전영중은 그 말을 또 웃어넘겼다. 가볍게 무시했다는 게 더 정확한 설명이었다. 성격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도통 종잡을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새하얀 성준수는 오늘따라 더 창백했다. 그래도 자발적으로 밖으로 나온 것을 보면 요 며칠보다는 상태가 나아진 것 같긴 했다. 물을 마시는 성준수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이름을 불렀다. 준수야. 대답이 없길래 한 번 더 불렀다. 왜 부르는데. 무시할 것 같으면서도 결국에는 대답하는 성준수.

"바빠?"

"아니."

"그럼 게임 하나 할래?"

"갑자기 뭔 게임이야, 시발."

"젠가 하자."

"……."

"가족들이 보내줬어."

이번에는 성준수가 전영중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젠가라는 단어 때문인지 가족이라는 단어 때문인지. 그 이유를 정확하게 알기는 어려웠다. 거절할까 혹은 방 안으로 들어갈까 성준수가 고민하고 있을 때 전영중은 서랍장 안을 뒤져 작은 박스 하나를 꺼냈다. 누가 봐도 젠가였다. 성준수는 헛웃음을 지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사람 죽이러 전장으로 나가고, 센터로 돌아와서도 사람 죽이는 연습 하고, 숙소로 돌아오면 지쳐 쓰러지는 일상들 사이에서 그 나무 블록 박스가 너무도 이질적이어서 그랬다. 저 앞에 가서 앉을지, 무시하고 방 안으로 들어갈지 생각하는 와중에 전영중의 손목에서 요란한 호출음이 들렸다. 전영중은 그 알림을 빤히 쳐다보다가 방 안으로 들어가 환복을 마치고 나왔다.

"나 가봐야겠다. 준수야, 아쉬워?"

"지랄."

"나 다녀오면 하자. 무사히 갔다 올게."

"빨리 가기나 해."

"준수는 룸메이트한테 상냥한 배웅도 못 해줘?"

"어. 꺼져."

전영중은 끝까지 웃음을 잃지 않고 손을 흔들며 숙소를 나섰다. 이번에는 성준수 혼자 숙소 안에 덩그러니 남았다. 채 뜯다 만 젠가 박스와 함께. 그걸 보고 있자니 어릴 적 성지수가 줬던 젠가가 생각났다.

「우와! 어디서 났어?」

「여동생이 줬어. 한 번도 안 해봤지만.」

WPC에서 지옥 같던 하루하루를 버티던 날들 속에서 누군가와 함께 젠가를 하던 모습도 생각났다.

「영중아, 너도 나중에 나처럼 이식받게 되면 말야.」

「응.」

「여기 들어온 이유를 잊지 마.」

그리고 C2290506-04였던 전영중이라는 소년까지도.

지형지물이 험난해 게릴라 습격이 잦은 섹터 3은 요주의 접전 지역이었다. 그곳에 있던 병사들은 자기보다 한참 더 짬밥을 먹었을 텐데도 한낱 열아홉인 전영중의 눈치를 봤다. 처음에는 의아했지만, 성준수가 지원 나왔던 곳은 유독 그런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었다. 아마도 성준수의 CFC 상태를 마주한 것이겠지. 그 이후로 센티넬의 심기를 최대한 거스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분명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시한폭탄 취급이었겠지만. 전영중은 그게 잔뜩 못마땅했다. 필요에 의해 센티넬들을 죽음의 목전인 전방에 세워두면서도 제멋대로 두려워하는 꼴이 우스웠다.

섹터 3 지원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 이미 성준수는 자리를 비운 뒤였다. 가이딩실에서 듣자하니 몸 상태 회복하자마자 또 현장으로 끌려 나간 것 같았다. 상부에서는 능력 좋은 센티넬이 널리고 널렸는데 왜 성준수만 쥐잡듯이 굴리는지 그 속내를 알 길이 없었다.

전영중이 다시 성준수를 만난 건 한참이 지난 뒤였다. 숙소 문이 스르륵 열리며 성준수가 들어왔다. 터벅터벅. 그 발걸음이 유독 무겁게 느껴졌다. 전영중은 읽던 책을 내려놓았다. 훈련이 끝나면 지지리도 할 게 없어서 몇 권씩 읽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센티넬 능력이 발현된 후로는 자극적인 취미를 가질 수 없었던 것도 한몫했다. 그래도 책보다는 성준수가 훨씬 더 흥미로웠다. 언제까지 저를 기억하지 못할지도 궁금했다. 요, 준수. 그 말에 꺼지라고 대답할 줄 알았는데 조용했다. 대신 손만 휘적이며 그 뜻을 대신했다. 그걸 보니 의식이 없이 움직이는 CFC 상태는 아닌 것 같은데. 전영중은 다시 성준수를 불렀다.

"머리 울리니까 부르지 마, 씨발."

"가이딩 받아."

"됐어. 좀 잘 거니까 방해하지 마."

성준수는 아프다는 와중에도 단호하게 선을 긋고 방 안으로 사라졌다. 시계를 보니 밤이라기보다는 새벽에 가까운 시각이었다. 전영중도 몸을 일으켜 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잠에 들 시간이었다. 오늘은 복귀한 날이라 가이딩실에 있다 바로 방으로 내려왔지만, 내일 오후부터는 다시 훈련에 참여해야 했으니까.

전영중은 오랜만에 꿈을 꿨다. 깊은 물 속으로 끊임없이 가라앉는 꿈이었다. 온몸을 감싼 물이 된통 차가웠다. 그 감각이 지나치게 날 서 있어서 전영중은 눈을 떴다. 손목에 찬 워치는 새벽 다섯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직 완전히 깨지 않아 몽롱한 정신으로 누워있길 몇 분. 방 안의 난방 상태가 예사롭지 않았다. 아무리 겨울이라 해도 창문 하나 없는 지하가 이렇게 추울 리 없었다.

방문을 열자마자 더욱 싸늘한 공기가 밀려 들어왔다. 옷 아래로 소름이 돋았다. 전영중은 서리가 나부끼는 어둠 속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곧 찬 바람의 근원지를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었다. 성준수의 방. 방문 위에 손을 대자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센서에 손목을 가져다 대자 룸메이트를 인식한 문이 저절로 열렸다. 동시에 남극에 온 듯한 추위가 전영중을 덮쳤다. 저절로 욕설이 새어 나갔다.

"준수야."

이름을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성준수는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잠에서 깨질 못했다. 얼어붙은 이불 위로 성에가 날렸다. 보급받은 옷들이 정갈하게 걸린 행거에는 고드름이 자라 있었다. 하나의 큰 냉동고에 들어온 것 같았다. 성준수는 제 딴에는 본인의 능력이라고 영향을 덜 받는지 추워하는 기색은 없었다. 아, 원래 하얘서 티가 잘 안 나는 건가. 자세히 보니 입술이 파랗게 질려 있긴 했다. 자면서도 능력 제어가 안 될 때가 있다는 소문을 두 눈으로 확인하게 되니 조금 당황스러웠다. 전영중은 침착하게 성준수를 제외한 방 안의 중력을 한껏 끌어내렸다. 어는점의 변화로 성에며 얼음 조각들이 순식간에 승화하며 사라졌다. 추위가 조금 가시자 성준수의 입술도 서서히 원래의 색을 찾아갔다. 그 사이에서 새어 나오는 고통의 소리는 그대로였지만. 그 모습이 낯설었다. 언제든 덤덤해 보이던 성준수가 남들의 눈을 피해 아파하는 모습이.

전영중이 얼마 전까지 읽던 서적에서는 그렇게 말했다. 선량한 사람들이 자신의 온정을 감추듯이 용감한 사람들은 자신의 공적을 감춘다. 전영중은 그게 성준수의 얘기라고 생각했다. 온갖 임무에는 불려 나가면서 힘든 내색 하지 않는 꼴이 그랬다. 아닌가. 용감한 게 아니라 무모하고 멍청한 걸까. 전영중은 답을 내릴 수 없어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성준수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가이드가 아닌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곤 고작 이런 것 뿐이었다. 얼음을 걷어내고 지켜봐 주는 것. 가이딩을 할 수 있었다면 침대 위로 올라가 성준수를 껴안을 수 있었을까. 전영중의 속도 모르고 밤은 깊어만 갔다.

"잘 잤냐?"

전영중은 오후 훈련에 간신히 늦지 않을 시간이 되어서야 눈을 떴다. 새벽 내내 성준수의 모습을 지켜보다 겨우 잠들었으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방 밖으로 나가니 성준수가 전영중에게 툭 질문을 했다. 성준수가 전영중에게 먼저 말을 거는 것은 근 한 달을 통틀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룸메이트가 되어 마주친 날부터 성준수는 전영중이 계속 던지는 질문에 마지못해 답하는 게 고작이었으니까.

"그냥저냥. 준수는?"

"오랜만에 좀 잤어. 약 덕분인 것 같은데."

자세히 뜯어보니 그전보다 눈 아래로 내려온 다크써클이 옅어져 있었다. 전영중은 밤새 있었던 일을 이야기할지 고민하다가 말았다. 자면서도 능력 조절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본인이 모를 리 없었다. 센터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전영중마저 알 정도로 소문이 나 있었으니까. 그 어떤 사람과도 숙소를 같이 쓰지 않았던 성준수의 룸메이트 자리를 꿰찰 수 있었던 것도 말하자면 이 문제 덕분이었다.

전영중은 여전히 성준수가 이해되지 않았다. 몸만큼 정신도 무너져 간다는 일종의 적신호였는데, 성준수는 그걸 애써 모른 척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가이딩을 받지 않겠다고 극구 버티는 이유를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가이딩 없이 약으로만 버티는 이유가 무엇이냐 물어보려다가 너무 오지랖 같아서 전영중은 말을 삼켰다. 아무리 빙글빙글 웃는 낯으로 성준수 속을 긁어대던 전영중이었지만 건드려선 안 될 부분까지 찔러댈 정도로 눈치가 없진 않았다.

"나 나갔다 온다."

"준수야, 같이 나가. 나도 훈련 가야 돼."

"됐어. 나 훈련 가는 거 아니고 이주원 선생님 보러 가."

"어? 어."

"다녀오면 젠가라도 한 판 하든지."

그렇게 말하며 성준수는 숙소 밖으로 사라졌다. 저거, 기억 난 거 맞지? 전영중은 벙찐 상태로 성준수의 뒷모습이 사라진 곳에 한참이나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다가 결국 훈련에 늦어 한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된통 깨지고 나서도 웃는 전영중을 보고 또 다른 WPC 출신 센티넬 지국민이 말했다. 영중아, 너 설마 PTSD로 정신 나간 건 아니지?

훈련 끝나고 돌아온 전영중은 잔뜩 지쳐있었다. 방까지 들어갈 힘도 없어서 숙소에 들어오자마자 소파에 드러누웠다. 성준수의 방은 여전히 열린 채였다. 아직 오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이주원을 만나러 간다고 했었는데, 무슨 얘기를 하길래 이야기가 길어지는지. 전영중은 읽다 만 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 전쟁과 센티넬에 관련된 이야기였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성준수의 생각이 났다. 하루가 멀다하고 지원을 나가야 하는 성준수, 능력이 불안정한 성준수, 가이딩은 죽어도 싫다는 성준수, 그럼에도 남모르게 고통을 감내하는 성준수. 성준수는 영웅이 되고 싶은 걸까? 전영중은 그 속내를 여전히 모르겠다.

숙소 문이 열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저도 모르게 책을 읽다 잠든 것이 분명했다. 평소에도 살가워 보이는 표정은 아니었지만 유독 성준수의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이주원에게 한 소리 듣고 온 걸까. 모르는 척하기에는 너무 티가 나는 표정이라 전영중은 궁금증을 숨기지 못했다.

"왜. 또 선생님이 뭐라 했어?"

"어."

"오늘 가서 뭐 했는데?"

"검사 받고 잔소리 듣고."

"검사는 왜?"

"가이딩 안 받는 새끼는 나밖에 없어서 몸에 이상 있을까 봐 걱정된다고."

"야, 선생님도 너 어지간히 아끼나 보다."

"뭘 아껴. 센티넬이 아까운 거겠지."

"준수야, 선생님은 나 그 정도로는 안 챙겨."

"오늘도 가이딩 좀 받으라고 계속 말하고."

"……."

왜 안 받는 건데? 전영중은 그렇게 물으려다가 참았다. 물어봤자 욕만 들을 것 같아서 그랬다. 다른 이야기라면 눈치 없는 척 괜히 물음표를 던졌겠지만, 이만큼 기분이 좋아보이지 않는 성준수는 괜히 건드리지 않는 것이 나았다. 그런 전영중을 보더니 성준수가 피식 웃었다. 생각을 다 들킨 것 같았다. 젠가 가져와, 약속했잖아. 성준수는 그렇게 말한다. 어찌 보면 전영중보다 화제를 돌리는 데에는 도가 튼 것 같았다.

크고 나서 보니까 젠가가 한없이 작게 느껴졌다. 어릴 땐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굵은 손가락이 나무 블록을 건드리는 모양새가 위태위태했다. 그래도 둘 다 어지간히 감각이 발달한 센티넬이라 무너지지는 않았다. 구멍이 숭숭 뚫린 탑이 점점 높게 쌓였다.

"나 기억나, 준수야?"

끝나지 않는 젠가 게임에 전영중은 물었다. 정말 가볍게 툭. 그러자 성준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젠가 얘기 하니까 기억나더라. 내 옆에서 맨날 울던 애. 그 말에 무어라 반격하고 싶은데 틀린 말은 아니라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그렇다고 오늘 새벽에 보았던 광경을 약점 잡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무심히 말했다. 이제라도 기억해서 다행이네. 그것도 기억 못하면 어떡해, 준수야.

그러다가 삐끗. 성준수의 손이 한순간 휘청하며 아슬아슬한 탑이 무너져 내렸다. 둘 다 반사적으로 무너지는 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렇게 순간 맞닿는 손. 성준수는 불에라도 데인 것처럼 황급히 손을 뒤로 물렸다. 누가 봐도 닿는 것을 꺼리는 모양새였다. 졸지에 전영중만 황당한 꼴이 됐다. 성준수는 그새 태연한 낯이었다. 방금 전까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무너진 나무 블록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전영중은 순간 자신이 착각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별말 없이 성준수를 도와 블록을 치웠다.

"벌칙은 어떡할래?"

"딱밤 말고 다른 거로 해."

"그럼 소원 들어주기."

"그런 말 시작할 때 없었잖아."

"그럼 딱밤 맞든가."

"씨발. 그럼 소원으로 해."

"하하, 준수야, 소원권 잘 아껴놨다 쓸게?"

"어~그래 씨발. 니 맘대로 해라."

성질을 내는 성준수 앞에서 전영중은 생글생글 웃었다. 그 모습에 성준수가 더 열받아 하는 것이 보였다. 준수야, 저녁 먹으러 가자. 너 약 먹으려면 밥이라도 제대로 먹어야지. 그렇게 말하며 전영중이 먼저 몸을 일으켰다. 성준수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성준수는 보지 못한 것인지 스스로 일어나 엉덩이를 털었다. 식당으로 가는 내내 묘한 거리감이 유지됐다. 전영중은 무언가 찝찝함을 느꼈지만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언젠가는 성준수가 먼저 말해주리라 믿었다. 시간이 걸렸지만 자신을 다시 기억해 낸 것처럼.

또다. 또 성준수가 피떡이 되어서 돌아왔다. 옆에는 또 안절부절못하는 이주원이 함께였다. 부축도 마다하고 걸음을 질질 끌면서 방으로 돌아오는 꼴이 제법 안쓰러웠다. 그 와중에 약은 잘도 찾았다. 몇 알 입에 털어 넣더니 방안으로 비척비척 들어갔다. 다친 짐승이 제 보금자리를 찾아가는 모습 같기도 했다. 센티넬이 일반인보다 회복력도 좋은 것은 맞지만 가이딩을 받으면 훨씬 더 빠르게 회복될 텐데. 전영중은 여전히 의문을 가진 채였다.

성준수가 얌전히 누워 잠드는 것까지 확인한 이주원이 거실로 나왔다. 그 또한 잔뜩 지친 표정이었다. 그러다가 전영중을 마주하고는 힘겹게 웃어 보였다.

"영중아, 요즘 지내는 건 어때?"

"그럭저럭 괜찮아요."

"준수랑 방 쓰는 건 괜찮고? 좀…, 힘들지는 않아?"

"잘 때 능력 조절 잘 안되는 거 얘기하시는 거죠? 전 괜찮아요."

"그냥 얌전히 가이딩 받으면 좋은데 한사코 싫다고 하네."

"성준수 쟤 진짜 독하네. 이상하긴 해요. 계속 싫다고만 하는 게."

"센터로 이관된 지 5년인데도 계속 저래. 일부러 뻗대는 건 아니고…."

"알아요. 준수가 그럴 만한 애는 아니라는 거. 이유야 나중에 본인이 직접 이야기해 주겠죠. 그때 들을게요."

"그래. 생활하는 데 불편함 있으면 얘기하고. 어쨌거나 원중 애들은 내 담당이니까."

"네."

"네 덕에 숨돌린다."

이주원은 고맙다는 얘기를 하며 머리를 짚으면서 밖으로 나갔다. 아무래도 신경 써야 할 원중 애들이 한둘이 아닌 탓이겠지. 완력 조절 못하고 센터 내 기물 부숴 먹는 지국민이나 공기 흐름을 이용해 공기포를 장난처럼 쏴대는 조재석까지 하나같이 개성 넘치는 센티넬들뿐이었으니까. 개중에서 성준수는 가장 까다로운 녀석일 테고. 센터 내에서도 가장 번거로운 센티넬 취급당하는 성준수랑 별말 없이 잘 지내주고 있는 전영중이 여간 고마운 게 아닐 터였다.

성준수는 하루도 채 되지 않아서 밖으로 나왔다. 경이롭기까지 한 회복력이라 전영중은 입을 떡 벌렸다. 회복력의 문제가 아니라 독한 정신력의 영역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식받아서 갖다 줘? 그 말에 성준수는 고개를 저었다. 가서 먹을 수 있어. 그러면서 전영중의 부축도 없이 위층 식당을 향해 가기 시작했다. 평소처럼 저벅저벅이 아니라 비척비척 걸으면서. 그 모습이 위태로워 보여서 전영중은 한걸음 뒤에서 성준수가 나아가는 모양새를 걱정스레 지켜봤다.

"너 몸은 괜찮냐?"

평소보다 천천히 식사를 하는 성준수를 향해 전영중이 대뜸 물었다. 신경 쓰지 않으려 했는데 자꾸만 신경이 쓰여 미칠 것 같아서 그랬다. 성준수의 상태는 누가 봐도 모르는척 하는 게 어려운 정도라서. 그래서 저도 모르게 질문이 먼저 튀어 나갔다.

"보면 모르냐. 괜찮잖아."

"뭐가 괜찮아."

"너도 또 가이딩 받으라고 하게?"

"말이 또 왜 그렇게 튀어. 걱정되니까 그러잖아, 준수야."

그 말에 성준수는 입을 꾹 다물며 국그릇에 눈을 고정했다. 전영중도 한숨을 쉬며 수저를 내려놓고 성준수를 바라보기만 했다. 식당은 온통 북적이는데 둘의 주변만 고요한 것 같았다. 밥이나 마저 먹어. 성준수가 그렇게 말한다.

"그렇게 말 자꾸 돌리면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야 해?"

"……."

"친구 정도는 되잖아. 나 아플 때 네가 걱정해 준 것처럼 나도 네 걱정 좀 할 수 있잖아."

분위기가 금세 싸늘해졌다. 그 기류를 읽었는지 남들이 전영중과 성준수 주변을 슬슬 피해 갔다. 남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성준수의 머릿속이 눈에 훤히 보였다. 모든 걸 굳이 말해야 하냐는 표정. 전영중은 더 이상 앉아있을 것도 없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자리를 피해 봤자 결국 숙소에서 또 만나게 되겠지만, 계속 앉아있어봤자 성준수에게 욕을 먹는 게 전부일 것 같아서 그랬다. 하 씨발… 뒤에서 성준수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결국 무엇을 선택하든 욕먹는 건 예정된 시나리오였나보다.

센티넬 관리 센터에서 원중 프로젝트 대상자들은 어떤 인식인가. 그 인식은 극과 극으로 나뉘었다. 강력한 능력에 따른 높은 등급을 부러워하는 자들. 그리고 그래봤자 실험용 쥐라며 불안정한 능력을 업신여기는 자들. 다행인 점은 후자의 경우는 극히 적었다. 게다가 대부분은 별생각이 없었다. 그래봤자 같은 센티넬에 매일 전장으로 밀려 나가야 하는데 서로를 구별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그래서 별문제 없었다. 일반적인 센티넬들은 원중 프로젝트 대상자들이 WPC에서 온갖 실험을 견딘 것에 대한 측은지심을 표현하지도 않았다. 그게 어설픈 동정이 될까 봐 그랬다. 오히려 어릴 적부터 험난한 과정을 견딘 것에 격려를 보내거나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 굳이 따지자면 원중은 센터 내에서도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유독 성준수에 대해서만은 달랐다. 그의 불안정한 능력 때문인지, 혹은 다른 이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성격 탓인지. WPC 출신 내에서도 가장 별 볼 일 없는 것 아니냐며 뒤에서 수군거리는 일이 잦았다. 정작 이야기의 당사자인 성준수는 그러한 말들에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지만.

센터 내에서 성준수만을 죽어라 굴리는 것도 그러한 취급에 한 몫 했다. 센터에서도 대우받지 못하는 센티넬. 그 문장 하나가 성준수의 가치를 재단하려 들었다. 특히나 성준수보다 등급이 낮은 일반 센티넬들은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봤자 실험체다. 능력도 불안정하다. A등급은 순 거짓말 아니냐. 자면서도 능력 제어가 잘되지 않아 방 안이 다 얼어붙는다는 소문도 거기서부터 퍼져 나왔다.

그들은 성준수가 가이딩을 받지 않으려는 것 또한 아니꼽게 바라보았다. 유독 원중 프로젝트 대상자들이 감응하는 가이드를 찾는 것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가이딩 자체가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성준수는 끝까지 가이딩을 거부했다. 센터로 이관된 이후부터 꼬박 5년을. 그 이유는 이주원을 제외한 아무도 몰랐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성준수는 센터 내에서 제법 튀는 존재였다. 원중 프로젝트 대상자들은 필연적으로 눈에 띌 수밖에 없는데, 그 속에서도 독특했다. 그게 오히려 독으로 작용했다. 

전영중도 센터로 들어오자마자 성준수를 향한 묘한 기류를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그게 참 신경에 거슬렸다. 열등감에 찌들어 뒷말을 끊임없이 늘어놓으면서도 정작 앞에서는 한마디도 못 할 찌질이들. 전영중 생각에 성준수가 그런 놈들을 가만 놔두지 않았을 것 같았는데,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은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런 놈들을 하나하나 잡아다 족치기엔 성준수가 너무나 바빴다. 뒷말이 도는 걸 알아도, 저를 업신여기는 자들이 있는 걸 알아도, 대놓고 열등감을 전시하며 씩씩거리는 놈을 알아도, 일이 너무 많았다. 현장 지원을 나갔다가 피떡이 되어 돌아오고, 겨우 회복하면 다시 현장으로 끌려가고. 무한 반복. 가이딩도 받질 않으니 회복 속도도 더뎠다. 그 와중에 잔챙이들까지 상대하기에는 제아무리 성준수라도 무리일 것이 분명했다. WPC에서부터 성준수를 멋있다고 생각하던 전영중 심사만 뒤틀렸다.

"야, 전영중. 자냐?"

식당에서의 일이 있고 나서 한참 뒤, 성준수가 전영중의 방문을 두드렸다. 몸이 좋지 않을 때 이래저래 신경 써 준 것을 알기에 그냥 내버려두기가 어려웠다. 회복이 타인의 정성과 맞닿아 있다는 걸 상기했기 때문이었다. 위안을 주는 것들은 결국 누군가의 마음 씀으로 이루어진다. 이번에는 자신이 정성을 베풀 차례였다. 잠시 밖에서 기다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며 전영중이 나왔다. 왜 부르는데? 그렇게 말하며 웃는 전영중의 표정이 제법 싸늘했다. 얘기 좀 하자고 불렀는데, 왜, 불만 있어? 성준수도 만만치 않았다.

"아까는 그냥 가더니."

"야, 그럼 거기에 사람도 많은데  얘기를 하겠냐?"

"그럼 사람 없는 데서는 대답해 주게?"

"그러려고 지금 부른 거잖아."

"……."

전영중의 말문이 막혔다. 제가 아는 성준수가 맞는지 순간 의문이 들 정도로. 벙찐 전영중에게 성준수가 한마디 했다. 아무 말 안 하면 너 또 삐져있을 거잖아. 그 말에 전영중이 반문했다. 내가 대체 언제? 그러자 성준수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너 내가 기억 못했을 때도 계속 티 냈어."

"아닌데."

"너 일부러 내 속 긁어댔잖아. 웃으면서."

"……."

"너 어차피 방 나갈 생각도 없어 보이는데 계속 물어볼 것 같아서 알려주는 거야."

"뭘?"

"가이딩 안 받는 이유."

"왜 안 받는데?"

"일단 잘 안 맞기도 하고."

"그리고?"

"나 다른 사람이랑 닿는 거 싫어해."

말하자면 실험이 남긴 부작용이었다. 일종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같은 것. 실험과 훈련을 반복하며 능력은 빠르게 개화했지만 그로 인해 타인의 손길을 극도로 꺼리게 됐다. 레우논 이식 때의 고통이며, 그 이후 반복되던 악랄한 난이도의 훈련, 주삿바늘을 연신 꽂아대던 결과 수집의 과정들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모든 감각이 일반인보다 한 수 위인 센티넬에게는 그 자극이 더 심했다. 단순한 회상 정도가 아닌, 놀랄 정도로 그 당시의 감각들이 날 선 채 느껴지는 것 같았다. 방사형 가이딩을 할 줄 아는 가이드는 극소수였으며, 그것도 효과가 미미했다. 말하자면 가이딩을 위해서는 접촉이 필수 불가결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것은 성준수에게 있어서는 고문과도 같았다. 전장에서 이리저리 찢긴 채 돌아온 몸이 실험대 위에 다시 올라간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했다.

처음부터 상태가 나빴던 건 아니었다. 감응이 잘되는 가이드가 없다는 것만 빼면 큰 문제가 없었다. WPC 출신 중 감응하는 가이드가 없는 건 종종 발생하던 일이었다. 하지만 개중에서도 가이딩의 효과가 유독 미미했다. 이 정도로 가이딩이 듣지 않는 사례는 국내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혔다. 효과가 떨어질수록 접촉 시간은 길어졌다. 회복에도 시간이 오래 걸렸다. 회복이 끝나면 곧장 현장으로 뛰어들어야 하는 경우가 허다하게 생겨났다. 사람이 죽어 나가는 꼴을 보고 온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사람을 죽이러 가야 했다. 몸은 정상 범위 안으로 들어왔을지 몰라도 정신은 아니었다.

정신세계라는 건 참으로 복잡해서 순간 손을 놓으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냥 아주 조금씩 조금씩 균열이 가고 무너져 내리고 부식되고 있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조금 꺼림칙한 정도였다. 그 뒤로는 소름이 돋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천장의 등이 실험실 조명으로 보였다. 그때부터 실재(實在)하지 않는 고통이 실제로 느껴지곤 했다. 사람들과 닿을 때마다 가장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순간들이 떠올랐다.

능력이 불안정하게 요동친 것도 그즈음부터였을 것이다. 센티넬의 능력은 감정에 가장 큰 영향을 받는다. 누군가와 부딪칠까 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으니, 능력이 안정될 리가 없었다. 결국 등급의 재조정이 있었다. 숙련도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여 S등급에서 A등급으로 강등되었다. 이 일로 센터가 여러 가십으로 떠들썩했지만 정작 성준수 본인은 덤덤했다. 등급이 낮아졌어도 제 능력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저 본인이 잘만 하면 언젠가는 전쟁 영웅이 될 수도 있겠지, 그렇게 생각할 뿐이었다.

그때부터 가이딩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효과가 있는 것도 아닐뿐더러 트라우마를 자극하기만 하는 행위를 계속 이어갈 이유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중독성 없는 신경안정제가 조금이라도 들어먹는다는 점이었다. 희귀하지만 신경안정제가 아예 듣지 않아 향정신성의약품 및 신경 억제제를 포함한 마약을 투여해야만 하는 경우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신경안정제도 임시방편일 뿐, 지속적인 가이딩만큼의 효과를 주진 못했다. 약 투여 기간이 길어질수록 이주원의 걱정도 깊어졌다. 성준수 꽁무니만 쫓아다니며 트라우마 극복 및 가이딩 시도를 노력해 보자고 했지만, 성준수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성준수의 이야기를 들으며 전영중은 젠가 때 손을 피하던 모습이 제 착각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첫 만남 때 빠르게 손을 털어낸 것도 그 때문이었겠지.

그러니까 너도 왜 가이딩 안 받냐고 그만 물어봐. 성준수의 말에 전영중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아마 이 이야기를 꺼낸 근본적인 목적이기도 했을 것이다. 자의로 가이딩을 거부하는 최초의 센티넬. 동시에 언제 폭주할지 모르는 최악의 센티넬. 그것만으로도 주변에서 온갖 따가운 시선을 받았을 테니까. 그래서 전영중은 어떠한 말도 얹지 않았다.

전영중은 느껴지는 냉기에 또 눈을 떴다. 시계를 보니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래도 이전에 한 번 겪었다고 크게 놀랍지도 않았다. 윗옷을 한 겹 더 입고서는 거실로 나섰다. 숙소 안에는 앙상한 겨울이 들어차 있었다. 지하의 숙소에 바람이 들어올 창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겨울바람의 근원지는 자명했다. 전영중은 굳게 닫혀있는 성준수의 방으로 향했다. 내장된 칩을 갖다 대 익숙하게 방문을 열었다. 저번과 같은 광경이 눈 앞에 펼쳐졌다. 풀풀 날리는 서리며 여기저기 매달린 고드름. 딱딱하게 굳어버린 이불과 그 아래에서 덜덜 떨며 잠이 든 성준수. 불편하게 왜 특수재질로 만든 유니폼을 입고 자나 싶었는데, 이런 일이 드물게 있는 것은 아닌 듯했다. 그냥 잠옷이었다가는 동사할까 봐 그랬겠지. 이럴 때 보면 센티넬도 영락없는 사람이다.

이번에는 저번보다 정도가 더 심했다. 머리 위로는 작게 눈보라가 쳤다. 문을 열어두었다고 그새 거실까지 난리가 난 것이 보였다. 전영중은 그제야 숙소에 들어온 첫날에 들여놓은 가구들을 보고 성준수가 왜 꼽줬는지를 이해했다. 얼었다가 녹았다가 반복할 텐데, 멀쩡하게 남아날 리가 없었다. 그럴 바에야 처음부터 아무것도 들여놓지 않는 것이 편리할 터였다.

전영중은 조용히 방 안의 중력을 낮췄다. 얼음이 빠르게 승화하기 시작했다. 성준수는 자면서 자꾸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신음 소리들 사이로 조각난 이름을 이어 붙여보니 WPC에서 종종 이야기하던 여동생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제아무리 독한 센티넬이라 해도 사람은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필연적으로 약한 부분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누구보다 강해 보였던 성준수의 이런 모습은 전영중을 제법 불편하게 했다. 전영중은 성준수의 이름을 불렀으나 그는 깨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흔들어 깨울까 생각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첫째로는 다른 사람이 제 몸에 닿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자신의 약한 모습을 누군가에게 보였다는 것을 싫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다만 전영중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은 겨울나무처럼 가만히 서서 성준수를 지켜보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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