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리 너머의 종수가 손끝으로 창을 톡톡 건드렸다. “저기.” 규는 노트패드에서 눈길을 들었다. 종수의 무기물처럼 새까만 눈동자와 마주한다. 종수와 그를 가로막고 있는 십오 센티미터 두께의 유리를 창이라고 부르는 게 가당키는 한지 규는 의문이었다. 실험 공간을 연구대상이 사는 테라리움과 연구자가 그를 관찰하는 사무실로 양분하는 유리는 창보다는 벽이라고 부
이을 예정은 없지만 백업은 해둠… 규는 말하자면 종이책 파였다. 독서란 적당히 거친 종이에 눌러 쓰인 글자를 음미하며, 오른손으로는 다음 페이지를 기대하며 살며시 건드리는 동시에 왼손으로는 이미 읽은 페이지를 추억하며 귀퉁이를 만지작거리는 게 맛이다. 촉감을 통해 비로소 이야기는 온도를 갖고 살아난다. 번거롭게 편집하고 인쇄하는 전통이 아직도 그럭저럭 인
히트체크 (2024.1.25) 최종수가 경기에 나가지 못한 것은 고등학교 삼 년을 통틀어 두 번이다. 1학년 때는 도진고와 연습경기를 하다 공중에서 저쪽 센터와 부딪혀 어깨에 가벼운 부상을 입었다. 입학한 지 두 달이 채 안 지났을 때였다. 2주간 쉬는 중에 치러진 무준고와의 연습경기에서 종수는 벤치를 지켰다. 또 한 번은 2학년 때다. 쌍용기 대회, 무
6. “Home” “린, 23은 아니야.” 샴페인, 보드카, 위스키. 낭자한 핏물의 성분이었다. 어두운 클럽 벽면과 기둥으로 이어진 파노라마 LED 라인이 붉어졌다가 하얗게 빛났고 천장에서 쏘아지는 푸른 보랏빛의 사이키 레이저가 어지럽게 번쩍였다. 경직되기 시작한 시체의 안구에 빛이 돌아왔다 꺼졌다. 시끄러운 락 음악에 맞물리던 총성은 잦아들었다. 지금
0. “Pilot” 달큼한 브랜디 향이 소름끼쳤다. 이규는 묶인 팔을 가능한 헤드에 붙였다. 교차된 팔목은 테이프로 칭칭 감겼고 끝에 걸린 수갑이 침대와 연결되어 있었다. 쓸린 피부 위로 접착제와 쇠고랑이 느껴졌다. 달그락. 멀리서 코냑을 비우던 그가 잔을 내려놨다. 얇은 옷자락이 서로 맞닿을 때마다 소리가 났다. 정돈된 몸가짐은 기세와 달리 거칠지 않았
시기상 베트남의 우기는 완벽하게 지났지만, 그 말이 비가 완전히 오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바다와 인접한 곳이 다 그렇듯 이곳의 날씨 역시 변화무쌍했다. 시시때때로 여우비가 내리는가 하면 비가 오지 않는 날에는 희뿌연 안개가 자세를 낮추고 온통 축축한 녹림을 유영했다. 녹림. 그것은 나흘 내내 그들을 미치도록 만들었다. 사이공 최남단에 위
가로등 몇 대가 새벽녘을 어스름하게 밝힌다. 강변을 따라 가지런하게 심어진 초목은 북반구에 있는 나라 대다수가 지금 어떤 계절을 보내고 있는 줄도 모르고 마냥 푸릇푸릇하다. 땀으로 잔뜩 절은 머리카락에 열대야가 송골 맺혔다. 종수가 축축한 머리카락을 위로 쓸어올렸다가 정수리 부근에서 털었다. 땀방울이 사방으로 튄다. 기후 위기를 맞은 11월 중순 서
이규랑 같이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일도 된다니까. 그런 소리를 많이 들었다. 운동을 시작한 이래로 수업 시간에 자리를 자주 비우게 되어 발표 수업이 있을 때마다 큰 역할을 맡지 못하지만, 발표 주제를 ‘사다리 타기’ 따위로 결정할 때만큼은 반드시 일선으로 나서서 조원들이 바라는 결과를 얻어냈다. 가위바위보에서 지는 일도 거의 없었으며 시험 시간 전에
이규와 종수의 집 중간 되는 지점에 위치한 강변은 산책로로 아주 잘 꾸며진 곳이었다. 잘 깔린 보도블록 안쪽과 바깥쪽에는 가장자리가 희게 칠해진 붉은 러닝 트랙이 강이 흐르는 둘레를 따라 나있었고, 그 길을 걷다 보면 큰 공원이 나온다. 저녁이 되어서도 산책을 하거나 강아지를 데리고 나온 마을 주민으로 붐비는 공원이더라도, 어스름한 밤만큼은 이규와 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