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쫑] 단문
바보
최종수가 하는 말 중에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단어를 하나만 꼽으라면 단연 ‘바보’일 것이다. 시즌 중에는 함께 시간을 보낼 시간이 별로 없어서 체감이 안 되는데, 비시즌만 되면 입에 달고 사는 걸 보니 예전부터 그랬던 모양이다. (혹시나 싶어 정수인에게 슬쩍 물었을 때 그는 웃으며 종수는 우리 앞에선 말을 가려서 하는 편이라고 답해 주었다. 내 앞에선 안 가린다니 싸가지 없는 새끼.)
“너 바보야? 그걸 왜 그렇게 구워? 탄 고기 먹고 싶냐?”
이 말은 고기를 구울 때 들었다. 이틀 전에 마트에서 할인 중인 목살스테이크를 샀는데 먼저 일어나기도 했고, 생각난 김에 먹어치우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대충 굽는데 느닷없이 나타나 던진 첫 마디였다. 성준수는 무어라 대꾸하기도 전에 환풍기를 틀더니 집게를 가져가는 까치집 남자를 쳐다보았다. 방금 일어나서 엉성한 차림인 것도 모자라 졸려서 눈도 제대로 안 떴으면서 그 좁게 뜬 눈으로 쳐다보는 게 제가 아니라 고기라는 사실이 웃겨서 웃었다가 무릎을 걷어차였다. 하나도 아프지 않았지만 아픈 척을 하자 여전히 좁게 뜬 눈으로 저를 흘기는 게 귀여워서 넘어갔다. 참고로 자다 깬 최종수가 구운 목살스테이크는 존나 맛있었다.
또 뭐가 있더라.
어제는 나가기 전에 스마트폰을 챙기는 걸 잊어서 현관까지 갔다가 거실에 돌아갔더니 신발을 신고 나가는 내내 바보냐는 말을 들었다. 거기서 끝났으면 늘 듣는 말이라 그냥 넘겼을 텐데 ‘내가 꼭 챙겨 줘야겠어?’ 라는 불평을 빙자한 애정 표현을 남발하는 바람에 문고리를 잡은 채로 키스했다. 어. 네가 챙겨. 침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을 핥으며 속삭이자 최종수가 세상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그냥 똑바로 하면 안 돼? 왜 바보인 채로 살려고 해? 네가 챙겨 준다는데 똑바로 해 버리면 니 일이 없어지잖아. 뭔 소리야? 내가 제대로 해서 네가 챙겨 줄 일이 없어지면 너 서운해 할 거잖아. ……아닌데?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너 지금 입 댓발 나온 거 모르냐? 안 나왔거든? 나왔는데. 안 나왔다니까? 무시하면 이제 뒤꿈치를 걷어차는데 그게 또 귀여워서 문제다. 이제 최종수가 숨만 쉬어도 귀엽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니 세월이 무섭긴 존나 무섭다.
이런 경우를 바로 떠올리기 힘들 만큼 자주 듣는 말이라 언제 그랬는지를 따지는 것 자체가 무의미했다. 당장 메신저에서 ‘바보’라고 검색하면 나오는 숫자만 70개가 넘는데 뭘 잘못해서 듣는 말이 아니라 숫자도 큰 의미가 없었다. 그냥 ‘바보’를 입에 달고 살기 때문이다. 처음 들었을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유치한 말만 쓴다고 생각은 하지만 새삼스레 다시 생각해 보면 그냥 그 말 자체가 최종수의 정체성 같은 거였다. 지가 바보 같은 행동을 하는 건 들은 체도 안 하면서 남이 뭔가 조금만 잘못하면 ‘바보’를 남발하는데 그 얼굴이 꽤 만족스러워 보여서 뭐라고 하진 않았다. 사람을 바보라고 놀리는 게 그렇게 재미있나 싶다가도 대상이 저라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면 결국 ‘바보’도 애정 표현의 일부라는 뜻이 된다.
무슨 사람이 이렇게 유치하고 귀엽지?
야
바보
오후 09:27 언제 오냐
내가 왜 바보야
니가 바보지
가는 중
왜? 오후 09:28
보고 싶어서
오후 09:28 근데 내가 왜 바보냐
넌 원래 바보야
바보
멍청이
바보
거의 다 왔어 오후 09:35
당장 이 대화에서도 ‘바보’는 일곱 번 쓰였다. 이러니 세는 게 의미가 없을 수밖에. 나이가 들면 별게 더 귀여워 보인다더니 이젠 애인이 하는 모든 말이 귀엽다. 와, 성준수 미쳤네.
스마트폰을 끄고 일어나는 와중에 밖에서 도어락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거의 다 왔다더니 주차장이었나 보다. 일부러 숨기에는 이미 메신저로 놀렸는데 못 알아챈 게 웃기고 귀여워서 관뒀다.
문이 열리는 것과 제가 현관 앞에 도착하는 게 비슷했다. 볼이 벌게진 최종수가 찬공기를 머금은 채 팔을 벌린다. 추워질 걸 알면서도 안기는 게 둘 사이의 규칙이었으므로 얌전히 안겨 주자 최종수가 제 정수리 위에 얼굴을 박고 크게 숨을 쉬었다. 성준수 머리 냄새 나. 머리니까 당연하지, 새끼야. 밥은. 먹어야 돼. 고기 남았어? 어. 아직 있어. 나 씻을 테니까 고기 좀 구……. 아니야. 먹고 씻을래. 뭐지? 내가 고기도 못 구울 놈처럼 보이냐? 어. 성준수 고기 존나 못 구워. 바보 같아. 고기 좀 못 굽는다고 내가 바보 소릴 들어야 되냐? 어. 바보. 성준수 바보. 여전히 유치한 언변과 달리 저를 떼어놓을 마음은 없어 보인다. 등 뒤에 둘렀던 손을 가볍게 두드리자 아쉬운 얼굴로 떨어졌다. 야. 어. 내가 여기서 키스하면 고기 말고 널 먹겠지? 밥 먹고 또 먹으면? 시간이 없지. 애정이 식었어. 뭔 소리야? 그럴 땐 만든다고 해야지. 바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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