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비지타임

시취屍臭 下

좀비 아포칼립스

PITA BREAD by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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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던 사이에 많은 일이 있던 모양이다. 네 사람이 적당한 거리에서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 인원이 이야기하는데 전혀 모르고 잠만 잤다고? 전영중의 꼬장이 어지간히 피곤했나. 한 시간도 안 잔 것 같은데 이야기의 진척이 3시간은 훌쩍 넘긴 수준이었다.

"저희 캠프에 전영중 씨 같은 사람들이 몇 있거든요. 비슷한 친구들이 있으니 지내기 나쁘지 않을 거예요."

잠깐 잤다고 머리가 둔하다. 저와 전영중이 싸운 걸 엿들었나? 정신이 맑지 않은 상태로 섣불리 결정하면 안 될 것 같아 성준수는 입을 다물고 인상만 썼다. 이러고 있으면 대부분의 선택은 조금 유예가 가능했다.

"그걸 걱정한 거잖아요?"

그러나 캠프의 대표 자격으로 온 사람은 기다려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능숙한 재촉에 성준수는 도움을 구하듯 저도 모르게 전영중을 보았다.

"네 말대로 해보자고. 나는 좀비들 틈에서, 너는 사람들 틈에서."

물론 이 상황에서 제일 수상한 건 전영중이었다. 조금 전까지 미친 것처럼 좀비로 사는 것도 좋다고 팔아대던 녀석이 무슨 심경의 변화를 겪어서? 순순히 여기서 헤어지자는 말을? 저 사람 화술이 그 정도인가? 아니, 그보다.......

"넌 꼴이 왜 그 모양이야?"

"옷이 덜 말라서."

"그럼 가방에서 아무거나 꺼내 입었어야지......."

아랫도리를 그냥 덜렁거리며 저 사람들이랑 얘기했다고? 옷으로 중심부만 대강 가린 놈에게 잡히는 대로 꺼내 건네며 송곡 캠프 사람들을 보았다. 일행 중 뒤에 서 있던 사람이 엄지 두 개를 들어 보였다. 존경스러웠습니다. 뭐가요.......

"걱정되면 캠프에 들려서 살펴봐요. 우리 캠프는 마을 바로 뒤에 있어서 얼마 안 걸리니까. 가서 하룻밤 보내고 내일 출발해도 좋고."

"캠프 물자가 넉넉한가 봅니다? 손님도 선뜻 받으시고."

"겸양 떨지 않고 말하자면, 꽤 여유로운 편이에요."

아무것도 받지 않고 손님을 대접한다라. 적어도 성준수의 상식에 따르면 흔한 일이 아니었다. 제가 지내던 관음사 캠프도 서울 인근이라 의뢰를 해결해 주고 캠프 운영에 필요한 물자를 보충하긴 했다지만 기본적으로는 자급자족이었다. 모두가 제 몫을 해야 굶지 않고 무사히 하루를 넘길 수 있었다.

호의를 그저 베풀기만 하기에는 각박한 세상이다. 아무런 대가 없이 입 하나 더 챙기고 잠잘 곳 정리할 품으로 밭에서 고랑 하나 만드는 게 더 나으니까.

그러나 저들은 손님의 존재에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는 듯했다. 대전도, 부산도 아닌 어중간한 위치의 캠프에서?

"거래하자는 겁니다. 최근에 그쪽 노동력이 줄어서 보충이 필요하거든요."

의심을 읽어낸 듯 그가 덧붙였다. 솔직한 말이었지만 성준수는 불쾌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쪽 노동력. 먹고, 자고, 쉴 필요 없는 인간이 아닌 노동력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제야 송곡 캠프가 어떻게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는지 어렴풋이 짐작됐다.

"저쪽이 준수 씨의 보호자 역이었다는 것도 압니다. 걱정 하지 않아도 되도록 준수 씨가 무사히 부산까지 갈 수 있게 송곡 캠프에서 신원을 보장할게요. 그럼 하이에나의 수배도 풀릴 테니."

그러니까, 이건 사람을 파는 값이다. 저들은 자신을 전영중의 주인으로 인식했고, 호의는 노예를 얻기 위한 값싼 대가였다. 전영중이 그 의도를 못 읽고 그들을 자신에게 데려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옷을 다 입은 전영중이 팔짱을 끼고 성준수를 평소처럼 미미하게 웃으며 내려다보기만 했다. 꼭 괜찮다는 듯이.

"가보고 아니다 싶으면 거절해도 됩니다."

거절당할 리 없다는 듯 당당한 태도였다.

송곡 캠프는 규모 면에서 성준수가 있던 관음사 캠프와 큰 차이는 없었다. 반좀비가 있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지 전영중을 보고도 놀라는 사람이 없었다.

외려 경계하는 성준수의 손을 잡아 흔들며 신입이냐고 반갑게 인사했다 전영중을 보고 멋쩍게 놓았다. 아, 거래로 오신 분이구나. 이런 거래가 종종 있던 모양이었다.

날이 선 느낌은 아니었다. 사람을 대하는데 여유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성준수는 마음이 놓였다. 비록 전영중과 같은 반좀비들의 생활공간은 볼 수 없으나, 보통 사람들과 마주치는 걸 최소로 하기 위해 격리했다는 이유도 납득할만했다. 배를 충분히 채울 만큼의 식사도 하고, 정수된 물로 몸을 깨끗이 닦은 성준수는 한층 누그러진 마음으로 손님용 방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나는 괜찮은 것 같아."

다른 반좀비와 함께 살아가는 게 훨씬 나을 것이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고, 보통 사람과 계속 관계를 맺어야 하는 자신과 있는 것보다 그편이 전영중에게 좋을 거란 생각은 변함없었다. 동류라는 말이 왜 있겠어.

"그럼 제안대로 해. 송곡 캠프 신원보증을 받고 부산으로 가."

"......진짜 이해가 안 가서 그러는데, 나 조는 사이에 무슨 얘길 들었길래 마음을 바꾼 거야?"

"음......."

전영중은 한참이나 말을 골랐다. 턱을 살살 긁기도 하고, 저를 가늠하며 쳐다보다 결국 내뱉는 말이라는 게.

"비밀."

"장난하냐."

"이 정도 비밀은 남겨둬야 헤어지고도 내 생각 해주겠지."

사납던 시선이 갈피를 잃었다. 이 캠프에 왔을 때부터 예정된 일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새삼 흔들리기는. 면박 줄 생각은 아니었는데, 헤어지자는 말이 나왔을 때 내심 서운했던지라 정정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날을 세워도 서투르기 짝이 없는 어린애라는 걸 안다. 모진 세상에 일찍 클 수밖에 없었다 해도 이제 갓 성인이 된 애인데. 제게 의지하는 걸 모를 만큼 전영중은 눈치 없지 않았다. 그럼 차라리 애답게 다 털어놓기라도 하던가. 꽁꽁 눌러놓은 말은 뭐 그리 많아서.

그렇게 탓을 하다 그마저도 그만둔다. 조금 전까지 정신 나간 것처럼 저 애를 좀비로 만들려 한 제가 할 말은 아니었다.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성준수를 제 옆에 둬야만 한다는 맹목에 사로잡혀있었다.

"실례합니다."

어색한 침묵만 한참 내려앉은 자리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임시거처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이 반가울 지경이었다. 송곡 캠프의 사람이 쟁반에 마른 허브 다발을 들고 들어오다 성준수의 눈치를 살폈다.

"조금 있다 올까요?"

"아뇨, 괜찮아요. 무슨 일이세요?"

"캠프에서 만든 스머지스틱 좀 태우려고요. 진정 효과도 있고, 모기향처럼 쓰고 있어요. 괜찮을까요?"

성준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허브 다발 끝을 태우고, 연기가 피어오르자 침대 근처 테이블에 올려놓고 나갔다. 주무시고 내일 봐요. 벌써 그런 시간이었다. 성준수는 닫힌 문을 보다 쭈뼛거리며 침대에 몸을 집어넣었다.

천장의 형광등에서 빼꼼히 늘어진 원형 스위치가 제법 못생겼다. 제가 어렸을 적 시골에서나 보던 스위치였다. 그마저도 전기가 여유롭지 않은 지금 시대엔 사치품이라던 성준수의 말이 생각났다. 어렸을 땐 의자를 밟아야 겨우 발이 닿던 스위치를 어렵지 않게 눌렀다.

"잘자."

어두워진 방 안에는 달빛도 잘 들지 않았다. 높은 곳에 있어 환기만 겨우 가능할듯한 작은 창으로 들어오는 광원은 세 평 남짓의 방도 밝히기 부족했다. 그럼에도 전영중은 낮과 다름없이 방안을 파악했다. 심장이 멈춘 이후로는 어둠 속에서도 억지로 밝힌 것처럼 사위를 구분하기 수월했다.

덕분에 이불 속에 몸을 구기고 말똥하게 눈을 뜬 성준수를 볼 수 있었다. 제 옷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따라 눈동자가 움직인다. 의자를 끌어 자리에 앉는 것까지. 딴에 마지막이라고 잠이 안 오나 보지. 창문 아래 앉아 물끄러미 그 모습을 쳐다보았다. 암순응이 돼도 저 아이는 제가 눈을 감고 있는지 뜨고 있는지 모를 테니 마지막 밤 내내 모습을 새기고 싶었다.

평소와 다른 건 성준수도 마찬가지였다. 누우면 곧장 눈을 감던 녀석이 한참이나 어둠을 노려보다 웅크린 몸을 구석으로 옮기더니 이불을 들추고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꼭 키우던 짐승을 부르는 듯한 손짓이었다.

"잠이나 자."

"이리 와."

"나 안 자도 되는 거 알잖아."

"아, 빨리 오라고."

"이게 형을 개새끼 부르듯 부르네."

"마지막이잖아."

옆자리를 팡팡 두드리던 손이 멎는다. 말을 마치자마자 목이 멨는지 콧잔등을 구겼다. 눈물이 고이다 콧대를 타넘어 흘러내리는데도 들키기 싫은 듯 얼굴을 닦지 않고 심호흡한다. 그래봤자 다 보이는데.

"마지막, 인데...... 같이 자."

띄엄띄엄 내뱉는 말이 젖었다. 성준수는 제 목소리를 가리려는 듯 옆자리를 세게 두드렸다. 못 이기는 척 몸을 뉘이면 어린애는 이불을 눈 밑까지 끌어올려 몰래 눈물을 찍었다. 성준수를 비추던 희미한 달빛마저 제 몸뚱아리로 다 가린 전영중은 눈물을 닦아주는 대신 이불로 감싼 채로 저보다 작은 몸을 당겨 안았다.

"싫어서 버리고 가는 거 아냐."

"이미 말했잖아."

"나도 너 필요해. 계속 필요할 거야. 언제까지고 생각할 거라고."

"알았어."

킁. 이제 우는 걸 감추는 건 그만뒀는지 코를 울리며 이불에서 얼굴을 꺼냈다. 머리 아래 베개를 대주자 꾸물거리며 자리를 잡았다. 자꾸 제 품에 가까워지는 몸을 밀어내고 싶었다. 행여나 안 좋은 냄새라도 날까 싶어서.

"우리 캠프도... 처음엔 여기 같았어."

끝내 뻣뻣한 군복에 머리를 기댄 녀석이 입을 열었다. 코가 막혀 살짝 맹한 목소리로 먼 과거를 짚는다. 낯선 사람도 환대하고, 가족으로 받아줬어.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더 쉽지 않은 일이었어. 누가 좀비인지 알 수 없고, 좀비만큼이나 사람도 무서웠으니까.

그때의 관음사 캠프는 캠프라 부를 수 없는, 그저 생존자 집단이었다. 온전한 가족은 거의 없었고 대부분 살길을 찾아 홀로 엉망진창 도망친 사람들이었다. 스님들은 도움을 외면하지 못하고 그들을 받아주었다. 일손을 거들기 어려운 노인이나 어린아이들에게도 도움의 손길은 공평하게 주어졌다.

그리하여 성준수의 모친은 관음사 캠프에 아들을 데려다 놓고 중간에 놓친 동생을 찾으러 길을 떠났다. 두 번 다시 제 가족을 못 볼 줄 알았다면 열 살의 성준수는 떼를 써서라도 모친을 따라갔겠으나, 당시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의젓하게 어른들 손을 잡고 기다렸다. 세상이 뒤집어졌다는 건 어린아이도 알 수 있었으니, 어머니의 짐이 되기보다 그저 제 동생을 찾아 무사히 돌아오기만 바랐다.

"열 살짜리 꼬마 따위는 캠프에 도움 하나 안 되잖아." 가라앉은 목소리가 말을 잇는다. 그저 온정 하나를 나누며 살아남은 사람들이었다. 피란민을 받아준 스님들. 스님들이 떠난 이후에도 뜻을 이어 어린아이도 보살펴주던 어른들. 당장 먹을 것이 부족해도 아이들의 죽에 한 숟갈이라도 더 퍼주는 손길에 음식이 맛없다 투정할 수도 없었다. 심심하다 투정 부리는 대신 잔가지 하나라도 주워 보태보려다 여린 손에 가시가 박혀 눈물을 참기 일쑤였다.

그날도 그랬다. 캠프가 자리를 잡아가던 때, 어른들은 어디 계시나 묻는 군인을 데리고 관음사로 향했다. 아이들은 멀리 보내고 나누는 이야기는 으레 좋지 않은 것이기에 어렸던 성준수는 창문 너머로 그들을 훔쳐보았다. 제가 데려온 이가 마을을 해코지하면 어쩌나 싶어서였다.

군인이 떠나고 이내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겨울을 대비해 모아두었던 장작들을 가운데 쌓고 정리했던 여름옷도 모조리 가져왔다. 죽은 이들의 무덤을 파헤쳐 썩다 만 몸을 끼워 넣고, 소중히 모셨던 경전도, 나무로 된 불상도 모조리 꺼내왔다. 불을 크게 피우기 위해 태울 수 있는 건 모조리 태워야 한단다. 좀비 소탕을 위해 서울 인근 생존자 캠프를 일소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는 걸 크고 나서야 들었다. 그 군인 아저씨가 태운 척할 테니 불만 크게 피우라 했단다.

힘들지만 연민할 줄 알던 시기였다. 캠프 위치를 들키지 않으려고 불도 제대로 못 피워 그해 겨울은 특히 더 혹독하게 보냈다. 결국 몇몇은 추위를 버티지 못했으나 그 군인의 도움이 없었다면 전부 죽었을 목숨이었다. 관음사 캠프는 그렇게 살아남았다.

"그때랑... 비슷한 분위기 같아. 좋아... 괜찮을 거야......."

잠에 취한 듯 목소리가 느려진다. 영길이 아저씨 말이야....... 느슨해진 사고가 눌러 놓았던 말을 흘린다. 이듬해 봄에 영길이 아저씨가 관음사 캠프를 찾아왔다. 정확히는 성미 아주머니와 그의 아들이었다. 몸이 약한 어머니가 걱정돼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한 아들이 생존자 캠프를 떠돌다 관음사까지 흘러왔단다.

여러 날을 두고 살펴보다 그들은 같이 살기를 택했다. 사람이 아니니 사람과 동등하게 대해줄 수는 없으나 겨우 섞여서 살 수 있게는 해줬다. 그래서 더 마음이 놓였다. 관음사에는 반좀비가 하나였으나 송곡에는 전영중과 같은 이가 여럿이라지 않나. 무리를 지을 정도라면 영길이 아저씨보다는 훨씬 나은 대접을 받을 수 있겠지.

영길은 캠프의 궂은일을 도맡았다. 제 어머니를 옆에서 보살필 수 있게만 해주면 된단다. 마을에서 제일 헤진 옷을 입었고, 거친 일을 하다 살이 패여 뼈를 덜렁 드러내고도 흉한 꼴 보였다며 사람 좋게 웃었다. 저는 아프지 않으니 괜찮다고.

경계하던 아이들도 어느새 영길에게 모여들었다. 어른들이 위험하다고 쫓아내도 호기심은 못 이기는 법이다. 바쁜 어른들과 달리 영길은 일을 미뤄놓고 아이들과 놀아주었다. 다 마친 일은 모두가 잠든 사이에 해치우면 되니까.

겨울에는 많이도 죽었다. 폐에 찬 바람이 드는 것만으로도 힘겨워하는 이가 많았다. 성미는 결국 캠프에 오고도 한 해를 넘기지 못했다. 영길은 손수 어머니를 묻어주었다. 사람을 온전히 묻으려면 어른 키만큼은 파야 한다며 깊은 구덩이를 만드는 영길의 곁을 성준수가 지켰다. 헤진 천으로 감싸고 덩굴로 묶은 성미의 몸을 구덩이 가운데 뉘고 흙을 덮었다. 아무도 모르도록, 파헤칠 수 없게 묘비 따위 만들지 않았다. 일을 마친 영길이 머리를 가볍게 두드려주었다. 흙냄새가 났기에 성준수는 그게 무덤의 냄새라 생각했다.

저를 죽음에서 일으켜 세웠던 어머니가 떠나고도 영길은 캠프에 남았다. 부모 없는 아이들의 보호자를 자처했고, 밤새 알밤을 주워 아이들에게 먹이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영길이 아저씨라 불렀지만 그도 그리 나이가 많지 않았으리라 짐작한다. 성준수는 그가 혈색만 멀쩡했다면 스물 후반의 탐색팀 형이랑 비슷해 보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깊은 밤에 별을 보겠다 빠져나온 아이들을 등 뒤에 끼고 보초를 섰다. 제가 죽기 전에 들었던 아무 이야기나 읊으며 긴 밤을 지새웠다. 이야기의 끝은 항상 같았다. 엄마가 떠나시면 쉬나 했는데, 지금은 너희가 있어서 버틴다.

그 말의 무게를 알았으면 달랐을까. 또래의 아이들은 금방 컸고, 밤에 몰래 나와 죽지도 못한 이의 곁에 앉아있는 것보다 야식거리를 훔치는 데에 더 재미 붙이기 시작했다. 넷이던 무리는 둘에서, 금세 성준수 혼자 남았다. 아무 말 없이 지새는 밤이 지루하다가도, 홀로 남은 이들의 외로움을 공유한다고 생각하면 버틸만했다.

아직도 영길이 아저씨를 따르는 성준수가 무리의 눈 밖에 나는 건 순식간이었다. 어른들은 영길을 사람 취급하지 않은 지 오래였고, 아이들은 쉽게 답습했다. 사람도 아닌 이에게 의지한다는 놀림에 감수성이 막 풍부해지던 시기의 아이는 보호자처럼 따르던 이를 외면했다.

그렇게 한 달여, 영길이 사라졌다.

캠프의 뜯어진 담장으로 오소리가 들어와 식재료를 죄 훔쳐 가서야 말없이 담장을 보수하던 영길의 부재를 깨달았다. 성준수는 이미 3일 전부터 영길을 찾아 틈만 나면 산을 헤맸다. 오소리가 음식을 훔쳐 가고 어른들이 투덜거리며 보수하던 다음날, 폐쇄 표지판이 걸린 등산로 너머에서 영길을 발견했다. 부패하기 시작한 그의 손 아래 진물이 묻은 편지가 눌려있었다.

"이제 자기가... 없어도 될 것 같다며......."

다행이라더라. 혹시나 울까 싶어 얼굴을 들여다보았지만 그런 기색은 없었다. 나른하게 숨을 뱉는다. 나는 아저씨가 같이 있어줬으면 했는데. 꿈꾸듯 몽롱한 목소리였다. 실제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감긴 눈 너머에 그날이 뭉개진 것처럼 그려진다.

캠프에서 삽을 가지고 나왔다. 구덩이는 어른 키가 되도록 파야 한다던 말을 기억해 냈다. 아침부터 단단한 땅을 내려찍고 파헤치기를 한참이었다. 아저씨가 썩어가는 냄새가 났다. 나 때문에 아저씨가 죽은 거야. 내가 아저씨를 외롭게 해서. 내가 아저씨가 없어도 괜찮을 거라 여기게 해서. 삽 손잡이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눈물은 이내 땀과 섞이다 고된 노동이 이어지자 어느 순간 멎었다. 해는 중천을 넘어 저물어가고 배에서는 꼬륵 소리가 났다. 부들거리는 팔로 마지막 흙을 던지고 구덩이를 기어 올라왔다. 퉁퉁 부은 손바닥이 그저 아프기만 했다. 땀 냄새와 시큼한 썩은 내가 섞인다. 영길이 아저씨를 구덩이에 밀어 넣고 흙을 덮었다. 성미 아주머니를 묻어줄 때처럼 아무 표지도 세우지 않았다. 이래서 아저씨는 손수 구덩이를 팠을까. 구덩이를 파는 행위는 애도나 다름없었다. 내내 자신을 집어삼킬 것 같던 슬픔은 배고픔과 통증으로 더 이상 울지 않아도 될 만큼 그럭저럭 걷혔다.

아저씨를 묻어줄 수 있어서 다행이었지.

온전하게 썩어들어갈 수 없는 세상이니까. 태울 게 없으면 시체라도 태워야 했다. 그때는 삽질이 힘들기만 했는데, 돌이켜 생각하면 아저씨를 묻어줄 수 있어 다행이었다. 한편으로는 두 번 다시 누군가를 묻어주기 싫었고.

전영중이 필요했다. 그는 좋은 친구였고 보호자였다. 처음 본 순간 든 강렬한 예감이었다. 우리는 서로가 필요할 거라고. 너의 외로움을 나로 채우고, 나의 외로움에 널 집어넣는 공생관계가 되리라. 제 손목을 붙잡는 체온 없는 손길에 영길이 아저씨가 생각났다. 자신은 영길이 아저씨의 외로움을 공감할 유일한 사람이었다. 남영길. 아무도 몰랐던 아저씨의 성. 쪽지에 적혀있어서 알 수 있었어. 아저씨 성 말이야. 영길이 아저씨. 나라도 알아서 다행이지. "준수야." 고작 한 달 모른 척했다고, 아저씨는 날 두고 떠났어. 외로워서? 이제 자신이 쓸모없다고 생각해서? 그렇다면 그건 내 탓이잖아. 내가 그렇게 생각하게 만든 거잖아.

너와 그런 사이가 되기 싫었어. 나는 사람과 엮이며 살 수밖에 없는데, 내가 잠시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사이에 널 떠났다 받아들이고 죽을까 봐. 또 나만 남겨질까 봐 무서웠어. 그래서 네가 어떻게 온전히 죽을 수 있는지 비밀로 했어. 네 죽음의 이유가 내가 되기 싫었어. 차라리 친해지지 않으려 했어. 근데 안 되더라. "성준수." 넌 다정하잖아. 종종 미친 것 같지만, 결국 너도 날 떠나기 싫어서 그랬던 거잖아. 그러니까 여기서 헤어지자. 그게 좋을 것 같아. 우리 서로 잘 지낸다는 소식만 주고받자. 그거면 돼. 네가 잘 지냈으면 좋겠어. 오래 살아줘.

"너 괜찮아?"

"괜찮아. 이거면 괜찮아."

제게 파묻은 얼굴을 잡아 든다. 답지 않게 잘도 조잘대는 주제에 얕게 뜨인 눈이 몽롱하다.

아무리 마지막 날이라 감성에 젖었다 해도 제가 아는 성준수는 속에까지 까발리는 놈이 아니었다. 약한 모습 보이기 싫어 꾸역꾸역 다 녹슨 야구방망이를 들이대며 보지 말라 윽박지른다면 모를까. 전영중....... 이름 석 자를 느리게도 내뱉는다. 간결하고 명확하게 말하던 놈이 꼭 교태라도 부리는 모양새였다.

이거 상태가 왜 이래?

연기가 짙다. 아무리 방이 좁아도 보통의 허브 다발을 잠깐 태웠다고 이리되진 않는다. 스머지스틱을 쥐고 침대를 빠져나온다. 움직이는 소리를 좇던 성준수가 무기력하게 눈을 감았다. 창문, 안 열리고, 문, 잠겼다. 그럴 수 있다. 손님방에 들어가 있는 게 진짜 손님인지 좀도둑 새끼인지 장담할 수 없으니 방에서 함부로 못 나오게 감시하는 게 맞다. 철컥철컥. 아무리 문손잡이를 비틀어도 밖에서는 반응이 없었다.

근데 이따위 수작질을 해놨으면 그럴 수 없지.

곧장 발을 들어 문고리를 내리찍었다. 쾅! 통증을 느끼지 못하니 뼈가 부러지든 말든 손속을 둘 이유가 없었다. 쾅! 소음에도 성준수는 이불에 파고들 뿐이었다. 쾅! 평소라면 제가 더 긴장해 벌떡 일어났을 녀석이. 콰직! 합판으로 된 문이 버티지 못하고 부러진다. 어설프게 걸린 문고리를 비틀어 빼내자 문이 무기력하게 열린다. 무기를 쥔 이들이 일제히 전영중에게 손전등을 비추었다.

하여간 어설픈 애새끼. 제 딴엔 세상을 많이 겪어봤다 바락거렸지만 결국 한 캠프에서 보호받으며 큰 어린애였다. 분위기가 좋아? 좋은 사람들 같아?

캠프 초입에 피어있던 붉은 꽃잎의 야생화가 뭔지는 알까. 너를 대하는 시선에 조소가 섞인 건 눈치챘을까. 네가 깬 이후로 나와는 제대로 말 한마디 섞으려 들지 않았다. 네가 캠프에 맡기며 들어온 짐이 벌써 분해된 건 알고? 입구에 쌓아놓은 무기 중에 손잡이를 줄기로 감아 둔 야구방망이는 봤어?

연기가 피어오르는 스머지스틱을 던졌다. 그들을 캠프로 데려온 이가 스틱을 주워 물이 고인 양동이에 담갔다 꺼낸다.

"우리 애 아편쟁이 만들지 말고 어른들끼리 협상하자고."

툭툭. 물기를 털어낸 그가 아무에게나 허브 다발을 건네고 팔짱을 꼈다. 낮과는 다르게 사뭇 고압적인 자세였다.

"내가 살면서 송장 새끼랑도 협상을 하게 생겼네."

저를 향한 비웃음이 쏟아진다. 송장 맞고, 불리한 입장도 맞으니 비웃을 만 하지. 전영중은 선선히 인정하며 웃음이 멎기를 기다렸다.

성준수의 짐작 중 맞은 건 하나도 없었다. 하여간 까칠한 주제에 사람은 좋아서 경계할 줄도 모르고.

이런 널 어떻게 혼자 부산까지 보내지. 준수야, 나는 네가 걱정돼 눈도 못 감게 생겼다.


어디서 구한 건지 전영중이 빈 목걸이를 가져와 제 인식표 하나를 꿴다. 분명 간밤에 잘 잤는데도 출발 준비를 마치도록 정신이 또렷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피로가 많이 쌓였나. 길게 늘어진 목걸이를 들이밀자 고개를 살짝 숙였다. 차가운 금속 줄이 목덜미에 닿고, 커다란 손이 조심스레 인식표를 내려놓았다.

"이건 왜?"

"준수 미아 방지 목걸이."

"뒤질래?"

"갖고 있어. 보호자 찾으면 내가 걔 보호잡니다 하고 달려가게."

"하......."

평소처럼 울컥 치미는 기분은 아니라 한숨만 쉬고 말았다. 이제 작별이니까 그런가. 인식표를 옷 안으로 밀어 넣는 게 다였다. 한 걸음 떨어져 보던 전영중이 그를 당겨 깊게 끌어안았다.

"잘 가."

"너도 잘 지내."

"아무나 믿지 말고."

"당연한 말을."

"낯선 사람 함부로 따라가지 말고."

"......뭐래."

"남이 뭐 줘도 덥석 받지 말고."

"새삼 잔소리는."

"아무거나 받아먹지 마."

"왜 이래?"

거칠게 밀어내도 전영중은 하하 웃기만 했다. 옷매무새를 한참 만져주던 전영중이 캠프 입구로 그를 이끌었다.

"여유 되면 가끔 편지라도 해. 난 그거면 돼."

가. 등을 떠밀자 캠프 문이 열린다. 캠프에 거래를 위해 들렸던 사람들이 몸을 일으켰다. 성준수는 그들의 도움을 받아 대구까지 내려갈 예정이었다.

"쉬지 말고 가. 인사는 어젯밤 충분히 했잖아."

무리 중 한 명이 성준수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손을 흔들어 배웅하는 전영중에게 저도 다급히 손을 들어 흔들었다. 여운을 가질 틈도 없이 쫓겨나듯 걸음을 재촉한다. 굽이치는 산길을 내딛다 짧은 순간마다 돌아보면 전영중은 나무 사이로 여전히 성준수를 보고 있었다.

다섯이던 일행은 빠르게 줄었다. 마을 갈림길에서 둘은 곧장 상주 방향으로 올라갔고, 한동안 함께 이동하던 한 명은 칠곡에서 헤어졌다. 대구로 향하는 건 성준수와 그곳에서 장사한다는 조성수 둘 뿐이었다.

나누는 말은 적었지만 그는 자주 성준수를 챙겼다. 물이라던가 먹을 걸 자주 권했는데, 남이 주는 걸 함부로 받지 말라던 말이 맴돌아 거절하고 제 걸 마셨다.

"진짜 송곡 캠프에서 신원보증 해줬어요?"

대구의 초입에서야 그가 물었다. 뭐야, 캠프 사람들 부탁으로 동행한 거 아니었나? 왜 새삼 묻지? 저의를 알지 못해 조용히 있자 앞만 보던 그가 흘끔 성준수를 훑었다. 재촉이다.

"......네."

"허어."

확실한 대답을 바란 것치고 반응은 싱거웠다. 남자는 대구에 도착하고도 곧장 헤어지지 않고 제가 장사한다는 시내 구석에 위치한 상가까지 성준수를 데리고 갔다. 잠시 앉아있으라는 말에 성준수는 주변을 살피며 플라스틱 의자에 걸터앉았다. 아무나 믿지 말라던 당부가 떠오른다. 언제든 달려 도망갈 수 있게 다리를 밖으로 빼고 주변을 살폈다. 돌아다니는 사람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캠프의 부탁을 받고 자신을 대구까지 데려다주기로 약속한 사람이니 이제 와 해코지할 가능성은 낮지만....... 전영중과 헤어진 뒤로 날 선 불안이 가시질 않았다.

조성수는 안쪽에 짐을 내려놓고 담배 한 개비를 가져왔다. 입에 물려다 말고 내밀며 물었다. 피울래? 성준수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두 번 권하지 않고 두껍게 만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나도 그쪽에 잘 보여야 하는 처지라 원래는 이런 말 하면 안 되는데......."

길게 내뱉는 연기 냄새가 역했다. 어른들이 피던 담배와는 달랐다. 어딘가 썩은 듯 쿰쿰하면서도 톡 쏘는 풀냄새였다.

잠시 머리를 긁적이던 그는 거북함을 숨기지 못하는 모습에 보고 고개를 반대 방향으로 돌리고 연기를 뱉었다.

"대마 냄새 싫어해요?"

"대마요?"

눈을 동그랗게 뜨다 이내 경계하는 모습에 그가 혀를 찼다. 재떨이를 가져와 제가 피던 대마를 짓이겨 껐다.

"진짜 아무것도 모르네. 그 캠프 정식 소속은 확실히 아닌 거죠?"

"지나가다 송곡 쪽 요청으로 하루 들린 거예요."

"그 산송장 거래하러?"

"산송장이요?"

"캠프에서 헤어진 그쪽 친구 같은 치들. 뭐라고 부르는지도 몰랐어?"

몰랐다. 자기 앞에서는 한 번도 그렇게 부르지 않았으니까. 허벅지에 올려놓았던 손에 힘이 빠졌다. 아무튼 운 좋은 줄 알고 다른 데서는 송곡 캠프 얘긴 꺼내지도 마요. 신원보증이 필요하면 내가 대신 해줄게. 어디까지 간다고 했지? 부산? 그가 철로 된 서류함에 열쇠를 꽂아 서류를 가져온다. 기어이 제 손에 서류가 쥐어지기까지, 성준수는 무언가 물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전부 이상했다. 이상한데, 대체 뭐가? 뒤엉킨 생각이 좀처럼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숨통을 막는다.

"......왜 도와주세요?"

대구 상인회 연향 대표 조성수. 인감이 찍힌 조악한 서류를 보고 내뱉은 말이라는 게 겨우 그거다. 그는 옳은 사람이 아니다. 처음 맡는 대마 냄새의 쿰쿰함이 그가 어떤 일을 하는지 짐작케 했다. 그런 그가, 등쳐먹어도 이제 뭐라 할 사람 하나 없는 어린애에게 보답받을 가능성 없는 선심을 베풀었다.

"나 같은 놈도 죽어서 염라대왕 앞에 섰을 때 변명거리 하나쯤은 만들어 둬야지."

그러나 이런 빌어먹을 세상만 아니면 그가 옳은 일을 하며 살 수도 있었으리라.

그는 성준수의 배낭에 비상식량 몇 개를 더 챙겨주고 떠밀었다. 이 근방도 웬만하면 오지 마요. 사람 너무 믿지 말고. 중앙로역 근처에 평화장이 있는데, 사장님한테 내 이름 대면 하룻밤 재워줄 거요. 빨리 가. 내일 아침 일찍 떠나. 송곡 캠프 얘기는 아무한테도 하지 말고. 그냥 잊어. 운 좋게 연명했으면 무탈히 지내야지.

아무런 위협도 없고, 푹신한 이불에 감싸인 안온한 밤이었다. 그러나 성준수는 조금도 잠이 오지 않았다. 친구의 비명이 들리던 그날 밤처럼, 소리를 갖지 않은 무언가가 날카롭게 귀를 후비는 느낌이었다. 내가 뭘 놓쳤지?

막연한 와중에 하나는 확실했다. 전영중을 그렇게 두고 오면 안 됐다.

처음부터 되짚어보자. 그들은 처음 목표였던 전영중에게 접근했음에도 굳이 자신을 캠프로 데리고 갔다. 반좀비를 아는 사람이라면 둘 사이에 어떠한 귀속 관계가 없다는 걸 알 텐데도 소유물을 대하듯 거래를 원했다.

애초에 왜 전영중을 원했지? 그쪽 노동력이 줄어서.

그쪽 노동력이 줄을 이유는? 죽는 것밖에 없지.

반좀비가 죽을 이유는? 그가 외로움을 느끼기 했기 때문에.

다른 반좀비와 있는데도 외로웠다고?

애초에 외로움이 반좀비를 죽인다고 누가 그랬지? 모두 짐작일 뿐인데.

다시, 의문을 처음으로 되돌리자.

전영중은 자신을 깨울 때 이미 헤어지기를 결심한 상태였다. 그를 설득하기만 하면 되는데도 번거롭게 캠프에 성준수를 초대하고, 먹이고, 재우는 수고를 들였다. 굳이 거래와 납득이라는 이유를 갖다 붙이며.

왜? 그의 노동력을 온전히 얻기 위해. 그리고 그 아저씨의 말. 운 좋게 연명했으면 무탈히 지내라고.

전영중의 사용에는 어쨌든 성준수가 필요하다는 결론밖에 없다. 그래서 캠프는 성준수를 불러들였고, 전영중은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어떤 식으로든 합의를 보고 아침이 되자마자 성준수를 내쫓았다.

어깨에 흘러내린 인식표의 감각이 아직도 낯설었다. 줄 게 없어서 제가 가진 유일한 걸 나눠줄 수밖에 없던 비루한 새끼. 가끔 편지만 보내만 된다던 개자식.

이불을 접고 제대로 풀지도 않은 배낭을 둘러멨다. 여관을 나가려는데 문이 잠겨있었다. 덜컹거리는 소리에 여관 주인이 총을 들고나왔다가 한숨 쉬고는 그를 안쪽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안전을 위해 5시까지는 못 열어준다며 컵라면에 끓인 물을 부어 건넨다. 따끈한 국물에 며칠째 둔했던 머리가 깊은 잠에서 깬 듯 이제야 맑아졌다. 여관 문이 열리자마자 성준수는 보증서를 써주었던 아저씨에게 달려갔다.

"아저씨. 죄송한데 한 번만 더 도와주세요."

눈 밑이 깊게 파인 이들이 지폐를 건네다 성준수를 본다. 뭐야, 조 사장. 애도 키워? 킬킬거리는 이들을 조성수가 손을 휘저어 내쫓았다.

제 거, 여기서 쓸모 있는 건 다 가져가셔도 돼요. 대신 필요한 것 좀 구해주세요. 배낭을 열어 위에서부터 하나둘 꺼내다 아예 뒤집어 쏟아버렸다. 조금도 자지 못해 눈 밑이 거뭇했으나 여느 때보다 절박하고 치기 어린아이의 모습이었다.

"부탁할게요. 도와달라고 할 데가 아저씨밖에 없어요."

그것이 조성수의 마음을 흔들었다.

납작 짓뭉개진 꽁초들에 끝이 잔뜩 씹힌 필터가 하나 더 더해진다. 큼직한 발이 화풀이하듯 몇 번이고 꽁초를 비볐다. 너덜해진 필터 일곱 개에도 성에 차지 않아 전영중은 한 개비를 더 꺼내 입에 물고 빈 담뱃갑을 구겼다. 불을 붙이고 가느다란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과 거의 동시에 멀리서도 연기가 피어올랐다.

저를 캠프로 데리고 갔던 아이는 키만 컸지 얼굴은 어린 티가 역력했다. 애들 나이는 가늠을 잘 못 하지만 중학생도 안 되지 않았을까. 절에 자리 잡은 생존자 무리엔 특이하게도 그 나이대 애들이 여럿 보였다. 보통은 애들 먼저 버리던데.

저 불을 피우느라 소비한 땔감은 얼마일까. 저 치들이 올겨울은 무사히 날 수 있을까. 그렇다고 살아남기 힘들 텐데 고통스럽지 않게 죽여줄 테니 순순히 죽어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잖나. 당장 배를 곯더라도 하루를 더 살아가려고 모여든 이들에게 어떻게 그런 말을 해. 그것도 군인이나 돼서.

자국민에게 총을 쏘려고 입대한 게 아니다. 좀처럼 가시지 않는 답답함에 깊게 숨을 마시자 매캐한 연기가 폐를 가득 채운다. 폐병도 산재로 쳐주나. 쳐줘야 할 것 같은데. 숨을 아끼지 않은 탓에 연초는 순식간에 타버렸다. 가래와 함께 꽁초를 뱉고 어김없이 짓밟는다. 씨발. 모든 게 좆같았다.

가느다랗던 연기가 몸집을 불리고, 나무 사이로 붉은빛이 보여서야 전영중은 몸을 일으켰다. 살려둔 거 들키면 어떡하지? 어떡하긴 존나 까여야지. 아니면 하극상이라도 해? 탈영? 전산도 마비됐는데 탈영병이 생겼는지 어떻게 알겠어? 이런 상황이면 적당히 전사 처리되겠지. 어디는 관심병사인 일병 새끼가 이병 둘 달고 무장 탈영했다고 소문 돌던데.

그러면서도 몸은 착실하게 산을 내려간다. 입구에 집합시켜 놓은 중대원들을 입단속 시키고 복귀할 예정이었다. 김 소위나 채 중위, 서 중위는 문제가 아닌데 밑에 놈들이 입방정 떨다 어떻게 말이 새어나갈지 몰라 걱정이다. 고 상사님이 애들 잘 잡아주셔야 할텐데....... 터덜거리며 좁은 등산로를 내려가던 전영중이 발소리에 뒤로 돌려 맨 소총을 겨누었다가, 다가오는 이를 알아보고 손을 올려붙였다.

"어어, 쉬어. 전 대위도 수고가 많아. 중대장 달았으면 애들 시킬 것이지 몸소 뛰어다니고."

"......뭐 좋은 꼴이라고 어린애들 시킵니까. 제가 해야지."

평소 같은 입에 발린 대답조차 하기 싫었다. 중령의 웃는 낯에는 흔들림이 없었으나 두터운 손으로 제 뒤통수를 후려치고 싶어 하는 게 느껴졌다. 비정상적으로 길어지는 침묵을 보면 그랬다. 이제 와서 군기 잡아 어쩔 건데? 삐딱한 생각이 머리 한구석에 똬리 튼 참이다.

"그래서 병사들 먼저 내려보내고 혼자 움직였나?"

"민간인 대상이니 장교들만으로 충분히 대응 가능하다 판단했습니다."

곁눈질로 하늘 높이 솟는 연기를 본다. 부탁대로 불을 크게 피워줘서 다행이었다. 얼굴을 굳혔던 중령은 이내 인자하게 웃으며 전영중의 어깨를 두드렸다.

"수고했네.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확인하러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나라고 마음이 편했겠나."

빈정거림을 모른척하며 그가 말했다. 별로 유감스러워 보이지 않는 표정이었다. 품에서 얇은 수통을 꺼낸 그가 뚜껑을 열어 내밀었다. 독한 알코올 냄새가 났다.

"사양하겠습니다."

"마셔. 이게 어디 맨정신으로 할 일인가."

알면서 시켰냐, 개자식. 군인정신은 잘도 운운하더니. 거둬지지 않는 손을 물끄러미 보다 수통을 받아 물었다. 평소라면 근무 중 음주는 어림없었으나 순전히 배알이 꼴려 저지른 짓이었다.

알코올이 식도를 태우듯 긁고 내려간다.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내밀어지는 것을 중령이 받아 갔다. 목울대 몇 번 움직였다고 수통은 내용물이 반 넘게 비어있었다. 독했을 텐데 잘 마시는구먼. 중령이 뚜껑을 닫고 흔들더니 말했다.

"그래서, 캠프를 수색한 인원은 몇인가?"

"......저 이외 소대장 셋으로 총 사 인입니다."

순식간에 취기가 오르듯 현기증이 일었다. 전영중이 잠시 비틀거리느라 대답이 늦어도 중령은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많이 독할 거야. 내 일부러 좀 독한 걸로 준비했지. 급하게 마신 독주에 구역감이 올라왔다. 울컥 치미는 것을 삼킨 전영중이 흔들리는 시선으로 중령을 보았다. 그가 손바닥만 한 권총의 슬라이드를 당겼다 놓는다. 철컥. 그거 아나?

"자네 중대는 자네 때문에 버려진 거야."

순전히 운이었다. 살겠다고 치켜올린 소총에 탄환이 튕겨 나갔다. "그 못마땅하다는 눈깔 때문에 백 명이 죽는 거라고!" 어지러운 몸이 그 반동조차 못 견디고 휘청이는 틈에 중령이 명치를 걷어찬다. 뒷걸음질 치다 넘어지기 직전 나무에 부딪히며 엉거주춤 기댄 전영중의 손아귀에서 총을 앗아간다. "어찌 국가가 국민을 버리겠어. 그냥 재수가 없었을 뿐이지." 몇 번이고 헛손질하다 겨우 나무를 짚어 일으킨다. 저를 겨눈 권총을 보고 무작정 몸을 던졌다. 퍽! 등 뒤에서 나무에 총알이 박히눈 소리가 났다. "관악산 생존자 집단엔 이미 좀비밖에 남지 않았고, 자네 중대는 전투 중 감염된 병사 하나 관리 못 해 전멸." 몸을 일으켜야 하는데 팔이 떨린다. 다시금 속에서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을 결국 참지 못하고 게워 냈다. 투명한 술과 위액이 아닌 피가 섞인 덩어리였다. "생존자들은, 자네들은 그렇게 죽은 거야." 술에 뭘 탔는지 알 만했다. 개자식. 개새끼들. 허술하기 짝이 없는 시나리오였다. 사람들은, 우리는 이렇게 버리고 저들끼리 서울에 벽을 치고 안전하게 살겠다고.

속을 뒤집어 쏟아내며 생리적인 눈물에 흐리던 시야가 더 부얘졌다. 그럼에도 중령이 제가 바닥을 구르는 꼴을 기껍게 보는 것만큼은 선명하게 보였다. 시야가 살아있는 것만을 명징하게 잡는다. 저 건방진 새끼의 목덜미를 찢고 싶었다. 눈을 파내고 손가락을 뜯어먹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힌다. 결단보다 먼저 몸이 반응했다. 발을 마구잡이로 굴러 달려든다.

권총이 불을 뿜는 동시에 전영중의 앞에 누군가 끼어들었다. 중령의 어깨를 쥔 이가 드러난 살갗을 물어뜯었다. 아아아아악! 처절한 비명에 격발음이 섞여 들었다. 흐려지는 이성 속에서 제 뱃속에 파고든 것을 느낀다. 복부 오른쪽에 불이 옮겨붙은 듯한 격통이 느껴졌다.

"전, 대...... 위야, 도망......!"

핏줄이 불거지고 까맣게 변색된 손이 전영중을 밀어냈다. 고 상사가 끓는 목소리로 말을 마치기도 전에 머리가 터진다. 거세게 밀치는 힘에 전영중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탈을 굴렀다. 아파. 채 중위는? 나무에 얻어맞고도 멈추지 않은 몸은 깊은 계곡 아래까지 힘없이 굴러간다. 서 중위도 이런 꼴을 당했나? 정신이 흐려질 때마다 제가 아는 이름들을 새긴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다 마침내 멈췄다. 배가 축축했다. 힘이 들어가지 않아 몸도 못 일으키고 옆을 더듬었다. 자연의 것이 아닌 뻣뻣한 감촉에 고개를 돌렸다. 질기기는 더럽게 질긴 녹빛의 군복이었다. 김 소위.

초점을 잃은 눈과 마주쳤다. 뺨이 아직 따듯하다. 더듬더듬 코를 덮었으나 숨은 느껴지지 않았다. 밤에 몰래 찾아와 차마 밑에 놈들 앞에서 울 수 없었다고 제 앞에서 부모님 이름을 부르며 흐느끼던 이 병장도 있었다. 낙엽을 부수며 흘러 내려온 것이 옆구리에 부딪혔다. 격통에 손을 대지도,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맥없는 신음만 흘렸다. 머리 절반이 박살 난 고 상사였다.

그냥 살고 싶었을 뿐이다. 우리도, 그 사람들도. 함께 살아남고자 했던 결과가 이따위였다. 중령의 말대로 제 탓이라 생각하진 않았다. 그런 새끼도 있는 거지. 돕는 놈이 있고, 뺏는 놈이 있고, 살리려는 나 같은 놈도 있고, 다 죽이려는 중령 같은 새끼도 있고.

전영중은 빨리 중령이 좀비가 되어 사살당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자신은 어서 죽기를. 좀비가 되어 행여라도 자신이 살린 사람들을 물어뜯으면 안 되니까. 그건 너무 비참하잖아. 흐려지는 정신이 사람을 잡아먹는 몸으로 변해가서가 아니라 죽음이 가까워서였으면. 제발.

그래도 다행이지. 그 사람들은 살릴 수 있어서. 가쁘던 숨이 점점 옅어진다. 발작처럼 경련하던 손끝이 점점 잦아든다. 아, 죽나보다. 다행이야. 이제 산을 뒤지지 않는 한 생존자 무리는 한동안 안전할 것이다. 그 사람들은, 그 애들만은 무사하기를.

전영중의 마지막 미련이었다.

그러니 아이의 울음소리에 어설프게 감았던 눈을 다시 뜰 수밖에 없었다.

"뭐, 그런 류지."

그는 별 감흥도 없이 동조했다. 잘게 자른 대마잎을 종이에 올려 도르륵 마는 손길이 익숙했다. 적신 스펀지로 종이 끝을 훑고 꾹 누른다. 그의 옆엔 말린 대마가 벌써 몇 박스였다. 전영중은 그보다 어설픈 손길로 대마를 말았다. 고르지 않게 퍼진 잎이 자꾸만 새는 걸 무시하고 대강 말았다. 초짜한테 맡겼으면 이 정도 불량은 감수해야지 어쩌겠어. 어차피 직업의식도, 애정도 없는 일이다.

"미련보다는 불안 아냐?"

"걱정일지도. 일단 나는 그래."

"걔는 외로움이라던데."

"그건 아니지."

작은 웃음소리가 여럿 들렸다. 신고식처럼 하던 행위였다. 너 죽은 이야기 좀 해봐. 살던 이야기도 아니고 죽은 이야기라니. 송장끼리니까 가능한 농담이었다. 그걸 시킨다고 아무렇지 않게 읊던 전영중도 전영중이었고.

그들은 꽤 집중해서 전영중의 말을 들어주었다. 비닐하우스를 관리하고, 대마를 말고, 마약을 제조한다. 휴식도 필요 없는 그들에겐 이야기 외엔 마땅한 오락거리가 없었다.

"근데 왜 아직도 살아있어?"

"걱정돼서?"

"거봐, 걱정이라니까?"

"뭐가 걱정되는데? 네 친구는 캠프에서 내보냈다며."

"그냥....... 걔는 좀 무모한 건지, 대범한 건지... 도통 안심이 안 돼."

이 토론은 전영중의 이야기에서 파생된 '죽지 못한 이유'였다. 세분화한 이유는 달랐지만 어쨌든 함께 다니던 사람이 걱정되어서라는 건 다들 동의했다. 적어도 외로움 때문에 죽는 건 아니었다. 하여간 성준수, 뭐 하나 제대로 맞추는 게 없다니까.

"그래도 부럽다. 난 걔가 그렇게 살 줄 알았으면 여기 안 왔어."

죽어버린 몸은 감각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둔해진다. 희로애락에 대한 갈망 역시 흐릿해진 와중에 자신이 살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만은 모든 게 선명했다. 내 친구가, 가족이, 연인이 안전한 곳에서 굶고 지내지 않았으면 했다. 둔감한 몸이니 그 사람이 잘 지낸다면야 고생 조금 대신 하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걔가 그런 꼴로 살길 바라지 않았으니까."

숨 쉬지 않는 이들은 한숨으로 동의를 표하지 않았다. 다만 입을 다물 뿐이다. 설마 자신들을 죽지 못하게 묶어두려고 그들을 포로로 붙잡아둘 줄은.

불도 켜지지 않은 비닐하우스에는 마른 풀과 종이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보는 데 불편함이 없으니까. 대마를 채운 상자를 들어 올리는 손에는 손가락 한 마디 반이 잘려 뼈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낫에 살점이 뜯긴 사람. 불에 얼굴이 그을린 이. 통증을 느끼지 못하고 상처가 곪지 않으니 다쳐도 신경 쓸 필요 없는 송장들. 마을에서 제일 허름한 옷을 입고 궂은일을 도맡았다던 영길이 아저씨처럼.

비닐하우스를 감시하는 인력도 없는데 그들은 자발적으로 이곳에 남았다. 대마를 말고, 마약을 제조한다. 그중 일부는 자신의 친구였던 이가 사용할 것이었다. 성준수에게 했던 것처럼, 사람 좋은 척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하고 마약에 노출시켜 중독시키는 수법이었다. 그 사람이 캠프를 떠나지 못하게 만들고, 산송장들은 그들을 보살피기 위해 눈을 감을 수 없도록.

전영중은 캠프에 지켜야 할 사람이 없는 유일한 산송장이었다. 거래는 간단했다. 원하는 노동력을 제공할 테니 성준수를 무사히 내보낼 것. 아니면, 머리가 터지는 순간까지 반항해서 캠프를 작살내고. 하이에나에게서 전영중의 악명을 들은 캠프 사람들은 쉽게 요구를 들어주었다. 어차피 원하는 건 산송장뿐이었다.

지금쯤이면 성준수가 대구에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성준수의 안전을 요구했으니 적어도 대구까지는 확실히 갔을 것이다. 운이 좋으면 벌써 부산에 다다랐을 수도 있지. 그럼에도 안심이 안 된다는 말은 정말이었다.

양귀비를 정제하기 위해 준비했던 플라스크에 불을 붙이려던 손을 멈춘다. 해가 뜨려면 한참 남았는데도 숲 구석에 서광이 비치듯 밝아졌다. 드문드문 비추던 빛이 나무를 잡아먹고 높게 솟는다. 귀를 찢을듯한 조악한 경고음이 사방에서 터졌다.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말도 안 되는 짐작에 가슴이 뛰는 것처럼 설렌다.

"전영중!"

내가 말했잖아. 안심이 안 된다고.

"어딨어!"

부산에 갔어야지. 왜 돌아왔어.

챙강! 비닐하우스 바로 밖에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불이 붙는다. 투명한 비닐이 순식간에 녹아내리며 비닐하우스가 허물어졌다. 푸하핫! 죽은 이들이 드물게도 유쾌하게 웃었다. 너도, 네 친구도 보통 아니네. 기름을 따라 작업장으로 흘러들어온 불이 대마며 집기에 옮겨붙어도 누구 하나 끄려 들지 않았다.

"미안. 애가 찾아서 가봐야겠다."

"그래."

"너희는?"

그들의 시선이 캠프 안, 중독자들을 모여있을 곳을 향한다. 일단 구해 봐야지. 저대로 살게 둘 수 없으니까. 때마침 캠프를 감싼 목책에 화염병이 던져진다. 비닐하우스로 바로 올 수 있도록 후문으로 만들어놓은 곳이었다.

캠프 안에서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소란에 잠에서 깼으나 불 때문에 밖으로 나오진 못한 모양이었다. 성준수는? 화염병이 여기 떨어진 거 보면 근처에 있을 텐데? 발소리가 뒤쪽에서 들린다. 쇠를 걷어차고 비닐을 찢는 소리가 났다.

"전영......!"

"저거 대마 연기니까 가지마."

무작정 비닐하우스 안으로 들어가려는 녀석을 붙잡는다. 머리 위로 날아오던 야구 배트가 가까스로 멈췄다. 오, 이번엔 진짜 치는 줄. 깡! 아니다. 진짜 쳤다.

"왜 때려!?"

"너는, 씨, 아프지도 않잖아! 더 맞아!"

"아프진 않아도 기분 나쁘거든? 그리고 피부 찢어지면 낫지도 않아!"

진짜 머리 깨지면 어쩌려고. 휘두르는 걸 곱게 맞아줄 전영중도 아니었기에 처음 한 대 빼고는 이리저리 피하긴 했다. 가볍게 두드리려던 것이 약이 올랐는지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제 옆을 스치고 간 배트를 옆구리에 꽉 끼우고 이제는 야구 배트를 뺏으려 힘 싸움을 시작했다.

"씨발아!"

"왜 왔어."

"너는 왜 보냈는데!"

성준수가 손을 놓차 안간힘을 쓰며 당기던 몸은 쉽게 넘어졌다. 우당탕, 뒤로 구르는 와중에도 야구 배트는 뺏길세라 꼭 쥐었다. 놓쳤다가는 냉큼 주워 저를 흠씬 두들길 기세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애새끼 취급하니까 좋냐? 재밌었어? 여기가 어딘지 알고 남아!"

그랬더니 서슬이 시퍼레서는 앞으로 맨 가방에서 유리병을 꺼내 꽉 쥔다. 액체가 찰랑찰랑하고 끝에 천이 끼워진... 화염병이다. 작정하고 처들어 왔네.

"......네가 같이 못 있겠다며."

"이런 데서 노예처럼 살란 소리가 아니었잖아!"

나라고 이럴 줄 알았나. 도착해서야 알았지. 그러니까 너라도 빼내려고 거래한 건데 남의 노력은 모르고. 전영중이 투덜거리며 몸을 일으키자 성준수가 천 끝에 불을 당겼다. 왜... 왜?

한껏 젖혀 제 쪽으로 던지려는 듯한 동작에 전영중이 몸을을 숙였다. 챙강! 정확히 망루에 명중한 유리병이 깨지며 불이 옮겨붙는다. 총을 들고 올라가 있던 이가 욕설을 뱉으며 뛰어내렸다.

"......네가 이런 대우를 받는 게 아니라 무사히, 잘 지냈으면 했던 거야."

"나도 그랬어."

전영중이 배트를 돌려 손잡이를 꽉 쥔다. 어둠을 성급하게 달려오는 이의 머리를 정확하게 노려 휘둘렀다. 깡! 시원한 타격음 사이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네가 부산이든 어디든, 안전한 곳에서 잘 지내길 바랐어."

쓰러진 이의 어깨에서 총을 벗겨낸다. 물자가 풍족한 캠프여서 그런지 탄창이 꽉 차 있었다.

"큰일 났네. 이 깽판을 쳤으니 준수 다시 수배당하겠는데?"

"너 때문이니까 알아서 책임져."

"웃긴다. 이게 왜 나 때문이야? 네가 돌아와서 다 때려 부순 탓이지."

"네가 멋대로 여기 남았으니까 온 거 아냐."

야구방망이를 내밀자 받아 가는 손이 덜덜 떨렸다. 무서웠나? 무서웠겠지. 제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캠프 하나를 뒤져야 하니. 저 시끄러운 소리도 인근 좀비들은 전부 유인해 혼란을 가중하기 위해서일 테고. 열심히 머리 굴린 게 틀림없다.

캠프의 주 수입원인 대마와 양귀비를 키우는 비닐하우스에 불이 걷잡을 수 없이 옮겨붙었다. 후문에 화염병을 던진 덕에 그쪽에서 달려 나오는 사람은 없었다. 요행인지, 아니면 알고 던진 건지. 캠프 안쪽에서는 불을 끄려고 소란이 일었다.

그럼 저 사람들이 나오기 전에 발바닥에 땀나도록 도망쳐야 하는데. 캠프 하나를 상대해야 하니 분명 쉬운 일은 아닐 테지만, 마침 저를 도와줄 이들이 있었다.

"화염병 남은 거 있어?"

죽지 못한 이들이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를 되찾기 위해 걸어 나왔다.

부산까지는 거의 쉬지 않고 걸었다. 추격대가 쫓아오거나, 하이에나에게 소식이 풀리기 전에 최대한 부산 가까이 가야 했으니. 낮 동안은 에너지바 같은 걸 먹으며 걸었고, 밤에는 쪽잠을 자거나 전영중이 업고 이동했다. 짐은 대구에서 대부분 정리해 얼마 되지도 않았다. 낡은 배낭과 야구 배트, 음식 몇 개가 전부였다.

밤에는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어둠을 틈타 습격하는 이들이 많았다. 다 보인다니까. 전영중이 어렵지 않게 그들을 쏘면 총소리에 놀란 성준수가 허우적거리며 일어나다 쥐가 난 다리를 움켜쥐기도 했다.

부지런하게 이동하니 부산까지는 순식간이었다. 지저분한 길이 부산 초입에서부터 손길이 닿은 모습으로 바뀌었다. 차가 충분히 다닐 수 있을 만큼 도로가 정비되어 있었다. 서울은 여전히 엉망이었던 것 같은데.

"여기서 기다릴게."

전영중이 먼저 말을 꺼냈다. 제가 매고 있던 배낭을 건넸다.

"더 안 가고?"

"이렇게 정비된 도로면 부산 측 순찰대가 돌아다닐 수도 있어. 저쪽은 나 같은 걸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모르잖아."

새카맣게 죽은 피부나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 얼굴은 누가 봐도 시체 같은 행색이었다. 송곡 캠프처럼 반좀비의 존재를 알고 이용하려던 사람도 있으나 부산은 어떨지 모르는 일이다. 성준수는 내키지 않아 하면서도 배낭을 받았다.

"다시 올 거니까 여기 있어."

"알았어."

"어디 가면 안 된다?"

"준수, 분리불안이야?"

"전적 있으니까 하는 말 아냐, 이 사기꾼 새끼야!"

"알았어. 알았으니까 화내지 말고."

며칠 제대로 쉬지 못해 지친 탓인지 금세 성을 낸다. 전영중은 주변을 둘러보다 산 아래 나무에 기대앉았다.

"여기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게."

그 모습을 착잡하게 보던 성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 걸어 피로가 쌓인 다리를 절뚝이며 시내로 향했다. 몇 번이고 돌아볼 때마다 전영중은 안심시키듯 손을 흔들어주었다.

마침내 보이지 않게 돼서야 눈을 감는다. 준수가 그렇게 바라던 부산이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다니까 들어갈 수만 있다면 잘 지낼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자니 이런 몸이 된 이래로 느껴본 적 없는 피곤이 몰려왔다. 전영중은 저를 잡아당기는 듯한 힘에 저항하지 않고 몸을 늘어뜨렸다.

아주 오랜만에 잠이 쏟아졌다.

검문소에서 신원확인을 요청하자 성준수는 주섬거리며 대구에서 받은 조악한 보증서를 내밀었다. 그걸 보고 잠시 저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더니 성준수를 차에 태웠다.

부산은 생존자 캠프가 아니라 온전히 하나의 도시로 기능했다. 구획을 나눠 벽을 세우기는 했으나 어디까지나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세운 것이지, 이동을 막지는 않았다. 대전, 대구도 제법 번화하다고 생각했는데 부산은 재난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성준수는 생소한 기분으로 도시를 눈에 담았다.

도착한 곳은 태극기가 걸린 건물이었다. 그들은 적대적이지도, 호의적이지도 않은 태도로 성준수를 구석의 방으로 데리고 갔다. 작은 창이 난 방에 앉아있고, 오래지 않아 남자가 들어왔다.

"어려 보이는데, 몇 살이고?"

깔끔하게 양복을 입은 남자가 서류뭉치를 내려놓으며 대뜸 물었다.

"올해 스물이요."

"서울에서는 이제 주민등록증도 안 만들어주는 갑네? 그런 임시 서류는 아나 들고 다니는 건데."

서울 쪽에 일을 보러 가는 건 성준수가 아니었기에 알 수 없었다. 주민등록증이 지금도 나오나? 성준수는 대답 대신 침묵을 택했다. 긴장한 게 역력한 표정에 남자는 웃으며 의자를 빼 앉았다.

"표정 풀어라. 너 잡아먹으려는 거 아니고, 우리도 이놈이 허우대 멀쩡한 놈인가 알아는 봐야지."

내밀어지는 손을 머뭇거리며 마주 잡았다. 남자는 사람 좋게 웃으며 악수하고는 서류 몇 장과 펜을 성준수 앞에 놓았다.

제 신상정보와 원래 있던 곳, 부산까지 오게 된 경위, 오기까지의 과정. 그 외 세세한 것들을 적는 용도였다. 사실대로 적으면 된다는 말에 성준수는 펜을 들었다. 사람을 죽이고 캠프를 떠난 일, 하이에나에게 쫓기던 일, 송곡 캠프에서 겪었던 것 모두 적으려 했다.

그럼 전영중은? 전영중을 만난 게 관악산이다. 사실상 이 모든 여정은 전영중과 함께였다. 전영중을 뭐라고 적어야 하지? 왜 같이 안 왔냐고 하면? 이들이 반좀비에 대해 알고 있나? 자신처럼 사람으로 받아들일지, 아니면 노예처럼 생각할지 모른다. 보통은 후자려나. 후자겠지. 제가 만난 사람들은 대개 그랬으니.

검은 펜이 느릿하게 흰 종이를 채운다. 역시 전영중에 대한 건 빼기로 했다. 분명 많은 일이 있었는데, 전영중을 제외하니 적을 것이 생각보다 많지는 않았다. 눈치를 살피고, 그들이 반좀비를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으면 차라리 떠나자. 별수 없지. 어딘가에 반좀비도 사람 취급해 주는 캠프가 있을 것이다. 그런 곳을 찾아 같이 살면 되겠지.

서류를 읽는 남자의 얼굴이 신중했다. 전영중을 비워낸 자리를 얼기설기 얽은 수기는 어쩐지 빈약해 보였다. 사실대로 적으라 했는데 전영중의 이야기가 빠졌으니 거짓말을 한 셈이다. 거짓말한 걸 들키면 어떻게 되지? 잡혀가나?

"서울이 사이비종교 때문에 골머리 앓는다는 건 들었다. 관음사 캠프 쪽에도 퍼졌나 보네. 고생했다."

남자의 말은 담담한 위로로 시작됐다. 어린 게 하이에나 상대는 우예 했나? 허어, 송곡 캠프. 여기 문제 많은데 잘도 빠져나왔네. 이쪽 쑤셔보려캐도 명분이 없어 두고 보던 참이다. 이제 생겼네, 명분. 남자는 흥미로운 감상문을 읽듯 길지 않은 글을 읽고, 뒤집어 내려놓았다.

"우리가 빙시도 아니고, 하이에나들 줄줄이 꼬리에 달고 내려오는데 네 소문 하나 못 들었겠나."

성준수는 책상 아래 모아쥔 손을 꽉 쥐었다. 큰일났다. 저들이 전영중을 죽이려 하면 어쩌지?

"성준수."

"무슨... 소문이요."

"너 혼자 내려온 거 아니잖아."

아니라고 해야 하는데 말이 나오지 않는다. 소용 있나? 이미 다 아는 것 같은데? 처음부터 부산에 오지 말 걸 그랬나?

"기회 다시 준다. 솔직히 말해라."

"......저 그냥 떠날게요."

"지 마음대로 들어왔다 나갔다, 여가 느그집 안방이고?"

남자의 목소리가 위압적이다. 어떡하지.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캠프에서처럼 무작정 도망칠 상황도 아니다. 부산은 대도시였고, 무장한 사람들이 당장 지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눈앞의 남자를 죽이고 도망칠 수도 없다. 그렇게 나쁜 사람도 아니잖아. 그냥, 자기 일을 하는 것뿐인데. 무릎 꿇고 빌까? 전영중은 여전히 거기 있을까? 전영중이라도 도망치라고 말해야 하는데.

길어지는 침묵에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조금 전과 달리 완전히 누그러진 어투였다.

"왜, 같이 온 소생자한테 해코지할까 봐 걱정되나?"

푹 숙인 성준수의 눈앞에 주민등록증이 내밀어졌다. 이현성. 맞은편에 앉은 남자의 사진이 박혀있었다.

"부산에서는 사하구를 특수거주지로 지정했다. 누구는 슬럼이라고도 하고 누구는 격리구역이라고 하는데, 그냥 특수거주지다. 별거 없어. 소생자들이 마음 놓고 다닐 수 있게 소생자들을 꺼리지 않는 사람들만 들어와 살라고 공표한 구역이니까. 네가 원한다면 다른 구에서 살아도 되고. 강제는 아니다."

등록된 주소는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

"내도 사하구 주민이다. 네 마음 잘 알지."

내가 말하지 않았나. 네가 어떤 놈인지 우리도 알아야 하지 않겠냐고.

사람에 대한 확신이 필요한 건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소생자를 인간 이하로 대우하는 사람은 질리도록 많이 봐왔을 테니.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든 성준수에게 이현성이 하얀 종이를 내밀었다.

"다시 시작하자. 이번엔 거짓말 말고, 처음부터 끝까지 솔직하게 다 쓰는 거다."

성준수는 끄덕이며 펜 꼭지를 눌렀다. 여정이 다시 쓰인다. 관악산에서, 전영중이 제 손목을 잡던 그 순간부터.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죽었다 살아났다고 감각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통증으로 인식되지 않을 뿐이지 자기를 만지거나 살이 베여 벌어지는 감각은 살아있었다.

전영중은 깊게 가라앉은 의식에서 누군가 자신이 만지는 느낌을 받았다. 반응해야 하나? 괜히 일어났다가 좀비로 알고 공격받으면 귀찮다. 그냥 시체인 척해야지. 뭐 훔쳐 갈 것도 없는데 뒤지고 싶으면 뒤지라지. 솔직히 일어나 대응하기 귀찮았다. 말소리가 들렸으나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의미가 인식되지 않는 말은 소음이나 다름없었다.

그것은 끈질기게도 전영중을 뒤졌다. 그러다 얼마나 지났을까. 잠잠하다 싶더니 이젠 몸을 끌고 가더니 어딘가에 처박았다. 이건 그냥 넘기기 어려웠다. 준수가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으니까 움직이면 곤란한데.

"저기, 적당히......."

후두둑. 머리 위로 흙이 쏟아졌다. 구덩이 위에서 삽을 들고 내려다보는 인영이 익숙하다. 전영중은 머리 위에 쌓인 흙을 털어내며 물었다.

"......준수 뭐해?"

"하......."

"부산에서 너 오지 말래?"

"시팔, 좆같은 새끼."

몸을 일으키는 제게 흙을 퍼 퍽퍽 던지더니 급기야 구덩이를 기어 올라오려는 전영중의 머리를 꾹꾹 밟아 눌렀다.

"씹새끼야! 걍 뒈져, 이 개새끼야!"

"아! 아야! 왜 성질이야! 나 아예 묻어버리려고 작정했네?"

"그래 네 거기 처 묻어버리려고 했다! 흙으로 덮고 발로 꽉꽉 눌러서 다시는 못 기어 나오게!"

전영중의 키는 될 만큼 깊게 판 구덩이는 기어올랐기도 쉽지 않았다. 저를 저지한다고 몇 번이고 걷어차는 발을 잡자 놓으라고 실랑이를 벌이다 기어코 중심을 잃는다. 그대로 미끄러지는 몸을 전영중이 받으려다 넘어져 두 사람은 다시 구덩이 안으로 굴렀다. 씨발! 빠르게 몸을 일으킨 성준수가 주먹을 휘둘렀다.

"너 진짜 뒈진 줄 알았다고!"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저를 내려다보는 눈두덩이가 발갛게 부었다. 주먹 쥔 손 마디가 고된 노동에 퉁퉁해졌다. 파르르 떨리는 주먹에 손가락을 넣어 피면 온종일 삽자루에 쓸린 손이 빨갰다. 체온 없는 몸에 닿는 손바닥이 평소보다 뜨끈했다.

"하루 종일, 말을 걸어도, 너는 씨발, 일어나지도 않고."

미뤄놓았던 슬픔이 몰려왔다. 상상했던 순간을 다시 맞이하는 건 끔찍한 경험이었다. 또 내가 널 두고 가서. 나 때문에.

"죽은 줄 알고......."

원망할 수도 없게 눈을 감은 전영중은 너무나 평온한 얼굴이었다. 마음 편히 가버린 사람을 두고 갈 수 없어 묫자리를 팠다.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았으나 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았다. 그냥 송곡에서 모른 척할 걸. 처음부터 같이 가지 하지 말걸. 그럼 내가 죽더라도 넌 죽지 않았을 텐데. 익숙한 일이니 슬프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예기치 못한 작별은 언제나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을 가져왔다.

입술만 짓씹으며 울음을 참는 녀석을 감쌌다. 무덤에서 바라보는 세상이 이럴까. 좁은 하늘 아래 오롯이 저와 성준수만 남은 것 같았다.

"준수야. 영길이 아저씨는 외로워서 죽은 게 아니야. 자기가 없어도 네가 잘 살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안심한 거지."

흐윽. 기어코 참지 못한 울음이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근데 너 하는 꼴을 보면 나는 영 안심이 안 된다."

서럽게 우는 걸 봐버렸는데 내가 어떻게 가겠어. 얄밉게 덧붙이면 성준수는 울다 말고 몸을 일으켰다. 얼굴이 온통 젖어서는 다시 주먹을 휘둘렀다.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같이 부산에 살아."

성준수가 내민 건 깨끗한 주민등록증과 너덜해진 임시허가증이었다. 부산시청에서 발급된 허가증에는 소생자 전영중의 보증인으로 성준수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꼭 쥐어 구겨진 종이에서 성준수의 설렘과 절망이 읽혔다. 이걸 보여주고 싶어 한달음에 달려왔겠지. 그리고 일어나지 않는 날 보았을 때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어둠 속에서도 어렵지 않게 글씨를 읽은 전영중이 그를 끌어안았다. 별 수 없다. 헤어지기는 다 틀렸으니 준수 죽을 때까지는 꼼짝 없이 같이 살아줘야겠네.

해가 완전히 넘어갔다. 부산 외곽은 전기가 잘 들지 않아 어둑해진 산에는 빛 하나 없었다. 전영중에게 안긴 채로 별 무리가 떠오르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사방에서 흙냄새가 났다.

성준수는 이 순간을 아주 오래 기억하게 되리라는 걸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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