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비지타임

[종뱅] 驟雨 中上

餓鬼

俗世 by 麻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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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양풍 창작조선, 인외물

  • 11,275 자

驟雨 中上

인간이 아닌 존재는 한계를 벗어났기에 잠들 필요가 없다. 그 절대적인 법칙을 깨트렸기 때문일까. 종수가 머릿속을 웅웅 울려대는 꿈에서 깨어났다. 퀭하게 말라붙은 눈가가 버석하다.

머릿속을 헤집어 대는 꿈은 어지럽기 짝이 없었다. 어지럽고 어지러우면서도 언제나 그랬듯 익숙해지지 않는다. 멍하니 바깥을 바라본다. 그가 앉아있는 곳은 언제나 그랬듯 넓은 사당의 안쪽이었다. 이는 저주다. 바깥을 응시하는 시선을 따라 비가 내렸다. 맑을 밤하늘의 밤과 달리 누군가의 눈물이 우수수 쏟아져 내린다. 눈물. 박병찬은 언젠가 하늘에서 내리는 것을 그렇게 이야기했었다.

물끄러미 어스름한 장지문을 응시했다. 굳게 닫힌 문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꿈은 절대적인 예언, 혹은 계시와도 같았다. 무거워진 얼굴을 팔뚝으로 대강 가렸다. 깊게 숨을 들이마신다. 바깥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내리는 비. 얼마간은 내리지도 않는다, 싶더니. 꿈을 꾸는 날이면 득달같이 하늘에서 빗물이 쏟아졌다. 종수는 그 요란함이 끔찍하여 혐오스러웠다.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은 채 어둠의 속에서 웅크렸다. 몇십일지 몇백 년일지 모르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인간이라는 정체성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괜찮아?”

열린 문의 틈으로 병찬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종수는 말없이 사당의 구석에 웅크린 채 샛노란 눈으로 장지문에 어렴풋이 비치는 바깥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소리가 요란하다. 그것들이 온통 예민한 종수의 신경을 두드렸다.

“……비와?”

비가 오는 건 절대로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갑작스러울 말에도 병찬은 그의 말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것만 같았다.

“엉.”

불경한 말투에도 종수는 신경 하나 쓰지 않고 오히려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애초에 자신에게 이름으로 부르라는 둥, 말을 높이지 말라는 둥, 그럴 때부터 그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진작 알고 있지 않았는가. 병찬이 문득, 종수를 응시한다. 노란 눈동자는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끄트머리가 무언가를 또 허겁지겁 찾는다.

신도 꿈을 꿀까? 잠이라는 것을 자기도 하는 걸까? 안배와 망상은 인간의 이기심이니, 신은 꿈을 꿀 필요성이 없지 않을까? 아무것도 없는 사당의 바닥, 그 위에 웅크린 최종수가 병찬은 안타까웠다. 웅크린 몸의 주위로 새카만 것들이 넘실거린다. 그것이 지금, 눈앞의 안타까운 존재가 길을 잃었음을 증명하는 것만 같았다.

“들어간다?”

병찬은 저 얼굴이 신경 쓰였다. 지독히도 음울하여 새까만 얼굴이 말이다. 혼란스러움과 누군가가 자신을 구원해 주기를 바라는 저 낯은 익숙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병찬이 아무 말 없이 최종수에게로 다가간다. 웅크려 앉은 신은 그저 가만히 병찬을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이리 와.”

적어도 병찬은 길을 잃은 얼굴을 한 이를 그냥 방치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서늘하게 떠는 남자를 안아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근처로 다가가 아무렇게나 바닥에 주저앉은 병찬이 자연스럽게 종수에게 팔을 뻗었다. 자존심을 내세우며 버틸 것 같던 ‘어린애’가 순순히 병찬에게 이끌려 끌려왔다. 붙잡힌 팔이 어쩔 줄 몰라 엉거주춤 굳었다. 뭐하냐는 말을 내뱉기도 전에 종수의 본능이 병찬의 품을 찾아 얼굴을 파묻었다. 자신을 끌어안은 팔은 살아있다.

“종수, 신 맞아? 아닌 거 같은데.”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키득거린다. 종수가 숨을 들이마셨다. 굳이 이어낼 필요도 없는 호흡의 속에 병찬의 향이 마구잡이로 뒤엉켜 폐부를 가득 채운다. 상쾌하다. 당장이라도 날아가 버릴 듯이 가벼웁고, 유쾌했다.

언젠가의 최종수가 그다지도 그리워했던 향이었다. 원하고, 바라여, 몇 번이고 우짖게 만들었던 향. 병찬의 등 뒤에서 바르작거리던 팔이 기어코 병찬을 품 안 가득 끌어안는다. 상체를 웅크린 몸이 품을 하염없이 파고들었다. 병찬은 그런 종수의 뒤통수를 묘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두었다.

불과 얼마 전 했던 생각이 떠오른 탓이었다. 그는 최종수에게 무언가를 물을 생각이 없었다. 그럴 위치도 아닐뿐더러, 허락되지도 않았다. 품 안은 울음으로 젖지 않는다. 그저 삭막하리만치 건조하다. 병찬이 어릴 적 누군가가 자신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천천히 종수의 긴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손끝에 결 좋은 머리카락이 구불구불하게 이어진다. 새카만 것들은 밤의 장막과도 같았다. 온통 새카마며, 고독하다. 침잠한 것들의 무게를 병찬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제물’의 본질이 무엇이든, 그는 본인이 할 일을 다할 생각이었다. 끌어안은 몸은 여전히 서늘했다. 그 온도에서 병찬은 남자가 인간이 아님을 실감하고 또 실감한다.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을 되새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처절하게. 그러지 않는다면 순식간에 휩쓸릴지도 몰랐다.

“언제까지 울 거야.”

“……안 울어.”

병찬이 저가 들어오면서 살짝 열린 채 방치된 장지문으로 눈을 두었다. 그 틈에서는 여전히 바깥에서의 처절한 우짖음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병찬이 피식, 웃었다. 자신이 끌어안은 신은 철이 덜 든 게 분명했다.

“울고 있잖아. 밖에 비가 오는걸.”

“…….”

종수가 병찬의 품에서 고개를 든 채 바깥을 바라본다. 요란한 빗소리가 예민한 귓가에 들린다. 우수수 떨어지는 빗방울의 소음에 병찬의 심장 뛰는 소리가 뒤섞인다. 살아있다. 죽어있는 자신과 다르게 박병찬은 살아 있었다.

묘하게 다정해진 손길이 얼굴을 가린 종수의 머리칼을 뒤로 넘겼다. 평소라면 어린애 취급이라도 하는 것이냐며 발끈할 법도 하건만, 종수는 그저 가만히 병찬의 손길을 받고만 있을 뿐이었다.

 

 

* * *

 

 

종수를 휘감는 악몽은 언제나 변화가 없었다. 비릿한 냄새가 풍긴다. 주위에는 소음이 가득했다. 승리의 환호성일지, 비탄의 우짖음일지 모르는 소리다. 종수는 그 사이에서 필사적으로 누군가를 찾았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자신에게 웃어주던 이를 간절한 시선이 찾는다.

신이라는 위치에는 막중한 책임이 따른다. 종수가 아는 그는 그런 무게감 따위 질색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길고 긴 삶을 산 뒤에야 이어지는 다음 대가 찾아오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며 신앙은 변질되고, 변질된 신앙은 증오가 된다. 그는 그 한가운데 있었다. 빨리 찾아내지 않는다면, 늦어버릴 게 분명했다. 종수가 정신없이 걸음을 옮겼다. 날카로운 가지의 끄트머리에 단단해지지 못해 무른 살이 쓸리고 찢어졌다. 속에서 올라오는 비명을 내뱉는다. 온통 어지러운 산의 안, 멀쩡한 것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만 같았다.

“―――!”

어쩜 이름도 똑같을 수 있을까. 터져 나온 이름은 절규다.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는 피는 바닥에 흔적을 남기지 못한다. 종수가 허겁지겁 팔을 뻗어 그를 받아낸다. 시야에 들어오는 그의 얼굴에는 웃음 말고는 어떤 것도 띄워져 있지 않았다.

종수는 그것이 못마땅했다. 그는 본인이 일궈놓은 모든 걸 망쳐 놓은 이들을 저주하거나, 원망하지도 않는다. 아둔하기 짝이 없는 인간에게 분노하지 않았다. 그저 무료했던 그 끝이 보이기라도 한 것처럼 남자의 얼굴은 평안하다. 자신을 받아낸 종수의 얼굴을 보고 나서야 그 얼굴에는 엷은 파문이 생겼다.

“시발. 넌, 넌 항상 그래. 항상!”

종수가 참지 못하고 속에 고여있던 말을 터트렸다. 체념일지 안도일지 모르는 감정. 그 안에 최종수는 없다. 종수는 그게 이기적이기 짝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의 안에 자신의 자리는 없다.

“저딴 놈들이 뭐가 중요하다고!!”

“야. 최종수........ 머리 울리니까 좀, 조용히 해주라.”

종수는 그게 미웠다.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랬다면 저를 거두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이미 자신은 남자의 생을 따라 그 끝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가 죽는다면, 그가 죽은 이후를 영원히 살아가야 한다는 것과 다름이 없다.

이게 지옥이 아니라면 무엇이랴. 속에서 번지는 감정은 종수가 감히 남자에게 건네지도 못한 것들의 파편이었다. 종수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남자는 멍한 얼굴로 손끝을 움직였다.

“울지 마. 너 울면,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게 지금 할 소리야?”

종수가 다급하게 손을 움직인다. 어떻게든 될 거다. 흐트러지는 숨결은 종수에게 지독한 죄악을 남긴다. 흐트러지는 것들은 찬란할 정도의 빛을 낸다. 종수는 처절했다. 품 안의 남자는 숨을 쉬지 않는다. 본래 그럴 존재가 아니다.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왜.

왜.

걸치고 있던 도포의 색상이 변한다. 다급함으로 경직된 종수의 시선이 품 안의 남자에게로 옮겨간다. 같은 얼굴이건만, 같지 않다. 그가 흘리는 피는 ‘남자’의 것처럼 산화되어 흩어지지 않았다.

그저.

떨어진 채.

고인다.

종수가 크게 뜬 눈을 덜덜 떨었다. 팔이 그를 끌어안는다. 들리는 숨소리가 없다. 품에 담긴 체온이 저와 같이 서늘하다. 이는 절망이었다. 입술을 벌려 이름을 쏟아낸다.

“야, 시발, 야. 박병찬!!”

몇백 년이고 한결같이 쏟아내던 이름이다. 그리고 그건 한결같이 종수를 맴도는 저주였다. 무언가가 타오르는 소리가 들린다. 불타는 것은 무엇인가. 구분되지 않았다.

지금 자신이 딛고 서 있는 곳은 무엇인가.

현실인가 과거인가.

아니면 훗날인가.

구분할 수 없다.

 

 

* * *

 

 

“헉…!”

지독히도 인간 같이 잠들었던 종수가 눈을 떴다. 거칠어진 숨이 본능적으로 헐떡거린다. 손끝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그런 자신의 처지가 우습기 짝이 없다. 애초에 저는 숨을 쉴 필요도, 혈액이 몸을 떠돌 필요도 없는 존재이지 않나.

“응? 일어났어?”

식은땀으로 젖은 얼굴에 병찬을 향했다. 종수는 병찬의 다리에 고개를 누이고 있었다. 여전히 바깥은 비가 쏟아진다. 병찬이 땀에 젖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떻게 좀 해봐. 이러다가 사당 다 무너지겠다.”

무너지면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머물 곳이 없어지는 거야. 종수는 병찬의 이런 습관을 알고 있었다. 시선이 바깥을 향하는 고개의 끄트머리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부릅 뜨인 종수의 눈이 병찬에게서 떨어지지 않는다. 턱과 귀를 잇는 그 선에서.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바깥을 바라보고 있는 병찬은 종수의 다른 기미를 눈치채지 못하는 것만 같았다. 들린 상체와 함께 입술이 병찬의 뺨 언저리에 닿는다. 깜짝 놀란 병찬의 시선이 종수에게로 튀었다.

“무, 뭐. 왜 그래.”

“그냥.”

얼떨떨한 얼굴의 병찬이 뺨을 문지른다. 그게 제 흔적을 지우려는 시도처럼 보여 종수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허기가 진다. 채워도 채워도 삿된 것을 갈망하는 아귀가 된 것만 같았다. 우악스러운 손이 병찬의 고개를 아예 아래로 끌어당긴다. 속에서 울렁거리는 것들이 수런스럽다. 종수의 긴 속눈썹의 끝이 병찬을 향한다.

종수는 수런스러운 것들을 부정하지 않는다. 실상, 자신과 아귀는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그것들이 탐욕에 굶주렸듯이, 자신 또한 박병찬에게 굶주리고 박병찬을 탐욕하고 있었으므로.

“그냥 닥치고 있어봐.”

상처가 스며 잠긴 목소리. 그것에 병찬은 종수가 제게서 또 다른 사람을 겹쳐보고 있음을 깨닫는다. 입술이 겹쳐진다. 그는 누구일까? 이런 접촉을 할 정도로 가까운 사람이라면 숨겨진 신의 내자인 것일까? 그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으나, 최종수가 품은 시간은 길고 길 것이다.

병찬은 그 무게를 감내할 자신이 없었다. 가볍게 겹쳐졌던 입술은 얼마 가지 않아 떨어졌다. 도장이라도 찍은 것처럼 꾸욱, 힘이 들어갔던 입술의 감촉이 머릿속을 아우른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병찬은 여전히 종수를 향해 상체를 수그린 채 맞닿았던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런데 왜 이러는 거냐?”

편하게 말하라고 안 했으면 어쩌려고 그랬는지, 당황으로 터져 나온 목소리는 버릇없기 짝이 없었다. 종수가 자신의 지척에 놓인 병찬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당황스러워하지만, 그 안에 거부는 없었다. 그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걸까?

“그걸 알면 이러고 있겠냐?”

부러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에효, 그래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병찬이 종수의 손을 떨어트리고 상체를 세웠다. 저보다 큰 놈 머리를 올려두니 다리가 저릿하다. 최종수의 상태를 보니 떨어지라고 해도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러면 나름의 대가를 받아야 하지 않나? 병찬이 힐끗, 제 배에 고개를 묻은 종수를 바라본다. 날카로운 반응, 음울하게 가라앉은 얼굴. 긴 머리카락이 악몽으로 창백해진 뺨을 가렸다. 병찬이 자연스럽게 머리카락을 쓸어 종수의 귀 뒤로 넘긴다. 이제는 모르겠다.

“있잖아. 너 여기에는 왜 혼자 있는 거야?”

저 애 같은 신 새끼도 자기 멋대로 구니, 자신도 제멋대로 굴 것이다. 남에게서 본인의 내자를 떠올리는 예의하고는. 속에 맺힌 것들이 꽁꽁거리며 뭉쳐진다. 병찬이 더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은 사람의 것과 다름이 없다.

“무슨 꿈을 꾸는 거고?”

빗소리가 요란하다. 무슨 꿈을 꾸느라 그렇게 괴로워하는 건데? 차가운 습도, 그리고 늘 찹찹하던 살갗과 달리 자신을 바라보며 잘게 떠는 금색의 눈동자는 지독히도 인간적이다. 병찬이 조용히 종수를 응시했다. 그는 남자가 자신에게 모든 것을 말해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입에 올린 질문은 왜인지 모를 심술의 일종이었다. 넓은 사당. 그 안에 있는 그와 자신. 내리는 빗줄기와 음울한 신. 그러한 것들은 평생을 외롭게 견뎌온 병찬을 흔들어 놓기 충분한 요소들이다. 어쩔 수 없잖아.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병찬에게 있어 마지막의 유예였다. 고작 얕은 흔들림 하나는 나중에 병찬에게 거대한 너울로 변질될 수도 있었다. 병찬은 그것을 잘 알았다. 그가 답을 하지 않는다면, 병찬은 영문 없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한 호기심과 감정을 아무도 모르게 묻어버릴 생각이었다.

그 누구도 알지 못하도록. 심지어 훗날, 본인도 알지 못하도록.

그렇게 본인의 존재를 죽이는 것은 병찬에게 있어 쉬운 일이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만큼, 병찬은 조심스럽고 또 조심스러웠다. 누군가는 이것을 겁쟁이라고 표현하고, 누군가는 이것을 신중하다고 평가한다. 병찬은 그런 사람들의 판단들 사이에서 그저 웃었다.

타인이 입에 올리는 판단들은 틀리지 않았다. 오히려 전부 옳을지도 모른다. 존재가 지워진 채 살아왔으나, 어느 순간부터 병찬은 더는 자신을 죽이며 살아가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눈앞의 어린애 같은 신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그래서 솔직한 심경은? 말해줬으면 했다. 그러면 그와 자신 사이에 놓인 무언가가 파훼될 것만 같았다. 그가 자신에게서 겹쳐보는 무언가를 끄집어내고, 그 안에 자신을 밀어 넣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영생을 사는 신에게는 잔인한 일일지도 모른다. 오로지 생존만을 원하며 손해를 보고 살아온 병찬은 이번만 이기적이게 살기로 했다. 그러니.

“……지금 말고, 나중에.”

다른 한 켠으로는 최종수에게서 저런 답이 돌아올 것임을 알고 있었을 것이었다. 병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머뭇거렸던 최종수가 눈에 들어온다. 뭐가 무서워서 저렇게 손을 벌벌 떠는 걸까. 신이면 무서울 게 없어야 하는 건 아닌가? 최종수는 신이라기엔 너무 연약하고, 사람이라기에는 기이하다. 병찬이 손을 들어 종수의 눈을 가렸다. 웃었다.

“그래그래. 알았으니까 조금 더 누워있어.”

손등 위에 벌벌 떠는 손이 닿는다. 달싹거리던 종수의 입술이 벌어진다. 손바닥에 닿는 눈가는 약간 일그러져 있는 것만 같았다. 병찬은 그것을 느꼈다.

“박병찬.”

“응.”

“나 버리지 마.”

불경하기 짝이 없는 말투의 나열. 쏟아지는 빗줄기는 여전하다. 병찬은 여기서 저들을 나무랄 수 있는 존재들이 없음에 감사했다. 상체를 수그렸다. 둥글게 앞으로 수그러든 상체가 자신의 손등 가까이에 어린다.

조금 긴 듯한 머리카락이 종수를 향해 쏟아진다. 종수의 향이 제게 물씬 치미는 만큼 종수에게도 제 향이 치밀 것이었다. 병찬은 그러기를 바랐다. 작게 내뱉었다. 어차피 그와 자신이 아니라면 아무도 들을 수 없는 소리이다.

“약속해.”

선명하게 치미는 약속의 속에서 종수가 눈을 감는다. 잘게 떠는 손가락이 완전히 병찬의 손등 위로 내려앉았다. 뜨겁다. 찹찹하여 서늘해져 버린 자신의 것과 달리, 따뜻하기 짝이 없다. 살아있는 자의 온도이다. 그것을 실감하면서 종수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저 약속이 얼마나 허황된 건지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인간이 말하는 영원은 모순적이고, 그만큼 어리석다. 특히 박병찬이 이야기하는 모순은 더욱 그렇다. 종수는 길고 긴 생을 살아오면서 그것을 아주 잘 실감하고 있었다.

거짓말. 입술의 바깥으로 회의적인 말은 내뱉지 않는다. 빗물이 쏟아진다. 박병찬은 저것을 누군가의 눈물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종수에게는 그저 재앙일 뿐이었다. 숨을 쉼 필요가 없음에도 느릿하게 숨을 내뱉으며 종수가 아주 작은 찰나의 틈을 내보였다.

“……그래.”

그가 말하는 영원은 변속적이고, 같잖기 짝이 없다. 그걸 알면서도 종수는 그렇게 답했다. 쏟아지는 빗소리는 여전히 소란스럽다.

그렇게라도 답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 * *

 

 

병찬은 지금의 생활이 싫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죽은 듯이 살았던 대보다 지금이 낫지 않겠는가. 병찬은 혹여 누군가와 눈이 마주칠까, 바닥을 바라보며 살던 때를 기억한다. 주위에 어떤 이 없이 겨우 생을 이어가던 때를 기억한다.

그것이 저주스럽다는 건 아니었다. 만약, 병찬이 자신에게 주어진 부당함에 분노하는 사람이었다면, 그는 이미 죽었을 테다. 생존하기 위해 체념하는 법을 배웠고, 그 체념은 사당까지 이어졌다.

“뭐해.”

관심을 받지 못해 부루퉁한 목소리가 들린다. 뒤이어 긴 도포로 감싸인 팔이 병찬의 허리를 감아 품으로 끌어안았다. 빗물의 냄새. 저번의 일 이후 남자는 이렇게 불쑥 나타나고는 했다. 어깨에 올려지는 고개가 느껴진다.

“아무것도?”

병찬이 푸스스 웃었다. 정말이냐는 듯이 저를 멀뚱멀뚱 쳐다보는 종수는 확실히, 일전과 분위기가 달랐다. 날카롭고 으스스하던 분위기는 어디로 가고 목덜미와 어깨에 뺨을 붙여오는 존재가 여기에 있었다. 손을 뻗은 병찬이 종수의 머리를 마구잡이로 쓰다듬었다.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어.”

결 좋은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뒤섞이는 감각이 나쁘지는 않은 건지 남자에게서는 별말이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더 뺨을 붙여온 채 자신을 가둔 팔에 힘을 줄 뿐이었다.

병찬이 익숙하게 남자의 품에 고개를 기댔다. 이리저리, 향이 뒤섞인다. 넓은 사당은 광활하지만, 처음처럼 외롭고 적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남자 또한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위에 다른 사람을 겹쳐보는 것 같지 않았다.

그저 서로에게 서로가. 이게 바로 시각의 변화인 건가? 격식도, 상황도 모두 훌훌 벗어던져 버린 것 같은 기분이다. 자유롭다. 이대로, 어떠한 허물도 걸치지 않은 채. 병찬에게 있어서는 처음으로 맡는 안온한 상황이다.

병찬은 그 안온하고 평안한 상황 속에서 자신이 그렇게 축복받지 못한 존재임을 간과하고 있었다. 산을 짓잇기는 듯이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들린다. 병찬은 저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고요하던 적막이 한 번에 깨지는 것만 같았다. 병찬이 고르게 내뱉던 숨을 멈춘다.

“……박병찬?”

불길한 예감이 병찬의 등을 진득하게 훑고 지나갔다. 궁에서나 늘 느꼈던 아득한 감각이다. 멈췄던 숨을 다시금 들이킨다. 잘게 떨리는 목소리는 불행에 관한 일종의 학습이었다.

“……잠깐.”

“박 씨 소생 취우군(驟雨君)은 예를 갖추고 어명을 받드시오!”

왕자라 부를 수도 없는 왕자. 봉호도 받지 못하고 왕자로 책봉되지도 않은 병찬에게 ‘취우’라는 봉호는 낯설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애초에 이곳에 자신을 제외한 ‘사람’은 없었기에 저것이 자신에게 붙여진 봉호임을 알았다. 병찬이 고개를 틀었다. 이제 시야에 남자는 보이지 않는다. 병찬이 걸음을 내디뎠다.

가야 한다.

“야…!”

최종수가 병찬의 손목을 붙잡았다. 놀란 듯이 크게 뜨인 병찬의 눈이 그제야 종수를 담아낸다. 드러난 얼굴에서 무언가가 일렁인다. 병찬이 입술을 벌렸다가, 닫았다. 목구멍의 안쪽에 채워진 말들이 자글거리면서 끓었다. 심장이 뛴다. 붙잡힌 손목의 너머로 자신의 맥동 소리가 전부 노출되는 것만 같았다.

“……금방 갔다 올게.”

“박병찬.”

“종수야.”

불안해하지 마.

언젠가의 말이 간결한 부름의 위에 겹쳐 들린다. 종수가 숨을 들이켰다. 안 된다. 잡아야 한다. 그러나 이 빌어먹을 정도로 ‘인간적’인 몸은 저를 떨어트리고 가는 병찬을 붙잡기 위해 움직이지 못했다. 이미 멎은 숨이 다시 멎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버리지 않는다며. 말이 목의 안쪽에서 진동하지만, 종수가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 * *

 

 

“그래. 지내는 건 평안하느냐?”

머리 위에 들이밀어진 물음에도 병찬은 미동하지 않았다. 눈앞에 놓인 찻물에서는 고급진 향이 났다. 분명히 대륙에서 건너온 차일 테니, 자신 따위는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비쌀 것이었다. 상념과 달리 손은 찻잔을 향하지 않고 무릎 위에 놓여 있었다. 수그러든 고개는 들리지 않았다. 보아서는 안 된다. 이 자리에 자신이 앉아있게 될 것이노라, 상상치도 못했던 곳이다. 동시에 격한 불안감이 치민다.

“……내려주신 하해와도 같은 은혜 덕에 평안하였나이다.”

입술이 바짝 말랐다. 정말로. 죽었으면 죽었지 이 자리에 앉아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이곳에 앉게 된 이유가 절대로 긍정적이지 않을 것임을 병찬은 예상하고 있었다. 되도 않는 ‘취우군’. 왕자로 받아들여지지도 못해 궁의 구석에서 겨우 생존을 이어가던 이에게 봉호라니. 자신은 책봉을 받은 적이 없다.

“왕자가 잘 지냈다면 기쁘군.”

기분 나쁜 것이 기어다닌다. 수그린 고개의 너머, 우글거리는 것들이 새카맣고 진득하다. 종수의 눅눅함과는 달랐다. 꾹 다물린 입술에 힘이 들어간다. 속이 갑갑하다. 그러나, 결국, 병찬에게 궁이라는 갑갑한 화원의 안을 벗어날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긴 포승줄에 묶여 질질 끌려가는 것처럼, 제게 유예는 없다. 숨이 막히는 것만 같았다. 어깨에 손이 내려앉는다.

“그래서 말이네만.”

취우군. 책봉. 봉호. 그러나 왕은 제게 왕자에 걸맞은 예를 갖추지 않는다. 스멀거리는 것들이 등줄기를 뒤덮었다. 숨이 막혔다. 병찬이 굳은 티를 숨기지 못하고 고개를 더 수그렸다. 평소라면 보이지 않을 실수다.

“짐이 왕자에게 제안할 것이 있다네.”

문장이 머릿속을 기어다닌다. 우글거리며 기어다니는 것은 기생충처럼 병찬의 의지를 갉아먹는다. 아주 오래전부터 학습된 본능이다. 틀어막힌 숨통으로 인해 말이 나오지 않았다. 고개는 더 아래로, 수그려졌다.

“평안히 지내고 있다, 하였으니, 나라의 우환은 바로잡아야 하지 않겠나?”

어깨를 덮은 손아귀에 힘이 들어간다. 사적인 자리였음에도 보란 듯이 걸친 곤룡포는 화려하다. 화려한 만큼, 수수하기 짝이 없던 사당과 빗물의 냄새와 다른 추악한 향이 났다. 우글거리던 것들이 시야의 안쪽을 뒤덮는다. 병찬이 입술을 깨물었다.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왕이 품에서 꺼낸 것을 다과상 위에 꺼내 들었다. 화려한 다과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추레한 검이다.

“그러니 왕자가 ‘평안’을 대가로 책임지고 나라의 우환을 없애도록 하게.”

제안. 그 단어와 달리 왕의 입에서는 일방적인 요구만이 쏟아진다. 이로서 제 ‘평안’은 무너져 사라져 버렸는데도. 굳은 눈이 다과상 위에 올려진 단검을 향한다. 저것이 말하는 의미를, 모를 수가 없다. 강박적으로 크게 뜨인 눈은 시리게 빛나는 검날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숨을 들이마신다. 병찬이 결국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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