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RATCH
주간창작 챌린지 6월 2주차: 밴드
만석이 되는 일이 드문 평일 공연이지만, 오늘 라이브 클럽에는 좌석만이 아니라 입석 손님들까지 들어찼다. 최근 인디 씬에서 독보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밴드, 장도가 공연 리스트에 있어서다.
장도는 아직 정규 앨범은 없지만 디지털 싱글로 발표한 세 곡이 모두 좋은 평을 받고 있는 모던락 밴드였다. 지방의 작은 영화제에서 급한 주말 공연 섭외가 들어오는 바람에 예정되어 있던 라이브 클럽 공연을 평일로 돌린 거였는데, 다행히 생각보다 많이 보러 와주었다. 관객의 수에 신경이 쓰이는 것은 엔터테이너의 본능 같은 것이라, 최종수는 겉으로 무심한 얼굴을 하면서도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관객들의 호응이 좋았던 덕에 감정 기복이 심한 보컬 승대도 좋은 퍼포먼스를 보여주었고, 연주하는 밴드 멤버들 모두 실수가 없었다. 밴드 리더로서, 기타리스트로서, 그리고 평점에 인색한 청객으로서, 종수는 오늘 공연에 나쁘지 않았다는 종합 평가를 내렸다.
잠시 밖으로 나갔던 막내 키보디스트 찬양이 대기실로 돌아왔다. 악기를 정리하는 형들 사이를 오가며 클럽 바에서 받아온 생수병을 나눠준다. 마지막으로 베이스의 규에게 물병을 건네며 찬양이 물었다.
“규 형. 조형이라는 밴드 알아요?”
“어? 너 조형 몰라? 몇 년 전에 엄청 유명했는데. 음원 순위도 꽤 높게 올라갔고 공중파 음방 섭외도 들어올 정도로 잘나갔어.”
“몇 년 전이요?”
“거기 보컬 목이 망가지는 바람에 순식간에 몰락했거든. 지금은 공연도 거의 안 뛰는 망한 밴드야. 해체는 안 했던 거 같긴 한데.”
취미로 피아노를 치다 규의 눈에 띄어 밴드에 합류하게 되기 전까지 인디 뮤직에 관심조차 없었던 찬양은 전혀 모르는 눈치다. 잠시 생각하던 규가 종수를 돌아보았다.
“종수! 조형의 그 보컬 이름이 뭐더라?”
“…잘 몰라.”
종수의 대답을 들은 규는 다시 찬양에게 시선을 돌렸다. 종수의 대답 앞에 생겨난 몇 초간의 망설임은 알아채지 못한 듯했다.
“아, 그 사람 이름이 기억이 안 나네. 아무튼 그 보컬이 노래를 진짜 잘했거든. 아깝게 됐지. 근데 조형 밴드는 왜?”
“밖에 조형 보컬이 와 있다고 수군거리는 사람이 많더라고요.”
“그래? 지금 조형은 기타 치던 친구가 보컬도 겸임하고 있는 걸로 아는데. 그래도 아직 조형 팬이 꽤 남아있나 보네.”
그 대화를 끝으로 규와 찬양은 악기를 정리하는 일로 돌아갔다. 기타와 백팩 정리를 마친 종수는 먼저 일어나 대기실을 나섰다.
장도의 기타리스트를 알아보고 환호하는 사람들에게 가볍게 눈인사로 응대하며 클럽을 가로지른 종수는 바 카운터로 향했다. 기타 케이스와 백팩을 바닥에 내려놓고 맥주를 주문하기 위해 손을 들었다. 공연과 공연 사이의 휴식 시간에 술과 음료를 주문하는 사람들로 바의 주문은 꽤 밀려 있는 모양이었다. 바를 맡은 직원은 반쯤 정신이 나간 표정을 한 채 종수의 부름을 좀처럼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카운터에 기대어 기다리는 종수의 어깨가 누군가와 부딪쳤다. 반사적인 사과를 입에 올리며 돌아보니 눈에 익은 얼굴이었다. 찬양이 말했던 대로 조형의 보컬이 와 있었다. 조형의 두 번째 보컬이자 기타리스트. 이름이 이초원이던가 이평원이던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종수와 마찬가지로 반사적인 사과를 한 조형의 보컬이 뒤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형, 빨리 와요! 공연 전에 받으려면 지금 주문해야 한다고요.”
그 외침에 저만치 모여 있던 사람들의 군집이 깨어졌다. 그 가운데서 한 남자가 사람들에게 고개 숙여 양해를 구하며 빠져나온다. 볼캡을 깊게 눌러쓰고 어깨 위로 긴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린 남자였다.
바 카운터로 다가온 남자가 조형 보컬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높이 매달려 있는 블랙보드 메뉴판을 바라보았다. 고개가 들려 볼캡 챙이 드리우는 그림자가 사라지고 조명에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종수는 순간 숨을 들이켰다. 박병찬이다. 조형 밴드의 전 보컬리스트. 공중파 데뷔를 앞두고 목이 망가져 사라졌던 사람.
3년 전, 종수는 친구들에게 이끌려 간 락 페스티벌에서 그의 스테이지를 처음 보았다. 조형이 입소문을 타고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조형은 그리 실력이 뛰어난 밴드는 아니었다. 열심히도 하고 즐겁게도 하지만 그건 인디 밴드라면 어느 팀이나 갖춘 소양이다.
솔직히 조형의 곡들은 종수의 취향이 아니었다. 아직 일개 청자에 불과하던 무렵이지만, 앞으로 만약 음악의 길을 가게 된다면 사람들을 흔들고 긁고 휘저어 그들의 영혼에 충격을 남기고 싶었다. 그런 그에게 조형의 곡들은 너무 나약하고 다정했다.
그런데도 조형의 스테이지에서 눈을 뗄 수 없었던 건 오직 보컬 박병찬 때문이었다. 박병찬은 놀랄 만큼 맑은 미성이었지만 결코 가냘프지 않았다. 그 안에는 사람들을 거침없이 흔들고 쓰러뜨릴 수 있는 거대한 폭발력이 내재되어 있었다. 그건 아름다움과 강함을 동시에 가진 목소리였다.
박병찬의 목소리는 기타를 연주하고 작곡을 연습하고 있던 종수에게 일종의 계시로 내려왔었다. 저 목소리에 걸맞은 곡을 만들고 싶다. 저 안에 깃든 힘을 끌어내고 싶다. 저 목소리로 내 곡을 노래하게 하고 싶다.
친구인 규를 끌어들여 밴드를 만들자는 계획을 진행하던 중, 어느 소규모 락페에서 조형 밴드가 공연을 망치고 도중에 스테이지를 내려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조형 밴드 안에 내분이 있었다느니, 누가 누굴 때렸다느니, 조형이 해체 발표를 했다느니 확인되지 않은 온갖 뜬소문이 인디락 커뮤니티를 한참 달구었다. 모든 소문이 잠잠해진 후에 남은 진실은 성대결절로 박병찬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더 이상 노래할 수 없는 보컬은 밴드를 탈퇴했고, 가장 잘나가는 인디 밴드였던 조형은 그들이 올라갔던 높이 이상으로 내리막을 하염없이 굴러떨어질 뿐이었다.
혼자 기타만 끌어안고 살던 종수를 방 밖으로 끌어낸 사람의 어이없는 몰락은 상당한 충격이었다. 종수는 인디 씬에서 자취를 감춰버린 그를 처음에는 안타까워했고, 안타까움이 한계에 다다른 후에는 경멸했다. 멍청한 새끼. 노래하는 인간이 제 목 관리도 제대로 못하다니. 잠깐 반짝하고 사라진 시시한 새끼. 경멸조차 동이 난 후에는 그를 미워했다. 가까이 갈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주지도 못하다니. 버텨내지도 못한 쓸모없는 새끼. 급기야 종수는 박병찬의 목소리를 생각하며 조금씩 만들어가고 있던 작곡 악보를 찢어버렸었다.
“초원아. 여기 칵테일도 있다. 칵테일 마실까?”
“아, 형. 이 정신없는 와중에 미안하게 칵테일을 어떻게 주문해요?”
“그런가? 아쉽네. 그럼 재미없게 기네스나 마셔야지.”
어깨가 닿을 정도로 가깝게 선 조형 전 보컬과 현 보컬의 대화가 종수의 귀에 들려왔다. 내용 같은 건 체로 떠낸 물처럼 그저 흘러내려 사라진다. 종수의 귀에 남은 것은 오직 박병찬의 목소리였다. 기억하는 음색과 다르다. 낯설다. 섬뜩했다. 이전의 아름다운 미성은 찾아볼 수 없었다. 박병찬이 내는 소리는 굵어졌고, 거칠어졌다.
바 카운터 주위에 몰려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나간다 싶더니 등 뒤 무대 쪽에서 마이크 노이즈가 울렸다. 누군가 오프닝 인사를 하고 있었다. 휴식 시간이 끝나고 다음 공연이 시작된 거였다. 결국 술은 주문도 못 했는데.
종수는 그대로 몸을 돌려 바 카운터에 허리를 기댄 채 무대를 향했다. 오늘의 세 공연 중 마지막 무대로, 셋리스트의 상당 부분을 커버곡으로 채운 밴드가 스테이지에 서 있었다. 인기나 주목도로 치면 장도가 마지막에 서야 했지만 연차가 오래된 선배 밴드에게 파이널 스테이지를 양보한 거였다.
밴드의 오리지널 곡이 두 곡 지나가자, 인디로 시작했지만 이젠 인디라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성공한 밴드의 히트곡 전주가 나오기 시작했다. 여성 보컬의 톤에 맞춰 키를 올려 편곡한 커버 연주가 클럽 안을 울렸다. 친숙한 리듬에 무심코 발장단을 맞추는 종수의 귀로 여성 보컬의 노래에 겹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곁에서 노래를 따라 부르는 사람이 있다.
조형의 현 보컬 이초원은 이런 톤으로 노래를 하나. 이전의 박병찬과는 많이 다르네. 그런 생각을 하며 종수는 흘끔 곁을 확인했다.
조형의 전과 현 보컬 두 사람은 종수와 나란히 서서 카운터 바에 기대어 스테이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종수의 어깨 옆에 선 이초원은 입을 다물고 리듬에 맞춰 고개를 까닥이고 있을 뿐이다. 노랫소리는 그의 너머에서 나오고 있었다. 여성 보컬이 부르는 커버곡을 따라 부르고 있는 것은 이초원의 어깨에 팔을 두른 박병찬인 것이다.
나직이 따라 부르는 노래는 말할 때보다 한층 무거워진 톤이었다. 박병찬의 음색은 더 이상 맑지 않다. 구절의 끝마다 허스키한 긁힘이 희미하게 따라붙는다. 가장 처음 느낀 감정은 불쾌감이었다. 낮게 가라앉은 음이 종수의 기억에 남아있는 박병찬의 미성을 움켜잡고 추락하는 것만 같았다. 짙은 안개 속으로 떨어뜨리고 종수가 다시는 찾아낼 수 없도록 감춰버린다.
원래 박병찬의 목소리. 그게 어땠더라? 투명하고 여리게 시작하는 첫 소절은, 한껏 높이 치솟는 음역을 돌파하는 힘은 어떤 느낌이었지? 종수는 곁에서 들려오는 안개 같은 노래 속에서 잃어버린 목소리를 찾아 하염없이 헤매는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굳건한 안개는 종수를 조롱하듯 감춰버린 것을 다시 내놓지 않는다.
무대 위의 노래보다 곁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보니 문득, 가슴 언저리에서 묘한 감각이 느껴졌다. 짜증과 비슷하지만 조금 결이 다르다. 두 개의 폐 사이에서 무언가 부풀어 오르는 것 같다. 작고 섬세한 간질거림이 최종수의 호흡을 긁는 것처럼.
곡이 끝나고 박수가 나오자마자 종수는 눈앞에 놓인 박병찬의 팔을 톡톡 두드렸다. 박병찬이 고개를 기울여 이초원 너머에 있는 종수를 확인했다. 좀 더 잘 보려는 듯, 한 손으로 모자챙을 살짝 들어 올리더니 눈을 크게 뜨며 웃었다.
“최종수? 너 장도의 최종수 맞지?”
종수는 흠칫 놀랐다. 현재 가장 잘나가는 실력파 밴드 장도, 그중에서도 밴드 리더이자 천재 기타리스트라 불리는 자신을 모를 사람은 인디 바닥에 없다고 생각해 왔다. 아마 3초쯤 전에도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 사람이 자신을 안다는 것에 놀라 그만 말이 목에 걸리고 말았다.
“…박병찬.”
“오? 네가 날 알아?”
박병찬은 두 사람 사이에 끼인 이초원의 가슴을 툭툭 치며 즐겁게 웃었다.
“초원아. 장도의 기타가 형 아는 거 봤지? 형이 아직 이 정도로 유명해.”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본 이초원이 어깨에 걸린 박병찬의 팔을 걷어내고 몸을 빼었다. 편히 대화하라는 듯 박병찬을 종수 쪽으로 밀어 보내고 자신은 등을 돌린다. 공연이 시작되어 한가해진 카운터 바에 미처 못한 주문을 하려는 모양이다. 그 광경은 시야 안에 고스란히 비치긴 했지만, 머리에까지는 전달되지 않았다. 종수는 눈 앞으로 다가온 박병찬에게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너 노래… 할 수 있어?”
“엥?”
“다시 노래 못한다는 소문 돌던데.”
“그냥 성대결절이었는데 뭘. 꽤 안 좋아서 수술도 받고 음성 치료도 오래 하긴 했는데 거의 3년이나 지났잖아. 이젠 회복했지.”
“그럼 이제 다시 노래하는 거야?”
“이미 하고 있어. 우리 밴드에서. 초원이 노래 사이에 한두 곡 정도 부르는 정도지만. 공연장도 여기보다 훨씬 조그만 클럽이고.”
박병찬이 다시 노래를 한다. 영영 음악에서 떠난 줄 알았던 사람이 다시 노래한다. 트레몰로 피킹을 연주하는 리듬으로 심장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격렬한 속주처럼 몰아쳐 오는 떨림에 마음이 급해져 종수는 그만, 3년 전에 전하지 못했던 말을 꺼내고 말았다.
“너… 네가 내 노래 불러줬으면 좋겠어.”
“오잉?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조형에 곡을 주겠다는 거야?”
박병찬의 어깨 너머로 이초원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깜짝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종수는 당황했다. 반색하는 박병찬의 얼굴이나 이초원의 놀란 표정보다 더 그를 당황하게 만든 것은 스스로 한 말이었다.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박병찬은 이제 더 이상 종수를 매혹시켰던 미성으로 노래하지도 못하는데.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럼 뭔데? 혹시 스카우트 제안이야?”
박병찬은 신난 얼굴로 등 뒤를 돌아보았다.
“초원아. 형이 아직도 이렇게나 인기 있다니까. 늘 긴장감을 가지고 형을 존경하도록….”
짐짓 난처한 척하는 장난기 섞인 말은 험악해진 이초원의 얼굴과 마주치자 졸아붙어 사라져 버렸다. 다시 종수를 향한 박병찬이 피식 웃으며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향하는 방향을 따라가 보니 벽가에 기댄 임승대가 몇몇 팬에게 둘러싸여 웃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제의는 고맙지만 거절할게. 장도에는 좋은 보컬 이미 있잖아.”
그런 의미가 아니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머릿속은 박병찬의 거침없는 말과 행동에 더욱 복잡하게 헝클어지기만 했다. 종수는 다급한 마음에 박병찬의 팔을 붙잡았다. 박병찬은 춤이라도 추는 것처럼 몸을 빙글 돌리며 잡힌 팔을 빼내었다.
“너에게는 보컬이 있고, 나에게는 우리 조형 밴드가 있지.”
겨우 다시 노래를 부르게 된 보컬을 채어가려는 종수를 경계하듯 이초원이 매섭게 노려보며 박병찬을 끌었다. 그의 손에 이끌려 가며 박병찬은 종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또 보자, 태풍.”
마치 노래하는 것처럼 곡조를 붙인 인사가 멀어진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도, 음의 끝에 희미하게 비치는 허스키한 긁힘도 금세 클럽의 소음에 섞여 사라져 버렸다.
또 하나의 히트곡 커버가 끝나고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린 종수는 클럽 안을 돌아보았다. 어쩐지 머리가 멍했다. 아직 짙은 안개 속을 더듬고 있는 것처럼.
종수는 바닥에 내려놓았던 기타와 백팩을 둘러메고 문으로 향했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 클럽 문을 나서자마자 벽을 따라 돌아 골목으로 들어선다. 가로등 빛이 미치지 않는 클럽 건물 끝으로 가 벽에 등을 기대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백팩을 열어 이어폰과 아이패드를 꺼내었다. 이어폰을 귀에 꽂자 클럽에서 새어 나오는 드럼 비트가 지워졌다. 고요 속에서 종수는 아이패드의 작곡 앱을 열었다.
종수는 가슴 속을 간지럽히던 음색이며 희미하게 남은 허스키한 긁힘을 천천히 되새겨보았다. 문득 음 몇 개가 떠올랐다. 머리를 뒤덮은 짙은 안개를 흐트러뜨리는 바람처럼 코드가 만들어진다. 종수는 급히 액정을 두드려 떠오르는 음이며 코드를 채워 나갔다.
음악을 하게 된다면 사람들을 흔들고 휘젓고 싶었다. 사람들의 약한 부분을 찌르고 긁어 그들의 영혼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싶었다. 그런데 상처를 입은 쪽은 종수 쪽이었다. 변해버린 박병찬의 목소리에 생겨난 허스키한 울림이 종수의 가슴을 긁어 작고 희미한 상처를 내버렸다. 아프진 않지만 지워지지 않는 흠집이다. 이런 방식으로 사람을 긁어놓는 방법도 있구나. 처음 알았다.
누군가 종수의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이패드 안에서 만들어지는 음에 집중하는 동안 누군가 다가오는 것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갑작스레 현실로 끌려 나온 정신은 옆에 앉은 사람이 박병찬이라는 것만 겨우 인식할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박병찬은 종수의 귀에 걸린 이어폰 하나를 빼어 제 귀에 꽂고는 아이패드를 낚아채었다. 조금 전까지 만들고 있던 곡이 한쪽 귀에만 남은 이어폰을 통해 울려 퍼졌다. 박병찬이 재생 버튼을 눌러버린 것이다.
“아이 씨발, 당장 꺼! 그거 이리 내놔!”
박병찬의 목소리를 생각하며 만들고 있던 곡을 바로 당사자가 듣고 있다. 들킬 리 없다고 생각 하는데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종수는 급히 팔을 뻗어 아이패드를 되찾으려 했다. 하지만 박병찬은 순순히 내어주지 않고 버틴다. 바닥에 나란히 주저앉은 채 한동안 실랑이를 벌인 후에야 겨우 아이패드를 되찾아 정지 버튼을 누를 수 있었다.
아이패드를 빼앗기고도 박병찬은 즐거운 얼굴을 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웃음 끝에도 살짝 거친 허스키한 음이 묻어난다.
“뭐야. 너 왜 여기 있어? 어디서 나타났어?”
“초원이가 아는 형님을 만났길래. 나는 모르는 사람이고 해서 먼저 나왔지. 그리고 골목을 들여다보니 짜잔, 웬 시커먼 덩치가 쭈그리고 앉아 있길래 와 봤더니 엄청 좋은 곡 쓰고 있네. 좀 더 들어보고 싶었는데.”
좋은 곡이라는 칭찬은 내심 기뻤지만 아직 얼굴의 열기가 채 다 가라앉지 않았다. 종수는 아이패드를 다시 뺏기지 않도록 박병찬과 먼 쪽 손으로 단단히 움켜쥐고 맞붙은 어깨를 살짝 떼어냈다. 그러자 박병찬이 떨어진 거리만큼 종수를 향해 몸을 기울여 왔다.
“곡 진짜 괜찮더라. 근데 너네 장도랑은 분위기가 좀 안 맞는 거 같다. 벌써 이미지 변화 시도야?”
“…장도에서 쓸 곡 아니야.”
“그럼? 아, 혹시 우리 조형에 주려고?”
“뭔 개소리를 해.”
지금의 조형이 어떤 음악을 어떤 수준으로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3년 전 보았던 공연을 생각하면 종수의 기준으로 서툴고 물렁하기만 한 조형 밴드에게 이 곡은 터무니없이 아깝다. 박병찬은 거절에도 물러서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최종수 너, 곡 엄청 많이 쓰고 대부분 버린다며? 하나쯤 줘라. 장도의 천재 기타리스트가 만든 곡 받았다고 홍보해서 우리도 좀 더 큰 클럽에서 공연하게.”
“그러니까 내가 너네 밴드에 왜 곡을 주냐고.”
“치사하네. 치사 태풍.”
“아니, 뭔….”
박병찬의 말끝에 온 단어가 뒤늦게 마음에 걸렸다. 그러고 보니 박병찬은 클럽에서 헤어질 때도 종수를 같은 호칭으로 불렀었다. 또 한 발 뒤늦은 위화감이 어깨 위로 떨어졌다. 설마….
한때 최종수는 태풍이라고 불렸었다. 중학생 때 시작한 유튜브 채널에서 생겨난 별명이었다. 얼굴은 잘라내고 연주하는 손과 기타만 보이도록 각도를 맞춘 연주 영상을 올리는 채널이었다. 채널 구독자들에게서 종수는 천재 소년이라고도 불렸고, 기타 신동이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스티브 바이의 커버 연주 영상을 올렸던 날 ‘좋아요’를 엄청나게 받은 댓글 하나가 종수의 별명을 종결지어 버렸다.
태풍이 몰아치는 것 같은 연주였다! 나는 이제 이 친구를 태풍이라 부르련다!
그 뒤로 구독자들은 종수를 태풍, 혹은 태풍 소년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꽤 자랑스럽고 뿌듯했다. 하지만 중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는 이미 그 별명이 부끄럽게 느껴지기 시작했었다. 그래서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에 채널을 닫아 버렸었다. 기타리스트 태풍의 정체는 중학 때부터 친구였던 규 말고는 아무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그때의 별명을 말한 건 아니겠지?
침묵이 길어지자 박병찬이 종수의 얼굴을 살피듯 들여다보았다.
“기타리스트 태풍 소년 그거 너 맞잖아.”
“…아닌데.”
대답은 너무 늦었다. 당황해 목소리가 살짝 갈라지기까지 했다. 이래서는 부정한 의미가 없다. 박병찬은 키들거리며 웃고, 종수는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알았어?”
“손 모양이랑 버릇. 나 작년에 장도 밴드 공연 네 번이나 봤다. 락페에서 한 번, 클럽 공연 세 번. 너 밴딩 할 때 힘으로 돌리는 버릇 여전하더라. 그래도 스트로크 길어지면 손 늘어지는 버릇은 고쳤던데.”
“…안 그러거든?”
“안 그러긴 인마. 유튜브에서도 안 그런다고 우기더니.”
무심코 부정하려다 보니 떠오르는 것이 있다. 유튜브 채널에서 자꾸만 나쁜 습관들을 지적하는 구독자가 있어서 댓글을 달아 싸웠던 적이 있었다. 밴딩이며 스트로크 버릇도 그 사람이 모두 지적한 것들이었다. 마음에 걸려 결국 하나하나 나쁜 습관들을 고쳐나가긴 했었지만. 그 유튜브 계정명이 뭐였지?
“잠깐, 박병찬. 혹시 그….”
“너 그때 중딩이었나? 그때부터 기타 실력 진짜 엄청났지. 나 그때 이런 녀석이랑 같이 밴드 하면 끝내주게 재밌겠다고 생각했다. 될 거라고 생각은 안 했지만, 일단 찔러는 보려고 혹시 같이 밴드 해볼 생각 있는지 물어보려는데 채널 닫아버렸더라.”
물어볼 틈이 없다. 박병찬은 제 할 말만 멋대로 이어가고 있다. 그래도 기분 좋은 이야기였다. 기타 실력에 대한 칭찬도, 박병찬과 함께 밴드를 시작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관한 이야기도 썩 듣기 좋았다.
만약 채널을 닫지 않았고 박병찬의 제안을 받았다면 어땠을까. 아름다움과 힘을 모두 가진 그 미성이 종수가 만든 곡을 노래하는 걸 들을 수 있었을까. 그러면 박병찬이 목소리를 내지 못해 무대를 망치고 스테이지를 내려가는 것을 보게 되는 건가. 박병찬이 밴드를 탈퇴하고 떠나는 것을 지켜보게 되는 건가. 생각이 거기에 미친 순간, 기분 좋았던 이야기는 또 종수의 가슴에 작은 상처를 입히고 말았다. 이 사람과 함께 있으면 모든 것이 상처로만 남는다. 아주 작고 작은 흠집이지만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된다.
박병찬이 입을 다물어버린 종수를 툭툭 쳤다.
“야, 최종수. 진짜 아까 그 곡 완성해서 조형에 주지 않을래? 어차피 장도에는 안 맞는 곡이잖아. 형아 재기의 발판을 마련해준다 생각하고.”
“지랄 마. 조형에 곡 안 준다고. 그리고 존나 못하는 너네 밴드가 이 곡을 제대로 연주할 수나 있겠냐?”
“이 새끼, 아주 막말하네. 내가 노래로 어떻게든 커버해 볼 테니까 일단 줘 봐.”
꽤 거칠게 나온 말에도 별로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 박병찬은 느긋한 소리로 졸라 댔다. 그러고는 한번 들은 그 멜로디를 외워버렸는지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종수의 머릿속에만 있는 미완성의 곡이 가사도 없이 무의미한 발음으로 채운 노래가 되어 공기 사이로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소절 끝마다, 음 하나하나마다 묻어나는 허스키한 소리가 다시 또 안개처럼 몽롱한 공간을 만들어낸다. 종수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이미지 그대로다.
종수는 사람의 영혼에 상처를 남길 수 있을 정도의 곡을 세상에 내놓고 싶었다. 아직 그가 만들고 연주하는 곡들은 그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 적절한 도구를 구한다면 달라질지도 모른다. 사람을 몽환적인 안개 속에 빠뜨려 길을 잃게 만들고, 초조해진 마음을 긁어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입히는 목소리 같은 무기를 손에 넣는다면.
모르겠다. 박병찬의 말대로 장도에는 이미 좋은 보컬이 있고, 박병찬에게는 조형 밴드가 있다. 지금으로서는 종수의 손에 박병찬의 목소리가 쥐어질 일은 없어 보인다. 그래도 종수는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그리고 종수는 제힘으로도 다른 이의 영혼에 상처를 입힐 수 있는 힘을 기를 것이다. 박병찬의 안개에 밀리지 않고, 그 안에서 헤매지 않을 힘을 갖출 것이다. 아직은 그 방법을 몰라 곧 아물고 말 직접적인 상처밖에 낼 수 없지만.
“아 씨발, 흥얼거리지 마! 노인네 타령 하냐? 그딴 거지 같은 소리로 내 곡 부르지 말라고!”
박병찬의 노래가 뚝 그쳤다. 잠시 시무룩해졌나 싶던 박병찬은 곧 웃기 시작했다. 종수가 말로 긁어 만든 상처 따위 순식간에 아물어버린 것처럼 즐겁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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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대단한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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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이무기
이거 진짜 조아요….. 병찬이의 보컬에 상처받고 또 사랑하는 종수라니ㅠㅠㅠㅠㅠㅠㅠㅠㅠ 밴드 종뱅은 왜케아름다운지모르겠어요 농구처럼 무언가를 열렬히 사랑하는 모습은 언제봐도 가슴떨리네요.. 그러니 둘도 사랑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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