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의 요람

행려자의 밤

쫑규, 23.12.31 천하제일 열애지회 교류회 참가자 <동경의 요람> 웹발행 공개 2

ㅍ-ㅍ x ^-^ by 인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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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등 몇 대가 새벽녘을 어스름하게 밝힌다. 강변을 따라 가지런하게 심어진 초목은 북반구에 있는 나라 대다수가 지금 어떤 계절을 보내고 있는 줄도 모르고 마냥 푸릇푸릇하다. 땀으로 잔뜩 절은 머리카락에 열대야가 송골 맺혔다. 종수가 축축한 머리카락을 위로 쓸어올렸다가 정수리 부근에서 털었다. 땀방울이 사방으로 튄다. 기후 위기를 맞은 11월 중순 서울 날씨는 겨울이라는 존재를 영 잊어버린 모양이다. 종수 역시 겨울을 실감하지 못했다. 자취방 바닥은 서늘했고 벽에서 찬 기운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솜을 얇게 채운 간절기용 면 이불이 침대 위를 차지하고 있다. 두껍지 않은 목폴라와 가볍게 걸칠 수 있는 재킷 혹은 아노락 티셔츠나 점퍼도 정리하지 않고 옷장 안에 그대로 뒀다. 날을 잡아 겨울옷을 꺼내려고 하면, 그날 저녁 기상 캐스터가 주중 내내 포근한 한낮 기온이 저녁까지 이어져 11월인데도 일교차가 거의 없을 예정이라는 전망을 알린다. 종수의 집은 아주 작은 여름의 한 단면과 가을이 적당히 혼재한 상태로 갑작스러운 추위보다 때아닌 더위를 예비하기 훨씬 좋은 상태를 유지하는 중이다.

작년 이맘때 정강이 언저리까지 오는 두툼한 코트를 장롱에서 꺼내입고 한창 난방을 뗐던 것과 대비된다. 간절기용 스포츠 후드티의 탄탄한 마감재가 달리면 달릴수록 뜨겁게 데워지는 공기를 바깥으로 순환시키기보다 내부를 빙글빙글 돌도록 유도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온기는 지퍼를 열어젖힌다고 해도 해결되지 않는다. 물성이 느껴질 정도로 주변 공기가 덥고 습하다. 숨이 쉽게 차올랐다. 심장이 빠르게 뛴다. 종수는 달리기를 멈추는 대신 앞니로 입술을 깨물며 박차를 가했다. 허벅지나 정강이가 무거운 추처럼 느껴지고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이 옷에 달라붙어서 떨어질 줄 모를수록 달려야 한다. 불면이 떨어져 나갈 때까지.

불면. 종수는 처음 잠을 설쳤던 기억이 까마득할 정도로 오랜 시간 그것과 함께했다. 그 세월만큼 못 자서 겨우 키가 190cm 초중반에 머물러 있나 싶다가도 그렇게 잤는데 이만큼 큰 것을 보면 유전자라는 것이 질기긴 한가보다 싶었다. 학창 시절 자신을 불완전하게 만들었던 요소를 주제로 우스운 소리를 할 수 있을 만큼 나이를 먹은 종수는 불면증과 자신이 거의 한 몸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그건 미국행 비행기를 탈 때마저 쫓아왔다. 짧은 수면시간이 경기 운영 능력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지만, 자국민의 시각으로 볼 때 심리적으로 다소 불안정하게 비칠 가능성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날도 슛 개수를 채우고 들어가던 길이었다. 농구의 본고장 미국에서는 어느 야외 코트를 가도 지나치게 후미진 곳만 아니라면 일정 수준 이상을 웃돌았다. 물론 종수는 안전을 위해 밤에는 기숙사 인근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활동했다. 새벽에 땀에 흠뻑 절어서 귀가한 걸 직접 마주 본 히스페닉계 룸메이트는 몇 번 종수에게 참견도 하고, 가만히 지켜봤다. 종수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의 정성에 응답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긍휼함이란 결국 여유 있는 자들에게서 나온다. 192cm를 웃도는 신장은 핸디캡이 아니었으나 교포가 아닌 동아시아 국가의 유학생이라는 신분은 소속감에서도, 신체적으로도 긍정적이기만 한 요소는 아니다. 더 열심히 해야 하는 이유다.

그 룸메이트는 결국 마지막 보루로 숨겨둔 오지랖을 발휘했다. 코치에게 종수의 문제를 슬쩍 찌른 것이다. 코치는 종수와 진행한 면담에서 스무 살 어린 아시아인의 문제를 향수병과 그의 까마득한 선배이자 같은 전철을 밟았던 아버지의 최세종을 결부해서 받아들였고, 사실과 사실이 아닌 부분까지 전부 전해 들은 감독이 조심스럽게 상담을 권유했다. 어떤 말은 화자의 손을 거치지 않은 채로 퍼져 신경을 침범한다. 미국 유학 생활 중에도 그리고 프로팀과의 계약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에도 한국의 인터넷 여론 외에도 신경 쓸 게 아주 많았다. 종수는 불뚝거리는 불쾌감을 억누르고 그들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꽤 괜찮은 병원과 상담 센터를 소개받았으나 유명세가 있는 의사와 적절히 처방된 약물 그리고 상담사조차 불면을 완전히 뽑아내지 못했다. 종수의 고질적인 불안감은 존재론적으로 설명 가능한 부류가 아니라 무형의 유산. 즉 미래에 있었다. 해답은 시간이었다. 외피에 점점 단단하고 두꺼운 껍질을 두르면서 나이를 먹는 나무처럼 서서히 삶의 방식을 정립하다 보면 해결되는 것들이었다. 종수는 그로부터 머지않아 이런 것들을 다스리는 방법을 스스로 깨우친다. 의료진이 실재하는 원인에 근본적으로 다가가고자 실시한 노력이 결과론적으로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소리다.

이번 여름의 초입. 종수가 NCAA에서부터 미국의 1부 리그 끄트머리까지 달린 후 계약 종료를 마지막으로 귀국행 비행기에 올랐을 때. 그러니까 최세종보다는 훨씬 나은 성과를 기어코 손에 쥐고 고국의 금의환향을 맞이했을 때, 10시간은 족히 넘는 비행시간을 보내면서 깨달았다. 불면은 이제 오랜 습관을 넘어 자신을 구성하는 본질 일부가 되었다는 것을. 중요한 경기가 있는 날에도 네 시간에서 다섯 시간 정도면 많이 잤다고 말할 수 있었다. 쇼트 슬리퍼가 되었다는 간단명료한 이야기는 아니다. 종수는 잠이 필요하지만, 그냥 잠들지 못했다. 밤은 종수가 미치지 않을 정도로만 품을 내어줬다.

인터넷의 바다를 헤엄치지 않을 때는 가끔 상상의 나래가 뉴런 다발 사이를 비산한다. 전기-화학-전기신호로 이루어진 일련의 사고 과정은 많은 기억을 끄집어냈다. 이런 종류의 과거 회상은 이따금 ‘가정’을 동반한다는 점에서 좋지 않다. 맑게 뜬 물을 헤집어 잘게 뭉친 진흙 덩어리를 집어내는 것처럼 기억을 건진 뒤 ‘만약에’로 시작하는 말을 곁들인 채 생각을 통과하는 순간 잠은 얄궂게 종수의 곁을 완전히 떠나서 새벽 내내 다시 찾아오지 않는다. 원하는 만큼 잠을 푹 잘 수 있는 상황은 두 가지로 지나치게 한정되었다. 하나는 극한으로 몰린 신체가 비명을 지르듯 휴식을 선언할 때였고 두 번째는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였다. 차 안에서 잠드는 것을 시도하는 건 몸을 혹사하는 방법보다 성공적으로 잠들 확률이 낮았고, 실패는 멀미라는 부작용을 필수로 동반했다.

그런데도 종수는 번번이 차에서 잠드는 일을 시도한다. 이 행위가 숙면에 있어 외곽에서 슛을 던지는 일보다 통계학적으로 가치가 낮을지도 모르지만, 보통 당위성 없이 그런 행위를 할 때는 무엇인가 일어날 것이라는 확신이 아니라 그저 그 순간이 도래했기 때문이 아닌가. 반드시 던져야만 한다. 그런 직감이 들 때. 종수는 그런 것을 쫓아 코트를 호령하는 사람이고, 그런 것을 거부하지 못해 자동차에 몸을 실었다. 이렇다 할 계기가 된 사건은 종수에게 별일이 아니었지만, 누군가에게는 교직 생활에 있어 전무후무한 사고였으리라.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진학하는 건 삶의 주기 중 일어나는 큰 변화 중 하나로, 대부분이 설렘이나 두려움을 느낀다. 그러나 드물게 장도 중학교에서 장도 고등학교로 진학하는 학생들 대부분은 입학식에서부터 상당한 지루함을 느낀다. 두 학교가 장도(裝道)라는 이름으로 묶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장도 중학교와 장도 고등학교의 이사장은 서로 남매 사이였고, 같은 법인에서 위탁받아 운영했다. 교복도 얼추 비슷하고 거리마저 아주 가까워서, 등굣길도 일치했다. 언뜻 보기에는 고등학생이 중학생 같았고 중학생이 고등학생과 같이 보였다. 심지어 그곳에 진학하는 학군마저 일치하는 바람에 얼굴을 뒤덮은 성장의 징표가 약간 벗겨지는 정도로는 매일 보던 인상을 새롭게 느끼는 일이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 학생들을 그나마 들뜨게 만든 건 4월에 있는 현장 체험학습이었다. 중학교까지는 학년끼리 반끼리 뭉쳐 내내 용산 인근의 공원이나 박물관 혹은 미술관만 전전한 단체 생활이 미시적인 단위로 쪼개져 각 반이 모두 다른 곳으로, 더 자유롭게 체험학습 장소를 선정해서 교복을 벗고 각자 이동하게 된 것이다.

일면에는 학생들의 불만이 터져 나오지 않을만한 체험학습 장소를 선점하기 위한 교사들의 사투가 숨겨져 있으나 그것까지는 대다수가 고려할 사항이 아니었다. 종수와 이규의 반은 8분의 1 확률로 놀이공원에 가게 되었다. 그것도 에버랜드로. 이규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은 수민이 한참 눈을 감고 계산하더니 말했다. 경우의 수를 아니? 너희가 바로 상위 12.5%에 유일하게 들어가게 된 거야. 축하해. 수민의 반은 하위 12.5%로 송도센트럴파크에 간다고 했다. 이규는 바닥에 궁둥이를 붙인 채 그저 웃었고 종수는 농구공을 튕긴 뒤 부드럽게 림에 집어넣었다. 거기 아무것도 없지 않아? 시간만 죽이게 생겼네. 영상통화라도 걸어줘? 이규가 선심 쓰듯이 물었다. 수민은 대충 이번 춘계 농구대회를 핑계로 대고 빠질 거라며 어깨를 으쓱했다.

종수는 순순히 체험학습 행렬에 동참했다. 빠진다는 것 자체를 염두에 두지 않은 사람처럼 안내문을 받자마자 절취선을 반듯하게 접어서 손톱으로 여러 번 그었다. 이규는 종수가 이런 부분까지 성실한 부류인 걸 어느 정도 알았다. 규는 놀이공원에 가고 말고를 재볼 것도 없이 참석 여부에 동그라미를 칠해 자신의 이름과 사인은 물론이고 보호자 날인까지 완벽하게 날조해서 반장의 책상 위에 올려놨다. 선배들의 심부름을 할 때 기구관리 대장에 적혀있던 코치님의 날인을 오며 가며 흘끗 봤던 게 도움이 됐다. 이규가 종수의 유인물에도 똑같이 사인을 휘갈기며 화백이나 할까? 농담했다. 종수는 그런 걸로 화가가 될 수 있겠냐며 입을 비죽였다.

체험학습 전날 뉴스에서 앞으로 일주일 내내 화창한 날씨가 이어질 전망이라고 했다. 앵커 두 명이 뉴스데스크를 마무리하면서 벌써 한반도 남부와 일부 중부 지방에는 벌써 벚꽃이 만개했다며, 봄이 이르게 찾아오는 중이라고 했다.

향후 몇 년 뒤면 서울에서도 3월이면 벚꽃을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우려를 마지막으로 카메라 초점이 점점 멀어졌다. 뉴스가 끝난 다음에 여자 연예인이 포카리스웨트를 들고 해변을 뛰어가는 광고가 나왔다. “어? 벌써 포카리스웨트 광고가 다 나오고. 정말 더워졌나 보다.” 규가 세안 밴드를 목에서부터 이마까지 올리면서 말했다. “종수 그렇게 되면 어떨 것 같아?” 종수는 포카리스웨트 광고와 이상 기후 사이의 상관관계를 떠올리려고 애썼다.

“……뭐가?”

“3월에도 벚꽃을 볼 수 있다면 말이야.” 이규가 수건을 목에 걸고 양 끝을 부여잡은 채로 고개를 기울인다. 종수는 고민했다. 애초에 궁금해서 물어보는 게 아닐 테다. 저 질문은 그저 이규의 무수한 사교 생활. 그것의 일부임이 틀림없다. 이규는 심오한 의도를 담을 정도로 섬세하지 않았다. 게다가 종수가 이규의 질문에 진지하게 대답하려고 노력했을 때 이규가 거의 파안대소 하기 직전이었던 꼴을 한두 번 본 게 아니다. 이규의 입에 걸린 옅은 미소를 보던 종수가 입을 뗐다. 네 꾐과 놀림에 쉽게 넘어가지 않을 테다. 그런 비장한 각오를 했다.

“…너는?”

“음? 내가 뭐?”

“다 벗고 일대일 하잖아. 더 더워지면 어쩌려고.”

“…하하, 그건 땀나서 그런 거고.”

“변태.”

“변태라니 몸에 열이 많아서 그래. 어쩔 수 없어.”

이규의 반라와 관련해서 할 말이 아주 많았으나, 침묵을 선택했다. 이규가 고개를 기울였다. 얘가 여기서 입을 그냥 다물 사람이 아닌데, 경쾌한 높낮이를 유지하고 있던 음성이 흔들린다.

“……종수 왜 대답을 안 하지?”

“…됐어.”

“종수야. 최종수? 야!” 미동도 하지 않던 종수가 치약을 쥔 상태로 옆으로 눈을 흘겼다. “…야라고 하지 마.”

“어휴…… 알았다. 알았어.” 이규가 세안 밴드 위로 수건을 올려 묶어 고정한 다음 노란색 칫솔에 치약을 묻혀 종수에게 건넸다. “그래서 내일 에버랜드까지 어떻게 갈래?”

“아직 생각 안 해봤는데, 버스랑 지하철 타겠지.”

“그럴 줄 알았어.”

“뭐?”

하하. 당황했지? 이번에는 내가 한 방 먹인 거야. 이규가 비죽 웃는다. 종수가 칫솔을 입에 문 채 미간을 구겼다. 잠시 잊고 있었다. 이규도 호승심이라면 둘째가면 서러울 정도로 가지고 있는 남자애였다. 이제 물러나려나 싶으면 정신을 흔든다. 가끔 규와 나누는 대화는 일대일을 하는 것 같았다. 이 언쟁이 끝도 없을 것을 짐작한 종수가 불편한 기색으로 한숨만 크게 쉬었다. 찾아보면 되잖아. 칫솔에 거품이 올라오지 않아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큰 장애 없이 입 밖으로 튄다. 뉴스가 던진 화두는 그렇게 묻혔다. 종수와 이규는 각각 칫솔을 문 채로 침대 1층에 걸터앉아 휴대 화면을 한참 두드렸고, 둘은 동시에 당황했다. 이렇게 오래 걸린다고? 이렇게 멀다고? 무수한 선택지 중에서 둘이 선별한 경로는 두 가지였다. 학교 인근 정류장에서 400번 버스를 타고 서초구 쪽에서 내려 직행버스를 타는 2시간 30분짜리 하나와 용산역으로 가서 두 번 지하철을 갈아탄 다음 진행 버스를 타는 2시간짜리 경로 하나. 어느 쪽이든 만만하지 않다. 그들은 문제를 풀기 위해 용산역에서부터 서초구까지 오가는 출근 시간대 지하철의 악명에 주목했다. 사람이 껴서 나오지를 못한대. 이규가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종수 역시 덩달아 심각해져서 그렇게 심해? 라고 물었다. 둘은 사람들 틈에 남자 평균 신장을 훨씬 웃도는 몸을 끼울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오랜 계산 끝에 이규가 400번 버스에 몸을 싣는 것을 제안했다. 종수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둘의 출발지가 비교적 버스 종점과 가까운 덕분에 운 좋게 좌석에 앉을 수 있었다. 순항을 기대했으나, 이후 일은 예상과 다르게 진행되었다. 버스가 정거장에 잠시 정차할 때마다 무섭게 앞으로 끼어들었고, 가지각색의 차로 꽉 찬 도로 위에서 시뻘건 브레이크 등이 켜졌다가 꺼졌다. 운전기사가 다 들릴 정도로 큰 목소리로 욕지기를 할 때마다 종수는 입을 다문 상태로 바람을 불어 볼을 불뚝거렸다. 이규가 지도 앱을 켜서 훑어보니 그 버스는 구룡사에서 출발해서 강남역과 논현역이 포함된 출퇴근길 교통체증 단골 구간을 노선 삼고 있는 것이었다. 한강 다리를 건너기도 전에 막히는 통에 늦을 것만 같은 예감이 둘을 엄습했다. “미안, 아침이라고 해도 이렇게 심할 줄은 몰랐다.” 이규가 멋쩍게 말했다. 종수는 창가에 고개를 괴었다.

 

4월 초에도 히터를 틀어대는 통에 공기가 답답했다. 계절감을 잃어가는 지구와 함께 어떤 사람들도 자신이 무슨 절기를 살아가고 있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종수가 생각하기로는 대표적인 예가 새벽부터 버스를 몰아대는 기사였다. 얼굴이 파랗게 질린 것을 보고 이규가 괜찮으냐고 물었다. 종수는 가볍게 손사래를 쳤지만, 곧바로 올라오는 토기에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차라리 잠들면 나을 것 같아서 눈을 감았더니 시야를 차단하자마자 다른 감각들이 날뛰었다. 그날 서울 출근길이 이렇게 소란스럽다는 점과 사람들한테서 그렇게 다양한 냄새가 날 수 있다는 걸 그날 처음으로 깨달았다. 크게 어디 나갈 일 없이 학교와 체육관을 반복하는 일상을 살아왔고, 어쩌다 멀리 나가도 학교 소유의 대형 버스만 타고 오간 종수로서는 낯선 타인의 옷에서 나는 된장찌개 냄새는 충격이었다. 이규도 코를 킁킁거리다가 종수를 돌아보고 기댈래? 라고 물었다. 종수는 처음에 거절하려고 했으나, 그건 농구 코트 위를 지배하는 사내 녀석들의 쿰쿰한 땀 냄새와는 차원이 여러모로 달랐다. 끝내 종수는 고개를 돌려 이규의 어깨와 고무 시트 사이에 코를 박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이규에게서는 공용샤워실에 대용량으로 쌓아둔 세신 용품 특유의 냄새가 아닌 다른 향이 났다. 아침에 먹은 시리얼과 우유 향이 달큼하게 올라온다. 이규가 입술을 얕게 말아 물다가 느슨하게 자세를 고쳐 앉고는 네가 된장찌개를 좀 안 먹니. 라고 농담을 했다.

“씨…. 개소리하지 마.” 종수가 미간을 구겼다.

“어허, 개소리라니. 우린 장도의 문하생으로 언제든지 말을 바르게 해야 한다고.”

“무슨 소리야. 그게…… 아, 헛소리하지 마. 된장찌개 냄새랑 편식이 무슨 상관이라고.”

규는 가끔 언제부터인가 이런 알 수 없는 말로 자신을 어르고 달래듯 굴었는데, 머리가 아픈 와중에 그런 소리를 들으니 골이 울렸다. 이상한 놈. 이상한 녀석. 더 이상한 건 그런 말을 듣고 나면 두 번 다신 이규가 한 말을 엇나가지 못하는 자신이다. 지적받은 이후 비속어 대신 나름대로 순화된 단어를 골라내는 종수가 재미있는지 규가 종수의 옆얼굴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주면서 가볍게 웃었다. 종수는 규의 손을 쳐낼 힘도 없었다. 언젠가 본 과학 저널에서 코가 인간의 감각 기관 중 가장 예민해서 한 가지 자극을 수용 치 이상으로 받으면 일시적으로 마비되는 증상을 보인다고 했는데, 종수의 코는 그럴 줄도 모르고 시내버스가 달리는 내내 속을 뒤집었다.

 

에버랜드로 가는 직행버스로 갈아탔을 때는 예정된 시각을 한참 지난 후였다. 결국 겨우 판교나들목을 지날 때쯤 지각이 확정된 것 아니겠는가. 아차 싶은 이규가 초조하게 휴대전화를 들여다봤다. 이규가 입술을 안쪽으로 말고 물었다가 숨을 작고 길게 내쉬었다. 종수는 차멀미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버스가 이규의 속도 모르고 전대3리를 막 지나 종점인 에버랜드를 향해 간다. 약 두 시간 삼십 분짜리 여정이 겨우 10분 남았을 무렵 이규는 휴대전화 화면을 스물세 번째로 확인했다. “왜 연락이 없지….” 이규가 중얼거렸다. 종수가 차창에 머리를 박은 채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냥….” 눈을 뜨면 토할 것 같았고 눈을 감으면 두통이 찌릿하게 올라왔다. 될 수 있는 대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편이 좋았지만, 묻는 말을 그냥 흘려들을 성미가 되지는 못했다. 종수가 앓는 목소리로 느리게 말을 이었다.

“그냥 늦는가보다……, 하는 거겠지.”

“……그런가.”

이규의 흉곽이 유산소 운동을 하는 것처럼 크게 부풀었다가 천천히 내려앉았다. 이규 말로는 주화입마를 예방하는 운심법 중 하나로, 깊은 호흡을 단전까지 운용해 온몸의 기를 풀어 심공을 다스리는 방법이라고 했었는데 종수가 보기에는 그냥 심호흡이었다. 마을 어귀에 다다른 차가 비틀거린다. 과속방지턱을 거침없이 넘는 차체가 크게 흔들렸다. 이규가 흔들리는 차창에 기댄 종수의 머리통을 조심스럽게 감싸 끌어당겼다. 종수가 눈을 크게 뜨고 이규를 옆얼굴을 쳐다봤다. 이규는 여전히 종수의 머리통을 감싼 채로 화면을 두드린다. 규의 표정은 여전히 심각했다. 정신이 다른 곳에 팔려있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서 무심하게 챙겨주는 행위. 종수가 생각하는 이규의 의외인 부분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무심하고 익숙한 다정. 그건 천천히 넘쳐 발등을 적시는 목욕물 같았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도록 이런 식으로 구성된 친밀함이 밀려들어 흐른다. 엉망진창인 상태를 파고들어 어떻게든 바닥부터 적시고 본다. 종수는 그걸 막을 새도 없다. 그저 이규가 가진 무수한 속성 중 하나의 구심력에 종수는 푹푹 속이 파일 뿐이다.

종수가 잠자코 이규의 손길을 따라 그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곁눈질로 본 창밖의 풍경이 봄을 맞아 시시각각 변한다. 푸릇푸릇하게 싹이 돋아난 나무에서 키가 자라지 못한 벼, 비닐하우스, 회색 아스팔트, 초목과 도로를 따라 가장자리에 심어진 무수한 벚꽃. 평일 시골길에서 본 벚나무 길은 서울의 것과 느낌이 달랐다. 한적한 거리가 주는 특유의 고즈넉한 느낌이 있었다. 도로에 깔린 꽃잎은 눈보다 채도가 높았고, 훨씬 가벼워서 버스 바퀴가 지나갈 때마다 들썩거리면서 일어났다가 흩날리며 가라앉는다. 버스가 굴곡진 길을 원만하게 돌기 위해 속도를 줄였다. 몸이 이규를 짓누를 정도로 바짝 기울었다. 종수는 관성에 저항하지 않았다. 이대로…… 그대로……. 신기하게 푹 잘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종수의 정신이 가수면 상태로 접어들 때 이규가 탄성을 질렀다. 하마터면 욕을 할 뻔했다. 종수가 이규의 옆구리를 찔렀다.

“뭔데.”

이규가 비장한 목소리로 응답한다. 놀라지 말고 들어. 꼭 그렇게 말하려는 듯 목울대가 움직이는 게 보일 정도로 크게 침을 삼키고 더듬더듬 말했다. “……종수 그게, 롯데월드였다네.”

“뭐가?”

“……소풍 장소가.”

“뭐?”

이번에는 종수의 비명 같은 외침과 함께 버스가 완전히 정차했다. 시선이 순식간에 종수에게 꽂혔다가 떨어진다. 사람들이 하나둘 빠져나가는 소리가 바닥이 흔들릴 만큼 울렸다. 파란색 차광 테이프 너머로 우뚝 솟은 에버랜드 마크가 번쩍거렸다. 사람들이 어느 정도 빠져나간 5002A번 버스 2층 구석 자리에 앉은 종수는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둔탁한 울렁거림으로 완전히 창백해진 채였고 이규는 당혹스러움으로 얼굴을 시퍼렇게 물든 채였다. 종수는 이 상황이 지나치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수습할 새도 없고 수습할 길도 없다. 농구 경기로 치자면 4쿼터 초반인데 30점 차이로 처절하게 발리는 와중에 팀 전체 파울이 4개인 상황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가비지타임이 올락말락 할 때. 물론 종수는 농구공을 손에 잡은 이래로 그런 상황을 좀처럼 겪어본 적이 없다. 대충 가지고 있는 상식을 동원해 ‘망했다’라는 말이 나올만한 상황을 가정하기는 했지만, 완전히 공감하지는 못하고 막연함만 들었다. 그것이 되려 종수를 차분하게 만들었다.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덩크가 없으면 레이업을 하면 되고…. 낙오되었으니 우리는 둘이서…. 아. 종수가 손을 뻗어 이규의 머리 위에 얹어진 캡모자를 툭 쳤다. “그래서?”

이규가 어물거리면서 종수의 말에 대답하는 것을 유보한다. 종수는 기다리지 않고 재차 묻는다. “담임한테 말했어?”

“아니 반장한테.”

“…그럼 된 거 아니야? 연락하겠지.” 대한민국의 필수 교육 과정에 의한 공교육 단계를 철저하게 밟아왔지만, 종수를 구성하고 있는 속성은 그런 것과 거리가 멀었다. 학급, 담임, 반장…. 무언가를 담당한다는 것, 공부를 한다는 것. 교실에 앉아서 흘러가는 시간에 떠밀려 시험을 보고 수행평가를 치르는 것. 말 그대로 ’농구 키드‘의 삶을 살아와서 그런지 그는 일련의 사고가 모두 꿈처럼 느껴졌다. “어, 그래도….” 이규가 모자를 벗고 부채질을 한다. 규의 뺨과 귀가 붉었다. 버스 기사가 분실물을 확인하기 위해 계단을 오르다 말고 둘을 빤히 쳐다본다. 선택을 기다려주는 것처럼 보였으나 그의 손에 들린 간이 빗자루가 곧 떨어질 축객령을 암시하는 듯싶었다. 바깥에서 들리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마냥 아득한 울림으로 전해지고, 멀리서부터 넓게 울려 퍼지는 음원이 영원과 환상을 종수의 귀에 반복해서 불어넣었다. 가사가 완벽하게 들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수년 동안 꾸준히 여러 매체에서 흘러나왔다 그 노래는 멜로디의 존재만으로도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그 힘이 자리에서 한둘씩 일어날 준비를 하던 사람들의 얼굴들. 그 얼굴에 몽롱한 환상과 기대감을 깃들게 했다. 종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유년부터 회전목마, 롤러코스터, 범퍼카보다는 드리블 연습용 고깔, 바닥에 붙여진 라인 테이프, 농구공에 더 관심을 가졌던 덕분에 시엠송의 마법이 자신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것 같지 않았다. 종수가 이규의 팔꿈치를 잡고 끌었다. “우선…….” 잠실에 박혀있는 담임도 어떻게 손쓸 방도는 없을 것이다. 종수가 드물게 이규보다 먼저 결론을 냈다. “내리자.”

여러 사람의 숨과 화장품 냄새가 뒤섞인 채로 정체된 공기를 벗어난다. 차가운 기운이 종수를 맞이한다. 작은 정류장 가장자리를 둘러싸고 있는 보도블록을 따라가면 돌계단이 나왔다. 돌계단 위에는 머리를 땋은 직원이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손을 흔들면서 사람들을 안내한다. 세상이 온통 희고 말간 분홍빛이다. 사람들이 휴대전화를 켜 버튼을 누르고 찰칵 소리를 내면서 사진을 찍는다. 놀이공원으로 향하거나 외각의 간이 정류장에 서서 ’호암 미술관 셔틀버스’라고 적혀진 정류장 표를 손가락으로 더듬는다. 종수와 이규만 못 박힌 사람처럼 우뚝 서 있었다. 종수가 이규를 돌아봤다. 진동 소리가 들렸다. 규가 손바닥을 비비고 바지춤에 문지르더니 잠시 다녀오겠다고 한다. 그러고서 하는 일이라고는 몇 발자국 떨어져서 휴대전화를 귀에 바짝 붙이고 누군가와 통화하는 것이다. 종수는 이 상황이 우스웠다.

“네…. 아, 선생님. 그러니까요. 저희가 전달을 잘못 받았나 봐요. 방금 도착했어요.” 바닥에 떨어진 꽃잎을 발 코로 문지르면서 이규를 기다리는 것이 지루해진 종수가 기척 없이 이규의 옆에 바짝 붙는다. ‘왜?’ 뻐끔거리면서 물어봤다. 이규가 몸을 수그려 종수 옆을 빠져나가 멀어진다. 두 발자국 정도 멀어지는 움직임이 꼭 일대일을 할 때 대치 상황을 피하려고 진입 방향을 틀어버리는 것처럼 부드러웠다. 종수가 미간을 구긴다. 이규가 손을 쥐었다가 핀다. 아기가 어쩔 줄 몰라 주먹을 말았다가 피는 것을 반복하는 것처럼. “정신없네. 잠깐만, 잠시만요. 잠실역까지 한 시간 반 정도 걸려요. 네. 아직 매표소로 들어가지는 않았어요. 정류장이에요. 그럼, 네. 그때까지는 갈 수 있어요.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저희도 확인 못 했어요. 네. 버스 타면 연락할게요.”

통화가 마무리되는 듯싶었으나 규는 여전히 곤란한 얼굴로 웃었다. 종수는 자신이 어떤 상황에서는 인내심을 통 발휘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새삼 감탄하면서도 규에게 재차 물었다. “뭐라셔?”

이규가 손바닥을 종수에게 보였다가 검지를 세워 입술 위를 지긋하게 누른다. 이런 상황에서도 쟤는…. 종수가 입을 비죽였다.

 

자초지종을 듣고 보니 최종적으로 결정된 체험학습 장소는 롯데월드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캐리비안베이로 정했다가 물놀이를 하기에는 지나치게 시기가 이르다는 이유로 에버랜드로 바꿨고, 교통적인 측면으로 항의 메시지를 다수 받은 후에 안내문 배부가 전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가까운 잠실의 놀이공원으로 장소가 변경된 건데, 일이 틀어진 건 마지막 부분부터였다.

종수와 이규는 반에서 존재감이 거의 없었다. 그들의 덩치와 학생들의 선망 여부와는 또 다른 의미였다. 소속이 남다른 탓이다. 학교 일정에 귀속되는 편이기보다는 전국구 단위로 진행되는 시합을 따라 움직이기에 대부분 어디에서나 간과되기 쉬웠다. 들었겠지, 누군가 알려줬겠지. 그런 방관에서 오는 무심함. 그런 세월을 3년하고도 더 보낸 덕분에 난생처음 겪는 이 상황이 마냥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선생님이 한 시 반까지 잠실로 올 수 있냐는데? 더 빨리 올 수 있으면 좋고. 바로 오는 버스 타는 게 좋을 것 같아…. 속은 좀 괜찮아?”

“어……. 좀.”

“다음 버스가…… 삼십 분 뒤에 온다. 조금 걸을래?”

“됐어. 뭘 굳이.”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까. 응?”

그렇게 말하는 이규의 표정은 눈썹이 살짝 팔자로 내려간 상태였고 입은 살짝 벌어진 채 끝이 처졌다. 유인물에 코치의 성명까지 적고 여기까지 종수를 안내한 행동에 죄책감을 느끼는 건가? 얼굴에 비죽 소름이 오소소 돋더니 간지러웠다. 이규가 눈썹을 들썩인다. 종수는 이것을 정정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따지고 보면 이규의 계획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함께 버스를 탄 건 종수였고, 이규가 중간중간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손을 붙들고 인파 사이를 비집으면서 버스에서 내릴 때 아무 불평이나 불만은 물론. 의구심 없이 따른 것도 자신이었다. 말도 안 되지만, 종수는 이규의 말에 숨겨진 불안감의 정체와 함의를 눈치챈 것과 굳이 꼬집어서 알리는 것이 별개의 일처럼 느껴졌다. 그러니까…. 이규가 조금 더 ‘이런’ 상태를 유지하도록 가만히 두고 싶었다. 종수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먼저 걸음을 옮겼다.

돌아가는 버스를 타기까지 30분밖에 남지 않는 터라, 구경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돌계단 너머 에버랜드 입구 인근은 대부분 텅 빈 주차장뿐이고, 구경거리라고는 고속버스 밖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는 중년 남성들 무리나, 줄을 서서 입장하려는 사람들이 전부였다. 이규가 지평선처럼 하늘과 땅의 경계면에 튀어나온 궁전 형태 구조물 위로 놀이기구가 솟았다가 내려갈 때마다 눈을 빛냈다. 그러고서는 긴장이 풀린 목소리로 종수야 이거 봐봐. 저거 재미있어 보이지 않아? 하고 너무 멀어서 희미한 점에 가까운 기구를 손가락으로 하나씩 콕콕 가리켰다.

종수는 이규가 그럴 때마다 괜히 뒤로 빠져 이규의 팔꿈치 소매를 잡거나 좌우로 자리를 바꾸면서 산책했다. 한참 그러다가 이규가 종수에게 붙어 너는 어때? 라고 말을 걸고 나서야 손을 푼다. 의도치 않게 종수가 이규를 붙들었다가 놓는 것을 반복하며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모양새가 되었다.

이규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튈 때마다 썩 유쾌하지 않았다. 이규도 자신과 같이 회전목마, 롤러코스터, 범퍼카보다 농구공이나 코트와 조금 더 친했던 어린 시절을 보냈는지, 종수는 규의 유년 시절에 대해 들은 기억이 없다. 그런 것을 좋아하는 애로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종수가 혀로 입을 축이다가 물었다.

“타고 싶냐?”

이규의 고개가 능선을 따라 잠시 돌아가다가 다시 종수에게 박혔다. “아니? 물론 재미있기야 하겠지만, 정신 없는 건 싫어.”

그럼 정신 있는 건 뭔데. 가끔 나한테 어휴 정신없어, 라고 말하고는 하잖아. 그것도 싫어서 하는 말인 거냐. 그런 생각을 했던 거야? 종수는 갑작스럽게 떠오른 질문 하나 제대로 물어보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한참 걷다가 이규가 왜 그래? 라고 말을 걸었을 때도 눈으로 팩 쏘아붙이듯이 쳐다봤다가 머리를 털었다. 하루 종일 ‘이런’ 상태로 살아보라지. 너도 모르는 사이에 신경을 나에게로 쏟고…. 종수가 발을 크게 구르며 이규로부터 멀어졌다. 붙어있으면 쓸데없는 것을 여럿 물어볼 것 같았다. 이규가 뒤에서 이마를 붙들고 한숨을 쉬었다.

 

둘은 20분 내내 걷고 남은 5분은 다시 정류장으로 돌아가는 데 할애했다. 서로 말도 하지 않고 하염없이 걷다가 시간이 애매해지는 바람에 다소 허둥거렸다. 먼저 종수를 끌어당긴 건 이규였다. 정류장에 쪼그려 앉아서 숨을 가쁘게 내쉬다가 가방에서 챙겨온 생수를 뚜껑을 열고 물을 마시려는데, 이규가 종수의 생수를 가지고 가더니 가방에서 빨대를 꺼내 꽂아주었다. 그래도 우리 나쁘지 않았지? 이규가 그런 얼굴로 종수를 쳐다본다. 종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빨대를 건드렸다. 어디로든 들어가지 못하고 표류하는 기분. 종수는 그것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가끔은 이렇게 방향을 모르는 채로 시간을 보내는 것도 괜찮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정말로 이런 것이 필요할지도 모르고…. 꽁한 마음은 이규가 대뜸 팔을 잡으면서 날아가고 말았다. 하지만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종수가 미간을 찌푸렸다. 손목으로 원을 그리듯 생수병을 느리게 흔들었다. 빨대가 뚝딱이면서 병 입구 가장자리를 탁탁 친다.

“속은 괜찮지?”

“……어. 이제 괜찮아.”

“응.”

이규는 종수가 들고 있던 병을 가지고 갔다. 빨대 앞부분이 손가락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히 잡고 반으로 접어 입구 안쪽으로 말아 넣은 다음에 뚜껑을 돌렸다. 종수의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진 빨대가 절대 빠져나가지 않도록 몇 번이고 힘을 줘서 단단히 돌려 잠근다. 가방 깊숙한 곳에 병을 넣고 가방 지퍼를 올리고 나서야 규가 다시 종수를 돌아본다. 더 필요한 건 없어? 확인하듯이 물어보는 눈을 응시하던 종수가 얼굴을 와락 구긴다.

“야, 나 이제 머리 안 아프다고.”

이규가 퉁명스러운 어조로 대꾸했다.

“알아. 너…. 내가 팔 잡을 때 다 풀렸잖아.”

“뭐?” 종수가 이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규가 손등으로 종수의 뺨을 벅벅 문지르듯 쓰다듬었다. 이규가 손에 힘을 줬다. 볼살이 거칠게 밀려 올라가는 느낌에 짜증 낼 타이밍을 놓치고 가만히 손길을 받아내기만 했다. 이규가 자신이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종수의 머리 위에 얹고 힘을 줘서 눌렀다. 그러고서는 종수의 앞머리가 눈을 찌르지 않도록 옆으로 살살 넘기다가 안 되겠는지 슬쩍 들어 올려 머리카락을 완전히 뒤로 넘긴 다음 모자를 푹 씌우는 것이었다.

“아씨, 야.”

종수가 팔꿈치를 들어 이규의 손을 쳐냈다. 그러나 이미 모자는 단단히 종수의 머리에 씌워진 상태였다. 이규가 손을 완전히 거뒀지만 부드럽고 요철이 느껴지는 운동부의 손. 섬세한 작업과는 거리가 멀고 서툴렀던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휘감았던 감촉이 남아 얼굴을 화끈거리게 했다.

쏴아아……. 순간 바람 소리인지 사람들의 비명인지 모를 것이 강하게 불어왔다. 그리고 코까지 찡긋거리는 이규와 눈이 마주쳤는데 막 구름을 벗어난 해가 이규 등 뒤로 역광을 만들어내 눈이 굉장히 부셨고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흐릿하게 부유하는 기억을 되살려보면, 꽃바람이 세차게 휘몰아친 것 같기도 했다. 27살의 종수는 그날의 기억이 모두 뚜렷하게 떠오르지는 않았다. 다만, 그때 20분 내내 에버랜드 인근만 빙글빙글 돌면서 벚꽃잎을 내리 맞다가 타게 된 광역버스는 아침에 탔던 2층 버스와 비교도 되지 않게 구식이었지만, 편했다. 유독 탈탈거리는 데에다가 올 때처럼 맨 뒷자리에 앉아 버스 엔진의 진동을 온몸으로 받아냈긴 했지만, 이규의 어깨에 기댄 채로 기분 좋게 햇살을 맞으며 반쯤 졸면서 갈 수 있었다. 힘껏 속도를 올린 버스가 과속방지턱 위를 지나갈 때마다 크게 붕 뜰 때마다 규가 자신과 겹친 팔을 엮어 안쪽으로 끌어당겼던 일. 3년 동안 원정을 다니면서 이규의 옆자리를 무수히 차지하는 동안 두 번 다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것만은 확실했다.

하필 종례 시간에 바뀐 체험학습 장소를 전달받지 못해서 낙오된 채 이규와 단둘이 도착한 평일의 에버랜드와 벚꽃 외에는 아무도 아무것도 없고, 외딴섬에 떨어진 기분이 들었던 17살의 어느 봄. 종수를 아는 사람은 이규밖에 없고 이규를 아는 사람은 종수밖에 없던 순간. 바퀴가 도로를 굴러가는 소음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던 때. 자신의 머리가 유리창을 두드리자 귀까지 부드럽게 감싸 자신의 어깨 위에 얹었던 이규의 온기와 반쯤 차양 처리가 된 창문을 통과한 부드러운 햇빛이 눈꺼풀에 내려앉았고, 미세한 틈을 파고들어 달려든 찬 바람이나 섬유유연제 냄새가 가득한 이규의 사복 냄새가 어우러진 채 처음으로 달콤한 수면을 맛본 일만이…….

10년도 더 지난 그 시절이 생생하게 퍼 올려질 때 다소 충동적으로 옷을 갈아입고 나섰으며, 그 기억이 불러오는 잠에 취하기 위해 유랑한다. 종수가 제법 아날로그적으로 느껴지는 디지털 전광판을 훑었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운영 중인 버스가 많지 않았다. 안내 데스크에 난 작은 창을 두드리자 숙직 중인 직원이 몸을 떨면서 뒤를 돌았다. 안내 직원이 가물가물한 정신을 깨운 불청객을 아크릴 칸막이 너머로 노려봤다. 이곳에 몇 번 왔지만, 종수로서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자신을 낯설게 쳐다보고 있는 남자를 보고 직원이 아무렇지 않은 말투로 말한다.

미영 씨는 비번이라서요.

직원의 적대가 어디로부터 근원하였는지 알 것 같았다. 인터넷이 발달한 세상이지 않은가. 휴대전화 화면 위로 손가락을 몇 번 움직이기만 해도 표를 살 수 있는데, 종수처럼 귀찮은 걸 감수하는 사람들이 있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카드를 주고받고 카드를 긁게 만들고 종이 영수증으로 된 표를 받아내는 등 완벽하게 자동화된 사회에서 쉬고 있는 직원을 불필요한 절차로 끄집어내고는 한다. 직원의 얼굴을 꽉 조이고 있는 마스크가 불뚝거린다. 종수는 인내했다. 가뿐한 기분으로 길에 오르고 싶었다. 직원이 메뉴얼을 읊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가 어깨를 움츠리고 눈을 깔았다.

필요하신 거라도? 지금 남아있는 표가…. 어디로 가시는 건데요? 예? 뭐든요? 지금 당장 탈 수 있는 거라면 뭐든 된다고요……. 삼십 분 뒤에 차가 있긴 해요. 김해 가는 거랑 저기 통영도 있고. 자리는 맨 뒷자리로요? 왕복이시죠? 아 편도라고요? 음. 결제는…… 카드 받았습니다. 영수증은 카카오톡으로 보내드릴까요? 네. 결제되셨습니다. 카드 제거해주세요.

직원은 종수에게 잔뜩 겁을 먹은 것 같았지만, 종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저 반쯤 감긴 눈으로 직원의 안내에 따라 고개를 주억거리고 꼬박꼬박 대답했다. 직원이 표에 딸린 영수증 하단의 취소 수수료 규정과 금액을 빨간색 펜으로 밑줄 긋고 다시 상단에 기재된 시간에 동그라미를 치다 말았다.

…그런데요. 이 시간에 왜 김해입니까? 그가 궁금증을 숨기지 않고 물었다. 겨울이라면 동해가 더 파랗고 예쁘거든요. 직원이 변명하듯 덧붙인다. 종수가 자신의 뒤를 곁눈질했다. 아무도 없다. 표 없이 앱도 켜지 않고 이 시간에 고속버스터미널을 찾은 건 아무래도 자신 하나밖에 없는 것 같다. 직원은 눈을 가늘게 뜨고 종수만을 응시한다. 종수가 눈을 굴렸다.

…그런 게 있어야 합니까?

네? 직원이 어안 벙벙한 낯으로 되묻는다. 특이한 청년이네. 그냥 가고 싶어서 가는 거라면, 요즘은 날이 따듯해서 아직 단풍 구경하기 좋거든요. 안내직원의 표정이 바뀌었다. 경계심이 흐릿한 낯을 종수가 내려다본다.

김해에 왜 평지못 둘레길이라는 데가 있거든. 은해사도 괜찮고요. 연지공원도 많이 가던데.

시뻘건 온풍기가 삐거덕거리면서 머리를 돌린다. 직원의 얼굴이 순간 붉은빛으로 물든다. 그가 잔기침한 다음 혀로 입술을 빠르게 축였다. 올해 한강 가보셨어요? 3월인데도 벚꽃이 만개했잖아요. 그런데 가을은 또 늦게 찾아왔다고 하니, 라니냐 때문이래요. 바닷물이 따듯해져서…….

……그래요?

무수한 시행착오의 역사에 탈 것이면 무엇이든 상관없을 것이라고 착각한 시간이 있다. 그때에도 종수의 선택은 고속버스였다. 택시는 운전자와 탑승자 간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웠고 시내버스는 시끄러웠다. 다음 주에는 다른 요일에 올까…. 이전 직원이 말이 없고 좋았는데.

하지만 밤은 자신이 원하는 요일에 자신을 이곳으로 인도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줄곳 종수의 편이 아니었다. 다음에도 이 직원을 만날 것 같았다. 종수는 무성의한 얼굴로 표를 가져가 지갑에 넣는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직원의 어깨가 위로 튕겨 올라간다. 탑승까지 30분이 남았다. 종수는 안내 데스크를 떠나기 전 앞으로 구면이 될 이에게 나름대로 에의를 갖추기 위해 고개를 까닥였다.

 

제법 으슥한 시간대여도 서울의 고속버스터미널은 여전히 교통의 허브이긴 했다. 아무도 없을 것 같다가도 눈을 가늘게 뜨고 보면 어두운색 패딩이나 코트를 입은 덩어리들이 꿈틀거린다. 먼 길을 오가야 하는 행상인들이나 아직은 KTX나 SRT보다 버스가 익숙한 젊은이들. 노모나 노부. 혹은 그저 그런 노인들과 이 시간에 왜 버스를 타는지 사연이 전혀 궁금하지 않은 중장년들….

그들 대부분은 불이 꺼진 상점을 기웃거리다가 편의점에서 달걀 두 알이 들어있는 팩과 박카스 따위를 구매해 맞이방에서 야금야금 먹는 중이었다. 종수도 차림새가 가볍고 짐이 없으며 편의점을 서성거리지 않는다는 점을 제외하면 그들과 행색이 다르지 않다.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처럼 정신을 서울 바닥 어딘가에 붙이기보다는 국도나 도로 표지판을 떠올리며 일정한 비율로 축척이 된 지도의 길을 따라 흘려보내는 것이다. 그저 그렇게 행려자들의 삶을 살아간다. 이제는 관습이 된 불면으로부터 행하는 주기적인 피탈에 어째서, 왜. 같은 질문이 필요 없는 행동도 있지 않을까.

버스에 몸을 싣는다. 다양한 교통수단이 발달한 요즘 버스를 타기 위한 행렬은 짧고, 기사의 검표는 꼼꼼하지 않다. 지류 표가 있는 경우 영수증만 보여주면 된다. 기사가 표를 반으로 꺾고 영수증 귀퉁이를 자른다. 약간의 생활 소음이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버스 안은 적요하다. 종수는 맨 뒷자리 오른쪽 창가에 앉는다.

좌석에 앉기 전 고개를 완전히 수그렸고, 높이 조절을 못 해 정수리를 천장에 박았을 때 이를 악물었어야만 했다. 버스가 몇 번째일지 모르는 요금소를 지나 화물선과 승용차 몇 대뿐인 국도를 과속한다. 일몰 시간이 되어 나타난 해가 어스름한 푸른 빛으로 지평선을 밝힌다. 따듯하고 강렬하게 남은 기억을 재현하기 위해서 이것저것 재고 따지는 척 당위성을 부여하는 행위에는 되새기고 싶은 오직 추억만이 깃들어 있으므로. 종수는 한나절 왕복하면 끝나는 이 짧은 여행에 이규를 동참시킨다면, 걔는 어떨까 ‘가정’한다. 두통을 따라 서서히 예민하고 까칠한 오감이 올라온다. 속이 울렁거렸다. 평소처럼 눈을 감는 대신 휴대전화 옆면을 만지작거린다. 불이 켜진 화면이 점멸했다가 다시 빛을 발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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