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파우스트

$23 파우스트 2

쫑규

쓰레기장 by 왕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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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Home”

“린, 23은 아니야.”

샴페인, 보드카, 위스키. 낭자한 핏물의 성분이었다. 어두운 클럽 벽면과 기둥으로 이어진 파노라마 LED 라인이 붉어졌다가 하얗게 빛났고 천장에서 쏘아지는 푸른 보랏빛의 사이키 레이저가 어지럽게 번쩍였다. 경직되기 시작한 시체의 안구에 빛이 돌아왔다 꺼졌다.

시끄러운 락 음악에 맞물리던 총성은 잦아들었다. 지금쯤 때아닌 살인 클럽에 대한 신고로 경찰 사무실은 마비되었겠으나 그들은 아마 갱생 불가능한 양아치들끼리 싸우다 전부 죽어버리길 빌며 출동하는 시늉만 하고 있을 거였다.

임승대는 총을 내렸다. 이규의 말을 따른 건 아니었다. 상완을 피로 적신 최종수가 권총을 왼손으로 잡고 그를 향해 뒤돌았기 때문이다.

이규는 간신히 한 번 더 그에게 방아쇠를 당기지 않을 수 있었다. 종수가 쏜 것은 감마가 아닌 안쪽 테이블 가까이 있던 경호원이었다. 쪼개진 두개골에서 골수가 멀리 튀었다.

잠시간 적막이 일었다.

“내 대신이라기엔 얼굴이 아쉽지 않나?”

직전까지 살의를 드러낸 임승대가 뻔뻔스레 놀랐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닥쳐, 개자식아.”

홧김에 경호원을 쏴버린 청부업자는 짓씹듯이 뱉어내며 일갈했다. 상체가 온통 피범벅인 무기상이 그릇에 든 얼음을 집어 와그작 깨물며 입안을 씻었다.

“멀쩡한 걸 보니 내 친구가 봐준 모양인데. 그러게 왜 애먼 사람을 쏴.”

규는 분수대에서 떨어지며 푹 젖은 블레이저를 벗는 척 시간을 벌었다. 소강 상태를 눈치챈 노수민이 다시 연락하겠다는 말을 남겼다. 이규는 대답하지 않았다. 티셔츠의 물을 짜내면서 인이어와 마이크를 부쉈다. 그는 긴장을 놓지 않고 대치 중인 둘에게로 다가갔다.

“지랄 말고 제대로 설명해. 이건 또 무슨 장난질인지.”

“성질 좀 죽여~ 제 명에 가야지.”

당장이라도 서로에게 둥근 쇠공을 박아줄 것만 같은 그들 사이로 규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총 놓고 얘기해.”

네 개의 눈이 이규에게 꽂혔다.

“일단 손님 내보내고 정리하자고.”

개를 진정시키듯 팔을 뻗은 이규는 탄환에 스쳐 옷 위로 붉은 자국을 그려내고 있는 최종수의 팔뚝을 힐긋 봤다.

“지혈도 할 겸.”

클럽 안에는 흐린 황색 조명만이 켜져 있었다. 정신 없이 몸을 흔들어대던 인파는 모조리 썰물처럼 빠져나간 이후였다. 그 성실한 바텐더도 무사히 돌아갔지만 아마 내일부터 출근하지 않을 것 같았다.

층고 높은 건물은 일반적인 4층 높이를 두 단계로 가르는 구조여서, 2층 내에서도 클럽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단상이 있었다. 장식용 그랜드 피아노와 전용 바, 큰 홀로그램 무늬 투명 테이블. 아크릴과 대리석, 플라스틱 살으로 된 가벽은 은사로 꾸며 공간을 분리했다. 

임승대는 쓸데없이 큼직한 소파에 앉아선 온더락 잔의 얼음을 씹고 있었다. 최종수가 그에게서 떨어져 피아노에 기대었다. 불붙지 않는 라이터를 수차례 켰다. 이규는 환자를 끌고 소파에 합석시키는 대신 구리선 녹일 때나 쓰던 판촉용 라이터로 불을 대줬다. 

빤히 보던 종수는 김이 빠진 기미로 꼬나문 연초를 바스라뜨렸다.

“입이 비싸네.”

규는 괘념치 않고 바 밑에서 주워온 응급 키트를 건반 덮개에 내려놨다.

“할 수 있지?”

“아니.”

이규의 눈썹이 삐딱해졌다. 최종수는 오른팔을 잡고 있던 제 왼손을 뗐다. 흥건한 피가 묻어나왔다. 규가 보기에도 저 팔로는 무리인 듯했다. 그가 눈을 맞춰오며 물음을 되돌렸다. ‘할 수 있지?’

“네가 도와달라 할 줄은 몰랐어.”

“그렇게 공손한 건 아니고.”

최종수는 건반대를 짚고 옻칠한 나뭇결을 따라 칠하며 손끝을 그었다. 이 중엔 제일 낫겠지.

“솜씨가 돼지잖아.”

라이터를 쥔 손에서 까득 소리가 났다. 규는 그 난리통에도, 그러니까 최종수가 멕시코 킬러의 가슴에 두 발, 머리에 한 발을 정확한 간격으로 박아 넣으면서도 자신을 보고 있었다는 게 어처구니 없었다.

“내 정보원이다, 종수.”

턱을 치키는 것으로 찡그릴 뻔한 인상을 숨긴 승대가 탁자에 거만히 발 올리며 말했다.

“오클랜드 쪽 알아봐줄 인력을 구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최종수는 승대 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듣고 있는지도 의심스러웠다. 이규는 곤란한 표정 짓지 않았다. 그는 바지춤에 손을 끼워 넣고 건반을 향해 눈을 내리뜨며 물었다.

“피아노 칠 줄 알아?”

이 효율적인 살인자는 불필요한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그의 시그니처는 명확했고 은유와 기교로 점철되어 있을지언정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여도 된단 의미였다.

“너랑 비슷해. 악보 읽는 걸 배우다 정육점에 취직하는 인생은 꽤 흔하거든.”

적어도 지난 몇 달 동안 좇아온 그 우아한 도축 기술자는 그랬다. 규는 신경 한구석을 갉아먹는 벌레의 울음소리가 기괴한 파이프오르간과 닮았다 생각했다. 거룩하시도다! 그가 들은 마지막 성가는 불타오르던 낡은 교회당이었다. 재는 재로, 먼지는 먼지로.

“여긴 미국이니까. 자유롭게 살아야지. 안 그래?”

족쇄 찬 세 남자는 익숙한 기만을 시향했다. 자유의 향기는 무취였으므로 맡아 본 적 없는 이들도 취한 척할 수 있었다. 이규는 구급함을 도로 들고 테이블로 향했다. 그는 돌아보지 않았지만 최종수가 따라올 것을 알았다.

“이거 내가 비켜줘야 할 분위기네.”

임승대는 태평히 일어나선 말했다. 세수하고 올 테니 볼 일 봐.

최종수는 느리게 점퍼를 벗었다. 티셔츠 소매는 이미 너덜너덜해서 간단히 찢겼다. 내의를 들춰 몸을 확인해 보려던 규는 속으로 혀를 찼다. 옆에 앉아 팔을 붙잡았다. 부러 망설임 보일 틈 없이 움켜쥐고 달라붙는 천을 뗐다. 이규는 호흡이 흐트러지지 않았는지 눈을 부자연스레 깜빡이고 있진 않는지 고민하지 않았다. 그럴 시기는 초저녁에 지났다. 정확히는 아주 옛날, 그 집에서 살아남아야 했을 때부터.

이규는 환부에 물을 부어 씻었다. 간격은 꽤 낯설었다. 멀어지려 할수록 더 가까이 붙는 경주마를 상대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 게임이 경마였더라도 돈을 잃는 쪽은 그가 아니었다. 이규는 트랙에 오를 생각이 없었다. 그는 어디까지나 완벽한 타인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키트를 열어 알코올과 처치 도구를 꺼내고 천으로 팔뚝을 묶었다. 그동안 종수는 상체를 숙인 그를 내내 지켜 보고 있었다. 규는 구호품을 뒤져 라텍스 장갑을 끼고 칼날이 꺾인 가위를 소독했다.

“따끔할 거야. 술만 빼고 아무거나 집중해 봐.”

“오클랜드?”

“좋아. 틴더 프로필이나 만들며 시간 때울 생각은 없나 보군.”

평생 이베이를 써본 적 없는 것 같은 킬러는 눈살을 찌푸렸다. 규는 그게 뭐냐는 눈빛을 무시했다.

“어, 다녀왔지. 오클랜드엔 어머니가 있어서.”

종수가 그의 머리 위에서 코웃음쳤다.

“그 부모가 몇이나 더 있는데.”

“필요한 만큼.”

푹 찔러 들어간 가위가 상처를 벌렸다. 그는 단번에 피부를 가르고 안을 긁어냈다.

걸쭉히 젖은 가위를 내팽개치며 조용해진 남자를 올려다보자 최종수는 통증을 참느라 가늘어진 숨을 뱉으며 시선을 맞대왔다. 어두운 그림자가 겹겹이 둥글게 똬리를 튼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붉은 피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이규는 잘린 부위를 모아 잡았다. 스테이플의 중심을 맞춘 뒤 말을 이었다. 의료 행위의 일환.

“그래서 내 고향은 LA야. 거긴 아무도 없거든.”

잘각. 살을 집는 소리가 섞였다. 철심이 좁다란 틈을 메웠다. 상지를 따라 건물 외벽 사다리 같은 무늬가 생겼다.

“⋯그게 왜 이유가 돼?”

탁자를 더듬어 붕대 끄트머리를 잡아챈 종수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중추 신경을 찔러대는 홧홧한 환부를 애써 무시하느라 음성은 완전히 날것이었다. 이규는 갑갑히 달라붙는 장갑을 벗었다.

“날 낳은 건 너무 많아. 일부는 한국에 있지. 더 얘기해 보자면, 너도 그렇지 않나?”

그는 붕대를 뺏어 왔다. 최종수는 허무하리만치 쉽게 헝겊 두루마리를 놓았다. 규는 이 남자가 언제든 제게 붕대를 내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걸 스치듯 깨달았다. 그는 속아주기로 했다. 서로가 원하는 바였다.

“누구나 자신을 완성하는 조각이 있어. 너나 나나 가족으로 충족될 수 있는 인생은 아니야. 약이나 섹스일 수도 있지만, 한 장소인 편이 여러모로 낫지. 집은 그런 거야.”

이규는 종수의 팔에 단단히 붕대를 감았다. “23. 이제 네 홈타운을 떠올려. 회복에 도움될 거다.”

“글쎄⋯ 없는데.”

최종수는 매우 쉽게 답했다.

“누가 방금 집이란 개념을 지워버려서.”

그 미아는 의미를 부여할 가치 없는 삶의 조각보를 들여다보며 말했고 규는 서비스 정신 투철한 지배인처럼 느긋하게 응접했다.

“고마워해도 돼.”

이규는 근원지를 잃고 갈 곳을 몰라 떠도는 습한 바람이 우스웠다. 작열하는 캘리포니아, 열대의 사막은 언제나 폭풍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새롭게 갖게 될 일만 남은 거니까.”

7. “Outlander”

이규는 난간 아래를 보았다. 소매를 걷어붙인 직원들이 시체를 끌고 있었다. 질질 끌려나가는 시신을 관찰하면 각각 팔뚝, 목, 허벅지. 찢긴 드레스 안에 문신이 보였다.

“취향이야?”

막 씻고 돌아온 임승대가 겉옷을 던져주며 물었다. 규는 쌍욕을 참으며 그의 레더 재킷에서 불룩 튀어나온 고가의 라이터를 빼들었다.

“오래 살고 싶으면 끊자.”

“뭘?”

승대는 섬세히 인각된 제 금장 라이터를 뻔히 보면서도 능글맞게 물었다. 이규는 눈썹을 찡그렸다.

“그 후진 농담.”

임승대는 겉보기와 달리 낮고 정제된 웃음소리를 흘렸다. 규는 라이터를 도로 주머니에 집어 넣고 외투를 걸쳤다. 물에 닿아 얼룩져 있던 상의가 가려졌다. 소매는 그리 남지 않았는데 기장이 넉넉히 내려왔다.

“일반적인 사이즈는 없어?”

“클럽에 둔 건 내 옷뿐이다. 쟨 이런 데 안 다니더라고.”

그가 눈짓으로 가리킨 최종수는 피 묻은 소파에 따분히 앉아 있었다. 승대는 입모양이 보이지 않게 고개를 기울여 작게 물었다.

“문신 알아보겠나? 이탈리아는 아닌 것 같은데.”

얼음과 보드카로 이루어진 그의 숨은 너무 차가웠다. 이규는 간질거리는 귀를 털고 싶었다.

“저건 멕시코야. 이 근처에선 본 적 없으니 400만 달러를 꿈에 그리며 여기까지 달려온 거지.”

규는 가늠자를 대체하는 시선으로 그를 훑었다.

“파티라니. 네 몸값을 자각하고 있긴 해? 덕분에 난 잊을래도 밀리언 달러가 아른거리는데⋯”

승대는 묘한 침묵을 지키더니 수염이 옅게 올라온 턱을 쓸다 떠올랐다는 듯이 가죽 파우치를 건넸다.

“아깐 쓰고 있었잖아?”

“카메라 아니었어. 부숴먹었지만.”

“흠⋯ 그런 뜻이 아니라.”

검은 파우치를 열자 안경이 당겨져 올라왔다. 이규는 옅은 올리브빛 크라운판토를 썼다. 굽은 브릿지와 눈썹 라인에 맞게 각진 얇은 테였다. 말거리를 뽑지 못하던 승대는 화두를 바꿨다. 밀담이 길어져서 좋을 게 없었다.

“오클랜드 상황은 어때?”

“5월까진 잠잠할 거야. 중요한 거래가 있다니까. 저번 충돌은 그냥 찔러 본 거겠지, 되면 좋고 안 되면 말고 식으로.”

“딜을 제대로 물었나 본데.”

“알아서 뭐 해? 우리가 안 물릴 궁리를 해야지.”

오크나무는 구경도 못해본 이규는 대략 취합한 정보로 장단을 맞췄다. 핑계 삼아 내뱉은 뼈대에 살이 척척 붙었다. 이규는 사전 안내가 되어야 했던 사후 보고를 했다.

“저 문신은 바하칼리 형제단이고 멕시코 카르텔에서 떨어져 나온 현상금 사냥꾼 애들. 그래봤자 잽이지. 앞으로 올 녀석들에 비하면.”

“아직 이탈리아 놈들은 도착도 안 한 거군.”

“미리 짐 싸 놔. 적이 내부에 있으니 가게부터 털린 거 아니야?”

“와우. 정확해서 소름이 다 끼치네.”

임승대는 그새 다 녹은 얼음잔을 퉁겼다. 정확히 6번. 독특한 연결음처럼.

“⋯일단 여긴 며칠 닫아둘 거고. 종수, 호텔에 있을 건가?”

“어.”

“Q. 넌?”

“내 아파트.”

“연락해. 제때 받고.”

승대는 그의 손엔 너무 작은 피처폰을 규와 종수에게 하나씩 토스했다. 최종수는 일을 맡을 때마다 받은 일회용 연락수단인지 익게 받아 챙겼다. 어물쩍 한 팔로 지탱해 일어나는 그를 본 규가 말했다.

“23. 내가 태워줄게.”

이규는 임승대와 찰나 눈빛을 교환했다.

클럽 정문은 통제되어 있었다. 그들은 외진 출구로 몰래 빠져나왔다. 바깥에는 정차한 자주색 캐딜락 한 대가 서 있었다. 운전석에 이미 누군가 타고 있었고 임승대가 다가가자 문이 열렸다. 캐딜락이라. 역할에 충실한 건지 본인 성격인지 알 수 없는 취향이다.

승대는 의뭉스런 비음을 짧게 내며 돌아봤다. 정말 괜찮겠냐 묻는 것 같기도 해, 규는 등을 툭 밀었다. 들어가. 그 저의를 읽은 승대는 찝찝한 기분을 애써 감추며 뒷좌석에 탔다. 내비게이션을 끈 운전사가 인적 드문 밤거리로 차를 몰았다. 번호판이 죽 멀어졌다.

“조금 걷자. 강 건너에 댔어.”

남겨진 그들은 번화가를 걸었다. 이 도시의 다운타운은 강줄기를 끼고 길게 이어지는 형태였다. 어느 건물에서 난무하는 총성쯤은 시가지 레코드점에서 흘러나오는 긴 올드팝에 묻힐 만했다. 임승대가 소유한 차량은 모두 추적이 가능했으므로 최종수의 동선을 체크하려는 이유가 컸지만, 나름 오랜만의 산책이었다. 어쨌든 쫓거나 쫓기고 있진 않았으니까.

걸음걸이가 크지 않은 동행은 적당한 보폭으로 옆을 걸었다. 제법 마른 밤공기가 일년 내내 뜨거운 해안가의 설익은 겨울을 완성시켰다. 곧 3월이었다. 춘분을 지나면 기나긴 여름이 시작될 것이다. 넓직한 도로와 촘촘한 가로등, 개량 팜트리가 우거진 길은 오래된 석재 건물과 갈색 벽돌이 뒤죽박죽 나열되었다.

카페테리아 천막이 죽 펼쳐진 노천 식당을 지나 삼거리 블록에서 꺾으면 멀리 불쑥 솟은 빌딩가를 등져 눈 아픈 전경이 줄었다. 아시아인이 많은 지역 특성상 드문드문 한자와 기와를 흉내낸 지붕이 보이기도 했다. 여즉 불 켜진 상점들 위로는 커튼 쳐진 발코니가 층층이 쌓여 있는 주상 복합 상가였다. 이규는 그풍경을 구경하는 척하다 문득 그 옆의 남자도 이방인이란 사실을 떠올렸다.

최종수는 한 네온 간판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규는 제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자정을 향해가는 시각에도 환하게 불이 켜져 있는 「웨스턴 그릴」은 서부 전역에 깔린 프랜차이즈였다. 80년대 인테리어를 고집하느라 타일 바닥에 빨간 에나멜 의자가 들어찬 복고스러운 내부가 누르스름한 전등에 비쳐 보였다.

24시간 영업인지 오픈 팻말이 걸려 있었다. 안에는 높은 선반에 올린 자그만 브라운관이 송출하는 스포츠 채널을 보며 맥주를 주문하는 손님이 있을 거였다. 전형이라는 관념이 딱 들어맞는 공간.

“뭐 해?”

“⋯그냥.”

이규는 구태여 멈춰서주지 않았다. 그와의 관계에서는 무엇도 양보해선 안 된다는 직감이 규를 움직이게 했다. 스무 걸음 가량 떨어졌다고 생각했을 때, 어느새 시야 사각으로 따라붙은 기척을 느꼈다. 규는 왠지 그를 성공적으로 따돌린다는 이미지가 그려지지 않았다.

“저런 덴 가본 적 없지?”

“그게 뭐.”

“귀하게 자랐나 싶어서.”

최종수는 살짝 찌푸렸다. 뺨에 닿는 눈길에 무게가 실리는 것이 느껴졌다. 얕았다가 점차 진득해졌다.

“농담이니까 그렇게 보지 마.”

아까 몇 발을 쐈던 간에 M&P의 대용량 탄창을 고려하면 적어도 여섯 발 이상 남았을 거였다. 식스 슈터. 리볼버 한 정이었다. 목숨값 장사하는 직군이 다 그렇듯 최종수는 약간의 신경증이 있어 보였고, 그가 언제 돌변해 남은 장탄을 쏘아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마음 한편에 남아 있었다.

“사람들이 저길 가는 이유는 단순하거든. 근데 아마 넌 모를걸.”

“미국인이 기름진 감자튀김을 왜 먹는지 내가 모른다고?”

아하. 바보 취급 당한 것에 화난 거구나. 규는 눈을 끔뻑였다. 얘 은근⋯ 싱겁네.

“저건 기준이야. 그릴보다 저렴한지, 품질이 낮은지, 비싼지, 고급스러운지. 그것만 판단할 수 있어도 보통의 사람이 돼. 저길 갈 돈을 아끼면 타코를 세 번 먹을 수 있지만 두끼를 굶으면 더 나은 인간으로 사는 거야. 이해 돼?”

“⋯⋯.”

“보통이 되려는 노력. 해본 적 없잖아. 그렇지?”

하나를 포기하면 하나를 얻는다. 때로는 부도덕이 정상성을 지탱한다. 도덕을 지키면서 정상적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규는 뒤 잡히지 않으려면 곁을 내어줘야 하는 꼬리잡기에 응했다. 이것을 등가라고 할 수 있을까? 계산기를 두드리던 규는 어쩐지 오싹해졌다.

“사실 네가 뭐든, 난 상관없어. 난 더 많은 달러가 필요하거든. 어디에나 널린 서부식 레스토랑의 선에 갇혀 살긴 아까우니까.”

그는 바지 뒤춤에서 차키를 꺼냈다. 손목에 5천불이 달랑거렸다. 이 금속 시계가 방탕해 보이길 빈다. 버튼을 누르자 갓길에 댄 스바루가 등을 반짝였다.

“모쪼록 잘 지내자. 린도, 너도 당분간 내 VIP고. 우린 괜찮은 팀이 될 수 있을지도 몰라.”

어렵다 느낄수록 세워둔 원칙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 그의 플레이였다.

터치스크린에도 그들의 목적지는 뜨지 않았다. 최종수는 따로 지내는 곳을 말하지 않았지만 이규는 그가 묵는 호텔을 알았다. 임승대가 하필 이 항만에 자리잡은 건, 또 다른 신분이 ‘Ⅱ’이기 때문일 거였다. 밀수꾼의 천국. 감시망을 피해 흘러들어오는 건 산업 컨테이너뿐만이 아니었다. 달릴수록 거리 곳곳에 그려진 각 갱의 표식이 줄어들었다. 위험한 고객을 태운 일일 우버는 중립구를 향해 갔다.

종수는 조수석 차창을 표류했다. 내장 스피커 유닛에선 포크 락이 재생되고 있었고 그는 와인색 좌석 등받이에 몸을 구겨 넣은 채 거뭇한 눈시울을 무겁게 떴다. 유리에 엷게 비치는 대시보드 불빛과 왼편 운전자의 얼굴이 겹쳤다. Q의 바랜 잿빛 눈동자가 불그스름한 엠비언트 라이트로 물들었다. 묵직한 노을이 깃든 눈은 안경 탓에 감정이 옅었다.

최종수는 유리창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뻐끔거렸다.

“벌써, 부활절 장식이 걸렸던데.”

이규는 검지부터 차례로 까닥여 핸들을 되잡았다.

“올해 부활절은 3월 마지막 날이니 벌써 한 달밖에 안 남은 거지.”

시속 50마일로 한산한 도로를 지나치며 웨스턴 그릴 벽면에 붙어 있던 네온사인 토끼를 기억했다. 이규는 그가 간판이 아니라 토끼를 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깜찍한 밀짚모자를 쓴 부활절 토끼는 최종수와는 도통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따지자면 불곰보단 섬세하고 야밤 서부 벌판에 울음소릴 퍼트리는 코요테보단 고요했는데, 이규는 최종수를 한 표상에 국한해 정의하길 기피했다. 이를 테면 강철과 수은의 중간쯤으로. 애매히 인식하는 것이다. 

“그게 신경쓰여?”

강철과 수은의 중간. 강한 표면장력으로 뭉쳐 여리게 스며들지 못하고 너울처럼 들이닥치는 검은 남자의 시선이 기어이 움직여 이규를 바라봤다. 신경쓰이는 것은 그 즈음에 있다는 듯이. 이규는 그가 집요한 안광으로 정을 박으려 들 때면 불현듯 발가벗겨질 것만 같았다.

“내 첫 일감이 그거였어. 달걀 배달.”

“아, 이스터 버니.”

이규는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피어스 박힌 눈가를 찡그렸다. 무심코 입술을 씹지 않기 위해 혀를 움직였다.

“몇 살이었어?”

“열 둘.”

“귀여웠겠네.”

종수는 콧등을 찡그렸다.

“그럼 팁을 받았겠지.”

“불친절한 이웃들이라 그래. 난 줬을걸.”

이규는 잠든 최종수의 얼굴을 상기했다. 무척 소년스럽고 또 무고한. 어린 그는 분명 버터스카치 사탕을 물려주고픈 꼬마였을 거였다. 과연 마피아 밑에서 자란 아이의 행실을 장담할 순 없지만.

“네 이웃은 자비로웠나?”

최종수는 참 신기한 재주를 가졌다. 모든 대화를 빈정거림과 명령조를 오가며 진행하면서 아주 일상적이고 평이하게 들리도록 얘기할 수 있었다. 규는 새삼 놀라는 대신 안가에 둔 서류를 머릿속으로 되새기며 핸들을 돌렸다.

“나도 그쪽으론 운이 없어서.”

7층 가량의 가로로 긴 건물이 나타났다. 외견은 매우 평범해서 힐튼 호텔 체인이라 해도 믿음직했다. 입구가 보이자 규는 조금 떨어진 건너편에 차를 댔다. 직원이 그를 발견하고 뛰어나오지 않을 위치에. 최종수의 눈은 룸미러를 향해 있었고 그는 느릿하게 안전벨트를 풀었다.

“친절한 이웃은 원래 드물어. 거기도, 여기도.”

최종수가 점퍼 후드를 꾹 눌러쓰고 내렸다. 이번엔 그 차례였다. 결국 뒤따르고 말 것을 알면서 돌아보지 않는 건. 이규는 매트로놈처럼 가죽 핸들 커버를 두드리다가 호텔의 조명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봤다.

그림자가 드리웠다. 아주, 아주 길게. 발치에 닿도록.

8. “Laundry service”

HOTEL CALIFORNIA

-호텔 캘리포니아

살면서 친절한 이웃을 만나게 될 가능성은 그다지 높지 않다. 설령 뉴욕에 살더라도, 거미 인간이 실제로 빌딩을 타고 다니며 인사해줄 확률은 낮다. 글쎄 이규는 뉴욕의 히어로보다 황야의 협객을 좋아했지만.

그 집을 기억한다. 결국에 무로 돌아간 것들. 벌레 먹은 서까래, 나무 판자 몇 개를 뜯어 금고 대신 쓰는 마루바닥. 헐거운 널빤지는 양탄자로 가렸다. 마당엔 철망 섞인 험악한 울타리가 쳐져 있고 도끼 꽂힌 그루터기와 잿가루를 품은 커다란 바비큐 그릴, 조악한 과녁이 줄지어 서 있었다. 창고에는 갈고리, 덫 재료, 엽총이 쌓여 있었다. 주위에는 아무도 살지 않았다.

이규의 첫 번째 양부는 고립되어 살아가는 남자였다. 그는 표면적으로는 경찰이었고 넓은 정원 딸린 집을 가진 번듯한 아버지였지만 정부를 믿지 않는 음모론자이기도 했다. 개척시대에나 쓰인 책들을 탐독하며 생존 훈련에 집착했다. 그는 아이들을 매달리게 해놓고 이렇게 말했다. 먼저 떨어지는 놈부터 아주 아프게 해줄 거야. 그 집 안에 갇힌 아이들이 어떤 교육을 받는지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납치당한 아이가 카르텔로 흘러 들어가는 과정처럼.

저 킬러의 이웃들 대부분은 가톨릭이었겠지. 신실하든 냉담자든 정치권과 함께 타락한 교구를 존중하는. 신앙을 조롱하는 시그니처, 악마를 자처한 사연 따위 진부하다. 죄악과 인생이 늘 그렇듯이. 위선에 절망하는 것은 미성숙한 인간의 특권이니까. 하지만 이규는 불타는 성당을 카메라에 담은 순간부터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미약하나마 자각한다. 교회의 종소리가 울렸다. 이규는 오르간 연주자를 찾아 문을 열고 들어갔다.

“Welcome to the Hotel California.”

라운지는 가운데 관목처럼 난 장식용 계단이 지하까지 이어져 원형으로 뚫려 있었고, 마치 광장 같은 시계탑이 솟아 있었다. 19세기 유럽 건축물을 연상시키는 구조는 쓸데없는 웅장함이 있었다. 대리석 바닥에는 카펫이 길게 깔려 안쪽의 엘리베이터로 손님을 유도했다. 카운터와 각종 시설을 나누는 일련된 기둥마다 화려한 청동 촛대가 장식되어 있었으며 천장에선 육중한 샹들리에가 빛났다.

이규는 빠르지 않은 걸음으로 각 승강기가 멈춘 층을 확인했다. 최상층과 지하층이 아닌 곳에 도달한 엘리베이터는 두 대였고, 그 중 하나는 막 내려와 있었다. 이규는 그것에 올라탔다.

문이 닫히기 직전 우산이 틈새로 불쑥 찔러 들어왔다. 꼭 몹쓸 함정의 창살 마냥. 규는 거의 가슴께에 다다른 우산 꼭지를 보고 헛숨을 내쉬며 버튼을 눌러 도어를 열었다. 흰 페도라에 반팔 스프라이트 셔츠 차림의 백인이 남색 우산을 거두면서 구둣발을 들여왔다. 덥수룩한 수염에 짙은 고동색 체모를 가진 라틴계였다. 이규는 한 발짝 뒤로 갔다. 남색 우산은 윤기 나는 목재 손잡이와 단단한 고강도 알루미늄 살, 고급스런 쪽빛 원단으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그리고 캡이 매우 깨끗했다. 최근 몇 시간 죽 비가 내렸다는 걸 생각한다면 부자연스럽게도.

흰 페도라는 4F에 불이 들어온 것을 흘금 보더니 그대로 섰다. 안내 음성은 나오지 않았다. 띵, 인조 벨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닫혔다. 이규는 아마도 같은 층에 내려설 백인 남성을 의식하지 않으려 천장을 훑었다. 일반 투숙객이 무언가 목격하길 반기진 않을 테니 저 카메라는 제대로 작동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 사실은 이 우산을 든 신사도 알았다.

수적으로 환산할 수 있는 정보는 쉽다. 아마도 50대. 페도라는 380달러. 셔츠 250달러. 우산 225달러. 금붙이는 없다. 이 동네에선 흔한 괴랄한 패션.

“바비큐는 맛보셨소?”

볼이 움직이자 턱수염이 흔들렸다. 중후한 음성엔 약간의 비음이 꼈다. 특정 구간의 불명확한 발음은 영어 화자란 느낌을 주지 않았다.

“진짜는 이런 데 없죠.”

이규는 강한 남부 억양으로 답했다.

“정답이군. 하지만 캘리포니아는 즐길거리가 많아. 예컨대⋯”

부유감이 멎는다. 4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가 잠시 덜컹였다.

“이 호텔의 세탁 서비스는 완벽하지.”

문이 열렸다. 이동식 도구함이 덩그러니 놓인 복도는 인적이 없었다.

이규는 휘둘려져 오는 우산을 잡아챘다가 포악한 힘에 딸려나갔다. 빨간 카펫 깔린 복도를 두어번 구르며 일어선 그는 캡슐을 꺼내 머금었다. 곧바로 내리치는 우산을 전완으로 막자마자 주먹에 갈비뼈를 얻어맞았다. 순식간에 여러번 훅을 먹인 신사가 우산을 눕혀 이규의 턱 밑에 걸고는 벽으로 밀어붙였다. 규는 숨통이 틀어막힌 채 우산을 쥔 팔뚝을 긁어 당겼다. 캡슐을 씹어 붉은 액체를 가까이 붙은 얼굴에 뿜었다.

“샹!”

시야가 막힌 페도라가 비거리며 떨어졌다. 이규는 거친 호흡을 다시며 도구함을 쓰러트렸다. 아랫칸에 있던 공구가 쏟아졌다. 그는 우산에서 마체테 크기의 칼을 분리시킨 암살자가 덤벼오는 것에 아슬아슬하게 맞춰 케이블과 망치를 집어 들었다.

이규는 망치를 던져 칼의 각도를 틀고 품에 파고들며 케이블을 연달아 튕겨 뺨을 쳤다. 반사적으로 놈의 고개가 돌아간 찰나 목을 휘감아 조았다. 콧구멍에 비계 낀 소리가 났다. 줄을 끊으려 칼을 위로 올린 그때 힘을 풀자 흰 페도라가 뒤로 넘어갔다. 이규는 이미 피맛을 봤을 칼자루를 쳐내고 목줄을 앞으로 넘겼다. 넘어진 도구함에 머리로 떨어진 턱수염의 페도라가 벗겨져 굴렀다.

그는 케이블을 도구함에 건 채로 감아 당겼다. 턱수염은 그 자신이 교수될 것임을 직감했는지 끅끅거리면서도 제 셔츠를 들추는 데 성공했다.

“젠장.”

이규는 이 백인의 손끝에 권총이 걸려 있음을 직감했다. 감출 수 있는 크기라면 마이크로 컴팩트 사이즈. 어쩌면 .380 ACP 탄, 종류에 따라 약 여섯 발에서 열 두 발. 개량 탄창일 시 그 이상도 가능하다. 캘리포니아는 은닉 휴대가 불법이래도! 규는 놈이 막무가내로 총을 쏘아대기 전 카트를 걷어찼다. 끈이 더 팽팽히 당겨지고 뻣뻣이 풀린 아귀에서 총신이 떨어졌다. 메탈 프레임의 둔탁한 소리가 푹신한 카펫에 먹혔다.

“끅, 끄윽⋯”

이규는 BMW 트렁크에 얼굴 전체가 테이프로 둘둘 말려 있던 브로커를 떠올렸다. 그도 이런 도축되는 짐승 울음을 내며 서서히 질식했겠구나. 무언가 끊어지는 느낌이 전해졌다. 케이블은 아니었다. 이규는 불쾌감과 함께 살인의 감각을 지우려 노력했다. 

그는 눈 뜬 시신으로부터 거리를 벌렸다. 케이블을 아무렇게나 팽개쳤다.

“내려가서 청소부 부르세요. 매뉴얼 대로.”

규는 안경을 올려 마른 눈가를 문지르면서 객실 문을 열고 나오다 굳은 직원에게 말했다.

“루, 룸으로 보내드릴까요?”

호텔 유니폼을 돌아보자 직원은 자라목이 되어 복도 끝을 눈짓했다. 엘리베이터가 한 대 더 있었고 그 너머에 객실이 보였다. 규는 한숨을 쉬고 죽은 자의 발목을 붙잡아 끌었다.

“열어요.”

룸 입구에 시체를 구겨넣은 그는 널부러진 도구를 가리켰다. 허둥지둥 허리 굽혀 공구를 줍는 직원의 벨트에서 키 카드를 빼냈다.

이규는 복도 끝 스위트룸의 잠금을 풀고 들어갔다. 내부는 불이 꺼져 있었다. 가벽을 짚으며 거실로 다가가자 오디오에서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그것이 어떤 소음을 가려주었다. 탄피가 밟혔다. 탁자에 엎어진 한 명, 구멍 뚫린 가벽에 쓰러져 앉은 한 명. 둘 다 자세를 낮춘 사수에게 다리부터 저격당했다.

딱 이렇게 깔끔한 사격 실력을 가진 자가 그보다 일찍 이 방에 와 있다는 건 놀랍지 않았다. 이규가 따라온 남자였으니까. 거실은 핏자국만 제한다면 가지런했다. 몸싸움의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소음기를 부착한 토카레프가 소파 아래에 떨어져 있었다. 유럽에서 날아온 손님이다.

욕실과 붙은 침실에만 조명이 들어와 있었다. 빛 자락이 바깥으로 늘어져 있었다.

“⋯⋯!⋯!⋯.”

안에서 나는 소리가 재생되는 기타 연주에 가려졌다. 코너를 돌자 그의 등이 보였다. 그를 수식하는 문장은 많았다. 안티오키아의 악마. 그들의 왕을 목매달고 쫓긴 청부업자. 뒤집은 십자가를 상징 삼은 오르가니스트. 한때는, 무지개 리본 단 이스터 버니 역의 꼬마아이.

제단 같은 매트리스 위에서 마침내 한 인간의 명이 끊어졌다. 이규는 상반된 여러 감정들을 가라앉혔다. 최종수가 목에 꽂아 넣은 토카레프 부품을 놓았다. 슬라이드를 분해한 총열이 기도에 박혀 있었다. 탄환이 떨어지자 총을 빼앗아 그의 방식으로 되돌려준 것 같았다.

최종수의 오른팔 붕대는 붉게 번져 있었고, 그는 바닥을 딛고 침대에서 일어나다 비틀거렸다. 규가 무심코 방아쇠 스프링처럼 튀어 종수의 몸을 받쳤다.

높지 않은 체온. 그의 차분한 숨소리. 빠르지 않은 고동. 옅은 마르멜로 향.

“⋯정말 어딜가나 이웃이 별로네.”

이규는 여상한 척 농담하며 복장뼈 아래를 감싼 손을 빼려 했다. 최종수가 손목을 잡아오지만 않았다면 그랬을 거였다.

“여긴 왜.”

“예감이 안 좋아서. 이 호텔도 린의 이름으로 체크인 되어 있잖아.”

물론 너도 알았겠지. 치우고 싶었거나. 이규는 구태여 덧붙이지 않았다. 그가 규의 시계 러그 스트랩을 따라 손목을 쓸었다. 꼭 뱀이 타고 오르는 느낌이었다. 그것이 습성 대로 먹이 크기를 가늠하며 비늘을 비볐다. 규는 그를 뿌리치려 했다.

“청소 요청했어. 일단 나가⋯”

최종수가 갑작스런 억센 힘으로 이규를 잡아 밀었다. 욕실은 따로 문이 없었고 이규는 뒷걸음질쳐 세면대 대리석에 부딪혔다. 이런 걸 기시감이라고 해도 될까? 그들은 매번 동일한 매커니즘으로 충돌했다. 이규가 최종수를 이해할 수 있다 착각할 즈음, 가장 취약한 순간에, 그는 늘 불길한 예견과 같이 역류했다. 바로 지금처럼.

그가 멱살을 틀어쥐었다. 이규는 그의 관절을 팔꿈치로 찍었으나 여전히 잡힌 팔목이 꺾였다. 최종수는 규의 덜미를 잡아 누르고 팔을 등 뒤로 납작히 고정시켰다. 자연히 상반신이 굽혀졌다. 세면대에 거의 박힐 뻔한 고개를 간신히 들었다. 욕조가 비치는 커다란 거울이 코앞에 있었다. 거기엔 이규를 짓누르는 최종수가 보였다.

얼핏 지친 것 같은 인상에도 손놀림은 부드러워질 기미가 없었다. 종수는 규의 뒤에 붙어 하얗게 변한 손목에서 시계를 끌러냈다. 이규는 거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래야 표정이 보였다. 최종수 역시 거울을 쳐다봤다. 둘의 시선이 얽혔다. 그는 규의 양팔을 모아 뒤로 꺾었다.

“시간 외 근무도 팀워크의 일환인가? 그래, 어디 해 봐. 그 ‘팀’이란 거. 단⋯”

그가 시계를 대리석에 내리쳤다. 인서트 세면대로 티타늄 러그와 깨진 다이얼, 삽입되어 있던 소형 녹음기가 빨려 들어가다 배수구에 막혔다.

“나한테 수작 부리지 마.”

이규는 뻐근한 통증이 점차 멀어짐을 느꼈다. 의식이 육신과 유리되어 사고하는 기분이었다. 해야 할 말을 읊을 뿐이다.

“미안. 직업병이야. 편집증 환자 상대할 일이 많거든⋯ 윽.”

“아니, 좆같은 취미지.”

그가 이규의 몸을 수색하듯 더듬었다. 주머니에 집히는 딱딱한 것을 모조리 꺼냈다.

“맹세컨대 다른 취미는 없어. 음⋯ 서부영화 보기?”

“그 새끼냐? 날 감시하라 한 게.”

최종수는 임승대의 라이터를 규의 시야로 던지며 물었다. 청명한 금속음이 울렸다.

“아무랑도 상관없어. 왜 그렇게 연결 되는데? 너흰⋯ 친구잖아.”

“도발인지 해명인지 헷갈리는데.”

“알았어, ‘친구’도 금지어로 하자.”

그는 이규의 목을 조르고 싶다는 표정을 했다.

“난 린과 네가 서로 부탁을 들어주는 사이라고 들었을 뿐이야. 그와 나도 같지. 그냥 팀이라고. 이런⋯ 하, 취미를 공유하지 않는.”

저릿한 등에 힘이 빠졌다. 이규는 곧 고개를 떨구고 말 것만 같아서, 방향을 틀어 그를 달랬다.

“녹음은 미안. 하지만 이 바닥이 다 그렇잖아. 23, 난 총도 없어. 놔줄래?”

그는 묵묵히 틀어쥔 팔을 건반을 누르듯 툭툭 두드렸다. 이규는 쇠사슬이 절그럭대는 환청을 들었다. 순간 욱, 통제를 잃고 소스라칠까 어지러웠다.

“말해. 뭐가 문제야?”

이규는 터져 나오려는 탄식을 가까스로 삼켰다. 어쩌면 최종수는 그 편을 원할지도 모른다. 안 된다. 그건 위험했다. 최종수는 거슬리는 살을 낱낱이 바르려는 충동에 휩싸여 있었고, 명백히 흥분했다. 이규 또한 마찬가지였다. 욕실 바깥에 세 구의 시체가 있었다. 그들은 급조되었고 살해 위협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그는 이규의 거죽을 죄 벗기고 싶어 보이면서도, 열망과 허무가 번갈아 일렁이는 소용돌이에 모든 걸 갈무리했다.

“넌, 지나치게 조밀해.”

끔찍하리만치 섬세한 남자가 말했다. 타인의 속을 갈라보고 싶어하는 작자에게 들어 좋을 말은 아니었다. 그가 드디어 양팔을 놓아줬다. 규는 세면대 하부 장을 짚었으나 힘이 들어가지 않아 휘청였다. 이규는 턱을 붙잡혔다. 최종수가 거울을 들여다보며 규의 얼굴을 치켜 올렸다가 슬슬 돌렸다.

“너무 잘 만들어져서 화가 난다고.”

“무슨⋯”

큰 손이 규의 머리채를 낚아챘다. 그가 가발을 벗겼다. 콧등에 걸터 있던 크라운판토 테가 비뚤어져 튕겼다. 이규는 제 소지품과 안경, 망가진 시계가 늘어진 대리석에 묶여 있었다. 갓 목장에서 잡혀온 염소 같이.

거울 속 기억이 깜빡였다. 갈아줄 때가 되어 불이 반만 나간 욕실 등을, 어느 어둑한 공간을 연상시켰다. 거울의 밝은 면에는 그 자신이 비치지 않았다.

9. “Wilds”

로스앤젤레스의 건조한 기후는 텍사스 황야를 닮았다. 그리고 그 버려진 땅들은 이규의 근간이었다.

WELCOME TO HELL

-지옥, 심층부

감시탑은 언제든 폭동에 대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꼭대기에 선 교도관은 경고 사격용 샷건을 차고, 실탄을 재운 저격총을 온 벽에 도배해둔 채 엄중한 얼굴로 가시철조망을 향해 나아갈 순교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위용이 효과가 있었는지 오래되고 열악한 수용소는 600명의 사형수와 마약상, 밖에선 한가락 했다는 갱단 간부를 수용하고도 불꽃과 비명 없이 무사히 밤을 보냈다.

수감자들은 사막 한가운데에서 짐승 같은 대우를 받았다. 해를 볼 수 있는 유일한 시간대 불려나오는 좁은 마당엔 약간의 잔디가 나 있어서, 그들은 그 감옥을 ‘목장’이라는 별칭으로 불렀다. 그러나 이규는 누구와도 접촉하지 않고 독방에 격리되어 있었으므로 잔디는 커녕 으레 젖소 흉내를 내며 하는 저질스런 농담조차 들어보지 못했다.

그는 실내 기온 50도를 웃도는 사막의 열병을 하루 한 번 배식구로 호스를 집어 넣어 뿌려주는 물로 버텼다. 독방 수용기간은 법적으로 제한되어 있었으나 그곳에서 이규가 할 수 있는 말 중에 ‘비인도적 처우’나 ‘부당’이라는 단어는 없었다.

철제 테이블 가운데에는 수갑을 걸어둘 수 있는 쇠고리가 튀어나와 있었다. 이규의 손목은 상 위로 끌어 올려져 단단히 고정되었고 두 다리 사이에는 족쇄가 채워졌다. 그가 갇혀 있었던 1평 남짓한 독방은 정신을 갈기갈기 찢어둔지 오래였다.

“리. 네게 흥미로운 제안을 할까 하는데.”

값비싼 정장을 차려입은 차장이 양손을 바지춤에 꽂아 넣고 다리를 꼬며 지껄였다. 그를 불러 앉힌 양복쟁이는 조금 붉은기가 도는 갈발에 검은 눈을 가진 아시아계였다.

“당연히 네게도 거부권이 있다. 이대로 교도관에게 면회를 끝내고 싶다고 말해. 넌 방으로 돌아가 남은 형기를 채우면 돼. 30년쯤 후에는 자유를 얻을 수 있겠군.”

무슨 제안이죠? 쩍 갈라진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너를 ‘다시 태어나게’ 해줄 제안.”

이규는 수상한 양복이 제안하는 감형을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잠은 좀 잤나?”

“예⋯.”

규는 혀를 굴리며 목소리를 내는 발성 자체가 매우 낯설게 느껴졌다. 차장은 이규를 목장에서 꺼내온 책임자였고 동시에 규의 인생을 샀다.

그는 손을 까딱여 주위를 지키고 선 군인을 움직였다. 그들이 허리에 찬 곤봉을 짚으며 위압적으로 다가와 수갑을 풀어주었다.

“‘재활용 프로그램’에 합류한 걸 환영한다, 리. 나는 감독관이다.”

이규는 12시간 전 바깥을 볼 수 없는 수송 차량에 올라 이곳으로 왔다. 그는 여벌의 검은 트레이닝복을 지급 받았다. 간수는 없었지만 군인이 있다는 것 말고는 어디로 끌려왔는지 알 수 없었다.

“텍사스에서 고생 깨나 했나 보군. 그쪽 친구들이 워낙 험하지. 게다가⋯”

차장이 얇은 파일철을 뒤적거렸다. 오, 이런. 진심 없는 감탄사를 덧붙인다.

“경찰을 죽였으니 가만 뒀을 리가 있나.”

이규는 동요하지 않으려 자유로워진 손목을 잡았다. 그는 교도소에서 소리 소문 없이 살해당할 수도 있었다. 운이 나빴다면 진작 이유 모를 심장마비나 열사병으로 포장되어 처단되었을 거였다.

“또 다른 수양 형제는 자살했고. 아버지는⋯”

차장은 제법 감흥 있게 읊조렸다.

“네가 38구경 리볼버 탄을 이마에 박았지.”

“⋯⋯.”

“학업 성적이 좋던데. 양부를 따라 경찰이 될 생각이었나? 네 재판 영상을 봤다. 배우가 더 어울리겠더군.”

이규는 입양되어 큰 아주 어릴 적부터 분위기를 살펴 적절한 화법을 구사하는 아이였다. 가정에서 거친 남부 방언과 비속어를 쓰던 규는 법정에 서서는 반듯한 사회 주류를 흉내냈다. 비록 그는 40년에 달하는 형량을 선고 받았지만 가석방 기회를 부여 받았다. 물론 절대적으로 자유를 박탈당한 건 분명했다. 가석방 심사는 형기 85% 채워야 가능했으므로.

“이전 가족의 성은 버려. 원래 이름이 뭐지?”

러시아계 성씨에 리 라는 이름을 단 소년은 그 한마디로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규.”

“규. ‘교화’가 끝나면 넌 우리가 설계한 대로 살게 될 거다. 너희 같은 쓰레기들에게 어줍잖은 애국심은 기대하지 않아. 명심해야 할 것은 세 가지.”

그의 사명은 한 문장으로 집약할 수 있었다.

“불신자와 거래하고, 진리를 얻어내고, 유혹되지 마라.”

“그건 꼭⋯”

이규는 무심코 중얼거리다 차장의 허락을 구하듯 시선을 올렸다. 감독관은 제지하지 않았다. 규는 뒷말을 완성시켰다.

“파우스트 같은데요.”

그예 차장이 피식거렸다. 그는 정장 안주머니에서 기름 라이터를 꺼냈다.

“담배 피나?”

“아뇨.”

“살고 싶다면 그래야지.”

리의 이력이 적힌 종이를 뜯어낸 차장은 불을 붙였다. 이규는 제 머그샷과 수인번호 4-6-4, 비루한 삶이 재로 돌아가는 과정을 지켜봤다.

“내 임무는 고결한 성자가 아니라 조용히 죽어줄 개를 찾는 거다만.”

신도 목자도 존재하지 않는 목장 안 비루먹은 나귀였던 그는 이제 사역견이었다.

“너완 오래 보게 될 것 같군, 어린 파우스트.”

공군 기지로 위장한 훈련소를 벗어나는 데 2년이 걸렸다. 그가 만난 차장이 FBI 첩보부 차장으로 발령 받은 CIA 국내 요원이라는 걸 알게 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다시 태어난’ 이규에겐 은퇴한 외교관 부부가 붙었다. 그들은 아무것도 알려하지 않는 성실한 공무원이었고 규에게 정상 가정을 가르쳤다. 그렇게 보통의 인간이 됐다. 애리조나 피닉스에서 온, 고위 공무원 출신 양부모를 둔 이규가 탄생했다.

대학 중퇴라는 가짜 학력을 받아든 그는 캘리포니아의 경찰학교를 이수했다. 텍사스 목장에 비하면 LA 카운티 교도소는 견딜 만했고, 잠입 임무는 특별 경력이 되어 FBI 입사를 도왔다. 경찰 조직에 미련이 있으나 양부모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정부에 헌신하는 길을 받아들인, 얌전하고 선한 청년이 됐다. 

한때는 될 수 있다고 믿었던 그 자신 말이다. 몰입하긴 쉬웠고, 혹은 진짜이길 원했다. 

북한 비밀경찰 피살 사건 이후 한국과의 공조를 위해 주한대사관으로 향하기 전까지 이규는 스파이가 접촉한 내부 인사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비리로 위장해 해고시킨 그들이 어디로 끌려갔는진 몰랐다. 그가 있던 감옥보다는 낫길 바랄 뿐이다. 개중엔 그를 꿰뚫어 본 사람도 있었다. 그가 아직 어수룩한 애송이였을 때. 중요한 건, 속에 감춘 짐승을 들켰던들 수싸움에선 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연극에서 깨어나는 데에는 노력이 필요치 않았다. 그는 언제나 제정신이었으니까. 매순간 스스로 타인을 투영하며 살았지만 그의 영혼은 단 한순간이나마 황야를 벗어난 적 없었다. 그는 21세기에 떨어진 카우보이였다. 죽음과 살인 그리고 피. 문명과 야만을 동시에 허락 받은 고전적 현대인. 

깜빡임이 천천히 멎었다. 이규는 깨진 구석 없이 반듯한 거울 표면에 있었다. 파우스트. 그를 우스운 별칭으로 부르던 이 프로젝트의 창조주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그가 맞서야 할 악마가 거울에 비쳤다. 이미 그 안에 들어와 있는 존재였다.

10.  “Easter egg”

“쏘고 싶단 말을 복잡하게 하네.”

이규는 종수의 손을 쳐냈다. 그는 잠깐 미동도 않았다가 마치 들어준다는 듯이 시간차를 두고 물러났다. 이규는 그가 다시 간격을 좁혀올까 얼른 거울을 등지고 돌아섰다. 대리석 하부 장을 짚은 규는 힘에 부치는 척 걸터앉아 눈높이를 낮추었다. 그가 자극 받지 않도록. 의식 기저에 묻어둔 사냥법을 끄집어냈다. 텍사스에 버리고 온 것 중 하나였다.

“넌 린과도 비즈니스적으로 엮이잖아. 믿든 말든. 그러니 나완 못할 게 뭐야?”

“달라.”

이규는 눈썹을 치켰다.

“어째서?”

“너와 임승대는 완전히.”

“잠깐,”

그는 규의 레더 옷깃을 잡아 끌었다. 더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았다. 규는 종수에게 끌려가주다가 욕조가 가까워지자 멈춰세우려 했다. 그는 아랑곳않고 규를 욕조 안으로 넘어뜨렸다. 받아져 있던 미지근한 물에 첨벙 빠졌다. 튄 물이 후두둑 굵은 비처럼 내렸다. 이규는 흔한 자살자처럼 누워 그를 침례한 이를 올려다봤다. 젖은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입가에 묻은 붉은 색소 외에 닦아낼 수 있는 건 없었다.

“너 너무 흥분했어. 네가 화가 난 이유는 내가 아니라, 오늘 밤에만 두 번이나 눈 먼 총알에 죽을 뻔했기 때문이라고.”

“어쩌면. 그렇겠지.”

규는 곧바로 입술을 뗐지만 목소리를 내진 못했다. 쉬이. 손버릇 더러운 세례자가 검지를 제 입가에 가져다댔다.

“Q는 이니셜인가?”

욕조에 들어온 게 규가 아니라 최종수였다면 정녕 자살 기도처럼 보였을 거였다. 이규는 그의 핏물이 배어나오는 팔을 훑고는 이젠 익어버린 화법에 응했다.

“비슷해. 나머지 글자는 지금은 안 써.”

종수는 오묘한 표정을 했다. 그러더니 몸을 숙여 욕조에 손을 담궜다. 수면을 가르면서 이동해 규의 상반신이 잠긴 곳까지 올라왔다. 규가 둘레에서 떨어지려 하자 그는 가슴께를 손바닥으로 꾸욱 눌렀다. 이규는 속절없이 물속에 침식되면서도 이 남자가 이야기를 시작하리라 직감했다. 아마도, 웨스턴 그릴과 이스터 버니 언저리에 대해. 그는 네온 사인을 보듯이 조명이 부옇게 반사되는 물결을 봤다.

“부활절은 중요한 날이야. 그와 그의 형제들은 독실한 가톨릭이었으니까.”

그가 습기에 젖은 속눈썹을 내리뜬다. 이규는 뜻밖에 감탄했다. 까마득한 낭떠러지 같은 시선을 거둔 최종수는 뭇 대중의 심미안을 만족시킬 법했다.

“그는 고르고 고른 몇에게만 이스터 에그를 선물했는데, 난 맡은 서프라이즈를 모두 성공했어. 달걀 옮겨두는 걸 들켰다면 그 자리에서 뒈졌을 거다. 달걀엔 쪽지가 들어 있었고, 수령자는 빠짐없이 목이 잘렸지.”

“⋯그가 누군데?”

“파파.”

이규는 폐부를 담그고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헛숨을 들이킬 뻔했으니까.

“매년 그날. 내가 살아 돌아가면 파파는 10만 페소를 건네. 대부분은 달러였고. 간단히 환산해⋯ 23달러.”

최종수가 물 묻힌 손끝을 모아 이규의 이마를 건드렸다. 세례는 이십삼 달러로 그의 야훼가 된 자의 몫이다. 최종수의 행위는 표적을 심는 의식 같았다. 규는 종수의 눈동자를 거울처럼 엿보며 참지 못하고 말했다.

“네가 23인 이유를 아는 자들은 전부 이 세상에 없지?”

그가 픽 웃었다. 그래. 긍정한다. 규는 뜸들이다 욕조에 기대어 붙었다. 식어가는 물의 온도에 서늘한 포세린 타일이 닿았다.

이규는 지친 얼굴을 쓸었다. 그는 살짝 가라앉은 톤으로 말했다.

“호텔 캘리포니아는 밀수꾼들의 돈세탁을 위한 합법 업소지만⋯ 이곳에 오는 부류는 딱 두 가지를 찾아.”

“무기를 팔던데. 너넨 바비큐라고 부르는 그거.”

“물론 그것 때문에 사람이 모이지. 그런데 목숨 내놓고 다니는 놈들끼리 만나면 뭘 하겠어? 대개는 내기 도박을 즐겨. 군인, 경찰, 촌구석 마초만 러시안 룰렛에 환장하는 게 아니거든.”

규가 수면 위로 올라 앉았다. 그는 제지하지 않았다.

“비즈니스가 싫다면, 게임으로 하자. 적도 없고 아군도 없는 룰렛으로.”

“뭐가 다르지?”

“이건 테이블의 딱 한 자리만 비우면 나머지 모두가 이기는 게임이야. 그리고 나는 그게 너나 린이 아니라 망할 마피아였으면 좋겠다고.”

최종수는 미간을 모았다. 고개가 삐딱하다.

“나는 네가 사는 데 걸었어. 1대1은 이 판이 끝난 뒤에 해도 안 늦어.”

“⋯⋯.”

규는 태연한 낯짝으로 손을 내밀었다.

“이제 일으켜 줄래, 종수야.”

23은 찝찝하잖아.

이규는 마침내 헐겁게 맞잡아오는 아귀를 꾹 눌러 당기며 몸을 일으켰다. 물은 아주 무거웠다.

침실에 붙은 드레스룸에서 라운드넥 면스웨터와 웰론 패딩조끼, 밴딩바지, 운동화를 야무지게 주워 입은 규는 최종수의 짐을 파헤쳐 비니 하나를 건질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끝이 있는 바닥으로 내려가는 동안 그 난리통에 무사한 안경을 썼다. 곧 멀미가 멈추고 라운지가 보였다.

“남의 집 창문 안 타봤어? 모자가 없네.”

“쓰고 버려.”

이규가 간단히 샤워하고 옷을 챙기는 내내 총기와 여분의 탄창이 든 더플백에 옷가지를 집어 넣고 송장 가운데서 담배를 태우느라 최종수의 붕대는 여태 너덜거렸다. 그나마 아노락을 걸쳐 들어올 때보단 사정이 나았다. 그들은 작위적인 샹들리에를 벗어나 정문을 나섰다.

자정을 한참 넘겨 또 오늘이 시작된 거리는 늘 그랬듯 어제와 달라지지 않았다. 카라멜 차체의 스바루는 정차한 위치에 서 있었고 가로등이 두 사람을 내리쬤다. 뜨겁지도 강렬하지도 않은 미온한 전등은 그들의 습성에 딱 알맞았다. 겨울 끝자락 북서부의 날씨 역시 그랬다.

호텔이 밤하늘에 쏘아보내는 불빛이 사이드미러에서 점차 멀어졌다. 종수가 문득 불렀다.

“야.”

규는 그가 말을 덧붙이길 기다리며 좌회전 했다. 운전대를 트는 이 약간의 동작으로 최종수는 규를 지옥 문턱에 처박을 수 있는 사내였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이규는 그의 파파가 즐겼다는 부활절 장난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부활은 사멸을 수반한다. 최종수는 이규를 깨트릴지언정 새롭게 재생되길 바라지 않을 것이다.

“도박, 해 봤냐?”

“의외야?”

종수는 침묵했다. 말문이 막혔다는 관용 표현은 그에게 들어맞지 않는다.

“⋯계산 없이 굴 것 같지 않다고.”

이규는 나지막한 희열이 색료 입힌 안개처럼 퍼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최종수가 이규를 정의하는 데 집어든 망설임과 찰나의 공백이 마음에 들었다. 그것은 단순명료한, 편집되기 수월한 인간을 위장하며 살아온 세월을 배반하는 행위였으나 그를 지겹지 않게 할 수단이기도 했다.

“그 멍청한 룰렛을 좋아하진 않았는데.”

“그런데.”

“나를 건 게임은 재밌잖아.”

이규는 턱을 넘어 그물이 다 뜯어진 녹슨 농구대가 있는 주차장에 차를 댔다. 시동을 꺼트리고 키를 모두 안에 둔 채 내렸다. 종수는 남겨진 열쇠를 흘겼다.그들은 보폭 맞춰 건물로 걸었다.

옆집 대학생이 재배하는 마리화나 화분을 피해 계단을 올라가면서 임승대에게 받은 구형 폰을 조작했다. 연락처 한 개가 이름없이 저장되어 있었다. 규는 현주소를 전송하고 현관을 통과했다. 그럭저럭 구색이 갖추어진 집 안은 어딘가 싸늘했다. 최종수는 내부를 한 바퀴 둘러보다가 지퍼백 몇 개를 발견했다. 잡고 놓아주길 반복하는 민물낚시였다. 그동안 이규는 서랍을 뒤져 깨끗한 붕대를 찾았다. 

“이거 갈고 씻어. 저쪽이야.”

최종수가 우중충한 눈빛을 보냈다. 규는 설명을 덧붙였다.

“뽀송뽀송해지기 전까지 어디에도 엉덩이 못 붙인다는 의미지.”

“빌어먹을 말투는 그만 두지?”

그는 투덜거리곤 붕대와 여벌옷을 챙겨 화장실로 사라졌다.

이규는 물소리가 나는 걸 듣고서야 벽장을 열었다. 아이폰과 현금, 백팩, 다이얼, 약병이 있었다. 규는 탁자에 둔 시계를 쓸어와 흩고 가죽 스트랩을 골라 사각 다이얼을 가지고 있던 것으로 교체했다. 나머진 모두 가방 안에 담았다. 아이폰을 켜자 메시지 알림이 왔다. 회사 메일 역시 밀려 있었는데 이 기기로는 확인할 수 없었다. 이규는 노수민이 남긴 마지막 메시지를 띄웠다.

-The Hard Goodbye.

11. “Sin city”

새벽이 깊었다. 최종수는 새 외출복을 껴 입고 소파에 앉아 자고 있었다. 달빛 새는 창문에 커튼을 치느라 작은 바스락 소리가 나자 그는 잠결에 권총을 쥐었다. 규는 혹시 오발 사고를 내고 싶냐 물었고, 그에게서 글록19를 떼어 놨다. 통 매트리스를 거부하는 탓에 어쩔 수 없이 소파에 재우는 대신 규는 그 옆에 앉았다.

최종수는 몇 번 뒤척이다 어깨에 기대 자는 것이 편하다는 걸 인정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이규는 커피에 위스키를 섞어 마시며 시간을 죽였다. 소리를 낮춘 TV는 《씬 시티》를 내보내고 있었다. 몸을 붙인 종수에게선 규가 쓰는 제품 향이 났지만 이상하게 아까 그 마르멜로가 코끝을 떠나지 않았다. 창백한 화면이 스트립 댄서의 춤사위에 번쩍거림에도 반응하지 않을 만큼 잠들었을 때, 규는 인기척을 느꼈다.

잠기지 않은 현관이 돌아갔다. 이규는 조용히 커피잔을 내리고 빼앗은 글록을 겨누었다. 큰 체구가 문간을 잡고 머리를 숙이며 들어온다.

쥐색 피 코트 차림의 임승대는 잠든 최종수를 흥미롭게 봤다.

“약이라도 먹였나? 저렇게 푹 잠들 놈이 아닌데.”

“커피는 안 마시길래.”

이규는 총을 발치에 둔 백팩에 넣으며 빈 주사기를 가리켰다.

“들켰으면 어쩌려고.”

“항생제라고 했을걸.”

“그거 참 감쪽같이 속았겠네.”

승대는 피식 웃으며 백팩과 더플백을 양손에 하나씩 들어 올렸다.

“누가 차를 들이박기라도 한 건가?”

“아니, 받은 차라서. GPS 검사는 못 했거든. 두고 가야 할 것 같아. 연락은?”

“가서 얘기하지. 내려 와. 할 얘기가 길잖아. 너나 나나.”

셋은 임승대의 머스탱을 타고 1시간 거리를 내달렸다. 규는 종수를 싣고 뒷좌석에 타 시 외곽으로 달려가는 풍경을 봤다. 구간마다 교차로를 지키는 바이크가 있었지만 지시해두었는지 따라오는 차량은 없었다.

외진 거처는 숲과 매우 가까웠다. 나무를 빼곡히 심어 수풀 속처럼 꾸며 놓은 것 같기도 했다. 일부러 넓게 조경하고 사물을 치워둔 정원은 탁 트여 있었고 건물은 단층의 별장 느낌이 났다. 옥상에 수영장과 그네, 그늘막 등이 준비되어 있었으나 쓰이지 않는 듯했다. 규는 정원을 가로지르면서 감상했다.

“왜 하필 숲이야?”

“산림감시단이 근방에 깔려 있다. 더 들어가면 국립공원이라.”

“돈을 안 뿌린 데가 없구나.”

“눈 빌리는 정도지.”

거실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컸다. 아일랜드 식탁이 있는 부엌, LP턴테이블 스탠드와 대형 스피커들, 중앙에는 카우치 세 개가 붙어 있었고 외곽 작은 온실에서 식물등 레일이 은은한 빛을 내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어두웠다. 커튼과 벽 근처 가구에 설치된 간접 조명이 시야를 밝혔다.

“카우치에 둬. 침대에 두면 발광하니까.”

규는 최종수를 카우치에 눕히고 등받이에 쿠션을 끼워 넣었다. 승대가 짐을 내려놓고 손짓했다. 규는 가죽 시계를 손목에 차면서 그를 따라 서재로 들어갔다. 문이 걸어 닫힌다. 규는 퇴창에 붙어 섰다. 임승대는 잔을 뒤집어 보울에서 얼음을 옮겨 담았다.

“따로 얘길 하자고 했지, 최종수까지 눕혀다 들어오란 뜻은 아니었는데.”

그는 아까와 같이 유리잔을 퉁퉁 두드렸다. 질릴만치 뻔뻔한 신호였다.

“호텔도 털렸어. 칼라브리아(남부 이탈리아)는 아니야. 그리스와 동구권이었고 경찰로부터 무기 마켓이 오픈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

“미국 전역에 썩은 돼지들이 무기 빼돌려 파는 게 하루 이틀인가? 남부에선 매일 망할 바비큐 파티를 해대잖아. 아무튼 그쪽이 수류탄 공급할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약 쳐뒀어.”

“그래⋯ 네가 그렇다면.”

이규는 3시를 넘어가고 있는 시침과 어둑한 밤하늘을 번갈아 봤다. 7시는 되어야 해가 떴지만 약효가 얼마나 갈진 알 수 없었다.

“감마? 린?”

“임승대.”

“승대. 어쩌다 노출된 거야?”

“뭐⋯ 배신자가 있었지. 모든 일이 다 그렇듯이.”

승대는 붉은 라벨의 보드카를 따랐다.

“‘린’을 찾는 남미 녀석들에게 같은 이름의 밀수꾼이 북서부 해안에 있단 사실을 팔았더라고.”

이규는 그가 쫓았던 여섯 명의 사망자를 떠올렸다. 그들은 임승대의 업계 신상을 유출한 죄로 죽었다. 그중 교도소 안에서 목 매달린 어느 하청조직의 보스가 뇌리를 스쳤다.

“감마는 워싱턴에게, 린은 은드랑게타에?”

한 사람을 반씩 쪼개어 팔아치우다니 대단한 수완가였다.

“알뜰한 새끼였지. 목숨은 낭비했지만.”

그 자는 신원을 감추느라 도움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간수가 뒤를 봐주며 죄수들에게 살인을 종용했다면? 검사 역시 종결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았다면? 규는 삐뚠 한숨을 쉬었다. 연방이 움직였던 거였다. 재활용 프로그램의 존재를 아는 자는 FBI 첩보부서와 국내 CIA, 그리고 대통령 직속의 정보실뿐이었다. 안보부는 감마를 들춰내길 원했지만 첩보부는 감마를 지키려 훼방 놓았다. 이규는 그 간극을 메꾸기 위해 투입된 퍼즐 조각이었다.

임승대는 술을 한 모금 넘기고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쳤다. 기대한 대로, 그가 본론을 꺼냈다.

“Q. 알다시피 우린 서로 목적을 몰라. 그러니 풀 건 풀어야지. 오해가 생기지 않게.”

“목적이라니? 맡은 임무를 수행하면 돼.”

“이러지 마. 재미없는 대답을 원한 게 아니야.”

살짝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공기는 꿉꿉했다. 그나마 내리던 비는 물안개가 되어 부유했다. 규는 달빛에 의지해 푸르스름한 임승대의 반쪽 얼굴을 마주봤다.

“우린 팀이지만 모든 걸 공유할 순 없어. 그건 규정 위반이야.”

“내 목숨이 내게 달렸을 때와 한 배를 같이 몰아야 하는 지금은 다르지. 정 내키지 않으면 나부터 할까? 내가 받은 정보는 두 가지다. 날 지원할 요원이 Q고, 최종수는 사살해도 된다는 거.”

“그게 꼭 죽이란 말은 아니지만 다른 옵션은 둘 다 반길 것 같진 않네. ⋯애초에 안티오키아에서 그를 빼내준 건 너 아니었어?”

“이미 짐작했지 않이? 파파 보나벤투 살인 의뢰는 연방정부가 나를 통해 넣었으니까. 사업 때문에 콜롬비아에 끈이 있던 내가 그 거래를 떠맡게 된 것뿐이야. 놈이 대가로 요구한 건 하나였지. 미국으로 데려가 줄 것. 좋아서 같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난 그 자식 안 믿는다.”

이규는 퍽 우습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다 떠돌이 부랑자였다. 임승대는 재활용되지 않았다면 불명예 전역자에 불과했다. 수감되지 않았을 뿐 이미 군적이 말소됐을지도 몰랐다. 규에겐 임승대도 노수민도 믿을 수 있는 타인은 아니었다. 믿음은 중요치 않았다. 그러나 군에 몸담은 이 사내는 땀투성이 단체가 강조하는 전우애에 지배당한지 오래라, 그런 가치를 놓을 수 없는 듯했다. 그것이⋯ 싫지만은 않았다. 어쨌건 ‘팀’이 되어야 하니까.

“고마워. 덕분에 상황 파악했으니 이만 끝내. 더는 안 돼.”

“알아두는 게 좋을 텐데? 우리가 목줄을 달았지 진짜 개가 된 건 아니잖아.”

“임승대. 그만 마시는 게 좋겠다.”

승대는 눈썹으로 아치를 그리더니 전부 비운 잔을 내려놨다.

“중국이 남미 마약 카르텔에 개입하려 했다.”

규는 쏘아붙이려다가 입을 닫았다.

“중국으로 콜롬비아산 마약이 어마어마하게 들어가는데, 공산당은 그걸 막고 싶어했지. 그들은 ‘린’이 카르텔 질서를 흔들 수 있을 거라 믿고 내게 접촉했고. 난 연방정부에 그 사실을 흘렸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그 결과가 이거야, Q. 난 두 고래 사이에 껴서 그 빌어먹을 마약왕을 제거해야 했다고. 그런데 이젠 은드랑게타가 고용한 킬러들이 쫓아오는군.”

임승대는 이골이 난 세일즈맨처럼 말했다.

“우린 정치에 엮인 거야. 최종수가 열쇠지. 열쇠가 없으면? 어떤 문도 열리지 않아.”

이규는 승대의 속내를 가늠하기 위해 뜸들였다.

“정치판의 장기말인 게 뭐? 그게 너와 내가 살아 있는 이유야.”

“Q. 솔직해져 봐. 너도 플레이어가 되길 원하잖아.”

순간 그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부정도 긍정도 나오지 않았다. 규는 어째서 바로 부정하지 못했는지 그 자신이 의심스러우면서도, 이 잠깐의 틈으로 승대가 얻을 잘못된 이해부터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승자가 되길 원해.”

이규는 한숨을 쉬듯 눈꺼풀을 내리떴다.

“이길 수 있다면 방아쇠를 당기는 건 내가 아니어도 돼. 행운이 따라주길 기도할 뿐이지.”

“넌⋯”

“최종수를 버리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각자 위치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나 본데.”

규는 시선을 올려 임승대를 형형히 쏘아보았다.

“이미 로데오는 시작됐어. 도중에 내리는 거? 그건 기권이나 탈락일 뿐이야. 플레이 전략이 아니라. 네가 거부하고 싶대도 ‘린’과 ‘23’은 한몸이고, 이 팀의 핸들러는 나야.”

그들 사이로 다시 정적이 올라앉았다. 승대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는 장난이나 실수로 포장하려는 여지를 남겨둔 게슴츠레한 흉내를 집어치우고, 약간의 신경증을 동반한 채 물었다.

“미친 황소 위에서 다 같이 어쩌자고?”

“계획이 있어.”

승대는 습관적으로 병을 잡았다가, 공연히 얼음만 입속에 털어 넣었다.

“무슨 계획.”

“우리 모두가 성공적으로 죽을 방법.”

규는 근 몇 년 간 관리되지 않아 작동하지 않는 듯 보였던 산림 감시 카메라가 절묘히 퇴창을 촬영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이규는 그 방향을 똑바로 바라봤다. 이상을 감지한 임승대가 이규의 눈길이 향한 곳을 응시했다. 산기슭에서 부엉이 울음소리가 메아리쳤다.

“라스베이거스로 가자.”

쇼를 하기 딱 좋은 도시니까.

12. “Vital”

안정적인 바이탈 비프음이 그를 깨웠다.

주찬양은 낯익은 천장을 보았다. 정적을 가르는 날선 기계음과 주렁주렁 달린 의료용 선, 하얀 커튼과 메탈 재질의 기둥들, 그리고 흔하지만 제값을 하는 천장자재. 은은한 매립등은 오랫동안 어둠에 길들여진 눈을 자극하지 않았다. 덕분에 찬양은 곧바로 이 공간의 가장 이질적인 존재를 알아챌 수 있었다.

이곳은 회사 직원이 이용하는 병원이었다. 보안이 철저해 관계자가 아니라면 접근이 불가한 곳이어야 할 테니 도심의 정부 병원으로 이송되었거나 버지니아 또는 캔자스의 한적한 군사 시설을 빌렸을 수도 있었다. 찬양은 그 자신이 꽤나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기억을 떠올리려 할 때마다 삐-하는 이명이 뇌리를 울렸지만, 폭발에 삼켜졌음에도 불구하고 시청각과 인지력 모두 정상인 걸 느끼고 있었다.

그가 꿈틀 미간을 모으자, 마침내 보조의자에 앉아 있던 와인색 폴로 티셔츠를 입은 남자가 휴대폰을 내렸다. 너른 병실에 인적이라곤 단 두 사람. 그들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칠 듯 하다 맥없이 흩어졌다. 먼저 경계를 사그라뜨린 찬양이 침묵을 지켰다. 그와 같은 아시아계 요원은 최소한 정부 인사로 보였다.

“일어났나.”

의식이 돌아온 건 며칠 전이었으나 내내 죽은 것처럼 병상에 누워 있어야 했던 주찬양은 그 한마디에 부활 신고서에 사인을 한 기분이 되었다. 남자가 무릎에 올려두었던 파일철을 뒤적거렸다.

“한국계. 콜로라도 출생. 양친은 우주군 비행사, 본인도 공과 대학을 졸업했고. 조기졸업, 조기입학 다시 조기졸업⋯ 뭐, 지루하진 않은 인생이었던 것 같군.”

제법 인생 계획이 훌륭했네. 그가 비꼬듯, 재미없는 농담을 덧붙였다. 팔랑 장이 넘어간다.

“DIA(국방정보국) 휘하 대학에서 군사학 및 암호학 이수⋯ 한국 파병이 불발되면서 군 수사관으로 전향. 모범적인 군인이었더군. 수사관으로선 엉망이었지만.”

대답을 바라는 기색은 없었다. 찬양은 몇 줄로 요약된 그의 지난 삶을 들으면서 움찔거리는 손끝을 힘주어 통제했다.

“하지만 FBI를 선택한 건 왜지?”

주찬양은 이 남자가 FBI 소속이 아니며, 그를 여전히 군인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걸 어렴풋하게 깨닫고 말았다. 찬양은 내키지 않았지만 차분히 입을 열었다.

“⋯대테러국 개편 당시 모집에 응했습니다. 시기가 맞아서⋯.”

난잡하게 얽혀 있던 지휘권을 대대적으로 조정한 국토안보부(DHS)에 의해 FBI 대테러국이 DIA의 국내 작전 권한을 넘겨 받았다. DIA는 군사조직인지라 군의 민간 개입을 억제하는 연방법에 의해 활동 제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찬양은 그 당시 마침 FBI의 위장회사에서 근무할 수 있을 만한 학력과 비전투병 복무 이력이 있었고, 그는 어쩌면 이 선택이 순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삐딱하게 웃는 남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하, 시기. 딱 마지막 재판 후로군. 반역죄를 군수비리로 바꿔주었지. 마침 그 재판에 선 장교와 같이 옷을 벗었고.”

“⋯⋯.”

“동향인에게 마음이 동했나?”

찬양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옅은 동요가 가슴께에 퍼졌다.

“불의에 침묵하기로 마음 먹었으면 동정은 발휘하지 말았어야지.”

그가 드디어 파일철을 덮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남자는 휴대폰 화면을 누르면서 무심히 말했다.

“번뜩이는 새로운 삶의 목적 따위 있었을 리가. 이쪽 인간들이야 다 그렇지. 사람을 갈아끼우는 부품으로 여기는 체제에 환멸을 느껴도 민간인으론 살 수 없거든. 배운 거라곤 죽여서 빼앗는 것밖에 없는 원시적이고 부속적인 녀석들⋯”

더없이 감정적인 말이었지만 그에게선 서슬 퍼런 이성의 단면만 보일 뿐이었다. 그는 아주 간단한 절차에 불과하다는 듯 선고했다.

“주찬양. 내 팀에 합류해라.”

징계 따위의 시시한 이야기를 할 것 같진 않았으나, 내심 각오한 것과는 결이 다른 명령이었다. 찬양은 더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왜 접니까?”

남자의 입매가 비스듬히 휘어졌다. 그건 어쩐지 미소 같았다. 그가 파일의 낱장을 형편없이 뜯어 구겨버렸다. 그리곤 남은 서류철을 병상으로 던졌다.

이불 위에 무게감이 얹혔다. 찬양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내렸다. 거기엔 새로운 신분이 있었다.

“시키는 대로 싸우는 주제에 스스로 생각하는 놈은 드무니까.”

찬양은 왠지 모르게, 한 사람을 떠올렸다. 그는 무심코 입속으로 익숙한 알파벳을 굴렸다.

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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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설의 나무늘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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