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뱅

Sweets Love

상호병찬

페일 펜슬 by 페일
35
1
0

Sweet Darling

 

기상호는 제 앞에 있는 컵을 집어 들었다. 그대로 혀를 댄다. 꿀꺽. 소리와 함께 얼굴을 찌푸렸다. 으, 소리를 내며 내려놓고 혹시 물이 있는가 물었다. 감독 선생님이 자연스럽게 물 한 병을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마시자 바로 앞, 마주 보고 앉은 검사관이 묻는다.

 

"무슨 맛이 느껴졌습니까?“

 

기상호는 미친 듯이 뛰는 제 심장을 느낀다. 모 아니면 도, 맞추면 제 인생은 여전한 하루를 보낼 것이고 틀린다면? 알 수 없다. 기상호는 정말 아무렇지 않은 듯, 침묵이 너무 길지 않도록 신경 쓰며 마지막까지도 제 답에 확신을 하지 못하며 입을 열었다.

 

"짠맛이요.“

 

쿵, 쿵, 쿵. 기상호는 뛰는 심장을 들키지 않으려 눈을 살짝 내리 깐 채로 제 앞의 액체를 쳐다보았다. 설탕물? 소금물? 어쩌면, 레몬? 다시 시선을 든다. 검사관은 제 앞의 종이에 무언가 적고 있었고 감독 선생님은 하품을 하고 있었다. 사각사각, 검사관이 다시 시선을 들어 기상호를 쳐다보더니 눈을 휘며 웃었다. 아, 기상호는 그 미소에 그제야 웃을 수 있었다.

 


 

기상호는 포크였다. 언제나처럼 등교 전 어머니가 차려준 된장찌개를 한 숟갈 푹 떠서 입에 넣는데 아무 맛도 안 나더라. 잠이 덜 깨서 그런가? 생각하며 마저 밥을 먹는데 계속 아무 맛이 안 났다. 그럴 만한 일이 따로 없었으니 떠올릴 수 있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포크로 각성을 한 것이다.

차별에 관대한 대한민국에서 포크로 각성한다는 것은 평생 사람보고 살 일 없는 게 마음이 편하다는 것과 뜻이다. 주민등록증에 식인食人주의자 라고 적히고 이력서를 제출할 때도 포크임을 숨겨서는 안 됐다. 사는 지역 근처의 모든 케이크에게 이름과 얼굴, 나이가 고지 되었고 포크라는 이유로 주변 사람들은 이미 범죄자로 단정 짓고 배척하곤 했다. 기상호가 사는 지역에도 포크가 있었기에 기상호는 그 모든 일들을 지켜본 바 있었다.

국가에선 이 잠재적 범죄자들을 색출 해내 범죄를 예방한다며 주로 포크가 각성하는 고등학교 시기의 끝, 수능에 문제가 갈까 염려한 학부모들의 의견을 수용해 수능이 끝난 뒤 검사했다. 검사는 간단하다. 단맛, 짠맛, 신맛이 나는 투명한 액체를 먹이고 맛을 물었다.

기상호는 검사를 받고 나오는 애들에게 어땠냐고 물었고 대부분 모를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맛이 났으며 첫 번째엔 대부분 단맛을 먹었다는 답변을 받았다.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아이들을 배려하는 걸까? 기상호는 주워들은 답변 몇 개로 도박을 했고 도박은 성공했다. 기상호의 주민등록증에는 식인주의자라는 글자가 박히지 않았다.

 

미맹이 되었다고 기상호의 인생이 그렇게 달라지진 않았다. 경상도 사람으로 간이 센 것을 선호하는 취향이야 있었지만 아예 느껴지지 않아 주는 대로 잘 먹는 덕에 어머니께선 좋아하셨다. 그냥 평범하게 공부하고 친구들과 떠들다 밥을 먹는 하루를 반복했다. 마음 한구석에선 계속 불안했다. 포크는 케이크를 보면 미친다는데 나는 어떻게 될까.

불행 중 다행으로 기상호의 근처엔 케이크가 없었기에 한동안 그 답을 알 수 없었으나 대학교에 갔을 때 그 답을 알게 될 기회를 얻었다. 다 같이 모여 인사하는 자리에 도착하여 들어갈 때부터 단내가 났었다. 케이크가 있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기상호는 안으로 들어섰고 자리를 잡았다. 맛을 잃어버린 지 1년이 채 되지 않았으나 기상호는 제 혀 밑에서부터 침이 고이는 것을 느꼈다. 원래도 단것을 좋아하는 편이었는데 제대로 먹지 못한 지 한참이라 더 그랬던 것 같기도 했다. 자기도 모르게 주변을 계속 살피는데 단내가 점점 심해졌다. 여기서 음식을 먹을 거란 생각에 점심을 굶었더니 주린 배가 아우성친다.

멍하니 있는데 어깨에 손이 올려졌다. 단내가 바로 옆에서 나는 것처럼 진하게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선배들이 모여있던 곳에서 얼굴을 봤으니 제 선배일 텐데, 그는 저를 보며 이름이 뭐야? 라고 물었다. 제게 호감이 있는 게 느껴졌다. 그래서 기상호는 마찬가지로 눈을 접어 웃으며 기상호입니다. 라고 답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신입생들을 환영하는 자리인지라 술도 잔뜩 있었다. 빠른 년생이라 말하지 않은 탓에 술이 권해졌고 기상호 또한 몇 잔 마셨다. 기상호는 어느새 제 옆에 앉은 선배를 뚫어지게 쳐다보고만 있었다.

자리가 파하고 모두 돌아갈 즘 되니 제 옆에 앉았던 선배가 번호가 무어냐 물어 제 휴대폰을 내밀었다. 그리고 기상호는 말했다. 데려다드릴까요? 그 선배는 웃으며 자취방인 거 알고 묻는 거냐 했고 기상호는 몰랐다고 답했다. 그렇게 둘은 선배의 자취방으로 갔고….

그렇게 기상호는 답을 얻었다. 들어와서 물 한 잔 마시고 가라는 말에 집을 따라 들어가고 집 안에서 진동하는 단내에 머리가 아찔하면서도 기상호는 그 선배에게 손을 대지 않았다. 선배가 웃으며 제 손을 잡고 가까이 앉아도 기상호는 웃음을 유지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것을 쑥스러워한다고 생각한 건지 혹시 연애해 본 적 없냐 묻는 말에 기상호는 웃으며 누님이 처음인데요. 라고 답했다. 키스는? 하고 묻는 것에 그것도 처음이라 답하자 고개가 들이밀어진다. 기상호는 점점 가까워지는 단내에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집으로 가는 길에 기상호는 확신했다. 저 자신이 남을 먹게 될 일은 없을 것이다. 자신보다 한참 작고 힘도 약한 케이크. 장소는 집 안. 저에게 호감을 느낀 이는 무방비하게 기대왔음에도 기상호는 기어코 입을 대지 않았다. 참지 못하고 손을 뻗고 입을 벌리다가도 기상호는 두려워했다. 제 주위 사람들이 저를 떠날까, 부모님도 실망하여 저를 쫓아낼까, 범죄자 딱지를 달고선 다시는 일반인에게 섞이지 못할까 그리도 두려웠다. 가장 두려운 것은 제 앞에서 환히 웃는 사람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드는 것이었다. 기상호는 누군가의 목숨을 제 손에 쥐고 좋을 대로 뭉그러뜨리는 것을 좋아할 수 없는 인간이었다. 그럴 자격이 제게 있을 리가. 기상호는 감히 제가 그럴까 두려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겁쟁이라서 범죄자가 되지 못한다니. 그게 좀 비웃기면서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범죄자보단 겁쟁이가 낫지. 그런 생각을 하며 기상호는 잘 들어갔어? 라며 메시지를 보내온 선배의 번호를 물끄러미 보다가 답장했다. 여전히 순하고 착하고, 호감이 있는 것 같은 답변이었다. 웃음이 실실 나온다. 여전히 혀 밑에는 침이 고여있어 기상호는 그것을 꿀꺽 삼켰다. 처음 맛본 케이크는 정말 달콤했다. 어째서 그 많은 이들이 제 모든 걸 망가트리는 짓을 하고자 마음먹는지 알 수 있을 만큼.

자신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다 입을 꾹 다문다. 아직도 정신이 어지럽기만 했다. 그래도 자신이 선을 넘지 않을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어 마음은 편했다. 미지는 언제나 기상호를 두렵게 했기에 기상호는 제 모든 걸 걸고 저를 단두대에 올렸다. 그리고 살아 돌아왔다. 이제 기상호는 그 무엇도 두렵지 않았다.

 


 

기상호는 멀쩡히 대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에 취직했다. 회사의 톱니바퀴가 되어 데굴데굴 구르고 있을 때 소속된 부서에 경력자가 새로 들어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전 회사에서 안 좋은 일이 생겨 이직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탕비실에 가니 그 이야기로 또 시끌시끌하다. 기상호는 무심하게 들어가 커피 머신에 제 머그잔을 올렸다. 말을 옮겨대지 않는다는 걸 아는 소식통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제 패거리들에게 속삭이는 게 들렸다.

 

"이번에 오시는 분이 케이크래요.“

 

아하. 그건 좀 곤란한데. 손을 못 대는 것과 별개로 옆에 있으면 거기에 신경이 쏠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일에 방해가 될 텐데. 만약 자신이 포크라는 인증을 받았다면야 둘 중 하나를 다른 부서에 보냈겠으나 기상호는 일반인으로 표기되어 있으니 그럴 일이 없다. 익숙해져야지 별수 있나. 기상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고민하다 말았다. 그만두거나 자신이 이직할 거 아니면 해결책도 따로 없었다.

머그잔에 커피를 잔뜩 담고 탕비실에서 나온다. 홀짝거리며 걷고 있으니 벌써 복도에서부터 단내가 났다. 벌써 왔나. 그대로 문을 열고 들어가면 빈자리 하나가 차 있다. 기상호의 옆자리였다. 아. 이런. 기상호는 아무런 티도 내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자연스럽게 제 자리에 앉았다.

맛있겠다. 떠오르는 생각을 굳이 잡지 않으며 다이어리를 꺼내 해야 할 일을 살펴본다. 하던 서류 마저 완성하고 조금 있다가 일 얼마나 진척됐는지 연락하고…. 돌아가지 않는 머리에 억지로 업무를 쑤셔 넣고 있으니 옆에서 톡톡, 팔뚝을 건드린다. 고개를 돌리면 웃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아래 속눈썹은 거의 없고 눈은 쭉 째져선 뭔가 매끄러운 얼굴인데 전체적으로 조형이 조화로워 미인상의 얼굴이다. 맛있겠다. 눈이 마주치니 장난스러운 얼굴로 말한다.

 

"안녕하세요. 새로 온 박병찬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기상호입니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데 안 그래도 먹고 싶어 죽을 것 같은 상황에 예쁘장한 얼굴 보니 군침이 돈다. 기상호는 고개를 돌려 머그잔에 담긴 커피를 다시금 삼켰다. 지금이야 웃어주지만 자기가 포크인 걸 알면 경악하고 싫어하겠지. 경멸하듯 쳐다보며 옆에 오기도 싫어할 테고 자신이 포크인 걸 까발리며 타 부서로 옮겨달라고 요구할 것이다. 회사는 그 요구를 들어줄 테고, 어쩌면 그냥 밖으로 내보내 버릴지도 모른다. 아니 그럴 확률이 높다. 이 회사는 모집 공고에 포크를 받지 않는다고 명시해 두었으니 계약 위반으로 얄짤없이 해고다. 그리고 영원히 포크라는 꼬리표가 저를 따라다닐 것이다. 어떻게든 숨기고자 했던 제 치부가 낱낱히 밝혀지겠지….

좋아. 식욕, 정확히는 제 모든 의지를 꺾는 상상이었다. 기상호는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으므로 제 앞의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 타자를 두드렸다. 타닥타닥타닥. 단내도 결국 향기. 오래 맡으면 익숙해진다. 그것은 경험에서 우러나온 답이었다. 맛있겠다. 기상호는 익숙해질 때까지 규칙적인 타건 음에 머리를 맡겼다.

 


 

저 자신이 케이크인 건 아기 때부터 알았다. 신생아실에 누가 쳐들어와서 아기를 훔쳐 가려 했으니 원. 그 사람이 포크였으므로 그 사람이 데려가려던 병찬이 케이크인 건 그냥 당연한 사실이었다. 부모님은 자신이 케이크인 걸 알자마자 옆에 반드시 있었고 대부분은 안고 다녔다. 하지만 걸을 수 있게 되고 고집이 있는 제가 걸어 다니겠다 고집을 피우자 나중에는 산책 줄을 허리에 매어두기도 했다.

그리고 납치 납치 납치…. 부모님이 하도 신신당부했던 덕에, 그리고 옆에 붙어 있어 주신 덕에 다 클 때까지 겨우 살아있었으나 납치된 횟수는 세기도 어렵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얼굴이 좀 괜찮아서 그런가. 다들 키워서 잡아먹으려고 든 덕에 탈출할 수 있었다. 다사다난했지만 그래도 많은 사랑과 보호를 받으며 그럭저럭 살 수 있었는데.

회사 합격해서 경력 좀 쌓고 있으니 일이 터졌다. 타 부서에 포크가 있는 것도 알았고 그 포크의 이름과 얼굴도 당연히 제게 건네졌지만, 담배 좀 피우겠다고 들어간 옥상에서 딱 마주칠 줄은 몰랐지. 근데 그 미친놈이 얼굴 보자마자 달려들어서 계단에서 굴렀다. 덤빈 놈도 같이 굴러서 어디 부딪힌 건지 기절을 한 덕에 잡아먹히진 않았는데 몸을 다치긴 했다. 합의금도 받았고 쫓아내겠다 약속도 받았는데 밤늦게 퇴근하다 또 덤벼들더라.

다행히 병찬이 덩치도 있고 힘도 센 덕에 제압은 했지만, 일정한 루틴을 들켰다는 건 꽤 피곤한 일이라 결국 병찬은 이직을 했다. 그리고 이직 이직 이직…. 포크의 취급이 너무 안 좋으니 회사에선 포크를 고용하면 지원금을 받았는데 그 탓에 어디든 포크가 한 명쯤은 있었다. 그리고 모두 기가 막히게 마주치더라. 아마 쫓아오거나 돌아다니는 걸 보고 기다리고 있는 거겠다 싶었다. 결국 병찬은 다음 이직에 조건을 걸었다. 무조건 포크가 없을 것.

 

지원금이고 뭐고 회사에서 살인 나는 거 기겁하는 사장도 많아서 고르기는 쉬웠다. 그리 도착하니 문제가 조금 생겼는데, 뭐냐면 옆 사람이 자기를 싫어하거나, 적어도 친해지고 싶지 않은 것 같다는 점. 첫날에 잘 지내보고자 웃음 장착하고 먼저 인사할 때까지도 받아주는 것 같던 그 사람은 정말 죽어라 자길 피해 다녔다.

다섯 살이나 차이라 어색한가? 해도 제 또래 선배들이랑은 매우 잘 지냈다. 병찬이 먼저 웃는 얼굴로 몇 번 다가갔는데도 모든 대답을 네. 그래요. 진짜요. 로 통일해서 대화도 제대로 안 이어주고 업무 관련도 바로 옆에 있는데 꼬박꼬박 회사 메신저로 보낸다. 다 같이 밥을 먹을 때도 속이 안 좋다는 말로 맨날 빠지더니 어쩌다 저가 쉬거나 사정이 생겨서 점심을 못 먹을 땐 다른 사람이랑 잘 먹는다는 얘기도 들었다.

밥도 같이 먹기 싫을 정도로 내가 싫은가. 박병찬은 기분이 좀 이상했다. 살면서 좋은 피지컬, 예쁘장한 외모, 활발한 성격 덕에 어디 가서 누구한테 싫은 소리 듣는 건 고작해야 그 조건들을 질투하는 사람이 전부였는데. 그런 인간인가 싶어 넘어가려고 했더니 나중에 탕비실에서 누가 제 얘기하는 거에 그런 사람 아닌 것 같던데요. 말하면서 뒷말하는 사람들 막는 꼴 보면 그건 아닌 것 같고.

짐작은 안 갔으나 저 피하는 사람과 억지로 친해질 정도 없다. 이왕이면 잘 지내는 게 좋겠지만 업무적으론 문제없으니까 더 신경 쓸 필요는 없지. 그래서 박병찬은 제 옆의 기상호를 무시하기로 했다.

 

그리고 무시하기로 하자마자 같이 야근한다. 운명의 장난이란. 협력사에서 급하게 준비해 줘야 할 서류가 있다고 전화했는데 담당자가 기상호 본인이고 부장님께선 혼자서 하긴 벅찰 테니 지원자를 받았는데 다들 약속이 있다는 말로 피하길래 박병찬은 별수 없이 자신이 손을 들었다. 그럼 병찬 씨가 같이 해줘. 라는 말을 할 때 옆에서 아…. 하며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박병찬도 기분이 좀 꽁기해지지만 뭐 야근 수당 받으면 좋으니까. 약속도 없었고.

그렇게 나란히 앉아 한참 자료를 정리하고 서류를 작성한다. 저녁때도 같이 나가서 먹겠냐 물으니 속 안 좋다고 하는 거에 나가서 먹고선 커피 하나 사 와 건네준 뒤론 대화가 없었다. 솔직히 좀 짜증 나서 침 좀 뱉어볼까 했다가 역시 좀 그래서 에스프레소 샷 네 개 추가했는데 잘만 마시더라. 에씨. 쓴 거 잘 먹나 보네.

속에 점점 쌓이는 이 와중에 또 톡으로 할 말 전하는 꼴 보고 말없이 자료를 정리하던 박병찬은 결국 참지 못하고 파티션 너머 제 옆에 앉은 사람 얼굴에 제 고개 들이밀며 말했다.

 

"상호 씨는 제가 싫어요?"

"네???"

"맨날 점심에 같이 밥 먹을 때 빠지길래 혼자 먹는 타입인가 보다 했더니 저 없을 땐 같이 먹는다면서요?"

"…."

"다른 사람한테 업무 설명할 땐 말로 하고 나중에 메신저로도 보내준다고 하더니 저한테는 바로 메신저고?"

"그건, 효율성을 위해…."

"저 반대의 옆 사람한텐 그냥 말로 하면서?"

"…."

"전에 흡연실에서 만났을 땐 저 보자마자 담배 끄고 나갔죠."

"그건 다 펴서…."

"아, 다 펴서 반도 못 피운 장대를 비벼끄고 나가셨다?"

 

할 말이 없는지 자긴 쳐다보지도 않고 모니터만 빤히 바라보는 꼴이 얄밉다. 어떻게든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모양새다. 진짜 내가 싫은가? 근데 왜 내가 싫지? 오늘 낮에 했던 무시하자는 다짐은 그새 잊은 박병찬이 아예 기상호 쪽으로 몸을 숙이며 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왜 절 그렇게 피하시는데요. 이유나 듣죠."

"…저기."

"네."

"너무 가까운데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로 고개를 돌리는 꼴이 퍽 가녀리다. 덩치는 병찬이랑 비슷한 놈이…. 예상치 못한 반응에 병찬은 멀거니 그 뒤통수를 쳐다본다. 뭐야. 왜 저래…. 그럴 분위기 아니지 않았나? 아닌가? 좀 과했나? 병찬이 뒤늦게 몸을 바로 하니 이젠 아예 의자를 돌려 등을 보인 채로 상체를 푹 숙이고 있다. 열 받아서 신경 안 썼는데 생각해 보니 좀 가까웠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니 근데 우린 그냥 동료니까 좀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지는 옆 동료랑 귓속말도 하던데 왜 나하고만….

궁시렁거리며 고민하던 병찬의 머릿속에서 전등이 켜진다. 깨달음이 왔다. 왜 자기랑 점심도 안 먹고 눈도 안 마주치고 흡연실에서 마주치면 냅다 나가면서 말도 제대로 안 하려고 했는가? 그렇구나, 날 좋아하는구나…. 박병찬의 모든 의문에 답이 되는 이유였다. 얼마나 쑥스러움이 많은지 그렇게 좋으면 말이나 한번 걸어보던가 뭘 그렇게나….

저 좋아해서 그렇다는 답이 나오니 박병찬은 조금 너그러워진다. 저 싫다는 사람에겐 매정해도 저 좋다는 사람에겐 나름 관대해지는 게 박병찬 인생 모토였다. 포크는 제외지만? 그 새끼들은 저 좋다는 게 좀 궤가 다르니까. 마음이 너그러워진 박병찬은 가벼운 목소리로 말한다.

 

"알았어요. 그럼 천천히 친해지든가 하고, 앞으로 밥 먹을 때 저 피하지 말고 업무 관련 이야기도 말로 하세요. 솔직히 무시당하는 거 같아서 좀 섭섭했거든요."

"…."

"대답 안 해요?"

"………네….“

 

어디서 사람 목 졸리는 소리가 난 거 같았는데 마음속 꽁기함이 모두 풀린 박병찬은 그것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뭐 사실 얼굴 괜찮고 다른 사람 대하는 거 보면 성격도 나쁘진 않았지. 마침 박병찬은 애인도 없었고 바이기도 했다. 당장 사귈 맘은 없지만 마음은 알았으니 천천히 보면서 생각해도 될 문제다. 병찬은 아직도 푹 숙이고 있는 이를 흘끔 쳐다보며 콧노래를 불렀다. 저 꼴은 좀 귀엽네.


Sweet Honey

 

왜 이렇게 된 거지…. 기상호는 앞에 놓인 파스타를 포크로 돌돌 돌리며 고심에 빠진다. 따지고 보면 항상 이랬다. 기상호는 포크로서는 정말 이상적이게도 케이크에게 꽤 인기가 있었다. 저 자신은 그냥, 확신이 있다고 쳐도 굳이 굳이 위험하게 굴 필요가 없으니 나름 거리를 두고자 노력했을 뿐인데 몇 안 되는 케이크들은 기상호에게 호감을 느꼈다. 그리곤 다들 말했다 좋아하는 티가 난다고.

좋아하냐 물어보면 싫어하진 않겠지. 좋아함 쪽에 무게가 더 가는 것도 맞다. 그야 자긴 상대방에게 식욕을 느끼고 있으니까. 엄청 맛있는 음식을 눈앞에 두면 기분이 좋아지는 건 별수 없지 않나. 바로 앞에서 눈을 마주치면 머리가 어지러워서 빤히 쳐다보기도 하고 자기도 모르게 유해져 상대방에게 약하게 굴게 되기도 했으나 케이크들은 그 모든 행동을 호의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대놓고 피해 다녔는데도 결과가 이렇다. 기상호는 제 앞에서 피클을 집어 먹다가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어 보이는 박병찬을 보며 뇌가 간지러운 기분을 느꼈다. 맛있겠다.

그 후로 병찬은 상호만 보면 다가왔다. 원래도 부드럽게 웃으면서 이런저런 말을 걸었는데 좀 더 적극적으로 말을 걸었다. 태도에서 티가 났다. 병찬은 상호가 자길 좋아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썸을 타볼까, 싶은 것 같은데 기상호는 그걸 거절도 못 하고 끌려다녔다. 다시 말하지만, 기상호는 정말 어쩔 수 없이 케이크에게 약하니까. 고역이긴 해도 이렇게 단둘이 있는 상태에서 상대방을 빤히 쳐다봐도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지 않을 수 있는 건 정말 행운이긴 하다. 되려 제 시선을 호감으로 받아주면 특히나 그렇다. 맛있겠다….

밥을 다 먹고 나면 카페다. 어차피 맛을 못 느끼니 먹는 건 제일 싼 아메리카노였다. 옆에서 미숫가루 라떼를 시킨 병찬이 웃으며 묻는다.

 

"상호 씨는 쓴 거 잘 먹나 보네."

"그냥 그래요."

"전에 내가 장난으로 샷 추가 네 번 한 커피 먹여도 잘 먹던데."

"아…. 제가 뭐든 맛이 강한 걸 좋아해서요.“

 

언제지. 생각하면 커피를 사다 준 건 전에 같이 야근할 때 정도다. 어쩐지 그날 퇴근하고서 한참 잠이 들지 못해서 뒤척였는데 그건가. 멍하니 생각하면서 커피를 쪽 빤다.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는 맹물이지만 바로 앞에서 나는 단내 덕에 어쩐지 단맛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박병찬이 기다란 손가락으로 옆머리를 넘긴다. 그 손가락을 멍하니 따라가며 기상호는 다시 커피를 꼴깍 삼켰다.

눈이 마주치면 다시 웃는다. 알만하다는 얼굴이라 기상호는 그냥 하하…. 웃었다. 그대로 둘은 천천히 회사로 돌아갔다. 아직 점심시간이 남아서 바로 들어가진 않고 주변을 천천히 걸었다. 이렇게 같이 걸으나 들어가서 옆에 있으나 다를 바는 없어 기상호는 얌전히 옆에서 걸었다.

 

조잘조잘. 상호 씨는 여기 들어오기 전에 뭐 했어. 공부했어요. 병찬 씨는요. 나는~ 친하게 지내자고 하더니 말 편하게 하시라는 말에 냉큼 받아들인 박병찬은 그 뒤로 둘만 남으면 반말을 썼다. 5살 많고 경력도 자기보다 많은데 일일이 존댓말 듣고 싶은 맘 없던 기상호는 별로 신경 안 썼다. 넋 놓고 묻는 대로 대답하고 적당히 병찬 씨는요 하고 덧붙이면 어예저예 티키타카가 된다. 와중에 병찬이 말하는 정보는 쏙쏙 듣는다. 어디 대학 나왔고 회사 몇 번 옮겼고 자기가 케이크인데 죄다 포크 때문에 이직한 거고 받은 합의금만 3억이 넘는다고. 덕분에 기상호의 대가리에 레퍼토리 하나가 추가된다. 정신 놓고 덤비면 5천에서 1억 사이의 합의금. 응응. 모아둔 돈이 그게 안 되니 부모님께 손 벌리거나 한동안 허덕여야겠지. 좋구만. 의욕 떨어져.

제 식욕 꾹꾹 죽이고 있으면 조금 남은 여유시간도 사라진다. 엘리베이터를 타겠다는 사람에게 건강에 좋게 계단으로 올라가겠다. 하니 나 무릎 안 좋은데. 한다. 그러면 혼자…. 하면 또 흘겨봐서 결국 엘리베이터를 탔다. 다행히 타임 어택으로 올라가는 사람이 둘 뿐인 건 아니라 안은 만원이다. 이러면 좋지. 슬그머니 병찬에게서 멀어지는데 사람이 더 들어오는 거에 병찬도 옮기다 졸지에 구석에 둘이 낀다.

사람이 한가득 찬 와중이다. 자연히 안은 후덥지근했다. 어우, 소리를 내며 병찬이 몸을 꾹 붙인다. 병찬 말고도 잔뜩 밀착된 사람이 한가득하지만, 상호의 신경은 모두 병찬에게 쏠려있었다.

 

맛있겠다. 맛있겠다. 이리 밀집되어 있으니 자연히 땀이 조금씩 맺힌다. 달콤한 향내가 머리를 마비시킨다. 맛있겠다. 아니지, 참을 수 있을 텐데. 이런 건 위기 축에도 안 드는데. 하지만 기상호는 자신도 모르게 박병찬을 빤히 본다. 눈높이가 같아서 그런가, 금세 시선을 눈치채고 병찬이 마주 본다. 맛있겠다. 기상호는 홀린 듯 입술을, 목덜미를 바라보았다. 저쪽도 지금 땀이 조금 난 것 같은데. 머리가 지끈거린다. 맛있겠다. 진짜 맛있겠다. 손을 뻗는다. 박병찬의 두 팔뚝을 잡았다. 고개를 들이민다. 입을 쩍 벌렸다. 기상호는 처음으로 자신을 제어하지 못했다. 너무 맛있을 것 같아서.

사람들이 내린다. 한산해진 와중에 박병찬은 경악한 표정으로 제 목덜미를 감싼 채 반대쪽 구석에 붙었고 기상호는 멍청한 얼굴로 박병찬을 쳐다보았다. 그 미묘한 낌새에 남은 사람들이 둘을 힐끔거리면서 쳐다보았다. 박병찬은 어색하게 웃으며 별일 아니라고 했고 기상호는 여전히 멍하게 있다가 죄송해요…. 중얼거리며 반대쪽 구석에 머리를 박았다. 또 멈춰 서면 사람들이 우르르 내린다. 남은 건 우리 부서, 또 옆 부서 사람들이었다.

다음 층에 도착해 모두 내리고 병찬이 내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 뒤를 느릿하게 따른다. 발걸음을 느릿하게 해서 병찬을 먼저 보낼 생각이었는데 뒤처지는 걸 귀신같이 깨달은 병찬이 자신도 발걸음을 늦추더니 상호 옆에 선다. 아직도 제 목덜미를 손으로 덮고 있었다.

 

"상호 씨."

"…네."

"안 그렇게 봤는데 엄청 적극적이네.“

 

슬쩍 시선을 올린다. 은근히 붉어져 있는 얼굴이 여유를 가장하지만, 깜짝 놀란 얼굴은 이미 봤다. 냅다 목덜미를 핥았으니 놀랄만하지만.

"너무 빠른 거 아니야?"

"죄송해요…."

"적어도 근처에 사람 있을 땐 그러지 마."

"네….“

 

미쳤다. 만약 병찬 씨가 물러나지 않았다면, 자길 밀어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참지 못한 것이 처음이라 어떻게 되었을지 가늠도 가지 않는다. 원래 이렇게 못 참는 사람 아니었는데. 이제까지 이런 적 없었는데…. 왜 못 참지? 이제까지랑 뭐가 달라서? 얼굴은 별로 문제가 아니었다. 이제까지 다가온 케이크 중에는 예쁜 미인도 있었지만, 그 사람한테도 참았는데. 너무 가까워서 그랬나? 너무 가까운 데서 너무 달콤한 향이 나니까?

아니면 예쁘고 잘생기고 친절하면서 다정한데 와중에 가까운 데서 그 흰 목덜미를 드러내면서 내 눈 마주 보고 웃어주니까 그랬나…. 그랬던 듯…. 나름대로 답을 내고 나니 심란했던 마음이 가라앉는다. 정신 차리라 기상호. 삐끗하면 진짜 고쳐 쓸 수 없는 구제 불능의 쓰레기가 되는 기다.

다시 최악의 상황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있는 도중 갑자기 잡념이 하나 끼어든다. 웬만하면 입을 닥쳐야 할 텐데 그럴 여유가 없는 기상호는 그 잡념을 잡지 못했다. 결국 아직 부서에 들어가지 않고 저를 기다리고 있는 박병찬에게 물었다.

 

"그러면 주변에 사람 없을 땐 해도 돼요?"

"…상호 씨!!!"

"죄, 죄송합니다.“

 

기어코 혼이 난 기상호는 허겁지겁 뛰어 병찬이 열어준 문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단내가 심하다. 아마 열이 나서 그런 것 같다고 생각했다.

 


 

뭐가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박병찬은 기상호에게 잘해줬고 호감을 표시했으며 자신과 계속 어울리는 기상호가 마음에 든 것 같았다. 기상호는? 싫진 않지. 여전히 박병찬은 맛있을 것 같으니까. 친절하고 다정하며 잘 웃어주고, 그런 와중에 은근히 성깔이 있어서 기상호가 자기한테 마냥 예스맨이 되는 것도 묘하게 기분 나빠 하는 것까지 톡톡 튀는 느낌이 있었다.

그래봤자 포크인 거 알면 금방 떠날 테지만. 그러나 박병찬 하나의 안전을 위해서 제 인생 다 말아먹을 자신은 없었던 기상호는 꾸역꾸역 그 사실을 숨기면서 박병찬에게 휘둘렸다. 제 식욕 하나 참는 게 너무 어려워서 같이 있으면 대부분 휘둘리기만 하는데도 그냥 기상호는 휘둘렸다. 뭔 자연재해도 아니고 방법이 없어서 그랬다. 제일 쉬운 방법은 저는 사실 포크고 당신을 계속 잡아먹고 싶어서 미치겠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거지만 그건 안 되니까 별수 있나. 싫다고 거짓말도 못 하겠으니 그냥 끌려다녀야지.

기어코 박병찬은 기상호 앞에서 삐죽이며 말한다.

 

"언제 사귀자고 말해. 다가가는 것도 내가 했는데 고백도 내가 해?“

 

쿵. 쿵. 쿵. 쿵. 선택의 갈림길에 선다. 참을 수 있을까. 사실 기상호는 연애를 여러 번 해봤다. 다 케이크였다. 좋아하는 티가 난다고 말했던 케이크들은 이유는 모르겠지만 기상호를 좋아해 줬다. 그래서 연인이 되었다. 연인이 된다는 건 그 사람에게 좀 더 접촉할 수 있다는 거다. 더 접촉할 수 있으면? 체액을 얻을 수 있다. 가장 쉬운 방법은 타액. 여차하면 다른 곳에서 나오는 것도. 운이 좋으면 어딘가 가볍게 베였을 때 피를 핥을 수도 있지. 기상호는 언제나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선을 넘지 않을 자신이 있었으니까.

아, 하지만 지금은 모르겠다. 선을 넘지 않을 수 있을까. 참을 수 있을까. 엘리베이터의 일 말고도 상호는 병찬에게 손을 댔었다. 어쩌다 흡연실에서 단둘이 있었을 때 담뱃불을 붙이는 병찬을 보다 다가가서 입을 맞춘 적이 있었고 카페에서 음료를 들고 나오다 샜는지 무언가 묻은 병찬의 손을 핥은 적도 있었다. 전에는 자기도 모르게 병찬의 손목을 깨물어서 자국이 만들어진 적도 있었다. 그때의 상호는 너무 당황해서 버릇처럼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어쩔 줄 몰라 했다.

지금도 참지 못하겠는데 연인이 되어서 좀 더 많은 게 허용되면 괜찮을까? 정말 완벽한 기회가 생겼을 때 자신이 저지르지 않을 수 있을까. 기상호는 도저히 답할 자신이 없어서 머뭇거렸고, 긍정적이지 않은 반응에 조금 툴툴거리는 것 같던 병찬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화한다. 기상호는 그 변화를 쳐다보다가 어물거리면서 말했다.

 

"제가 해도 될까요…. 저, 자신이 없어서요."

"무슨 자신이 없는데?"

"참을 자신이요….“

병찬의 표정이 다시 변화한다. 한 손으로 자기 얼굴을 쓸어내리더니 이내 그 손으로 부채질하는 시늉을 하며 고개를 돌린다.

 

"….뭐 얼마나 못 참는지는 모르겠지만 정 안 되면 그때 생각하고. 그래서 안 할 거야?“

 

기상호는 시선을 내렸다. 안 할 거냐고요. 안 하는 게 맞겠죠. 전에 지금 사는 빌라가 많이 낡고 건물주가 구두쇠라 건물에 달린 CCTV는 다 가짜라는 점도 말해주셨잖아요. 워낙 급하게 구해서 별수 없었다고요. 그리고 연인이 되면 제가 당신의 집에 찾아가는 게 이상하지 않은 일이겠죠. 뭔가 큰 가방을 메고 가도요. 그러면, 어쩌면. 나는 내 사회적 위신을 지켜낼 아주 완벽한 계획을 짤 수 있을 테고 그러면 아마도 당신을.

 

이거 아세요? 저는 당신을 만나고 당신이 제게 가까이 다가올수록 아주 많은 상상을 해요. 그 길쭉하면서 하얀 손가락을 어금니 사이에 두고 힘을 주면 과연 어떻게 으스러질지, 새하얗고 곧은 목덜미를 깨물면 무슨 향이 날지, 그 탄탄한 뱃속에는 얼마나 달콤한 것들이 가득할지. 지금도 그런 생각들로 머리가 가득한데.

아, 지금도 그랬다.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가 닫는다. 그 어디라도 좋으니 제 입 안을 당신으로 가득 채우고 싶었다. 분명 점심을 먹은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배가 고픈 기분이었다. 저를 향해 좋아하는 티를 내고, 그러면서 업무를 할 땐 집중하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에 자부심을 가지는 저 빛나는 사람을 남김없이 제 뱃속으로 집어넣어 버리고 싶다는 욕망이 아랫배에서부터 들끓는다. 기상호는 당장이라도 머리가 폭발할 것 같았다.

침묵이 길어진다. 영 받아줄 기색이 아니자 이제는 병찬의 얼굴이 다른 느낌으로 빨개졌다. 당황스러움과 약간의 짜증, 수치심이 섞인 얼굴이었다. 하, 헛웃음을 뱉은 병찬을 보며 상호는 결국 목이 졸리는 듯한 목소리로 겨우 대답한다. 여전히 머릿속에선 이게 아닌 것 같다는 말이 맴돌고 있었으나 상호는 참지 못했다.

 

"저랑 사귀어 주실 수 있나요….“

 

그제야 안심하는 얼굴을 본다. 기상호는 어색하게 웃으며 혀뿌리 밑에 고인 침을 삼켰다. 이 순간 기상호는 끔찍할 만큼 배가 고팠다. 병찬이 기쁜 듯 웃는다. 기상호는 결국 입술을 말아 물며 고개를 푹 숙였다. 버릇처럼 제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다. 어떻게든 저 단내를 덜 맡고자, 달싹이는 입을 막고자 생긴 버릇이었다. 주변에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병찬이 소리 한 번 지르면 금방이라도 올 것이다. 그 사실을 몇 번이고 떠올리며 기상호는 저 자신을 억눌렀다.

너무 배가 고팠다.

 


Sweet Deer

 

기상호에게 포크로 각성한 것은 그다지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 들키면 곤란하지만, 맛을 못 느끼는 건 아쉬울 뿐이지 그것 때문에 죽느니 마느니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므로. 그저 삶을 번거롭게 만드는 장애. 포크라는 사실은 그 정도의 무게였다. 가끔 케이크들을 만날 때마다 속절없이 휘둘리는 문제가 있었으나 기상호는 그들에게 손을 대지 않으리라 확신을 얻은 뒤 그 문제들을 기꺼이 즐겼다. 그들에게 휘둘리는 일은 피곤함을 동반했지만, 그것을 모두 보상해 주는 것 같은 달콤함을 제공해 주었으니 마다할 이유도 없었다. 꽤 위험한 취미여도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었다. 그것은 기상호가 미등록 포크로서 즐길 수 있는 나름의 스릴이었다.

그런 기상호에게 박병찬은 미지의 재난이다. 기상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기도 했다. 박병찬은 다른 케이크처럼 제 욕망을 참느라 정신이 없는 저를 좋을 대로 다뤘다. 그것은 익숙한 일이었음에도 기상호는 박병찬의 앞에서만 서면 이제까지 잘만 참아왔던 욕구를 참기가 힘들었다. 참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입을 맞추고 허리를 쓰다듬을 때마다 붉게 달아오르는 눈가를 보면 기상호는 당장이라도 말캉한 혀를 씹어 삼키고 싶은 생각에 머리가 마비되었다. 매 순간 기상호는 자신이 넘지 않으리라 자신했던 선을 불신하기 시작했다.

어째서? 이유를 알 수가 없다. 박병찬은 이제까지 기상호가 만나온 케이크와 별 다를 바도 없었다. 기상호는 박병찬만큼 밝은 케이크도 만나봤고 박병찬만큼 예쁘장한 케이크도 만나봤으며 박병찬만큼 다가오는 케이크도 만나봤다. 따지자면 익숙함의 나열인데 그 모든 것을 합친 박병찬은 기상호에게 언제나 이변을 남긴다. 기상호는 어느 순간부터 이 사람을 삼켜버릴 수만 있다면 저가 아끼는 모든 이들에게 미움을 받아도 좋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모르고 병찬은 상호가 스킨쉽을 좋아한다고 생각한 건지 사람이 없을 때면 먼저 고개를 들이밀기도 했다. 입을 맞추는 것이 더 괴롭다는 걸 알면서도 그 유혹적인 향에 기상호는 감긴 눈꺼풀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면 그 다음 기상호가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일은 입을 닫지 않는 것이다. 제 딱딱한 치아가 상대방의 물렁물렁한 살덩어리를 무자비하게 짓이기지 않도록. 감히 자신이 저지르지 않도록.

 

"내일 회사에서 봐?“

 

웃는 얼굴로 말하며 장난스럽게 제 엉덩이를 한 번 툭 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멀어지는 것을 본다.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면 병찬이 웃다 뒤를 돌아 엘리베이터를 누른다. 엘리베이터는 현관과 바로 맞은 편에 배치되어 있었다. 병찬만 태운 엘리베이터가 올라간다. 1층, 2층, 3층…. 쭉 올라가던 엘리베이터는 7층에서 멈췄다. 아니, 이런 일은 쓸모가 없다. 상호는 이미 병찬의 집을 알고 있으니까. 그런데도 상호는 습관적으로 병찬의 행적을 좇는다. 곧 있으면 덜컹,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조금 더 기다리면 창문이 열린다.

빼꼼 내밀어지는 것은 병찬의 얼굴이었다. 아직도 밑에 있을 저를 내려다보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이미 저가 있으리라 확신하는 행동이었다. 상호 역시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배고프다. 지금 당장 올라가 문을 열어달라고 하면 열어주겠지. 들어가도 되냐고 하면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같이 씻자고 말하면 글쎄, 거부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리하여 욕실로 들어가면 그곳은 완벽한 장소가 되어주겠지. 그리고 무방비하게 저 자신 앞에서 맛있게 차려진 그를….

 

가까스로 생각을 멈춘다. 머리가 완전히 망가진 것 같았다. 제 속이 어떤 상태일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당신은 언제나 제게 사랑을 건넨다. 사랑은 귀한 것이다. 그것은 저에게 아주 좋은 먹잇감이 되어주니까. 그런 사랑이라는 것은 얼마나 얄팍한가. 기상호는 그 귀한 것을 언제나 비웃었다. 제 처지를 모르는 이들이나 가질법한 평화로운 감정이니까. 당신의 사랑도 마찬가지다. 저 자신이 포크인 걸 알면 금세 사라질 의미 없는 것이다. 그래, 당신의 사랑은 결국 쉬이 사라질 허상 같은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하고서야 미련이 뚝뚝 흐르는 시선을 떼어내 집으로 돌아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허기에 배가 주린 기분이 들지만, 눈에 보이는 것들을 억지로 위장에 쑤셔 넣어도 채워지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으니 쓸데없는 짓은 미뤄두고 기상호는 돌아가기 위해 바삐 걸음을 옮겼다. 배고파. 머릿속을 비우기 위해 기상호는 일부러 한참을 뛰고 뛰어 제집에 도착했다. 헉, 헉. 숨을 몰아쉬며 집 앞에 도착한다. 몸을 혹사한 덕에 생각이 조금 날아갔다. 이대로 머리를 계속 비워야 하는데, 버릇처럼 휴대폰을 꺼낸다. 왜냐하면….

 

[잘 들어갔어?]

 

몇십 분 전에 온 메시지였다. 전에 병찬을 데려다주면서 제집까지 얼마큼 걸리는지 말한 뒤로 병찬은 그 시간에 맞추어 이리 안부 인사를 보냈다. 기상호는 그 글자를 한참이나 쳐다보다 자판을 꾹꾹 누르며 답했다.

 

[네, 씻고 나왔어요.]

 

긴 시간 동안 답을 하지 못한 변명으론 괜찮았으리라 생각하며 상호는 느릿하게 집 안으로 들어간다. 조금 있으면 벨이 울린다. 받으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배고파. 분명 당신은 제 옆에 없는데 이제는 코끝에 단내가 스치는 착각이 일었다. 마치 당신이 제 옆에 있는 것처럼. 아, 진짜, 너무, 배가 고파서…. 상호는 제 손을 꾹 깨물었다. 금방이라도 돌아가 당신에게 문을 열어달라고 말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요새 박병찬은 조금 불만이 있다. 뭐냐면, 이 자식이 단둘이 있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 점심을 따로 먹자. 하면 같이 먹는 게 좋지 않겠냐며 슬그머니 빼질 않나 집에 쉬다 가라고 해도 한사코 거절한다. 모텔이나 호텔에 가자고 슬쩍 흘려도 못 들은 척하는 건 예사다. 이젠 데이트할 때 스킨쉽을 좀 하고 싶어서 골목으로 살짝 이끄는 것도 고개를 도리도리 저어대며 낑낑대면서 난리였다.

예전엔 제가 먼저 얼굴 들이대 놓고 요즘엔 박병찬이 먼저 안 하면 손도 안 댄다. 보통은 오래 사귀거나 결혼하면 변한다는데 이 자식은 사귄 지 한 달도 안 됐는데 변하네. 그래도 여전히 병찬이 하자는 건 얌전히 따르기 때문에 병찬은 특별히 용서해 주기로 했다. 사귀기도 전에 부끄러워하며 자길 피하던 녀석이니 사귄 후에 새삼 당황스러운 모양이겠거니 했단 뜻이다.

그리고 병찬은 그렇게 도망가는 놈 잡아 오는 데엔 도가 텄다. 병찬은 언제나처럼 밥을 먹고 상호 손목 잡아 산책 좀 다녀오겠다고 하고 빠져나왔다. 화라도 난 것처럼 쳐다보지도 않고 손목도 부러 세게 쥐었더니 조금 버티던 녀석이 결국 얌전히 따라온다. 병찬은 여전히 화난 기색을 유지하며 상호를 질질 끌고 회사 근처 단골 카페에 갔다. 들어가서 주문할 때야 얼굴을 피고 장난스레 웃으면 또 제 수작 뻔히 짐작했으면서도 속았다는 얼굴로 입을 삐죽이는 꼴이 보인다. 알면 뭐 어떡할 건데? 병찬은 웃으며 상호가 항상 마시는 아아메 하나에, 오늘은 미숫가루 대신 아이스티 하나 주문하고 곧 나온 것을 쪽 빨면서 회사 주변 공원을 천천히 돌았다. 쓴 것을 잘 마시는 것과 별개로 좋아하지 않는듯한 상호는 평소처럼 괜히 빨대를 씹어대고 있었다. 그 꼴을 물끄러미 보던 병찬이 웃으며 말했다.

 

"상호 씨."

"네?"

"나 곧 있으면 이사하거든. 주말에 짐을 좀 싸려는데 토요일에 와서 도와줄 수 있어?"

"이사요?"

"어, 급하게 구한 곳이라고 했잖아. 괜찮은 곳을 찾아서 옮기려고. 거긴 보안도 철저해서 좋대."

"아…."

"도와줄 거지? 이삿짐센터에는 옮겨달라고만 했거든."

"…저, 주말에는….“

 

또 거절하려고? 병찬은 그 순간 상호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공원이긴 하지만 여긴 구석이고 산책로에서 조금 벗어나 있었다. 그늘도 져 있고 나무가 있어 이 정도면 사람들의 이목을 충분히 가려줄 정도는 됐다. 그대로 병찬은 얼굴을 들이민다. 코끝이 닿을 만큼 가까웠다. 상호의 눈동자가 잘게 떨린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꼴을 보며 병찬은 씩 웃으며 말했다.

 

"나 도와줄 거지?"

"…아, 어."

"응?“

 

그대로 쪽, 입술에 제 입을 맞대면 절로 입을 벌린다. 하지만 병찬은 그 순간 뒤로 물러났다. 멀어지는 것에 상호의 시선이 따라온다. 시선이 제 입술에 박힌 것을 확인하고 다시 입을 연다.

"도와줄 거지?“

 

그러고는 입을 살짝 벌린 채로 다시 고개를 살짝 들이민다. 당장이라도 키스할 것 같은 상태였다. 기상호의 시선은 아직도 제 입술에 박혀있다. 이번에도 튕기려고 했겠지만, 박병찬은 기상호를 다루는데 도가 텄다. 이렇게 할락 말락 굴면서 애를 태우면 기상호는 금세 넘어갔다. 이미 결과를 알고 있는 병찬은 의기양양하게 쳐다봤고.

 

"네에….“

 

결국 기상호가 눈을 질끈 감으며 언제나처럼 항복 표시를 한다. 어차피 받아들일 거면서 버티긴. 병찬은 웃음을 흘리며 칭찬하는 의미로 얼마 남지 않은 틈을 메운다. 입술이 닿는다. 아까는 함부로 손도 못 뻗던 녀석이 당연하게 허리에 손을 올려선 손가락 끝을 세우며 제게 몸을 바짝 붙이게 만든다. 그 손이 벌벌 떨리는 것이 느껴져 미약한 아픔이 느껴졌으나 병찬은 기꺼이 고통을 참아주며 입을 열었다. 상호는 키스할 때면 미묘하게 몸을 숙여 병찬이 고개를 조금 숙이게 했다. 병찬은 조금 더 입을 벌린다. 입 안을 쪽쪽 소리 나게 빨아대던 녀석이 꿀꺽, 소리를 내며 타액을 삼켰다. 하아, 소리를 내며 조금 떨어질라치면 다시 고개를 붙여온다.

눈을 살짝 뜨면 여전히 눈을 뜨고 저를 똑바로 바라보는 갈색 눈이 보인다. 무언가에 홀린 듯 제 얼굴을 쳐다보는 꼴이 마냥 예뻤다. 병찬은 다시 눈을 휘어드렸고 그 꼴을 바라보던 녀석은 병찬의 옷깃을 꽉 쥐어틀었다. 마치 견딜 수 없다는 듯이. 귀여워. 그 모습이 참 보기 좋아서, 병찬은 상호를 달래듯 마주 안아주었다.

 


 

직- 찍- 치직- 테이프 뜯는 소리가 집 안을 가득 채운다. 단둘이 있고 싶어서 꼬신 건 맞는데 이사를 한다는 것도 거짓말이 아니었던지라 둘은 몇 시간째 짐을 싸고 있었다. 기상호는 아침부터 와서는 마스크를 쓴 채로 집 안의 모든 창문과 문을 열어버렸다. 거절하지 못한 기상호 나름의 발악이었다. 마음 같아선 입마개를 써버릴까, 생각도 했지만 그러면 말 못 하니까, 결국 고르고 골라 마스크를 쓴 거다. 병찬이 더울 텐데 벗으라고 해도 기상호는 한사코 마스크를 쓰고 일을 했다. 몇 번 말해도 들어먹지 않으니, 나중에는 딱히 말을 얹지 않았다.

박병찬 역시도 일을 하느라 바빴다. 꼬시는 건 꼬시는 거고, 일은 해야지. 빨리하고 이 순진한 애인을 놀려먹을 생각이 만만한 병찬은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중간에 나가서 점심을 사 먹은 것 외엔 둘은 무슨 이삿짐센터 직원처럼 짐을 쌌다. 빨리 끝마치고 도망가고 싶은 사람에 빨리 끝마치고 귀여운 연하 애인 놀려먹을 사람 둘이 온종일 일을 하니 애당초 넓지 않았던 집은 저녁때가 다 되어갈 즘 거의 정리가 끝난다. 남은 건 나중에 가기 직전에 병찬이 챙기겠다고 해서, 둘은 그제야 바닥에 널브러져 허공을 보는 시간을 가졌다.

헛짓거리를 안 하고자 기계처럼 일만 했더니 온몸이 녹초다. 이젠 코가 마비되었는지 단내도 별로 나지 않아 기상호는 멍하니 누워 천장만 봤다. 혹여나 오늘 실수라도 할까, 걱정되어 잠을 설쳤는데 집중력이 끊어지니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온다. 오늘 집에 가서 진짜 기절하겠는데. 마찬가지로 일만 한 병찬도 지친 듯 벽에 기대 앉아있다 이내 먼저 씻으라면서 기상호의 어깨를 툭툭 쳤다. 기상호는 늘어지는 몸을 어떻게든 일으켜 욕실로 들어갔다. 들어가서 따뜻한 물을 맞으니 노곤하다. 이거 집에는 멀쩡하게 돌아갈 수 있는 건가. 돈 아껴야 하는데. 하루 정도는 택시를 타도 괜찮지 않을까. 따뜻한 물을 맞으며 멍을 때리던 기상호는 반쯤 허우적거리며 마저 씻었다. 형도 씻고 싶을 텐데….

씻고 나니 갈아입을 옷을 가지고 들어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생각나 기상호는 고민하다 결국 허리에 수건 하나 두르고 욕실 밖으로 나갔다. 문을 열자마자 느껴지는 것은 진한 단내다. 졸음에 머리가 멍한 와중에도 단내는 예리하게 감각을 파고든다. 익숙해졌던 향은 씻으면서 다시금 새롭게 훅 끼친다. 심지어 자신이 씻는 동안 병찬이 모두 창문을 닫아둔 상태였다. 배고프다. 실제로도 배가 고팠다. 이제는 저녁때가 다 되어가고 있으니까. 상호는 제 이성이 보내는 위험 신호도 알아채지 못하고 제게 다가오는 병찬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에구. 눈도 못 뜨네."

"죄송해요….“

 

웅얼거리니 병찬이 웃으며 안아준다. 마주 끌어안는데 그제야 병찬이 아, 냄새나겠다. 하며 저를 다시 밀치려 든다. 상호는 너무 졸려서 그 모든 것을 인지하지 못한 상태로 손에 힘을 주고 입을 벌렸다. 배고파. 맛있겠다. 혀뿌리 밑에 침이 고인다. 혀에 말랑한 살이 닿는다. 고작 닿았을 뿐인데 혀끝이 아릴 만큼 달았다. 배고파. 기상호는 제 입에 가득 찬 것을 씹어 삼키기 위해 턱에 힘을 주었다. 잘 먹겠습니다.

 

"아, 아파…!“

 

병찬이 소리를 지르는 것에 상호는 눈을 번쩍 뜬다. 졸음에 둔해졌던 정신이 돌아온다. 놀란 눈으로 쳐다보니 병찬 역시 놀란 눈으로 목덜미를 감싼 채 상호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뭘 했지? 상호는 본능적으로 병찬의 눈을 살핀다. 놀라움, 당혹감, …딱 그 정도. 병찬은 상호를 밀쳐냈으나 물러나진 않았고 여전히 상호의 팔에 제 손을 얹은 상태였다. 도망도 가지 않고 여전히 상호와 마주하고 있었다.

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 심장이 가쁘게 뛴다. 기상호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제 두 손으로 입을 감싸 쥐자, 박병찬이 손을 내린다. 여전히 미심쩍게 쳐다보면서도 멀어지지 않는 모습이 아직도 기상호가 무엇인지 짐작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두근두근두근. 보이지 않게 제 손가락을 꽉 깨문다. 금방이라도 다시 달려들 것 같아서 그랬다. 상호의 눈이 불안하게 병찬을 훑었다. 병찬은 그런 상호를 쳐다보더니 한숨 한 번 쉬고선 괜찮아? 라고 묻는다.

…들키지 않았다. 들켰으면, 이럴 리가 없지. 그렇지. 들켰다면 당신이 제 앞에서 여전히 무방비하게 있을 리가 없다. 저를 신경 쓰며 걱정하는 얼굴로 있을 리가 없다. 그제야 상호는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겁에 질렸던 상호가 서서히 진정하자 병찬이 천천히 팔을 토닥이면서 말한다.

 

"갈아입을 옷 꺼내놨으니까, 저녁은 시켜 먹자. 기다려?“

 

상호의 대답도 듣지 않고 병찬이 상호를 지나쳐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심장이 너무 뛰었고 집 안에는 온통 단내가 난다. 고통으로 인해 명징해진 머릿속에 여러 생각이 들었다. 욕실로 들어간 박병찬. 여기는 CCTV가 다 가짜이며 내일이면 이삿짐센터가 온다. 이번에 가는 집은 보안이 좋다고 했다. 지금 따라 들어가면 무슨 반응일까. 무엇이든 상관없다. 제대로 옷을 입지 않은 사람은 가드가 훨씬 약해진다.

상호의 시선이 부엌 쪽으로 향한다. 꽂힌 칼이 보였다. 두근두근두근. 아. 기껏 외면하려고 애를 쓰며 일에만 집중하려고 발버둥 쳤으나 졸음에서 깨어난 머리는 하나의 사실을 선명히 떠올린다. 본능 역시 그 사실을 상호에게 속삭였다. 지금이 병찬을 삼켜버리고서도 멀쩡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걸. 감히 저 달디단 살을 취하고서도 여전히 인간인 체 살 수 있는 완벽한 기회임을.

배고파. 배고파. 진짜, 너무, 끔찍할 만큼 배가 고파. 상호는 주린 배를 감싸 쥐며 욕실 문에 머리를 박았다. 기상호는 이미 박병찬이 얼마나 달콤한지 알고 있었다. 지금 마음만 먹는다면 그것을 삼켜낼 수 있으리라는 것도. 충동이 머리를 지배한다. 인간의 이성은 언제나 쉽게 휘둘린다. 상호는 눈을 질끈 감으며 작게 앓는 소리를 내다 욕실의 손잡이를 부러트릴 듯이 꾹 쥐었다. 아, 아. 먹고 싶어….

 


 

타닥타닥타닥. 조용한 타건 음이 사무실을 울린다. 조금 기다리면 박병찬의 모니터에 알람이 뜬다. 눌러보면 발신인은 기상호였다. 전에 같이 했던 자료를 메일로 보내달라는 이야기였다. 박병찬은 자료를 찾아 메일에 첨부파일로 올려두면서 텅 빈 메일 본문을 빤히 쳐다보았다. 탁, 탁, 탁. 이어 적은 것은 다른 자료를 보내준다는 딱딱한 말이었다. 메신저로 보냈다 답장하면 감사합니다. 라는 말로 끝난다. 병찬은 그것을 바라보다가 제 이마를 꾹 눌렀다.

솔직히 말하자면 박병찬은 둘의 분위기가 좋다고 생각했다. 특히나 씻고 나온 녀석이 냅다 목덜미를 깨물었을 땐 아프긴 했지만 그래도 이 자식이 고자는 아니구나. 했단 말이다. 피곤하긴 했지만 빨리 씻고 나와서 같이 저녁 먹고 푹 쉬면서 뭐 끝까지는 아니어도 나름 분위기 좀 잡을 생각 했는데 씻고 나오니까 흔적도 없더라. 당황해서 집을 다 뒤져보고 혹시나 해 핸드폰을 켜보니 헤어지자는 메시지 하나 띡 와있었다. 황당해서 전화를 거니 차단했다는 음성이 나와 박병찬은 환장하는 줄 알았다.

집으로 찾아갈까, 했는데 항상 자기가 데려다주는 걸 고집해서 그러려니 하고 말았던 탓에 집도 몰랐다. 이를 갈며 난생처음으로 월요일을 애타게 기다렸는데 출근하고서 9시가 넘어도 옆자리는 비어있었다. 팀장님한테 물어보니 연차를 냈다네? 진짜 오기만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다짐했더니 화요일에 돌아온 기상호는 팀장하고 무슨 얘기를 했는지 타 부서로 자리를 옮겨버렸다. 어떻게든 화를 꾹꾹 참고 점심시간이나 쉬는 시간에 찾아가서 대화 좀 하자고 하면 할 말 없다고 버티기만 하고. 퇴근길에서 잡을까 했더니 다른 사람을 끼고 다니면서 절대로 둘만 있지 않으려는 꼴에 박병찬은 화병이 난다. 마음 같아선 멱살을 잡고 장난하냐고 고래고래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얼굴이나 배를 한 대 치고 싶고.

그래, 하다못해 헤어지면 헤어지는 거지. 근데 이유나 좀 듣자. 갑자기 이러는 거면 이유가 있을 거 아닌가. 권태기라기에도 마지막까지 기상호는 제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꼴로 당황하기만 했다. 아직도 종종 마주치면 고개를 푹 숙이면서 괜히 제 얼굴 가리던데 뭐가 문제냐고 이 새끼야. 내가 너무 들이대서 부담스러워? 그런 거면 어? 그게 불만이라고 말이라도 해주지. 고칠 기회는 좀 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이렇게 쳐내? 싸가지 없이?

원래라면 사람 관계에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구는 일은 없을 텐데 박병찬 인생에 이런 새끼는 처음이라 진짜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안 왔다. 딱 봐도 여전히 나 좋아하는데 왜 그러냐고. 진짜 싫어하는 거면 왜 저래. 하고 말지 좋아하는데 안 다가오는 새끼는 처음 본다. 하지만 어떻게 해도 말 붙일 기회가 영 생기지 않는다. 하…. 이렇게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박병찬은 정말 많은 생각을 했지만 결국 장고 끝에 직장인의 금기를 깨트리기로 했다. 진짜 마지막의 마지막 수였지만 협조를 안 해주니 별수 없다. 이게 다 기상호 탓이라서 미안하지는 않았다.


 

기상호는 오늘 야근이다. 왜냐면, 박병찬이 어떤 자료가 필요한데 내일까지 해줄 수 있겠냐고 해서…. 그것도 오후 5시 50분에. 원래 이러는 사람이 아니니 이유는 느낌이 온다. 아마 기를 쓰고 피해 다니니까 좀 빡치셨던 듯…. 하지만 이 정도 상황은 박병찬이 아니어도 심심찮게 생기니 화는 안 났다. 차라리 이렇게 괴롭히면서 짜증 난다고 멀어지면 차라리 나았다. 어쨌든 야근하면 야근 수당도 나오니까….

야근하기 위해 저녁 대충 때운 뒤 컴퓨터 앞에 앉는다. 어차피 매일 하던 일 비슷하게 하는 거라 뇌 좀 내려놓고 손만 열심히 움직였다. 그래도 오늘 늦게 퇴근하니까 돌아가는 길은 그럭저럭 편하겠네. 그러고 보니 세제 다 썼는데 들어가면서 하나 사야겠는데. 이번 주말에는…. 한참 딴생각하고 있는데 순간 코끝에 단내가 스친다. 맛있겠다. 그 생각과 함께 기상호의 손이 딱 멈췄다. 포크는 향이 맛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탓에 아무리 맛있는 냄새를 맡아도 반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순간 기상호의 뇌는 배고픔을 호소한다. 그러면….

깨닫는 순간 벌떡 일어나 뒤를 돌아본다. 뒤에는 박병찬이 있었다.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서인지 구두를 손에 들고 양말만 신은 채 살금살금 다가오는 박병찬이. 당황한 얼굴을 확인한 기상호는 본능적으로 컨트롤에스, 이어 컴퓨터 전원을 꾹 누르고 그대로 튀었다. 야, 기상호! 하고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거 듣고 멈출 거면 애초에 튀질 않았겠지. 기상호는 뒤에서 우당탕 소리가 들림에도 기상호는 전력을 다해 도망갔다.

허겁지겁 뛰쳐나와 엘리베이터를 보니 3층에 서 있다. 현재 사무실은 10층이라 올라오는 걸 기다리는 데만 해도 한세월이다. 딱히 원하진 않았으나 몇 번 박병찬과의 달리기 대결을 했던 기상호는 계산을 끝마치고 그대로 비상구 계단을 연다. 비상구에 발소리가 울린다. 탁탁탁, 딱딱한 가죽구두가 계단 밟는 소리가 경쾌하다. 한 번에 두세 개를 넘으며 내려간다. 8층, 7층, 6층…. 5층에 도착하고서야 뜀박질을 멈춘다. 거친 숨을 참으며 귀를 기울이면 뒤따라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일상생활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 것으로 보였지만 병찬은 다리가 조금 불편한 탓에 웬만하면 계단은 피했다. 제가 이리 내려갔으니 병찬 씨는 높은 확률로 지금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겠지. 아무리 제가 허겁지겁 뛰어갔다 쳐도 엘리베이터보다 빠를 수는 없다.

열이 오른 머리가 팽팽 돌아간다. 일단 기상호는 비상구에서 나와 엘리베이터를 확인했다. 대부분 퇴근했을 시간인데 1층으로 바뀌어 있다. 이게 아마 병찬 씨가 탄 거 아닐까. 아직 7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간이라 확신이 들지 않는다. 근데 만약 맞는다면? 엘리베이터를 다시 올리면 이상하게 생각할 텐데. 차라리 다시 올라갈까? 어쩌면 비상구 입구 쪽에서 기다릴지도 모르니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예 지하로….

머리를 굴리는 와중에 끼이익,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타다닥 달리는 소리가 들린다. 기상호가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리면 박병찬이 보였다. 가깝다. 기상호는 자기도 모르게 악, 하고 소리를 질렀고 박병찬은 그대로 달려들었다. 딱딱한 바닥에 사람 두 명이 구른다. 와중에 기상호는 박병찬을 끌어안았고 박병찬 역시 기상호의 머리를 감싸 받쳤다. 헉, 헉. 가쁜 숨이 섞인다. 병찬 역시 숨이 거칠었다. 둘은 한참 서로를 끌어안고 숨을 고르다 병찬이 먼저 몸을 조금 떼어내며 상호를 살펴본다. 찬찬히 살펴보던 시선이 이내 상호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한다.

 

"머리 굴려서 중간에 멈출 줄 알았지. 상호 씨 하루 이틀 봐?“

 

어떻게 아셨어요? 라고 물어봐야 의미 없다. 이미 잡혔으니까. 기상호는 손을 올려 제 입을 꾹 막았다. 입으로 숨을 쉬어도 단맛이 나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아, 안 돼. 멀어지고자 피했더니 오랜만에 맡은 냄새가 더더욱 식욕을 돋운다. 며칠 동안 굶은 사람 앞에 먹을 것을 둔 것처럼 죽을 것 같은 허기가 몰려왔다. 저도 모르게 입이 벌어진다. 딱, 이가 부딪히는 소리. 배고파. 기상호가 멍하니 보는 동안 박병찬은 상호의 가슴팍을 손가락으로 툭툭 찌르며 말한다.

"얘기 좀 해. 왜 그렇게 피하는데? 내가 싫어졌어?“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목소리로 말하는 꼴이 자신만만했다. 그리 물어오는 것에도 기상호는 그냥 입을 막고만 있었다. 배고파. 왜 그렇게 피하냐고요. 그야, 당신을 잡아먹어 버릴 것 같으니까. 나는 당신과 마주하는 매 순간이 고난이다. 잡아먹지 않기 위해 도망치듯 집으로 갔던 그날, 돌아가는 내내 당장이라도 몸을 돌려 그 완벽한 기회를 지금이라도 잡아챌까 말까 수백 번 고민했다. 이미 헤어지자는 메시지를 보냈음에도 돌아가서 빈다면 용서해 줄지도 모르고 그게 아니더라도 일단 밀고 들어간다면 거긴 완벽한 밀실이 될 테니까. 기상호는 그 유혹에 머리가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 실제로 그럴지도 모른다. 기상호는 자신이 참지 못할까 두려워 집에 가자마자 잠금장치를 모두 걸어놓고 이불을 뒤집어쓴 채 벌벌 떨었다.

그 몇 없던 케이크 중에서도 박병찬만이 기상호를 참지 못하게 만든다. 처음의 케이크가 기상호에게 확신을 주었던 것처럼, 그리고 그 뒤 수많은 케이크들이 기상호의 안심에 확신을 주었던 것처럼 박병찬 역시도 기상호에게 확신을 주었다. 기상호는 언젠가 박병찬을 잡아먹게 될 것이다. 인간임을 포기하는 것은 당연하고 그렇게나 지키려 애써왔던 인간으로 대우받는 것마저 포기해 버리며 그저 그 달디단 살덩어리를 맹목적으로 갈구하겠지.

기상호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제 앞의 남자 하나 때문에 기껏 쌓아 올린 제 인생을 바보처럼 무너트리고 싶지 않았다. 인간으로서의 무언가를 내려두고 싶지 않았다. 인간으로 존재하고 싶었다. 사람으로 대우받고 싶었다. 언제고 일을 저지를 수 있는, 그리고 실제로 저질러 그 누구에게도 신뢰받지 못하는, 그리고 그것이 마땅한 포크 따위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기를 쓰고 도망간 것이다. 완벽히 도망가고자 이직 준비까지 하고 있었다. 그렇게 영영 멀어진다면 계속 인간으로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당신은 또 아무것도 모르면서 저를 붙잡고 있었다. 무방비하게. 당장이라도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서.

 

"나 좋아하잖아. 그냥 받아주면 안 돼?“

 

제 볼을 간지럽히듯 쓰다듬는 하얀 손가락을 쳐다본다. 그 끝에 애정이 담겨있어 기상호는 더욱 끔찍한 기분이 된다. 당신은 어떻게든 잡아먹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나에게 아무렇지 않게 다가와 사랑을 말하며 제 인내심을 시험하게 만든다. 제가 그 시험에서 떨어졌을 때 자신이 어떤 꼴이 될지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그 무지가 제게는 끔찍할 만큼 잔인하다. 이게 저 자신이 포크로 태어난 죗값일까. 기상호는 그렇다면 너무 억울하다고 생각했다.

두근두근두근. 기상호는 비명을 지르고 싶은 심정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가 결국 제 손을 꽉 깨문다. 어찌나 세게 깨물었는지 으득, 소리가 함께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달지도 않은 그 액체는 아무런 갈증도 채워주지 못한다. 그것에 박병찬은 깜짝 놀라 어떻게든 손을 떼어내려 하며 소리쳤다.

 

"잠깐, 뭐 하는 거야. 야! 하지 마!“

 

발버둥을 치며 제 위에 있는 병찬을 밀어내려 하지만 자세도 그렇고 그냥 평범한 힘도 병찬이 우세하다. 병찬은 어떻게든 상호의 손을 잡아 뜯어내고선 또 깨물지 못하도록 바닥에 내리눌렀다. 자연스럽게 얼굴이 가까워진다. 제 갑작스러운 행동에 잔뜩 화가 난 얼굴이 보이지만 그건 지금의 기상호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아 가까워. 가까워. 너무 가까워. 냄새가. 달달한 냄새가 너무 가까워. 머리가 돌기 시작한다. 아, 안 돼. 여긴 안 돼. 어떻게든 제 입을 틀어막아야 하는데 내리누르는 손이 단단하다. 안 되는데. 입을, 입을 막아야 하는데. 하다못해 떨어졌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병찬은 여전히 가깝기만 하다. 어쩌면, 그저 고개를 들이미는 것으로 그 목덜미를 물어뜯을 수 있을 만큼 가까웠다.

회사 안에는 CCTV도 가득하고 출입증 카드도 찍는다. CCTV가 없는 곳으로 끌고 간다고 해도 그 과정이 다 찍힐 것이다. 이대로 보이지 않는다면 당연히 자신이 의심받겠지. 그리고 모두가 저를 질시할 것이다. 그럴 줄 알았다면서, 이제까지 숨겨왔으니 어쩌면 잡아먹었던 케이크가 있을지도 모른다면서. 미등록 포크였으니 처벌도 가중되어 받을 것이다. 더는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고 처절하게 살아가야 할 것이다. 매 순간 모든 사람이 저를 비난하고 경멸하고….

저 자신을 누르고자 가장 끔찍한 가정들을 떠올리면서도 기상호의 몸은 움찔거린다. 시선은 여전히 박병찬의 목덜미로 향한 상태였다. 무언가를 끊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그 물질을 들이대면 쉬이 빠져나올 수 없다. 억지로 케이크에게서 멀어지려 노력했던 포크에게 갑작스레 다가온 케이크는 얼마나 달콤한 유혹인가? 실낱같은 인내심이 간당거린다. 언제나 견고하게 지켜왔던 이성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마지막 발악으로 제 입술을 깨물어도 언제나 고통은 기상호를 막지 못했다. 입을 막아야 하는데. 괴로워하는 상호를 내려다본 병찬이 고개를 내리더니 하지 말라는 듯 입술을 핥았다.

아. 마지막 남은 이성마저 끊긴다. 기상호는 지금까지 숨겨왔던 포크라는 사실이 들키고 평생 다른 이들에게 박해당하며 살더라도 지금 제 앞의 이를 잡아먹고 싶었다. 기상호는, 박병찬이 얼마나 달콤한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먹고 싶어….

 

먹지 않기 위해 힘을 주었을 때는 병찬을 이기지 못했는데 잡아먹겠다고 생각하니 그의 손을 밀어낼 수 있었다. 케이크를 향한 포크의 집념은 상상 초월이다. 힘으로 밀어내니 당황하는 모습이 보인다. 이젠 자신이 병찬의 손목을 누른 채로 내려다본다. 제 밑에 있는 병찬은 아직도 숨이 조금 거칠어 얼굴에는 열이 올라 있고 뛰다 더워서 풀었는지 단추는 몇 개 풀려있어 목덜미가 훤하니 드러나 있다. 언제나 얌전히 가라앉아 있던 머리도 지금은 부스스했다. 맛있겠다. 이제는 모든 게 마비되어 열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병찬의 그 모든 것이 상호를 자극했다.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입을 벌린다. 삼킬 생각도 못 하고 고여있던 타액이 흘러내렸다.

상체를 숙인다. 저 허연 목덜미를 뜯어 숨을 멎게 할 속셈이었다. 그리고 오늘 밤 동안, 이 달콤한 살덩이를 모두 제 뱃속에 처넣을 것이다. 그러면 박병찬은 온전히 제게 소화되겠지. 기상호는 그것이 정말 환상적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죄를 저지른다는 생각은 이미 사라졌다. 당신을 남김없이 제 것으로 만든다는 희열감이 제 머리를 가득….

 

"너 포크야?“

숙어지던 머리가 덜컥 멈춘다. 아까까지만 해도 다정함이 담겨있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목덜미만 바라보았던 시선을 천천히 올린다. 분명 병찬이 제 아래에 있는데도 목덜미를 향해 고개를 숙였던지라 마치 병찬이 저를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저를 내려다보는 새까만 눈과 마주친다. 그 눈은 박병찬에게서 처음 보는 눈이었다.

 

"….“

 

찬물이라도 맞은 것처럼 정신을 차린다. 인간으로 남아있기를 포기했으면서도 이 순간 기상호는 고작 박병찬의 말 한마디에 몸이 멈췄다. 마주한 눈에 담긴 것은 무엇인가. 기상호는 이 눈빛이 익숙했다. 포크임을 숨기지 못했던 타인들이 또 다른 타인들에게 받았던, 특히나 케이크로서 그들에게 삶을 위협당했던 이들에게 받는 시선이었다. 기상호로서는 단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던 시선이기도 했다. 분노, 거리낌, 그리고 경멸로 가득 찬….

쿵, 쿵, 쿵. 심장이 거세게 뛴다. 그 시선을 마주하는 순간 박제된 벌레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기상호는 이 순간을 상상했었던가. 상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어찌 피식자가 언젠가 자신을 먹게 될 포식자를 사랑하겠는가. 그것도 자신을 잡아먹으려 드는 포식자를. 박병찬이 기상호를 경멸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순리다. 인간으로 남지 못한 짐승에겐 그런 취급이 딱 어울린다.

…하지만.

 

"저는….“

 

기상호가 자기 자신을 억누르기 위해 떠올렸던 것은 사회의 시선이었다. 친구들, 지인들, 동료들이 모두 저를 경멸하고 떠나며 더 이상 사람으로 취급해 주지 않는 것을 상상했다. 그리고 박병찬이 저를 두려워하는 것을 상상했다. 경악하고 후회하며 두려움에 발버둥 치는 그를. 그리하여 박병찬을 잡아먹고 모두가 저를 손가락질하는 것으로 상상이 끝난다. 그것은 기상호를 잘 억죄어 주었으나 지금, 이 순간에서야 기상호는 제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하고 두려워했던 것을 깨닫는다.

손을 덜덜 떨며 천천히 물러난다. 기상호는 저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나 그것에 신경도 쓰지 못하고 떨리는 손으로 제 얼굴을 감쌌다. 헉, 흐윽…. 울음을 참으려 애를 쓰며 기상호는 몸을 웅크렸다. 이제는 온몸이 떨렸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기상호는 용서를 빈다. 자신이 이 순간 가장 두려운 것은.

 

"저, 저 미워하지 마세요….“

 

기어코 제 욕망에 패배한 기상호를 멈추게 만든 것은 박병찬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와 차가운 시선이었다. 우습게도 기상호는 그런 박병찬을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그것이 당연하다 생각했으나 떠올리지는 않았다. 다른 이들이 모두 저를 경멸하며 피하는 건 항상 생각했음에도 박병찬이 그러는 것만큼은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상상만으로도 두려웠으니까.

박병찬의 사랑을 언젠가 깨어질 얄팍한 것이라 비하하면서도 기상호는 그것이 영원히 남아있길 바랐다. 그것이 시간에 의해 사라지는 건 괜찮아도 저로 인해 산산이 조각나는 건 바라지 않았다. 기상호가 가장 인간으로 남고 싶었던 순간은 박병찬의 앞이다. 기상호는, 박병찬의 앞에서 인간이고 싶었다. 사랑받을 수 있는, 예쁨받을 자격을 가진 그런 보통의 인간. 사실 박병찬의 사랑을 얄팍하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그것은 애초에 포크인 자신이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이다. 자격이 없는 주제에 받아왔으니 그저 과분했을 뿐이고 이젠 자격이 없음을 들켰으니 당연하게 거둬지는 것이다.

그러니 미움받는 게 당연한데도 기상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미워하지 마세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저, 절대 손 안 댈 테니까…, 이직 준비도 하고 있었어요. 앞으로도 절대 옆에 안 갈게요. 아는 척도 안 할 테니까, 제발 저 미워하지만 마세요…. 죄송해요….“

 

기상호는 조금씩, 조금씩 박병찬에게서 도망갔다. 얼굴을 마주하는 것도 겁이 나서 그랬다. 그리고 박병찬은 그 모든 꼴을 지켜본다. 방금까지만 해도 침을 줄줄 흘리면서 저를 잡아먹으려 들었던 주제에 지금은 아이처럼 엉엉 울면서 몸을 뒤로 물리고 있었다. 두려운 듯 얼굴을 가리고 몸을 한껏 웅크리면서, 제 시선에서 달아나고 싶다는 듯이. 그대로 박병찬이 손을 뻗어 팔을 잡으면 기겁하며 팔을 빼내려 했지만, 박병찬은 그 팔을 놓지 않았다. 죄송해요, 놔주세요. 그리 말하는 팔이 병찬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결국 기상호는 잡힌 팔만을 내민 상태로 다른 팔에 얼굴을 묻고 덜덜 떨기만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포크임을 알았을 때 순간적으로 좋지 않은 반응을 보인 것은 맞다. 워낙 당해온 게 있어야지. 기상호가 완전히 돌아버린 눈으로 저를 내리누르며 입을 들이대는 꼴을 보며 예전 일이 떠올려 저도 모르게 날카롭게 반응했다. 지금까지 저 좋다고 어쩔 줄 모르던 모습이 죄다 포크라서 그랬구나 싶어 실망감과 배신감이 들기도 했다. 왜냐하면 병찬에게 웃는 얼굴로 다가오는 포크가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모든 포크가 병찬만 보면 달려들었을까? 아니다. 어떤 포크는 케이크와 친밀한 관계를 쌓고자 한다. 어떤 포크는 아주 착실하게 계획한다. 그 모든 것은 케이크를 먹어 치우기 위한 수작이다. 케이크를 온전히 삼키기 위해서, 그렇게 일을 저지르고서도 자기 자신은 멀쩡히 인간인 척 살아가기 위해서 등. 이유는 다양하다. 결과적으로 그 끝의 목적은 케이크를 먹고자 하는 욕구다. 병찬은 살아오면서 아주 많은 포크 지인을 만들었고 그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박병찬을 배신했다. 하는 말도 다양하다. 미안해, 고마워, 별수 없었어, 이해 해줘. 병찬은 그들이 정말 지긋지긋했고 경멸스러웠다. 결국 원한 건 고작 제 살덩어리이면서 그렇게 간이고 쓸개고 빼줄 것처럼 구는 꼴이 끔찍했다. 병찬은 그들을 정말 친구라고 생각해 주었음에도 돌려받은 것은 고작해야 수많은 합리화였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제 앞에서 저를 미워하지 말라며 우는 어린애를 보고 있으면 뭐라고 할까.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포크인 걸 부정도 하지 않은 녀석인데, 원래라면 기겁하고 도망가서 미등록 포크가 있다며 신고해야 할 텐데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지금도 이리 가까이 있는데 녀석은 훌쩍거리면서 웅크리고만 있었다. 다시금 제게 덤벼들지도 않고 돌아버린 눈으로 저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로.

박병찬은 이런 기상호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상호 씨. 괜찮으니까 나 봐봐."

"안 돼요. 저, 아까, 덤볐잖아요. 저 두고, 가세요. 죄송해요…."

"얼른, 내 말 들어. 내 얼굴 봐.“

 

어린애를 달래듯 말하면 녀석이 천천히 고개를 든다. 눈이 마주친다. 그렇게 한참 시선을 마주하고 있음에도 상호는 눈물이 그렁한 상태로 가만히 병찬을 쳐다볼 뿐이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병찬은 이 순간 확신한다. 그래서 부드러이 웃으며 상호의 팔을 천천히 잡아 내리고 다가가 얼굴을 마주했다.

 

"상호 씨. 이거 알아? 보통의 포크는 케이크랑 이렇게 눈 마주치고 있으면 못 참고 달려들어."

"…."

"포크인 거 알고 나니까 말이야. 날 잡아먹으려면 진작에 잡아먹었을 것 같거든. 기회가 잔뜩 있었잖아."

"…."

"왜 날 못 잡아먹은 것 같아? 상호 씨가 인내심이 강해서?"

"…그런 것, 같은데요…."

"글쎄…, 내가 보기엔….“

기상호는 자신이 식욕 때문에 약하게 굴고 휘둘린다고 생각했지만, 박병찬은 기상호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그야 자신만 보면 얼굴이 빨개졌으니까. 얼굴을 가려대도 빨갛게 달아오른 귀를 보면 나를 좋아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뭐가 그렇게 긴장되는지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키스라도 할라치면 조금만 더 해달라고 매달리는데 그럴 때마다 저를 빤히 쳐다보면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보면 그저 귀엽기만 했다. 주변 사람들도 지나가는 말로 기사원이 관심이 있는 것 같던데, 같은 말을 던졌다. 누구나 보면 알 수 있었다. 기상호가 박병찬을 좋아하는 것을.

예전에 기상호는 박병찬에게 한 번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다. 왜 자신을 좋아해 주냐고. 그것에 박병찬은 네가 날 좋아하니까? 라고 답했다. 기상호는 거기에 미적지근한 반응을 했지만…. 거기에 아니냐고 대거리를 하지 않았던 이유는 간단하다. 평소 박병찬을 보는 기상호의 얼굴을 보면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기상호 역시도 그 얼굴을 보면 깨달았을 거라고, 박병찬은 생각했으나 말하지 않았었다.

 

"상호 씨는 절대 나 못 먹어.“

 

너 역시 결국 포크라는 태생에 굴복하여 나를 속이고 배신하는 걸까. 그런 생각에 차갑게 말했으나 이제 알겠다. 기상호는 저를 사랑한다. '케이크' 박병찬이 아니라, '박병찬'을! 지금도 제가 목소리 좀 깔았다고 겁에 질려 우는 꼴을 봐라. 이런 주제에 저를 먹겠다고. 하하, 박병찬은 그 말이 웃기기만 했다. 어느 포크가 그런 걸로 먹고자 하는 일을 포기하지? 아무리 케이크가 포크에게 소중한 사람이더라도 죄책감은 포식 후에 찾아온다. 가족, 친구, 연인, 처음 보는 모르는 사람까지… 모든 포크는 먹어버린 뒤 후회한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고. 얼마나 허망한 말인가? 그래서 박병찬은 포크라는 족속들이 말하는 사랑이 참 알량하다고 생각했다. 그만해, 무서워, 하지마, 우리 친했잖아. 그리 말하는 병찬에게 반응했던 포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단 한 명도. 모두가 본성을 드러낸 뒤에는 혹시나 병찬이 도망가 버릴까 잡아먹으려 애를 쓰고 덤벼들었다. 병찬이 무어라 말하든 신경도 쓰지 않고.

하지만 지금 제 앞의 포크는 어떻지. 고작 제게 미움받고 싶지 않아 먹는 것을 포기하고 울고 있다. 죄다 먹어버린 뒤 후회하는 게 아니라. 몇 번이나 기회가 있었음에도 손대지 못하다 겨우 덤벼든 뒤에는? 또 물러났다. 본성을 다 드러냈음에도 달려들지 못한다. 변명조차 하지 않고 죄송하다고, 다가가지 않겠다고 말하면서 저를 잡지도 못한 채 고작 하는 말이라고는 미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정말 끔찍할 정도로 나를 사랑하는구나. 박병찬은 환히 웃으며 기상호를 끌어안는다. 제발…. 하고 절박하게 말하는 꼴이 만족스럽다. 입을 달싹거리면서도 결국 손도 못 대는 주제에 날 잡아먹겠다고. 우스운 말이다. 기어코 기상호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얌전히 안긴다. 그 순응에 박병찬은 충족감을 느낀다. 제 목덜미가 입 앞에 들이밀어지는데도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포크를, 박병찬은 이 순간 진심으로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기상호는 이미 행동으로 자신의 사랑을 증명했다. 그렇다면 박병찬도 그 사랑에 부응해야겠지. 그래야 했고, 그러고 싶었다. 어떻게 이런 포크를 남에게 주겠나. 이건 이제 온전히 병찬의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난다. 기상호는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한 얼굴을 한 채 병찬이 당기는 대로 일어섰다. 그대로 이끌면 저항 없이 따라온다. 여전히 겁에 질린 얼굴로 무기력하게 있는 꼴이다. 하하. 병찬은 사랑스러운 것을 보는 얼굴로 상호의 얼굴을 부드러이 쓸어내린다. 눈물에 젖은 시선이 천천히 올라와 병찬을 쳐다본다. 그 시선이 절박하여, 병찬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상호 씨. 아니, 상호야."

"…네."

"네가 날 잡아먹으면, 나는 있는 힘껏 널 미워할 거야. 죽어가면서도 원망할 거야."

"…."

"그러지 않으면 사랑해 줄 테니까. 알았지?“

 

눈에 어린 감정은 무엇일까. 말해주지 않아도 알아차릴 만큼 박병찬은 기민하지 않다. 그저 그것이 긍정적이지 않음을 유추할 뿐이다. 그러나 기상호가 해야 할 답은 정해져 있다. 이것은 다른 길이 없는 외통수기에. 왜냐하면 기상호는 박병찬을 사랑하니까. 박병찬은 웃는 얼굴로 답을 종용하고.

 

"안 그럴 테니까, 사랑해 주세요….“

 

그래야지. 병찬은 만족한 얼굴로 제 패배를 시인한 이를 내려다본다. 병찬이 다시 걸음을 옮긴다. 등을 보인 채 무방비하기 짝이 없는 태도였다. 기상호가 마음만 먹으면 쉬이 우위를 점할 수 있을 것 같이. 언제든 잡아먹을 수 있을 것 같은 모습으로. 그 뒷모습을 보면서 여전히 입 안에는 침이 고이고 가슴이 거칠게 뛰는 것을 느꼈으나 결국 상호는 달려들지 못한다. 기상호는 감히 박병찬에게 미움받을 용기가 없었기 때문에.

…그러나 상호는 이것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느새 울음을 그친 상호는 제 손을 꾹 잡은 병찬의 손을 내려다본다. 밀어내지 않고, 손가락질하지 않고 저를 꾹 잡아 온 그 손을. 병찬은 상호를 받아들였다. 사랑하겠다고 말했다. 기상호가 포크임을 앎에도, 결국 참지 못하고 달려드는 꼴을 뻔히 보고서도.

아, 아. 배고파, 먹고 싶어, 먹고 싶어. 기상호는 다시금 제 머릿속에 차오르는 감정들을 무력하게 흘려보낸다. 수많은 단어가 떠오르고, 이내 그것들이 모두 흘러가 버린 뒤에야 기상호는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을 깨닫는다. 그러니까 자신이 정말 간절히 바랐던 것은….

 

"…사랑해요…."

"드디어 말해주네.“

 

환하게 웃으며 돌아보는 그 얼굴이, 정말 끔찍할 만큼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상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BL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