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비지타임

시취屍臭 上

23.12.17 빵준전력 | 좀비 아포칼립스

PITA BREAD by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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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팅이 벗겨진 야구방망이에서는 쇠 비린내가 났다. 킁. 잠깐 잡았다고 그새 손바닥에는 본능적인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냄새가 스몄다. 가방에서 청테이프를 꺼내려다 도로 집어넣는다. 문명이 무너진 시대에는 다 갈라진 청테이프 하나도 아쉬웠다. 길가에 무성히 자란 넝쿨을 잡아당기고 이파리를 정리해 칼등으로 쳐 짓이긴다. 시팔. 바빠 죽겠는데 이게 맞나. 대강 섬유질을 피고는 둘둘 감아 질끈 묶는다. 거친 감촉 사이로 이제는 맵싸한 풀냄새가 났다. 싱그럽다 느끼는 풀 냄새는 사실 이파리가 잘려 나간 식물이 위협처럼 내뿜는 냄새라던가. 주워들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렇다면 풀 냄새 또한 죽음의 냄새였다. 감상에 빠져있을 시간도 없기에 손에 쇳내가 나든 풀냄새가 나든, 급조한 그립이 헛돌지 않는 것만 확인하고 걸음을 옮긴다. 다듬어지지 않은 배트 그립이 거칠었다.

관악산을 넘으면 안양이다. 거기서 국도를 타고 수원으로. 수원에서 동탄으로. 풀뿌리든 버섯이든 캐 먹으려면 산이 좋지만 혼자 이동한다면 노지보다는 도시 아무 건물이나 숨어들어 문이라도 잠그는 게 습격에 대비하기 좋을 거라는 판단이다. 그게 퇴로를 막는 자승자박일지, 아니면 한 놈씩 잡아 족칠 킬존이 될지는 모른다. 어차피 뒈질 거 발악이라도 해야지. 울컥 치밀어오르는 생각에 침이라도 뱉고 싶었으나 꿀꺽 삼킨다. 며칠이나 걸릴지 모르는 길에 침 한 방울도 아까웠다.

나뭇잎이 밟히는 소리가 들린다. 씨발. 성준수는 반사적으로 멈추려는 몸을 부러 움직인다. 듣지 못한 척, 알지 못하는 듯 걷는다. 바스락, 바삭. 머뭇거리던 발소리는 돌아보지 않자 대범하게 저를 쫓는다. 어쩌지. 뛸까? 길 옆의 경사가 조금 급한 사면을 본다. 낙엽이 조금 깔렸지만 바위는 없어 그대로 미끄러져 달아날 수 있을 것 같다. 상대는 아마도 하나. 완전히 길로 올라온 듯 발걸음이 묵직하게 따라붙는다. 소리에 비해 가까워지는 속도가 빠르다. 키가 나보다 클지도. 배트를 꽉 쥔다. 망설이는 시점에서 도망친다는 선택지는 끝났다. 이대로 길을 벗어나 달아나봤자 상대에게 고지의 우위를 내주는 꼴밖에 안 된다. 저벅, 저벅, 탁! 씨발! 돌아보는 동시에 양손으로 배트를 쥐고 온몸으로 휘둘렀다.

"저기― 왁!"

훙! 사선으로 휘둘러지는 배트를 몸을 숙여 피했다. 제 몸도 못 가눌 만큼 강한 풀스윙이었다. 맞았으면 그대로 머리가 터졌을지도.

"요즘 애들은 왜 이렇게 폭력적이야?"

"씨발, 그럼 가만히 있다 뒈지라고?"

휘청거리며 물러난 성준수가 배트를 고쳐 쥐었다. 이번에야말로 제 앞에 웅크린 녀석의 머리를 터트릴 작정이었다. 머리 위로 치켜든 배트를 내리치려는데 턱, 어느새 일어난 녀석이 그걸 막는다. 배트를 쥔 손 전체를 움켜잡고 밀어내는 힘이 더 강했다. 한쪽 손을 빼낸 성준수가 주머니에서 칼을 꺼냈다. 그마저도 휘둘러지기 전에 손목을 잡아 막는다.

"학생 잠깐만, 진정하고......."

"너 같으면 진정......."

하겠냐고 대꾸하려는데 진정했다. 그제야 저와 가까이 붙은 남자를 살펴본다. 핏기 없이 회빛으로 죽은 피부와, 가까이 있는데도 숨결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이질감. 남자는 공격 의사가 사라져서야 무기질 같은 손을 풀어 무해하게 들어 올렸다.

"미안. 웬만하면 접촉은 피하려 했는데 네가 자꾸 공격하니까 어쩔 수 없었어."

그것은 지퍼를 조금 열어 제 목에 걸려있던 군번줄을 들어 보였다.

"내 이름은 아마 전영중이고, 죽다 살아난 것 같은데 설명 좀 해줄 수 있을까?"

전영중의 군복 구석은 구멍이 뚫려 주변이 까맣게 변해있었다. 아마도 그게 그의 사인이리라.

다짜고짜 제 머리통을 터트리려 했던 폭력적인 소년(인지 청년인지), 성준수는 전영중을 계곡으로 끌고 가 졸졸 흐르는 개울물에 사정없이 밀어 넣었다. 알았으니까 일단 씻어. 냄새나.

그런가? 전영중은 제 겨드랑이 쪽에 코를 박아 냄새를 맡았다. 킁킁거려도 아무 냄새도 안 났다. 죽을 때 후각 세포도 같이 죽었나. 그래도 시각이랑 청각은 멀쩡한 것 같은데. 흙에 파묻혀 있었으니 뭔 냄새가 나든 나겠지. 살아있는 사람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웃옷을 벗어 계곡에 담그고 몸부터 문질렀다. 오른쪽 가슴 아래에 구멍이 나 있길래 손가락도 한 번 넣어보고. 토마스야. 네 손가락을 내 옆구리에 넣어보아라. 그런 구절이 생각났다. 손 끝에 이질적으로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음. 하나님. 저도 죽은 게 확실한 모양입니다.

"뭐하냐?"

"내 사인 확인 중."

"뭐래. 씻을 때 아랫도리도 빡빡 씻어."

"여기서? 좀 부끄러운데."

"반좀비새끼가 별, 뒤 돌고 있을 테니까 빨리 처 씻기나 해. 나 바빠."

"반좀비? 내가 반좀비야?"

성준수는 대답 대신 배낭에서 옷을 꺼냈다. 속옷 없이 위아래만 꺼내 커다란 바위에 올려놓는다. 바지도 벗어 흐르는 물이 통하도록 놓고 계곡에 주저앉아 사타구니부터 발끝까지 문질렀다. 빠르게 씻는 건 원래 군인의 특기니까. 머리카락 사이에 파고든 흙까지 다 씻어내고 대강 빨래를 마친 전영중은 옷을 쥐어짜며 물을 나왔다. 수건은 없나? 그렇게 물으면 어쩐지 화낼 것 같아 젖은 몸에 옷을 꿰어 입었다. 저는 긴팔이면서 내준 옷은 반팔에 반바지였다.

"내가 반좀비란 거야? 그럼 좀비도 있어? 사람 공격하는 좀비? 영화처럼?"

발바닥을 탁탁 때려 물기를 말리고 군화를 신는 모습에 성준수가 몸을 일으켰다. 군복이 마를 수 있게 배낭에 걸고 걸음을 옮긴다. 제가 내려온 길을 흘끔 돌아보고는 잰걸음으로 산을 마저 내려간다.

"너 군인이었어?"

"기억은 없지만 아마도."

"어디까지 기억하는데?"

"아무것도. 근데 성경 구절은 기억나더라. 나 교인이었나?"

"왜 죽었는지도?"

"총 맞아서가 아닐까 싶은데."

전영중은 구멍이 있던 자리에 손가락을 눌렀다. 옷감이 구멍 안으로 말려 들어가는 모습에 성준수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군인을 본 게 십 년 전이야. 좀비가 퍼진 건 십이 년쯤?"

"진짜 그 좀비 말 하는 거야? 바이러스 퍼트리는?"

"어. 사람 처먹으려고 눈깔 돌아간 그 좀비."

말하기 무섭게 산을 벗어나는 길목에 서 있는 인영이 하나 보였다. 미동도 않고 사지를 늘어뜨리며 서 있는 그것을 보고 성준수가 마스크를 끌어 올리며 성큼 다가갔다. 으으으.... 신음을 내며 이쪽으로 고개를 들어 올리는 그것은 얼굴 반이 썩어 무너져있었다. 배트를 쥐고, 달려가던 그대로 힘을 실어 머리를 내려찍는다. 퍽! 머리가 터진 그것이 쓰러진다. 와우. 전영중은 어쩌면 제가 맞이했을지도 모르는 미래를 보았다.

"썩고, 안 썩고. 말이 안 통하고, 말이 통하고. 그 정도 차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몸뚱아리와 저를 이것저것 엉겨 붙은 배트로 번갈아 가리키며 말한다. 준수 학생, 적어도 감수성 같은 게 메말랐다는 건 알겠네. 전영중은 단번에 제 앞에 선 이의 성격을 파악했다.

"십 년 전쯤 죽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이후 군대는 주요 거점으로 이동해서 외부 탐색 대신 거점방위만 한다고 들었거든."

"거점이면 어디?"

"큰데. 서울, 부산 이런 데라고 들었어."

텅 비어버린 줄 알았던 상식이 되살아나는지 머릿속에서 대강 지도를 그린다. 수도랑 제2의 수도. 뭐, 보통 그렇겠지.

"넌 어디 가는데?"

"부산."

"관악산이면 서울이 훨씬 가깝잖아. 사실상 서울이지. 서울로 가는 게 낫지 않아?"

"아 씹, 부산 간다고."

"왜, 멀리 도망쳐야 해?"

성큼 앞서가던 녀석이 멈춘다. 배트를 쥔 손에 다시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아이구. 전영중이 자기도 모르게 탄식했다. 도발하려던 건 아닌데. 그냥, 자꾸 뒤를 흘끔거리는 모습이나, 가까운 서울을 두고 구태여 부산엘 간다는 모습에 한번 찔러봤을 뿐이다. 설마 정곡일 줄은.

"씨발, 너 하이에나냐?"

"그게 뭔데? 새로 생긴 부대 이름?"

"이 씹새끼, 순진한 척하네."

"진짜 몰라서 그래. 동물 말하는 건 아니지?"

천연덕스럽게 또 두 손을 펼쳐 들어 올리는 모습이 가증스러웠다. 지금이라도 머리를 터트릴까. 배트에 감긴 거친 줄기를 엄지로 문지른다. 처음 봤을 때 무시할 걸 그랬나? 진짜 하이에나면 돌아선 순간 자기 멱을 따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근데 아니었잖아. 그럼 진짜 뭐지 이 새낀? 하이에나가 기르는 애완 좀비?

퍽. 전영중의 몸이 거칠게 튄다. 어깨를 찢고 나온 탄이 바닥에 박힌다. 어? 전영중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진다. 비명 지를 새도 없이 건물 옆으로 몸을 굴렸다. 제가 서 있던 자리에 총알이 몇 번 튀었다. 많이 쏘지는 못할 것이다. 물자가 귀한 시대니까. 대신 양쪽으로 에워싸 단번에 절 죽이려 들겠지. 상상만으로 심장이 빠르게 뛰고 호흡이 차올랐다.

"야, 씹, 전영중!"

대답 대신 무수한 발걸음이 쫓아온다. "쟤 이름이 전영중이야? 그새 친구도 만드셨어? 미안해서 어쩌냐. 내가 실수로 죽였다, 야." 숨길 것 없는 조소가 와르르 따라붙는다. 어떡하지? 건물 안으로 들어갈 창문도 없다. 다음 건물까지는 10미터 남짓. 달려가는 길에 엄폐할 곳은 없다. "준수야, 괜히 힘 빼지 말자." 승리를 확신한 발소리가 느긋하다. 성준수가 배낭을 벗고 칼을 꺼내며 입안으로 욕설을 뱉었다. 누가 쉽게 죽어줄 줄 알고?

발걸음이 멈췄다. 성준수는 소리를 죽이고 모퉁이에 붙어 몸을 낮췄다. 사람을 죽여도 되나? 죽일 수 있을까? 손끝이 차갑게 식는다. 그렇지만 가만히 죽기는 억울하잖아. 적어도 제일 처음 한 놈만큼은 같이 데리고 갈 작정이었다. 숨소리를 내지 않으려 억지로 호흡을 삼킨다. 킥킥거리는 웃음과, 매캐한 담배냄새가 났다. 사냥도 아니고 아예 장난감 취급이었다. 안달나게 해 피를 말려 죽이려는 듯, 한참의 여유 끝에 다 태운 담배 꽁초가 튕기고 새카만 인영이 튀어나왔다.

성급하게 팔을 들어 올렸으나 남자는 저를 노린 게 아니었다. 중심을 잃고 고꾸라진 남자의 등에 투둑, 소음기를 통과한 탄환이 꽂힌다. 목덜미에 나이프가 꽂힌 남자가 성준수의 뒤쪽을 겨누었다. 고통에 발버둥 치는 몸을 제압하고 전영중이 정확하게 반대편에서 나타난 이를 맞추었다. 덜컥. 탄창이 비었는지 더 이상 나가는 게 없었다. 홀로 남은 남자가 뒷걸음질 치며 사격하는 걸 제압했던 사람 뒤에 웅크려 피한다. 탄환이 얼마 없는 건 저쪽도 마찬가지였는지 이내 총을 내던지고 뒤돌아 달린다. 그 뒤를 전영중이 쫓고, 잠시 후 멀쩡한 군복 한 벌을 들고 나타났다. 쓰러진 이들이 입은 것과 같았다.

순식간이었다. 무력감을 느낄 새도 없이 끝난 상황에 성준수가 아연히 물었다.

"......어떻게 살았어?"

"그 말은 이상한데. 난 이미 죽었잖아."

"씨발, 어떻게 사지 멀쩡하게 나타났냐고."

"멀쩡하진 않지. 나 구멍 하나 더 났어."

전영중이 반팔티를 훌러덩 벗으며 말했다. 왼쪽 쇄골 아래에 거칠게 찢어진 구멍이 새로 생겼다. 너덜거리는 살점을 뜯어내고 제가 가져온 군복을 성준수에게 건넸다.

"내가 냄새를 못 맡아서 그러는데, 그거 냄새나?"

"안 나. 안 나니까 대답이나 좀 제대로 해!"

"시체인 줄 알고 지나갔나 보지. 그냥 무시하던데?"

"병신들......."

그제야 칼을 던지고 주저앉아 얼굴을 문지른다. 진짜 죽을 뻔했네. 전영중 없었으면 죽었을지도. 아니, 근데 따라잡힌 것도 전영중 때문 아닌가? 저 새끼 씻으라고 계곡에 담그지만 않았어도 십오 분은 벌었다. 물론 언젠가 따라잡혔겠지만 그래도.

"얘네가 하이에나?"

성준수가 끄덕였다. 옷을 다 갈아입은 전영중이 동물 친구의 몸을 뒤졌다. 탄창에 든 게 얼마 없으니 총은 패스. 주머니에서 간식과 군용 나이프만 챙긴다. 바스락 소리를 내도 주저앉은 녀석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웅크리고 있는 몸이 잘게 떨렸다.

"그래서, 너는 왜 도망치는데?"

묻는 말에 온기가 없었다. 온기는 애저녁에 없는 몸이 됐지만 어쨌든. 호의가 거세된 질문은 추궁이었고, 이제 심판당할 사람은 성준수였다.

"......내가 캠프 사람을 죽였어."

전영중은 목 끝까지 지퍼를 채워 올리고 뒷짐을 졌다. 커다란 덩치는 어깨를 펴고 내려다보는 것만으로 위압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왜."

"......말 안 할래."

고개를 들고 눈을 마주치는 녀석의 눈매가 단단했다. 자신이 어중이떠중이가 아닌, 사람을 순식간에 죽일 수도 있다는 걸 알고도 그랬다. 그렇다고 마냥 뻔뻔하지만은 않은, 무서워하면서도 올곧은 눈.

"나쁜 놈이었어?"

"응."

"그래서 죽이고 도망친 거고?"

"......응."

전영중은 직감을 믿었다. 적어도 사람 보는 눈은 꽤 정확하다고 생각했다. 기억은 없지만, 그런 것 같았다. 그래서 성준수의 말을 믿어줄 것인가? 성준수와 동행할 가치가 있는가?

혹은, 자신이 성준수를 심판할 자격이 있는가.

성준수의 말에 따르면 군대라는 시스템은 더욱 폐쇄적으로 변한 지 오래다. 사실 아직 유지되는지조차 알 수 없다. 그럼 자국을 수호한다는 의무는 어디까지인가. 이미 죽은 나는 군인인가. 국가가 존재하기는 하는가.

탁. 부스러진 초코바 끄트머리가 정수리를 때린다.

"그거나 먹고 일어나. 부산까지 간다고?"

순식간에 불만스레 얼굴을 구긴 녀석이 초코바를 낚아챈다. 유통기한이 지난 듯 부스러진 것을 아무 말 없이 베어 문다. 전영중은 제 몸의 반만 한 배낭을 짊어졌다. 군장처럼 침낭을 포함해 야무지게도 꾸린 짐이었다. 짊어졌다는 감각은 있으나 무겁다는 통증은 없었다. 촉각도 반만 기능하나 보지. 전영중은 제 몸의 상태를 다시금 살핀다.

근간이 무너진 시대에 대의를 지우고 중요도를 재정립한다. 성준수가 옳다고 하면 어디까지 해줄 수 있는가. 옳지 않다고 하면 어디까지 참아줄 수 있는가.

성준수가 없는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반좀비라는 거, 보통은 모를 거야. 나도 우리 캠프에 반좀비가 있어서 알던 거지."

남은 좀비나 생존자는 없나, 아파트 전체를 한 바퀴 돌고 오자 성준수는 잘 준비를 마친 채였다. 창문 바로 아래 침낭을 붙이고 누운 채였다. 그럴 가능성은 낮지만, 저격총을 구비한 하이에나가 노린다 해도 시야에 들지 않는 사각이었다.

"그런 것 같더라. 여기까지 오면서 좀비만 좀 봤지."

이 사태도 십 년이 넘었다고 했나. 도시에 좀비는 거의 없었다. 간혹 마주하는 좀비는 살점이 다 부패하고 녹아내려 제대로 걷지도 못했고, 아주 가끔 불운하게 최근 당했는지 비교적 멀쩡한 것도 있었다. 그나마도 몸 여기저기가 뜯긴 채였지만.

그런 것들은 보통 전영중이 맡았다. 좀비의 손에 뜯겨 상처가 나거나 물리면 바로 감염이란다. 맹렬하게 달려들던 것들은 전영중이 막아서면 물어뜯으려 입을 벌렸다가도 코를 울리며 냄새를 맡아댔다. 그냥 하는 행위가 아니라, 머리를 치켜들었다 숙이며 제법 꼼꼼하게 상대를 확인했다. 이 친구들은 아직 후각이 살아있나? 반좀비인 나는 아무 냄새도 못 맡는데. 반좀비도 동류로 치는지, 공격성을 누그러뜨리는 좀비 친구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전영중은 좀비보다 인간을 택했기에 거침없이 머리와 상체를 분리했다. 성준수에게서 배운 좀비 사냥법이었다. 머리를 터트린다. 하악 위로 날려버린다. 목을 분리한다. 좌우간 머리를 어떻게 한다.

그래도 반좀비는 본 적 없었다. 대전이면 목적지까지 절반을 내려왔는데도.

"그 친구는 어쩌다 반좀비가 됐대?"

"몰라. 그냥 어느 날 그렇게 캠프에 왔어. 어느 아주머니가 자기 아들이 좀비가 되다 말았다고, 숨만 안 쉬지 사람이랑 똑같으니까 제발 죽이지 말고 같이 있게 해달라면서."

"그래서, 캠프에서 살았어?"

"응. 며칠 가둬봤는데 아줌마 말대로라 같이 지내기로 했대. 그래도 불안하니까 생활할 때는 입마개하고 손 꽁꽁 싸매게 했어."

"같이 생활도 했나 보네."

"가끔 얘기도 했어. 영길이 아저씨였는데, 통각을 못 느끼니까 궂은일 주로 하셨어. 잠도 안 자니까 경비도 전담하셨고."

"친했나 보다?"

"가끔 대화하는 정도."

궂은일에 대해 생각해 본다. 사람들이 기피하는 일. 몸을 상하게 하는 일. 아프지 않고 잠을 자지 않으니까 아무 때에 아무렇게나 써도 괜찮은 처지. 벽에 기대 창밖을 보는 저처럼.

"그래도, 말 걸면 좋아하셨어."

아마도 성준수는 그 아저씨를 제법 따랐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니 꼬박꼬박 존대해 가며 얘기하겠지. 사람의 습관이라는 게 그렇다. 제 밑으로 봤으면 하대하고, 사람 취급하지 않았으면 이것저것 하며 함부로 불러댔다.

그리고 그 아저씨 덕분에 성준수가 반좀비인 자신을 보고도 함부로 공격하지 않았으리라. 성준수는 반좀비를 사람처럼 대했으니까. 전영중은 얼굴도 모르는 영길 씨에게 감사를 전했다.

"너 캠프 떠날 땐 뭐 하셨는데?"

"돌아가셨어."

"어쩌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잠든 게 아니었다. "어떻게?" 다시금 묻자 부스럭거리며 돌아눕는다. 대답하기 싫다는 표현이다. 성준수는 잘 말하다가도 이따금 이랬다. 알려주려면 좀 끝까지 알려주든가. 전영중은 누가 지켜보기라도 할까 봐 몸을 낮추어 살금살금 성준수의 머리맡으로 기어가 누웠다.

"준수, 그거 알아? 사람 화나게 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 말을 하다 마는 것이고."

이어지는 말이 없었다. 분명 눕는 소리가 났는데, 이 반 송장은 그대로 죽어버렸는지 아무 기척도 없었다. 돌아눕자, 거무죽죽한 얼굴이 눈을 감고 숨도 안 쉬어 영락없이 죽은 꼴로 지척에 누워있었다.

"두 번째는 뭔데?"

"영중이 잔다."

"지랄 말고. 너 안 자는 거 알거든? 두 번째는 뭔데?"

"형 피곤해. 잔다니까?"

"시발, 두 번째는 뭐냐고!"

"흥. 나도 말 안 해줄 거야."

전영중이 새침하게 돌아누웠다. 시발, 별, 좆같은, 치사한 새끼. 그게 뭐라고 말을 안 해 주냐! 하여간 첫 번째 방법으로도 사람을 화나게 하기엔 충분한 건 확실했다. 전영중은 딱딱하게 굳어 잘 움직이지 않는 폐를 떨며 웃음을 삼켰다.

전영중은 그날 이후 성준수가 해줬던 영길이 아저씨를 가끔 떠올렸다. 돌아가셨다는 이야기까지는 쉽게 하던 성준수. 어떻게, 왜 죽었는지는 말 못 하던 성준수.

쉽게 소모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얼추 짐작이 간다. 군대 역시 효율로 돌아가던 집단이니까. 할 수 있는 놈이 일을 떠맡고, 할 줄 아는 놈이 계속하고, 갈 곳 없는 걸 인질 삼아 억지로 하고. 그런 측면에서 먹지도, 자지도 않지만 감정이 있는 노예라는 건 제법 편한 수단이다.

내가 성준수를 떠날 수 있나? 전영중은 벽지가 다 떨어진 천장을 보며 생각했다.

아직도 하이에나는 성준수를 쫓았다. 캠프에서 사고 치고 달아난 사람을 하이에나에게 팔면, 하이에나들은 인간을 사냥해 복수를 해주고 의뢰비 대신 그들이 가진 것을 취했다. 캠프 안 사람들은 유대가 끈끈하니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지만 캠프의 보호를 벗어난 사람들을 습격하는 게 그들이 살아가는 방법이다.

수지가 맞고 안 맞고는 이미 문제가 아니었다. 성준수는 그네들 눈에 생존 물품을 짊어지고 다니는 황금 고블린으로밖에 안 보일 것이다. 다른 하이에나가 죽은 거야, 경쟁자가 제거 측면에서 잘 된 거고.

그들의 눈에 전영중은 시체, 혹은 귀가 어두운 좀비였다. 이지가 있는 반좀비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 적당히 누워있거나 앓는 소리를 내며 멍청하게 몸을 흔들고 있으면 무방비하게 다가오다 반격당하기 일쑤였다. 밖에서 떠도는 이들은 반좀비를 모른다는 거다.

그럼 캠프 안의 사람을 만난다면? 전영중은 종종 부산에 도달한 이후를 상상해봤다. 성준수가 떠나고 반좀비를 아는 사람을 만날 확률은? 모르는 사람에게 날 무해하다 어필했을 때 받아들여 줄까? 모르긴 몰라도 성준수처럼 제 입과 손을 자유롭게 놔둘 가능성은 낮았다. 반좀비라는 이름만 봐도 그랬다. 반은 좀비라는 거잖아. 빌어먹을 감염체 취급인 거지.

그럼에도 캠프 안에는 반좀비가 있었다. 성준수를 좋아했다는 영길이 아저씨. 궂은일을 도맡았던 영길이 아저씨. 좀비들 사이에 있어도 멀쩡했을 영길이 아저씨. 결국 죽은 영길이 아저씨. 왜, 어떻게 죽었는지 비밀에 부쳐져야 했던 영길이 아저씨.

아무렇게나 부려지면서도 꾸역꾸역 사람들 사이에 살았던 이유는 알 것 같았다. 그 아저씨도 외로웠던 거겠지. 대강 파묻혀진, 아마 제 동료였을 백골 사이에서 눈을 떴던 저처럼.

무작정 산을 떠돈 게 며칠인지도 분명하지 않다. 그때는 감각만큼이나 생각도 둔했다. 스스로 살아 움직이는 이를 발견했을 때야, 제 목에 걸린 인식표의 이름을 겨우 읽을 만큼 정신이 돌아왔다.

성준수가 죽었으면 좋겠다. 전영중은 문득 못된 충동을 느꼈다. 그렇지만 괜찮은 방법 아닌가? 반좀비가 되면 하이에나에게 쫓기지 않아도 된다. 더 이상 먹을 걸 구하지 않아도 되고, 저 혼자 밤을 지새울 필요가 없어진다. 성준수가 부산으로 향할 이유가 사라진다.

부산에 도착하면 성준수는 홀가분하게 저를 떠나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겠지. 도시의 보호를 받게 되면 하이에나도 성준수를 쫓을 수 없으니 그를 지켜준다는 명목으로 붙어있을 수도 없게 된다. 성준수를 보고 되찾았던 감각이 그가 사라지면 다시 둔해질까 두려웠다.

그러니 부산에 도착하기 전에.

더운 날씨에 침낭 밖으로 빠져나온 손을 본다. 땀이 맺힌 손바닥이 척척했다. 장판을 벗겨낸 바닥에 자리를 깔다 손가락을 쓸어 마지막 마디가 발갛게 벗겨져 있었다. 하여간, 바이러스로 세상이 망했는데도 상처 안 나도록 조심하지는 못할망정.

침이 고이지 않아 바싹 마른 혀를 댄다. 좀비 바이러스의 주요 감염경로는 상처였다. 좀비에게 물어뜯긴 곳. 손톱에 베인 곳. 감염력이 강한 바이러스는 상처에 아주 조금 닿는 것만으로도 쉽게 숙주를 점령했다.

네가 나처럼 생각할 줄 아는 좀비가 되면 좋을 텐데. 그냥 좀비가 된다 해도 좋아. 좀비는 반좀비를 공격하지 않으니까. 네가 좀비가 되면 손을 꽁꽁 싸매고 입마개를 채워 목줄을 달아 데리고 다닐까. 이성을 잃은 네가 사람에게 이빨을 드러내면 피부가 녹아 내린 널 안아 내 냄새를 맡게 해줄게. 그럼 코를 울리며 온순하게 안겨있겠지. 그래도 좀비가 된 네가 너무 빨리 녹아 내리면 슬플 테니 북쪽으로 가자. 어차피 우리는 지치지 않으니 하염없이 걸으면 될 거야. 서울을 지나, 평양을 지나, 중국, 러시아도 지나 극지방에 닿을 때까지. 말 못하는 널 끌어안고 눈에 파묻혀 영영 얼어버릴까.

"......왜?"

잠긴 목소리가 가물거리며 묻는다. 제 손이 어디 있는지 확인하려는 듯 두어 번 움찔거리더니 그대로 방치한다. 제 상처에 닿은 게 스펀지인지, 혓바닥인지 조금도 관심 없는 행태였다.

"더워보여서."

"......으응."

으응이 아니라, 준수야 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이래. 그러나 이 순박한 청년은 아예 경계를 놨는지 차가운 손을 제 이마에 내려놓는다. 덥긴 했는지 이마가 제법 뜨끈했다. 날이 더워진 이래로 침낭에 안 들어간다 성화인 걸 벌레에 뜯긴다고 억지로 집어넣으며 실랑이 벌인 게 며칠이었다. 서바이벌의 쥐뿔도 모르는 민간인이 우겨대는 꼴이란. 이마에서 뺨으로 손을 옮기며 체온을 식히던 전영중이 팔딱이는 맥 위에 손가락을 얹었다.

그래도 숨을 쉬지 않는 성준수보다는 따듯한 성준수가 더 좋으니까. 제 손에 기대오는 머리를 받치며 외로움을 유예해 본다. 부산 앞까지는. 적어도 성준수가 바라는 그곳이 보이기까지는.


넥커버 마스크를 눈 바로 아래까지 올려 덮는다. 모자를 눌러쓰고 드러난 귀는 최대한 머리카락으로 가린다. 군복은 목 끝까지 채워 입고 어디서 구해온 장갑까지 씌우면 이질적인 피부색은 그리 티가 나지 않았다.

"초여름에 이렇게까지 꽁꽁 싸매는 게 더 수상하지 않아?"

"밖을 봐. 수상한 놈들이 한둘인가."

과연. 외곽이라 인적이 드문 와중에 삼삼오오 모여있는 이 중 절반은 전영중과 같은 행색이었다. 얼굴을 꽁꽁 싸 가리고 좀비에게 뜯길까 더운 여름에도 긴팔을 고수하는 떠돌이.

캠프에 정착하지 못한 떠돌이들은 크게 두 분류로 나뉜다. 태생이 한군데 얽매이길 싫어하거나, 정착할 수 없는 사연을 가졌거나. 멀리서 잠깐 쳐다보는 시선도 기민하게 눈치채고 제대로 들리지도 않는 욕설을 내지르는 이들은 대개 후자였다.

"평범해 보이고 싶으면 그 군복이라도 벗든가. 어디서 종류별로 잘도 주워 온다?"

"뭘 모르네. 군복이야말로 인류사 최고의 의복이거든? 10년이 지나도 안 썩고 멀쩡한 거 봐. 이만한 게 없어."

"통풍도 안 되고 안 썩는 게 좋은 거냐?"

"내구성만큼은 끝내준다는 거지."

그런 이유로 전영중은 10년간 생매장을 함께했던 제 군복도 정성스레 기워 입었다. 재수 없게 구멍 뚫린 옷 내다 버리라고 잔소리하던 성준수도 커다란 손을 꿈질거리며 바느질하는 모습에 입을 다물었다. 그래. 그게 네 애착 군복인가 보지.

금방 떠날 줄 알았던 대전에 예상보다 오래 머물렀다. 서울과 부산 가운데 위치한 도시다 보니 대전에는 자연스레 물자며 사람이 모여들었다. 통제하는 집단이 있는 건 아니었으나, 암묵적인 합의로 시내에서는 싸움이 금지됐다. 성준수는 전영중이 불침번을 서주는데도 날이 잔뜩 선 채로 선잠 자다 대전에 와서야 처음으로 죽은 듯 잠을 잤다. 해가 지면 자고 뜨면 일어나는 생활에 짙어지기만 하던 다크서클이 조금 옅어졌다.

그것도 다 제가 고생한 덕인 건 모르고 있었다. 싸움 금지도 드러난 장소에서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칼질하는 걸 누가 무슨 수로 막는다고. 물론 준수에게는 든든하고 잠도 자지 않는데 잘생기기까지 한 파트너가 있으니 괜찮지만. 덕분에 성준수가 잠든 사이 그들이 가진 물건은 야금야금 불어났다. 필요한 것만 추려냈는데도. 그만큼 밤중에 많이도 찾아오고 또 죽였다.

전영중이 모아놓은 탄환을 받아 가면서도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는 게 다였다. 원래 이렇게 많았나? 많았나 보지. 성준수는 그런 쪽으로 섬세함이 부족했다. 총보다도 그걸 쏠 수 있는 탄환이 부족한 시기니 멀쩡한 탄환은 화폐나 마찬가지였다.

가진 물건으로 필요한 걸 사는 건 온전히 성준수의 몫이었다. 전영중이야 먹고 마실 필요가 없으니 살만한 물건을 조언해 주는 게 다였다.

그래도 도시는 빨리 벗어나면 좋겠는데. 사람이 모이면 눈도, 입도 많으니 소문이 쉽게 퍼지기 마련이다. 대전에서 머문 지 벌써 며칠이다. 성준수에게 동행이 생겼다는 정보가 하이에나에게 들어갔을 것이다. 평범한 시체인 척했다 덮치는 기만전술은 이제 쓸 수 없을 확률이 높다.

"점심 먹고 옥천으로 출발하자."

늑장 부릴 만큼 부렸는지, 반갑게도 성준수가 떠나자는 말을 꺼냈다. 어깨를 바짝 붙이고 남들은 듣지 못할 성량으로 경로를 정한다.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거리감이 예사롭지 않은 사이에나 나올 그것이라 전영중은 다 죽은 감각으로도 귓가가 간지러운 느낌을 받았다.

"금산이 낫지 않겠어?"

"그쪽은 산이던데. 그리고 돌아가잖아."

"거리는 큰 차이 없어. 산 타기 싫으면 광주 통해 가는 건?"

"......장난하냐? 아예 제주 찍었다 가자 하지?"

너덜너덜한 지도를 짚으며 말하는 것과 달리 전영중은 기억을 더듬으며 길을 찾았다. 텅 비어있던 기억은 성준수와 이야기하다 보면 관련된 것들이 조금씩 되살아났다. 이것저것 생각해 보던 성준수는 처음 제 생각대로 옥천과 대구를 거쳐 가는 것으로 경로를 정했다. 결정됐으니 적당히 점심을 사 먹고 짐을 정리해 바로 떠날 생각이었다.

통일감 없는 색색의 조끼를 입은 이들이 광장 한가운데에 크게 장작을 쌓고 있었다. 걸음을 멈추고 그것을 보던 성준수가 지도를 접어 품에 넣었다.

"번복해서 미안한데, 내일 출발하자."

"왜?"

"오늘 대청소인가 봐."

"그게 뭔데?"

"근처 좀비랑 시체들 정리하는 날."

여름이 다가오면 가까운 캠프들끼리 연합해 청소부를 차출하고 불을 피워 큰 소리를 냈다. 부패한 시체가 병을 퍼트리기 전에 위생관리 차원에서 근처 떠돌던 좀비들을 일부러 유인해 정리하는 거다. 부나방처럼 달려드는 좀비들의 머리를 일사불란하게 쳐 날리고 처리한 좀비는 그대로 불에 던져넣는다. 그 김에 죽은 캠프 사람들도 태웠다. 누굴 묻고 썩기를 기다려줄 만큼 좋은 세상이 아니니까. 재작년, 관악산 인근에서 제가 참여했던 작업이다. 큰 도시에 건물이 많아서인지 대전의 대청소는 장작의 규모도, 차출된 인원도 배는 많았다.

"인근 좀비들을 싹 유인할 거야. 어중간한 데서 밤새우면 사람이랑 좀비가 섞여 정신없으니까 차라리 가까운 데서 하룻밤 보내는 게 나아."

잘못하다간 좀비랑 사람을 분간 못 하는 얼빠진 놈한테 머리가 터질 수도 있고. 혹은, 좀비인 줄 알았다는 핑계로 하이에나가 공격할지도 모른다. 전영중은 고개를 끄덕였다.

캠프파이어에서 적당히 떨어진 건물에 일찍부터 자리를 잡았다. 장작이 얼핏 보이는 위치였으니 밤이 되면 불길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자리를 정돈하는데 빨간 조끼를 입은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오늘 여기서 지낼 거예요? 이 방에 태울 거 없죠? 전영중이 끄덕이자 그 사람은 알겠다며 문에 무언가 적고 떠났다. 마스크를 내리고 있었는데, 해를 등지고 있어 피부색은 눈치 못 챈 모양이었다.

날이 저물기 시작하자 장작에 불을 붙였다. 성준수는 일찍부터 침낭에 들어가 눈을 감았다.

살구를 따오겠다며 캠프를 나섰다. 캠프에는 일손이 늘 부족하니 다 큰 사내놈 둘씩이나 갈 일이냐며 호통을 들었지만 금방 돌아오겠다 억지 부려 친구의 손을 붙잡고 나선 참이다. 무기 하나씩은 챙겨 가라는 소리를 들을 여유도 없었다. 내내 죽상이던 녀석은 캠프 어귀를 벗어나자마자 아예 고개를 처박고 흐느꼈다.

씨바알....... 할 줄 아는 말이라고는 그것밖에 없는 것처럼 녀석은 주저앉아 같은 욕만 뱉었다. 그 사이 살구를 따 가방 두 개를 채우는 건 온전히 제 몫이었다. 단내에 벌이며 파리가 꼬이면 손을 홰홰 쳐 쫓아낸다.

"작작 울어, 등신아. 그러게 누가 생활관 화장실에서 떡 치랬냐? 캠프 분위기 좆 같은 거 알면 알아서 사렸어야지."

"그 정도일 줄 알았냐?"

"그래서 어쩌라고. 이미 들킨 거 어떡할 건데? 니 좆 자르라고 하면 닥치고 잘리든가, 아니면 다른 캠프로 튀든가 해야지."

"넌 그 새끼 표정 못 봐서 그래. 씨발. 좆이 문제가 아니라 캠프 한가운데서 태워 죽일 기세였다고."

"퍽이나. 다른 어른들이 그 꼴을 가만 두고 보겠냐?"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지만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마귀 새끼들! 한밤중에 캠프에 울렸던 노성이 생생했다. 악에 받친 목소리에 잠이 순식간에 달아나 창문에 매달렸다. 머리채를 붙잡힌 친구가 캠프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끌려가고 있었다. 씹질에 미친 음탕한 새끼들! 천벌 받은 놈들! 세상이 이렇게 된 것도 다 천벌을 받아서인데, 감히 동성애를 해? 하나님의 분노가 무섭지도 않아?

종교는 팍팍한 삶의 좋은 도피처였다. 이게 다 하나님 말씀을 따르지 않아서. 썩어 빠진 세상을 정화하려고. 하나님은 다소 억울할지 모르겠으나, 그네들의 주장에 따르면 다 그분의 마음에 들지 않아 세상이 이렇게 된 거란다. 좀비 바이러스도 간악한 동성애 마귀에게서 시작된 게 분명하다나. 논리의 비약은 적당히를 모르고 인과가 전혀 없는 두 가지를 억지로 얽었다. 그러면 사람들은 꿇어앉아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빌었다. 하나님, 저희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피해자는 사랑 한번 나눠보려던 젊은 청춘이었다. 아버지, 죄송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잘못했어요. 손이 닳도록 비는 애원에도 좀비를 때려잡고 궂은일을 하며 키운 팔뚝으로 제 아들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호령하듯 더 크게 소리 질렀다. 일어나 와서 이 꼴을 보라고 부러 전시하듯.

"희원이 어떡하지? 진짜 아저씨한테 맞아 죽은 거 아냐?"

"야. 치안 대장이어도 사람 함부로 죽이면 퇴출이야. 청승 그만 떨고 니 앞가림이나 잘해."

적어도 치안 대장 아들인 희원이보다는 제 걱정을 먼저 하는 게 옳았다. 걔는 빽이라도 있지, 니는 쥐뿔도 없는 고아 새끼면서. 니는 쫓겨나면 갈 곳이나 알아봐. 씨발, 똥구멍에 씹질하다 쫓겨났다는 거 소문나면 수도권 캠프엔 못 있겠네. 부산으로 꺼지든가. 나름 진지한 조언이었다. 성준수의 생각엔 정말로 김희원보다는 어디 비벼볼 구석도 없는 백혜성이 더 문제였다. 내가 너면 새끼야, 희원이 끌려가는 사이에 짐 싸서 존나 튀었어.

"넌 그걸 말이라고 하냐?"

불쌍한 희원이. 불쌍한 나새끼. 저딴 걸 친구라고 둬서. 백혜성은 더 크게 울었다. 아니, 불쌍한 건 노동 혼자 다 하고, 조언해 주고도 욕 처먹은 나 아냐? 성준수는 억울했으나 우는 사람에게 맞는 말을 해봤자 조금도 받아들이지 않는 걸 알기에 입을 다물었다. 나뭇가지에 체중을 실어 당기고 부지런히 살구나 딸 따름이었다.

부스럭. 인기척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제 친구는 무릎을 세우고 엉엉 우느라 못 들은 것 같았다. 야생동물? 아니다. 야생동물의 발소리는 이것보다 가볍다. 멧돼지? 멧돼지는 어른들이 하도 잡아서 씨가 말랐다던데. 잘못 들었나?

한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청각에 신경을 집중하느라 저도 모르게 멈추었던 숨이 탁 터졌다. 잘못 들었나 보지.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기에 캠프로 돌아가려고 친구를 일으켜 세우려던 참이다. 발을 길게 끌며 낙엽을 헤치는 소리가 났다. 꼭 좀비의 걸음처럼.

"야, 야! 시발! 일어나!"

가방을 질끈 묶고 던진다. 좀비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딴 걸 확인한다고 어물거렸다 물리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등짝을 걷어차 일으켜 세우고 캠프로 무작정 달렸다. 서둘러 나온다고 야구 배트고 빠루고 아무것도 안 들고 나왔으니 뛰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도록 달려 도착했을 땐 살구가 다 짓눌려 가방 아래로 과즙이 뚝뚝 떨어졌다. 모든 게 엉망이었지만 그래도 살아남았다고 만족했다. 살아남는 게 최선인 날들이니까.

회고에 뒤따르는 반성은 늘 늦었다. 그러면 안 됐을지도.

짓뭉개진 후회가 눌어붙는다. 바로 얼마 전이기에 기억은 조금도 퇴색되지 않았다. 성준수는 창문 너머로 붉게 비추는 불을 피해 어둠에 파고들었다.

청소날도 아닌데 장작이 높게 쌓였다. 캠프 내에 그렇게 태울 것이 쌓인 건 십 년 만이었다. 뭣도 모르고 그 작업을 거들었다. 어쩐지 저를 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지만 모른 척했다. 얼마 전, 살구를 죄 뭉개놓은 일로 다 큰 것이 아직도 캠프 살림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입방아에 올랐겠거니 했다. 장작더미에 불을 붙이고 있을 때 치안대에 호출당했다. 그제야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넌 알고 있었지.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침을 삼키는 소리가 너무 컸다. 긴장한 걸 들키면 안 돼. 이미 잔뜩 얼어붙은 얼굴로 소용없는 생각을 했다. 뭘요? 목소리가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내 아들이, 그 마귀 새끼랑 붙어먹은 거! 침착하게 시작된 문장은 이내 고함으로 변했다. 와장창. 물건이 쏟아졌다. 열린 창밖에서 비명이 들렸다.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아버지. 제발.

살려주세요!

청소의 날이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불태워 흔적도 없이 치워야 했다. 불신자를 바치는 제였다. 하나님을 믿지 않아 온전히 죽지 못한 이들을, 하나님의 말을 따르지 않아 죽어야 하는 이들을. 그들을 태우면 고기 익는 냄새가 났다. 부패한 것도, 멀쩡한 것도, 동물도, 사람도. 불길 앞에서는 모두 공평하게 한낱 고깃덩어리고 재였다. 비명을 지른다. 제가 쌓은 장작 위로 무엇이 던져졌는지 알 것 같았다. 불길이 몸 안에서부터 솟구쳤다. 생이 끊어지는 소리였다.

제 화를 못 이기고 광분하는 남자를 바라본다. 제 아들을 살라 먹은 주광빛이 얼굴에 번들거렸다. 남자가 저를 속여서 화를 내는지, 불신자가 다름 아닌 제 아들이어서 화를 내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바로 다음 순간 붙잡혀 불길에 던져지는 건 저라는 걸 깨달았다. 살려주세요! 조금 전까지 살아있던 친우의 절규가 떠올랐다. 살아야 했다.

남자의 머리에 화분을 내리쳤다. 그가 젊을 적 땄다던 트로피를 휘둘렀다. 제 몸같이 여기던 야구 배트를 치켜들었다. 깡! 맑은소리가 났다. 퍽. 때린 곳이 터진다. 좀비도 그랬다. 썩어 문드러진 살을 내리치면 단단한 뼈 아래 감춰뒀던 것이 맥없이 터졌다. 남자는 좀비처럼 사지를 꿈틀댔다. 그의 사무실 구석에 있던 배낭을 둘러멨다.

고기 익는 냄새가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어둠 속에서 온기 없는 손을 찾아 더듬는다. 모로 누워 버석하면서도 쿰쿰한, 먼지 같은 냄새에 코를 파묻었다. 그러면 세상에서 저를 유리시키듯, 메마른 손이 드러난 귀를 덮어주었다.

"처음부터......."

쿵. 쿵. 쿵. 심장 소리가 들렸다. 오롯이 제 심장과 제 목소리뿐이었다.

"처음부터 이상한 사람들은 아니었어. 힘드니까 다들 변한 거지."

밤이 깊었는데도 목소리에는 잠기운이 없었다. 저와 달리 살아가기 위해 내뱉는 숨이 손가락에 감긴다. 제법 불편한 자세임에도 전영중은 미동도 않고 따끈한 얼굴을 감쌌다. 어수선한 탓에 도리어 방해하는 사람이 없는 밤이었다.

"그래."

아직 덜 여문 사내가 속에 눌러둔 것을 토해낸다. 뻣뻣한 엄지로 뺨을 문질렀다. 살아있는 것의 말랑한 감촉이 너른 손에 무방비하게 파고든다. 이대로 짓눌러 숨통을 막아도 반항 하나 없을 것처럼.

대전을 기점으로 전영중이 돌아버렸다. 큰 도시에 너무 오래 머물렀나? 사람이 많아 피하는 게 힘들었나? 좀비도 스트레스를 받으면 맛이 가버리나? 잠이 없고 고통을 못 느낀다지만 매일 밤 홀로 불침번을 서는 게 고됐을지도 모른다.

"야. 그냥 오늘 밤은 내가 불침번 설게 니가 처자라."

"나 잠 안 잔다니까? 왜 그런 대답이 나와?"

"그럼 씨발 수면 부족도 아닌데 니 대가리는 왜 고장 났냐?"

"지극히 정상이고, 이성적으로 하는 제안이야. 이딴 세상이면 차라리 좀비로 사는 게 낫잖아."

아 씨발 하나님 맙소사. 종교를 싫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지만 극히 최근 싫어하는 쪽으로 기울게 된 성준수조차 작금의 사태에 절로 절대자를 찾았다. 씻을 때 외에는 떨어져 있던 적도 없는데 어디 이상한 피라미드 회사에서 교육을 듣고 왔는지 열혈 영업사원이 되어 자꾸 제게 좀비를 팔아댔다. 고객님, 좀비 진짜 좋다니까요?

이 돌아버린 좀비를 버리고 가면 안 되나? 절대자를 가장한 성준수의 이성이 대답한다. 응, 안돼. 여기서 이 새끼 버리고 가기? 싸우는 게 업이었던 장교 출신에, 저보다 체격 좋고, 고통도 못 느껴 때려봤자 소용없는 반좀비를 무슨 수로?

"넌 지금 좀비 안 되려고 버둥거리며 살아온 내 12년을 부정했어. 알아?"

"그건 나같이 듬직하고 섹시하고 죽지도 않는 파트너가 없을 때였고."

"섹시... 씹... 하....... 그래, 어쩌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셨는지 들어나 보자."

그래서 전영중은 며칠간 생각한 좀비의 장점을 말했다. 안 먹어도 되고, 안 싸도 되고, 안 자도 되고, 안 죽어도 된다. 심지어 다른 좀비가 공격하지도 않는다. 와, 좀비 짱이네! 하이에나도 물자를 노리던 거니까 갖고 있던 짐 다 버리고 대충 아무 시체로 죽은 척 위장하면 더 이상 찾지 않을 거다. 성준수가 반좀비만 된다면 사람들을 피해서 영원히 함께 있을 수 있다. 평생의 동반자. 아이, 로맨틱해. 설령 실패해서 좀비가 된다 해도 제가 옆구리에 끼고 다니며 사람들 해치지 않게 살뜰하게 보살펴줄 테니 괜찮지 않을까? 사람들도 무사하고, 성준수도 무사하고, 저도 행복하고, 모두가 윈윈....... 아니, 아니! 잠깐만!

"윈윈은 무슨, 괜찮긴 뭐가 괜찮아!"

"안 죽어도 된다는 부분이?"

"너는 씨팔 이미 뒤졌잖아!"

"준수야. 삶이라는 행위를 좀 더 넓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아니, 그래, 반좀비까지는 살아있다고 치자. 좀비는 이성도 없고 썩어가는데 그게 뒈진 거랑 뭐가 달라? 그냥 민폐 끼치는 시체 아냐?"

"그래서 내가 끼고 살아 주겠다고."

"뭘 선심 쓰듯 얘기해?"

"왜, 싫어?"

"당연히 싫지!"

그렇게 이야기는 돌고 돌아 원점이다. 진척 없는 대화에 불만스럽기는 전영중도 마찬가지였다. 내내 아니, 시발, 싫어, 미쳤냐만 돌림노래 부르던 성준수에게 볼멘소리가 튀어 나간다.

"그렇지만, 너랑 같이 있으려면 이 방법 외엔 모르겠단 말이야."

불평치고는 제법 로맨틱했지만 그 방법이라는 게 제 죽음을 기반으로 하고 있어서 문제였지.

"지금 같이 있잖아?"

그리고 성준수는 속내를 살펴줄 만큼 섬세한 사람이 아니었다. 아. 동시에 이마를 짚는다. 분명 대화 중인데 말이 영 안 통한다.

"네가 부산에 도착한 이후를 말하는 거잖아."

그래서 던졌다. 부정할 수 없는 꽉 찬 직구였다. 네가 부산에 도착하더라도 나와 함께 있으면 좋겠다는, 사람보다 저를 택했으면 하는 소망. 나를 혼자 두지 말라는 호소였다.

"그러잖아도 내려가는 길에 캠프들 돌아보려 했어. 너같이 반좀비 데리고 있는 캠프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걸 또 멋들어지게 받아친다. 전력투구한 진심이 홈런이 되어 저 멀리 날아갔다. 어처구니없어 대꾸도 못하고 서 있자 앞서 걷던 성준수가 짜증스레 돌아봤다.

"왜, 또 뭐가 아니꼬워서?"

"날 이렇게 버린다고?"

"버리는 게 아니라, 아니, 왜 이렇게 극단적이야? 네 친구들 찾아준다는 거잖아."

"내 친구가 누구인지는 알아? 내 친구 만나면 준수 허리 접고 공손하게 인사해야 해. 내가 착해서 준수가 싸가지 없이 반말 찍찍 하는 거 봐주는 거지, 우리 그 정도 나이 차라고."

"아저씨, 저는 너 두고 늙은 네 살아있는 친구들 찾아주겠다는 게 아니라요, 함께 살 반좀비 친구를 찾아주겠다는 거예요. 네 동류."

"내가 언제 그런 거 부탁했어?"

갑자기 험악해진 분위기가 당혹스러웠다. 전영중이 이렇게까지 화내는 모습은 본 적 없었다. 사람을 죽였다 말한 날에도 왜 죽였냐 묻던 게 고작이었는데. 이게 화낼 일인가?

"그럼 나랑 평생 같이 다니려고?"

"이제까지 내가 말한 건 발바닥으로 들었어?"

"아니...... 전영중."

반대로 성준수는 평소보다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꿈같은 이야기 앞에 현실을 아는 이가 응당 취해야 할 태도였다. 정신이 아뜩해지는 기분이었다.

당장 저 나무 중 어딘가에 영길이 아저씨가 몸을 기대고 잠들어 있을 것 같았다. 코를 찌르는 썩은 내를 풍기며.

"그건 안돼."

왜 캠프에 반좀비가 있었는지, 그게 왜 과거형이 될 수밖에 없는지, 열하나에 만났던 영길이 아저씨가 왜 열넷에 먼 길을 떠났는지 전영중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사람 틈바구니에서 반좀비가 살 수 없듯, 사람 역시 반좀비들 사이에 살 수 없는데.

"나랑 있다고 네가 행복해질 수 없어. 내가 시발, 너보다 어린 건 맞는데, 너 뒤져있는 동안 변한 십 년은 그대로 겪었다고."

성급한 결론일 수 있으나 제가 살아본 바로는 그랬다. 반좀비와 사람은 같이 살 수 없다. 사람인 자신은 그들의 근원적인 외로움을 달래줄 수 없다. 어느 날 캠프를 떠난 영길이 아저씨처럼. 아무도 그를 걱정하지 않았고, 그가 맡았던 지저분한 일을 직접 해야 한다는 현실에 짜증 낼 뿐이었다. 그렇기에 영원히 잠든 그를 발견하고도 알릴 수 없었다.

"죽을 거라고. 너나 나, 둘 중 하나는. 너는 내가 죽는 게 기꺼울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난 아냐."

그렇게 말하는 표정이 엉망이었다. 애써 외면한 기억을 스스로 헤집으며 내뱉는 애원이 초라했다. 몇 번이고 죽을뻔한 순간을 함께 넘기고 서로의 밤을 지켰어도 결국엔 같은 것들끼리 어울려야 한다. 그게 옳으니까.

“나라고 너랑 헤어지고 싶은 줄 아냐고. 미친 좀비 새끼야.”

분명 죽었을 거다. 평택이 뭐야. 안양에 도착하기도 전에 하이에나에게 사냥당해 팬티 한 장 안 남기고 탈탈 털렸을 게 분명하다. 산을 벗어나자마자 습격당했을 때 죽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지금까지 살아있는 건 모두 전영중 덕이었다. 제가 죽여야 할 사람을 대신 죽이고, 잠든 사이 지켜주는 것도 안다. 다 안다. 전영중이 좋은 보호자라는 것도, 죽어달라 하면 당연히 죽어줄 수밖에 없을 만큼 여러 번 목숨을 빚졌다는 것도.

그래도 안 되는 일이 있다.

우두커니 서 있는 녀석에게 다가가 어깨를 감쌌다. 고집부리며 버틸 줄 알았는데, 당기자 지친 듯 제가 이끄는 대로 고분고분 따르는 모습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근처의 천장이 무너진 버스정류장에 짐을 내려놓고 벤치에 성준수를 앉혔다.

일찍 어른이 되어야 하는 시대다. 이제 갓 성인이라지만 좀비가 퍼지지 않았다면 아직도 부모님께 응석부려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다. 저 애가 마음 놓고 한껏 떼써본 게 언제가 마지막일까.

차라리 평소처럼 화내며 지랄이라도 하지. 조금 전까지 제 속을 불태우던 분노가 거짓말처럼 사그라졌다. 어린애에게 고집부리던 제가 더 철없이 느껴졌다.

"......쉬고 있어. 씻고 올 테니 무슨 일 있으면 소리 지르고."

성준수는 고개를 끄덕이고 아예 벤치에 누웠다. 긴 다리를 한쪽만 접어 올리고 눈을 가린 채였다.

전영중은 냇가로 내려가 버스정류장의 끄트머리가 보이는 적당한 거리에서 옷을 벗었다. 머리카락과 주름 사이에 낀 먼지를 꼼꼼하게 문질러 닦았다. 목욕보다는 세척에 가까운 동작이었다. 그야 이제 자신은 땀도 나지 않고, 각질도 떨어지지 않는 죽은 몸이었으니까.

하얗게 퇴색한 손톱을 본다. 되살아난 이래로 깎은 적 없는 손톱이 손끝에 바짝 붙었다. 의지대로 바지런히 움직이는 손가락과 달리 진작 말라붙은 혈관은 까맣게 변해 어디에서도 생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흉측하네. 제 손이지만 솔직히 그랬다.

옷을 뒤집어가며 안과 밖을 부지런히 문지른다. 제 몸에서 무슨 냄새가 나는지 알 수 없으나 악취만은 아니기를 바랐다. 잘 마른자리에 옷을 펼치고 그 옆에 헐벗은 채 드러눕는다. 무기질 같은 몸을 소독하기 적당한 날씨였다.

"그쪽이 성준수의 동행인?"

전영중이 고개만 비틀어 소리가 난 곳을 보았다. 성준수가 있을 버스정류장을 살피고, 다시 낯선 이들을 향한다. 세 사람은 들고 있던 배낭이며 쇠 파이프를 전부 내려놓고 손을 활짝 펼쳐 들었다.

"성준수 씨한테는 아무 짓도 안 했어요."

"하이에나?"

"송곡 캠프 소속입니다. 하이에나한테 정보를 사기는 했고."

전영중이 몸을 일으켜 앉았다. 아직 옷도, 몸도 덜 말랐기에 옷을 입지는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자 세 사람은 뒤통수에 손을 붙이고 천천히 걸어왔다. 무해하다고 온몸으로 드러내는 노력이 가상했다. 다섯 걸음 앞에서 손을 들어올리자 그 자리에 멈춘다. 어우, 크시네. 누군가 중얼거렸다.

"제안할 게 있어 왔습니다. 아까 두 분이 싸우던 이유와도 관련 있어요."

일부러 들으려던 건 아니었는데, 동네가 작다 보니 다 들렸거든요. 리더로 보이는 사람이 천연덕스럽게 덧붙였다. 속내를 가늠하며 전영중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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