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의 요람

여름밤, 녹음, 그리고 끝

쫑규, 23.12.31 천하제일 열애지회 교류회 참가자 <동경의 요람> 웹발행 공개 3

ㅍ-ㅍ x ^-^ by 인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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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상 베트남의 우기는 완벽하게 지났지만, 그 말이 비가 완전히 오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바다와 인접한 곳이 다 그렇듯 이곳의 날씨 역시 변화무쌍했다. 시시때때로 여우비가 내리는가 하면 비가 오지 않는 날에는 희뿌연 안개가 자세를 낮추고 온통 축축한 녹림을 유영했다. 녹림. 그것은 나흘 내내 그들을 미치도록 만들었다. 사이공 최남단에 위치한 무인도는 인도차이나 전쟁 이전까지 그럭저럭 잘 나가는 어촌 마을이었다는 과거가 무색하게 현재는 정글과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항만에 발을 디뎠을 때부터 생기라고는 볼 수 없는 마을의 전경에 혀를 내둘렀다. 여긴 없던 귀신도 생기겠다. 딱 그런 감상이 들었다. 거의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인간의 손을 타지 않은 건물에는 이름 모를 덩굴 식물들이 자라났고, 곳곳에 있는 플라스틱 기구며 철골 등 과거 누군가 살았던 흔적들은 거의 바스러지고 있었다. 전쟁이 시작하고 나서부터는 학살의 역사가 깃든 땅이다. 따뜻하고 습한 환경에서 기승을 부리며 거대하게 몸집을 불린 나무와 모든 풀. 그것들의 스산하고 암울한 기운이 습한 공기를 타고 반파된 철골을 누볐다. 눈을 아무리 돌려도 따가운 정글, 간지러운 정글, 바람이 불면 서로 비비적거리며 속삭이는 소리를 내는 정글……. 세상이 온통 초록으로 가득 찬 가시광선의 연속이다. 사람이 미치기 딱 좋은 공간. 그러나 종수를 미치게 만드는 건 미지의 장소가 주는 비가시적인 미래시보다 같은 팀원이자 오래된 전우이며 애인의 알 수 없는 적대였다. 느껴질 때마다 그는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증오나 불쾌함의 감정보다는 조금 더 심오한…. 그러니까 이규는 자신을 의심하고 있으며, 종수의 존재가 꼭 그 불신에 상당수 기여하는 사람처럼 굴었다. 다가가려고 하면 자리를 피한다. 은근슬쩍 손을 잡으려고 하면 팔을 비틀었다. 알 수 없는 반항과 오기가 이어진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런 중 현지인마저 꺼리는 미지의 구역에서 여러모로 좋지 않은 국면을 맞닥뜨렸다. 그날은 사흘 전 길을 잃거나 같은 곳을 수색하는 허사를 방지하기 위해 나뭇가지를 꺾고 덩굴을 묶어 구역을 나눴던 일이 모두 쓸모가 없었다는 것을 막 깨달은 날이었다.

“……보. 걸음 끝. 남서쪽 0.23km² 부근 항구 밖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이상.” 탐색을 위해 박 일병을 대동하고 나간 이규가 자신의 위치와 함께 절망적인 소식을 전했다. 아무리 오래 걷거나 방향을 틀어도 임시 주둔지로 삼은 폐건물 반경으로부터 약 0.23km²를 벗어나지 못한다. 며칠 내내 그들이 한 고생을 요약하면 이런 것이라는 말이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말문이 막힌 군인들 사이 공백을 빼곡히 채웠다.

시원하게 내리는 빗소리와 함께 간간이 지직거리며 연결되는 듯했던 선발 수색대의 신호도 끊긴 지 오래다. 본부와의 연락 역시 마찬가지였다. 실종된 선발 대원의 흔적을 찾고 어딘가에 살아있을지도 모르는 그들을 구출한다. 모두 그런 생각으로 배에서 내렸을 것이다. 그러나 길은 물론이고 이곳에 파견된 동기마저 잃은 지금 다섯 명이나 되는 수색대원들은 그야말로 고립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까? 본국이 앞으로 나흘 뒤 접선 예정일에 나타나지 않는 그들을 위해 제3차 수색대를 꾸려줄까? 군은 이번을 마지막으로 귀중한 인력을 낭비하지 않는 쪽을 선택하고 말까? 의심이 점점 짙어지는 그들로서는 그 무엇도 확신할 수 없었다.

불확실함! 그 누구도 군인이 된 이래로 그것을 용인한 경험과 기억이 없었다. 안 되면 될 때까지, 안 하면 할 때까지, 악에서 악으로. 이런 방식으로 살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장기전으로 돌입될 가능성이 있는 작금의 사태에 대해 우선은 지켜보기로 했다. 정글과 비. 두 가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길한 징조였다. 무엇이든 하나라도 없는 게 좋았다. 그러나 낯선 장소에서 느끼는 막막함과 초조함은 불안감을 증폭시키기 마련이고, 안개가 땅에서 버짐처럼 피어오르듯이 일렁거리는 불안함이 그들 사이에 미세하게 난 균열을 비집었다. 그때였다. 그들이 주둔지에 도착할 때부터 있었던 라디오에서 잡음이 들리기 시작하더니, 갑작스럽게 누군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긴 청설모, 청솔모 04부대. 들리는가? 허 중위가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계단 난간에 기대 가닥가닥 초조하게 뜯어내던 강아지풀의 잎혀를 손에 쥔 채로 멈췄다. 그와 함께 모든 부대원들이 몸을 굳혔다. 그 라디오는 연식이 최소 40년은 더 되었으며 이곳은 무인도이기 때문에 라디오에게 전원을 공급할 사람도, 공급할 일도 없는 것이 정상이었다. 허 중위가 손가락을 굽혀 자신의 귀를 후볐지만, 소리는 계속해서 들렸다. 구조를 요청한다. 여기는 청설모. 여기는 청솔모. 기습, 기습이다! 인원은…… 아! 씨발 저리가 오지 마, 오지 말라고. 김 일병 뭐헤 쏴! 죽여버려! 누군가의 긴급한 목소리는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전파 속에서 다급하게 구조를 요청하던 음성의 주인이 곧이어 둔탁한 무언가에 맞고 비명을 지르더니 침묵하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긴 적막이 이어졌다. 이곳에 도착한 이래로 바람 잘 날이 없다. 중위는 생각했다. 대체 내가 왜 이런 작전에 참여하게 되었는지…… 애초에 그의 경력과 지위로는 굳이 해당 임무에 나서지 않아도 되었다. 그는 군인으로의 긍지나 동료에 대한 애정이 아니라 ‘최종수’ 때문에 이곳에 자진해서 왔다. 굳이 자원을 한 건 그곳에 최종수가 있어서. 그뿐이었다. 늘 항상 그랬듯이 대대에서 잘 나가는 대령 아들이 친 사고의 뒤치다꺼리를 하기 위해서. 그 아들은 고마움도 모르고 잘난 척이었지만. 그는 이번 작전이 쉬울 것으로 오판한 것을 후회했다. 상식적으로 겨우 가파도 면적 정도 되는 무인도에서 대한민국 특수군인을 위협할 수 있는 게 있겠는가. 길을 잃는 것조차 상상한 적 없다. 며칠 휘휘 돌며 수색이나 하다가 제1 선발 대원의 인식표든, 사람이든 발견한 다음 이규에게 모든 걸 인계한 뒤 남은 기간은 관광에 쓸 계획으로 잔뜩 부풀어 있었다. 잘못이 생기면 그에게 뒤집어씌울 요량이었다. 베트남 하면 열대과일이랑 마사지 아니겠나. 하하, 왜 그렇게 다들 죽상이야. 관광 온 셈 치자고. 출국 전 비행장으로 가는 군용차에서 으쓱대며 말했던 것도 같다. 왕년에 아프간이나 소말리아를 종횡했는데, 그깟 베트남 따위.

허 중위는 녹슨 들창에 떨어지는 빗물이 이리저리 튀어 바짓단을 적시는 것처럼 하나같이 전부 죄다 거슬렸다. 그는 점점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더니 대뜸 허리춤에서 권총을 꺼내 라디오를 갈겼다. 미친, 미친 거야. 미친 거라고. 이딴 게 들리다니. 그는 완전히 겁에 질려 소리를 질러댔다. 허 중위의 발광으로 인해 대다수가 이규의 귀환을 눈치채지 못했다.

씩씩거리던 허 중위가 골짜기에서 빙글빙글 맴도는 소리처럼 응어리진 말을 겨우 우물거렸다. 턱이 불만으로 가득 차 주름이 자글자글 생겼다. “난! 난 씨발 이곳을 떠나야 하겠어. 당장.” 그가 누구에게 무슨 뜻으로 말하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부대에서부터 허 중위를 곧잘 따라다녔던 김 하사와 오 병장 둘만이 응답하듯 고개를 들어 서로 눈을 마주쳤다.

“하지만…. 아직 비가.”

“……저걸 듣고도 여기 남겠다고? 미친 거야? 당신,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이곳에서 허 중위보다 직급이 낮은 사람은 없었으나, 그거 종종 존대를 사용하며 비위를 맞추던 사람은 있었다. “최종수 중사.” 그 이유는 허 중위가 원체 점잖은 인간이라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후광을 업고서도 수석으로 졸업한 사관학교 엘리트라는 출신에 있었다.

“…이미 결정된 사안입니다.” 종수는 처음부터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에 관한 판단이 모두 이루어지지 않은 지금 계속해서 탐색을 나서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의견을 냈다. 우선 발을 묶을 만큼 줄기차게 내리는 비가 그칠 때까지만이라도 일시적으로 체류를 제안했고, 이후 외부와 재차 교신을 시도하거나 0.23km²의 끝인 항만을 통해 탈출을 감행하자고 합의를 본 것이 겨우 몇 시간 전이다. 허 중위 역시 처음에는 고개를 끄덕였으면서, 잔뜩 겁에 질린 채 볼썽사납게 구는 것이었다. 어떤 팀을 이끄는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모습에 종수가 이를 악물었다. 이규와 자신을 제외한 인원들이 눈에 띄게 동요하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아무리 최종수라고 해도 작전의 지휘권은 어디까지나 허 중위에게 있으니, 치밀어오르는 분노와 짜증을 참을 필요가 있다.

“아니, 아니. 최 중사. 봐. 이번이 2차 수색이야. 이번에도 허탕인데, 여기서 버텨봤자 뭐가 되겠나. 뭘 기다리는 거야.” 허 중위가 다리를 달달 흔들다가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넓어봤자 0.9km² 정도 되는 땅덩어리야. 길 몇 번 잃은 걸로 바짝 쫄아서 죽치고 앉아있을 건가. 정말?” 그가 잔뜩 흥분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새파랗게 어린 애의 혓바닥에 의해서 상황이 돌아가는 꼴을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머리까지 쥐어뜯으면서. 원래부터 이 중사와 최 중사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허 중위였으나, 평소보다 더 격렬한 감정변화에 도리어 김 하사와 오 병장이 당황한 눈치였다. 허 중위는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 사람 같았다. “갈 수 있을 때 가자고. 내가 왜 여기까지 왔는데. 우리 타고 온 보트. 어 그거 타고 나가면 금방 본토잖아.”

중위의 입술이 파리하게 질린 채 스프링의 탄력을 받고 파르르 진동하는 저울접시처럼 움직였다.

“저는 아직 못 갑니다.” 순식간에 대꾸한 종수가 자신의 단호함에 놀란 듯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아직은 말입니다.”

“그렇다면 인식표라도 내놓게.”

“하!” 종수가 벽에 삐딱하게 기댄 채로 날카로운 헛웃음을 지었다. 그는 분명 혼자서 이곳을 빠져나간 이후의 상황을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허 중위와 같은 사람을 종수는 숱하게 봐왔다. 그는 오직 자신의 탈출과 앞으로의 변명을 위해 내밀 수 있는 어떤 ‘증표’를 원하고 있었다. 이건 뭐 지휘권을 땅에 처박겠다는 거지. 종수가 뇌까렸다.

“미쳤군,” 허 중위는 자신을 혐오스럽게 보는 몇 쌍의 눈길을 무시하고 아예 손까지 내밀어 흔들었다. 종수가 허 중위를 노려보다가 거칠게 자신의 목에서 인식표를 뜯어 바닥으로 던졌다. 어디 한 번 해보라는 속셈이었다. 허 중위가 그것을 주섬주섬 주워들고 자신의 군장 깊숙한 곳에 쑤셔 넣었다.

한바탕 다투고 난 직후라서 그런지 종수를 비롯한 무리 몇 명과 허 중위는 이후로는 일절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저녁 식사도 따로 취침도 따로 진행되었다. 허 중위는 진실로 분열을 원하는 모양인지 간이침대를 이리저리 옮기더니 김 하사와 오 병장 옆에 바짝 붙었다.

출입문이 비어 휑뎅그렁한 실내에 들이닥치는 빗물이 줄어들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유독 컸다. 으슬으슬한 어둠이 자욱하게 앉아 앞뒤가 제대로 분간되지 않았다. 종수가 몸을 일으켜 신경을 집중하려고 했다. 이런 때에도 움직일 수 있도록 훈련된 몸이 소음에 빠르게 반응한다. 자신의 가슴팍을 지긋하게 누르는 손길만 없으면 아마 가능했을 것이다. 여전히 누군가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하나 아니면 둘에서 셋. 그리고 자신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넷. 종수가 입을 뻐끔거리기 전에 누군가가 검지를 입술에 얹어 약하게 올렸다. 종수보다 약간 차가운 체온이 입술을 문지르고 볼을 감쌌다. 그는 종수의 굵은 목덜미와 옆으로 툭 튀어나온 연골을 주물렀다. 인식표를 뜯어내면서 볼체인이 강하게 마찰한 곳이었다. “아팠겠다.” 이규의 목소리였다. 종수가 들숨을 빠르게 마시고 몸을 긴장시켰다. 규가 가만히 종수의 목덜미를 애달프게 쓰다듬기만 했다. “안 아팠어?” 이규가 재차 묻는다. 어둠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는 눈이 이규를 훑었다. 이규가 긴 속눈썹을 내리깔고 조심스러운 눈으로 종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답하는 대신 팔을 쭉 뻗었으나 금세 제지당했다. 이규가 손가락 사이에 깍지를 끼고 종수의 손을 가슴팍에 얹었다.

“저것들….”

“……그냥 둬. 본인들 손해야. 멀리 가겠어?”

“보트를 가져가면….”

“본대에서 헬기 타고 왔잖아. 보트는 무슨 보트. 그 낡은 거 하나?” 이규가 의아하다는 듯이 답한다. “그랬나?” 종수가 한 박자 늦게 대꾸하자 이규가 종수의 눈에 손바닥을 얹었다.

조곤조곤 말을 잇는 그의 목소리가 마치 주술처럼 들렸다.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빠져드는 것이다. 너는 배 타고 왔어? 이규가 속삭인다. 속눈썹을 가닥가닥 어루만지는 이규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종수는 확인할 수 없었다. 그저 나직한 목소리가 약간은 경쾌하고 조금은 음울한 기색을 띠고 있다는 점이 종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나는 그랬던 것 같은데. 종수가 고개를 흔들며 대꾸한다. 이규가 작게 탄성을 터트린다.

“아까는 왜 못 간다고 한 거야?”

“그냥, 그렇게 말해야 할 것 같았어. 그나저나 규.”

“음?”

“화 다 풀렸어?”

“내가 화난 것 같았어?”

종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규의 갑작스러운 심경 변화가 이상했지만, 경계해야 한다는 감상이 들기보다는 도리어 이 상황이 반가웠다. 얼마 만에 말을 붙이는 건지…. 시종일관 입을 다물고 웃지 않는 규는 화가 난 사람처럼 보였다. 무언가를 의심하고 절대적인 믿음의 범위에 일부러 자신을 철저하게 배제하는 규.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낯선 모습에 나흘 내내 물에 발린 종이처럼 마음이 일어났던 자리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화 안 났어. 그냥…. 그냥. 혼란스러워서. 이규의 음성이 멀어졌다가 다시 가까워진다. 조심스럽게 자리를 옮기는 소리가 들렸다. 묵직한 발소리가 몇 번 울리다가 꿈질거리면서 신발을 벗었다. 곧바로 야전 침대가 끼긱 소리를 내며 내려앉았다. 갑갑할 정도로 옆구리가 꽉 차는 건 덤이었다.

“이러고 자게?”

“걱정한 거 아니야?”

규의 단단한 팔뚝이 허리를 감았다. 종수가 웅얼거리면서 익숙하게 몸을 옆으로 돌려 팔을 내밀어 까슬까슬한 머리통에 자신을 반쯤 내어줬다. 맞아…. 맞닿은 가슴에서 심장 고동 소리가 느껴진다. 틈이 없도록 바투 붙고 목덜미에 가볍게 입술을 눌렀다. 규의 목울대가 꿀렁거렸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침을 삼키는 모양새다. 가벼운 떨림을 즐기며 종수가 그의 이마와 콧잔등에 이어서 입술에 입을 맞췄다. 작정하고 옆에 누운 건지 규는 종수를 제지하지 않았다. 느리게 이완하는 몸을 느끼며 종수가 턱과 귓가에 마저 얼굴을 묻었다. 서로의 체중에 진득하게 압박감을 느끼며 규는 완전히 누웠고 종수는 규의 위에 몸 반쪽을 얹다시피 엎드렸다. 귓가가 축축하다. 이규는 몸을 굳히고 발을 굽혀 종수의 종아리를 긁었다. 이제 누가 나가든 상관이 없었다. 온종일 이러고 있을 수도 있다. 아니 규만 문제가 없다면 이러고 싶다. 강렬한 욕망이 훅 올라왔다가 천천히 가라앉는다. 못할 것도 없지 않나…… 종수가 허벅지 사이에 다리를 퍼즐처럼 끼우는 규를 느끼며 가물거리는 눈을 감았다. 종수가 옷감 아래 이규의 어깨에 있는 총상 흉터 위를 손가락으로 헤집듯 문질렀다. 규가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규와 종수가 바르작거리는 동안 대강 짐작했던 모습이 허 중위와 김 하사 그리고 오 병장의 마지막이었다. 그들은 날이 밝기 전 완전히 떠난 모양이었다. 물에 젖은 신발 자국도 남지 않은 것을 봐서는 종수과 규가 서로 흘레붙었을 때, 밤새 빗줄기가 약해지자마자 바로 군장을 챙긴 것 같았다. 종수는 눈을 뜨자마자 거짓말처럼 빈 옆자리에 황당함을 한 번 느꼈고, 예상을 빗나가지 않는 진부함에 두 번 짜증이 났고, 눈에 띄게 줄어든 자원에 세 번 싫증이 났다. 끝까지 엿 먹으라는 심보가 보였다. 박 일병은 종수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벽을 발로 차는 소리에 깼다. 햇살이 어스름하게 내려앉은 시각이었다. 물자를 관리하기 위해 쌓아뒀던 더미가 눈에 띄게 낮아졌다.

팀이 결성될 때부터 기름과 물 같은 관계였으니 인원이 셋이나 줄어든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기껏 잘 분류해서 쌓아둔 군용 식품 두 묶음이 사라진 건 여러모로 불쾌한지 종수가 화를 참지 못하고 씨근덕거리다가 폐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박 일병은 불똥이 튀기지 않는 것에 감사했다.

“박 일병 잘 잤어? 상황은 설명 안 해줘도 알겠다. 그치?” 이규가 바깥 기운을 몰고 성큼성큼 들어왔다. 박 일병은 몸을 일으켜 허옇게 떠서 초조한 기운을 보이는 이 중사에게 경례했다.

“옙.”

“편하게 있어, 편하게. 박 일병 사관학교 출신아니야? 사제랑 사형 간에…… 우리 말고 또 누가 있다고.”

이규가 무릎을 굽혀 철제바스켓이나 넓적한 돌, 철망, 첫날 간이로 만들었던 버너를 달그락거렸다.

“네에…… 중사님,”

박 일병이 자리에 앉았다가 무릎걸음으로 종종 바닥을 기어 규 옆으로 바짝 붙었다. 어쩐지 심상치 않은 기류였다. “중사님, 밖은 어떻습니까?” 이규는 무슨 생각인지 곧바로 대답하는 대신 끈적끈적한 땀이 흐르는 턱을 훔치고 천장을 한 번 올려다봤다. 입술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규가 한숨 대신 코로 길게 숨을 내쉬었다.

“모르겠다.” 입김만 나오지 않을 뿐이지, 비가 오는 정글은 쌀쌀했다. 밥이나 먹자. 규가 객쩍은 추임새와 함께 몸을 쭉 폈다. 괜찮을 거야. 그 말을 들은 우진은 잠시 어깨를 움츠려 양팔을 교차해 팔뚝을 쓸었다.

그 사이 종수가 옷에 비와 담배 냄새를 묻히고 들어왔다. 종수가 잠시 이규를 응시하다가 이규가 아는 척하지 않자 미간을 살짝 구겼다. 우리 어제 괜찮아진 것 아니었나. 눈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지만 이규의 낯빛이 근 며칠과는 또 다른 양상을 띠고 있어 함부로 말을 걸지 못하는 눈치였다. 종수는 그대로 자신의 몫으로 주어진 간이침대로 가서 몸을 눕힌다. 이규가 이제 간이 버너 앞에 쪼그려서 손을 쥐었다가 폈다. 그건 버너라기보다는 젖은 나뭇가지와 넓적한 돌멩이로 그럴듯하게 뼈대를 만든 다음 밑에 종이나 덜 젖은 나뭇잎을 넣은 것에 불과했다. 규는 불룩한 윗옷을 들쳐 마른 불쏘시개들을 바닥으로 쏟은 다음 부싯돌을 꺼내 탁탁 긁었다. 스파크가 튀자마자 바로 신중을 기울여 바람을 부는 솜씨가 능숙했다. 금세 가느다란 연기가 피어 올라왔다. 철망 위에 철제바스켓을 얹고 수통에 있던 물을 모두 쏟아부었다. 건물 구석에 있던 것을 주워 며칠 내내 쓰던 건데 생각보다 꽤 구실을 했다. 이규가 우진을 불렀다.

“박 일병 밥 한 봉지만 가져와.”

우진은 자세를 낮추고 소리 없이 마구잡이로 늘어진 물품 사이로 기어서 갔다. 바로 옆에 있는 종수의 미간에 빗금이 갈수록 박 일병은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저거, 성질머리 정말 대령 아들이라서 다행이다. 나 같은 보통 말단이었으면 진작 영창 갔다. 그가 쌓아둔 물자 중 가장 위에 있는 것을 품에 쏙 넣으며 혀를 내둘렀다. 이규가 굳이 들쑤실 필요 없이 우진의 표정을 보고선 다 이해한다는 낯으로 비죽 웃었다. ‘자는 것 같은데.’ 규가 입 모양으로 속삭였다. 우진은 그것이 못내 얄미워 군용 비빔밥 봉지로 이규를 툭툭 쳤다. 오. 규가 봉투를 받아들고 차근히 살피다가 입술을 동그랗게 말았다.

“이거밖에 없어?”

“잡히는 게 이거라서….” 우진이 말끝을 흐렸다. 군장 옆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입을 꾹 다문 종수를 살피는 눈치였다. 앓는 듯 끙 소리가 동시에 났다. 허기졌지만 달갑지는 않았다. 우진은 봉지를 완전히 뜯어 내용물을 가볍게 흔드는 규에게 물었다. “……뎁히지 않으십니까?”

“…끓여야지. 그래야 많아지거든.”

진공 포장된 양념장 특유의 케케묵은 냄새가 코를 찔렀다. 동결 건조된 밥알과 채소가 팔팔 끓는 물을 만나 금세 몸집을 불렸다. 수분을 머금을 대로 머금어 불어 터진 짬밥을 수저로 밥알을 잘 골라서 후후 불어 이로 쪼갰다. 혀와 입천장 사이에 닿자마자 부스러져서 몇 번 씹을 필요가 없었다.

“다 됐다. 먹어볼래?”

“예, 예에….”

비빔밥은 원래도 보급품 중 맛없기로 다섯 손가락에 꼽는 메뉴 중 하나였다. 인공적인 감미료에 어딘가 꺼끌꺼끌하게 남는 채소 부스러기부터 해서 혀뿌리에 퀴퀴한 향까지 감돌았다. 죽처럼 조리해서 먹으니 그냥 먹을 때보다 더 별로였다. “나가면 말입니다. 저건 쳐다도 안 볼 겁니다.” 이규가 낮게 웃었다. 우진은 입을 밑으로 늘어트리면서 과하게 울상을 지었다. 진심이 어느 정도 담겨있기도 했지만, 그 나름의 애교였다. 어떻게든 정체되고 딱딱한 분위기를 풀고야 말겠다는. 그는 어느 조직에 가나 막내로 오래 생활한 덕분에 이런 잔머리가 굵었다. 이규가 실없이 우진의 옆통수를 손바닥으로 마구 헤집었다.

“그러고 보니까 중사님.”

“음?”

“비도 오고, 밖은 어두컴컴하니 드는 생각인데 말입니다. 혹시 괴담 좋아하십니까?”

이규가 진심이냐는 표정으로 눈썹을 들썩였다. 우진은 이규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뀐 것을 알지도 못한 채 입을 놀렸다. “이런 폐가에는 꼭 귀신 한 명이 붙어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귀신은 본인 얘기하는 걸 좋아한다는데.”

“아하.”

규가 성의 없이 대꾸하고 콩나물 머리를 씹었다. 정신이 완전 다른 곳에 있는 사람 같았다. 우진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자세를 낮췄다. 그거 말고도요. 세 번 이름을 불리면 귀신한테 끌려간다는 얘기도 있고요. 실제로 교대 때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있어 저희 때는 야간 순찰을 돌 때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군번으로 호명하고는 하지 말입니다. 아하. 우리 때도 그랬어. 여전하네. 이규는 대강 대답하면서 숟가락으로 밥알을 쑤셨다. 식사는 오래 가지 못했다. 규가 수저에 묻은 밥풀을 탕탕 내리쳐서 떨구고 숟가락을 죽 덩어리에 꽂았다.

“다 먹었어?”

“예? 아직……”

“우진이 너는 더 먹고 있어. 나는 아무래도…. 확인할 게 더 있어서.” 입맛도 떨어졌고. 규가 철제바스켓을 아예 우진 쪽으로 쭉 밀고 주머니를 뒤지고는 무전기 하나와 함께 몸을 일으켰다. 누가 봐도 나가려는 사람처럼 보였다. 우진이 엉거주춤 반쯤 일어났다. “어디 가십니까?”

엄지로 담뱃갑에서 담배를 밀어 올리던 규가 반쯤 입을 헤벌린 상태로 뒤를 돌았다. “멀리 안 가. 최 중사 일어나면, 항구 쪽으로 오라고 해.”

“저, 저도 같이 갑니까?”

“중사 두 명 사이에 끼고 싶어?”

“아, 아닙니다. 기다리겠습니다!” 우진이 질린 얼굴로 도리질했다. 중사 두 명은 고사하고 둘 관계를 모르는 사람은 군에 없었다. 규가 애써 산뜻하게 웃고 나갔다. 우진은 점점 멀어지는 규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벽면에 눌어붙은 죽을 긁어댔다.

태양이 머리 위로 올 시간이었지만 여전히 어두웠다. 하늘을 회색으로 덮은 구름이 이동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아침까지는 보였던 빗줄기가 살짝은 연해졌다는 점이 유일한 변화였다. 우진은 콘크리트 바닥에 박힌 자신의 두 발을 꼼지락 움직였다. 괜찮을 것이라고 이규가 말했지만, 그는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우진 역시 도저히 괜찮아지지 않았다. 정말 확실하게 잃어버리고 만 거 아닌가. 그것에서 오는 두려움이 조금씩 자신을 갉아댔다. 같은 운명을 겪었을 제1 수색대원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혈혈단신들로 찢어진 그들은 과연 어딘가로 어떻게 흘러가 버린 걸까. 똑같이 다섯 명이나 되는 대원들은 대체 이 조그마한 섬 어디로 사라져버린 건가. 음침한 생기로 가득 차 비정상적으로 큰 풀과 나무의 생김새가 불현듯 기이하게 보였다.

 

비가 잦아들자마자 자연 속으로 몸을 내던진 허 중위나, 그를 말리다가 휘말리고 마는 김 하사 그리고 결국 오다가다 못하고 같은 신세가 되는 오 병장이 눈앞에서 자연스럽게 그려졌다. 항구에 무사히 도착해서 보트를 타고 나갔을까. 아. 그러고 보니까, 작전 종료 후 헬기를 부르기 위해 신호탄을 쏘기로 했던 것 같은데. 왜 이걸 잊었지. 우진은 놀랐다. 망각! 혹시 그게 사람을 부르는 마력이 있는 섬이 ‘특별한’ 자양분으로 그들을 취하는 방식인 걸까. 부레옥잠이나 끈끈이주걱 같은 식물처럼…… 바다에 동동 잠긴 채로 떠 있는 이 섬 전체가 그런 양분이 있어야 하는 무언가에 의해 움직이고 있고 학살이란 원한에 사로잡힌 귀신이 군인 따위를 부르는 게 아닐까. 이 중사님이 오면 한 번 의논해봐야 하겠다. 그는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지만……

“야.” 점점 공상에 젖어 드는 우진을 종수가 불렀다. 막 잠에서 깬 최 중사의 목소리는 듣기 좋았으나 낮고 어두운 면이 있었다. 함의나 꿍꿍이가 있기보다는 깊은 골자가 있는 사람 특유의 느낌. 마치 항상 불호령을 듣는 기분이다. 이규 앞에서는 제법 발랄하게 치근덕거릴 줄 아는 우진이지만 종수에게는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규와 종수 둘 다 같은 '중사'였지만 조금 더 하늘같이 어려운 쪽을 고르라면 종수였다.

“옙. 20-70815974. 일병! 박우진.”

“됐고, 이 중사 어디 갔어.” 종수가 귀찮은 티를 숨기지 않고 목덜미를 문질렀다. 우진이 들고 있던 비빔밥이었던 무언가를 말없이 내밀었다. 이규와 몇 숟가락 나눠 먹은 후로 손을 대지 않아 그대로였다. 1인분보다는 많고 2인분 겨우 될까 말까 한 붉은 떡 덩어리를 본 종수가 미간을 와락 구겼다.

“……야.”

“예, 예….”

“이규가 만들었냐?”

“옙.”

종수가 한숨을 쉬었다. 우진은 흉흉하던 종수의 분위기가 차분하게 가라앉은 것을 슬그머니 눈치채고 이규가 놓고 간 수저를 아예 종수에게 내밀었다.

“규가 먹으래?”

“넵. ……저흰 다 먹었지 말입니다.”

종수가 쪼그려 앉은 채로 철제바스켓을 거칠게 뺏어 들고 수저를 달그락거렸다. 씨, 다 먹긴 뭘 먹어. 짬 처리도 아니고. 종수가 꾸역꾸역 비빔밥을 입에 넣는다.

침묵이 꽤 오랜 시간 이어졌다. 이규가 있었다면 분위기가 달랐을까. 종수가 밥을 먹을 동안 우진은 통신 기기를 해체한 다음 마른 헝겊으로 닦고 다시 조립하는 과정을 몇 번 반복했다. 신호탄이 젖지 않은 것을 확인한 뒤 군장 깊숙한 곳에 넣어 짐을 정리하고 도로 다시 꺼냈다가 차곡차곡 가방 안에 쌓는 과정을 이어나갔다. 최대한 종수에게 자극을 주지 않으려는 태도였다. 다행스럽게 종수는 우진을 그렇게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다. 우진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손가락을 굽혀 정리했다. 최 중사님이 밥을 다 드셨는지 확인하기. 최 중사님께 이 중사님 위치 보고하기, 이 중사님 기다리기…… 멋쩍음에 코 밑을 문지르고서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종수는 빈 그릇을 바닥에 내려놓고 자리를 정리하는 중이었다. 우진의 일을 알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일부러 느릿하게 움직였다.

“……아! 최 중사님, 이 중사님 저쪽으로 갔습니다.”

“저쪽 어디?”

“항구에서 뵙자고 하셨습니다.”

비가 꽤 그쳐서 다행이었다. 비가 어젯밤처럼 억수 같이 내렸으면 종수의 표정은 볼만한 것을 넘어서 와락 험악하게 구겨졌을지도 몰랐다. 종수가 건물을 완전히 나서기 전 발을 바깥으로 향한 뒤 볼록 튀어나온 옆 테를 보이며 말했다.

“다음부터 걔 말대로 하지 말고 원래 방법대로 해.”

그건 꼭 부탁이나 당부 같기도 했다. 이 정도는 해야지 군대 생활이 편해질걸? 우진은 그렇게 들었다. 둘은 부대에서 소문날 만큼 특별히 각별한 데다가 사관학교에서부터 동기였다고 하니 꽤 신빙성 있는 정보였다. 그 순간 최 중사가 무섭기보다 약간은 친근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우진이 셋과의 다음 식사 시간을 생각할 때 종수의 너른 등판과 단단한 견봉이 빗속을 뚫고 앞으로 나아갔지만 결국에는 안개에 천천히 잡아먹히다가 자취를 감췄다.

 

타박타박….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경쾌하다. 종수는 박 일병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으로 꽤 오랜 시간을 걸었다. 방향을 잃지는 않았다. 누군가가 난 자리라는 듯 움푹 파인 채로 누워있는 풀을 따라가면 될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비가 그치는 중이라고 하지만 아직 보슬비가 기승이었다. 임시 주둔지가 손바닥만큼 작아질 때까지 걷고 또 걷고 한참을 걸어서야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고개를 기울이고 있는 규를 발견할 수 있었다. 0.23km²의 끝인 이 항만에서…….

이 날씨에 용케 줄곧 태운 것인지 발밑에는 짧은 꽁초가 가득했다. 담배를 쥔 손 반대편은 웬 무전기를 들고 있었다. 규는 종수가 가까이 다가온 것도 모르고 흉통을 잔뜩 조이면서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뱉었다. 규의 코와 입에서 나온 연기는 매캐하면서 쓰고, 기도로 넘어가는 뒷맛에서 살짝 단 내음이 났다. 종수는 어쩐지 숨이 턱 막혔다. 가끔 규와 함께 흡연하고는 했지만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 이규도 겨우 담배 한 갑을 4주 내내 피는 사람이었다. 그나마 피울 때도 필터 끝까지 태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규는 대부분 담배가 반절 정도 남았을 때 꺾고는 했다. 이규와 복무는 고사하고 훈련병 시절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을 봐서 그런가. 항구를 응시하는 규의 등에서 낯선 기운이 느껴졌다. 종수가 겨우 헛기침을 해서 인기척을 냈다.

“조난으로 죽기 전에, 폐병으로 죽겠다.”

“아, 그런 꿈도 꾼 적 있어.”

이규가 천연덕스럽게 받아치면서 몸을 반쯤 틀었다. 종수가 이규의 옆으로 난 공간에 서면서 손을 휘저었다. “다행이지. 야산에서 만난 기인이 연초를 그다지 즐기지 않아서 말이야.” 이규의 발밑 콘크리트 벽 아래에는 끄트머리가 마모된 방파제가 켜켜이 쌓인 채 바닷물을 빨아들였다. 방파제 사이에 희끄무레한 것이 얼핏 둥둥 떠다녔다.

“웃기는 소리.”

“안 웃잖아.”

“짜증 나게 할래?”

“하하, 이건 좀 웃기네.” 규가 담배를 떨어트려 군화 앞굽으로 비벼끈 다음 종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이 종수의 찡그린 미간을 잠시간 문지르다가 볼을 쓸고, 군번줄이 거칠게 마찰하며 붉게 상흔을 남긴 자리를 더듬었다. 이규가 중얼거렸다. “진짜 아프지 않아?”

“별로.”

“엄청 아팠을걸.”

“네가 어떻게 알아.”

이규의 광대가 씁쓰름하게 올라갔다. “모를 수가 없거든.”

이규는 종종 종수가 스스로 눈치채고 있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아주 잘 아는 사람처럼 굴었다. 종수의 상태만 아니라,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출처를 알 수 없는 잡다한 상식을 자주 입에 얹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종수는 항상 질문했다. 네가 어떻게 알아. 물론 경험으로 미루어본 건데 제대로 된 답이 돌아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처음 그렇게 물어봤던 밤도 쌀쌀했다. 규와 함께 단둘이 야간 불침번을 설 때였다. 같은 사관학교 출신에 어느 정도 생활 반경이 겹쳐 접점은 있었지만 이렇다 할 정도로 말을 섞는 사이는 아니었다. 앞으로도 그럴 줄 알았는데, 어쩌다 불침번 순서가 붙어 마주하게 된 것이다.

안녕. 바로 옆 관사지? 네 얘기 많이 들었어. 스스럼없이 말을 거는 웃는 얼굴에는 아무 사감도 엿보이지 않았다. 언뜻 듣기로는 장교들한테 그렇게 귀염받는다고…. 성격 좋아, 성적 좋아, 집안 나쁘지 않아…… 과연 실제로 만난 규는 정말 나쁘지 않았다. 종수는 자신을 향해 늘어지는 눈썹을 보고 작게 코웃음을 쳤다. 자신에게 붙은 타이틀을 지나치게 잘 아는 바람에 이규의 곰살맞은 면을 몇 번 봤음에도 경계를 풀지 않았다. 원래 날고 긴다고 하는 애들이 더한 법이니까. 여름이었는데도 군복 사이로 찬 바람이 스몄다.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흔히 비가 내리는 바닷가가 다 그렇듯이 산도 대부분 이런 식이었다. 야간의 산에서 보내는 시간은 지루했다. 자신보다 반보 앞에 있는 규는 뒤통수를 시원하게 밀어 말 그대로 훤히 드러냈는데, 춥지도 않은지 오랫동안 자세를 유지했다. 종수가 적당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혀로 입 안을 훑을 때, 규가 대뜸 말을 붙였다. 타박타박. 들어봤어? 귀신은 사실 타박타박 소리를 내면서 걷는대. 종수는 반사적으로 대꾸했다. 네가 어떻게 알아. 어떤 시간은 겨우 말 몇 마디를 나누거나, 생각을 저편으로 보내는 정도로는 순순히 흐르지 않는다. 불침번을 서는 것보다 군장을 차고 숨이 막힐 때까지 뛰거나 화생방을 견디고, 고공낙하 훈련을 반복하는 등 몸이 고생하는 훈련이 차라리 나았다. 무작정 기다려야 한다는 의식이 추가된다는 이유로 불침번을 서는 시간은 생각보다 훨씬 지루했다. 그래서 다소 실없게 들렸던 말을 끊기보다 조금 더 궁금증을 파헤치기로 했던 것 같다.

21g. 딱 그 정도라고 하거든.

귀신이?

정확히는 영혼이.

사실 종수는 심령 현상을 믿지 않았다. 귀신이 있으면 자신은 벌써 원혼 중 한 명에게 비명횡사하고도 남았다고 생각했다. 파병 좀 나갔다는 군인들은 항상 절이나 굿을 달고 살아야 했고, 이 세상에 살아있는 범죄자는 없을 것이다. 형사들은 자신들의 원한을 풀기 위해 찾아오는 귀신의 고민 상담을 들어주기 위해 늘 초과근무에 시달리고 있을 게 뻔했다. 그런데도 묻는 걸 멈추지 못했다. 굳이 친해지려는 의도 없이 단지 종수와 같이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말을 붙이는 자세가 마음에 들었다. 아부나 아첨이 절박하지 않은 애. 그런 건 종수의 인생에서 드물었다. 그래서?

‘지이익 탁’보다 무겁고 ‘터벅터벅’보다는 가벼울 거라는 소리지. 그래서 타박타박.

종수가 그때와 같이 조금은 느릿하고 힘없는 모양으로 발을 턱턱 내미는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봤다. 깊은 숲. 가로등 따위는 있을 수 없는 광활한 자연 앞. 체감하길 엄동설한보다는 절대적으로 따듯하고 열대야는 아닌 기온. 사람 목소리보다 천지에 풀벌레가 찌르르 우는 소리가 훨씬 큰 공간.

경험이 감각과 딱 맞아떨어지는 바람에 들이닥친 추억에 취한 종수는 이규가 자신의 목을 더듬다가 점점 밑으로 손을 내리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규의 손가락은 목구멍 아래부터 가슴까지 가파르게 꺾이며 어떤 자리를 찾아 더듬고 있었다. 종수는 혀가 입천장을 때리면서 시작하는 소리를 웅얼거렸다.

타박타박.

그건 파도가 방파제에 부딪히는 소리보다 컸다.

“기억하고 있네.”

“네가 나한테 처음 말 걸었을 때였거든.”

요지는 그래서 잊어버릴 리 없다는 말이었다. 종수는 안 그런 척 세심한 면이 많았다. 굳이 몸을 써야 하는 일을 해야 한다면 군인이 아니라 운동선수를 하는 게 조금 더 잘 어울렸을 만큼. 규가 잠시 골몰하더니 아예 손바닥을 펼쳐 종수의 멱살을 잡아 바짝 끌어당겼다. 종수가 발끝을 세워 겨우 넘어지는 것을 면했다. 벌컥 화를 내기도 전에 이규가 말했다. “그럼 처음 유서 썼을 때도 기억해?”

“어.”

“나는 총에 맞았고 너는 배에 구멍이 났었는데.” 하하. 가볍게 웃으려고 노력하는 이규가 불안정하게 보였다. 숨을 씨근덕거리면서 자꾸 종수의 기억 아래에 있는 것을 끌어올리려고 했다. 종수는 이제 이규가 무엇을 끄집어낼지, 최후에는 뭘 얘기하고 싶은지 알 수 없어 두려웠다. 생사를 오가는 삶을 함께 생존하면서 유일무이하게 자신을 깨부술 수 있는 권력을 쥐여준 사람이다. 그건 이규에게 종수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종수가 규의 허리춤을 붙들고, 규의 회상에 화답하듯 대꾸했다.

“서로 이름을 써주기로 했지. 너도, 나도.”

규는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대신 꼭 찾아주기로 했고. 타지에서 길을 잃으면……” 라고 하며 먼바다를 응시했다. 어느덧 규는 종수의 멱살을 잡은 손을 풀고 종수에게 자신의 몸을 기댔다. 바람이 불지 않았고, 빗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아 주변이 지나치게 조용했다. 파도만 이따금 철썩거렸다. 이상한 고요함이 그들을 내리누르고 있었다. 종수가 손톱을 세워 목덜미를 긁었다. 어쩐지 버거웠다.

“저기, 자세히 봐. 내가 찾은 것 같거든.”

어제 우진이랑 와서 봤을 때는 별거 아닌 줄 알았거든. 근데 맞는 것 같아. 못간다고 하던 게 이거 때문인가…. 이규가 턱짓한 아래에 무언가가 넘실거렸다. 물살에 의해 검게 풀어진 머리카락과 군복처럼 보이는 옷감이 찢어진 채로 주변보다 명도와 채도가 낮은 물을 따라 파도의 흐름을 타고 있었다. 서서히 퍼지는 질감이 최소한 일주일은 묵은 채로 고인 핏덩이 같았다. 종수는 순간 등골을 타고 오르는 소름에 몸을 굳혔다. 희끄무레한 건 사람의 살이었다. 잔뜩 불어 터진 누군가의 육신이 저곳에 있는 것이다. 얼굴이 뭉개져서 보기 힘들었지만, 예상하기로는 제1 수색대원 일원 중 누군가가 아닐까 싶었다. 깊은 방파제 사이에 껴있는데도 선명하게 보일 정도면 꽤 덩치가 있다는 말이었다. 키는 190에서 195 언저리. 대충 가늠하기로는 90에서 100㎏ 사이. 턱으로 추정되는 것에서부터 가슴팍까지 우둘투둘하게 올라온 살과 허옇게 드러난 뼈 모양을 보면, 땅굴상 특유의 상흔을 가지고 있었다. 움푹 들어간 땅에서 총을 맞은 군인은 그런 상처를 입는다. 종수는 이제야 임시 주둔지부터 이곳까지 자신이 밟고 온 땅이 누군가에 의해 움씬 파이고 긁혔는지 알 것 같았다. 경악에 찬 종수를 보고 있는 규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포말에 부딪힌 군인의 군번줄과 인식표의 음각이 요란하게 빛났다.

해군…… 23-523423…… 최……

“봐, 맞지.”

이규도 자신과 함께 음각을 읽고 있는 것 같았다. 규는 감당하지 못할 것을 받아들인 사람처럼 씨근덕거리며 현기증이 나는 머리를 붙들고 휘청거렸다. 너 맞지. 그렇게 물어보려는 규는 담배를 쌓으면서 꾹꾹 눌러왔던 감정이 터진 둑처럼 마구잡이로 새어버린 바람에 자신을 스스로 감당하지 못한 듯 보였다. 종수는 규가 고꾸라지거나 밑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붙들고 품으로 끌어당겼다. 바다에 붙박인 규의 눈이 무서웠다. 야전 병원에서 나란히 누워 언젠가 맞이할 수 있는 죽음에 관해서 얘기를 나눴을 때도, 겨우 천 하나에 의지해 1,500m 이상의 상공에서 떨어지기 직전에도, 망망대해의 선박 위에서 경비작전을 수행할 때마저 규는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 규가 시신 하나를 보고 걷잡을 수 없이 무너졌다.

종수는 어제 새벽 이규가 그랬던 것처럼 규의 눈 앞머리에 손바닥을 얹

“종수……”

“날 봐.” 저거 보지 마. 규…. 흉하잖아. 0.23, 땅굴상, 제1 수색대대, 나의 부하들…… 굳이 가지 않아도 되었던 작전과 알 수 없는 괴현상. 종수가 빠르게 행간을 읽고 규를 응시했다. 규는 어깨를 떨고 있었다. 자신에게 몸을 기댄 이규가 넘어지지 않도록 다리를 살짝 벌리고 규의 허리춤과 어깻죽지를 단단하게 감싼 뒤 바로 세웠다. 뒤로 밀리지 않으려고 했지만, 평균 남성 이상을 훨씬 웃도는 몸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이규는, 이규가 숨기지 않고 표출하는 슬픔이 넘실가리는 파도처럼 종수에게 밀려든다. 종수가 주춤거리던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가기 전에 무릎을 굽혀 자리에 주저앉았다. 규 역시 종수를 따라 허물어졌다. 무게를 이기지 못해 종수는 몸을 뒤로 젖히면서 아스팔트 바닥에 머리를 댔다. 규는 이제 거의 종수의 위에 엎드렸다. 한참 비를 맞아 척척한 이규의 손이 가랑비에 젖은 종수의 군복 가슴팍을 헤집었다. 종수가 누워있는 땅이 부르르 진동했다. 거친 요철과 굳은살이 잔뜩 난 손바닥이 무게를 실어 가슴을 문질렀다.

“야. 규, 너 지금 뭐 하는….”

“최종수.”

그는 이제 거의 식은땀을 흘리기까지 했다. 애수. 규의 목소리에서 왜 그것이 떠올랐는지 모를 노릇이다. 규가 거의 이를 악물고 겨우 목소리를 냈다. 눈과 엇비슷한 위치에 있던 머리통이 한참 밑으로 내려가다가 가슴팍에 귀를 가져다 댔다.

“……나한테 남길 말 없어?”

살갗에 입을 붙인 규의 목소리가 선득하게 울렸다. 그때 내가 말렸잖아. 느낌이 좋지 않다고. 내가 가겠다고. 종수는 자신의 밑에서 비비적거리는 이규를 의식하지 않기 위해 정신을 겨우 다잡았다. 자꾸만 흐려지는 정신을 잡기 위해 턱을 치들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전복된 시야에 들어오는 하늘이 익숙했다. 거꾸로 선 짙은 녹림과 아지랑이처럼 흐려졌다가 선명해지는 풀들. 바람이 볼을 세차게 때렸고 머리카락 맡에서 잔돌이 풀썩거렸다. “미안해. 명령이 있었거든.” 그의 입에서 자신도 기억 저편으로 날려 잊은 지 오래인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이규가 몸을 반쯤 일으켜 배에 걸터앉았다. 종수는 움찔 떨지도 못한 채 역광을 지고 무릎을 꿇은 채 자신을 짓누르는 이규의 콧잔등을 올려다봤다. 이대로 눈을 감으면 영 일어나지 못할 것만 같았다. 부족한 숨을 메꾸기 위해 흉곽을 빠르게 부풀면 부풀수록 정신이 멍해지고 어떤 기시감을 쫓기 시작했다. “어떤 명령.” 이규가 입술을 움직였다. “중요한 명령.” 종수가 답하면 이규가 다시 무섭게 따라붙었다. “어떤 중요한 명령?”

不歸……

돌아가지 못한다는 것 자체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항상 위험한 임무를 맡았고 그것이 종수와 이규의 일이었다. 악에서 악으로. 안 하면 할 때까지. 안 되면 될 때까지. 그들 항상 명예를 훈장처럼 달고 죽음의 꽁무니를 쫓아다녔다. 不歸. 그러니 이규도 인정해야만 했다. 사람의 일은 항상 불식간이므로 반복해서 복기할 일도, 새삼스러울 필요가 없단 말이다. 이런 일이 닥칠 예정이라면 어느 한쪽이 희생하려고 한다는 건. 종수가 눈을 굴려 아스팔트의 갈라진 틈으로 난 잡초를 응시했다. 겨우 바늘구멍만 한 사이를 비집고 기어코 싹을 틔운 씨앗의 노고와 절박함에 괜히 울컥 서글픔이 치밀었다.

“이규.”

종수가 자신의 가슴을 누르고 있는 손목을 틀어잡았다.

규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종수는 볼 안쪽을 홀쭉하게 빨아들이고 어금니로 볼 안쪽 살을 물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비명을 지를 것 같았다. 잔뜩 긴장해 씨근덕거리는 어깨만큼 목도 부풀어 군복이 온몸을 답답하게 조였다. 먹구름 없이 내리는 빗방울이 뺨에 닿았다가 떨어지고, 움직일 때마다 바닥과 맞닿은 살이 돌과 마찰해 자잘하게 긁혔다. 종수는 손을 움직여 겨우 허벅지에 찬 권총을 손에 쥐었다. 내리쳐야 하나. 가슴팍에서 다시 빗장뼈 언저리로 향하는 이규의 엄지손가락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어둠이 드리워진 얼굴을 바라봤다.

“최종수,”

“어.”

“……최, 중사”

“대답하고 있잖아.” 긴장하다 못해 잔뜩 갈라져 기력이 쇠진한 목소리로 응답했다. 몸무게로 눌러오는 이규에게 저항하기 위해 힘이 들어갔기보다는 원초적으로 근육이 뻣뻣하게 굳었다는 말이 맞을 정도로 침을 삼키는 것조차 어려웠다. 자신을 향해 내리깐 속눈썹이 무언갈 망설이듯 한참 깜빡거렸다.

땀과 비가 섞여 규의 이마에서 뭉쳐 눈두덩이로 흘러내렸다. 규는 물방울이 자신의 볼을 타도록 가만히 두었다. 이마와 눈에서부터 저항 없이 쏟아지는 물이 턱 끝에 방울지다가 종수에게 떨어졌다. 침을 한 번 크게 삼킨 이규가 좀 전보다 부드럽고 다정하게 동정을 담아서 종수를 호명했다.

“최종수……”

세 번째 부름이 끝나자 종수는 자신에게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귀에서 폭음이 터졌다. 목에서부터 가슴까지 이규가 손으로 덧그리고 누른 자리가 점점 골짜기처럼 밑으로 꺼지고 있었다. 뜨겁고 울컥거리는 무언가가 깊게 파인 살을 비집고 흐르고, 눈에 핏발이 설 정도로 강렬한 통증이 종수를 사로잡았다. 나는 이렇게 죽었구나. 모호하던 기억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렸다. 단말마가 튀어나온다. 아. 아. 아. 씨발. 규…… 반쯤 벌어진 종수의 입이 꺽꺽거렸다. 규는 여전히 해명이 필요하다는 시선으로 종수를 봤다. 종수가 쿨럭거리더니 뻐끔뻐끔 입을 움직였지만, 그래서 나는. 난. 아. 핏덩이 같은 신열이 목구멍에서 끓어 종수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비린 단내가 코언저리에서 빙빙 돌았다. 절대 울지 않을 것이다. 그런 집요한 의지를 가지고 자신을 노려보는 눈에 대고 어떻게 말하겠는가. 사실 이번 작전에서 네가 첫 번째고 자신이 두 번째였을 거라는 말을. 자신은 대외적으로 이런 순정과 거리가 멀었고 말도 안 되는 순애나 희생이라는 단어와는 더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니 어쩌면 해명은 전하지 않는 게 이규의 안정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통으로 잠식하는 와중에도 자신의 위에서 턱을 붙들고 눈을 마주치고 있는 이규를 보고 있으면 이것이 맞겠다는 생각이 든다. 눈이 반쯤 돌아간 종수의 안와를 규가 피범벅이 된 손으로 부드럽게 문질렀다. 밑에서 버둥거리던 군화 밑창에 자갈이 엉기다가 멈춘다. 이규가 종수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긴다.

“거봐, 아팠을 거라니까.”

“무서웠겠다.”

“나 없이.”

“이제 괜찮아.”

이규는 종수가 ‘어떻게 알아?’라고 질문하면 항상 의뭉스럽게 웃어넘기고는 했다. 미결된 궁금증은 종수의 몫이었고, 어떻게든 해석하든 규의 생각과는 관계없이 온전히 종수 마음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이규가 어떻게 자신에게 공감하는지 알 수 있었다. 아픔을 완전히 공유하지는 않았지만, 이규의 턱 역시 종수만큼 달달 떨리고 있었다. 분노하고 있나. 슬퍼하고 있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아느냐고 묻고 싶었다. 목소리가 아니라 바람이 쌕쌕 새는 소리가 난다. 근육이 일하고 있지 않았다. 곧고 단정한 손이 자신의 볼을 감싸는 것이 느껴졌다. 종수가 겨우 눈동자를 굴려 초점을 이규에게 맞췄다. 규가 고개를 숙여 종수의 볼에 코끝을 뭉근하게 부볐다. 볼에 닿는 숨이 습윤하다. 규보다 종수가 먼저 응답하듯이 고개를 틀었다. 규의 입술은 며칠 동안 고생한 탓에 거스러미가 올라와 꺼슬꺼슬하고 눅눅했다.

규는 울지만 않을 뿐이지 거의 흐느끼고 있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나는 이제 쟤를 제대로 안아줄 수 없을 텐데, 이제 떨어져야 하는데, 돌아가. 이 말을 전해야 하는데. 이규가 떨어지지 않는다. 분기마다 작성하던 유서에 규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것이 불쑥 떠오른다. 그만큼 당연했다. 이런 순간에 같이 있는 ‘우리’가. 규도 마찬가지려나. 종수는 임시 거처에서 자신들을 기다릴 박우진을 떠올리고, 자신의 위에서 오랫동안 머물러 있을 이규의 모습을 떠올렸다.

쏴아아…….

뒤집힌 능선에서 풀들이 바람에 비명을 지르며 손짓한다.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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