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뱅

낯선 사람은 다시 보자

상호병찬

페일 펜슬 by 페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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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상호는 경계심 있는 성격이다. 남들의 사소한 버릇조차 하나하나 살펴보며 가벼운 관심조차도 다른 사람에게는 가볍지 않아 기분 나쁘다는 말을 듣곤 한다. 군대에 갔을 때는 사소한 움직임도 포착하고 무엇인지 확인하려 들어 결국 어두운 밤에 초소 경비를 서다가 거수자를 발견하고 휴가를 받은 일도 있었다.

그러나 기상호는 생각보다 헐렁한 성격이다. 처음 보는 사람이 친절하게 다가오면 영문도 모르면서 어색하게나마 웃어 보이고 얼굴 몇 번 안 본 사람이 돈 좀 빌려달라고 하면 큰돈은 아니어도 나름 본 정이 있다고 푼돈이나마 빌려주었다. 무대를 하고 내려와야 할 때 선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한 적도 몇 번 있었다.

같은 밴드의 보컬인 박병찬은 기상호의 헐렁한 면을 자주 지적했다. 안 그래 보여도 사람 좋아하는 녀석이 남에게 쉽게 정 주지 마. 맹하니 남 하자는 대로 휩쓸리지 말고. 특히 기분 좋으면 다 오케이 해버리는 건 진짜 고쳐야 한다.

기상호도 그 부분을 고쳐야겠다는 생각을 안 한 건 아닌데 쉽게 고쳐질 문제였으면 기상호가 이미 고쳐놨을 테니 박병찬에게 지적받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지적을 받았으면 정말 고쳐야 했다. 그래서 기상호는 그 부분을 항상 신경 쓰면서 머릿속에 박아넣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래도 말이지. 그날은 무대가 정말 끝장났던 날이었고 가져왔던 앨범은 모조리 팔렸으며 앵콜 요청이 얼마나 거센지 추가로 곡을 세 곡이나 불렀던 말이었다. 장사가 잘된다며 클럽 사장은 병째로 술을 공짜로 줬으며 평소라면 구석에서 밴드 홍보를 하는 보컬과 기타를 쳐다보며 술을 홀짝였을 기상호조차 그 중심과 가까운 곳에서 술잔을 들며 사람들과 웃고 떠들었다.

내일이면 아마 기력이 쪽 빨려서 연습 외엔 밖에 나가지도 못하겠구나. 생각하면서도 사람들이 웃으면서 말을 걸고 대단했다며 추켜세워주니 이제 가보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기상호는 기꺼이 광대를 자처하며 웃긴 말을 하려고 했고 어쩌다 얻어걸려 사람들이 빵 터질 때마다 시시덕거리며 입을 더 나불거렸다.

그러니까, 기상호는 사람들과 대화하느라 정신이 팔려 제 손에 들려있던 술잔에 별로 시선을 주지 않았고 자주 어깨동무를 했으며 옆의 사람이 좀 마시면서 얘기하라는 말에나 술잔을 들어 마셨다. 술잔은 손에 들려있었을 뿐 기상호의 관심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럴까? 기상호는 갑작스러운 원샷 구호에 병찬이 싹 털어 마시고 머리 위에 컵을 뒤집는 것을 보며 자신도 쭉 술을 들이켰고 그것을 마지막으로 기억이 끊겼다.

 


 

기억은 잘 나지 않았지만 기상호는 기분이 좋았다는 건 느꼈다. 무언가 하늘 위를 붕 떠다니는 것 같았다. 너무 기분이 좋아서, 이 상태가 계속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왜 이렇게 기분이 좋지. 하긴, 오늘은 진짜 끝내주는 무대였으니까. 상호는 히죽 웃었다.

근데 아까부터 자꾸 눈이 부신데. 뭔가 어지러운 것 같기도 하고.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해. 하지만 기상호는 이 기분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을 외면하려고 굴었다. 싫어. 눈 안 뜰래. 그렇게 애를 써도 자각하는 순간부터 기상호는 빠르게 기분이 낮아지는 것을 느꼈다. 진짜 좋았는데...

그 순간 눈앞이 번쩍인다.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의식 저편에서 강제로 일어나는 충격에 기상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몸이 잘 가눠지지 않아서, 결국 기상호는 딱딱하면서도 부드러운 무언가에 얼굴을 푹 묻고 앓는 소리를 냈다. 여전히 희뿌연 머리를 어떻게든 깨우기 위해 기상호는 애를 쓰면서 제 얼굴을 비비적거렸고 그 순간 어깨를 꽉 잡아 오는 손길과 함께.

 

"야! 정신 차리라고!!!“

 

라고 소리치는 목소리에 겨우 고개를 들 수 있었다. 박병찬의 얼굴이 가까웠다. 그것 뿐이라면야 기상호는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 몰라 하고 급하게 고개를 빼겠지만 그렇게 두근거림을 느끼기엔...

 

"햄...?“

 

눈 앞의 박병찬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마치 힘든 운동을 한 것처럼 숨이 거칠었고 입술과 입 옆은 터져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머리카락도 잔뜩 헤집어져 있었고 얼굴에는 긁힌 자국이 있었다. 옷도 잔뜩 흐트러져있어서, 꼭 누군가랑 몸싸움이라도 한 꼴이었다.

기상호는 그게 이해가 안 되어서 자기도 모르게 두 손을 뻗어 박병찬의 얼굴을 만지려고 했는데 박병찬은 그 순간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고개를 돌리고 기상호가 뻗은 손을 밀쳐냈다. 명백한 거절의 행동에 기상호가 벙찐다. 아니, 거절은 그럴 수 있었다. 갑자기 얼굴에 손을 뻗으면 그럴 수 있지. 하지만...

 

"햄? 햄 왜 그래요? 괜찮아요? 왜, 어? 얼굴이 엉망인데...“

 

얼빠진 목소리에 걱정이 스민다. 손을 뻗던 것이 거절 당해서, 상호는 멍청하게 두 손을 움츠리며 팔을 제 몸에 붙인 채로 병찬을 쳐다보기만 했다. 고개를 돌리기 전의 병찬의 표정이 선명했다. 병찬은 무서워하고 있었다. 무엇을? 상호를. 그래서 상호는 차마 병찬에게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서 그저 병찬에게 말을 걸었다. 고개를 돌리고 눈을 질끈 감았던 병찬은 그 목소리에 눈동자만 굴려 상호를 쳐다본다. 멍청하기 그지없는 얼굴을 한참이나 쳐다보다 결국 그런 병찬이 걱정된 상호가 해앰...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부르고서야 잔뜩 긴장했던 몸에 힘을 풀었다.

긴장이 풀린 병찬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상호는 그것에 더욱 어쩔 줄 몰라 하며 손을 뻗지도 못하고 굳어있었고 병찬은 그런 상호의 손을 잡아당겨 굳은 손바닥에 제 볼을 기댔다. 상호는 그제야 두 손을 다시 조심스럽게 뻗었고 엉망으로 상처가 난 얼굴을 살살 만지작거리다가 이내 흐르기 시작한 눈물을 닦아주었다. 병찬은 한참 눈물을 주룩주룩 흘려내더니 이내 인상을 팍 썼다. 상호는 그 얼굴에 담긴 것이 분노임을 알아 순간 손이 굳었지만 여전히 병찬이 울고 있었기 때문에 눈치를 보면서도 계속해서 눈가를 살살 닦아주었다.

 

"기상호."

"넵..."

"너 누가 담배를 줬다거나... 아니면 껌이나... 하여튼 뭔가 먹은 적 있어?"

"어... 아뇨? 그냥 술만 마셨는데..."

"술잔은 계속 쥐고 있었어?"

"네. 네... 근데 얘기하느라 손에 든 것도 까먹고 그러긴 했어요...“

 

병찬은 이제 제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분노로 가득 찬 욕을 짓씹었다. 상호는 뭔가 잘못한 기분을 느끼며 두 손을 가지런히 했다가 자신이 아직도 병찬의 위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내려오고자 시선을 내렸다.

 

"헉."

"...왜, 이제 보이냐?"

"아니, 왜. 어?“

 

병찬만 신경 쓴다고 몰랐는데 상호의 옷도 난리였다. 입었던 셔츠는 단추가 떨어지거나 너덜너덜했으며 진정하고 나니 제 몸도 이곳저곳 맞은 듯 아팠다. 특히 입이. 상호는 손으로 제 입을 한 번 문질렀다가 손에 피가 묻어나오는 것에 그제야 코피도 터졌음을 깨달았다. 이것만 보면 기상호가 박병찬이랑 싸운 것 같은데 문제는... 바지가 반쯤 벗겨져 있었다. 박병찬의 바지도 그랬다. 이제 보니 드러나 있는 병찬의 허리에 멍이 든 것이 보였다. 분노의 대상이 제가 맞구나. 상호는 급하게 위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었다.

분명 제 술버릇은 너무 취하면 집에 가고 싶어 하는 거였는데. 기상호가 경악에 잠겨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말도 못 하니 병찬이 그 꼴 내려다보다가 쯧, 혀를 차고선 몸을 일으켰다.

 

"상호야."

"네..."

"너 앞으로 우리 무대 하고 나서 술 마시지 마. 아니, 그냥 아무것도 마시지 마. 마셔도 뚜껑을 막 딴 물 같은 것만 마셔. 알았어?“

 

박병찬은 그 말을 하며 기상호를 노려봤기 때문에 기상호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박병찬은 한 손으로 제 얼굴을 쭉 쓸어내리고선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다듬고 기상호의 팔도 잡아 올려 일으킨 뒤 옷매무새를 만져줬다. 그다음 기상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선 이마를 툭 기대고,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상호야. 너는 술 마시고 정신을 잃은 거야. 남이 물어보면 그렇게 말해."

"...“

 

상호는 눈치가 빨랐다. 아까부터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병찬이 저렇게 말하자 가늠이 갔다. 어떤 상태였는지는 몰라도 아까 흘끔 봤던 문은 잠겨져 있었고 밖은 계속 시끄러웠다. 병찬이 쓰러진 상호를 여기다 넣어주다가 이렇게 된 건지, 아니면 달려드는 상호를 잡아들고 이쪽에 들어왔는지는 몰라도 상호보다 훨씬 힘이 센 병찬이 이리 다칠 정도였으면 얼마나 거칠게 굴었는지 알 수 있었다. 아까 전 상호를 쳐다보고 고개를 돌렸던 병찬의 얼굴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나. 기상호는 자신을 무서워하는 박병찬과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조심히 손을 올려 병찬을 꾹 끌어안는다. 평소 애교를 부렸던 것처럼 목덜미에 얼굴을 들이밀려다가 거기에도 할퀸 자국이 잔뜩 있길래, 상호는 그냥 병찬의 머리에 제 머리를 툭 기댔다. 나가 죽을까... 아무리 좀 메롱한 상태여도 자기가 병찬에게 그런 짓을 했다는 게 믿기질 않았다. 그러다가도 병찬이 팔을 올려 마주 안아주면 이젠 상호가 약간 울 것 같아졌다.

 

"햄 저한테 뭐라고 안 해요?"

"너한테 뭐라고 해야 하는데. 하고 싶은 말 다 했어."

"그냥... 왜 그랬냐고 하거나... 아님 그냥 한 대 치거나요."

"기억 안 나겠지만 내가 너 세게 때렸거든. 보나 마나 멍 들었을 테니까 연고나 사서 들어가."

"...“

 

저 말마저도 분위기를 풀려고 하는 것 같아서 상호는 그냥 낑낑거리며 병찬을 좀 더 꾹 안았다. 한참 그렇게 다독이고 나서 지친 얼굴로 집에 가자 말하는 병찬을 따라 대기실에 있던 베이스 가방을 어깨에 멘다. 가장 인기 있는 병찬이 없어서 그런지 바깥은 여전히 음악으로 시끄럽긴 했으나 사람은 많이 빠진 상태였다. 얼굴 아는 스태프들이 다가와 걱정 어린 얼굴로 괜찮냐 묻는 것에 병찬은 좀 싸우긴 했는데 이젠 풀었다며 상호의 등을 꾹 눌러 재빠르게 빠져나왔다.

클럽 밖까지 나온 상호는 그대로 인사하고 제집에 가려고 했는데 병찬은 상호의 손목을 덥석 잡더니 그대로 끌고 갔다. 상호는 으에? 소리를 내며 일단 얌전히 그 뒤를 따랐다.

 

"햄, 햄?"

"너 오늘 우리 집에서 자고 가."

"예?"

"이상한 새끼가 아직 근처에 있을 수도 있으니까 자고 가라고.“

 

아하... 아직 덜 맞았나 본데... 순간적으로 이상한 생각을 했던 기상호는 속으로 제 머리를 치며 조금 더 빨리 걸어 병찬의 옆에 섰다. 그러고도 병찬이 손을 놔주지 않아서, 그냥 그렇게 얌전히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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