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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죽어!

준수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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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아침 불길한 꿈을 꾸고 일어난 성준수는 자신이 준수상호 연성의 회귀자 주인공으로 변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물론 구라다.

꿈도 꾸지 않고 딥슬립한 성준수는 지상고 도보 13분 거리 21평 빌라의 이불 속에서 눈을 떴다. 그와 동시에 아주 중요하고 유의미하며, 어쩌면 앞으로 10년간 막대한 영향을 끼칠 고민이 머릿속을 잠식했다.

준향대를 가느냐. 수명대를 가느냐.

정확히 하루 전 오후 2시 14분, 원서를 낸 6개 학교 중 세 개의 합격 통보를 받은 뒤로 성준수는 온통 저 생각뿐이었다. 고등학교 3년 중 2년을 아예 날린 것치곤 타율이 나쁘지 않았다. 아무래도 쌍용기 장도전과 원중전 때의 활약이 눈에 띄었던 모양이지. 진재유도 같은 날 합격 소식을 받아, 어제는 완전히 축제 분위기였다.

이제는 선택만 남았다. 안전빵으로 넣었던 2부 대학을 쿨하게 날린 성준수는 남은 둘을 저울에 올렸다. 둘 다 매력적인 선택지라 고민이 깊었다. 수명대는 작년 프농 드래프트 지명률이 꽤 높고, 준향대는 코치진이 좋고. 이현성이 없는 머리를 쥐어뜯어 가며 함께 고민해주었다지만, 그는 결국 방금 입시에 뛰어든 햇병아리 감독일 뿐. 성준수는 이 선택이 오직 자신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즉 대학에 합격해도 대가리 굴리느라 신경이 예민한 건 마찬가지였다는 뜻이다.

기상호와 편의점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도 고민은 계속되었다. 성준수의 눈치를 보며 메로나를 쪽쪽 빨던 기상호가 물었다.

"햄, 수명대랑 준향대 중에 고르고 계신 거예요?"

"어."

"영중햄이 수명대 붙으면 오지 말라던데요. 그 햄 수명대 넣었대요."

"너 걔 번호 있냐? 그 새끼한테 나 원서 넣은 곳 말했어?"

"당근 안 말했죠! 제가 왜 굳이 욕 먹을 짓을… 그 햄이, 나중에 필드에서 만나게 될지도 모르는데 좋게좋게 말하라길래 걍 안 친해서 못 물어보겠다 했어요. 잘했죠?"

반짝이 효과 떡칠한 눈빛이 성준수를 향한다. 성의 없는 칭찬이라도 던져줘야 할 것 같은 표정. 성준수는 가볍게 먹금했다. 너 전영중이랑 연락하지 마라. 걔가 뭐 남의 후배 챙길 성격도 아니고 좋을 거 하나도 없다. 넹... 근데 영중햄이 먼저 연락하면 어케요? 씹어. 전화하면요? 꺼. 근데 그러다 제가 왕따가 되면...?

"뒤져."

"힝…."

“….”

"입니다."

잔뜩 울상 지은 기상호를 힐끗 쳐다본 성준수가 숨죽여 웃었다.

성준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익숙한 학교를 등지고 홀로 부산으로 향했을 때도, 실적 하나 없이 원서 접수일이 코앞으로 다가왔을 때도, 심지어 우승을 목전에 뒀던 장도전 때도. 마지막 슛을 위해 기상호에게 공을 넘길 때마저도, 그는 아무에게도 기도하지 않았다. 노력으로 수많은 한계를 극복한 농구선수를 앞길 삼았으므로 남의 힘을 빌어 이룰 수 있는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가끔 기적처럼 개노답 삼형제가 쓸모 있어졌으면 했던 적은 있다. 못하면 연습이라도 성실하게 하든가, 그것도 못하면 씨발 말을 듣는 척이라도 하든가. 하지만 눈앞에 있는 이 새끼만 봐도 어떤가. 후보 선수 꼴랑 하나니 몸 아끼래도 숙소 바로 앞 동네 농구장에서 보란 듯이 처뛰어다니질 않나, 씹덕 같은 소리 작작하래도 그때만 찔끔하고는 경기장에서 각성상태 진심모드 100% 달밤의 피에 미친 폭주 기-상-호 이 지랄.

미리 변명해본다. 성준수는 집중력이 좋은 편이다. 한 번 집중하면 주변이 블러 처리되고 자동으로 청각이 노캔을 시작한다. 즉 잡담을 마치고 다시 진학 고민을 시작한 성준수는 알아챌 수도 없었고, 알아채도 뭘 할 수가 없었다는 거다. 옆 공사판에서 떨어진 벽돌이 정확히 기상호의 머리를 향해 떨어져도.

위화감을 인식했을 때, 귀 바로 옆에서 퍽 소리가 났고, 성준수는 본능적으로 멈추어 섰다.

고개를 돌린다. 기상호가 있어야 할 왼쪽을 바라본다. 아무도 없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기상호는 나와 키가 똑같은데. 무릎을 편 기상호를 내려다 본 적이 없는데. 이상한 일이다.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내려본다. 그곳에 기상호가 있었다. 길바닥이 지 집구석이라도 되는 것처럼 채신머리 없이 누워 있었다.

"야."

"……."

"기상호. 야."

"……."

"귓구멍 처막혔냐? 기상호. 대답해봐."

당황한 입에서 격한 말이 쏟아졌다. 싸가지 없이 선배 말 씹는다고 욕해도 기상호는 묵묵부답이다. 기상호가 이렇게 조용한 애가 아닌데. 욕 먹고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애가 아닌데. 눈물 질질 짜고, 징징대고, 귀를 막고 싶을 만큼 시끄럽게 굴어야 하는데. 기상호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

곧 기상호의 머리에서 시뻘건 액체가 흘러나와 아스팔트 도로를 적셨다. 훅 올라온 비릿한 피 냄새가 성준수에게까지 닿는다. 산산조각난 벽돌 파편. 어느새 고인 피 웅덩이. 미동조차 않는 기상호의 눈꺼풀. 사고가 둔해진다. 감각이 이해한 것을 뇌가 거부한다. 쓰러진 게 뭐? 피가 나는데 어쩌라고? 왜 대답을 안 하는데?

멍한 귀밑에서 제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들이마신 공기가 좁은 기도에서 막히는 감각이 불쾌했다. 속이 울렁거리는 와중에 모여든 사람들이 저마다 끔찍한 걸 봤다는 얼굴로 한 마디씩 얹었는데, 괜찮냐고 묻는 사람이 없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누가 봐도 괜찮지 않았다. 괜찮지 않았다. 괜찮지 않았다.

비로소 정신을 차린 성준수가 무릎을 꿇고 기상호를 품에 들어올렸다. 무서웠다. 붙들린 몸이 물처럼 늘어져서 무서웠고 의식을 잃은 인간의 무게감이 너무 선명해서 무서웠다. 덜컥 겁을 먹은 성준수가 가슴에 귀를 대봤다. 희미하게 느껴지던 심장 박동이 점차 느려졌다. 이내 완전히 사라졌다.

그렇게 기상호는 죽었다.

네가 죽어!

어느 날 아침 불길한 꿈을 꾸고 일어난 성준수는 단번에 상체를 일으켰다. 주위를 둘러본다. 잘하면 아이보리라고 우길 수 있는 누런 색 벽지, 다시 보기 기능도 없는 고물 TV, 먼지 쌓인 셋톱박스와 와이파이 공유기. 지겨울 정도로 익숙한 풍경. 거꾸로 봐도 지상고 도보 13분 거리 21평 꼭대기 빌라였다.

이 평화로운 공간에서 평화롭지 못한 것은 성준수뿐이었다. 숨이 가쁘다. 심장이 가파르게 뛴다. 분명 방금 전까지 도로 위에 있었는데. 엄청 시끄러웠는데. 기상호를 들고 있었는데. 기상호가 죽었는데.

손을 내려다본다. 아무것도 없었다. 축 늘어진 기상호의 어깨도, 팔뚝을 간질이던 갈색 머리카락도, 손바닥에 고이던 핏물도….

멍하니 텅 빈 손을 내려다보던 성준수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 화장실에서 나와 아침 인사를 건넸다. 햄 일어나셨어요? 살아있는 기상호. 그가 수건을 목에 매고 묻지도 않은 부원들의 위치를 브리핑하기 시작했다. 재유햄이랑 다은햄은 잠깐 본가 간다 했고요, 감독님은 코치님이랑 뭐 할 말 있다 하셨고 태성햄은 피씨방 간다고….

성준수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대신 기상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움직임에 따라 흔들리는 갈색 머리, 적당한 간격을 두고 깜빡이는 눈꺼풀, 혈기 도는 입술과 호흡할 때마다 부풀고 꺼지는 흉부.

기상호가 살아있다. 자신은 방금 이불 속에서 눈을 떴다.

그러므로 그 상황은 꿈이다.

하아. 성준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죽어도 존나 황당하게 죽는다 했다. 아니 씨발 대학 합격까지 해놓고 웬 악몽. 차라리 지상고 유니폼 입고 버저비터 넣는 꿈이 낫지. 축축한 이마를 손등으로 훔치며 멍한 눈을 꿈뻑이는데, 문득 기상호의 옷차림이 눈에 들어왔다. 흰 맨투맨에 검은 트레이닝 바지. 시비 걸 것 없는 평범한 백수 패션이었지만 어쩐지 너무 익숙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그래. 방금 꾼 꿈에서 꼭 저런 옷을 입고 있었다.

플래시 터지듯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단정하게 감긴 눈. 피에 젖어 달라붙은 머리카락. 흩어진 벽돌 조각과 느껴지지 않던 맥박.

꿈을 상기하자 절로 신경이 날카로워졌는지, 성준수는 저도 모르게 기상호를 노려보았다. 잔뜩 쫄아붙은 기상호가 쭈뼛거리며 물었다. 하... 할 말? 이 있으신지요? 야.

"너 나가냐?"

"넵. 햄도 같이 가실래요?"

"어디 가는데."

"요앞에 지에스요."

왜 이런 거까지 똑같은 거지. 꿈에서도 그랬다. 기상호가 편의점에 갔다 온다며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고, 성준수는 잠을 깰 겸 동행했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퍽. 씨발.

"너 안 나가면 안 되냐?"

"왜요? 저 아이스크림만 사고 바로 올 거예요! 사고 안 칠 건데…."

"아니 씨발 좀, 대꾸하지 말고 한 번 네 하는 게 어려워?"

"이유도 안 알려주시니까 글쵸…."

아씨. 성준수가 머리를 거칠게 헤집었다. 뭐라고 해? 니가 방금 꿈에 나왔는데 재수 없게 뒤졌다고? 근데 지금 상황이 꿈이랑 똑같아서 마음에 걸린다고? 이게 뭔 개소리야. 스스로 생각해도 이유가 구차했다. 입이 열리지 않자 기상호가 개빡치게 침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저는유엔이발표한세계인권선언이보증한세계시민으로서자유로운이동권이보장되며이건상하관계에의한명백한꼰대질…. 악! 햄 리모컨은 던지는 게 아닌데요! 가, 씨발 당장 가. 안 가면 뒤진다.

성질 들쑤셔 놓고 뒷일이 무섭나보다. 아님 평소 휴일엔 분신사바를 하든 줄 없이 번지점프를 하든 상관하지 않던 성준수가 안 하던 짓 하는 게 마음에 걸리든가. 찜찜한 얼굴로 슬리퍼를 신은 기상호가 문이 닫히기 직전 머리만 쏙 내밀고 물었다. 햄 꺼도 사올까요?! 후배의 따뜻한 마음씨에 성준수가 다정하게 대답했다.

"꺼져."

"넵."

잠깐 현관을 노려본 성준수는 식탁 겸 책상을 펴고 노트북을 올렸다. 이럴 때가 아니다. 뒤숭숭한 꿈자리, 언제 뒤질지 모르는 기상호보다도 중요한 것이 있으니까. 운석이 날아오고, 상온 상압 초전도체가 개발되며, 부산에 눈이 내리고, 대통령이 탄핵당해도 변하지 않는 것. 바로 대학 등록 마감 날짜다. 제한된 시간 내에 최선의 선택을 하기 위해선 시간 활용이 가장 중요했다. 성준수는 커뮤니티와 대학 홈페이지를 드나들며 수명대와 준향대를 비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도통 집중이 되지 않았다. 모든 신경이 바깥으로 몰린 탓이었다. 이유 모를 조급함이 그의 등을 찔렀다. 기실 그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둔탁한 소리가 들릴까 봐. 검붉은 피가 흐를까 봐. 피비린내가 피어오를까 봐. 아무도 괜찮냐고 묻지 않을까 봐.

결국 성준수는 노트북을 닫고 창문을 열었다. 흰 구름이 박힌 푸른 하늘이 창문에서 쏟아졌다. 다행이다. 이런 기분에 날씨까지 더러웠으면 참 좆같고 좋을 뻔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 뭉근히 목 근육을 풀고 스트레칭을 했다.

이제야 좀 정신이 드는 것 같다. 아까까지 느꼈던 불안함이 전부 우습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잠이 덜 깼던 모양이지. 고작 꿈이 뭐라고. 거기서 기상호가 뒤진 게 뭐 어쨌다고? 그럼 그거 갖다가 애를 못 나가게 막는다고? 과보호하냐? 187cm 남고생을? 생각만 해도 역겹다.

이 정도면 충분히 객관성을 되찾았다. 이제 다시 제 인생에 중대한 갈림길이 될 진학 고민에 돌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성준수는 한결 개운해진 기분으로 남은 잠기운을 털어내기 위해 눈두덩이를 꾹꾹 눌렀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땐 기상호가 차에 치여 죽어 있었다.

성준수는 이불 속에서 눈을 떴다. 가만히 누워 눈만 깜빡거리고 있자 세 번째 아침 인사가 귀에 꽂혔다. 익숙한 목소리. 익숙한 2003년 돌잔치 수건. 익숙한 모나미 패션. 곱게 봐줄래야 볼 수가 없다. 이불을 걷어찬 성준수가 말했다. 야.

"너 오늘 나가면 뒤진다."

"네?"

"한 발자국이라도 나가기만 해. 씨발 여기서 살인 났다고 집값 떨어지게 해줄 테니까."

생각해보니 과보호도 한 번쯤 할 만한 것 같다. 모든 경험은 자산이라는데 이런 경험도 어딘가 쓸모가 있겠지. 살의를 담은 눈깔로 꼬나보자, 기상호가 들고 있던 지갑을 툭 떨어뜨렸다. 웬만하면 웃어넘기겠는데 이 햄은…. 할 것 같다. 진짜 내를 죽일 수 있을 것 같다고.

평소라면 군말 없이 구석으로 짜졌을 것이다. 하지만 기상호는 어제 합격 발표를 받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얼굴을 했던 성준수를 기억하고 있었다. 아무리 사람 성격이 안 좋아도 하루를 안 갈 수가 있나? 기상호가 용기를 내보았다. 저 어제부터 메로나 먹고 싶어서 꿈에도 나왔는디요…. 잊어. 메…메멥.메.메로나..흑... 하. 이런 씨바꺼.

"내가 사 올게. 됐냐?"

"헐. 진짜요? 햄이 왜요?"

"이건 뭐 사와준대도..."

대충 눈곱만 떼고 패딩을 껴입은 성준수가 망설임 없이 집을 나섰다. 뭔가 이해할 수 없는, 아주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건 알겠지만. 진상 파악보다도 기상호를 막는 게 먼저였다. 일단 나가지만 못하게 하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왼손에 메로나 하나 달랑 쥐고 숙소로 돌아가던 성준수는 주택가에서 피어오르는 시꺼먼 연기를 발견했다. 동시에 스며드는 불길한 직감. 할 일이 사라져 심심해진 기상호가 공태성이 해둔 찌개를 끓이려고 주방에 갔다가, 기묘한 우주의 기운으로 가스레인지가 폭발하여... 씨발. 육두문자를 뱉을 시간도 없었다. 성준수는 최대한의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6층 건물을 말벌 아저씨처럼 뛰어 올라가 도어락을 열기 직전.

성준수는 눈을 떴다. 자신을 덮은 포근한 이불이 느껴졌다.

이쯤 되면 알 수밖에 없다. 성준수는 기상호가 죽는 꿈을 반복해 꾸고 있다. 이것만 해도 좆같은데, 더 환장할 지점은 꿈을 연속적으로 꾸는 것이 아니라 액자식 구조로 꾸고 있다는 것이다. 기상호가 죽으면 성준수는 꿈에서 깨어난다. 성준수가 깨어나면 기상호는 죽는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발생할 리 없는 현상이다. 현실적으로 생각했을 때, 이것은 단순히 길고 지루하며 끔찍한 악몽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기상호가 불타 죽은 후에도 빨래를 걷다가 옥상에서 발을 헛디뎌 죽고, 창밖에서 날아든 새가 박치기한 충격으로 죽고, 차 태워 보내니 교통사고로 죽고, 경찰서에 데려가니 간판이 머리 위로 떨어져 죽으니 이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웃고 지나갈 한낱 꿈 따위가 아니다.

위기 상황에서 생각은 중요한 무기가 된다. 성준수는 지금까지 있었던, 다윈상 유력 후보 같은 일을 줄줄이 떠올려 관찰해보았다. 또한, 왜 이런 좆같은 일에 말려들었는지 살펴보기 위해 스스로를 성찰했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끝에 드디어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내가 정신병에 걸렸구나. 난 정신병자구나! 그간 머릿속에서 찢어 죽인 시체로 바다를 메우고 산을 쌓았는데 왜 안 걸리나 했다.

자가 진단을 마친 그가 최소한의 시간을 마련하기 위해 집안 모든 문을 봉쇄했다. 기상호에게 그놈의 메로나와 점심밥을 직접 해다 바쳤고, 불시에 귀가했는데 너 없으면 바다 아래에 담가버린다 신신당부까지 했다. 택시를 잡을 때까지만 해도 기분이 괜찮았다. 이번에야말로 뭔가 해결될 것 같았다. 그러나 희망정신병원 건물 1층 유리문을 미는 순간.

성준수는 강제로 귀가했다. 기상호에게 해저 기지 구경 시켜줄 수고를 덜어 다행이었다.

성준수는 미신을 믿지 않는다. 특별한 이유가 있다기보단 믿어야 할 이유를 못 찾았다. 가위눌림은 단순 수면 장애이고, 심령 현상은 심리적인 요인에 의한 착각이며, 신빨 좋다는 무당이나 점술가는 감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저 좋으라고 농구부에서 제사 지낼 때도 뒤에서 짝다리 짚고 하품이나 하는 인간이었으니, 이런 방해가 있다고 순순히 아 이건 정신병이 아니라 내가 신비롭고 미스터리한 현상에 휘말려버린 거구나 정신병원에 가서 내 정신 상태를 확인하고 약을 받으려는 건설적인 사고방식 따윈 버려야겠다! 고 생각할 리 없었다.

하지만 정신병원에 가려고 몇 번을 시도해도 돌아오는 것은 도르마무 사태뿐. 약이 바짝 오른 성준수는 아예 기상호를 데리고 나왔다. 택시를 타면 반드시 교통사고가 났으니 걸어가야 했다. 그런데 이래도 문제가 생겼다.

밥도 못 먹고 나와서 배고프다고 징징대는 기상호를 카페에 데려갔더니, 주문도 하기 전에 조명이 머리 위로 떨어져 죽었다. 나대지 말고 앉아있으라고 쫓아내자 지나가던 손님이 실수로 유리컵을 처박아 죽었고, 어두침침하고 사람이 오가지도 않는 구석자리에 처박았을 땐 차량이 냅다 카페로 돌진해 기상호를 들이박았다. 1톤짜리 쇳덩이 앞에 강화유리는 너무나도 연약한 존재였다. 물론, 다른 카페나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그냥 굶기고 바로 병원에 데려가자 접수 중에 기상호가 악!!!!! 비명을 질렀다. 성준수가 허둥지둥 그를 살폈다. 야, 왜 그래?

‼️‼️ 갑운  ‼️‼️ 

성준수는 이불 속에서 눈을 떴다. 개씨발!!!!!!!!!!!!!!!! 우렁찬 사자후에 기상호는 반쯤 열었던 화장실 문을 다시 닫았다.

아무도 안 물어봤지만, 성준수에겐 창창한 미래 계획이 있다. 무려 초등학교 3학년 때 세운 건데, 그 내용을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 중학생 때 농구

  • 고등학생 때 농구

  • 대학 가서 농구

  • 프로 돼서 농구

  • 은퇴하고 농구

  • 임종 직전 농구

기상호처럼 씹덕 대사 중얼거리는 사람은 웃기기라도 하지, 경기 중에 본인 조지겠다고 눈을 시뻘겋게 뜬 소꿉친구 얼굴에 대고 티맥 타임 해설 읊는 건 진짜 이상성욕이 의심될 정도의 농친놈이다. 다 늙어 벽에 똥칠할 때까지 공을 던질 완벽한 미래를 이딴 일에 놓아줄 수는 없었다. 정신병원 가려다 정신병 걸리게 생긴 성준수는 어쩔 수 없이 병원행을 포기했다.

모든 문제는 발생에서 시작한다. 그러므로 처음을 되짚어보는 습관은 중요하다. 성준수는 최초의 죽음을 떠올렸다. 벽돌에 머리를 맞고 죽었던 기상호를 떠올렸다. 딱 체온만큼 따뜻했던 피를 떠올렸다. 현실을 도피하고 싶을 만큼 끔찍했던 시야를, 궁금해한 적 없던 시체의 무게를, 살아 움직이는 기상호를 확인하고 온몸에 퍼지던 안도감을 떠올렸다.

기상호는 분명 죽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살아있다. 비록 죽음을 반복하지만, 그 찰나와도 같은 시간이 지나면 그는 다시 숨을 쉰다.

부활이라기에도, 또 그것이 아니라기에도 무리가 있었다. 이건 대체 뭘까. 기대는 별로 없지만, 성준수는 혹시 자신과 비슷한 일을 겪은 사람이 있는지 찾아보기로 했다. 시간 확보를 위해 기상호가 화장실에서 나오기 전에 문을 막고, 노트북을 가져와 검색창에 타자를 쳤다.

시간이 반복되는 현상

시간이 반복되는

시간이 반

시간

시발.

예상은 했지만 쓸모 있는 게시물이 거의 없었다. 가장 상위에 뜬 주소는 '엣지 오브 투모로우'라는 영화에 관련된 기사였는데, 영화 속 주인공이 무한히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전투 경험치를 쌓아 영웅이 된다고 했다. 이 시간이 지나서 내일이 되면, 성준수는 영웅이 되긴커녕 정신과 상담을 받으리란 점만 빼면 상황이 흡사했다.

기사에서 나온 단어, 타임 루프를 검색하자 나무위키 '타임루프물' 항목이 보였다. 방금 본 영화와 마찬가지로 주인공이 특정 시간대에 갇혀 발생하는 사건이 주 내용인 애니메이션이나 영화의 설명이 이어졌다. 도쿄 리벤저스니, 극장판 프리큐어 미라클 리프 모두와의 신기한 하루니, 씹덕 세례에 미간을 찌푸린 성준수가 화장실을 막은 의자를 치우고 예고 없이 문을 열었다. 인터넷 검색해봤자 나오는 게 이딴 거라면, 성준수 기준 심각한 씹덕인 기상호에게 직접 묻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좆된 건 기상호도 마찬가지인데 저 새낀 아무것도 모르고 메로나 처먹는 생각만 하는 게 억울하다는 점도 한몫했다.

새로운 것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하지만 첫 도전은 보기 좋게 실패했다. 상호(not 기) 동의 없이 걍 못 나가는 방에 갇혔다는 것을 알고 문에 기대어 눈물 젖은 쇼츠를 보던 기상호가, 그대로 미끄러져 문지방에 머리를 부딪치고 사망했기 때문이다.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은, 전혀 낯설지 않은 천장이었다. 험한 것과 거리가 먼 곱상한 얼굴로 성준수가 생각했다. 진짜 씨발 화를 참기 존나 힘들게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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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구부의 남자아이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을까?

농구와 유니폼, 그리고 온갖 잡다한 것들.

여기에 하나를 더할 수 있다면, 그건 바로바로바로바로

언제든쌍욕을박을수있는연상남자의기분을살피는눈치...

기상호는 생각했다. 준수햄이 이상하다. 성준수는 원래도 남에게 관심이 없었지만, 합발이 난 뒤로 고민거리가 생겼으니 더더욱 두 귀를 막고 살 줄 알았는데. 느지막히 기상한 성준수는 냅다 외출 금지 명령을 때렸다. 심지어 이유를 물어보기도 전에 집을 박차고 나가 메로나를 입에 물려줘서(먹고 싶어서 꿈에도 나온 거 어떻게 알았냐고 물으니, 잠꼬대를 귀에 대고 하니까 그렇지 씨발아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반박도 못하게 했다. 그걸로도 모자라 무려, 그 성준수가 직접 점심상을 차려주는 은혜까지 베풀었다.

딱히 바란 적 없는 호강을 누리게 된 기상호는 마음이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순식간에 그릇을 비운 성준수가 귀신처럼 목을 꺾어 먹는 모습을 꼬나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선만으로 체할 것 같다. 이거 혹시 내 최후의 만찬인가? 다 먹으면 죽는 건가? 혹시 죽이는 이유를 물어보면... 이거 삼키기도 전에 죽게 될까?

가까스로 용기를 낸 기상호가 입을 열었다.

"저기, 준수햄. 죄송한데요."

"죄송하면 입 열지 마."

"네. 죄송해요."

사실 성준수가 삐딱하게 꼬나본 건 그렇게 살벌한 이유는 아니었다. 저번에 기상호가 반찬이 목에 걸려 죽었던 기억이 있어서, 여차하면 바로 하임리히법으로 대처하려고 지켜봤던 것뿐이다. 뭐 어쨌든.

성준수는 밥상을 다 치운 후에야 입을 열었다.

"너 타임 루프가 뭔지 아냐?"

"타임 루프요? 그, 계속 같은 시간 반복하는... 그거요 햄?"

"어. 그런 거 본 적 있으면 설명 좀 해 봐."

"뭔 설명을...?"

"니 보는 거에서 나오는 상황 있잖아. 왜 시작했다든지, 어떻게 반복이 끝났다든지. 해결 방법. 그런 거."

기상호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일단 성준수의 입에서 저런 단어가 나온다는 게 낯설었고, 그 주제로 질문까지 한다는 것도 신기했다. 근데 준수햄이 갑자기 왜 그런 걸...? 물론 씹덕 입장에서 모를 수 없는 용어다 보니, 듣자마자 작품 열댓 개가 머릿속을 스치긴 했다. 그러나 대답보다 호기심이 먼저였다.

"근데 이런 거 왜 물어보시는 거예요? 요새 회귀물 웹툰 같은 거... 보세요?"

날카로운 질문. 하지만 성준수에겐 호재였다. 이유를 물어보면 걍 닥치라고 할 셈이었는데, 기상호가 질문과 함께 좋은 핑곗거리를 던졌기 때문이다. 귀찮게 입 열 필요 없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헐. 준수 햄도 그런 거 보시는구나. 맨날 농구 영상만 보시는 줄...

"뭐 보셨는데요? 햄이 볼 만한 거면 전독시? 시달소? 쫌 마이너한 거면, 헉. 혹시..."

자신 있는 얘기가 나와서 그런가. 방금까지 눈치 보던 주제에 밥 먹을 때보다 안색이 밝다. 급기야 엿들을 사람도 없는데 입에 손바닥을 세로로 붙이는 재롱까지 떤다. 귀를 대보라기에 어울려줬더니, 기상호가 목소리를 깔고 속삭였다. 햄 혹시 리제로-Re:제로부터 시작하는 이세계 생활-을 보신 겁니까? 그게 뭔데 씹덕아...

"전 옛날 작품을 더 많이 봐서 회귀물은 잘 모르지만, 보통 그 세계관의 신이 의도하지 않나... 신이 아끼던 인간에게, 아니면 보상해야 하는 인간에게 그런 능력을 부여한다는 설정이 많죠. 성좌물을 아시나 모르겠는데, 이게 대충 모든 인간이 유튜버고 성좌는 시청자라고 생각하면 되거든요? 돈으로 초능력을 살 수 있는 세상에서, 성좌에게 회귀 특성을 받거나 돈을 모아서 쟁취하는 경우도 있고요."

"......"

"그런 거 아님 운빨. 진짜 아무 이유도 없는 것도 많아요. 그냥 우연히 그런 능력을 가졌고... 회귀 개이득 하고 그 설정 써먹는 경우도 많고요."

기상호가 열심히 얘기하긴 했는데 솔직히 영양가 있는 건 별로 없었다. 성준수는 대충 듣는 척하며 한 귀로 흘렸다.

기적을 믿지 않듯 신을 믿어본 적도 없다. 성준수는 언제나 하루하루 주어진 날을 살아가기 바빴고, 신에게 기도할 시간에 공 하나 더 던지는 걸 선택하는 인간이었으니까. 그리고 이 상황에서도 신을 찾을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를 굽어살피는 신이 있었다면, 1지망이었던 주익대학교에 합격시켜줬어야 했다. 이딴 개 같은 현상에 휘말리게 할 게 아니라.

그렇다고 우연히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하기도 싫었다. 이 개고생을 하는 이유가 단순히 재수가 없어서라니. 이미 한참 지난 일이지만, 이곳에 전학 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증발한 임승대가 떠올랐다. 저도 모르게 얼굴이 구겨졌다.

"야, 야. 시작하는 이유는 됐어. 다음."

"회귀가 끝나는 이유요? 음. 아무래도 주인공들은 다 목표가 있거든요? 게임 빙의물이면 엔딩을 본다든지, 세계 정복물이면 황제가 된다든지... 그런 목표를 이루면 완결이랑 함께 자동으로 없어지는 경우가 많은데요."

"그런 거 말고. 주인공 말고, 그 주변 인물이 죽어서 루프하는 건 없냐? 그런 거 어떻게 끝나는지 말해 봐."

"아이 햄, 첨부터 말씀하셨어야죠! 보통 그런 건 그 인물이랑 주인공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이 메인 갈등이라서 둘이 사건 해결하면 끝나요. 지금 생각나는 건... 그, 계속 죽는 애의 한을 풀어주는 거? 그런 거 있잖아요. 한 풀어달라고 저주 걸고..."

한? 성준수가 기상호의 얼굴을 응시했다. 매일 아침 거울을 보는 입장에서 기상호는 생기다 만 반죽같이 생겼다. 자세히 표현하자면 멍청하게 생겼고, 더 세밀하게 뜯어보면 맹하다. 무표정일 땐 무뚝뚝해 보이는데 표정을 조금만 풀어도 순식간에 흐리멍덩해졌다. 아무리 봐도 평생의 소원 같은 게 있어서 남에게 저주 걸 것처럼 보이진 않는데. 그래도 알아둬서 나쁠 것 없으니 일단 물어봤다. 넌 한 같은 거 있냐? 농구로 대학 가는 거요... 아님 부산에서 눈 구경하기. 성준수가 칼 같이 잘랐다. 다음.

"걔 안 죽게 하기... 솔직히 이 둘밖에 기억이 안 나는데요. 진심 회귀물은 많이 안 봐서."

"둘 다 아닌 것 같으면 어떡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저야 모르죠?"

속 편한 소리. 성준수가 뱉으려던 말을 겨우 삼켰다. 순간 욱한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개고생을 하고 있는데. 씨발 모르면 다냐?

한 번 불만이 생기니 쌓아왔던 것들이 둑 터지듯 쏟아졌다. 너 지금 내가 너 하나 살리겠다고 뭔 염병을 겪고 있는지 알고 그런 소리하냐? 뒤져도 왜 하필 나랑 있을 때 뒤지고 지랄이냐? 뒤지랬다고 바로 뒤지고 언제부터 말 그렇게 잘 들었어? 미리미리 뒤지면 좀 좋냐? 씨발 새끼야. 넌 내일이 안 오는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라 내가 내일 죽일 거니까.

문득 뜨거운 것이 차오르는 기분이 들어 성준수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힘들었다.

너무 힘들었다.

강남 노른자 땅에서 남자로 태어난 데다 미모가 빼어나기까지 하면 사람들은 인생이 존나 우습겠거니 지레짐작하곤 했지만, 그럴 리가. 탁월한 인성 덕에 면전에 대고 말하는 놈이 없어 기회가 없었을 뿐 반박거리는 차고 넘쳤다. 운동부로 입학한 중딩 시절부턴 공 던지기만 농구인 게 아니라 군대 뺨치는 좆군기까지 농구였다. 부유해봐야 원중중 운동부쯤 되면 형편 모자란 애가 없어 방패가 못 됐고, 시기 질투하기 쉬운 미모는 표적이 됐다.

얼차려와 인성 교육을 빙자한 구타가 일상이었던 때를 개같이 버텨 고등학생이 되니 이젠 떠나란다. 손에 농구공 하나 쥐고 싶었을 뿐인데 성준수는 연고지 없는 곳을 목적지 삼아 버스를 탔다. 심지어, 지금은 괜찮다지만 처음 지상고에서 맞닥뜨린 게 이 새끼들이었을 때... 아니, 말을 말자. 어쨌든 끝은 괜찮았으니까.

그런 와중에도 성준수는 약한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다. 단단한 심지는 그 자체로 무기고, 성준수는 무기를 버릴 만큼 어리석지 않으니까.

그러나 그는 고작해야 스무살이었다.

졸업한 뒤 오랜 시간이 지나 문자로 기상호의 장례식 날짜가 전해진대도 충분히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눈앞에서 죽음을 목도했다. 제법 오랫동안 함께 지낸 동료의 머리가 터지고, 몸이 쪼개지고, 피가 흐르고, 비명을 지르는 모습을 봤다. 몇 번이나, 기약도 없이.

언젠가 이 빌어먹을 현상이 끝나도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 같았다. 성준수는 정말로 보고 싶지 않았다. 이런 것은...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입을 꾹 다물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내뱉었다. 이를 천천히 반복했다. 터질 듯한 분노가 점차 가라앉고, 곧 거품 빠지듯 녹아내렸다. 어쨌든 간에 이것은 기상호의 책임이 아니다. 기상호는 아무것도 모른다. 탓해서는 안 된다.

반복되는 시간이 쌍용기 우승 후 둔해졌던 신경을 갉아먹고 있었다. 얼굴을 진정시킨 성준수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벌써 몇 번째 같은 하루를 겪고 있는 걸까. 몸이 가뿐할지언정 정신은 극도로 피로했다. 성준수가 미간 아래 콧대를 주물렀다.

숙소가 조용해졌다. 분위기를 보며 잠자코 있던 기상호가 이제 말해도 된다고 판단했는지 입을 열었다. 근데요 햄.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방금 물어보신 이거요, 혹시 제가 나가면 안 되는 이유랑 관련된 거예요?"

"... 뭐?"

"아까부터 계속 생각해봤는데 좀 이상해서요. 갑자기 나가지 말라고 한 것도 그렇고, 메로나 사주신 거나 밥 차려주신 것도. 준수 햄이 쫌생이란 게 아니라요. 햄 웹툰도 잘 안 보시잖아요. 솔직히 회귀물에 관심 있으면 전독시 같은 건 모를 수가 없는 건데 처음 들으신 눈치라..."

"......"

"준수 햄이 원래 잘 안 하시던 행동을 하루에 몰아서 하시니까, 혹시 이게 다 연결되어 있나~하는 호기심이... 뭔 의도는 없고요. 그냥 궁금해서... 여쭤봤습니다. 넵."

"......"

"... 저 닥칠까요?"

눈치 빠른 새끼.

성준수는 그동안 진재유나 이현성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하려고 했었는데(전부 씹혔다), 정작 눈앞에 있는 기상호에게는 털어놓을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 이유로는 1.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고 2.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고 3.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성준수가 보기에 기상호는 물론 오타쿠 새끼였지만, 그렇다고 대가리가 꽃밭인 놈은 아니었다. 오히려 판타지와 현실의 경계를 명확히 알고, 가끔은 현실적이다 못해 비관적이기까지 했다. 차라리 이현성에게 정신 병원 추천 받는 게 낫지, 기상호에게 같은 취급 받고 싶진 않아서 말할 생각이 없었는데. 미친 새끼. 경기 중에 상대편 싸인 읽어낼 때는 유용하기만 했는데 이건 좀 징그럽다.

하지만 성준수는 그렇게 생각한 것치고 기상호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정 말하고 싶지 않았다면 씨바꺼 남한테 관심 존나 많네 왜? 내일도 못 나가게 해줘? 니 때문에 공태성 김다은 다 숙소에 처박혀 있을래? 협박 몇 마디만 해도 해결되었을 텐데. 오히려 묻지도 않은 회귀 사실을 얘기해 기상호가 실눈을 뜨게 했다.

성준수는 외계인을 봤다든가, 신의 음성을 들었다든가 하는 믿지 못할 이야기를 굳이 남에게 떠벌리는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가 현실적인 사람일수록, 그리고 겪은 상황이 비현실적일수록 반드시 입을 열어야 한다. 누군가 이해하거나 공감해주지 않으면 자신조차 스스로를 믿지 못하고 미쳐버리기 때문이다.

기상호에게 말하기 전만 해도 몰랐다. 그러나 지금은 안다. 성준수는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었다. 이 현상을 설명하고 싶었다. 자신을 믿어주고, 구해주진 못하더라도, 이런 일이 생겼다는 것을 알아주길 바랐다.

"그니까 오늘이... 2월 4일이네. 2월 4일이 계속 반복되고 있다는 거죠? 그 시발점이 제 죽음이고?"

"어."

모든 이야기를 들은 기상호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곧 갈색빛 속눈썹이 움찔거리더니, 그 사이로 총기 어린 눈빛이 나타났다. 마침내 기상호가 말했다. 그럼 저 지쟈스예요? 개새끼야 니 내 말 안 들었지?

"아니아니아니 햄 그게 아니고... 사실 넵. 전 현실과 그쪽을 구분해요. 꿈꾸신 거예요?"

차라리 거짓말로 믿는다고 하면 모를까, 정직하게 대답하니 할 말이 없었다. 딱히 기상호에게 믿어달라 구걸하고 싶지도 않고. 그래씨발나는... 정신병자다. 성준수가 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기상호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근데 그게 현실이면 라노벨 같긴 하네요. 현실에선 평범한 에이스 스토퍼, 수비 스페셜리스트, 최종수와 박병찬을 막은 한국의 "진짜" 최종병기일 뿐인 내가 이세계에선 미남 회귀자의 회귀 발동 조건이라니...

"됐고, 그럼 그냥 라노... 라노벌? 그거라고 생각해 봐.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 같냐?"

"글쎄요. 뭔 마가 끼었나... 햄 혹시 상태창이라고 말하면 공중에 생기는 게 있나요? 제가 여러 번 죽으면 얻게 되는 스페셜 특성 같은 게 있으신 겁니까?"

기상호가 여러 번 죽으면 얻게 되는 스페셜 특성이라. 그딴 건 아무리 생각해도 없었다. 거대한 피로감과 PTSD만 제외하면.

어쩌고저쩌고 그뭔씹 안 궁금한 얘기를 늘어놓던 기상호가 갑자기 말을 멈췄다. 웬일인가 싶어 눈을 떴더니, 기상호는 뭔가 할 말이 있는데 주저하는 얼굴이었다. 설득할 것도 없이 채근하자마자 입을 연다. 근데요 햄.

"저 쫌 좋아? 하시나 보네요?"

"갑자기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씨발."

"아니, 그래도 계속 저를 살리려고 노력하신다는 게 쫌 감동이라서리..."

감동은 뭔 개 같은 놈의 감동이냐. 선택지가 없으니까 그런 거지. 인상을 굳히고 해명했지만 기상호의 묘한 눈빛은 사라지지 않았다. 야 그냥 꺼... 멈칫. 평소처럼 기상호를 눈앞에서 치우려던 성준수가 드물게 말을 골랐다. 꺼지라고 했다가 저승으로 꺼지면 상당히 곤란하다. ... 지지 말고 조용히 있어. 나대면 뒤... 혼나. 넵. 

그리고 1분 뒤 성준수는 이불 속에서 눈을 떴다. 유튜브를 보며 즐거운 배변 활동을 할 생각으로 화장실에 간 기상호가 슬리퍼를 신자마자 미끄러져 타일에 머리를 박고 죽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아침 불길한 꿈을 꾸고 일어난 성준수는 자신이 상황에 따라 범죄자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철물점에 다녀온 그의 손에 로프가 들려 있었다. 아아아악 준수햄이 미쳤다!!!!!!!!!!!!!!!!!!!!!! 닥쳐. 넌 이게 지구에 도움이 되는 길이야. 반항이 없지 않았지만, 힘과 기세와 권위로 기상호를 묶는 데 성공한 성준수가 이마를 짚었다. 진짜 개씹씹씹씹씹씹씹존나피곤하다...

이 정도로 피곤한 건 수상실적도 없고 팀에 애정도 없고 미래에 답도 없었던 4월에나 그랬던 것 같은데. 회귀고 나발이고 좀 쉬어야 했다. 마음 같아선 본가로 튀고 싶지만, 택시를 잡기도 전에 여기로 돌아오겠지. 차라리 제 옆에 딱 붙여두는 게 마음 편하다.

성준수는 로프가 절대로 풀리지 않게 몇 번이나 확인한 뒤 도로 이부자리에 들어갔다. 햄 저를 이렇게 십구금에로동인지처럼 묶어놓고 주무실 예정이세요? 진심으로? 이거 실환가? 저 화장실은 어떻게 가요? 참아. 못 참으면요? 닦아. 기상호가 작게 중얼거렸다. 준수 햄은 제정신이 아니다... 성준수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솔직히 이번엔 좀 방심했다. 현관문과 창문은 물론이고 가스까지 확인했다. 화장실도 못 가도록 기상호를 단단히 묶어뒀는데 목만 풀어둬서 목 졸려 죽을 일도 없었고, 장소 선정을 신중히 해 머리 위로 떨어질 전등도 없었다. 혹여 누군가 던진 돌에 창문이 깨지고 그 틈으로 다시 새가 박치기하러 온다고 해도, 창문이 깨진 시점에 성준수가 깨어날 테니 어떻게든 막을 수 있을 거다.

하지만 간만의 잠에서 깨어난 성준수는 또다시 기상호의 아침 인사를 들어야 했다. 여기서 잠깐 기상호가 죽은 이유를 알아보자. 본가에서 동생들에게 시달리다 오후 느지막하게 귀가한 김다은은 비현실적인 숙소의 모습을 발견했다. 노즐에 묶여 정신을 잃은 기상호(아니다. 그냥 졸고 있었다)와 이미 시체 상태인 성준수(아니다. 그냥 자고 있었다). 머리가 상식적인 결론을 도출한다. 숙소에 강도가 들었다...!!!

김다은은 벌벌 떨며 어머니가 챙겨주신 김치통을 내려놓았다. 문자로 112에 신고하고 주방에서 프라이팬 하나를 꺼내 비장하게 발을 디뎠다. 살금살금 소리 내지 않고 나아가고 있는데, 우연히, 어쩌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기상호 앞에서 노랑 장판 틈에 발을 걸려 넘어졌다. 덕분에 그의 손에 있던 프라이팬은 기상호의 머리를 강하게 내려치고 말았다. 개미친. 님아-!!

성준수가 간만에 평온한 얼굴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야 씨발 그냥 뒤져라 이 정도면.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슛 연습 백억 번을 하면 누구나 슛을 잘하게 된다. 하지만 개나 소나 슈터가 될 수 없는 이유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슛 연습 백 번을 해도, 나보다 재능 넘치는 사람이 똑같이 백 번을 하면 말짱 도루묵 신세다. 그렇기에 농구를 좋아하는 모두가 농구 선수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성준수는 다르다. 그는 이제 무한대의 시간을 손에 넣었다. 젊고 지치지 않는 몸으로 마음껏 공을 던질 수 있고, 잠시 슛 연습이 질리면 차분하게 대학을 고민하면 된다.

게다가 환경 보호 차원에서도 기상호의 죽음은 호재다. 대한민국 국민은 인당 연간 약 14톤의 탄소를 배출한다고 한다. 기상호가 80년 산다고 가정했을 때, 남은 수명이 64년이니 무려 896톤의 탄소 배출량을 절약하게 되는 것이다. 지구와 우리의 후손을 위해 걍 죽어라.

성준수는 기상호가 밖에 나가지만 못하도록 조치하고 체육관으로 향했다. 멍하니 공을 던진다. 그리하여 고민은 태초의 것으로 돌아온다. 준향대를 가느냐. 수명대를 가느냐. 금세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지금 수명대 주전 슈터가 누구더라. 적어도 2학년에는 스타팅 멤버로 뛰고 싶은데. 그런 의미에선 역시 준향대를 가는 쪽이 더...

"준수, 네가 웬일이냐? 오늘은 안 나올 줄 알았더니."

이거 봐, 대학 합격한 사람은 바로 다음 날부터 훈련하는데 이제 2학년 애들 노는 거 봐라. 너 없으면 이제 걔네 누가 기강 잡을지도 모르겠다 이젠. 이현성이었다. 코치와 할 말이 있다던 그가 성준수를 발견하고 체육관으로 들어왔다. 한참 투덜대며 장난스럽게 뒷담화를 하더니, 그의 얼굴을 유심히 살핀다. 니 뭔 일 있나? 눈이 퀭한데.

분명 어제도 같은 숙소에 있던 사람인데. 함께 대학 합격 발표를 확인했는데. 기가 막힌 하루가 반복되어 그런가, 한 삼주 만에 얼굴을 보는 기분이다. 사실상 기상호를 제외하고 아주 오랜만에 보는 타인이었다.

문득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을 털어놓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사실 전에도 그런 시도를 하지 않았나. 이현성에게 전화를 걸다 못해 학교로 그를 찾으러 가려고 했었다. 도와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혹은 제가 정신병에 걸렸으니 병원에 데려다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성준수가 이 하루를 조금 덜 살았다면. 그래서 기상호에게 모든 것을 쏟아내기 전이었다면. 전부 말했을지도 모르겠다. 기상호에겐 미처 말하지 못했던 정확한 사망 사유부터 기상호가 죽는 순간마다 느끼는 끔찍한 기분, 닳고 있는 정신력까지.

"뭔데. 할 말 있음 해라. 어제만 해도 합격했다고 좋아하던 게, 오늘은 상태가 또 왜 이러냐."

성준수는 그러지 않았다. 대신 뭉툭하게 말을 돌렸다.

"그냥, 무슨 일이 생겨서 뭘 해야 하는데... 너무 힘들어서요."

"그래? 그래서 포기하고 공이나 던지면서 스트레스 풀게?"

대답 대신 공을 한 번 더 던졌다. 이상하게 오늘따라 성공률이 낮다. 요새 며칠 공 안 던졌다고 벌써 감이 다 떨어졌나. 대학 가서도 이렇게 기복이 심하면 안 되는데. 성준수가 공을 주워 왔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이현성이 말했다.

"너답지 않네."

"뭐가요?"

"난 니가 포기 같은 건 배추 셀 때나 말하는 놈인 줄 알았다. 아, 그리고 이거 받아라."

이현성이 아까부터 들고 있던 박스를 건넸다.

"졸업 선물이다. 다른 애들한테는 비밀."

상자를 뜯는다. 그 안에 파란색과 하얀색이 조화롭게 섞여 반듯하게 놓인 농구화 한 켤레가 보였다. 갑자기 웬 농구화. 새 농구화 필요 없는데. 이현성이 어깨를 으쓱했다.

"쌍용기 때 기억나나. 원중고 때 보니까 누가 우리 팀인지를 모르겠더라. 지 혼자 시이뻘건 거 신고서는. 난 원중고가 반칙 쓰는 줄 알았다."

"......"

"지상고 다니면 지상고 티를 내야지. 다른 아들한테는 진짜 말하지 마라. 그걸로 이미 내 통장 거덜났다."

"저 이제 졸업하는데요."

"어쩌라고. 버리라고?"

뻔뻔한 대답이 돌아왔다. 우리 슈터님만 딴 거 신어서야 되겠냐. 누가 그거 보고 너 왕따인 줄 알면 어떡하냐고. 우승으로 챙긴 가오 다 떨어지길래 늦게나마 힘 좀 썼다. 너, 국가대표 될 때까지 신어라. 안 신으면 고등학생 때 감독 팼다고 폭로할 거다. 성준수가 건조하게 웃었다. 쌍용기 대회의 기억이 머릿속을 잠식했다.

그곳이 절벽 끝자락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서조차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하면, 앞으로도 늘 그렇게 살아갈 것만 같았다. 그만큼 절박했고, 간절했고, 절실했다.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거짓말처럼 결승에 진출하고, 장도고와의 시합이 시작되었을 때. 1분 1초를 숨 가쁘게 보내다 마침내 마주한 마지막 순간. 기상호의 손을 떠난 공이 허공을 향해 날아갔다. 모두가 숨죽이고 공을 바라봤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그 공을 마지막으로, 지상고는 승리했다.

소리 지르던 이현성. 포효하던 진재유. 팔짝팔짝 뛰며 달려오던 정희찬. 골대를 멍하니 바라보던 김다은. 어안이 벙벙하던 공태성. 그리고.

그리고... 기상호.

문득 기상호가 처음 죽었을 때가 떠올랐다. 소름 돋게 단정한 무표정이 쌍용기 때의 기억과 교차했다.

성준수는 대학에 집착했다. 괜찮은 졸업장을 갖기 위해서가 아니다. 프로가 되는 지름길이라서 그랬다. 공을 던지는 데 재미를 느꼈을 때부터 반드시 농구로 대학에 가겠다고 다짐했다. 그 다짐이 성준수를 원중고로, 지상고로, 마침내 대학 정문으로 이끌었다.

별똥별을 보고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그러나 누군가 말했다. 별똥별은 단 0.2초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그게 별똥별인지 인지하지도 못할 만큼 너무 짧은 시간이라고.

그런데 그 짧은 시간 동안 떠올릴 만큼 간절하다면,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거라고.

기상호와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넌 한 같은 거 있냐? 기상호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었다.

"... 감사합니다, 감독님. 잘 신고 다닐게요. 받자마자 죄송하지만 저 먼저 가보겠습니다. 저녁에 숙소에서 봬요."

"어야."

체육관에서 걸어 나온 성준수는 점차 보폭을 넓히기 시작했다. 조금씩 속도를 높인다. 땅을 밟는 발끝에 무게가 실린다. 정신을 차렸을 땐 달리고 있었다.

대학에 갈 거다. 쟁쟁한 선수들과 한 필드에서 발을 맞출 거고, 공을 던져 팀을 구할 거고, 프로 농구선수가 될 거고, 가슴에 태극마크를 달 거다. 죽는 날까지 손에서 공을 놓지 않을 거다.

그렇기 때문에 기상호를 살리고 싶다. 이 정신 나간 상황을 탈출하고 싶은 것과는 별개로.

성준수가 공을 던지고 싶은 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공이 제 손을 떠나는 순간의 벅참을, 설렘을, 짜릿함을, 긴장을, 책임감을.

기상호가 공을 던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 또한 그렇게 했으니까. 그렇게 했을 때 즐거웠으니까. 자신과 같은 감정을 아는 사람이 자신과 같은 길을 밟았으면 좋겠다.

그러므로 기상호는 살아야 한다. 살게 될 것이다. 성준수는 내일을 맞이해야만 하니까. 그러니까 너는-

마음 속으로 굳게 다짐하기 직전. 성준수는 지상고 도보 13분 거리 21평 빌라에서 눈을 떴다. 몸을 일으키자 부스스한 머리가 내려앉았다. 진짜 의욕 뒤지게 하는 데 소질 있네. 이젠 뭐 때문에 죽었는지 궁금하지도 않다. 또 병신 같은 이유로 뒤졌겠지. 갑자기 나타난 닌자가 죽였대도 그러려니 할 것이다. 햄 일어나셨어요? 아니.

폐 속 깊이 숨을 들이마신다. 후 내뱉는다. 게슴츠레 눈을 뜨자 긴 속눈썹 아래 그늘진 동공이 기상호를 담았다. 그래. 농구로 대학에 가고 싶다고 했지.

"야, 나가자. 슛 연습 봐줄게."

"지금요...?"

그래. 그럼 해보자.

배고파서 한 발짝도 못 움직이겠다는 기상호의 입에 메로나 꽂아줘, 점심 먹여줘, 1시간 압축 육아를 끝낸 성준수는 기상호의 멱살을 붙잡고 체육관에 밀어 넣었다. 중간에 이현성이 잠시 들렀는데, 비밀이라고 강조하던 게 빈 말이 아니었는지 이번엔 농구화를 건네지 않고 사라졌다. 이현성이 팔에 끼운 상자 크기를 본 기상호가 햄 저거 농구화 같죠? 누구 꺼일까요? 하는 걸 보면 이미 그른 것 같지만.

공을 잡은 기상호가 몇 번 드리블을 하더니 골대를 향해 던졌다. 언제나처럼 포즈는 그럴듯했지만, 공은 림을 돌더니 나가버렸다. 아~바람이쫌부나이건드갈수밖에없게떤졌는데이상하네~ 기상호가 동공으로 드리블을 했다. 성준수의 한숨 소리 한 번에 후다닥 볼을 들고 돌아온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차렷 자세까지 하고 지랄. 애초에 처음부터 잘 들어갈 거라곤 기대도 안 했지만, 참... 진짜 존나게 못하는구나...

"닌 뭐가 문제냐?"

"햄, 그기 아이라 바람이 불어서..."

"....."

"체육관에도 바람이 있을 수 있지 않나, 하는 그런. 저의 편견 없는 마음."

"편견 없이 대학 못 가고 싶냐?"

"아뇨! 절대 아뇨!"

그후론 삼점슛무한제공진실사건이었다. 공은 백보드를 맞고 안정적으로 들어갈 때도 있었고, 어림도 없이 림 주변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성준수는 옆에서 자세를 봐주거나, 몇 번 시범을 보였다. 기상호가 던진 공이 오십 개를 넘어가자 아예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기상호가 공을 던진다. 그 반동으로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아무 생각 없이 그 끝으로 시선을 내리는데, 기상호의 눈 아래 눈물점이 보였다. 기상호가 거칠게 움직이거나 자리를 옮길 때마다 머리카락 사이로 눈물점이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그때 골대를 맞고 튕겨 나간 공이 돌돌 굴러 성준수의 발에 닿았다. 기상호가 공을 받으러 이쪽으로 다가왔다. 두 손으로 공을 들고 기상호를 본다. 앳되고 말간, 애새끼다운 얼굴. 187(-대가리 크기)cm 위에 저런 게 붙어 있으니 징그러웠다. 기상호는 공을 주지 않자 어리둥절한 얼굴로 성준수를 바라보더니, 잠시 쉬라는 뜻으로 알아들었는지 그대로 코트 위에 주저앉고 말을 붙였다.

"햄, 준향대랑 수명대 붙었다고 하셨죠? 어디 가실 거예요?"

"몰라."

"뱅찬 햄 준향대 가신다던데. 만약 준향대 가심 뱅찬 햄이랑 같이 뛰시겠네요. 신기하다."

"들어가면 뭐 다 뛰냐? 주전이 돼야 뛰지."

"그래도요! 그냥, 전 여태 한 팀에서만 뛰어서 그른가. 상상이 안 돼요. 늘상 상대 팀인 줄만 알았던 선수랑 호흡을 맞추는 일이 생긴다는 게. 나중에 재유 햄이랑 상대 팀으로 만날 수도 있겠네요! 우와."

그러고 보니 경기에 나간 건 작년이 처음이었댔나. 중학생 땐 아예 뛴 적도 없다고 했으니, 익숙해진 팀 멤버가 바뀌는 일도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그게 뭐가 대수라고, 진재유와 성준수가 없는 농구부를 상상하는지 오. ... 오. 하며 등신 같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진재유와 성준수가 없는 지상고라. 딱히 졸업 후에 남겨질 지상고 농구부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좆같은 곳 벗어나고 싶단 생각만 했었지. 지금은 진학 고민하느라 바쁘고. 불현듯 농구부의 존폐를 얘기했던 5월이 떠올랐다. 전국 규모 대회에서 우승했으니 당분간 없어질 일은 없겠다. 다만 여전히 적은 부원 수가 문제였다. 고작해야 한 번 우승했다고 농구 인재가 몰려올 리는 없고, 홍보를 잘하면 쓸 만한 애는 한둘 쯤. 그것마저 없으면 또 굴러다니는 돌멩이 줍느라 바빠지겠고.

"인제 주전에 준수 햄 재유 햄 없을 거 생각하니까 신기하네요. 어뜩하지."

"... 너 스타팅이냐?"

"헐. 그르게요. 저번 대회야 희찬이 대신 들어간 거라 별로 실감 안 났는데, 주전이네. 아닌가? 신입생 중에 주전으로 나올 만한 애가 없어야... 아니, 아니지. 저야 이제 병찬햄최종수를 넘어뜨리고 '우승' 타이틀을 거머쥔 고등 농구의 제왕, 고등 농구의 군림자, 고등 농구의 지배-"

"야. 닥쳐."

"넵. 주전이겠죠?"

일단은 쓸 만한 놈이 들어온다는 쪽에 걸어보는 수밖에. 특히 슈팅 가드가 오길 바라야 할 것이다. 정희찬이 매일 자기가 듀얼가드니 뭐니 떠들긴 하지만, 사실 슈터라기엔 많이 부족하다. 원중전 때야 아다리로 들어간 거니 제외하고, 성준수가 보기에 정희찬도 공격 면에선 기상호보다 살짝 나은 수준이었다. 정희찬, 기상호, 김다은, 공태성이 주전인 농구부라니. 잠시 상상해보던 성준수가 쯧 혀를 찼다. 진심 답이 안 나오는 조합이었다. 뭐 이젠 자신과 관련 없는 일이지만.

앞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기상호가 잘만 주절거렸다.

"나아중에 내년 결승 구경 오시면 벤치 꼭 보세요. 6번은 없을 테니까."

볼 생각 없는데.

"......"

아닌가.

"결승 갈 수나 있냐?"

"아잇 당연하죠. 아, 뱅찬 햄이랑 한 번 더 뛰어보고 싶었는데. 이제 그럴 일이 없겠네. 고게 쫌 아쉽긴 한데..."

"너도 넣든가."

"예?"

"너도 넣으면 되잖아. 준향대."

딱히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니었다. 그래도 저번 대회로 준향대학교 체육 특기 수시 지원 자격인 전국 규모 대회 8강 이내의 입상 실적을 가지게 된 건 성준수뿐만이 아니니까. 3학년에 벼락치기로 실적 낸 성준수와는 달리, 기상호는 고작 1학년이니 운이 따르면 성준수보다 더 좋은 대학에 원서를 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거기까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기상호는 자신보다 못하니까.

그런데 기상호가 눈을 맞춰 웃으며 대답했다.

"저야 또 준수 햄이랑 같이 뛰면 영광이죠!"

나랑 같이 뛰자고 말한 거 아닌데. 아직 준향대 가겠다고 결정도 안 했다. 드물게 부드러운 분위기였지만 성준수는 무드를 모르는 남자였다. 그는 언제든지 시비를 걸어 기상호의 입을 다물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날카롭게 대꾸하는 대신 공을 건네주었다. 그럼 연습이나 해 등신아. 공을 든 기상호가 이번엔 덩크를 해보겠다며 골대 쪽으로 달려갔다. 성준수는 그 등을 응시했다. 아무리 동료고 한이든 뭐든 풀어주기로 결심했어도 다 큰 남자애가 계속 공 던지는 걸 지켜보는 게 별로 재미있는 일은 아니었는데 그냥... 했다. 그냥 계속 봤다.

솔직히 체육관에 기대가 없었다. 기상호의 멱살을 붙잡고 실내로 쑤셔 넣으면서도 갑자기 지진이 일어나 천장이 무너진다든가 덩크한다고 나대다가 백보드가 깨진다든가 하는 자잘한 이유로 또 죽음을 겪을 거라고 생각했다. 지하 주차장에 데려가도 악착같이 죽었던 기상호니까.

그러나 기상호는 무려 오후 6시까지 멀쩡하게 살아 공을 만지고 있었다. 최고 기록이 오후 3시 내외였던 것을 생각하면 체육관은 꽤 훌륭한 방공호인 셈이다. 그렇다고 방심하면 안 되겠지만. 적어도 8시까지는 상황을 살펴볼 셈이었는데, 기상호가 배고프다고 징징대기 시작했다.

"시끄러워. 숙소 가면 밥 먹어."

"전 지금 당장 배고픈 건데요!"

전 같으면 돼지 새끼야 살찌고 공태성만큼 체력 떨어져서 헉헉거리고 싶냐며 욕부터 박았겠지만, 이젠 같이 뛸 일이 없어서 그런가. 아님 징징대는 걸 계속 볼 힘이 없어서 그런가. 성준수가 한 수 져줬다. 편의점에서 간단하게 간식만 먹일 생각으로 밖에 나왔다.

벌써 깜깜한 밤이었다. 폴짝폴짝 뛰어 편의점에 도착한 기상호는 턱까지 괴어가며 신중하게 핫바를 골랐다. 전자레인지 돌리는 것까지 까먹지 않고 야무지게 먹을 준비를 마친다. 햄 이게요, 새벽에 먹어야 진가가 나오거든요. 한 새벽 3시쯤에 배고파서 깼을 때 몰래 먹는 게 진짜 맛인데 쫌 아쉽... 가끔 문소리 나서 다 깨우던 거 너였냐? ...제가 방금 입을 열었나요? 성준수가 한숨을 푹 쉬었다. 입 안에 넣은 핫바를 우물대느라 굴곡진 뺨을 보니 할 말이 사라졌다.

저거 몇 살이더라. 이제 열일곱이라고 했나. 성준수는 졸업이 가까워지고 나서야 기상호가 빠른 연생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성지수와 동갑이니 그가 대학에 가면 기상호는 비로소 교복을 새로 살 나이가 된다. 기상호는 그렇게나... 어리다.

다른 방법이 없어 한을 풀어주는 것으로 노선을 틀었지만, 만약 정말 그게 문제였다면. 그래서 한이 풀리게 된다면, 기상호가 또 죽는다면, 그런데도 시간이 돌아가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설마 그대로 죽어버리나?

순식간에 기분이 가라앉았다. 심란해진 마음을 달래기 위해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입술을 잘근잘근 무는데, 광고지가 잔뜩 붙은 유리창 너머로 희끄무레한 것들이 떨어지는 게 보였다. 성준수는 이게 뭔지 알았다. 핫바를 먹느라 정신없는 기상호를 툭툭 건드렸다.

"야. 눈이다."

그러자 기상호가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움직임을 뚝 그쳤다. 의심이 덕지덕지 붙은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성준수와 똑같이 창밖을 몇 초나 보고 나서야 편의점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와 햄!!!! 눈이에요, 우와!!! 저 눈 처음 봐요!!"

아무리 부산에는 눈이 내리지 않는다지만, 저렇게까지 좋아하다니. 니가 초딩이냐? 시비를 걸려다 말았다. 카운터에 서 있던 액면가 56세 편의점 직원도 당장 기상호를 쫓아 나가고 싶은 걸 참는 눈치였기 때문이다.

기상호는 똥강아지처럼 뛰어다니고 있었다. 눈 맞을 기회가 별로 없으니 맞을 수 있을 때 많이 맞아야 한다나. 척 봐도 쌓이기 전에 녹아버릴 싸릿눈을 보며 기상호가 이런저런 꿈을 늘어놓았다. 눈 위에 누워 천사 모양을 만들고 싶다느니, 눈으로 에바 초호기를 만들 거라느니, 눈싸움을 하면 이렇게 편을 먹어야 공정할 거라느니. 잔뜩 들떠 높아진 목소리를 듣고 성준수가 픽 웃었다.

기상호를 눈으로 좇는다. 그는 이리 펄쩍 뛰고 저리 펄쩍 뛰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어느새 풀린 운동화 끈을 밟고 넘어질 뻔했는데 용케 중심을 잡고 섰다. 그대로 넘어져 가로등에 머리를 박고 죽을 줄 알았는데 기특하다.

기상호가 신발 끈을 묶기 위해 쪼그려 앉았다. 고개를 숙이니 다갈색 머리카락이 내려와 눈물점을 가렸다. 별 생각 없이 눈물점에 시선을 두고 있던 성준수는 어쩐지 그게 거슬리다고 생각했다. 망설임 없이 기상호에게 다가가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걷어냈다. 그런데 눈이 마주쳤다.

"왜요?"

기상호가 물었다. 걍. 왜. 꼽냐? 뭘 봐? 뱉을 수 있는 멀쩡한 대답이 몇 개나 떠올랐지만, 성준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입을 뗄 수 없었다. 차오른 말이 순식간에 증발해 목이 말랐다. 심장이 조여드는 기분. 성준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대로 멈췄다.

그때 언젠가 기상호가 했던 말이 멋대로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근데 햄 저 쫌 좋아하시나 보네요. 진짜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해 비웃었던 말. 별 소리를 다 한다고 속으로 빈정거렸었다. 동료로서도 인간적으로도 관심이 없으니까.

그러나 지금, 성준수는 기상호의 눈동자에서 당황한 자신의 얼굴을 발견한다. 눈물점에 닿았던 손가락이 화끈거렸다. 온몸이 쭈뼛거리고 속이 울렁거렸다. 성준수가 천천히 기상호에게서 멀어졌다. 너무 당황스러우면 몸이 둔해지는구나.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성준수는 방금 느꼈던 감정이 뭔지 몰라 심란해 하고 있는데, 기상호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성준수가 지한테 다가와서 뭘 했는지 아예 관심이 없는 듯했다. 골치가 아픈 와중에도 그게 거슬렸다.

그때 기상호가 아련한 얼굴로 밤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쩐지 목소리도 제법 가라앉은 것 같았다. 햄.

"그거 아십니까? 누군가는 이런 기적 같은 날도 즐기지 못할 겁니다."

"왜 또."

"눈이 오는 날에... 가족이 죽었거든요. 눈만 보면 그날이 떠오릅니다."

"... 누군데 그게."

"체인소맨 아키요."

햄 설마 체인소맨도 모르시는 건 아니죠? 이건 갓생 갓반인 머글들도 아는 건데요. 넷플릭스에 있는 건데 진짜 모르세요? 어떻게 모르지?

성준수의 얼굴을 본 기상호가 호들갑 떨며 체인소맨의 역사에 대해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포치타가 진짜 개짱쎈 투명 드래곤 같은 악마고 덴지가 원래는 찢어지게 가난해서 장기도 내다 팔고 그랬는데 아키는 이렇고 파워는 누구고 마키마가 진짜 개.쩌.는 어쩌고저쩌고이러쿵저러쿵 존나게 안 궁금한 그뭔씹 얘기...

어 설렘 취소. 씨발새끼야 씹덕이라 고맙다 게이 될 뻔.

싸릿눈보다도 차가운 얼굴로 자신을 응시하는 성준수를 두고 눈을 먹어보겠다며 나대던 기상호는, 길바닥의 얼음에 미끄러져 죽었다. 정말 스스로의 안목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다. 혹시 내 정신병이 완치 불가능한 수준인가? 아무리 미쳐도 그렇지 왜 하필 저(런) 새끼를...?

아무리 사랑이 재난이라지만 이건 진짜 개큰, 형용하기 힘든, 있을 수 없는, 존나 꺼림칙한 재난이었다. 흰 맨투맨과 검은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인사하는 기상호가 벌써부터 귀여워 보여서, 성준수는 물에 코 박고 죽고 싶어졌다. 대신 솥뚜껑 같은 손으로 제 이마를 팍팍팍 치며 말했다. 상호야 지금 나가면 다시는 니 두 손으로 농구공 못 드는 줄 알아라. 네에...

성준수는 지가 기상호를 좋아할 리가 없다고 삽질하면서 또 백 번 정도 회귀할 정도로 어리석진 않았다. 걍 뭐 씨발 좋아하는데 어쩌라고? 딱히 사귀고 싶은 것도 아니고 어차피 대학 가면 존나 바빠서 이름도 잊는다. 쿨하게 인정한 성준수는 다시금 기상호를 체육관에 처넣었다. 이 빌어먹을 루프를 벗어나는 게 더 중요했고, 무려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기상호가 살아있던 건 체육관이 최초였으니까.

별 이유도 설명하지 않고 대뜸 체육관에 갇힌 기상호는 적잖이 억울해 보였다. 그러나 후배란 선배가 까라면 까야 하는 존재. 이왕 이렇게 된 거 열심히 하기로 마음 먹었는지 이내 공을 던지기 시작했다. 성준수는 이번에도 벽에 의자를 붙여 앉아 기상호를 보고 있었는데, 제 시선을 부담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한 옆얼굴이 귀여웠다. 자살해야지. 성준수가 벽에 뒤통수를 쾅 박았다.

"해, 해해햄 왜 그러세요...?"

"신경 끄고 공 던져라."

"넵....."

공이 체육관 바닥을 치는 소리가 쉴 새 없이 이어졌다. 기상호가 아흔 번쯤 헛손질을 하고, 마흔 번쯤 공을 넣었으며, 성준수가 세 번쯤 더 벽에 머리를 박았을 때. 어디선가 꼬르륵 소리가 들렸다. 잠시 넋을 놓고 있던 성준수가 그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기상호가 머쓱한 얼굴로 공을 안은 채 웃고 있었다.

"햄. 그만하자고는 안 하겠습니다. 잠깐 편의점이라도 갔다 오면 안 돼요? 진심 배고파서 옥황상제랑 대면 상담도 할 수 있을 것 같어요..."

"...... 너 여기서 쉬고 있어. 내가 사 올 테니까. 핫바 맞지?"

"제가 가도 되는데... 그럼 전 천하장사 매콤달콤후랑크로 부탁드립니다."

"그런 거 다 외우고 다니냐?"

이번엔 아예 체육관에만 박아둘 생각이었다. 핫바를 결제하고 저번에 기상호가 했던 것처럼 전자레인지에 돌린 성준수가 운동장을 가로질러 체육관으로 향했다. 걸음을 뗄 때마다 사박거리는 모래 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따라 시선을 내린다. 사박. 사박. 사박. 사박. 그러다 문득 차가운 것이 코끝에 닿아 녹아내렸다. 반사적으로 눈을 찡그린 그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밤하늘에서 별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

못생기게 웃으며 눈을 구경하던 기상호가 떠올랐다. 체육관에선 밤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싸릿눈은 몇 시간이면 그칠 것이고, 그러니 말해주지 않으면 오늘 밤 눈이 내렸다는 사실을 기상호는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럼 잔뜩 들떠서 내달리다 가로등에 머리를 박을 일도 없고, 신발 끈이 풀려 넘어질 뻔할 일도 없고, 눈이 내리는 밤하늘을 등진 채 저와 눈이 마주칠 일도... 없을 것이다.

발걸음이 무거워 더 걸을 수가 없었다. 성준수는 멍하니 밤하늘을 응시했다. 어차피 이따 숙소로 가려면 체육관에서 나올 수밖에 없고. 운동장에는 얼음이 없어서 미끄러질 일도 없고. 이번엔 내가 옆에서 어슬렁거리면서 잡아주면 되니까. 어휴. 씨발.

성준수가 체육관 문을 활짝 열었다. 여전히 슛 연습을 하는 기상호의 등을 향해 말했다.

"나와. 눈 온다."

"넹? 에이, 햄. 뭔 그런 농담을... 헐! 햄 뒤에!!! 대박!!!!!!!!"

기상호는 쏜살같이 체육관을 빠져나와 그대로 운동장 한 바퀴를 달리고 돌아왔다. 입을 아 벌리고 눈을 먹어봤는데 희한하게 물 맛이 난댔다. 햄도 먹어봐요! 차가운 도시 남자 성준수는 미세먼지로 오염된 눈을 먹을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기상호가 재롱 떠는 꼴을 구경했다.

"와, 햄 진짜 운 좋으시네요 부산에서 눈 쉽게 볼 수 있는 게 아인데... 지금 잘 봐두세요, 이게 우리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보는 부산의 눈일 수도 있걸랑요."

"두 번째야."

부산 토박이인 자신은 생전 처음 보는데 구라치지 말라든가, 부산은 눈이 없는 도시인데 꿈꿨냐 정도의 답변을 기대했으나 기상호는 웃을 뿐이었다.

"신기하네요. 부산에서 눈 두 번이나 보는 건 기적이나 마찬가진데."

"......"

드문드문 켜진 가로등 빛에 음영 진 기상호의 얼굴이 낯설다. 또 전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심장이 저릿했다. 공기를 들이마실 때마다 폐에 마음이 쌓여 숨을 쉬기 힘들었다. 기상호는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데. 이런 생각 안 하고 있을 텐데. 혼자 어색함을 느끼는 상황이 거슬린다. 성준수는 뭐라도 말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야. 너 만화 많이 본댔지. 내가 어릴 때 본 건데.

그렇게 성준수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전처럼 조금 속이 시원해지지도, 더 갑갑해지지도, 화가 나지도 않았다. 만화 내용이라고 못 박고 시작해서 그런가. 정말 남의 얘기를 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은 전부 꿈이고,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성준수와 기상호에게 아무 일도 없을 것 같았다. 짜증나거나 평범하거나 기분 좋은 날이 셀 수 없이 남아있을 것만 같았다.

긴 이야기를 끝내며 성준수는 왜 이현성을 봤을 때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는지 깨달았다. 이건 오직 기상호와 성준수 사이의 일이다. 말도 안 된다며 믿지 않고, 이 기나긴 하루 중 몇 초도 기억하지 못하며, 아침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하게 살아온다고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건 너와 내가 겪은 일인 걸 내가 아니까. 그러니까 내가 이 일을 얘기하고, 이해를 구하고, 공감을 받을 사람은 너밖에 없겠구나.

"웬만한 방법은 다 써봤어. 그럼 어떡해야 할 것 같냐."

"친구가 죽으면 주인공이 꿈에서 깨어난다고 하셨죠? 그게 계속 액자식으로 반복되고요."

"어."

곰곰이 생각에 잠긴 기상호를 바라본다. 실컷 찬바람과 눈을 맞아 붉게 물든 코와 뺨이 보였다. 시선이 마저 입술로 내려가기 전, 기상호가 말했다.

"주인공이 죽으면요?"

"뭐?"

"단순하게 생각하면, 주인공이 안 깨어나면 안 죽는 거 아니에요?"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방금까지 성준수가 느꼈던 말랑한 기분이 순식간에 증발했다.

기상호가 죽으면 성준수는 꿈에서 깨어난다. 성준수가 깨어나면 기상호는 죽는다.

그럼 성준수가 깨어나지 않는다면?

기상호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막 그런 거 있잖아요, 사실 진짜 죽어야 하는 사람은 그 친구가 아니고 주인공인 거죠. 친구가 잘못 죽은 거예요. 하지만 운명은 거스를 수 없는 거니까, 주인공이 죽을 때까지 상황이 반복되고...

"내가 죽어야 한다고?"

"네? 햄이요? 햄이 갑자기 왜요...?"

저도 모르게 기상호의 말을 끊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떠올리지 않았던 발상이었다. 모든 원인이 기상호인 줄만 알았다. 기상호가 계속해서 죽으니까. 살리면 해결될 것 같아서. 한을 풀어주면 해결될 것 같아서. 어쨌든 기상호가 해결책이라고 생각해서.

그런데 내가 죽어야 한다고?

기상호는 아무것도 모른다. 성준수의 입에서 나온 말이 정말 만화 속 내용인 줄만 안다. 그러니 저 말은 추측일 뿐인데.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아 화장실로 도피했다. 찬물로 세수를 해도 혼란스러움이 가라앉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거울을 바라본다. 젖은 머리카락에 맺힌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기상호의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정신이 팔린 나머지, 성준수는 어느새 자신이 누워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도 놀라지 않았다.

성준수가 기상호의 죽음을 가벼이 여길 수 있었던 건, 그의 수명이 무한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상호가 그렇게 많은 방법으로 죽는 동안 성준수는 신기할 만큼 영향을 받지 않았다. 트럭은 기가 막힌 실력으로 기상호만 들이받았고, 조형물이 떨어지면 성준수에겐 조각 하나 날아오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한 번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만약 기상호의 말이 정답이라면, 성준수가 죽은 후 세상은 어떻게 될까. 성준수의 시체는 주변 대학병원으로 이송될 것이고, 어쩌면 그곳에서 장례식을 치를 것이다. 어머니와 성지수가 많이 울겠고, 중고등학교 친구들 몇 명과 지상고 농구부원이 무거운 표정으로 자리를 지킬 것이다. 대학은 예비 1번에게 추가 합격 통보를 하고, 구단은 신인을 선발하며, 누군가는 꿈을 이룰 것이다. 세상은 수없이 많은 내일을 맞이할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성준수는 기상호가 아니니까. 그는 유한한 삶을 살고 있으니까. 시곗바늘은 누가 죽었고, 슬프고, 태어나고, 행복하다는 이유로 후진하지 않는다. 그게 보통이고 그게 정상이다.

그럴 리가 없다며 부정하고 있는데, 머릿속 누군가는 기상호의 말을 긍정했다. 기상호를 살리려는 노력 중에 통한 게 있던가?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죽는 시간을 미룰 수 있는 방법을 찾긴 했지만, 그건 정말 미룬 데서 의미를 다했다. 다가오는 죽음을 피할 수 있던 적은 없었다. 단 한 번도.

기상호의 말이 맞는 이유와 틀린 이유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그때 뭔가가 데굴데굴 굴러와 성준수의 다리를 툭 건드렸다. 농구공이었다. 기상호가 그를 향해 다가왔다. 볼을 건네주자 두 손으로 받고는 햄 많이 피곤하세요? 먼저 들어가셔도 되는데... 안 빼먹고 계속 연습하고 있을게요 진짜임 아닐 시 다은 햄 발 냄새 1분 동안 맡음 따위의 농담을 던졌다. 낯빛이 정말 말이 아닌 모양이었다.

성준수는 기상호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봤다. 어리고 앳된 얼굴. 성지수와 동갑인 나이. 스스로 죽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기상호도 죽을 이유가 없다.

말없이 기상호에게서 다시 공을 뺏어갔다. 3점 거리에서 공을 던지자 깔끔하게 림 안을 통과하고 바닥으로 떨어진다. 잠시 눈을 꿈뻑이던 기상호가 달려와 다리를 벌려 자세를 낮추고 성준수의 손에 있는 공을 빼앗으려 들었다. 성준수는 그를 가볍게 제치고 다시 볼을 림에 꽂아 넣었다.

기상호의 말이 맞다고 치자. 성준수가 죽으면 기상호는 내일을 맞이할 수 있다. 반대로 보면, 기상호를 죽이면 그는 정지된 하루 속에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었다.

성준수는 기상호를 좋아한다. 그러나 그 마음을 자각한 지 고작 이틀도 되지 않았다. 그를 위해 목숨을 희생할 의지 따위는 손톱만큼도 없다. 성준수에겐 언제나 자기 자신이 0순위였고, 1순위는 가족, 2순위는 농구였으며, 그 외 모든 것은 공동 316위쯤 됐다. 기상호를 좋아하고, 설령 사랑한다 쳐도 그래봐야 314위쯤 될 뿐이었다.

그러나 기상호의 말이 정답이라면. 선택지가 단 두 개뿐이라면. 그에게 남은 것이 성지수와 어머니, 기상호와 이현성, 아끼거나 얼굴만 아는 사람들, 또는 스쳐 지나간 적도 없는 사람들에게 아침을 선물하는 것과 지겹고 지치고 힘든 아침을 그 홀로 반복하는 것뿐이라면.

"야. 밖에 나가자."

"네? 햄... 솔직히 이건 아니죠. 지금 햄이 혼자 15점이나 넣어놓고 제가 겨우 공 한 번 뺏었다고 삐치시는 건 쫌..."

"아니 씨발, 지금 눈 오니까 보러 나가자고."

그렇다면 사실상 선택지는 하나뿐 아닌가.

성준수는 기상호가 또 눈 처음 본 강아지처럼 싸돌아다니는 것을 묵묵히 쳐다보았다. 입술을 잘근잘근 물며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실패했다. 도망치고 싶었고 죽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기상호가 대신 죽길 바라지도 않았다. 저도 모르게 다리가 움직일까 봐, 성준수는 최대한 이 상황을 가볍게 여기려고 노력했다. 괜찮아. 어차피 이게 정답인지도 확실치 않고 정답이 아니라면 분명 시간이 돌아갈 거야.

운동장에서 놀겠다는 기상호를 교문 밖 사거리로 데려갔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있으니 음주운전을 한 건지 꼴에 눈 온다고 도로가 미끄러운 건지 모르겠으나 휘청거리는 트럭이 보였다. 곧 귀신 같은 핸들링으로 옆에 있는 자신은 내버려 두고 기상호에게로 돌진하겠지. 옆에서 햄 내일 눈 쌓이면 눈사람 만들어요 따위를 지껄이는 기상호의 목소리에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손이 떨렸다. 헤드라이트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성준수가 기상호의 눈을 맞추고 말을 끊었다. 야.

"나 너 좋아한다."

"넹?.... 네???? 뭐라고요?? 저 지금 귀가 먹은 것 같은데..."

"근데, 씨발, 그렇게까진 안 좋아해. 그니까 내가 대신 희생해줬다느니 그런 말 하고 다니면 뒤진다."

성준수가 기상호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시야가 돌더니 금세 둘의 위치가 바뀌었다. 기상호는 분명 도로를 달리던 트럭이 어느새 인도 위로 올라와 있음을 발견했다.

"씨발새끼야 준향대 넣어라..."

성준수가 기상호를 밀쳤다. 바로 그 다음 순간. 퍽 소리가 났고 몸이 붕 떴다. 시야가 온통 붉게 물들었다. 아무래도 몸 구석구석이 아작난 것 같았다. 씨발. 이제 농구 못 하겠네. 그 와중에도 성준수는 그런 생각을 했다.

밀쳐져 엉덩방아를 찧었던 기상호가 주춤주춤 일어났다. 햄...? 단숨에 달려와 성준수의 몸을 흔든다.

"준수 햄."

"……."

"햄. 햄 일어나보세요."

"……."

"준수 형."

당황한 입이 계속해서 이름을 불렀다. 아무리 불러도 성준수는 묵묵부답이다. 성준수가 이렇게 인내심 깊은 사람이 아닌데. 조용히 듣고만 있을 사람이 아닌데. 귀 안 먹었고 한 번 더 부르면 뒤진다고 협박해야 하는데. 성준수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

곧 성준수의 머리에서 시뻘건 액체가 흘러나와 눈을 적셨다. 훅 올라온 비릿한 피 냄새가 기상호에게까지 닿는다. 깨진 트럭 헤드라이트. 어느새 고인 피 웅덩이. 미동조차 않는 성준수의 눈꺼풀. 사고가 둔해진다. 감각이 이해한 것을 뇌가 거부한다. 왜 대답을 안 하시지?

멍한 귀밑에서 제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들이마신 숨이 기도에서 막히는 감각이 불쾌했다. 속이 울렁거리는 와중에 트럭에서 내린 남자가 끔찍한 걸 봤다는 얼굴로 마른세수를 했는데, 그는 성준수를 보며 괜찮냐고 묻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누가 봐도 괜찮지 않았다. 괜찮지 않았다. 괜찮지 않았다.

비로소 정신을 차린 기상호가 남자에게 119에 신고하라고 소리 질렀다. 무서웠다. 붙들린 몸이 물처럼 늘어져서 무서웠고 의식을 잃은 인간의 무게감이 너무 선명해서 무서웠다. 덜컥 겁을 먹은 기상호가 가슴에 귀를 대봤다. 희미하게 느껴지던 심장 박동이 점차 느려졌다. 이내 완전히 사라졌다.

그렇게 성준수는 죽었다.

뒤늦게 도착한 119는 응급처치를 시도했으나 이미 떠나간 넋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성준수가 내일을 맞이하기 위해 보냈던 무수한 밤은 아무에게도 기억되지 못한 채 스러지고, 기상호는 영문 모를 희생에 계속해서 눈물을 흘렸다.

길고 긴 밤을 지나 마침내 세상에 여명이 쏟아졌다.

기상호는 성준수가 꿈꿔왔던 내일을 맞이했다.


구라다. 기상호는 자기가 부른 구급차에 치여 죽었고 성준수는 이불 속에서 눈을 떴다. 제 몸을 더듬어 멀쩡한 것을 확인한 그는 벌떡 일어나 화장실 문을 열었다. 한 손으론 유튜브 숏츠가 재생되는 핸드폰을 쥐고, 남은 손으로 수건을 들어 얼굴의 물기를 닦고 있던 기상호가 눈을 땡그랗게 뜨고 성준수를 쳐다보았다. 햄 저 지금 나갈 거예요! 글케 오래 안 썼는데.

자신은 살아있다. 기상호도 살아있고... 돌아왔다. 그날의 아침으로.

긴장이 풀려서 주저앉았다.

그 어떤 감상보다도 먼저 떠오른 것은 생존에 대한 안도였다. 제 의지대로 움직이는 건강한 신체와 선명한 정신. 부서지지 않은 몸은 고통 한 점 없었다. 망치로 맞은 듯한 두통도 없고, 억지로 눈이 감기지도 않았다. 죽음은 찰나였으나, 회귀를 갈망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구역질이 올라왔다.

이것에 안도해도 되는 걸까? 기상호가 대신 죽게 될 텐데? 난 한 번이었지만 쟨 수십 번을 겪었는데. 난 선택이었지만 쟤는 그럴 기회도 없었는데. 말 없는 자신을 두고 괜찮냐고 묻는 기상호를 보니 심장이 기분 나쁠 정도로 느릿하게 뛰었다.

너 아냐? 차에 치였을 때 후회했어. 존나 아팠거든. 진짜 존나 아팠어. 그래서 씨발 걍 가만히 있고 니가 죽게 놔둘 걸 생각했는데

"햄, 많이 안 좋으세요?"

넌 내 걱정을 하고

"어떡하지... 감독님께 전화할까요?"

성준수는 죄책감이 식도를 타고 오르는 기분을 알게 됐다. 차마 눈을 마주칠 자신이 없어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아직도 이 현상에 대해 파악한 것이 없다. 기상호는 앞으로도 계속 죽을 것이다. 나 때문에. 내가 알아낸 게 없어서.

그 수많은 죽음을 경험하면서도 조금도 성장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은 상상을 초월했다. 

성준수는 살면서 이 정도의 무력감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기상호가 눈앞에서 죽을 때마다 맨 처음, 편의점에서 숙소로 돌아오던 길이 떠오른다. 요란한 클락션 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은 피곤에 절었으며, 살을 에는 추위가 있을지언정 그때는 평화로웠다. 대학을 어디 가야 하는지 같은 시답잖은 고민에 집중할 여유가 있었고 기상호는 한 번도 죽지 않았었다. 그때 내가 왼쪽에 서 있었다면, 혹시 그 길로 가지 않았다면, 기상호가 나가지 못 하게 말렸다면 무언가 달랐을까?

왼쪽 시야로 떨어지던 무언가. 축 늘어진 몸의 무게. 들리지 않던 심장 소리. 그것만큼은 죽어도 잊지 못할 것 같다. 붉게 물든 포장도로를 떠올린 성준수가 눈만 깜빡이기를 반복했다.

이제 기상호는 다양한 방법으로 죽지 않았다. 성준수가 의미 없이 과거를 반복했기 때문이다. 오전은 대충 떼우고 오후엔 체육관에 종일 가둬둔다. 조명이 무너지기 전에 나오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엔 기상호가 죽는다. 이제 기상호가 어떻게 죽어도 성준수는 괴롭지 않았다. 그저 물끄러미 시체를 바라보다 보면 이불 속에서 눈을 떴다.

오늘은 그마저도 해낼 힘이 없었다. 하루를 시작할 마음이 나지 않는다. 기상호가 못 나가게 말리고, 체육관에 집어넣고, 이미 수천 번 본 기상호의 자세를 읽고, 함께 눈을 보고, 기상호가 죽지 못하도록 아등바등하는 모든 과정이 전부 의미 없게 느껴졌다.

햄 일어나셨어요.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어, 꺼져, 말 걸지 마, 이 중 무엇이든 간에 대답은 하던 사람이었는데.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낀 기상호가 지갑을 내려놓고 성준수에게 다가갔다. 내려앉은 속눈썹과 그 사이 빛 없이 섬뜩하게 확장된 동공. 햄, 좀 더 주무세요. 성준수는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성준수가 대학 고민 탓에 피골이 상접한 줄만 안 기상호가 의아해했다. 아니 합격만 하면 좋은 거 아니었어? 진학 고민을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고. 이렇게 신중한 사람인데 우리 학교에 대체 왜 온 거지...?

잠시 생각에 잠긴 끝에 기상호가 입을 열었다.

"햄. 저랑 가위바위보 해요."

"......"

"제가 이기면 좀 더 주무시는 거예요."

평소라면 어 나대지 마 하고 무시당할 텐데, 어쩐지 지금은 혼나지 않을 것 같았다. 예상대로 성준수는 말 없이 기상호를 쳐다볼 뿐이었다. 멍하니 기상호의 구령에 맞춰 가위바위보를 했다. 기상호는 가위를 냈고, 자신은 손을 편 채로 가만히 있었다. 기상호가 이겼다.

"햄."

"......"

"생각 너무 많이 하지 마세요."

눈을 감았다. 수마에 휩쓸린다. 기상호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꿈을 꿨다.

성준수는 눈을 떴다. 일어나는 순간 머리가 핑 도는 바람에 이마를 부여잡았다. 내가 왜 이불 속에 누워 있지? 방금까지 기상호랑 길을 걷고 있었는데. 병원에 가고 있었는데. 아닌가? 기상호가 밥 처먹는 꼴을 지켜봤던 것 같기도 하고, 이현성을 찾아 기상호를 맡겼던 것 같기도 하고, 기상호를 본가에 데려다줬던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기상호를 죽이고 있었던 것 같다.

기억이 파편처럼 부서졌다. 일의 선후관계를 파악하기 힘들었다. 성준수는 기계적으로 기상호를 찾았다. 기상호는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표정 없이 평화로운 얼굴. 그 고요한 얼굴을 바라보던 성준수가 기상호의 목에 손을 감았다. 천천히 목을 조르기 시작한다. 아직 죽지 않았는지, 기상호가 마른기침을 쏟아내며 버둥거리기 시작했지만 그 위에 올라타서 억지로 고정했다.

목을 쥔 손에 힘을 준다. 점점 체중까지 실어서 온 힘을 다했다. 얇은 피부 너머로 세찬 심장 고동이 느껴졌다. 어느 순간 기상호의 뺨이 눈물로 젖었는데 그것이 기상호가 흘린 것은 아니었다.

눈을 길게 감았다 뜬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기상호 대신 천장이 보였다.

"햄 일어나셨어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꿈이고, 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현실일까.

저 목을 쥔 것은 현실일까?

천천히 상체를 일으킨 그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크게 숨을 들이마신다. 그리고 내쉰다. 속이 불쾌하게 울렁거렸다. 가빠지려는 호흡을 의식적으로 안정시킨다.

거울을 노려본다. 끔찍한 기분이었다.

성준수는 눈을 휘둥그레 뜬 기상호를 들고 습관처럼 체육관에 구겨 넣었다. 날이 어두워지고 눈이 내릴 때쯤 다시 꺼냈다. 지겹지도 않은지 기상호는 눈을 처음 본 사람처럼 좋아했다.

성준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새하얀 눈송이가 이마에 닿아 녹아내렸다. 싸늘한 바람이 뺨을 스치자 조금 기분이 나아졌다. 계속 이렇게 있고 싶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그 사이 운동장 한 바퀴를 크게 돈 기상호가 쭈뼛쭈뼛 다가왔다. 언제 자판기에 들렀다 왔는지 두 손에 캔 코코아가 하나씩 들려 있었다.

"햄. 그, 오늘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

코코아를 건네받고도 한참 캔을 따지 않길래, 기상호는 캔을 따서 다시 돌려주었다. 아침부터 내내 성준수의 상태가 좋지 않아 보여서 걱정이 됐다. 몸이 안 좋으면 그냥 숙소에서 쉬지, 왜 갑자기 연습을 도와주겠다고 자신을 체육관으로 끌어냈는지 모르겠다. 대학이 뭐라고 사람을 이렇게 피 말리게 하는 거지. 나도 고삼이 되면 저렇게 되는 건가. 실례되는 생각을 금세 지운 기상호가 힐끔 눈치를 봤다.

"솔직히 이런 식으로 신경 써주실 줄은 몰랐는데."

"......."

"약간 감동? 이네요? 이게 동문의 맛이랄까."

성준수는 말없이 듣고 있었다. 뭘 어떻게 해도 정적만 흐르는 게 어색해서 기상호는 계속 입을 열었다. 자신이 헛소리를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주체가 안 됐다. 

"상호야."

"넵."

"부산에 눈이 오는 건 기적이냐."

"아무래도...? 전 17년 인생 중에 오늘 눈을 생애 처음 보는데, 이 정도면 기적이 아닐지."

성준수는 하늘에서 내린 기적이 땅에 닿아 녹아내리는 모습을 무감하게 바라보았다. 앞으로 몇 번이나 남았을까. 몇 번의 기적이 자신을 괴롭힐까. 몇 번까지 자신이 제정신을 유지하고 눈을 볼 수 있을까?

성준수에게 이 밤 풍경은 더 이상 감상의 대상이 아니었다. 한 장면만 나오는 지루한 무성 영화 같았다. 자신은 영화를 바꿀 수도, 영사기를 끌 수도, 영화관을 나올 수도 없다.

눈이 내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별이 떨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어둡기만 한 밤이 세상을 전부 삼켜주기를. 영원히 아침이 오지 않기를.

기상호가... 죽지 않기를.

"야."

"헉 네?"

"너 죽지 마라... 죽지 말라고, 좀."

성준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그 어떤 상황이 와도 남의 힘을 빌어본 적이 없다. 단순히 바란다는 이유로 생기는 좋은 일은 없다고 믿었다. 그토록 너그럽고 관용적인 일이 있을 리 없다.

그러나 지금, 헤아릴 수 없이 무수한 아침과 밤을 반복한 남자는 최초의 기적을 빌기 시작했다.

그는 대지에 비처럼 내리는 별을 보며 기상호가 죽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햄... 우세요?"

기상호는 이보다 더 당황스러울 수 없다는 투였다. 이미 던져놓고 잘못 말했다는 듯 헉! 손으로 입을 막는다. 눈을 이리저리 굴리더니, 기상호가 천천히 손을 치우고 물었다. 근데 저 죽어요...?

"어. 존나 뒤져. 한 백 번 뒤지고 더 뒤져."

"아니... 왜요? 저 오늘은 진짜 잘못한 거 없는데요. 준수 햄이 절 죽이신다는 건 아니죠? 네?"

성준수는 우는 주제에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기상호를 노려보았다. 하필 가로등 밑이라 그늘진 얼굴에 흰 동공만 선명했다. 그 눈빛이 어찌나 흉흉했는지, 아연해진 기상호가 눈을 피하며 찡찡거렸다. 저도 대학에 가고 싶었어요... 안 죽으면 안 되나요...

"살려주시면 최선을 다해서 잘 살게요... 진심. 진짜. 스틱스 강에 맹세하고."

기상호를 바라본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눈동자 아래 눈물점이 보였다. 성준수는 저것에 처음으로 시선을 빼앗겼던 날을 기억한다. 기상호가 어떤 보폭으로 제 뒤를 따라 체육관에 왔는지, 어떤 얼굴로 공을 던졌는지, 어떤 표정으로 자신과 대화를 나누었는지, 그의 손이 기상호의 머리카락을 만지고, 눈이 마주쳤을 때, 그 동공이 어떤 색으로 빛났는지를 기억한다.

어느 날 성준수는 기상호 대신 죽을 각오를 했었다. 애처럼 좋아하는 얼굴을 보며 고백했다. 그리고 그다음 아침, 당연하게도 기상호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야."

성준수도 안다.

"야, 기상호."

"넹?"

어차피 기상호는 이번에도 전부 잊을 것이다.

"좋아해."

그러니 이 고백에는 의미가 없다.

멀뚱히 서 있던 기상호가 눈을 꿈뻑이더니 손가락을 스스로를 가리키며 물었다.

"... 네?? 저요? 저를요?"

"어."

"아니... 저를 좋아하는? 엥?... 그니까 그런 좋아하는? 그런... 그런 식으로? 그렇게 좋아하는..."

"어. 어 씨발새끼야 어. 그런 식으로 좋아하는 거다 씨발 왜 꼽냐?"

미묘한 표정인 기상호는 존나 꼬와보였다. 심란하게 허공을 바라보다가 성준수를 바라보다가. 이리저리 시선을 옮기더니 진심 이해가 안 된다는 목소리로 묻는다. 아니 왜요...? 좋아한다는데 왜요가 씨발아 할 말이냐? 아니 이상하잖아요! 갑자기 절 왜 좋아하는데요? 그럴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요??

성준수가 지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몰라씨발... 내가 돌았나 보지. 그러고선 기상호를 앞질러 걷기 시작했다. 정지한 기상호와 거리가 벌어지자 뒤를 힐끗 보고 말한다. 뭐해. 숙소 가자.

"지금요? 아니 방금 그렇게 말해놓고요?"

"그럼 뭐 여기서 노숙하고 내일 갈까? 좋게 말로 할 때 따라 와."

"......"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더 이상의 대화가 없었다. 기상호는 울고 고백하고 욕 박고 귀가하자는 사고 회로를 이해하기 힘들어 어색함을 느낄 정신이 없는 듯했고 성준수는 차라리 기상호가 숙소에 도착한 후 죽었으면 하고 바라느라 바빴다. 지금 당장 눕고 싶었다. 눈을 감고 아무 생각 없이 잠들고 싶었다.

기상호는 정말로 숙소에 도착해 도어락을 열 때까지 죽지 않았다. 밤이 되었는데 기상호가 아직 죽지 않고 심지어 현관에 발을 들이기까지 했다는 것이 신기해서, 성준수는 신발을 벗다 말고 기상호를 위에서 아래로 훑었다.

숙소엔 김다은과 공태성이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이 반가울 만도 한데 피곤해서 꼴 보기 싫었다. 둘의 인사를 대충 받은 성준수는 저녁도 마다하고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지쳐 쓰러지는 기색이 역력하자 김다은이 기상호에게 물었다. 어디 갔다 이제 옴? 체육관 좀... 햄이 갑자기 슛 넣는 자세 좀 보자고 해서요. 햄이 넣고 니가 본 거임? 왜 준수 햄이 쓰러짐? 몰라요 대학 합격한 기쁨이 정신적 충격을 유발했나 이상한 얘기 하던데요...

수마가 몰려왔다. 성준수는 눈을 감았다. 전원이 꺼진 듯 세상이 암전되었다.

성준수는 지상고 도보 13분 거리 21평 빌라의 이불 속에서 깨어났다. 정신이 들긴 했지만 눈을 뜨지 않았다. 당분간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았고, 듣고 싶지 않았고, 느끼고 싶지 않았다. 기상호의 좆같은 모나미룩도, 녹음기를 틀어둔 듯한 아침 인사도, 자욱한 피비린내도. 또 다시 세상을 마주할 힘이 나지 않았다. 이대로 가만히 누워 있고만 싶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평소와 다른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그러고 보면 평소처럼 주변이 조용하지도 않았다. 뭔가가 부글부글 끓는 소리, 부산스럽게 발을 옮기는 소리, 잠들어 있는 누군가를 의식한 듯 낮게 속닥이는 소리.

결국 성준수는 손으로만 더듬어 핸드폰을 찾았다. 힘겹게 뜬 눈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그리고 잠시 그대로 굳었다.

2024년 2월 5일 월요일
9:00

2월 5일?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둘러본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진재유가 양치를 하다 그를 돌아보았다. 칫솔 탓에 뭉개진 발음으로 어제 일찍 자더라며, 많이 피곤했냐고 묻는 말에 성준수가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 판단이 제대로 되지 않는 탓에 반응이 느렸다.

그때 진재유 뒤에서 공태성이 나와 그대로 뒤지신 줄 알았사옵니다, 전하. 하며 시비를 걸었다. 성준수는 가볍게 먹금했다. 재유. 기상호, 기상호 어디 있는지 알아? 진재유가 대답하기도 전에 어떤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저 여기 있어요!"

방금 집에 들어온 듯 기상호는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있었다. 왼쪽 손목에 달랑거리는 검은 봉지 안에 메로나 일곱 개가 보였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는 성준수에게 머쓱하게 말한다. 어제 사실 메로나 먹고 싶었는데 햄이 체육관 데려가가지고요... 아 불만 있는 건 아닙니다. 밥도 먹기 전에 잘하는 짓이라며 공태성에게 등을 찰싹 맞은 기상호가 봉지를 통째로 냉동실에 넣었다.

내가 지금 환각을 보고 있는 건가? 성준수가 제 팔뚝을 꼬집었다. 짜릿한 고통이 느껴졌다. 믿어지지 않아 다시금 핸드폰 화면을 확인한다. 2024년 2월 5일 월요일 9:03.

회귀가... 끝났다.

성준수는 이것이 제 환각 속이거나, 단순히 회귀가 다음날까지 확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며칠은 더 의심했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기상호는 죽지 않았다. 날짜는 끊임없이 바뀌었고, 겪은 일은 반복되지 않으며, 새로운 사건이 생겼다. 좆같은 일도 있었지만 쟬 죽이는 것도 내일로 미룰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아량을 베풀 수 있었다.

성준수는 점차 일상에 다시 녹아들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졸업식이 다가왔다. 성준수는 헌 것 대신 새 농구화를 가방 안에 넣고 남은 짐을 챙겼다. 어쩌다 보니 또 숙소에 남은 사람은 둘. 성준수와 기상호뿐이었다. 기상호가 눈치 보며 물었다. 햄 저 편의점 갈 건데 같이 가실래요? 성준수가 기상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대답도 않고 그를 지나치더니 신발을 신는다.

"뭐해. 빨리 와."

"넹."

예고 없이 시작되었듯, 크레딧 없이 회귀가 끝난 덕분에 성준수는 갑자기 후배 데리고 체육관에서 훈련 강요했다가 갑자기 처울고 죽지 말라고 협박하고 고백한 미친 놈이 되었다. 그날 이후로 둘만 남을 기회가 없어, 성준수의 고백은 한 번도 다시 논의된 적이 없었다. 기상호가 왜 말을 걸었는지 알겠다, 씨발. 아니나 다를까, 빠삐코를 손에 쥔 기상호가 머뭇거렸다.

불편한 대화가 시작되기 전, 성준수가 먼저 선수를 쳤다. 야, 휴대폰 줘봐. 갑자기 왜요...? 저 이거 산 지 1년도 안 됐는데요. 아니 씨발 얘는 날 뭘로 생각하는 거야. 아무리 그래도 내가 지 좋아한다고 고백까지 했는데 뭐 던질까 봐?

"상호야. 별거 안 할 거니까 빨리 줘보라고."

"넵..."

기상호의 핸드폰을 강탈한 남자는 연락처 앱에 들어가 망설임 없이 전영중의 전화번호를 삭제했다. 그걸로도 모자라 카카오톡은 물론이고 인스타 계정도 차단한 뒤 돌려주었다. 햄 뭐하셨어요? 신경 꺼.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기상호는 결국 달라진 점을 찾지 못하고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햄 저번에..."

"그날에 내가 미쳤던 거 맞으니까 그날 얘긴 웬만하면 하지 말자."

"네."

솔직히 성준수는 그날의 기억을 삭제하고 싶었다. 씨발 아무리 기상호랑 당장 사귈 마음이 없어도 가오 없게 그게 뭐야. 나중에 그런 마음이 생긴다고 해도 고백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가오충의 마음은 피곤한 법이다.

하나 있던 용건이 막히자 둘 사이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할 말이 막힌 기상호가 민망한지 빠르게 주제를 돌렸다. 햄 준향대 간다고 하셨죠? 왜 거기로 가시는지 물어봐도 돼요? 성준수가 심플하게 대답했다.

"그냥."

"아 네."

대답을 마친 성준수가 잔소리를 시작했다. 내 대학 신경 쓸 시간에 너 슛 연습 열심히 해라. 대회는 못 가더라도 유튜브로 다 챙겨 볼 거니까. 열심히 하고 있는데... 더 열심히 해. 씨발, 3점 슛 성공률이 그게 뭐냐. 맨날 코너에서만 던질 생각하지 말고 어디서든 넣을 생각을 하라고. 좀 실력 확실히 잡아서, 그래서...

준향대 넣어. 말을 삼킨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상호에게 나 있으니까 웬만하면 준향대 오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걍 뒤지고 말지.

"햄...? 그래서요?"

말이 이어지지 않자, 기상호가 답을 채근했다. 그게 괜히 짜증나서 나오는 대로 뱉었다. 잘 좀 하라고, 안 쪽팔리게 좀. 내년에 전국 대회 결승에 한 번도 안 올라오면 니 죽... 패러 온다. 니엥... 

왠지 말 돌리신 것 같은데. 기상호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성준수를 쳐다봤다. 귀가 새빨개진 성준수가 괜히 인상을 찌푸리며 시비 걸었다. 뭘 꼴아 봐 눈깔 존나 자유분방하네 졸업한다고 이제 맞먹냐? 억까인 것이 스스로도 느껴져 성준수가 황급히 입을 닥쳤다. 그런데 그때 성준수의 머리 위로 벽돌 하나가 떨어졌다.

퍽!

어느 날 아침 불길한 꿈을 꾸고 일어난 기상호는 아주 오랫동안 이 아침을 반복하게 될 것을 깨닫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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