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comming
쫑규 야구au 조각
이규와 종수의 집 중간 되는 지점에 위치한 강변은 산책로로 아주 잘 꾸며진 곳이었다. 잘 깔린 보도블록 안쪽과 바깥쪽에는 가장자리가 희게 칠해진 붉은 러닝 트랙이 강이 흐르는 둘레를 따라 나있었고, 그 길을 걷다 보면 큰 공원이 나온다. 저녁이 되어서도 산책을 하거나 강아지를 데리고 나온 마을 주민으로 붐비는 공원이더라도, 어스름한 밤만큼은 이규와 종수의 공간이었다. 늦은 시간 덕분에 들짐승 그림자마저 찾아보기 힘들었다. 멀리 떨어진 강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둘은 나란히 장도 중학교 야구부에 입부한 뒤로 종종 이곳에서 만나 야간 훈련을 즐기고는 했다. 선배들 눈을 피해서 마음껏 연습하기 위해서 은밀하게 관행되었던 것이 2년이 지난 지금은 관습처럼 남은 것이다. 처음에는 그저 '배터리'로 묶인 둘이 서로의 이해관계에 맞춰 연습을 자행했지만, 지금은 종수가 잠이 들지 못하거나 혹은 이규가 낮 훈련 성과에 만족하지 못한 표정을 지었을 때 둘은 아무 말 없이 이곳에서 만났다. 그곳에 한 명이 없으면 다른 하나가 전화를 하거나 문자를 보냈다. 늦은 시간에 연락을 한다는 염려는 필요 없었다. 주로 전화를 하는 사람은 종수였고 문자를 하는 건 이규 쪽이었다.
다만 오늘은 평소와 달랐다. '나와.' 종수가 단 두 글자짜리 문자로 운을 띄운 것이다. 규는 늘어진 흰 티에 네이비 체크무늬 잠옷 바지를 갈아입을 틈도 없이 허겁지겁 밖으로 나갔다. 종수의 메시지를 이북 화면 위에 팝업으로 띄워둔 채로 늘 현관 앞에 두던 더플백을 어깨에 걸치고 뛰었다. 말하지 않았는데도 지레 찔린 것이 있는 사람의 태도였다. 규는 바람을 가로지르며 생각했다. 오늘 마지막으로 피칭한 투구에서 제법 나쁘지 않은 성과를 보였고, 만족할 만큼 했다는 듯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연습 공으로 60구 정도를 던지는 내내 종수와의 합도 좋았다. 근래 비공식으로 친선경기가 진행되는 것 말고는 큰 일정이 없으니, 외부인이 끼어들 틈도 없다. 종수의 정신이 다른 곳으로 팔려 잠을 이루지 못할 구석은 말 할 것도 없고. 다른 원인이 있다는 건데….
가로등 불빛과 특유의 시커먼 옷 덕분에 겨우 희끄무레한 인영으로만 존재감을 보이는 종수는 밤과 공원과 꼭 하나가 된 것 같았다. 잔뜩 뭉쳐진 채로 다시는 풀 수도 없도록. 본래부터 그 공간에 종수가 존재했다는 듯이.
“전화 하지. 오래 기다렸어?”
규가 살갑게 말을 붙였다. 종수는 대답하지 않고 턱으로 자신의 앞을 가리켰다. 까닥이기만 하는 움직임에 규가 어깨를 움츠리고 작게 혀를 찼다. 아무래도 오늘 야간 훈련은 꽤 고될 것 같단 생각이 든다. 이규는 새로 장만한 글러브를 끼고서 충분히 공을 주고받을 수 있을 만큼 거리를 벌린 채로 종수를 흘끗 쳐다봤다.
이규와 눈을 마주친 종수가 가타부타 말도 하지 않고 팔을 힘껏 휘둘러 공을 던졌다. 이규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이었다. 강한 송구 때문에 공이 이규를 스쳐 땅이 움푹 파일 정도로 박혔다가 데구르르 굴러갔다. 멍청하게 서 있던 규가 어, 어. 하고 엉거주춤 바닥을 기어 공을 주워들었다. 종수 오늘따라 급해 보이네. 볼을 홀쭉하게 오므린 이규가 쩝 소리를 냈다.
“규. 이게 뭐야.”
“당연한 걸 물어봐. 야구공이지.”
“이게 뭐냐고 이규……”
배신이야.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종수의 눈이 딱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아서 이규는 뜨끔했다. 엊그제 상명고와 치른 비공식 경기를 끝으로 이규는 장도 고등학교 2학년 투수 포지션에서 내려갔다. 정확히는 조금 더 이규가 있어야 하는 자리로 가게 되었다. 투수에서 외야수로. 이규의 큰 키와 빠른 상황 판단 능력 그리고 어깨가 더 많이 필요한 곳으로 갔다. 같은 포지션인 포수가 되어 라이벌을 자처한 것도 아니고 이규가 빠진다고 해서 종수에게 공을 던질 투수가 더 이상 없는 실정도 아니지만, 그와 가장 많이 배터리를 짰던 최종수에게는 다소 충격적인 소식이었나보다. 이해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규와 종수가 함께 한 시간은 곧 10년이 다 되어갔다.
종수는 단 한 마디 상의도 없이 멋대로 마운드를 나간 자신의 투수에게 단단히 골이 난 티를 감추지 못했다. 야밤에 불러낸 주제에 용건을 나누기 전부터 쓰고 있는 보호 마스크나 투구를 받을 준비가 되어있는 자세를 보면 뻔했다. 이래서야 괜히 허락받지 못한 기분만 든다고. 이규가 속으로 불만을 토했다. 그것들을 모두 종수에게 말할 생각일랑 없었다. 포지션 변경의 이유도, 종수의 완고한 태도에서 오는 불평도.
이규는 여러모로 주제를 알았다. 수비를 잘하는 야구 선수였지만 눈에 띌 정도로 특출난 투수가 되기에는 모자란 면이 있었다. 장도 고등학교는 전국에서 손에 꼽히는 고교 야구 명문이기에 좋은 선수들이 매년 각지에서 올라오곤 한다. 근래 야수에서 투수로 포지션을 바꾸거나 투타까지 겸업하는 선수들이 많아진 마땅에 굳이 투수가 아니더라도 쓸모 있다는 평가를 받는 이규로선 현재 상태로 더 넓은 그라운드로 나갈 기회가 충분히 주어질 것이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러던 찰나 코치가 연습 경기 선출 자리를 두고 선뜻 제안한 포지션 변경을 거부하기는 힘들었다.
가끔은 불가피한 선택도 있어. 이런 게 겨우 내 끝인가보다 할 때. 사실 그게 진짜 끝은 아닌데…. 규, 너는 계산이 빠른 애니까 알 거다. 나쁘지 않은 기회야. 코치의 말이 웅웅거린다. 이규는 급하게 뛰어오는 와중 반사적으로 챙긴 낯설게 생긴 글러브를 내려다보면서 자신의 어깨 위에 얹어졌던 손길을 떠올렸다. 너는 아직 어리고, 어깨도 좋으니까…. 변명처럼 덧붙였던 말들과 기회처럼 주어졌던 제안들. 자신보다 야구공을 수천 번은 더 던지고, 자신 같은 선수를 수백 명은 더 만나봤을 사람의 손길에는 어떤 애잔함이 담겨있었다.
이규와 길이 덜 들여진 글러브를 노려보는 종수의 시선이 따갑게 꽂혔다. “그걸 물어본 게 아니라는 거 너는 씨.…” 종수의 볼멘 목소리에 규는 대답을 유보하는 일을 그만 두기로 했다. 사실 일이 왜 이렇게까지 되었는지 생각을 더 길게 할 필요도 없이 그가 골라낼 대답도, 종수에게 하고 싶은 말도 단 한 가지였다.
“종수야.”
“…….”
“알아. 너무너무……”
“…잘 알아.” 알고말고. 그렇게 잘 아는 사람도 없을 걸.
자신이 화풀이하듯이 던진 그것을 종수가 모를리 없다. 실밥은 108개. 중량은 약 143g. 포털에 야구공을 검색하면 나오는 사전적 의미까지 이미 꿰고 있을 것을 분명히 안다. 다만 종수가 이규한테 물은 건 그와 함께 배터리를 짜고 꾸렸던 시간. 그 자체인 걸 이규는 모를 수가 없었다. 그랬기에 더욱 말하지 못했다.
타고난 재능에 노력까지 함께하니 종수는 어느 또래들보다 훨씬 일찍 재능을 꽃피운 축에 속했다. 그건 누군가를 지도하는 눈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야구를 조금만 볼 줄 안다면 모두가 알 수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빛나는 것. 그라운드가 훤히 보이는 자리에 앉아 모든 판을 읽고 짜면서 수비를 구축하는 것. 종수는 탁월했다. 이규는 종수와 함께 누군가의 상대가 되어 공을 던질 때는 그의 볼 배합에 감탄을 내둘렀으며, 홈런을 날린 뒤 포효하는 뒷모습을 보고 있자면 미칠 듯이 자랑스럽기도 했다. 다만 그 탁월함이 누구에게나 긍정적인 느낌을 주는 건 아니다. 어느 코치나 감독이 종수의 뒤에 주렁주렁 달릴 때, 어떤 이유로 선발에 들지 못해 종수가 자기가 아닌 다른 선수와 배터리를 짜 합을 맞출 때 밉기도 했다. 불안하기도 했던 것 같다. 보이지도 않는 재능이 너무 아득해서 무엇보다 순수하고 정제된 타고남과 꾸준함이 무서웠다. 이규는 그런 종수에게 이해받고 싶지 않았다. 이해를 구걸하기도 싫었다. 리틀 야구단에서 포지션을 정하며 처음 공을 주었을 때부터 시작해서 초등학교와 중학교 내내 붙어 다니며 배터리 콤비로 이름을 날리고 둘만의 사인을 주고받던 시간은 이규한테도 헛된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이런 추한 질투와 시기와 그 코치에게 받은 동정 같은 것을…. 어떻게 말하겠는가. 규는 그 시간을 지키고 싶었다.
코치의 제안이 마냥 달게만 느껴지지는 않았다. 곧 있으면 추계 대회인데. 이렇게 무턱대고 포지션을 완전히 바꾼다는 건 감수해야 할 것이 많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런 저런 사정을 차지하고서도, 규는 계산하는 것을 그만두고 단지 조금 더 종수와 한 그라운드에 서고 싶다는 마음이 있는 쪽으로 추를 기울였다.
어쩌다 학창시절에 스쳐지나갈 수 있는 투수가 아니라 오랜 동료 혹은 선수로. 그리고 같은 그라운드에 조금 더 많이 설 수 있는 선출로 나란히. 내가 원한 건 그것 뿐이었는데, 그런 마음은 말이 아니라 맥락으로는 전하기 어려운 걸까. 나도 선택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는 걸 꼭 알렸어야만 하나. 눈치채는 일에 우리들의 시간으로는 모자라느냔 말이다…. 이규가 겉면의 광택이 사라질 때까지 실밥이 닳고 손때가 충분히 묻을 만큼 던졌던 공을 한참 동안 문질렀다.
규는 입을 떼지 않았고, 종수 역시 이어질 말을 더이상 재촉하지 않았다. 여름과 가을의 편린을 지나가는 바람이 널찍히 벌어진 둘 사이를 시원하게 메꿨다. 시간의 흐름이 불명확하게 느껴졌다. 십 분에서 아마 오 분 언저리. 혹은 그것보다 약간 더일지 모른다. 그 시간 동안 종수는 입을 여전히 삐딱하게 다물고 있었고, 보호구 사이로 보이는 미간은 잔뜩 구긴 채로 볼을 불뚝거렸다. 다른 때였다면 종수, 애교부리는 거야? 하고 장난을 쳤을 터였다.
이규는 어쩐지 이 기다림이 굉장히 지난하고 또 버겁게 느껴졌다. 우리가 여기까지일 리가 없잖아. 그렇게 말하는 모양새와 미트 정중앙에 꽂힐 한 구를 언제까지고 기다려 줄 수 있다는 저의와 언제든 너는 던지고 말 것이라는 신의가 무엇보다 확실한 계기가 되어 자꾸만 규를 마운드로 끄집어냈다.
그러나 지금 규의 발밑은 평평했다. 성마른 잔디 특유의 질감이 신발 밑창에서부터 올라왔다. 이규는 무언가 다짐한 사람처럼 강하게 공을 쥐었다. 어느 때보다 세게 공을 그러쥔 상태로 검지와 중지 그리고 엄지에 생긴 굳은살이 공의 표면에 둔하게 짓눌렸다가, 근육이 내지르는 힘으로 강하게 뻗어 나와 마침내 휘어지는 감각을 복기했다. 굳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 자세를 잡거나 앞에 누군가가 있다고 상상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매일 수십번은 더 던져댔던 관성을 불러일으키기만 하면 됐다.
“종수.“
”어.“
”가끔은 불가피한 선택도 있어.“
”마음에 안 들어.“
”하하, 그래도.“
……. 그렇기에 우리는 함께 할 걸? 어떤 형태로 어떤 식으로든 말이야. 옆으로 비켜선 이규의 자세를 보고 종수가 검지와 중지를 핀 채로 가랑이 사이를 가리켰다. 여전히 납득하지 못하다는 투였다. 가로등 불빛이 어스름하게 깜빡거려도 이규는 다소 고집스럽고 빠르게 변화하는 종수의 손동작을 읽었다. 이규가 던질 수 있는 공 중 가장 속도가 있으면서 심지 곧은 것이었다. 긴 시간을 들여 단련한 규만의 것을 주문하는 그를 보며 규는 어깨를 잔뜩 뒤로 젖혔다. 마지막 결정구가 미트 정중앙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가 경쾌한 소리를 냈다. 둔탁한 퍽 소리가 들린 그 순간 어쩐지 다음에도, 그 다음번에도 이런 공을 던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언제든지 얼마든지 그의 포수가 원하는 만큼. 다만 마운드가 아닐 뿐이다. 그리고 그 기분을 종수도 느꼈으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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