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GHT or FLIGHT 01
센티넬X센티넬 빵준
망해가는 세상에서 망하지 않는 세계를 상상한다. 그곳에서 너와 함께 살고 싶었다고.
이제는 너의 희망인지 나의 바람인지 알 수도 없는 빛바랜 생각을 몇 번이고 되새겨본다. 그냥, 그랬으면 어땠을까, 하고. 하등 의미 없는 행위라는 것을 너도, 그리고 나도 모르지는 않았다.
부럽네. 멀어져가는 아이의 뒷모습에 탄식처럼 말이 샜다. 너는 그저 어깨를 으쓱이는 게 고작이었다. 그 모습에 나는 더 이상 말을 얹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다.
망해가는 세상에서 우리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가.
FIGHT or FLIGHT
성준수의 발끝에 잡동사니들이 채였다. 그와 함께 방문 앞에 거슬리게 쌓인 몇 개의 박스. 센터에서 유일하게 룸메이트도 없이 독방 쓰는 성준수인데, 제가 모르는 물건이 문 앞에 있을 리가 없었다. 또 어떤 신입 새끼가 착각했나. 아니면 잘못 배달됐나. 여러 의문을 가지며 익숙하게 손등을 갖다 댔다. 내장된 칩을 인식한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야, 너 뭐야?"
열린 문 너머로 보이는 동그란 인영. 보안 하나는 끝내주는 이곳에 좀도둑이 들었을 리는 없고. 문은 체내의 고유 칩 정보에 따라 열리는 것이니 잘못 들어온 놈일 리도 없고. 그럼 분명 허가를 받은 사람일 터인데 성준수는 새로운 입주자에 대해 들은 바가 없었다. 예전에 이 숙소를 쓰던 사람일 수도 있었지만, 그런 정신 나간 놈이 있을 리 없었다. 성준수의 날선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 짐을 정리하는 여유로운 자태에 미간이 구겨졌다.
저 새끼가 언제 대답하나 보자 싶은 마음에 성준수는 팔짱을 끼고 말없이 노려보기만 했다. 정적이 흐르는 대치도 얼마 가지 못했다. 씨발, 너 왜 여기 있냐고. 성질 급한 성준수가 결국 짜증을 팍 냈다. 그제야 상대는 고개를 돌렸다. 센터 내에서 성준수의 성깔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소문에 어두운 것인지 성준수와 눈이 마주쳤음에도 쪼는 기색이 없었다.
"준수야, 이야기 많이 들었어. 유명하던데? 앞으로 잘 부탁해."
그러면서 고작 한다는 이야기가 식상한 인사였다. 성준수의 눈썹 끝이 꿈틀거렸다. 스쳐 지나가며 본 적이 있어 초면은 아니었지만 말을 섞는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 최대한 성격을 참고는 있었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었다. 재차 물어도 빙글빙글 웃기만 하기에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몸을 돌렸다. 다짜고짜 상부에 가서 물어보면 뭐라도 나오겠지. 적어도 제 담당자인 이주원이라도 붙잡고 늘어지면 될 일이었다. 가장 깊은 지하 벙커 같은 방에 처박아놓을 땐 언제고 갑자기 새 룸메이트를 들여놓은 이유가 뭔지 들어야 했다. 배정에 오류가 있었다는 말을 들으면 더 좋고.
"왜? 걔 네 룸메이트 맞아."
그 말에 성준수가 한숨을 푹 쉬었다. 신경질적으로 지하를 벗어나 올라온 센터의 4층. 이주원의 연구실 문을 걷어차듯 열어젖힌 건 일종의 반항이었다. 그런데도 이주원은 성준수의 행동을 예측하기라도 한 듯 태연하게 굴었다. 다짜고짜 뭐냐고 묻는 말에도 당황하는 기색 없이 대화의 주제를 벗어나지 않는 답을 내놓았다.
"아니 ㅆ…, 근데 왜 저한테는 아무 말도 안 해주셨는데요."
"너 이럴까 봐. 미리 말해주면 센터 날려 먹을까 봐 말 안 했다."
"그걸 알면서도 그래요?"
"어쩌겠냐. 윗선에서 그렇게 말하는데. 무슨 변덕인지는 나도 몰라."
성준수는 습관적으로 욕을 내뱉으려다 참았다. 그래도 연구원 선생님 앞이니까. 그래도 불만이 쉽게 사그라드는 것은 아니라서 괜히 죄 없는 입술만 짓씹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높으신 분들이 부리는 변덕의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지하 겹겹이 거꾸로 쌓아 올린 센티넬과 가이드의 숙소들 중 역설적으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성준수의 방. 방이라기 보다는 벙커. 그 가장 깊은 곳에 가이드도 없이 혼자 처박아 놓은 것에는 여러 이유들이 존재했다. 그 이유들을 차치하고 사전 통보도 없이 룸메이트를 들이밀어 넣은 이 상황을 이해할래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가이드도 아닌 센티넬을. 거기에 더하여 이 모든 상황의 이유를 이주원까지 모른다는 점도 마음에 안 들었다. 하긴, 뭐 선생님이 모든 센티넬을 담당하는 것도 아니고. 그 작은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이주원이 말을 덧붙였다.
"걔는 내 담당 맞아. 원중 애들이라."
"그런데도 이 상황에 대한 이유를 몰라요?"
"미안하게 됐다. 그래도 좀 잘 지내보면 안 되겠냐."
"……."
"나쁜 애는 아니야."
"……."
"아니다, 좋은 애야. 기왕 이렇게 된 거 잘 지내봐."
센터 내 원중 프로젝트 담당자마저 모르는 일인데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마땅히 없었다. 늘 그래왔듯이 마주한 현실을 받아들여야했다. 센티넬 성준수는 그렇게 자라왔으니까. 그렇게 살도록 설계된 인생이었으니까. 제 의지와는 상관없는 현실에 불만을 짓씹으며 살아가는 건 이골이 날 정도로 익숙했다. 남들처럼 순응하면 편할 텐데 그것마저도 잘되지 않아 성준수는 늘 피곤한 인생을 살았다.
다시 제 방으로 돌아가면서 성준수는 방 안에 있던 이를 생각했다. 성준수는 그를 모르지 않았다. 성준수가 알고 싶지 않아도 저절로 주워듣게 된 정보만 해도 수두룩했다. 전영중. S급 센티넬. 최근 센터로 들어온 이후부터 그의 이야기가 어딜 가도 들려왔으므로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남들보다 늦게 능력이 개화된 점과 전에 없던 중력 제어 능력에 안정된 능력 컨트롤까지. 사실상 SS급 아니냐는 말이 돌 정도였다.
그런데 그 전영중이 지금 제 방 안에 와 있었다. 말하자면 거실에 작은 방 두 개 딸린 숙소에.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그 이유가 짐작이 가질 않았다. 밀려오는 짜증에 성준수는 괜히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오랫동안 고정된 탓에 생긴 가르마대로 다시 머리가 넘어왔다. 그게 오늘따라 거슬렸다.
다시 지하로 내려가 문을 여니 여전히 그 뒤통수는 여전했다. 제 공간을 비집고 들어온 침입자가 썩 달갑지 않았다. 그새 거실에는 이미 제가 보지 못했던 물건들이 즐비했다. 지하에 처박혀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센터 내에서 센티넬과 가이드들의 대우는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보통 센티넬과 가이드가 한 숙소를 쓰고, 그 안에서도 각방을 쓸 수 있도록 해주었으니까. 그 대신 늘 죽음을 코 앞에서 마주하며 살아야 했다. 목숨값이라 치면 조금 싼 편이라 말해도 할 말이 없긴 했다. 아무리 좋은 방이라고 해봤자 센터에 붙어 있을 날이 얼마나 된다고. 최소한으로 주어진 휴식이 지나면 전장으로 끌려나가야 하는 신세였으니까. 그래도 계속되는 반란군과의 전쟁을 생각하면 일반 군인들에 비해서 후한 처사였다. 그런데 그 덕분에 이제 전영중과 한 공간을 공유하며 살아야 한다니. 싫은 건 아니었지만 불편한 소식이었다. 혼자 방을 쓰게 된 지는 제법 오래된 이야기였으니까. 다른 누군가와 함께 공간을 공유한다는 사실이 반가울 리 없었다.
걔는 내 담당 맞아. 원중 애들. 문득 성준수는 방금 전 이주원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저 동그란 뒤통수. 어딘가 익숙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냥 툭.
"너 WPC(Wonjoong Project Control center) 출신이야?"
그 말에 부러 거슬리게 성준수를 무시하고 있는 것이 티가 나던 전영중이 몸을 확 돌리며 웃었다. 제일 반가운 말이라도 들었다는 듯이.
"준수야, 나 기억 안 나?"
성준수의 표정은 심드렁했다. 센터에 들어온 지도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을 기억하고 말고 할 게 있냐는 표정이었다. 그 표정에 전영중은 제법 서운하다는 기색을 내비쳤다. 그 모습에 성준수는 심드렁하게 말한다. 거기에 있던 애들이 수두룩한데 어떻게 기억해.
그보다 거슬리는 것은 제가 이주원을 만나고 온 사이에 방 안을 즐비하게 채운 가구며 잡동사니들이었다. 일부러 최소한만의 물건들로만 살고 있었던 것인데. 날벼락처럼 굴러들어 온 돌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아니꼬워 죽겠는데 원래 있던 방 주인과의 상의도 없이 제 맘대로 물건을 채워 넣은 꼴이 영 마음에 들지가 않았다. 얘랑은 죽어도 안 맞겠다. 그런 생각이 드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전영중은 그런 성준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인지, 못 본 척 무시하는 것인지 여전히 박스를 해체하고 그 안에 든 것들을 번쩍번쩍 들어 올렸다. 준수야, 좀 도와주면 안 돼? 성준수는 그 말을 못 들은 척하며 팔짱을 단단히 낀 채로 전영중을 노려보기만 했다. 전영중은 도움을 요청해봤자 별 소득이 없겠다고 판단했는지 다시 숙소 곳곳을 채우는 것에 집중했다. 부산스러운 소리만 들리기를 한참. 그제야 성준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야, 그냥 다 치워."
그 말에 전영중은 하던 것을 멈추고 성준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이내 푸핫 웃었다. 누가 봐도 작위적인 웃음에 성준수는 눈썹을 찌푸렸다.
"준수야, 방이 이게 뭐야. 적어도 사람 사는 꼴은 하고 살아야지."
"……."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누가 봐도 텅 비어 있던 곳이었으니까. 사람 사는 흔적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곳. 전쟁 중에 호사롭게 감성 인테리어를 하겠다는 터무니없는 꿈을 꾸는 놈들은 없었지만, 그래도 생활감이라도 찾아볼 수 있는 다른 센티넬들의 방과는 확연히 달랐다. 다른 이들은 무드 등부터 시작해 식물이든, 가족사진이든, 죽은 제 동료의 유품이든. 뭐라도 삭막한 세상에서 제가 기댈만한 것들을 찾아 방 안을 채워넣기 바빴으니까. 하지만 성준수의 방은 아무것도 없었다. 거실에는 최소한의 물컵 몇 개. 방 안에도 보급받은 옷가지 조금과 침대가 고작이었다. 준수야, 이게 사람 사는 방이라고 하면 믿겠니. 이주원이 성준수를 보러 올 적이면 늘 한마디씩 얹었다. 그럼 성준수는 늘 마음속으로 뒷말을 삼켰다. 방 아니잖아요. 원래부터 그런 목적이 아니었잖아요. 그러나 늘 허공에 퍼지는 말은 같았다. 글쎄요.
전영중 또한 그 점을 똑같이 지적하고 있었다. 사람 사는 꼴은 하고 살아야지. 이 사람이고 저 사람이고 자꾸만 성준수에게 사람답게 살 것을 강요한다. 평범한 사람들처럼 살아가는 건 이미 옛날 옛적 떠나가 버린 이야기인데도 불구하고. 그게 못내 짜증이 났다. 그런데 앞에서 빙글거리며 웃는 얼굴을 보자니 더 부아가 치밀어서.
"씨발, 걍 알아서 해."
"준수야, 왜 또 욕이야."
"이 상황에서 욕이 안 나오게 생겼냐."
"왜? 나는 너랑 방 써서 좋은데."
"지랄. 나중에 후회나 하지 마."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준수야."
"네가 가져온 저 쓸데없는 것들 나중에 네 손으로 다 갖다 버려야 될지도 몰라."
"그럼 그때 가서 버리지 뭐."
전영중은 성준수의 말에 한마디도 지질 않았다. 성준수는 한숨을 한 번 쉬더니 방 문고리를 잡았다. 이렇게 된 거 잘 지내보라던 이주원의 말도 머릿속을 맴돌았다. 전영중도 원해서 햇빛 하나 없는 가장 깊은 지하에 처박힌 건 아닐 테니 마지막 아량을 베풀기로 했다.
"잘 때는 방문 꼭 닫고 자라. 특히 나 있을 땐."
전영중은 갑자기 무슨 말이냐고 되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성준수의 자비는 딱 거기까지였다. 스르륵, 탁. 방문 닫히는 소리마저도 신경질적으로 들렸다. 공용공간인 좁은 거실에는 전영중 혼자만 멀뚱멀뚱 남았다.
전영중이 다시 성준수를 마주한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이 훌쩍 지난 뒤였다. 성준수와 같은 숙소를 쓰게 된 다음 날부터 당장 실전 투입 명령이 떨어졌다. 그렇게 전선에 나간 전영중은 목표물 사살 후 고작 생채기 몇 개 달고 센터로 복귀했다. 센터에 돌아오자마자 이주원이 부리나케 달려와 저를 맞이했다. 실전은 처음인데 괜찮았냐고 묻길래 어깨를 으쓱했다. 훈련보다는 덜 빡세던데요. 그 말에 이주원이 웃었다. 그래도 정신 똑바로 차려. 원래 처음에는 운이 좋은 거야. 그 말에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가이드 배정을 받지 못했거나, 담당 가이드만으로는 부족한 센티넬들을 위한 가이딩실 앞에 도착했을 때, 이주원의 워치에서 짧고 간결한 기계음이 들렸다.
"나 가봐야겠다. 급한 호출이라."
"네."
"내상 있을지도 모르고, 지금은 괜찮아도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발생할 수도 있으니 꼭 가이딩 받고 숙소 돌아가. 알겠지?"
"네."
"너는 특히 능력 안정화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걱정 마세요."
연신 신신당부하고 아래층으로 사라지는 이주원을 바라보다 가이딩실 안에서 적절한 치료를 받고 방으로 돌아온 참이었다. 그렇게 홀로 방에 누워있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스르륵, 방문을 열고 나가 보니 온몸에 생채기를 달고 거실로 들어오는 성준수와 그를 따라오는 이주원이 보였다.
"너 가이딩 받으라니까. 말 좀 들어!"
"괜찮아요. 나 가이딩 받는 거 싫다니까요."
"야, 너 계속 그러다 큰일 나!"
"손! 대지 마세요."
"……"
"소리 질러서 죄송해요. 저 약이면 충분해요."
"너 언제까지 그럴 거야. 아무리 맞는 가이드가 없어도 약보단 낫다는 거 너도 알잖아, 준수야."
"알아요. 그래도 저는 싫어요. 이게 다 ㅁ…,"
이주원과 실랑이를 하던 성준수는 방에서 나온 전영중과 눈이 마주치고는 입을 다물었다. 괜히 좋지 않은 꼴을 보인 것 같아 또다시 욕을 짓씹었다. 제발 가세요, 저 알아서 할게요. 귀찮은 벌레 쫓듯이 이주원을 숙소 밖으로 내보낸 뒤 곧바로 문을 닫았다. 뭘 봐, 구경났어? 성준수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성준수는 전영중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제 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툭, 투둑. 성준수가 지나간 길 위로 점점이 핏방울이 새겨졌다. 놀란 전영중이 다가가 몸을 돌려세우자 핏발이 선 눈이며 다 까진 입술, 그리고 줄줄 흐르는 코피가 보였다.
"야, 너 괜찮ㅇ,"
전영중의 걱정보다 성준수의 손이 빨랐다. 성준수의 어깨를 붙잡은 전영중의 손이 순식간에 떨궈졌다. 쳐내는 손길이 제법 매서웠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전영중은 얼떨떨하게 제 손을 쳐다보았다.
첫 만남부터 그런 식이었다. 성준수는 자꾸만 본인만의 공간을 원했다. 다른 이가 침범하는 것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았다. 성준수는 자꾸만 고립을 택했다. 그럼에도 전영중은 성준수의 공간 안에 들어가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일단 가이딩실부터 가자고. 그렇게 말해도 성준수는 여전히 고집을 부렸다. 전영중은 의아함을 느꼈다. 제가 아는 성준수라면 그깟 가이딩 한 번 받고 털어내는 게 낫다고 생각할 텐데. 소문대로 어지간히도 맞는 가이드가 없어서 그런가. 악으로 깡으로 버티는 성준수의 모습도 떠올리기 어려운 것은 아니라서 전영중은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
할 얘기 더 없지. 성준수는 그렇게 말하며 전영중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뒀다.
"준수야, 너 진짜 기억 안 나?"
"뭐."
"C2290506-04."
"몰라."
"C2281224-31은?"
"됐고, 나 쌍코피 났다고 이주원 선생님께 얘기하지 마. 또 난리 나."
그러더니 스르륵 방문 너머로 사라지는 성준수. 전영중은 성준수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적어도 마지막엔 일부러 화제를 돌린 것이 분명했다. 성준수가 그 번호를 모를 리 없었다. 그건 성준수의 실험 고유 번호였으니까.
이능력고유인자보유자. 통칭 센티넬. 일반인들과는 다른 유전 인자를 추가로 보유하고 있으며, 신경계에서 그 특징이 도드라졌다. 폭주한 센티넬을 해부한 결과, 뉴런들 사이에서 독특한 양상이 발견되었다. 뇌과학자들은 이를 레우논(Reunon)이라 명명하였으며 레우논 간의 긴밀한 연결을 통해 이능력이 발휘된다는 결과를 발표하였다.
전쟁이 막 시작될 무렵, 전세계적으로 이능력 현상이 한두 개씩 보고되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부터 기하급수적으로 그 수가 늘어났다. 그에 따라 사람들의 의견이 나뉘었다. 사회에 새로운 혼란을 야기할 것이라며 우려하는 목소리와 지속되는 전쟁에 투입된다면 피해를 대폭 줄일 수 있을 것이라는 긍정적인 목소리가 동시에 생겨났다.
센티넬은 레우논으로 인해 일반인들보다 몇 배는 예민한 감각을 지니고 살아야만 했다. 극도로 예민한 감각이 제어되지 않으면 폭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연구 결과까지 추가로 발표되자 여론은 급속도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센티넬들이 국가 내부의 위험이 될 것이며, 전쟁 중으로 혼란한 와중에 겨우 유지한 사회 안전망을 급속도로 무너뜨릴 것이라는 의견이 주를 이뤘다.
이에 정부는 특수능력자 총관리본부, 쉽게 말해 지금의 센티넬 관리 센터를 설립하였다. 센티넬의 안정적인 관리를 위해서였다. 센티넬이 일반인과는 다른 유전 체계와 레우논을 보유하고 있음을 고려하여 전 국민을 대상으로 초감각적 지각 검사(Extrasensory perception text, ESPT)를 실시하였다. ESPT는 이후 태어나는 아이들까지로 대상이 확대되었다.
정부는 ESPT를 통해 센티넬로 판정된 이들에게는 센티넬 고유 번호를 부여하고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가 센티넬의 등급화였다. 능력의 위험도, 희귀성, 숙련도 등을 수치화하여 SS 등급부터 B 등급까지 분류하였다. 능력이 위험할수록, 희귀할수록, 개인이 능력을 잘 컨트롤할수록 높은 등급을 받았다.
개중에서도 독특한 센티넬들이 있었다. 신체의 훼손을 복구하거나 정신을 안정시키는 등의 능력을 가진 이들이었다. 더욱 특이한 점은 이들의 이능력은 같은 센티넬 사이에서만 통한다는 것이었다. 정부는 이들을 다른 센티넬들과 구분하여 회복이능력고유인자보유자, 즉 가이드라 부르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의료계 센티넬이 그 외의 센티넬을 치료하는 과정은 가이딩이라 불리게 되었다.
정부는 ESPT를 통해 센티넬을 판별한 뒤 고유 능력을 판단하여 다시 한번 센티넬과 가이드를 분류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가이드로 분류된 센티넬들은 그 안에서 별도로 등급을 심사받았다. 절대성, 협응성, 숙련도가 그들의 등급 산정 기준이었다. 얼마나 광범위하게 치료가 가능한지, 센티넬과 얼마나 잘 감응되는지, 그리고 얼마나 능력을 잘 다루는지. 이 또한 다른 센티넬들과 동일한 등급 체계를 가지며, 보통 같은 등급의 센티넬에게 배정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가끔은 독특할 정도로 감응이 뛰어난 센티넬이 있어, 그런 경우에는 페어를 맺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렇게 이른 시간 내에 체계를 갖춘 센티넬들은 국가의 대표 공인이 되었다. 지속되는 반란군과의 전쟁에서 열세를 보이던 정부군은 금세 활력을 되찾았다. 센티넬들을 필두로 한 군대는 한순간에 전쟁의 흐름을 뒤바꾸어 놓았다. 그들은 더 이상 위험인자가 아니었다. 전쟁 영웅이었다.
정부에서는 이러한 센티넬들이 유출되어 사리사욕을 채우는 용도로 쓰이거나, 반란군에 흘러 들어갈 것을 염려하였다. 그리하여 전에 없는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었다. 센티넬의 가족들에게는 가장 안전한 도심의 숙소와 안정적인 물자 보급을 약속했다. 이제 막 태어난 아기의 목숨을 담보로 보장받는 안전이라는 비판의 목소리도 들려왔으나 그 이야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망해가는 세상에서 조금이라도 남들보단 잘 살고 싶은 이들이, 혹은 충성심을 증명하고 싶은 이들이, 남은 것 없이 절박한 이들이, 각자 다양한 이유로 아이들의 등을 떠밀었다. 개중에는 자발적으로 찾아온 이들도 적지 않았다.
센티넬의 투입에도 전쟁은 끝날 줄을 몰랐다. 반란군에서도 센티넬들을 선두에 세우기 시작했다. 결국 이능력의 대결이 되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서 특수 능력이 없는 일반 군인들은 더욱 비참하게 쓰러져갔다. 그럼에도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가 없었다. 센티넬을 물린다는 것은 이제 패배를 의미했으니까. 어떻게든 승기를 꽂아야만 끝나는 싸움이 됐다. 전쟁은 지척에서 흐르고, 번지고, 넘쳤다. 고통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부짖었다. 회의가 없고 반성이 없었다. 평화를 되찾는 방법이 전쟁의 심화라는 점은 참으로 역설적이었다.
센티넬들이 필요했다. 더 많은 센티넬과 더 강한 센티넬이. 그렇게라도 압도적인 힘의 우위를 점해야 했다. 결국 정부에서는 강수를 두었다. 많은 과학자들이 인공 레우논 개발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이는 인공 레우논을 만들어내고 이를 이식할 수 있다면 누구든지 센티넬로 개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데이비드 팰런의 이론에 기반했다. 그렇게 2221년, 국내 최초로 20대에 불과한 이주원이 인공 레우논 개발에 성공하였다. 레우논 이식에 성공한 것은 그로부터 2년 뒤의 일이었다.
그렇게 정부 주도하에 대규모 실험이 시작됐다. 적합한 유전 인자를 보유한 사람들을 모집하여 인공 레우논을 이식하고 이능력 사용이 가능하도록 훈련을 반복했다. 이름하여 원중(元衆) 프로젝트. 누구보다 강하고 뛰어난 센티넬을 키워내는 실험.
물론 실험이 성공하는 빈도는 저조했다. 면역 거부 반응으로 이식에 실패하는 경우가 허다했으며, 이식에 성공한다 해도 이능력을 쓰지 못하는 경우도 잦았다. 그렇게 하나둘 모인 실험 데이터에서 확연하게 드러나는 지표들이 있었다.
만 19세 이상의 피실험자는 모두 실패. 면역 거부 반응이 심하여 레우논 제거 수술을 진행함.
만 10세부터 만 13세까지의 아동기의 피실험자의 이식률이 가장 높음.
레우논 이식에 성공함에도 능력 발현까지 걸리는 기간은 피실험자마다 다양함.
지속적인 자극을 가할 경우, 그렇지 않은 피실험자 집단보다 능력 발현이 수월함을 확인함.
그렇지 않아도 인체실험 여부에 대해 말이 많았는데 이러한 연구 결과는 불에 기름을 부은 꼴이었다. 전쟁통에도 최소한의 인간성만은 잃지 말자며 목이 터져라 부르짖는 소수의 시민 단체들이 대거 들고 일어났다. 센티넬을 하나의 인격체가 아닌 전쟁을 위한 무기로 보는 것은 인권 침해에 해당하며, 전쟁을 위한 무기 재생산에 불과한 점을 꼬집어 인체 실험의 목적이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우습게도 그 사이에 센티넬 혹은 그들의 가족은 단 한 명도 찾아볼 수 없었다. 가끔 실패한 피실험자들과 그의 가족들이나 좀 마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오래가질 않았다. 끝이 보이질 않는 전쟁에서 사람들은 삶의 괴로움을 코앞에서 겪었다. 전쟁은 사람들의 일상을 마구잡이로 먹어 치웠다. 그 허기의 크기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결론은 돌고 돌아 센티넬의 필요성이었다. 사람들은 눈앞의 괴로움을 벗어나고자 도덕성을 팔아넘겼다. 특히나 수도에 사는 사람들은. 여전히 시위에 참여하고 있던 실패한 피실험자들의 가족을 비난했다. 다른 이들은 가만히 있는데 당신네는 왜 그러냐, 보상을 더 받으려고 그러는 것 아니냐, 라고 말을 서슴지 않고 내뱉으며 여전히 변하지 않은 대한민국 시민의식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렇게 원중 프로젝트 관리 센터(WPC)가 세워졌다. 대상은 성공률이 가장 높은 만 10세부터 만 13세 이하의 아동들. 대다수가 자발적으로 찾아온 전쟁고아들이었지만 가끔 제 자식을 본인들 의사로 WPC에 밀어 넣는 부모들도 있었다. 자식을 제물로 혼란한 시대에 안락한 삶을 누리고 싶은 자이거나, 혹은 정부의 더 없는 충성을 바치는 자이거나. 전쟁이라는 게 사람을 참 아둔하게 만들었다. 사실 코앞에 들이닥친 위험에서 살아남기에도 급급한 시대에 인륜을 찾는 것은 어쩌면 제일가는 사치였다. 일단은 오늘밤 안심하며 잠들 수 있는 공간과 당장에 배곯지 않을 수 있는 배급품이 먼저였다. 윤리니 도덕이니 하는 철학적인 것들 따위는 멀리 밀려났다. 사람들은 배고픈 소크라테스이길 원치 않았다.
원중 프로젝트는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센티넬 특유의 이능력을 강제로 개화시키려는 시도가 계속되었다. 연달아 실패였더라면 공분을 샀을 테지만, 미약하게 명을 이어온 시민단체의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SS급 센티넬이 인공적으로 만들어졌다. 고유 능력은 말이 좋아 바람이지 그 크기는 자연재해 태풍과도 같았다. 여러 번의 훈련 이후 실전에 투입된 센티넬은 순식간에 반란군을 초토화시켰다. 그 뒤로는 소년병 문제에 대한 논의도 쏙 들어갔다. 이미 대량 살상 무기와도 같은데 나이가 무엇이 중요하겠나.
물론 큰 성공을 기점으로 하여 무언가 극적으로 바뀐 것은 없었다. SS급 센티넬이 나왔다고 하더라도 성공률은 고만고만했다. 운이 좋으면 레우논 제거 수술을 받은 후 사지 멀쩡하게 나갈 수 있었지만, 대부분은 목숨이 오락가락했다. 그래도 절박한 자들은 계속해서 WPC로 몰려들었다.
사람들은 점점 현실에 무뎌져 갔다. 이 모든 게 반란군을 효과적으로 진압하고 전쟁을 빠르게 끝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믿었다. 원중 프로젝트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떠한 희망이 되어갔다. 어떤 이들에게는 적어도 제 몸 건사할 곳이 제공된다는 믿음이, 어떤 이들에게는 인생을 펼 기회가 되리라는 바람이, 어떤 이들에게는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기대가 되었다. 더 이상 원중 프로젝트의 윤리적 문제를 지적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것은 이제 너무나도 배부른 소리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센티넬로 개화한 소수의 아이들은 WPC에서 센티넬 관리 센터로 옮겨와 다른 센티넬들과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원중 프로젝트의 아이들을 관리하는 것은 처음으로 레우논 개발에 성공한 이주원이 맡았다. 서른 초입의 젊은 나이에 이십 대로 보이는 외모. 그리고 인공 레우논에 대한 깊은 이해까지. 어리디어린 원중 아이들이 센터에 적응하도록 돕기에는 가장 적합한 사람이었다. 그는 인공 레우논으로 인한 일반 센티넬보다 더욱 예민한 감각 및 그로 인한 더 높은 폭주 위험성을 항상 주시했다. 실제 전장에 나간 뒤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로 인한 폭주 위험을 낮추고자 노력했으며, 안정적인 가이딩 방법을 지시했다. 또한 원중 센티넬들과 감응하는 가이드가 있는지를 수시로 체크하며 데이터를 수집했다. 그것이 WPC를 떠나 관리 센터에 이주원이 있게 된 이유였다.
성준수 또한 원중 프로젝트의 피실험자였다. 불운하게도 그는 자의보다는 주변의 상황에 의해 WPC로 떠밀려왔다. 그러나 운 좋게도 그는 살아남았다. 성공한 피실험자가 되었다. WPC 안에서 성준수는 이름보다는 고유 번호로 불렸다. 그게 더 익숙했다. 매일 밤 제 이름을 까먹지 않도록 중얼거리는 것이 일정한 루틴이 되었다. C2281224-31번이 아니라 성준수. 나는 C2281224-31번이 아니라 성준수. 제 이름 석 자가 어색하게 느껴질 때도 더러 있었다.
그러니까 이곳은 일종의 제물대였다. 어린아이들이 피를 흘리고 머리가 쪼개지는 고통을 감내해 가며 지켜내는 국가.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 소수의 희생 위에 살아남는 다수. 너무 빨리 커버린 성준수는 센터 벽면에 붙은 포스터를 보고 피식 웃었다. 너와 나의 존중받는 세상, 함께 만들어요. 그리고 그 밑에 적힌 작은 글씨까지. 정부는 실험 강령을 준수합니다. 성준수는 그것이 웃기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준수하긴 개뿔. 준수는 내 이름이고. 정말로 모두의 인권을 존중받는 세상이었다면 성준수가 이곳까지 제 발로 걸어들어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애초에 전쟁조차 발발하지 않았을 것이고.
실험대가 침대만큼 익숙했다. 매일 보는 전등만큼 수술조명도 일상같 았다. 한 방은 대여섯 명이 같이 썼다. 개중에는 금식을 한 날이면 다음날의 수술대가 두려워 우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 와중에도 엄마아빠는 찾지 않았다. 찾지 못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다. 그들은 대부분 돌아갈 곳이 없는 아이들이었으니까. 기댈 대상이 없는 버려진 아이들은 스스로를 끌어안고 울었다. 서로에게 기대기에는 각자의 하루가 버거워서 그러질 못했다. 웅웅 울리는 머리통을 떼어버릴 수가 없어 침대에 머리를 박고, 예민해진 감각에 온 몸을 덜덜 떨었다. 다른 이들에겐 하루의 쉼이 될 방이라는 공간이 이들에게는 지옥의 입구와 다름없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이제 이런 일에 관심이 없었다. 민낯을 모르기에 분노하지 않았다.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WPC는 이제 하나의 종교이자 구원과도 같았으니까. 길고 긴 전쟁을 끝내줄 메시아의 존재와 다름없었으니까.
죽지 못하면 차라리 기절이라도 하는 편이 나았을 텐데 한껏 예민해진 감각은 그마저도 불가능하게 했다. 성준수는 피멍이 든 팔을 내려다보며 가끔 성지수를 생각했다. 이 세상에 남겨진 유일한 피붙이. 가끔은 부모님을 생각하기도 했다. 전장에서 먼저 떠나간 부모님을 원망하다가, 센티넬이었던 두 분의 운명을 원망하다가, 그들을 끌고 간 정부를 원망하다가, 결국에는 전쟁의 원인인 반란군을 원망했다. 성준수는 살아남고 싶었다. 살아남아서 승리를 거머쥐고 싶었다. 이 시대의 영웅이 되고 싶었다. 몇 개월째 별 탈 없이 무수한 실험을 견디고 있는 것을 보면 자신 또한 SS급 센티넬로 발현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품었다. 차라리 죽고 싶을 정도의 고통을 겪는 게 별 탈 없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었지만. 그래도 살아있으니까. 아직 몇 번의 실험을 더 견뎌낼 수 있으니까. 성준수는 당장에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같은 방을 쓰던 아이들과 잡담을 하기도 했는데, 그 빈도는 점점 줄어갔다. 의미 없는 행동이라는 걸 금세 학습했기 때문에 그랬다. 처음에는 C2281225-32 혹은 C2281231-35 따위의 번호였는데 날이 갈수록 다른 숫자와 낯선 얼굴들로 바뀌어 갔다. 원래 있던 녀석들은 어디로 갔는지 성준수가 알 턱이 없었다. 그저 실험이 실패했구나, 라고 짐작만 할 뿐이었다. 죽었는지, 혹은 살아서 센터를 벗어났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수없는 이별과 만남을 반복하며 무뎌져 갔다. 비단 성준수뿐만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더 이상 빈 자리를 아쉬워하지도, 새로운 얼굴을 반가워하지도 않았다. 그저 죽은 눈들의 무덤이었다.
"끅…끄흡…엄마아…."
겨우 잠을 자려다 누군가 흐느끼는 소리에 눈을 떴다. 최근에 옆자리를 채우게 된 아이였다. 이름은 몰랐다. C2290506-04. 그게 걔의 이름이었으니까. 성준수는 더 이상 누군가에게 정을 주려는 행위를 멈춘 지 오래였다. 그래봤자 필연적으로 이별은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반복되는 이별은 사람을 지치게 만들었다. 그런 성준수의 마음이 동했다. 어쩌면 오랜만에 듣는 엄마라는 단어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 단어를 듣고 나서야 부러 잊고 살았던 부모님 생각이 났다. 때로는 자각하고 나서야 생경하게 느껴지는 감각들이 있었다. 성준수는 자신 옆에 누운 아이가 어쩌면 저와 같은 상황일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괜히 안타까웠다. C2290506-04도 저와 같이 현실에 등 떠밀려 이곳으로 흘러들어왔을까. 제 몸 건사하기에도 급급했던 성준수가 오랜만에 관심의 범위를 확장했다. 그냥 순간의 충동이었다. 이름이 뭐야? 그렇게 먼저 물었던 것은.
전영중. 그 애가 답했다. 어느새 울음을 그치고 놀람을 가득 담은 눈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에서 제 이름에 관심을 갖는 자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같은 방을 쓰는 아이들도 현실에 지쳐 새로운 얼굴을 전혀 환영하지 않던 곳이었으니까. 그것을 알 턱이 없는 전영중은 처음 받는 호의가 괜히 고마웠다. 그래서 이름을 되물었다. 성준수라는 답변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 머릿속에 그 이름을 완전히 새겨버리기라도 할 듯이.
전영중은 언제 울었냐는 듯이 성준수에게 여러 가지를 속삭이며 물었다.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 무섭지는 않아? 여기 다 이상한 어른들밖에 없더라. 나 가족들이 보고 싶어. 너는 가족이 보고 싶지 않아? 성준수는 잠자코 그 말을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거나 짧게 대답했다. 이 특별한 것 없는 대화가 전영중과의 마지막 대화가 될까 봐 두려운 마음도 들었다. 밥 먹듯이 찾아오는 이별은 철이 들었다고 해도 어린 성준수에게는 버거운 것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최대한 진지하게 들으면서도 가볍게 답하려 애썼다. 그에게도, 자신에게도 상처가 되지 않을 방식으로. 몇 달간 WPC에서 습득한 것이라곤 바라던 이능력이 아닌 스스로를 지키는 어떠한 방어 기제였다. 그게 가끔은 못내 서글펐다.
며칠 뒤, 팔에 바늘 자국과 피멍을 주렁주렁 달고 온 전영중은 또 소리죽여 울었다. 계속되는 실험과 훈련 지쳐 기절하듯 잠이 든 다른 아이들을 깨울까 봐, 제 고통을 잇새로 짓이기며 울었다. 옆 침대에서 모로 누운 성준수는 그 소리에 잠이 들지 못했다. 온 신경이 등 뒤의 소년에게로 향했다.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던 아이들이야 숱하게 겪어왔지만, 제 숨을 조여가며 소리를 낮추는 처절한 울음은 외면하는 것이 어려웠다. 걸핏하면 서럽게 눈물을 뚝뚝 흘리던 제 여동생이 떠오르기도 했다.
에이씨. 결국 성준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머리가 깨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한데 여전히 생경한 감각에 작게 신음을 내질렀다. 그 소리를 들은 것인지 훌쩍이는 소리가 멎었다. 성준수는 이내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동그란 눈동자를 마주했다. 온 사방이 고요해서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기도 했다. 성준수는 최대한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마치 제가 여동생을 달래던 때와같이.
"야, 울지 마."
"준수야…."
"아파?"
"응. 너는 안 아파?"
"나도 가끔 아파."
"안 무서워?"
"글쎄. 어쩔 수 없잖아. 난 내 선택으로 여기 왔는걸."
"그렇구나…."
오래전, 눈물 많던 제 여동생을 달래려고 절절매던 때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성준수는 위로에 소질이 없었다. 아파서 우는 전영중에게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감이 오질 않았다. 고작 진통제 몇 알 더 얻어온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아서 그랬다. 더욱이 말 몇 마디로 아픈 걸 잊게 해줄 수도 없었고. 성준수는 막연히 저에게 가이딩 능력이 있었으면 참 좋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전영중이 센티넬이었을 때나 통하는 이야기였겠지만. 그러나 전영중은 센티넬이 아니고, 성준수도 가이드가 아니다. 결국 남는 것은 적막뿐이다.
그러다 성준수의 머릿속을 스치는 것이 있었다. 머릿속에 성지수의 목소리가 들리며 WPC에 들어오기 직전의 모습이 생각났다.
「오빠, 진짜 가야 돼? 안 가면 안 돼? 나 혼자 있긴 무섭단 말야….」
원중 프로젝트 대상자의 가족들이 지낼 수 있게 마련된 숙소 건물. 대부분이 전쟁고아라 건물을 쓰는 많지 않았지만, 성준수같은 케이스가 드문 건 아니었다. 남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자원하여 실험 대상자가 되는 아이들이. 그 앞에서 성지수가 성준수를 붙잡으며 울먹였다. 성준수는 성지수를 혼자 남겨두는 것이 맞는지 순간 의문이 들었다. 운 좋으면 센티넬이지만 나쁘면 개죽음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래도 보호자가 없어진 마당에 어린아이 둘이 살아남기란 녹록지 않았다. 그 현실이 너무도 선명해서 성준수는 최악보다는 차악을 선택해야 했다.
「어. 오빠 가야 돼.」
「…….」
「달래 줄 사람 없으니까 이제 많이 울지 말고.」
「…….」
「대답해야지.」
「…응.」
「다시 만날 건데 뭐. 잘 지내고 있어.」
「오빠, 그럼 이거 가져가.」
「뭔데?」
「거기서 심심할 수도 있잖아.」
「됐어.」
「받아 가면 안 돼, 오빠?」
「…….」
「…….」
「알았어. 이리 줘.」
그렇게 이곳에 들고 온 젠가. 구석에서 먼지가 잔뜩 쌓여가던 것. 잊고 살았던 것이 문득 떠올랐다.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면 잊게라도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툭 던지듯 물었다. 전혀 부담스럽지 않지만 진실성 있게. 게임할래? 그 말에 다 죽어가던 눈이 반짝였다.
"무슨 게임?"
"기대하지 마. 진짜 별거 아냐."
"뭔데?"
"젠가."
"우와! 어디서 났어?"
"여동생이 줬어. 한 번도 안 해봤지만."
두 소년은 침대에서 내려와 차가운 바닥에 털썩 앉아서 젠가를 쌓았다. 수 세기가 지나도록 명맥을 유지해 온 게임의 규칙은 정말 단순하기 짝이 없었다. 블록을 빼내고 위층에 쌓고. 전영중은 숨을 참으며 블록을 빼낼 정도로 집중했다. 조금 전까지 아파서 훌쩍이던 기억은 이미 날아가고 없는 듯했다. 늘 그들을 짓누르던 적막과는 다른 종류의 고요와 긴장감이 흘렀다.
와르르르. 성준수가 블록 하나를 빼내자 구멍이 숭숭 난 탑이 그대로 무너졌다. 제법 큰 소리에 둘은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살폈다. 끙끙 앓는 소리와 규칙적인 숨소리를 통해 아무도 깬 사람이 없음을 확인했다. 그제야 소리를 낮춰 키득키득 웃었다. 딱밤을 놓는 전영중의 손이 제법 매웠다. 둘은 다시 탑을 세웠다. 블록을 빼내고 쌓아 올렸다. 그 단순한 행위에도 전영중은 못내 즐거운 표정이었다. 웃는 모양새도 눈처럼 동글동글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성준수도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WPC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웃었다. 못 이기는 척 젠가를 받아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질리는 줄도 모르고 몇 번을 더 했다. 아무것도 없는 이곳에서 오랜만에 만나는 즐거움이라서 그랬다. 몇 번이고 작은 웃음소리가 새어나갔다. 모든 것이 죽어서 움직이는 곳에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웃음. 모두가 죽은 눈을 한 고립된 공간에서 유일하게 전영중과 성준수만이 살아있었다. 그들만이 감정을 잃지 않고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둘 사이에는 자연스럽게 작은 약속이 생겼다. 둘 다 침대에 있는 밤에는 함께 젠가 하기.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대화가 트였다. 어떻게 살았는지, 어쩌다 이곳으로 오게 되었는지. 오늘은 어떤 실험을 받았는지. 면역 거부 반응은 없는지. 얼마나 아픈지. 하지만 왜 견뎌야 하는지. 그런 시시콜콜한 것들을 블록 하나하나에 담았다. 먼지에 둘러싸인 그 사소한 것 하나가 둘에게는 큰 의미를 가졌다. 침대 밑에 숨겨둔 젠가 박스는 오늘을 견디게 해주는 버팀목이자 내일을 기다리게 하는 여명이었다.
전영중은 그 뒤로 오래 울지 않았다. 그 대신 성준수를 불렀다. 성준수도 굳은 얼굴로만 지내지 않았다. 전영중을 마주 보며 웃었다. 그것은 작지만 큰 변화였다. 부여된 번호 이상의 가치를 갖지 못하는 곳에서 서로의 존재를 자각하고 의미를 부여해 주는 것. 그것은 결코 사소하다고 말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느 순간 목적을 잃은 시련 속에서도 살고자 하는 의지를 찾도록 했다. 남들은 모르는 비밀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도 둘을 즐겁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 작은 사실 하나가 넘치도록 두근거렸다. 숱한 고통을 겪어온 이들이라 해도 아직 그들은 충분히 어렸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삶이 크게 달라지거나 나아지는 건 없었다. 늘 반복되는 실험과 반응 확인, 반복적인 데이터 수집. 그리고 성준수의 본격적인 레우논 이식 수술까지. 본 수술 이후에는 정말이지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동안 느꼈던 고통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비웃는 것 같기도 했다. 면역 거부 반응을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속이 메슥거렸고 눈을 감고 누워도 천장이 빙글빙글 돌았다. 센티넬들은 일반인보다 감각이 몇 배로 예민하다는 것은 얼핏 들어 알고 있었다. 그동안 진행된 실험들도 레우논 이식 후 날 선 감각들에 적응하기 위한 준비 단계였으니까. 그러나 실제로 겪는 것은 다른 층위의 문제였다. 성준수는 격리된 안정실에서 매일 밤 바닥이며 벽을 긁어대며 괴로워했다. 까드드득. 손톱이 짓물리고 부러지는 소리가 선명했다. 몰아치는 시각적 정보에 눈조차 뜰 수가 없었다. 제가 이곳에 왜 들어왔는지 이유조차 희미해질 정도로 고통이 선명했다. 그럼에도 목적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비명을 삼킬지언정 후회를 내뱉지 않으려 했다.
전영중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는 성준수의 빈자리를 걱정했다.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닌지 걱정이 앞섰다. 영영 잘못된 것은 아닐지. 이곳은 그런 이야기가 흔치 않게 일어나는 곳이었으니까. 혹은 어느 순간 사라지던 아이들처럼 성준수도 떠나버린 건 아닌지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저에게 짧은 작별 인사 하나 없이. 그럴 때면 침대 아래 숨겨진 젠가 박스를 들여다 보았다. 개인 물건 반입이 금지된 곳에서 성준수가 그것을 어떻게 들고 왔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너무나 하찮은 나무 블록 몇 개라 어른들이 신경 쓰지 않은 것일지도 몰랐다. 여전히 남겨진 박스와 정리되지 않는 빈 침대. 그것을 통해 성준수의 부재를 실감함과 동시에 돌아올 가능성을 믿었다. 전영중은 하루하루 날짜를 세었다. 성준수는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 다시 돌아와 저의 옆에서 긴긴밤을 보내줄 것이다. 전영중은 성준수를 믿었다.
성준수가 돌아온 건 그로부터 한참이 더 지나고 나서였다. 묘하게 더 살이 내린 얼굴과 한껏 예민해진 표정을 한 성준수. 전영중은 말을 걸어도 될지 잠시 고민했으나 그보다 반가움이 앞섰다. 괜찮냐며 묻는 목소리에서 걱정이 뚝뚝 묻어났다. 야, 나 괜찮아. 걱정하지 마. 그 말을 하는 목소리마저도 날이 잔뜩 서 있었다.
그 뒤로는 젠가 게임의 의미가 없어졌다. 하는 족족 성준수가 다 이겨 먹어서 그랬다. 전영중의 불만이 쌓여갔다. 너 갑자기 왜 이렇게 잘해. 볼멘소리에 성준수가 미동도 없이 대답했다. 나 레우논 이식받았어. 그 목소리에는 어떠한 흔들림도 없었다. 마치 오늘도 훈련이 힘들었다고 이야기하는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듯이.
"그래서 더 잘 느껴져. 어떻게 해야 안 무너질지."
안 아파? 불공평하다고 말할 줄 알았는데 전영중이 선뜻 뱉은 말은 걱정이었다. 어, 아프더라. 성준수는 그렇게 말하며 허탈하게 웃었다. 도망치고 싶었다는 자조적인 농담도 곁들었다. 단 한 순간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도 없으면서.
"영중아, 너도 나중에 나처럼 이식받게 되면 말야."
"응."
"여기 들어온 이유를 잊지 마."
하루는 늘 똑같이 반복됐다. 실험, 교육, 데이터 수집. 그리고 성준수에게는 이능력 발현을 위한 훈련과 자극 실험이 추가됐다. 이제 고작 열두 살이면서 성준수는 잘도 그런 것들을 버텨냈다. 성준수를 지켜보는 전영중도 불평 없이 비극적인 일상을 살아냈다.
성준수는 전영중에게 이곳에 들어온 이유를 잊지 말라 했으나 글쎄. 전영중은 그저 이곳에 존재하기에 버텨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막연하게 생각하기만 했다. 부모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센터에서 매일 듣는 교육대로, 나라를 위해 충성하는 강한 센티넬이 되고 싶다고. 소문으로만 듣던 센티넬들처럼 자신도 센티넬이 되어 꼭 정부를 위해 힘쓰고 싶다고. 관성대로 살아가던 전영중에게도 조금씩 선명한 목표가 생기기 시작했다.
단 한 번도 아프다는 증상에 대해 얘기한 적 없던 성준수가 손끝이 저릿저릿하다고 이야기한 것 또한 그즈음의 일이었다.
…치지지직.
보고합니다. C2281224-31, 이능력발현에 성공했습니다. 빙상(氷霜) 계열 센티넬로 추정됩니다.
다시 한번 보고합니다. C2281224-31, 이능력발현에 성공했습니다. 센티넬 관리 센터로의 이관을 요청합니다….
안녕하세요, FIGHT or FLIGHT라는 작품으로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파올플은 10화 정도의 장편입니다. 부디 긴 호흡으로 함께 달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전작인 상실과는 또 다른 느낌의 글이라 자부합니다. 여러분에게도 즐거운 글이 되길 바랍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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