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특급
쫑규, 23.12.31 천하제일 열애지회 교류회 참가자 <동경의 요람> 웹발행 공개 1
이규랑 같이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일도 된다니까.
그런 소리를 많이 들었다. 운동을 시작한 이래로 수업 시간에 자리를 자주 비우게 되어 발표 수업이 있을 때마다 큰 역할을 맡지 못하지만, 발표 주제를 ‘사다리 타기’ 따위로 결정할 때만큼은 반드시 일선으로 나서서 조원들이 바라는 결과를 얻어냈다. 가위바위보에서 지는 일도 거의 없었으며 시험 시간 전에 대충 출제가 예상되는 개념을 찍었다 하면 족집게처럼 시험에 나와 60점은 가뿐하게 넘겼다. 그런데도 성적은 80점이 되기에는 약간 모자란 상태를 유지했는데, 그 정도만 되어도 이규의 기준에서는 아주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도로의 신호등을 보지 않아도 초록 불이 켜질 타이밍에 맞춰 횡단보도 앞에 서는 건 이규가 가진 무수한 비기 중 하나다.
반 친구들은 이규의 행운을 자주 빌리고자 했다. 이규는 기꺼이 손을 빌려줬다. 같은 문파에 속한 속가 제자들의 요청을 모르는 척하지 않는 성격이기도 하거니와, 이규의 친할아버지께서 협행을 하는 진정한 무인이라면 인망이 두루두루 넓은 것은 물론이고 의를 실천하는 마음이 훌륭해야 하는데, 도움이 필요한 친구의 손을 잡는 건 그런 종류 중 하나라고 했다. 이 시기 이규는 주말마다 할아버지를 따라서 간 바둑 학원에서 우연히 접한 무협 도서를 읽기 시작할 때였다. 덕분에 할아버지가 말하는 의협심이 무엇인지 자세히 몰랐지만, 그것이 의로운 것이라는 점은 확실히 알았다. 주인공이라면 가지고 있는 필수적인 소양인 점도.
이상하게 네가 골라준 건 다 정답이 되는 것 같아. 친구들이 해주는 말을 들은 이규는 우쭐하는 대신 우스개로 내가 운이 좀 좋아, 라고 대답했다. 길운을 타고났다는 평이 이규를 따라다녔다.
그러나 이규가 생각하기로는 자신은 그저 신중할 뿐이었다. 백 가지나 되는 선택지 중에서 득이 될 것을 숙고해서 골라내고 그 감각을 잊지 않는 것. 그뿐. 사다리 타기를 할 때마다 담임 선생님이 긋는 선의 개수와 모양은 대부분 정해져 있었고, 가위바위보를 시작하기 전 상대방의 손을 가만히 보면 미리 어떤 것을 낼지 대충 가늠할 수 있었다. 가령 검지와 중지가 비죽 튀어나온 상태라면 가위였다. 주먹을 꽉 쥐고 있는 건 1/2 확률로 결연하게 펼칠 준비가 되어 있거나 그대로 내지르거나. 처음부터 주먹을 내는 사람은 의외로 손을 헐겁게 쥔다. 출제 내용을 족집게처럼 집어내는 건 이규가 판서하는 선생님의 목소리 고조 변화에 민감하기 때문이고, 초록 불에 맞춰서 학교 앞 횡단보도를 건너는 건 걸음걸이가 새로운 길에 적응을 마쳤다는 단순한 신호였다.
하루하루가 쉽게 흘러갔다. 큰 고단함이 없는 초등학생의 일과는 권태에 시달리도록 했다. 또래는 뻔했고 어제와 오늘은 반복된다. 가만히 앉아있는 건 지루함을 타파하는 일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무협지를 읽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간질거리는 몸을 풀어주는 건 스포츠였다. 잘 정제된 규칙에 얽매여 있으면서 도통 결과를 종잡을 수 없는 불규칙성이 있는 그건 끊임없는 선택의 순간을 제공했다.
계주를 나갔다 하면 당당하게 1등을 거머쥐었고 줄다리기를 할 때는 거의 선두에 섰다. 축구를 할 때 공을 득점까지 연결할 줄 알았다. 야구공을 거침없이 앞으로 흩뿌리면 이규의 공을 칠 수 있는 애들이 거의 없었다. 배트를 휘두르고 셔틀콕을 쳐내고 두 손을 모아 배구공을 튕기는 것도 꽤 괜찮게 했다. 관내에서 운동하는 이규는 대다수가 알았다. 그러다 초등학교 5학년이 될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바빠졌는데, 원래도 또래보다 머리 하나가 더 있는 몸이 훨씬 길어지기 시작하면서 체육 선생님 손에 이끌려 크고 작은 여러 권역 대회에 나가 활약하는 일을 반복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뭐든 하기만 했지 정확히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몰랐다. 타고났다는 말은 여전히 들었다. 사지는 유연하고 몸체 자체에 탄성이 있으며 또래에 비해서 지나치게 키가 커서 자세가 쉽게 나빠질까 걱정한 것이 무색하게 휜 구석 없이 반듯하고 언제든 근육이 붙을 여지가 있는 굴곡진 몸은 단단하다고…….
어른들이 이규에 관해서 칭찬할 때는 또래와는 약간 다른 신체적인 이점에 관한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규는 마찬가지로 잘난 척은 전혀 하지 않았다. 여전히 자신은 그저 어린이집에 다니던 시절부터 새벽마다 할아버지의 손을 붙들고 약수터에 가서 앞뒤로 손뼉을 치거나, 운동 기구를 이용해서 허리를 돌리는 등 꾸준히 몸을 엿가락처럼 늘렸고, 반에서는 맨 뒷자리에 앉아 가장 위에 있는 사물함을 이용하면서 허리를 수그리거나 어깨를 굽힐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어린이 야구단의 스카우트 매니저부터 격투기 관장까지 뭇 어른들은 이규에게 해주고 싶다는 게 많다는 뉘앙스로 말했다. 이규는 갈림길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쥐고 신중하게 굴렸다. 그러나 그들은 이규가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지지 않길 원하는 눈치였다.
농구라는 종목에 본격적으로 마음이 동하게 된 건 어떤 동영상을 본 이후부터다. 그건 80년대부터 90년대까지 10년 동안 NBA를 호령했던 불스 왕조의 33번이 보인 10초 남짓한 플레이였다. 영상은 수비수를 줄줄이 매달고 달려가는 10번이 블록할 위기에서부터 시작된다. 33번은 이규가 눈치채지도 못한 사이에 10번의 반대편으로 가서 그가 완전히 블록 당하기 전에 손을 펼쳤다. 볼이 이어질 길을 만들어낸 것이다. 10번이 강하게 패스한 공을 받은 33번은 곧바로 림을 향해 돌진해 덩크를 꽂아 넣는다.
인터넷에 ‘농구’를 검색하면 나오는 수많은 하이라이트 장면 중 그것이 눈에 꽂혔다. 나중에 찾아보니 옆면에서 날카롭게 찔러넣는 훅슛은 파트너를 살리는 볼 핸들링과 뛰어난 수비력 다음으로 그의 특기 중 하나였다. 볼을 돌리고 상대방 앞을 가로막고 허공에 뜬 공을 낚아챈다. 그리고 자신의 파트너에게 기회를 만들어준다. 그건 이규가 평소 친우들에게 하는 행동과 다름이 없었으며, 멋지기까지 했다. 그것을 본 뒤로 언젠가 그런 경기를 하고 싶은 기분에 휩싸였다. 아니.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체육 시간이나 야외 코트에서 농구공을 만질수록 이 둥근 물체가 자신의 운명처럼 느껴졌다. ‘와씨, 야 너 공 어떻게 넣은 거냐?’ 이런 경탄을 받았을 때는 어떤 말에도 높아지지 않았던 콧대가 올라갔다. 그 순간 아무래도 농구를 해야겠다, 이런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우둘투둘한 표면을 손에 감아 위로 올리는 짧은 시간 동안 순식간에 볼을 던지는 감각에 매료되었다는 소리다.
“장도중에 가려고요. 농구를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규는 긴장했고 두 부모님은 시선을 교차하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마침내 이 말이 공식적으로 떨어지고 나서도 뭇 어른들의 구애는 몇주간 계속되었다. 그들의 찬사는 저주로 변했는데, 그때 들은 말들이 ‘그 최종수도 장도중으로 간다는데, 걔만큼 하지 못하면 살아남기 힘들걸’ 따위였다. 신경 쓰이지 않았다고 하기에는 이규도 귀와 눈이 있는 애인지라 마음이 수런거렸으나 얼굴도 모르는 애한테 마음이 흔들리고 싶지는 않았다. 이규의 부모님이 무시로 일관하자 그들의 관심은 곧 시들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고 옆 문파의 문하생이 야구를 한다더니 갑자기 유소년 축구단에 들어갈 것이라는 소문이 들렸다. 이규는 어린이날 선물로 농구화를 장만했다. 중학교 배정 지원 기간 6개월 전의 일이었다.
“그게 네가 농구를 시작한 이유라고?”
이야기 중반까지 호의적인 태도로 듣던 최종수가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반문한다. 휴일을 맞은 학교 체육관은 텅 비어서 둘 뿐이었다. 음성이 사방에서 울렸다. 이규가 멋쩍게 웃고 차례를 기다리던 손을 까닥거렸다. 흰 티셔츠가 땀에 젖어 몸에 달라붙었다. 반질반질한 기능성 섬유는 오히려 면으로 된 직물보다 땀을 잘 흡수하지 못했다. 이규가 웃옷을 잡고 끌어올려 인중에 고인 땀을 닦는다. “응. 그게 전부는 아니지만, 아무튼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종수의 눈동자가 밑으로 내려갔다가 이규의 천연덕스러운 얼굴 쪽으로 올라간다.
“그러면 안 돼?”
“허…….”
최종수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낯선 타인이 자신의 인생을 멋대로 점지하고 재단하는 인생을 살았던 사람한테는 이해하기 다소 어려운 개념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이규가 어깨를 으쓱했다. 최종수가 제자리에서 농구공을 튀겼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 말은 다른 것도 언제든 시작할 수 있다는 말 아니야? 야구나 배구도 해봤다며. 공이면 다 좋아하는 개새끼라는 소리잖아.” 최종수가 이죽거렸다. 이규의 귀에는 겨우 그딴 정신으로 내 앞에 있는 것이냐는 소리로 들리기도 했다. 이규는 헤어 밴드 안쪽 두상에 고인 땀을 식히기 위해 엄지로 밴드 끝을 끌러 살짝 들췄다가 내려놓았다. 최종수가 턱을 목으로 당겨 이규의 표정을 살핀다. 꼴에 눈치는 보는 모양이다.
“글쎄……. 공격 안 할 거야? 그럼 공 나 주고.”
이규가 말하자마자 최종수가 턱에 힘을 줘서 입을 다물고 공을 바닥으로 세게 내리쳤다. “아이쿠.” 짐짓 여유 있는 척은 여기까지 해야 할 것 같았다. 이규 역시 늑장 부리지 않고 곧바로 태세를 갖췄다. 유광으로 코팅이 된 마룻바닥이 밀리는 소리가 귓구멍을 긁었다. 소름이 저절로 돋는다. 입안이 바짝 마르고 긴장으로 온몸의 근육을 팽팽하게 부풀렸다. 몇 번 겪어보지도 않았는데 이규는 자신과 최종수의 차이를 확실하게 느꼈다. 자세를 낮춰 바닥에 붙은 채로 활로를 훑는 최종수를 완벽하게 수비하는 일은 어렵다. 최종수와 맞붙는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처음 맞붙었을 때를 생각만 해도 몸에 힘이 들어갔다. 그때도 최종수는 어렵게 달려들었다. 코치님이 주문한 일일 루틴을 실행하면서 데워진 몸으로부터 후덥지근한 열기가 이제야 올라왔다.
최종수의 농구는 성격만큼이나 다소 뻔하면서 때로 변칙적이었다. 속이 읽힐 정도로 투명하게 감정을 드러내다가도 자신을 감춘 채로 되려 허점을 들쑤신다. 최종수는 이규가 공을 쳐서 뺏어가려고 팔을 뻗기도 전에 바로 각도를 틀었다. 신체적 조건만 봤을 때는 이규가 키가 약간 더 컸고 최종수는 손가락 한두 마디가 작았다. 무게도 이규가 조금 더 나갔다. 그러니 버티거나 간을 보는 건 이규를 대상으로는 영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듯싶었다.
조금만 더 가면 라인 밖인데. 규가 바닥을 흘끔거리며 바짝 종수를 쫓았다. 파울을 알릴 준비를 했다. 그러나 최종수는 애매한 위치에서 바로 멈췄다. 이규가 발을 한 발자국 디뎠다.
“종수, 샷클락 얼마 안 남은 거 알지?”
그때였다. 최종수가 총알이 총구에서 튀어 나가는 모양으로 순식간에 달아나 수비 범위를 벗어나더니 망설임 없이 공을 던졌다. 방아쇠를 당겼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신속한 움직임이다. 모든 동작이 깔끔했다. 슛을 시도하는 자세의 중심이 흐트러졌음에도 불구하고 이규는 길게 뻗은 팔과 공이 그리는 포물선이 완벽해서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골대 그물이 멋들어지게 흔들린다. 깔끔한 3점 슛이다. 이런 날 제대로 상대할 자신 있어? 최종수가 말을 한다면 곧바로 이렇게 말할 것 같았다. 그의 입술이 나직하게 벌어진다.
“흥.”
이규가 골대 밑으로 가서 농구공을 줍다가 멈칫했다. ……우와. 쟤 지금 육성으로 ‘흥’이라고 한 거야? 농구공을 문지르는 이규의 표정이 비틀렸다가 일자로 펴지다가 다시 씰룩거린다.
“야, 뭐해?”
최종수가 간격을 유지하며 다가왔다. 공기를 부유하는 먼지가 바짝 일어나 햇살에 비친다.
“공격 안 할 거냐? 계속 그러고 있을 거면 공 주든가.” 그러고서는 반바지 양쪽을 손으로 쥐고 당겨서 올린다. 이규가 아랫입술을 물었다. 흐흐. 실소를 터트리는 소리가 났다.
되로 준 말을 되로 받고 말았다.
분명 최종수는 어렵고 힘들다. 이규는 자신의 실력이 최종수의 발 끝에 겨우 미칠 수준이려나 생각했다. 하지만 그 사실이 마냥 나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래봤자 쟤는 마음이 수틀리면 ‘흥’ 소리를 내는 남자애라고 생각이 드니 우스웠다. 어쩌면 귀여워보이기도 했고. 이규의 어깨가 흔들리면 흔들릴수록 최종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허리를 폈다. 쟤 당황했다. 종수는 여러모로 또래를 많이 상대하지 않은 티가 났다. 자기소개할 때 신발 앞머리로 바닥을 긁다가 고개를 까닥이는 것이나 ‘최종수입니다.’ 고작 한 문장 말해놓고 자신에 대한 설명이 끝난 줄 아는 것만 봐도 말 다 했지.
“뭐하냐고.” 초조함이 들었는지 종수의 숨이 가쁘게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흉곽이 움직이는 것이 그대로 보였다.
“아, 아. 미안. 지금 갈게.”
이규가 겨우 진정하고 바닥에 공을 튕긴다. 퉁, 퉁. 가벼운 소리가 점점 박차를 가한다. 종수가 이규의 움직임에 맞춰 몸을 놀린다. 그의 신발은 조던 30이었다. 종수의 화려한 경기 운용과 그 신발이 제법 어울렸다. 어울리는 것을 넘어 언젠가 봤던 경기 영상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내가 이렇게 공을 잡고 있을 때 쟤가 코트 구석에 있으면 든든하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리바운드를 잡고 사람들을 주렁주렁 매단 채로 반코트 가로지르면 종수가 수비를 벗겨내면서 쫓아온다. 골대 앞까지 간 종수가 악착같이 자리를 잡는다.
그러고서는 내가 보내는 패스를 받고, 농구공을 한 손으로 감아올린 뒤 림까지 단 한 번에 슛을 통과시키는 거지. 굳이 직접 골대까지 공을 올리지 않아도 넣을 수 있다. 쟤라면 그 일을 용이하게 만들어줄 것 같다. 쟤한테 날개를 달아줄 수도 있겠지…. 공상과 심장이 공을 드리블하는 속도에 맞춰 쿵쿵 뛰었다. 에어컨을 켜지 못하는 4월의 체육관은 덥다. 규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다. 마냥 더워서 그렇다기보다 잔뜩 흥분한 탓도 있는데 어떤 것이 선행되어 머릿속이 뜨거운지, 실없이 미소가 나오는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종수가 앞을 가로막고 드리블 중 약간 높게 떠오른 공을 가로챘다. 다리 사이로 알을 까듯이 공을 보내거나 몸을 돌려서 회피할 시간 없이 순식간에 공을 뺏은 종수가 곧바로 자세를 취했다. 이규의 팔이 아무리 길다 하든 높게 날아가는 공을 잡을 수는 없다. 몇 번 합을 맞춘 걸로 규가 어떤 방식으로 허공에 떠오른 공을 낚아채는지 알아낸 모양이다.
이규가 입을 쩍 벌렸다. 아! 역시.
“넣을 줄 알았어. 폼 좋더라.”
“너…. 너는 너무 쉬운 거 아니야?”
두 번이나 연속으로 석 점을 터트린 종수가 입술을 잘근 물었다. 대놓고 무시를 받았는데도 이규는 전혀 자존심이 상하지 않았다. 가슴이 위아래로 팔딱였다.
“당연하지. 농구는 겨우 여덟 달 했거든. 너는 돌잡이 할 때부터 농구공 잡았다고 너희 아버지 유튜브에 나오던데 진짜야?”
짐짓 산뜻하게 들리는 대꾸에 종수가 고함을 질렀다.
“뭐? 언제 찾아본 거야.”
“네가 자기소개 한 날에.”
“왜?”
“어휴, 검색했더니 나와서 그냥 봤어. 궁금하잖아.”
“그걸 그렇다고 봐?”
종수의 얼굴이 점점 시퍼렇게 질렸다가 붉게 물들었다.
“아, 귀 떨어지겠네. 나는 네가 최세종 아들인 줄도 몰랐거든?”
“거짓말. 말도 안 돼. 그걸 어떻게 몰라?”
“안다고 생각하는 게 더 말도 안 된다고. 그럼 너는 조조나 관우, 장비 알아?”
“…뭐?”
“거봐. 그 사람들이 최세종 선수보다 더 유명한데.” 내가 널 모를 수도 있지. 한 방 먹였다는 쾌감에 이규가 입꼬리를 올렸다.
이규는 정말 종수를 몰랐다. 미국으로 갔다가 돌아온 대왕 센터 최세종은 알았으나 그의 가족관계까지는 관심 밖의 일이었다. 최세종 선수가 결혼했으며 아들이 있다는 것과 그 아들이 이규와 동갑이며 같은 중학교에 진학했다는 사실도 뒤에서 한참 떠드는 남자애 둘 덕분에 알게 되었다. 심지어 동아리 선배들과 대면식을 하는 당일, 자신의 옆에 서서 고개를 푹 숙여 고수머리로 눈을 가리고 있던 남자애의 이름을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그 ‘최종수’가 ‘최세종’의 아들일 줄은 추호도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그가 토끼처럼 눈을 뜨든 말든 이규가 손짓했다. 이규는 종수가 잔뜩 경계하며 눈을 좁힌 것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종수, 일대일 말고 다른 거 해보는 건 어때?” 그저 몸이 식기 전에 서둘러 상상한 것을 현실로 옮겨보고 싶었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이규는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지 궁금했다.
종수가 질린 얼굴로 미적거리다가 답한다.
“……이번에는 또 뭔데.” 이규가 무릎을 굽혀 수그리고 손가락으로 바닥에 그림을 그렸다. 입술을 안쪽으로 말아 넣은 채로 고개를 숙이던 종수가 침을 삼키고 이규의 말을 기다린다.
“여기가 골대고 이게 너랑 나야. 보고 있어?”
“…응.”
종수도 자연스럽게 쪼그려 앉았다.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드는 남자애 두 명이 머리를 맞댔다. 둘 다 땀으로 범벅된 탓에 바짝 붙었다는 이유로 공기가 금세 눅눅해졌다. 서로 간에 영 좋지 않은 냄새가 난다. 이규가 노란색 헤어 밴드를 아래로 내려 목덜미를 닦고 목걸이처럼 걸었다.
“우선 너한테 집요한 마크맨이 붙어서 볼을 오래 끌 수 없어서, 네가 나한테 패스한 상황부터 가는 거야.”
“네가 마크맨을 한다고?”
“아니 나는 이제부터 공을 가진 채로 너한테 어시스트를 해볼 건데, 네 위치가 중요해. 앞에 누군가가 있다고 상상하면서 경공 쓸 수 있지?” 이규가 묻자마자 종수가 미간을 찌푸렸다.
“경공이 뭔데?”
진심으로 모르냐는 눈치로 눈을 꿈뻑거리자 종수가 바닥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곧바로 가볍게 빨리 달리는 것이라고 풀어 말해주었건만 종수가 성질을 냈다.
“좀 똑바로 말해.”
“한자를 알면 어렵지 않은 말인데…. 가벼울 경 몰라?”
“몰라, 그게 중요해? 모르면 안 돼?” 그렇게 물어보는 얼굴이 진지해서 가까스로 웃음을 참았다. 이규가 손가락으로 마저 상대 수비수 위치를 짚은 다음 아군의 골대에서부터 반대편까지 길게 종수의 진입 경로를 그었다. “그건 아니. 아무튼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달려가서 슛을 쏠 건데, 이 각도로 해볼 수 있어?”
“좀 어려운데.”
“그래도 해봐. 조던은 할 수 있던데?”
“걔랑 내가 같냐.”
“아니야, 할 수 있어.”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는데?”
이규가 종수를 응시한다. 체육관 앞에서 마주쳤을 때만 해도 눈을 가릴 정도로 내려온 보송보송한 앞머리가 땀에 절어 여기저기 갈라지고 뒤로 넘어간 상태였다. 종수도 이규처럼 뺨에는 발그레한 홍조가 올라온 채로 불만스럽게 눈썹을 구긴 상태였다. 이규가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자 종수는 확신이 없는 얼굴로 운동화 밑창의 노란색 고무 마크를 손톱으로 뜯는다.
“너 조던이 왜 조던인지 몰라? 고작 8개월 농구 한 게 뭘 안다고…. 다 쉬워 보이지?”
아닌데, 너는 진짜 할 수 있을 텐데. 이규는 생떼 같은 말을 속으로 삼키고 잠시 망설였다. 평소 겸양을 떨면서 했던 말이지만, 종수에게는 이 말이 꽤 효력을 발휘할지도 모른다.
“나는 다 알아. 그런 감이 와.”
이규의 음성이 강당을 조그마하게 울렸다. 어떤 효과를 일으켰는지 몰라도 암시가 통하긴 한 모양이었다. 종수가 알았어. 해보면 되잖아. 하고 성질을 부렸다.
둘은 충분히 상상력을 가공해서 가상의 인물을 앞에 세웠다. 이규는 종수를 쫓았다. 빠르게 움직일 때마다 흩뿌려지는 땀방울과 어벙한 얼굴로 화를 발끈대던 애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날카로운 눈과 절제된 움직임이었다. 최종수, 장도의, 최종수, 23번.
온몸에서 땀이 흥건하게 흘렀다. 훅훅 숨을 내쉬는 소리가 코트 위에 뿌려진다. 이규보다 한참 앞서간 종수가 골대 밑 라인에 몸을 쑤시듯 비틀고 팔을 벌렸다. “야! 공 줘!” 이규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종수에게 공을 보냈다. 공을 잡은 종수가 사전에 얘기를 나눴던 위치에서 바닥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아!
규가 또다시 탄성을 내질렀다. 림이 거칠게 흔들렸다. 아직은 다듬어지지 않았지만, 이규가 그린 청사진대로 점수가 올라갔다.
“나이스 슛!”
저건 앞으로도 천편일률적인 모습으로 들어갈 것이다. 각고의 끝에도 들어간다는 행위 자체가 최종수의 정체성이 되리라.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종수의 등 뒤로 경기가 종료까지 3초 전. 버저가 울리는 순간에 기적 같은 2점을 넣어 팀을 승리로 이끈 조던이 모습이 겹쳐서 보이는 것이다. 몸이 떨렸다. 비스듬히 입술을 추켜세운 최종수가 이규를 돌아봤다.
“고작 2점 가지고….”
그러면서도 종수는 얼떨떨한지 자신의 손바닥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세게 쥐었다가 펼쳤다. 이렇게 연습해본 건 처음이야. 종수가 중얼거렸다. 비실비실 나오는 미소를 참기 힘든지 입술을 잔뜩 깨물고 낮은 웃음소리를 낸다. 이규 역시 종수의 어깨를 주먹으로 툭 친다. 거봐 된다니까.
“아직 연습 더 할 거지?”
“……또 이상한 거 시킬 거야?”
“뭐? 아니, 아니. 하하. 이번에는 그냥 일대일 하자.”
이규가 빠르게 손사래를 쳤다. 같이 하고 싶은 게 얼마나 많은데 벌써 이렇게 경계하면 안 되지. 대답을 듣자마자 종수가 움츠렸던 몸을 피고 한 손으로 가볍게 공을 넘겨주었다. 이규가 부드럽게 넘어오는 공을 안아 들었다. “너 이번에는 자유투 연습 좀 해. 내가 봐줄게.” 백보드를 맞춘다고 하면 쉽거든. 야 듣고 있어? 종수가 말했다.
코치님이나 선배들이 없는 자리에서 팔이 후들거릴 만큼 실컷 연습하고 나니 벌써 해가 질 시간이 되었다. 해가 길어지기 시작하는 때이므로 보이는 것보다 시간이 한참 지나있을 터였다. 이규는 천장 부근에 달린 디지털시계를 보는 대신 라인 바깥과 안쪽을 왔다 갔다 하면서 공을 림 중앙으로 던져대는 종수 너머를 바라본다. 노을빛이 창문 밖에서 분 단위로 너울거린다. 조도가 낮은 주광등은 낮보다 밤에 빛을 발했다. 이 체육관은 분명 절대 야간 연습을 염두하고 설계되지는 않았을 터인데, 낮의 체육관보다 고요하고 서늘한 지금이 훨씬 마음에 들었다.
“뭘 봐?”
“계속 농구 할 것 같아서.”
종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러니까 다른 데에는 신경 안 팔리고.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이규가 소리 없이 벙긋거린다. 종수가 크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영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뚱하게 팔짱 낀 애한테 손을 빌려주고 싶다.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길운’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해도, 설령 그것을 요청하지 않을 것이라고 해도……. 이상한 일이다. 큰 이유 없이 아주 가벼운 말로도 괜찮다고 하면 순풍처럼 속삭이고 싶어졌다. 혼자서 날 수 있는 애 옆에서 같이 뛰어 볼을 던지기만 해도 아주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런 환상이 강렬한 통증을 동반한 채로 가슴을 찌르르 울린다. 막으려고 해도 좀처럼 막을 수 없는 현상의 등장. 예측을 불허해서 오히려 도전할 가치가 있는 목표.
경쟁자. 동료. 팀.
조던이 있는 거다. 나만의 조던이. 그가 잔뜩 빠지게 될 공놀이를 여기서 마주칠 것이라는 예감이 전신을 휘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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