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뱅

꿈이 다 그렇지...

상호병찬

페일 펜슬 by 페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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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빡. 눈을 감았다 뜬다. 병찬은 습관적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익숙한 공간이었다. 글쎄? 익숙하다고 느낄 뿐, 실제로 어떤지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꿈이란 게 원래 그러니까. 병찬은 자각몽을 자주 꾸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 장소에서만큼은 꿈이구나. 하고 깨달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이 장소는 지금의 병찬의 인식 상 예전 부연중 체육관이었기 때문에. 입고 있는 노란색 유니폼도 그렇고 묘하게 낮은 시선하며 몇 번이고 봤던 익숙한 것 같은, 칠이 살짝 벗겨진 농구 골대가 여기가 부연중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부연중이라... 요즈음에는 악몽을 잘 안 꿨는데 오랜만이네. 하도 많이 꿔서 이제 레파토리는 질린 지 오래다. 아마 조금 있으면 경기가 시작 될 테고 몸이 멋대로 움직이겠지. 조금 하다 보면 무릎이 아프다고 얘기할 테고... 그 뒤는 뭐. 지긋지긋하다. 가끔 컨디션이 안 좋을 때나 꿨는데, 오늘 자기 전에 컨디션이 안 좋았던가. 그건 기억이 나지 않는다. 딱히 알아야 할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지나가면 깨니까. 그래도 오늘 깨어나면 기분이 안 좋겠구나. 딱 그 정도의 생각만 했다.

 

체육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병찬은 고개를 돌렸다. 아마 경기를 할 상대방이겠거니 했는데 들어온 사람은 상호였다. ...상호? 기상호? 병찬은 눈을 끔벅인다. 여긴 부연중인데... 와중에 입고 있는 옷을 보면 지상고의 파란 저지다. 병찬이 다시 시선을 내린다. 자신은 여전히 부연중의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말랑한 팔을 보면 저는 중학생인데. 다시 고개를 든다. 놀라는 기색도 없이 녀석은 별 놀라운 일도 없다는 듯 그대로 병찬에게 다가왔다. 상호 외엔 들어오는 사람이 없었다. 왜?

악몽이 바뀌었나. 하지만 상호에게 막혔던 걸로 악몽을 꿀 정도는 아닌데. 그리고 그때를 악몽 삼으려면 자신은 조형고 유니폼을 입고 있어야 이치에 맞을 텐데. 병찬은 기묘함을 느끼며 상호와 시선을 마주한다.

 

"...상호야?"

"응, 뱅차이. 와."

"뱅차이?"

"어? 어. 뱅차이. 와, 또 못 알아듣겠다 할라꼬."

"...아니야.“

 

그런 설정인가... 하긴. 빠른이라고 했었지. 부상을 당하기 직전의 자신이라면 16살이고 지상고 1학년의 상호도 16살이다. 친구 같은 건가? 상호한테 애교 있는 목소리로 햄 햄 불린 적은 많지만 이렇게 담백하게 이름을 불린 것은 처음이라 병찬은 조금 생경한 기분이 들었다. 평범한 목소리는 생각보다 낮구나. 들은 적 있던가? 목 안이 조금 간지러운 기분이었다.

병찬은 괜히 헛기침을 한 번 하고선 어느새 손에 들려있는 공을 탕탕 튀겼다. 익숙하게 손을 올려 슛을 넣는다. 이때는 아직 슛 성공률이 그렇게 높지는 않았는데 공은 유려하게 림을 통과한다. 흠. 익숙하다고 해도 공이 림에 들어가는 순간은 기분이 좋다. 병찬은 미소 지으며 상호를 돌아봤고 몇 발자국 정도 떨어진 상태에서 같이 림을 쳐다보고 있던 상호는 반짝거리는 눈으로 병찬을 마주 봤다.

 

"니는 넣는 족족 다 집어넣네."

"상호는 아직 못하던가?"

"내는 멀었제. 감독님이 슛 안 늘리면 주전 못 뛴다고 그래 뭐라 한다 안 하나."

"그런가~?"

"몇 번 더 보여주면 안 되나. 니 넣는 거 보는 것도 재밌다."

"그래, 그럼.“

 

원래라면 공을 주으러 가야 할 텐데 옆에 있던 상호가 언제 가져온 건지 공을 던져준다. 던져주는 공을 받아 두어번 바닥을 튕기고 이내 집어던지면 당연하다는 듯 림을 통과한다. 이건 꿈이라 그런 건가? 들어가길 바라서? 뭐가 됐든 바닥을 나뒹구는 악몽 보다야 넣는 족족 림에 들어가는 꿈이 훨씬 낫다. 그래서 병찬은 별 말 없이 상호가 주는 대로 공을 던져 넣기를 반복했다. 꿈이라 그런지 힘들지도 않아 굳이 숫자를 세지도 않았는데 문득 와야할 공이 오지 않는 것에 시선을 돌린다. 상호의 손에는 더 이상 공이 없었고 대신 스포츠 타월이 들려있었다.

그것을 가만 쳐다보고 있으니 병찬은 그제서야 자신에게 땀이 났다는 걸 자각한다. 언제부터 이랬지. 뒤늦게서야 숨을 천천히 들이쉰다. 여전히 힘들진 않았지만 숨이 조금 거친 것 같기도 해서 그랬다. 그러는 동안 조금 떨어져 있던 상호가 천천히 다가온다. 병찬은 그런 상호를 쳐다보다가 문득 상호가 제 생각보다 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호가 가까워지며 병찬의 시선이 서서히 올라간다. 그렇지. 16살의 자신은 180대를 넘지 못했었다. 그리고 상호는... 거의 190에 가까웠었지. 그래봤자 고작해야 10cm 차이일텐데 어쩐지 좀 더 나지 않나... 병찬은 제 바로 앞에 선 상호와 얼굴을 마주 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반쯤 내리깔린 눈이 병찬을 내려본다. 병찬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감기 들린다."

낮은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병찬은 자신도 모르게 물러날뻔 했지만 상호가 먼저 타월을 목에 둘러줌으로서 물러나지 못했다. 부드러운 것이 목덜미와 볼, 이마 등을 문질러준다. 그 세심한 손길에 병찬은 어느새 숨을 꾹 참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머리가 어지럽다. 무언가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러니까.

 

"뱅차이. 내 좀 봐라.“

 

고개를 든다. 갈색 눈동자가 여전히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모르는 사이에 얼마나 가까워진 건지 병찬은 제 허리에 둘러진 손을 느낀다. 상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온다. 병찬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올려 상호의 팔뚝을 쥐었지만 그것을 밀쳐내지 못하고, 붙박인 듯 굳은 채로 멍하니 다가오는 상호를 쳐다봤다. 아, 닿는다.

 

"왜, 그리 꼴리드나.“

 

웃음기 섞인 목소리와 함께 병찬은 눈을 번쩍 떴다. 익숙한 천장이 보였고 병찬은 그 천장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숨을 들이켜다 내쉬기를 몇 번. 병찬은 아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창문을 쳐다보면 아직 살짝 어두운 것이 이른 아침이거나 새벽인 것 같았다.

병찬은 멍하니 허공을 보다가 천천히 이불을 걷고 그대로 입고 있던 바지를 들춰보았다. 그리고 이내 눈을 질끈 감는다. 부정하고 싶었지만 모든 감각이 그것을 긍정하고 있었다. 병찬은 입술을 꾹 물었다가 옆에서 뒤척이는 초원이의 기척에 급하게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이제 상호 얼굴 어떻게 보지...? 이 와중에 그런 생각 먼저 하고 있으니 왜 그런 꿈을 꿨는지 알 것 같아서 병찬은 기분이 더 처참해졌다.

 


 

병찬이 대학생이 되고서도 상호는 종종 연락을 했다. 대학생이 된 뒤 첫 연락은 병찬이 먼저 했었다. 대학 동기인 준수랑 실없는 얘기를 하다가 지상고 이야기가 나왔고 협회장기에서 우승을 못했다며 연습 허투루 하는 거 아니냐는(실제 단어는 좀 더 그랬지만 순화하자면) 말을 했고 병찬은 그 말에 웃다가 하여튼 준우승은 했다는 말에 그냥 그럴 마음이 들어서, 먼저 상호에게 연락을 했다. 준우승 축하한다는 가벼운 안부 인사였지.

고등학교 때의 부끄러운 첫 몽정. 의연한 척 하려고 했지만 그 대상이 자신보다 5살이나 어린 애라는 건 솔직히 좀 생각이 많을 수 밖에 없었고 고작해야 낮아진 목소리와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 때문에 그렇게 반응했다는 건 약간 인간적인 무언가가 조각조각나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고 상호를 피한 건 아니지만 먼저 연락하지 않는 성격임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나서도 굳이 연락을 하지 않은 것은 아마 미묘한 죄책감과 쪽팔림의 발로였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이게도 대학생이 되고 나서는 그런 꿈을 꾸지 않았고 눈치 못했던 뒤늦은 사춘기의 여파가 아니었을까, 생각했던 박병찬은 이 정도면 괜찮겠지. 라는 마음으로 상호에게 연락을 했다.

 

왜 그랬을까... 병찬은 살면서 꽤 많은 후회를 지나왔지만 이번엔 좀 진한 후회를 했다. 준우승 축하한다고 메시지를 보낸 것 까지도 좋았고 그 뒤에 답변이 와서 적당히 근황 주고받은 것도 좋았는데 전화를 해도 되냐는 물음에 별 생각 없이 수락했더니 바로 전화를 하고, 그 뒤에 들뜸을 숨기지 못하는 목소리로 보고 싶다고 말하는 것에 박병찬은 아, 좆됐다. 라고 생각했다.

전화 받지 말 걸. 축하 메시지 받지 말 걸. 왜 그런 후회를 했는가? 박병찬이 기상호를 좋아하니까. 그것도 이제야 고2, 나이로는 고1이 된 애를 좋아하니까! 게다가 그 어린애는 저를 볼 때마다 눈을 반짝이면서 햄 멋져여! 같은 말이나 하는데 걔로 그렇고 그런 꿈을 꿀 정도로 묘하게 꼴림을 느꼈다는 사실을 차마 마주할 수가 없어서!

그리고 전화를 받고 병찬햄, 하고 부르면서 보고 싶었다. 라고 말하는 상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박병찬은 아랫배가 간지러워지는 기분을 느꼈다. 진짜 개 망했어... 와중에 앞으로 먼저 연락해도 되냐고 묻는 말에 어렵겠다는 말조차 나오지 않았던 병찬은 참담한 시선으로 당연하지~ 라는 답변을 하고서 전화를 끊었다. 참담했다.

그리고 한 말은 어떻게든 지키는 기상호. 그 뒤로 기상호는 자주 연락했다. 매일 연락하는 거면 뭐라고 하겠는데 경기에서 괜찮은 실적을 냈거나 그것 외엔 2주에 한 번 연락 할까 말까 하는 정도라 귀찮다고도 못했다. 아니, 글쎄. 사실 매일 연락했어도... 아니다...

 

그리고 그런 기상호 때문에 박병찬은 크나큰 에로... 아니, 애로 사항이 생겼다. 뭐냐면, 기상호와 통화한 날에는 예전의 박병찬을 미치고 팔짝 뛰게 만드는, 그 악몽이라고는 애매하지만 웬만하면 꾸고 싶지 않은 그 꿈을 꾸게 됐다는 것. 익숙해지지도 못하게 레파토리는 항상 바뀌었다. 어느 날은 저 자신이 어려져 키가 큰 기상호가 저를 내려다보았고 어느 날은 어린 기상호가 연습하는 박병찬을 보고 싶다며 서울로 올라오기도 했다.

어느 날은 연습 경기를 뛰는데 문득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벤치 쪽을 쳐다봤더니 후배들과 함께 기상호가 서 있더라. 그 순간 꿈인 걸 깨달았고 꿈은 마치 깨달았으니 더 배려해줄 필요 없다는 듯 중간 상황을 잘라먹고 라커룸에 한참 뛴다고 숨을 헐떡이던 병찬과 뭔가 좀 더 어른스러워진 상호를 집어넣어 버렸다. 오늘도 정말 멋지다며 볼을 붉히며 다가오던 녀석이 어느새 제 입술에 시선을 고정했을 때 병찬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러지 않으면 고개를 내밀어버릴 것 같았으니까.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몽정으로 깨닫는 건 정말이지 끔찍했다... 그 끔찍함 때문에 밥을 거른다거나 훈련을 대충하는 일은 없었지만 병찬은 매일매일 마주하는 준수의 얼굴을 보기가 갈수록 미안해졌다. 아직도 종종 지상고 이야기를 하면서 쉽게 좋은 말은 못해도 묘하게 아끼는 모습을 보이면 더욱 그렇다. 준수야. 나 너네 팀 17살 애기 가지고 몽정해... 아마 이런 말을 했다간 짜증 내면서 장난하지 마세요. 하다가 그게 장난이 아니라는 걸 알자마자 글쎄? 치지는 않겠지만 가만있지도 않겠지. 안 말할 거지만...

 


 

오늘도 앞에 상호가 있는 걸 보니 또 전화를 했구나. 병찬은 그렇게 생각했다. 꿈을 꿈이라고 깨닫는 것은 쉬운데 잠들기 전 기억은 나지 않아 그랬다. 버릇처럼 주변을 둘러보면 익숙한 장소다. 어디냐면, 병찬의 자취방이었다. 보통은 체육관이던데 그러다 앞에 있는 상호가 앞으로 몸을 내밀어서 병찬은 익숙하게 숨을 들이켰다.

둘은 현재 병찬의 침대 위에 앉아 있었고 특히나 상호는 병찬의 다리 사이에 자리해있었다. 아, 설마. 진짜? 하다 하다 이렇게까지 한다고? 병찬은 그 상황에 경악하려 했고...

 

"다리, 좀 더 쭉 펴세요. 잘못하면 다쳐요.“

 

그대로 제 발목을 잡고 쭉 잡아 당기더니 몸을 밀쳐 눕히고, 그대로 제 무릎을 주물러주는 손길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솔직히 꿈속이라 시원하거나 아픈 건 모르겠지만 하여튼 자신이 상상한 그 최악의 상황이 아니라는 것에 병찬은 매우 안심해버려서, 그대로 상호가 집중하는 얼굴을 멀거니 쳐다만 봤다. 이번에는 그래도 뭐가 변한 건 없는 것 같다. 아직 젖살이 남아있는 볼이라던가 웨이트를 열심히 했다지만 아직은 얇은 팔 등이 그 인식을 긍정해준다. 그럼 얘는 왜 내 방에 있는 거지. 이번에는 혹시 사촌, 이런 건가?

병찬이 그렇게 생각에 잠겨있으니 한참 다리를 주물러주던 녀석이 병찬을 쳐다보더니 눈썹을 묘하게 늘어트리며 서운하다는 듯 말했다.

 

"햄. 무슨 생각해요..."

"응? 아냐. 그냥... 상호 귀엽다는 생각?"

"저 귀여워요?"

"응, 귀엽지."

"근데 왜 그런 눈으로 보세요...“

 

내가 어떻게 봤는데. 그 말을 채 하기도 전에 상호가 몸을 숙인다. 또 이렇게 되는 구나. 병찬은 눈을 가늘게 떴다가 상호가 입술을 맞대면 못 이기는 척 입을 열어줬다. 그래, 병찬은 이제 꿈을 조금 즐겼다. 어차피 죄책감과 회의감에 허덕인다면 이런 거라도 받아야지. 어차피 진짜도 아니니까 이 정도는 괜찮지 않나 싶었다. 반항을 해봐도 아침에 허공을 보다가 화장실에 엉거주춤 가는 일은 변하지 않으니까.

질척이는 소리가 들린다. 병찬은 눈을 꾹 감았다. 고작해야 꿈인데도 상호랑 닿아있다고 생각하니 묘하게 기분이 들뜬다. 걔도 이제 2학년이고 선배라고 나름 바빠서 그런가 요즘 연락이 좀 뜸해졌단 말이야. 그래서 꿈 자체도 오랜만인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꿈속에서나마 저 좋다고 안달을 내고 달려드는 상호를 본 것도 오랜만이라는 거다. ...차라리 안 깼으면 좋겠다. 그러면.

그 순간 상호가 떨어진다. 그게 아쉽다고 생각해서, 병찬은 눈을 떴다. 놀란 눈으로 상호가 침대 옆에 앉아 저를 내려다보는 게 보인다. 얼굴이 여전히 가까워서, 이번엔 자신이 먼저 팔을 뻗어 상호의 뒷목을 잡고 제 쪽으로 당겼다. 억, 소리를 내면서도 쉬이 끌려오는 녀석에게 입을 맞춘다. 무슨 생각인 건지 입을 열어주지 않아서, 병찬은 조르듯이 입술을 할짝거렸다. 이내 벌려지는 입 안에 혀를 집어넣는다. 아까까진 그렇게 혀를 놀리더니 굳은 것이 웃기다. 왜, 맨날 내가 받기만 해서 놀란 모양이지. 병찬은 피식 웃으며 가까이 온 상호를 끌어안으며 다시 눈을 꾹 감고 고개를 비틀었다.

품 안에 가득 찬 온기가 좋다. 맞닿는 혀는 약간 뜨거운 것이 더 좋았다. 한참 굳어있던 녀석은 이제 병찬을 마주 끌어안으며 서툴게나마 혀를 같이 문질렀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그대로 입을 벌려 혀를 비비적거리다가 이내 상호의 혀를 살짝 물고 쪽쪽 빨아주었다. 흐윽, 숨 들이켜는 소리가 만족감을 더 해준다.

병찬은 한참이나 쪽쪽 소리를 내며 입을 맞추다 만족하고 눈을 떴다. 어느새 얼굴이 새빨개진 상태로 눈을 꾹 감고 부들부들 떠는 상호가 보인다. 병찬은 그 모습을 쳐다보다가 갑자기 찬물을 맞은 기분이 되었다. 잠에서 깨니 그 전 기억이 난다. 지금은 지상고의 방학이었고 며칠 주어진 쉬는 기간에 집에만 있을 거라 말하는 상호를 보고 서울에 한 번 놀러 오겠냐고 했었지. 상호는 그래도 되냐며 수락했고...

 

아 시발...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다. 잠결에 그랬다기엔 너무 오래 했다. 차라리 중간에 깨닫고 화들짝 놀랐으면 어떻게 무마라도 하겠는데 한참을 했다. 하다 보니 기분이 너무 좋아서, 그냥 계속하고 싶어서. 병찬은 망연자실하게 아직도 굳어있는 상호를 쳐다보다가 급하게 일어났다. 그대로 내일 상호랑 같이 놀러 갈 때 입으려고 내어두었던 코트와 바지만 적당히 걸쳤다. 이 밤에 괜찮으니까 자라고 해도 안 먹힐 테고 돈 주면서 밖에 나가라고 하는 것도 이상해서, 병찬은 그냥 자기가 나가기로 했다.

그러고 있으니 뒤늦게 정신을 차린 것 같은 상호가 어버버 거리더니 급하게 다가와 병찬의 옷자락을 잡는다. 당황한 얼굴이 선명해서, 병찬은 파들파들 떨리는 입꼬리를 어떻게든 끌어올리며 말했다.

 

"상호야, 진짜 미안하다. 내가 잠에서 덜 깨서 그랬는데 불편할 테니까 형이 나갈게. 너는 그냥 더 자고 나중에 일어나서 나가도..."

"ㅎ, 햄!!!"

"어, 어?"

"저인, 줄, 모르고 하, 하셨어요?“

 

병찬은 입을 꾹 다문다. 너인 줄 모르고 했냐고. 너라서 했는데. 근데 그걸 어떻게 말해. 꿈속에서 네가 키스해주길래 너무 기분 좋아서 꿈인지 현실인지도 모르고 입술 부볐다고 해? ...아니다. 잠깐. 이건 그러니까, 이 착해빠진 애가 나한테 주는 마지막 기회인가? 병찬은 급하게 다시 미소를 꾸며내며 입을 열려다가... 말았다. 그럼 누군지도 모르고 그냥 앞에 사람 있어서 했다고 해? 뭐 아무나 눈앞에 있으면 입술 부비는 새끼냐고 내가. 그건 아니지.

병찬은 이제 어린애 가지고 이상한 꿈 꿨다가 걔가 앞에 있길래 낼름 입술을 채간 도둑놈이 되거나 아무하고 입술을 부벼대는 제비 새끼 중에서 선택해야 했다. 뭐가 더 오답일까. 둘 다 오답인 거 같은데 그 이외에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근데 병찬은 그중에서 후자가 더 싫었다. 상호가 병찬을 어린애를 좋아하는 도둑놈 취급하는 것보다 안 가리고 아무하고 입을 부벼대는 가벼운 사람으로 아는 게 더 싫다. 그건 진짜 끔찍하잖아. 그래서 병찬은 한참 침묵하다가 결국 기어가는 목소리로 겨우겨우 말했다.

 

"너인 거 알았어...“

 

어찌나 작게 말했는지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을 텐데 상호는 병찬이 답하자마자 잡은 손에 힘을 더 준다. 병찬은 이제 도망갈 구석도 없어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가만히 잡혀있었다. 차마 시선을 마주할 용기가 없어서 당장 놔주길 바라며 손만 쳐다보고 있는데 상호가 그대로 병찬을 잡아당긴다. 병찬은 그 손길에 무력하게 끌려갔고, 이내 허리를 숙이면서 시선을 맞춰오는 상호와 얼굴을 마주한다.

 

"아, 아, 아셨, 으면. ...조, 조금만 더, 하면, 안 되나요...“

 

병찬과 마찬가지로 얼굴이 새빨갛다. 막 입을 뗐을 때처럼 완전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니, 달아오른 게 안 가라앉은 건가. 병찬은 그 얼굴을 마주하다가 하, 헛웃음을 흘렸고 상호는 가만히 올려다보면서 입을 꾹 다물고 계속해서 눈을 맞췄다.

 

"상호야, 너 지금... 네가 무슨 소리 하는지 제대로 알고 말하는 거야?"

"내, 내도 알아요. 애초에, 그렇게 자주 만나지도 않은 타교 선배가 불렀다고 서울에 오는 아가 어딨는데요...“

"그럼...“

 

이제 얼굴이 새빨간 사람 둘이 마주 본다. 방금은 뭐라도 말하더니 이젠 아무 말도 못하는 상태였다. 토마토 둘은 한참이나 서로 시선을 마주하다가... 결국 좀 더 어린 토마토가 마음을 먹은 듯 고개를 내밀었다. 꿈속에서 몇 번이나 봤던 장면이었지만 어느새 제 손을 조심스럽게 잡은 그 손이 정말 따가울 만큼 뜨거워서, 병찬은 이게 꿈이 아님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원래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할 텐데 열 때문에 마비된 머리는 제 앞에서 눈을 꾹 감고 고개를 천천히 내미는 상호의 입술만 바라봤다. 그러니까, 쟤도 날. 병찬은 결국 제 욕망에 패배하여 저 역시 고개를 내밀어 입술을 맞대고 이내 입을 열었다. 닿은 온기는 비슷해서, 병찬은 그제야 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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