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계인도 사랑을 할 수 있나요? 2
외계인 최종수 X 대학생 기상호 / 종수상호 / 종상
' 잠깐만. '
일주일이라고? 기상호가 다시 생각에 잠겼다. 설마 지구의 시간의 일주일이 아니라 우주의 일주일인가? 그전에 지구와 우주 간의 일주일이 어떻게 다르지?
" 햄, 그 일주일이라는 시간... 설마 우주에서 일주일이에요? "
" ... "
" 그러면 여기에서는 며칠이에요? "
한 달? 6개월? 1년?! 햄버거를 먹으려 입을 벌렸던 최종수의 입이 다시 다물어졌다. 저딴 멍청한 새끼가 다 있지? 최종수가 말하지는 않았지만 기상호를 그런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 같았다.
" 월, 화, 수, 목, 금, 토, 일. "
" ... "
" 지구에서 일주일. 됐냐? "
" ... "
" 병신도 아니고. "
햄... 결국 입으로 말했네. 기상호는 머쓱함에 목덜미 쓸어내렸다. 그러면 우주의 일주일은 어떨까? 지구보다 더 짧을까 아니면 길까. 그도 아니면 동일할까. 햄버거를 포장지를 구기고서는 콜라를 마시는 최종수에게 기상호가 쭈볏쭈볏거렸다.
" ...우주에서 일주일은 지구보다 길어요? "
" 아니. "
" 그럼 짧아요? "
" 아니. "
" 설마 똑같아요? "
" 아니. "
" 맨날 다 아니라고만 할 줄 알아요? "
" 아ㄴ... 뒤질래? "
쩝, 아니네. 기상호가 앞으로 숙인 상체를 일으키며 아쉬운 소리를 내었다. 최종수는 기상호라는 놈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골 때리는 놈이라는 걸 느끼고 있었다. 기상호를 만나기 전 봤던 프로필에서는 이렇게까지 멍청하고 골 때리는 놈으로는 안 보였는데.
" 우주에는 일주일이 없어. "
" 헐, 진짜요? "
" 그보다 시간이 더 빠르게 흘러서 없어. "
아쉬운 표정이었던 기상호가 최종수의 말에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얼마나요? 지구에서는 하루쯤인가? 기상호는 최종수가 대답을 하든 말든 자신의 궁금증을 쏟아냈다. 그게 그렇게 신기할 일인가. 최종수는 자신 앞에 있는 기상호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최종수에게 우주는 까만 덩어리일 뿐이자 재미없는 곳이었다. 흥미롭고 반짝이는 건 하나도 없는 곳인데 기상호는 흥미롭고 반짝이는 눈동자로 그곳에 대해 물었다.
탁- 기상호가 우주를 설명하다가 최종수가 마시고 있던 콜라 잔을 엎었다. 콜라는 최종수의 좋지 못한 곳에 흘렀고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기상호는 급하게 휴지를 들고 최종수의 바지를 닦았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누가 보고 오해를 해서 코나 안 막으면 다행이었다.
" 야. "
" 죄... 죄송합니다. "
기상호에게 오늘 하루가 참 쉽지 않았다.
* * *
" 햄, 정말 감사합니다. "
기상호는 박병찬에게 연신 고개를 숙이며 우는 소리를 내었다. 박병찬은 다행히도 이 근처였다면서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넘겼다. 지금 박병찬은 최종수가 앉은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자기 앞에 쌓여져 있는 햄버거 쓰레기들을 보며 박병찬이 기상호에게 물었다.
" 근데 누구야? "
" ...친구예요."
" 상호야, 너 친구 없잖아. "
박병찬이 정곡을 찔렀다. 저도 친구쯤은 있어요. 기상호가 박병찬의 눈을 슬금슬금 피했다. 상호야, 너 거짓말 진짜 못 한다. 박병찬의 정곡이 다시 한번 기상호의 가슴에 박혔다. 박병찬이 기상호의 인간관계를 다 알지는 않았지만 반대로 모르지도 않았다. 박병찬, 성준수. 학교 내에서 제일 친한 사람은 딱 이 두 사람뿐. 그 외에 동기들하고 과제 외에는 어울리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렇다고 기상호가 친한 사람이 없다고 단정 짓기에는 이른 판단이긴 했다. 하지만 기상호 입에서도 한 번도 '최종수'라는 이름을 들어 보지 못했다. 만약 정말 최종수가 친구라면 그렇게까지 숨겨야 할 이유가 있을까?
" 그래서 누구인데. "
" ...인터넷에서 만난 햄이요. "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상한 사이트에서 메시지를 보냈고 그걸 본 최종수가 기상호를 만나러 왔으니 반은 맞는 말인 셈이었다. 다만 나머지 반은 일반인의 상상을 뛰어넘는 영역이었다. 최종수가 외계인이니 이상한 사이트에서 메시지를 보냈다느니 그런 이야기를 차마 할 수 없었다. 그제야 박병찬은 기상호가 왜 최종수의 존재를 숨겼는지 이해가 갔다. 인터넷 친구라니. 갑자기 상호가 걱정스러워졌다. 어디 가서 삥을 뜯길 것 같지는 않지만 사기를 당할 것 같은 게 기상호였다.
" 인터넷 친구 이렇게 만나도 되는 거야? "
" 나쁜 사람으로는 안 보였는데요. "
아이고~ 상호야. 박병찬이 자신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세상 무서운지 모르고 인터넷에서 만난 사람을 덥석 현실에서 만나는 기상호를 어떻게 타이르나 머리를 싸매고 있을 때쯤, 박병찬이 가져온 여분의 옷으로 갈아입은 최종수가 막 나온 참이었다. 묘하게 짧은 바지나 조금 끼여 보이는 상체였지만 별 수 없었다. 기상호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 박병찬이 제일 큰 키와 큰 몸짓이었다. 최종수가 조금 불편한 기색을 보였지만 그마저도 얼마 가지 못했다.
" 상호야, 네가 188cm라고 하지 않았어? "
박병찬은 힐끔 최종수를 바라보며 작게 속삭였다. 기상호가 보기에도 188cm는 족히 넘어 190cm쯤은 되어 보였다. 하지만 최종수는 꿋꿋하게 188cm 라며 우겼다. 그렇게 우겨 되는데 기상호가 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박병찬은 여전히 최종수를 곁눈질로 흘겨 보았다. 최종수는 그런 박병찬의 눈길을 무시하고선 곧장 기상호한테 다가갔다.
" 가자. "
" 예? 어딜요? "
" 어디든. "
상호야~ 형한테 꼭 연락하고! 박병찬은 최종수한테 끌려가는 기상호에게 외쳤다. 기상호가 대답 대신 손을 흔들었다. 어휴. 박병찬은 자리에 앉아 남은 감자튀김을 집어먹었다. 자신을 향해 노려봤던 최종수가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그 표정 어디서 봤던 것 같았는데. 박병찬이 마지막 감자튀김을 들어 올리며 손가락을 튕겼다. 아, 얼마 전에 본 다큐에서 유치원생 표정이 딱 저랬다. 자기 거라고 두손에 꽉 잡고 있던 모습이 최종수와 겹쳐 보였다.
" 이거, 완전 애새끼구먼. "
* * *
" 햄... 햄...! 어디까지 가려고요....! "
기상호의 손목을 잡고 한참이나 잡아 이끌던 최종수가 우뚝 멈춰 섰다. 그건 생각해보지 못 했지만 이 정도 거리면 박병찬이 따라올 것 같지도 않았다. 최종수의 악력 때문에 자글자해진 소매를 괜스레 펴보는 기상호가 다시 물었다.
" 어디 가고 싶은 곳이라도 있어요? "
" 아니. "
" 근데 왜 급하게 나왔어요. 병찬햄한테 인사도 제대로 못 했는데. "
" 걔 이름이 병찬이야? "
" 네. 박병찬이요. "
" 걔 싫어. "
" 햄이 입고 있는 옷 다 병찬햄 옷인데요? "
" ... "
최종수는 기상호의 말에 자신의 옷을 되돌아봤다. 발목을 다 덮지 못하는 짤막한 소매나 밑단이나 가슴 부근이 끼는 이 후드티나 그 박병찬인지 뭔지 하는 새끼 거라는 거지? 최종수가 자신의 입은 옷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으니 기상호의 불안감이 커졌다. 저 햄, 또 뭔 생각인데 저러지. 아! 뭐 하세요! 기상호가 최종수의 돌발행동에 놀라 허겁지겁 후드티의 밑단을 잡아 댕겼다.
" 변태에요?! "
" 그 새끼 거면 안 입을래. "
" 벗어도 딴 데에서 벗어요. 여기 길거리 한복판인데! "
기상호가 최종수의 옷자락에 붙어 매달렸다. 최종수 힘은 어찌나 세던지 기상호 입에서 어후! 소리가 절로 나왔다. 지금 지구의 겨울을 우습게 보는 건가? 시베리아보다도 춥다는 대한민국 서울의 날씨를 지금 무시하는 건가? 안에 아무것도 안 입었으면서 최종수 진짜 미쳤나?! 기상호가 고목나무 매미마냥 매달리면서 최종수를 제지했다. 길거리 한복판에서 최종수가 복근쇼를 하느니 차라리 사람들의 오해를 사는 게 나았다. 최종수는 자신를 와락 끌어안으며 박병찬에게 보여줬던 가짜 눈물을 흘리는 기상호의 멱살을 잡았다.
" 그럼 네가 벗어. "
" 네? "
" 네가 입고 있는 셔츠 나한테 달라고. "
" ... "
" 안 벗어? "
최종수가 다시 한번 후드티의 밑단을 잡자 기상호가 최종수의 손위로 제 손을 겹쳤다. 벗... 벗을게요. 기상호는 울며 겨자 먹기로 위에 입고 있었던 체크남방을 벗었다. 근데 나한테 후드티는 어떻게 주려고 저러는 거지? 기상호가 오들오들 떨며 체크남방을 건네니 최종수가 그 위로 자신의 팔을 욱여넣었다. 저러면 찢어질 텐데. 아니 그전에 내 옷은...? 최종수가 어거지로 기상호의 체크남방에 팔을 다 욱여 넣고서는 가자는 제스처를 취했다.
" 제 옷은요? "
" 뭔 옷? "
" 후드티라도 주시면 안 될까요? "
" 길거리 한복판에서 후드티를 벗으라고? "
" ... "
" 너, 변태야? "
최종수의 말에 기상호는 입을 다물었다. 정확히는 최종수의 눈빛 때문이었지만 어찌 되었든 틀린 말은 아니었다. 기상호는 제 팔을 손으로 비벼가며 최종수 옆에 바짝 붙었다. 이래야 매서운 바람이라도 덜 맞아 덜 추울 것 같았다. 쳇, 아까는 자기가 변태처럼 굴었으면서 나보고 변태라니. 자신보다 작은 상대의 옷을 빼앗아 입는 행위는 제네바 협약에 의해 전쟁범쟁으로 규정되어 있어서 전국의 옷 나눠 입기 협회에서 알면 가만히...기상호는 구시렁구시렁 거리는 소리가 최종수의 귀에 안 닿았을 리가 없었다. 멀리서 구시렁 거리는 것도 아니고 옆에 붙어서 쫑알대는 기상호를 쳐다보니 기상호의 입이 조용해졌다. 그러나 다시 걷기 시작하면 구시렁거렸고 최종수의 발걸음이 멈추면 기상호의 입도 덩달아 다물어졌다. 야. 최종수의 한마디에 기상호가 움찔거렸다. 쟨 한마디에 저렇게 쫄 거면서 왜 저러는지. 아마 최종수는 평생 이해하지 못 할 거다. 최종수가 기상호의 팔을 끌어당겨 자기를 끌어안게 했다. 이거... 자세가 너무 남사스러운데.
" 이러면 됐지. "
" 뭐가요? "
" 너 춥다고 구시렁거린 거잖아."
" ... "
" 싫으면 빼던지. "
최종수가 기상호의 팔을 풀어버리려고 하니 기상호가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아아아뇨! 좋아요. 기상호는 빠르게 도리질을 했다. 모양새가 어째 닭살 커플 같았지만 추위 앞에서는 장사 없다. 기상호가 끌어안느라 텅 비어버린 맨 팔을 최종수가 살살 쓰다듬었다. 닭살이 오소소 돋았지만 추위 때문인지 최종수의 행동 때문인지 중요하지 않았다. 따뜻했으니 그만이었다. 이제 해도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최종수가 손으로 기상호의 팔에 열을 올려주는 것만으로는 감당되지 않을 추위가 찾아온다는 뜻이기도 했다. 문뜩 기상호는 최종수의 거처가 궁금해졌다. 잘 곳은 정해두고 왔나. 설마 길바닥에서 잔다는 소리는 하지 않겠지.
" 근데 잘 곳은 있어요? "
" 아니. "
" 어디서 지내려구요? "
" 너희 집. "
기상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야, 뭐, 눈을 왜 가늘게 떠. 최종수가 무어라 반박하니 기상호가 또다시 입을 삐죽 내밀었다.
이 햄, 뻔뻔하시네.
* * *
" 햄 어디서... "
기상호가 최종수에게 묻기도 전에 최종수는 이미 침대 위에 풀썩 누웠다. 이 집에 자취하는 사람으로서 아량 넘게 선택권을 주려고 했건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기상호는 이불 하나와 베개를 들고 바닥에 누웠다. 다행히도 내일은 공강이었다. 공강 하나 만들어보겠다고 똥꼬쇼를 했던 보람이 있었다. 다만 그게 외계인 지구 여행기에 쓰일 줄을 몰랐다. 내일은 어딜 가야 하나. 젊음의 거리 홍대? 역사가 살아있는 광화문? 치맥 하기 좋은 한강...은 추우니깐 패스. 기상호가 최종수를 데리고 어딜 가면 좋을지 한참을 생각하다 침대 밑으로 삐죽 튀어나온 최종수의 발과 눈이 마주쳤다. 꼼지락거리는 걸 보아하니 아직 잠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 지구에서 가고 싶었던 곳 있어요? "
" 딱히. "
" 그러면 하고 싶었던 건요? "
" 몰라. "
" 보고 싶었던 건요? "
" ... "
기상호가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내었다. 가고 싶었던 곳도 하고 싶었던 것도 보고 싶은 것도 없다는 외계인한테 어디를 데려가야 할지 막막했다.
" 하고 싶은 거 있어. "
" 뭔데요? "
기상호는 누워있던 상체를 반쯤 일으켜 세웠다. 듣던 중 제일 반가운 소리였다. 뭐일까. 김치 먹어보기? 틱톡 찍어보기? 그것도 아니면 설마 ...범죄는 아니겠지?
" 데이트. "
최종수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기상호도 생전 살면서 해본 적이 없었던 거였다. 그것도 남자랑 단둘이라면 평생을 해보지 않을 항목에 들어갈 선택지였다.
" 정말로 데이트가 하고 싶어요? "
" 어. "
" 다른 건요? "
" 없어. "
" 설마 일주일 내내 데이트만 할 생각이에요? "
" 어. "
데이트하면 어딜 가야 하지. 남산을 가서 사랑의 자물쇠라도 걸어야 하나. 기상호가 인터넷에 '데이트 장소'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톡톡톡. 방안에서는 기상호의 타자 소리만 울렸다. 아기자기한 카페, 아쿠아리움, 놀이동산. 에라이. 기상호는 몇 번 스크롤을 내리다가 화면을 꺼버렸다. 자신의 인생 첫 데이트를 이렇게 소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도 190cm가 넘고 몸도 우람한 시꺼먼한 남정네와는 더욱 하고 싶지 않았다. 기상호는 복잡해진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내일의 내가 생각해 줄 거다. 자신을 굳게 믿고 눈을 감았다.
" 햄, 잘자요. "
최종수가 대답 대신 이불을 바스락거렸다. 기상호가 다시 눈을 슬며시 떠 침대를 바라보았다. 종수햄은 정말로 나랑 데이트가 하고 싶은가? 외계인에게 데이트는 별 의미 없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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