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파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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쫑규

쓰레기장 by 왕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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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Pilot”

달큼한 브랜디 향이 소름끼쳤다. 이규는 묶인 팔을 가능한 헤드에 붙였다. 교차된 팔목은 테이프로 칭칭 감겼고 끝에 걸린 수갑이 침대와 연결되어 있었다. 쓸린 피부 위로 접착제와 쇠고랑이 느껴졌다. 달그락. 멀리서 코냑을 비우던 그가 잔을 내려놨다. 얇은 옷자락이 서로 맞닿을 때마다 소리가 났다. 정돈된 몸가짐은 기세와 달리 거칠지 않았다. 한껏 민감해진 감각이 사소한 인지를 구분해갔다.

인기척이 머리맡에 왔다. 그는 웃는 것 같지 않았다. 매트리스가 눌렸다. 차분한 숨결이 내렸다.

“입 벌려.”

예상보다 훨씬 목소리가 가까웠다. 쭈뼛 찬기운이 뒷목을 싸하게 훑어내렸다. 그는 더러운 성질머리와 어울리게 두 번 명령하지 않았다.

뻑. 묵직한 타격음과 함께 고개가 돌아갔다. 입가 살이 찢어져 피맛이 퍼졌다. 비린 핏덩이가 목 뒤로 넘어가지 못하고 코로 넘어올 지경이었지만 약기운이 덜 빠져 아프다는 게 와닿지 않았다. 그가 턱을 세게 틀어쥐고 정면으로 돌려놨다. 

“입.”

이규는 차라리 한 대 더 맞고 정신을 차리고 싶었다. 가려진 시야가 주는 공포감이 각오한 것보다 드셌다. 허리 근처로 무게감이 느껴졌다.

곧바로 그가 붕대 감긴 복부를 가격했다. 겨우 꿰메둔 상처가 터진 것 같았다. 그는 환부를 짓눌렀다. 약으로 끊을 수 없는 통증이 강하게 치솟았다. 이규는 고개를 젖히며 신음성을 흘렸다. 그 순간 열린 입 안으로 쇳덩이가 틀어박혔다.

“물어.”

“윽,”

이규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입술을 모았다. 상체가 들썩였다. 묶여 올라간 팔이 떨렸다. 피하려 해봐도 그것에 혀가 닿았다. 알루미늄, 약간의 강철. 씻을 수 없는 화약내.

안대가 살짝 들렸다. 빛이 쏟아졌다. 이규는 부신 눈을 깜빡거렸다. 확장되었던 동공이 빠르게 수축했다. 그곳엔 당연하게도 그를 내려다보는 최종수가 있었다. 그에게 허락된 시야는 오른쪽뿐이었다. 거리감이 애매했다.

끼릭, 달칵. 최종수가 물린 권총을 장전했다. 이규는 무심코 슬라이드를 깨물었다. 그가 재롱을 보듯 웃었다. 불안이 엄습했다.

“야. 조심해.”

최종수는 상반신을 숙여 오며 총구를 더욱 깊숙이 밀어넣었다. 반사적인 헛구역질을 삼켰다. 긴장한 몸은 굳어 온 신경이 방아쇠에 향해 있었다.

그가 느닷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수갑이 팽팽히 끌렸다. 툭. 총신에서 탄환이 걸리는 소리가 났다. 고장난 총이 그렇듯. 이규는 몇 초 숨이 멎었다. 뻣뻣이 솟은 허리를 내리며 눈을 떴다.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쉬었다가 곧 그를 올려다봐야 했다. 이 미친 살인마는 이규가 시선을 다른 데 두는 걸 못 견뎠으니까.

잘하네 이젠. 눈길을 피하지 않자 최종수는 뻔뻔스레 속삭였다. 그가 장난질한 총을 휘젓고 느리게 빼주었다. 꿀꺽. 고여 있던 침을 넘겼다. 쓸모를 다한 발터가 바닥에 떨어져 굴렀다.

“지금부터 게임을 할 건데.”

퍽 장난스러운 어조였다.

“난 단 한 가지 말만 들어주고, 넌 참는 거야.”

그가 이규의 뺨을 검지로 가볍게 두드렸다.

“여태 한 것처럼 굴어. 내가 모르는 널 드러내지 마.”

달짝지근한 과실주 향내와 서릿발 같은 음성이 섞였다.

“시시하게 끝내고 싶지 않거든.”

여린 살을 사리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요구는 이규가 평생 해온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는 다시 안대를 내렸다. 암전된 시야 속에서 다른 감각이 선명해졌다. 살갗에 닿는 차가운 체온이 목에서 가슴으로, 명치로, 그 아래로 천천히 쓸려내려갔다.

이규는 심연 속에서 그를 좇았다.

Q, 죽여달라고 빌어 봐.

1. “Ghost”

BOSTON, THE BEGINNING

-보스턴, 발단

10월 말. 서머타임이 끝나려면 아직 한 주 남았다. 오래된 벽돌 거리, 붉은 건물로 둘러싸인 보스턴 도심 경찰청 본부 상층. 중간선거를 앞둔 매사추세츠 주경찰은 한 달 굶은 이리처럼 예민했다. 주지사 경호 인력 배치 조정이 나흘 넘게 지지부진 끌리며 합의되지 않았다. 경찰은 마치 비밀검찰국이라도 되는 듯 연방에서 꽂은 인사들을 배제하고 싶어했다.

 “이런 식의 개입은 불법 아닌가요?”

 “재차 말씀드리지만, 저흰 협조 드릴 뿐입니다.”

위장회사 사원증을 걸고 불편한 펌프스 뒷굽을 테이블 다리에 긁어대며 할 말은 아니었다. 경찰청장은 이 바보 같은 연극을 가판에서 내리고 싶어 안달난 관객이었고, 앵무새처럼 하달 받은 대사만 되풀이하는 금발의 카페인 중독자를 무시하기로 했다.

“그쪽은 누구신지?”

청장은 미팅룸에 마지막으로 들어와 긴 회의용 테이블 끝에 앉으며 막 커피를 거절한 그를 봤다. 태블릿을 든 아시아계 남자였다. 밝은 브로우라인 안경, 넘겨 고정한 머리는 흩트려 몇가닥 흘러내리게 두었고 가벼운 정장에 어깨 보호대와 이어진 가죽 숄더벨트를 찼다. 전체적으로 앳되고 서글한 인상이었지만 회빛 눈동자가 꽤나 녹슬어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저라고 다른 답을 드릴 순 없을 것 같은데요.”

그는 짙은 눈썹을 까닥이며 미소를 가장했다. 잉글랜드 억양이 묻어나는 말투였다. 수사팀장의 대략적인 정보를 입수해 둔 경관이 총경에게 귓속말했다. Q⋯.

“당신이 Q?”

“반갑습니다 총경.”

이규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뻗었다. 악수를 받은 청장은 입술을 실룩였다.

“우리 관할 주에 미친 폭탄마가 있다는데, 참 느긋하게 오시는군요.”

“저희 임무는 어디까지나 예방이니까요. 경찰과는 만나지 않을수록 평화롭죠.”

이규는 겉으로 태연히 웃으며 몇 시간 전 전세기 타고 날아오면서 외운 사건 개요를 되새겼다. 어제까지 지구 반대편 아시아의 작은 반도에 있었던지라 그의 손목시계는 아직도 새벽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상관 얼굴을 오늘 처음 본 수사관들도 지시 받은 대로 행동했다. 9시부터 답없이 빙빙 돌던 미팅룸 전자 벽시계가 12시 정각을 알리자 청장을 엿먹이던 금발이 랩탑을 덮었다. 규는 신호에 맞춰 말했다.

“미안합니다만 2시간 후에 다시 얘기할까요?”

“이제야 제대로 얘기를 해볼 타이밍 아니었나요?”

“점심 시간이라서요.”

제 요원들이 식사에 예민해요. 이규가 천연덕스레 고개를 기울였다. 청장의 낯이 터질 듯 붉어졌다.

“선배. 표정 봤어요?”

팀내 유이한 아시안인 ‘오렌지’가 할랄 샌드위치 두 개를 한손에 들고 사옥 근처에 세워둔 대형밴 트렁크 도어를 열었다.

“총경이 내 이마에 구멍 뚫고 싶어하던 거?”

오렌지가 검연쩍게 끄덕였다. 이규는 웃었다.

“봤지. 어쌔신 알아? 동양 암살자. 딱 그 느낌~ 오금이 다 저리더라.”

“네, 알아요. 그런 것치고 아주 잘 털었단 것도.”

이규는 개조한 밴에 오르며 가발을 벗었다. 깔끔하게 깎은 민머리를 쓸었다. 오렌지는 먼저 와 부리또 먹고 있던 이들에게 손짓했다. 방탄조끼를 껴입은 금발 요원이 헤드셋 벗고 스피커를 켰다.

[총격 발생. 알파 진압 완료. 브라보 진입한다.]

밴 내부는 일반 좌석을 빼고 군 호송 차량처럼 2열로 마주보게끔 벤치를 놨다. 양벽에는 CCTV와 차체 외부에 달린 카메라, 투입된 FBI SWAT 보디캠에서 송출되고 있는 화면이 각도별로 나뉘어 뜨고 있었다. 그들이 있는 보스턴 시내에서 몇 마일 떨어진 지하도는 총격전이 한창이었다.

[사살 금지. 인질 여부 확인해.]

“곧 주경찰 수뇌가 쓸모없는 회의에 불려다니는 동안 FBI가 테러리스트를 빼돌렸다는 보고 올라가면 그땐 정말 총 맞을지도 모르겠네요.”

셔츠 가터를 빼며 헐렁한 면바지와 터틀넥 니트로 갈아입은 이규는 은테 선글라스를 꼈다.

“원래는 눈속임으로 내 신원만 빌려달라고 했었잖아. 날 ‘완벽히 유령으로 만들어주겠’다던 게 이런 의미야?”

“처음 계획은 분명 그랬는데⋯ 선배는 서류상에만 올려두고 권한만 공유해서 주지사 경호 작전인 척하는 거. MSP(매사추세츠 주경찰)는 유령에 홀리고, 우린 용의자 확보하고요⋯.”

무언갈 훌렁훌렁 벗고 쓸 때마다 이규는 완전히 다른 인간이 되어갔다. 경량 패딩을 입고 넥을 올린 그는 더 이상 건방진 영국인 책상물림 같지 않았다.

“이렇게 급히 귀환을 요청하게 될 줄 몰랐어서. 상황이 심각해졌어요.”

“찬양아.”

오렌지는 주찬양이 입사 후 썼던 가명이다. 사실 찬양도 본명인진 정확하지 않았다. 같은 한국계라며 규에게 접근하기 위해 만들어낸 가명이고, 실명은 대니얼이나 마일스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이규는 평범한 수사관인 줄 알았던 후배가 국가 안보 기밀 명령서를 사내 보안 메일로 쐈을 때만큼 충격 받진 않겠거니 했다. 그는 찬양을 돌아봤다.

“네가 안보부 대테러 요원이라는 거 말고 또 놀라야 하는 게 있으면 빨리 말해. 난 이만 곰팡내 나는 보스턴을 떠나고 싶거든.”

[브라보- 피해! 적이 자폭한다!]

쾅! 폭발음이 밴 내에 울렸다. 연기로 현장 상황이 뿌옇게 보였다. 찬양이 밉지 않게 눈을 굴렸다.

“⋯방금 지옥에 떨어진 폭탄마가 2년 전 샌프란시스코에서 북한 비밀경찰을 살해한 놈이에요.”

“끝이지?”

“선배 임무는 이제 시작이고요, Q.”

“샌드위치 줄래? 듣고 나면 못 먹을 것 같다.”

찬양은 래핑된 샌드위치를 건넸다.

Q Lee. 이규는 제 프로필이 우습다고 생각했다. 동료는 자연스러운 코드네임이라 했지만 어떻게든 쉽고 짧은 새 이름을 붙여주고 싶었던 거다. 그녀는 이규에게 안경을 씌우며 금욕적으로 보일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 다음엔 섹스했고, 향수를 추천 받았다. 

이튿날 그는 혼자 머리를 밀었다. 직장이 요구하는 인간이 되려면 더 섬세한 위장이 필요하단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가발을 썼다. 얇은 렌즈로 눈을 가렸다.

이규는 경찰학교를 졸업하고 특채로 FBI에 입성해 LA와 위성도시를 돌며 일한 내근 요원이었다. 양부모는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 친모가 지은 이름을 개명시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이규였고 Q가 됐다. 남들 스피릿스코프, 불릿, 힐레이저⋯ UFC 선수 같은 닉네임을 달에도 몇 번씩 갈아치울 때 일관되게 Q라 불렸다.

굵직한 사내 비리를 연달아 해결한 뒤에는 꽤 유명해졌다. 유능한 수사관이자 잠재적 방화범으로. 무슨 말이냐면, 그가 빡센 내사로 보내버린 연방 공무원이 잡아들인 경제사범보다 많았단 소리다. 도움을 준 첫 파트너는 산업스파이에게 받은 20만 달러와 함께 해고 됐지만 이규는 승진했다. 그의 커리어는 순조로웠다.

군사 기밀 빼돌려 망명한 북한 비밀경찰이 샌프란시스코 테러로 사망하고, 증언을 약속한 미국 시민권자가 한국에서 실종되기 전까지만 해도.

버지니아로 불려가 사상 검증과 재교육 절차를 거친 이규는 냉전기로 돌아간 한국지부에 배치됐다. 입양된 후 처음 서울 땅을 밟은 거다. 강제로 주한 대사관에 처박혀 실종 수사와 정치 줄타기에 소모된지 1년. 나날이 남북관계가 악화일로를 걷는 와중에 웬일로 본국에서 불러들인다 했더니.

“잠깐. 멈춰 봐. 그러니까 나 보고 현장을 뛰라고?”

“⋯네. 러시아와 중국 쪽으로 인력이 다 빠져서 남는 현장 요원이 없대요.”

“난 얼마 전까지 주한 대사관에 있었어. 아주 평화로운 일을 했고.”

“일단 작전 종료 시점까지 Q는 저희 팀인데다, 예전엔 교도소 잠입 임무도 맡았다고 들었어요.”

“그때는 나 말곤 빵 들어갈 사람이 없어서⋯ 아.”

“네⋯.”

없어요. 주찬양은 마지막 간식까지 먹어버린 고양이처럼 그를 쳐다봤다.

빌어먹을 아메리카. 땅덩어리는 무식하게 넓고 전세계가 적이다. 규는 식은 할랄 샌드위치와 함께 탄식을 베어물었다.

이규는 자유보단 체계를 사랑했다. 강철의 도시, 차가운 알루미늄과 지저분한 공기. 열정과 뜨거운 태양보다 꿉꿉한 스모그와 기술이 있는 곳이 좋았다. 그는 때때로 이 땅의 황야가 낯설었다.

그의 품에는 쇼 나가타란 성명의 운전면허증이 들어 있었다. 나가타의 프로필은 해외 파병을 다녀온 전역 군인, 알코올 의존증, 고향 서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었다. 이규는 쇼 나가타를 착실히 연기했다. 조수석은 늘 보드카를 옮겨 담은 스테인리스 수통이 들썩였다. 히치하이커를 태울 때는 수전증을 앓는 척 핸들을 잡은 손을 떨었다. 덧붙인 수염과 헌팅캡을 썼다.

“대테러국은 죽은 게릴라의 잔당을 계속 추적합니다. 선배는 따로 움직이면서 이 리스트의 인물을 찾아주세요. 서부는 잘 아시잖아요.”

지프 어딘가에 부착된 GPS 발신기는 항공기를 타고 이동하는 이규의 팀에게 위치를 보내고 있었다.

“6명이나 되네. 공통점이 뭐야?”

“무기상 ‘감마’의 살생부에 올랐어요.”

“연방 수배범이잖아? FBI에서 건 현상금이 100만은 넘었던 것 같은데.”

그가 탄 얼룩진 빨간 지프는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엔진 소리가 커졌다. 규는 속도를 죽이지 않은 채로 무스탕 주머니에 든 소형 녹음기를 차 오디오와 연결했다. 주찬양의 기계음 섞인 목소리가 커졌다.

“감마. 현상금 110만 달러로 책정됐고, 그의 사업은 게릴라의 자금 세탁에 이용되었습니다. 미사일 같은 대량살상무기는 취급하지 않아 1급 검거 대상은 아니었어요. 현재 사용 중인 신분은 하와이 태생 일본인, 6.5피트가 넘으며 로마 숫자 ‘Ⅱ’를 사인으로 쓰죠.”

“군부 출신?”

“⋯잘 아시네요.”

“무기 브로커가 대부분 그렇지.”

“‘린’이라 불리기도 해, 화교일 수도 있습니다. 중국의 비호를 받을 가능성이 높아요. 이 정보 모두 리스트에 오른 자들이 연방정부에 제공한 겁니다. 그 대가로 기소 취하됐고. 감마를 팔아 형량 거래에 성공했죠.”

“왜 죽이려는지 알겠네.”

“네, 그네들의 질서를 유지하려면 반드시 본보기를 보여야 할 상황이에요. 지금은 6명 전원 추적이 끊겼습니다. 신분 세탁을 해대니 도주한 건지 사망한 건지 확인이 안 돼서⋯ 살아 있다면 감마를 끌어낼 덫으로 쓸 수 있어요.”

항상 녹음기 달고 다니는 버릇을 안다면 그 비밀 많은 후배도 경악하고야 말겠지만, 어차피 이 판에 사람은 없었다. 충실한 개와 배신자뿐이지. 이규는 모든 대화를 녹음했고 매번 놓친 게 없도록 돌려 들었다. 그래야 오래 버텼다.

“내가 찾은 게 신체 일부뿐일 땐 어떡해.”

“이미 전원 작업이 끝났다면 전문 히트맨이 끼어든 겁니다. 감마와 접촉할 만한 후보가 몇 있어요. 일처리 패턴을 봐야 추릴 테니 현장 보고 기다릴게요.”

믿어요, Q. 녹음 파일이 끝났다. 이규는 사막의 끝을 알리는 파란 모텔 간판 달린 표지판을 봤다. 큰 도시까지 23마일. 그의 여정은 아마 1만 킬로쯤 남았겠으나 질리도록 본 눈더미와 이별할 수 있다는 게 기뻤다. 도시에는 눈이 잘 내리지 않았다.

2. “Red light”

SOMEWHERE IN NEVADA

-네바다, 어딘가

정확히 세 달.

여섯 구의 시체를 찾는 데 든 시간이었다.

음식물 쓰레기 집하장, 차이나타운 지하 냉동고, 폐공장 시멘트 기계 안, 호수 바닥에 처박힌 BMW 트렁크, 교도소 샤워실, 교회. 이규는 청소부부터 영양사, 땅을 매입하려는 호구 잡힌 사업가를 연기하며 돌아다녔다. 신고 들어간 사건도 없이 연방 요원이라며 거들먹대다 뒤 밟히면 골 아팠다. 이규는 차라리 빚쟁이인 척 행적을 탐문하다가 보험 조사관이라며 사유지를 강제로 열고 들어가는 방법을 택했다.

그가 발견하는 시신은 점차 신선해졌다. 처음엔 썩어 문드러져 있던 것이 나중엔 몇 시간 차이로 줄었다. 5번째 사망자는 신원을 바꿔 복역 중이었는데 공교롭게도 다른 수감자 손에 목 매달렸다. 이규가 면회 신청서를 작성하는 동안 꺽꺽대다 숨이 넘어갔다. 외부 침입 흔적은 없었다. 무기수가 벌인 짓이다.

FBI 배지를 들이밀고 조사실에 동행했다. 사주를 받았는진 알아내지 못했다. 수형자 간의 다툼은 간혹 있는 일이었고 검사는 형기를 때려박고 끝내고 싶어했다. 그러지 말고 시신 인수자나 알려주지 그래요? 안 그래도 교도소 공동묘지가 미어터지는 중이라.

이규는 추궁을 포기하고 안치실로 내려갔다. 사진보다 핏기가 없었지만 리스트에 있는 자가 맞았다. 창백한 형광등이 납덩이같은 뻣뻣한 몸을 더욱 시리게 했다. 이규는 교도관에게 들었던 말을 상기했다. 불안해 보였죠, 면회를 하고 난 다음에. 규는 그가 공범의 피살 소식을 전해들었으리라 추측했다. 교도소는 안전하다고 여긴 듯했다. 정말 숨고 싶었다면 조직원이 드나들게 해서는 안 됐다. 누구든 꼬리를 밟을 수 있으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이규는 안치실에서 뛰쳐 나왔다. 이건 앞선 네 번의 살인을 성공시킨 자의 솜씨가 아니다. 그는 곧바로 차를 끌고 내달렸다.

오렌지에게 받은 자료와 수소문 끝에 당도한 여섯 번째 도망자의 집은 번화가에 있었고 보안장치가 튼튼했다. 당장 문을 따거나 창문을 부술 수 없을 것 같았다. 이규는 밤이 될 때까지 기다리려다가 근처를 지나는 시위대를 봤다. 그는 할로윈 가면을 주워 쓰고 그 사이에 섞여들었다. 그리고 남몰래 허공에 총질했다.

인파와 비명이 어지럽게 뒤섞였다. 주위에 있던 경찰이 우르르 몰려 군중을 통제하는 동안 화단에 총을 빠트리고 태연히 빠져나와 옷매무새를 정돈하고는 관리실을 두드렸다. 코트 깃 바짝 세워 신고가 들어왔으니 문 열어달라 인상 한번 써주자 바깥 득실거리는 경찰 행렬에 떤 경비가 열쇠를 건넸다.

집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침입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고 약간의 혈흔과 여러 체모, 여성이 드나든 자취가 있었다. 생활을 다 청산해도 여자는 못 끊은 모양이다. 그러니 제 손으로 문을 열어줬겠지. 그는 벽장을 뒤져 옷가지를 풀어헤쳤다. 바닥 먼지가 특정 간격으로 닦여 있었는데, 캐리어 바퀴 자국이 분명했다. 나와 있는 옷걸이는 전부 외투가 걸려 있었다. 사라진 캐리어에 옷을 챙겨 담은 게 아니란 뜻이었다. 짐을 뒤져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규는 직감했다. 캐리어에 담겨 나간 건 사람이다.

뭇 칼밥 먹는 인간들과 달리 집주인을 납치한 범인은 꽤나 고독하고 섬세한 작업을 선호하는 것 같았다. BMW를 폐차장에 몰고 가는 대신 호수 밑에 푹 가라앉힌 것만 보아도. 이규는 그들이 오래 이동하지 않았으리라 확신했다. 그대로 건물을 나와 신분증을 요구하는 경찰에게 FBI 배지를 보여주며 지나쳤다. 자존심 상한 카운티 경찰의 불만스런 욕설은 들리지 않는 척했다.

이 동네는 애리조나와 같이 한적해 복잡한 시설이 거의 없었지만, 조용히 유기할 수 있는 장소가 많았다. 규는 유령마을과 장사 접은 상가를 둘러보려 외곽으로 빠져나가는 도중 옛날 지도에만 뜨는 교회를 발견했다. 교회. 강력한 심벌 아니던가? 이규는 이끌림을 느꼈다. 지난 90일의 경험으로 어렴풋이 실체를 그려내고 있었다. 그가 쫓는 살인자는 고도로 숙련되었고, 감추지 못하는 미적 감각이 있었다. 마침내 소몰이 끝낸 카우보이가 피날레를 얌전히 마쳤을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차선을 틀었다.

마지막 시체는 버려진 교회당에 양 손목이 못박혀 있었다.

사인은 과다출혈. 이규는 폭포수처럼 굳은 핏자국이 날개 같다고 느꼈다. 그는 현장을 천천히 감상했다. 이 킬러는 예술가의 기질이 충만했지만 스스로 절제할 줄 알았다. 손속에서 살인의 따분함과 흥분감이 동시에 존재하는 걸 보아 피와 쇠가 삶의 전부다. 규는 문득 생각했다. 이런 부류의 괴물은 마주친다면 바로 알아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 눈동자에 심연이 있을 테니까.

건진 사진이라곤 눈알을 파먹고 기어나오는 구더기밖에 없었다. 이규는 쓸모없는 사진기를 넣었다. 기름통 들고 구석구석 뿌린 다음 밖으로 나오며 라이터를 던졌다. 땅거미 드리우듯 주위가 노을색으로 물들었다. 십자가가 타올랐다. 이규는 깨달았다. 화가는 누군가 이 광경을 보길 원했다. 그래서 답지 않게 시체를 훼손하지 않은 거였다. 그건 더러운 영혼이 정화되는 과정 같기도 했고, 지옥의 가장 뜨거운 구렁 같기도 했다.

이규는 불타는 예배당을 사진으로 남겼다.

차에 탄 채 숙박비를 지불한 뒤 주차장에서 바로 1층 객실을 열고 들어갔다. 그는 간만에 씻고 침대에 앉았다. 곧 모텔방 작은 텔레비전이 돌아갔다. DVD 자판기에서 대여한 네바다를 배경으로 하는 유명한 괴수 영화였다. 오프닝. 미모의 지진학 연구원과 한물 간 마초는 사막의 이상을 감지한다.

이규가 한국지부에 있을 때 레이저 검 든 사무라이나 국가 비밀병기이자 닌자의 후계자가 나오는 끔찍한 평점의 미국 영화를 보고 있으면 현장 일 하게 생긴 동료 해커는 꼭 한마디 덧붙이곤 했다.

진심이야? (;⊙o⊙)}

⋯취향에 대해 잔소리 듣고 싶지 않은 날은 20세기 서부극을 봤다. 협객, 강자존, 말 한 필의 낭만, 황무지의 침략자, 야만적인 문명. 하여간 그의 비주류 기질은 주머니 속 송곳처럼 조용히 두드러졌다. 타인을 찌르지 않을 뿐이다. 그는 제 모난 곳을 깎아 둥글게 만들 줄 알았다. 머리를 밀고 눈을 가리듯이.

땅속 괴수를 피해 전봇대로 올라간 마을 주민이 탈수로 죽어 있다. 서부의 탕아들은 각자 산탄총을 챙긴다. 이규는 허리춤에서 홀스터를 뺐다. 권총을 손 닿는 탁자에 꺼내뒀다. 자다가 떠나게 될지 모르니 뭐가 묻어 있을지 모르는 이불을 치우고 재킷을 껴입었다. 그도 요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괴물에 쫓기고 있었다.

살인을 직업 삼을 수 있는 이는 신을 두려워할지 증오할지 궁금했었다. 그리고 이규는 얼마 전 답을 얻었다. 비주류의 송곳이 그를 찔렀다.

P30을 올려둔 탁자 위 구형 아이폰이 진동했다. 보안 메시지였다. 팀원 몇의 상태등이 꺼졌다. 흑색은 사망. 황색은 부상.

오렌지는 적색이었다. 임무 이탈, 의식없음.

무사히 아침을 맞은 그는 입맛이 뚝 떨어져 제공되는 조식을 패스했다. 일찍 지프를 몰고 나가 주차장에 세워 불필요한 짐을 내버린 후 대절한 포드 픽업트럭으로 갈아탔다. 규는 수염을 떼고 볼캡 위로 후드를 덮었다. 줄 이어폰을 꽂은 채 매장에 들러 프로틴 바와 이온 음료를 챙겼다.

이규는 구글 지도를 다운 받아 고속도로 탔다. 프로틴 바를 씹으며 가속 페달 밟았고 간간이 주유소에서 눈을 붙였다.

도착한 주소지는 임대한 타운하우스였다. 그가 요청한 짐이 와 있었다. 차고에는 현대 SUV가 정차되어 있었고, 그의 개인용품이 제자리를 찾았다. 아무래도 그는 이곳에서 이규로 있어야 할 듯했다.

숙소는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이 갖춰져 있었지만, 24시간 감시당하고 있는 걸 뻔히 아니 도통 쉰다는 기분이 안 들었다. 매일 걸려오는 유선 전화를 받지 않으면 자동 신고 접수되는데다 집안 곳곳에 도청 장치와 카메라가 있었다. 무시하고 싶어도 눈에 띄었다. 이규가 현장 수사관의 협조를 받을 때 자주 썼던 도구들이었다.

조깅. 식사. 독서. VOD 시청. 반복되는 일과는 휴가 같지 않았다. 그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전제로, 상상하기 힘든 평범함의 견적을 연기해야 했다. 하루는 인터넷 카페에서 충동적으로 보스턴에서 본 위장회사 라벨을 구글링했다. 당연히 검색 결과는 많지 않았다. 국영 기업, 사우스캐롤라이나, 보안업체⋯ 최근 사명을 변경했다. 이전 사명이 연결되어 떴다. 오렌지 보안 경비.

이규는 그냥 웃었다. 아마도 조금 오래. 그래서 주찬양이 오렌지였구나. 꼼짝없이 오렌지주스 마시다 정한 코드네임인 줄 알았다. 이규가 Q인 것처럼 후배는 오렌지였던 것이다. 그 다음은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안보부, 적색등, 제기랄.

그조차 지루해지면 야외 농구 코트에서 공을 튀기며 놀았다. 클럽 활동으로 여러 운동을 했지만 보호구 착용하고 개떼처럼 달리는 쪽은 영 맞지 않았다. 농구는 그가 드물게 흥미 붙인 종목이었다.

공이 포물선을 그리면 죽음, 살인, 피가 아닌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둥근 테를 통과했다. 그가 림을 쏘아 맞추는 건지 림이 줄 매단 그를 유도하는 건지 까맣게 잊어도 됐다. 그러나 3개월을 시달린 어떤 적막과 죄악, 빨간 욕조를 지웠어도 단 하나의 표상은 한결같이 잔존해 있었다. 그건 그가 여전히 괴물에 대해 생각한다는 의미였다. 이규는 낮에는 강박적으로 평범한 여가를 보내려 했고 밤이 되면 인쇄한 사진을 붙여둔 벽 앞에 섰다.

쓰레기장에서 발견한 조각난 손가락. 온전한 부위는 등이었는데, 척추를 따라 긴 종교적 문신이 나 있었다. 냉동고 안에 다진 소고기와 함께 들어 있었던 귀. 십자가 피어싱을 낀 채다. 시멘트 기계는 제품 브랜드 마크가 천사상이었고 BMW는 지난 크리스마스 장식이 아직 붙어 있었다. 이건 시그니처였다. 이규는 그것을 들여다 볼수록 막연한 공포가 줄었다. 그렇게 보다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들이 죽으며 풍긴 지독한 냄새가 점차 덜해졌다.

오후 9시. 어김없이 유선전화가 울었다. 이규는 수화기를 들고 기계적으로 이름과 위치, 암호를 말하고 수화기를 내렸다. 자동으로 스피커가 켜졌다. 끊겨야 할 전화가 연결음을 내고 있었다.

달칵. 누군가 받았다.

“규, 나야.”

피로한지 살짝 쉰 음성이 귀에 익었다. 배터리 부족한 녹음기의 빨간 불이 더욱 세차게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적색 경고는 꺼지지 않았다.

“오랜만이네. 죽었을까 봐 걱정했어. (^ㅇ^)”

4. “Devil”

NORTHERN CALIFORNIA

-캘리포니아, 북부

찰리는 시술을 끝낸 눈가를 주무르더니 입술을 맞대왔다. 입 안에 퍼지는 대마초 연기에 미간을 찌푸리자 웃음을 터트리며 놓아주었다.

“혀는 안 할래?”

“영업멘트 맞아?”

“당연히 치아 녹은 약쟁이 보곤 입 벌리라고 안 하지.”

그녀는 궐련을 재떨이에 비벼 껐다. 복잡하게 쌓인 도구를 치우며 잡동사니 속 금고를 열었다.

“제이버드한텐 당신이 마약과라고 했어.”

“어디 소속이야, FBI? DEA(마약수사국)?”

“DEA. 5월 캘리포니아에서 빅딜이 있거든. 제이는 큰 한 방을 노리는 중이지.”

이규는 이물감 느껴지는 얼굴을 씰룩거렸다. 눈썹 아래로 두 개, 콧볼에 하나. 자잘하게 묵직한 귀는 의식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찰리가 건네는 휴대폰과 스마트키를 받았다.

“차는 내 취향으로 고른 거야. 필요한 정보는 거기 안에 다 넣었어. 가 봐, Q.”

“고마워. 조심해 찰리.”

“또 보자곤 안 할게. 내 장례식이면 곤란하니까.”

찰리는 돌아보지 않고 새 궐련을 꺼내 입에 물었다. 그녀의 손은 조금 떨렸다. 이규는 연기 자욱한 지하를 떠났다. 

캘리포니아 주경찰에서 심은 지역 접선책 중 이규에게 오픈된 라인은 단 한 곳, 찰리였다. 찰리의 취향은 스바루 고성능 세단이었는데 그의 역할이 도벽 있는 하급 마약상이란 걸 상기하면 제법 어울렸다. 카라멜색 차체에 올라탄 그는 태블릿에 USB 젠더를 연결했다.

경찰의 주요 경계선, 도청 가능한 무전, 요주의 인물의 인상착의⋯ 잡다한 데이터가 섞여 있었다. 게릴라로 활동하는 갱이 대부분이어서 주시하는 명단은 많지 않았다. 조직원 간 거래는 척 봐도 더럽게 맛없어 보이는 피자 가게에서 약을 조달 받아 판 뒤 현금을 도로 가져다주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피자집 사장은 진즉 이런 일에 은퇴해 지인의 사업을 돕는 중개인일뿐이라, 심부름꾼 얼굴을 외우지 않았다. 제이버드의 이름만 대면 약을 받을 수 있었다.

이규는 시동을 걸어 한동안 묵게 된 아파트로 향했다.

낡은 아파트는 스튜디오에 가까웠다. 분리되어 있지 않을 뿐 공간 자체는 넓었다. 천장은 배관 파이프가 노출되어 있었고 가구는 몇 개 없었다. 이규는 지나치게 휑한 내부를 둘러보다가 난방과 불을 켰다. 누런 빛의 옛날 등이 들어왔다. 중요한 물품은 모두 안전가옥에 두고 왔기 때문에 그는 시내를 돌며 아파트에 둘 것들을 구해왔다. 관리인도 혼자 살던 양부가 갑자기 사망해 입주한 아들이라고 알고 있었으니 사용감 내려 애쓰지 않아도 됐다.

이규는 그가 세운 대원칙에 따라 배열을 시작했다. 서랍과 TV 안쪽, 대충 손 닿는 구석에 가루 담긴 지퍼백을 집어 넣었다. 권총은 의자 위에 두고 외투를 등받이에 걸쳤다. 비싼 시계와 명품은 되도록 보이는 곳에. 다용도 칼과 단검은 벽에 걸었다. 허영심 강하고 손버릇 나빠 보여야 했다. 그는 사무적으로 개인 공간을 정돈했다.

가짜 신분증과 FBI 배지를 반납했지만 이규는 여전히 Q일 예정이었다. 여느 범죄자가 그렇듯 별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3개월 간 쉬지 않고 일본계 군인, 러시아 무슬림, 중화권 호텔리어를 오가느라 그는 이제 Q로 있는 게 낯설었다. 기실 무엇이 그인지도 몰랐다. 당신은 금욕적으로 보이는 게 좋아. 그때 그는 욕망에 차 있었나?

사적으로 사용하던 기기는 전부 본사에 두고 왔고 피붙이는 애초 존재하지 않았다. 그나마 그를 양육한 부모님은 피닉스에서 쾌적한 노후를 보내고 계셨으며 아들이 해외 출장 중이라고 믿었다. 양부모는 연락이 되지 않으면 신호 안 터지는 오지에 있겠거니 했다. 이규는 그 오해가 기꺼워 구태여 한국의 통신망을 설명하지 않았다. 그가 죽으면, 한국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하겠지.

이규는 짧게 세수하고 수건을 덮어썼다. 욕실을 나오자 휴대폰 기본 화면이 깜빡이고 있었다.

-Q. 자료 보냈어. (^_^)v

메일은 길었다. 그는 내용을 꼼꼼히 훑다 첨부된 흐린 위성사진을 확대했다. 피곤한 인상의 동양인 남자가 보였다. 젊다. 화질이 좋지 않아 이목구비는 뚜렷하지 않았다. 키 약 6'2", 건장한 체격. 흑발⋯ 홍채 동일. 문신 및 신체 특징 보고된 바 없음.

스크롤을 내리자 예수의 벽화를 등지고 목 매달린 백인 남성이 있었다. 배가 반으로 갈려 내장이 밖으로 늘어졌고, 십자가를 완벽히 가리는 각도로 들어 올려져 있었다. 시그니처. 이규는 범인을 알 수 있었다. 그 자였다.

보고서의 아주 명확한 한 문장이 그 킬러를 설명하고 있었다.

감마의 히트맨. 안티오키아의 악마.

-역시 괜찮은 재료지? 잘 꼬셔 봐. (>ㅁ<)

한겨울 추적추적 비 흩날리는 날씨가 계속됐다. 구색 맞추려 산 커피를 한 모금 깔짝인 이규는 쇼윈도 유리 앞에서 머리를 정돈했다. 비니에 눌린 가발이 퍽 자연스레 자리잡고 있었다. 그는 금테 투브릿지 안경, 스웨이드 재킷, 물빠진 청바지와 적당히 지저분한 컨버스를 차례로 점검했다. 시계는 일부러 가격대가 있는 브랜드로. 한몸처럼 지녔던 홀스터와 총기는 간만에 따로 떼어두었다.

시곗바늘이 8시를 가리켰다. 약속 시간이 됐다.

다운타운 근처 강줄기로 나온 이규는 인적 드문 브릿지 위를 걸었다. 북서부 특유의 꿀꿀한 겨울이 보슬비를 동반했다. 그는 다리 중앙에 멈춰 강을 지나는 보트에 시선을 두었다. 얼마 후 반대편에서 왜소하고 껄렁한 히스패닉이 다가왔다.

“Q?”

“hola, 제이버드.”

“반가워. 제이라고 불러.”

바람막이 후드를 쓴 제이버드의 왼쪽 볼엔 해골 마스크가 그려져 있었다. 이규는 주먹을 부딪으며 현금 뭉치를 받았다.

“함께 들어온 친구가 몇몇 있지만 소개 받을 일 없길 바라는 게 좋아. 내가 제거됐단 뜻이거든.”

“넌 곧 귀환이라고 들었는데.”

“5월 빅딜에서 너희 팀과 아지트 소탕에 성공한다면 복귀할 거야. 그 전에 발각되면 죽는 거지.”

갱단에 잠입 중인 DEA 요원 제이버드는 예상대로 이규가 FBI 마약전담이라 알고 있었다.

“오클랜드에서 바이커 갱 상대하던 너희 요원 둘이 실종됐다던데. 그쪽 때문에 왔나?”

“비슷해. 시체라도 찾으라더라고. 내 전문이거든, 배신자 냄새 맡기.”

이규는 자조적으로 말했으나 제이는 우울한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끔찍해라. 우리 일이 다 그렇지만.”

제이가 씩 웃을 때마다 이빨 문신이 접혔다.

“‘린’이 단서라고 생각해? 물론 그가 평범한 사업가라곤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선은 지킬 줄 알지. 마약에 손 댈 놈은 아니야.”

“아니, 바이커 갱과 마찰이 있었던 것 같아. 마지막 회신이 린에 대한 이야기였거든.”

“이런. 복잡해지는군.”

“그래. 시간이 없지. 내 친구가 더 부패하기 전에 가봐야겠어.”

이규는 목에 건 얇은 체인에서 전자 열쇠를 뚝 뗐다. 

“네게 행운이 따르길, Q.”

제이버드는 그것을 낚아채듯 받고 휘적휘적 지나쳐갔다.

그는 자연스레 다리를 건너면서 현금 다발을 셌다. 50달러 사이에 구깃한 종이가 끼여 있었다. SULPHUR. 돈을 정리해 넣고 메모는 커피에 적셨다.

이규는 죽음과 살인, 피 중간으로 돌아왔다. 그는 하루에도 여러번 긴장했다가 또 전력 끊긴 광고풍선 같이 낙하했다. 현실과 강제로 분리되어 오직 충성심을 시험 받는 고난. 이건 신앙의 한 갈래 같았다. 그리고 그는 지금 악마를 만나러 유황의 못으로 걸었다.

《SULPHUR》

클럽 SULPHUR 입구는 긴 대기열로 북적였다. 유황이라니. 비록 네이밍센스는 썩 좋지 못했지만 이 유흥가는 일대에서 가장 컸고, 어느 갱단의 영역으로 구분되지 않는 드문 중립구였다. 이규는 줄을 서는 대신 뒷문으로 가 약을 가져왔다고 했다. 덩치 하나가 아시아 갱단 이름을 말했다. 이규는 망설임 없이 끄덕였다. 이후는 더 간단했다. 복도에 접어들면서 알아서 가겠다고 앞장서자 덩치는 의심 없이 돌아갔다.

그는 화장실로 꺾어 들어가 비니와 재킷을 벗어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된 남자에게 덮어줬다. 현금을 말아 앞섶에 꽂아주고 취객이 벗어둔 블레이저를 입었다. 어깨가 조금 꼈지만 그럭저럭 입을 만했다. 가발 앞머리를 대충 넘겨 고정해 안경은 넥에 걸쳤다. 인상이 제법 바뀌었다. 밖으로 나와 길을 잘못 든 척 홀으로 나갔다.

노랫소리가 메아리쳤다. 사람들이 몸을 얽으며 흔들어대고 있었다. 맞붙었다 떨어지는 몸들은 지난 몇 주 간 반복해서 들여다 본 살해 현장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헐벗은 댄서는 관절 어디를 갈라야 하는지, 거구의 바운서는 어떻게 효과적으로 구겨 넣을지 떠올랐다. 이규는 불쑥 토기를 느꼈다. 적응된 피투성이 기억 탓은 아니었다. 그는 어느샌가 정신 일부분을 갉아먹혔다. 벌레가 머릿속을 기어다녔다.

악마의 형상을 한 채.

5. “Fiery pit”

화려한 조명에 눈이 시렸다. 중앙에선 소란스런 칵테일 쇼가 한창이었다. 이규는 플로어 바에 앉아 위스키 담긴 잔을 흔들었다. 반투명한 호박색 액체가 음악과 함께 찰랑였다. 이 항구도시는 밀수꾼이 넘쳐났고 클럽 오너 역시 마찬가지였다. 안쪽 테이블에 ‘린’이 있었다. 청록색 드레스 입은 파란 브릿지의 단발 여자가 무릎에 올라타 있었지만 6.7피트는 되어 보이는 린이 가려질 턱 없었다.

린은 군 시절의 다부진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오클랜드 요원 실종 사건에 연루되어 보고가 오르지 않았다면 클럽 유황의 오너와 110만 달러짜리 무기상 감마를 연결할 수 없었을 거였다. 그의 위장은 훌륭했으나 운이 없었다. 최근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다는 것 또한. 이 파티가 과연 6인의 배신자를 처형한 기념일지 불안의 반감일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 외에도 아는 얼굴 몇이 지나쳐 갔다. 20세기처럼 야쿠자, 마피아, 아일랜드인과 흑인으로 구분할 수 없었다. 그냥 모두가 갱이고 마약상이며 폭주족이자 청부업자였다. 이규는 도시를 좋아했고 인간이 싫었다. 조형된 사회에 만족하다가도 불량품 같은 개인이 불만스러웠다. 그건 주류와 비주류, 다수와 소수의 개념이 아니라 질서정연한 규격과 무법자의 차이였다. 그는 언제나 극소수에 속했다. 좋은 의미로나 나쁜 의미로나.

은퇴한 50대들과 함께 줄을 서 DVD박스 밑에서 홍콩 영화 주워오는 걸 본 그의 경찰학교 동기들은 기함했다. 너 가끔 텍사스 할아버지 같아. 이규는 익숙하게 받아치곤 했다. 그 남부 노인은 원숭이 싫어할걸.

이규는 이따금 그 자신이 현대인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분명 현대와 강철의 산물을 사랑했는데 경찰이자 FBI이며 아시안에 미국인이면서 Q인 상황이 좀 버거웠다. 근데 그걸 다 했다. 그는 매일 타자를 연기했다. 자아가 외부 세계로 완전히 빠져나가고 텅 빈 속으로 온갖 군상의 탐욕, 악의, 집착을 둘러쓸 때면 사이키델릭 약물 쇼크에 시달리는 것 같았다.

추구하는 평온엔 뭘 해도 닿지 못할 걸 알게 된 후엔 오히려 덜 괴로웠다. 인지했다면 만족의 역치를 낮추면 된다. 어쨌든 그는 살아 있고, 최소한의 자유가 있고, 그가 원했던 삶의 단면을 이뤘다. 그 사실을 가슴에 새겨 놓고서야 적당히 도망치고 순응할 수 있게 됐다. 이를 테면 럭키한 이상주의자. 인위 극복한 인류애.

“마실 기분 아닌가 봐?”

두피부터 땋아내린 브레이즈의 바텐더는 손님 둘 앉은 바를 지키며 종종 말을 걸어왔다.

“괜히 사고 치기 싫거든.”

이규는 장난스레 답하곤 원목에 상체를 기댔다. 입 대지 않은 술잔을 내려 놓으며 관심 있는 쪽은 그녀인 척했다. 죽치고 앉아 주변만 훑어 봤다간 짭새라고 광고하는 꼴이었다.

잭다니엘스 병을 내려둔 바텐더가 물었다.

“이쪽은 많이 취한 것 같은데. 안 친해?”

이규는 옆을 돌아봤다. 두 칸 떨어진 간격, 바 끝자리에 앉은 소년이 이마를 짚고 꾸벅꾸벅 졸았다. 소년? 그럴 리가 없지. 강한 조명과 내려앉은 긴 속눈썹, 인종이 만들어낸 착시였다.

아시안끼리는 다 친구라고 생각하는 잔인한 질문⋯은 아니었다. 진짜 이 클럽을 쏘다니는 동양인은 거의 아는 사이였다. 경비원이 아시안 갱단을 줄줄 꿰고 있는 것만 봐도 뻔했다. 이규는 잠시 고민했다.

“괜찮아, 내가 보기엔 졸고 있는 거야.”

모른다고 하자니 어색해 부정하지만 않았다. 잡담을 나누기엔 너무 성실한 바텐더는 곧 컵을 닦으러 갔다.

수려한 소년은 한번 의식하고 나니 눈길을 떼기 힘들었다. 그늘진 눈가가 묻혀 잘생긴 턱선만 보였다. 살짝 부르튼 입술과 반듯한 콧날, 보드라울 것이 분명한 뺨, 아우터에 감추어지지 않는 탄탄한 몸도. 이 세상 모든 천사의 초상은 잠들어 있어야 마땅하다. 참 예쁘장한 외모였다. 마냥 중성적인 미인과는 아예 결이 달랐다. 곱고 정교했다. 이규는 소년이 남자로 변하는 순간을 알았다. 섬세한 이목이었지만 그가 가지고 태어난 조각들 중 가장 투박한 부위는 바로 눈이었다. 까맣고 스산하고 서늘한 구덩이.

지금 보이는 것과 같이.

이규는 곤란할 때 웃었다. 그 습관이 이번엔 그를 구해주지 못할 것 같았다.

“안녕.”

눈두덩이를 꾹 누른 남자가 졸린 눈을 녹슨 빗장 풀듯 느리게 굴렸다. 그는 대답 없이 이규를 훑었다. 자는 모습을 훔쳐 본 꼴이 된 규는 머쓱해졌다. 그 짧은 마주침에도 아웃사이더 분위기가 팍팍 풍겼다. 척 봐도 이곳 주민은 아니었다. 그처럼. 이규는 불쑥 얼굴을 가려주는 것이 없다는 게 불편해졌다.

이규는 티셔츠 위에 걸어둔 안경을 빼 들었다. 문득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드니 그가 아직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비스듬한 각도로 있을 때보다 반반한 느낌이 덜했다. 훨씬 거칠고 메말라 보였다. 이규는 눈썹을 들썩였다가 찡그리듯 웃음 지었다. 자꾸만 맨얼굴이 거슬렸다. 저 속을 알 수 없는 검은 눈동자는 익숙했다. 분명히 아주 깊이 들여다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이 남자도 그랬다. 눈맞춤이 길었다. 아차. 그는 얼른 안경을 썼다. 얇은 테를 고른 게 약간 후회스러웠다.

“아, 미안. 낯익어서. 우리 본 적 있던가?”

이규는 턱을 괴며 다소 눌린 발음을 냈다. 남자와 그 사이에 팽팽한 끈이 당겨지고 있는 것 같았다. 긴장감이 조였다. 그가 피딱지 앉은 제 입꼬리를 혀로 툭 건드리며 입을 열었다.

“아니.”

잠긴 목소리가 시끄러운 밴드 연주 속에서도 뚜렷하게 들렸다.

“본 적 없는 얼굴인데.”

“나는 아니고. 아버지가 여기 살았어.”

이규는 외워둔 사실을 말했다.

“피곤한가 봐. 네 친구들은?”

남자는 뻐근한 뒷목을 주무르며 천장을 향해 긴 날숨을 내쉬었다. 무척 무료하고 나른한 움직임이었다. 이규는 답이 오지 않으리란 걸 짐작했다. 시계를 봤다. 시침이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린이 슬슬 주변인을 물렸다. 조금 목이 탔다. 경호 인력이 가드를 쳐 시야를 가렸다. 규는 2층 난간 각도를 계산했다. 멀더라도 올라가는 게 나았다.

토독. 남자가 손끝으로 바를 두드렸다. 이규는 일어서다 주의를 돌렸다.

“넌.”

“어?”

“혼자냐고.”

“아. 이 동네 온지 얼마 안 돼서.”

이규는 껄렁히 기울이며 의도적으로 시선을 비꼈다.

“키친?”

드득. 그가 다시 목재 결을 긁었다. 그는 나직히 중얼거리는데도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것처럼 선명했다. 그러지 않으려 해도 그에게 집중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맞아, 피자. 알아 보네.”

“그쪽이 사람 많이 쓰니까.”

“손님? 미안한데 난 지금 물건 없어.”

“그건 다음에. 이름 뭐야?”

동향인에 대한 호기심? 의리? 그런 훈훈한 광경은 결코 아니었다. 약쟁이 사이에 무슨 대단한 동질감이 있다고. 이규는 집요하게 낯을 훑는 눈빛에 안면 거죽이 온통 스멀거렸다.

“Q. 너는?”

“23.”

숫자 사인. 모르는 체 하기엔 유명한 사실이다. 밀수, 도축, 정육점. 세가지 단어가 싸구려 칵테일처럼 속에서 뒤섞였다. 경찰을 살해한 현장에 돼지 피를 뿌려 조롱하는 건 서부 갱의 오랜 전통이었다. 돼지는 경찰을 뜻하는 구식 은어였고 정육점은 청부 살인의 의미로 굳혀졌다. 죽음의 상인들은 흔한 별명 대신 숫자를 썼다. 그들은 도축업자로 뭉뚱그려 살아갔다.

“험한 일 하네.”

“글쎄.”

그리고 이 남자는 분명 사람을 표적 삼는 데 숙달된 인간이었다.

“그냥 일이지.”

이규는 당장 그의 허리 부근에 묵직히 자리했을 총기를 빼앗고픈 충동을 가라앉혔다. 감각이 예민하게 올라붙었다.

“쉬러 왔어? 썩 즐기는 것 같진 않은데.”

“휴가.”

“어떤 머저리가 네게 이런 휴가지를 골라줬을까.”

“있어. 꼴사나운 놈.”

그는 무의식적으로 어느 한 군데를 흘깃댔다. 이규는 바로 알아들었다. 특별한 추리는 필요없었다. 그를 데려와 앉혀둘 인간은 클럽의 소유주밖에 없었다. 린이었고 또 감마였으며, 그의 고용 계약자인.

감마의 히트맨. 안티오키아의 악마⋯. 이규는 그를 이미 알았다. 안전가옥에서 반복해서 돌려 읽은 파일이 저절로 의식에 부유했다.

23, 최종수. 남미 은드랑게타의 청부사.

이규는 마저 발을 뗐다. 속으로 적절한 인사말을 골랐다.

“야.”

그는 심장의 깜빡임을 느꼈다. 깜빡깜빡. 급박히 점멸했다. 이규는 최종수를 삐딱히 응시했다. 그제야 붙잡힌 팔뚝에 힘이 풀렸다. 잡힌 부위에서부터 서서히 피가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참 더러운 버릇이다. 최종수는 억지로 눈을 맞춰 왔고, 폐부에서 아슬아슬한 작열감이 퍼졌다. 숨이 막혔다.

“왜.”

“뭘 찾아?”

최종수는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드물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깊게 파인 눈매가 미미하게 당겨 긴 속눈썹에 파묻혔다가 사근히 뜨였다. 이규는 또다시 누가 술래인지 모를 게임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사람 재보는 눈이 자극하거든. 아무나 말고⋯ 불현듯 옛 파트너의 음성이 귓가를 떠돌았다.

“딱히,”

그가 휙 팔을 잡아 끌었다. 이규는 중심을 잃을 뻔했다. 허리 숙여 바 스툴을 짚자 최종수의 손이 얼굴로 다가왔다. 규는 반사적으로 질끈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림자가 완전히 떨어지고 나서야 무심결에 세게 쥐었던 손에서 힘을 뺐다.

어느새 그에게 안경이 들려 있었다. 이규는 낮게 말했다.

“젠장, 뭐하는 짓이야.”

최종수는 기어이 손아귀에서 테를 뚝 부러뜨려 바에 올렸다. 망가진 나사가 떨구어졌다.

“가리잖아.”

숨결이 닿는 거리였다. 어디를, 그건 묻지 않아도 뻔했다. 그는 제 눈높이에 맞춰 선 이규의 민낯을 들여다봤다.

“뭐가 보여?”

최종수가 부드러운 살점 뜯듯 고개를 틀어 속살거렸다. 물러서면 그가 귀를 베어물 것만 같았다. 그의 수렁 같은 망막 안에는 일그러진 이규밖에 없었다. 최종수는 제게서 다른 것을 볼까? 더 무르고 은밀한 살코기를 찾아냈나? 경직되어 조아드는 혈관, 바싹 마르는 혀, 거미줄 같은 지각신경 사이사이 타르처럼 달라붙은 거짓말을⋯ 

일순간 깜빡임이 멎었다. 이규는 입 안을 강하게 깨물었다. 그러고도 멀미가 침잠하지 않을 때면 그는 속내에서 불안을 유리했다. 기껏 회피해놓고 스스로 원점으로 돌아가는 성향은 그 탓이었다. 

“내가 보여.”

이규는 표정을 지우고 담백히 대답했다. 그가 푸핫. 아이처럼 웃었다.

그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따라붙었다. 이규는 최종수가 무슨 놀이를 하고 있는지 어렴풋이 깨달았다. 이 도축 기술자는 명백히 이규를 해체하고 싶어했다. 그건 때로는 한 개인을 정복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당신은 금욕적으로 보이는 게 좋아. 사람 재보는 눈이 자극하거든. 아무나 말고⋯ 위험한, 별종들만.

아. 잊고 있었던 경고가 뇌리를 치고 들어온다. 그가 목을 틀어쥘 것처럼 오싹히 마주봤다.

그리고 그 순간, 총성이 그들을 갈랐다.

“하⋯ 씨발.”

최종수는 신경질적으로 일어서며 M&P를 빼들었다. 그는 한손으로 정확히 세 발을, 경호원을 쓰러트린 2층 저격수의 관자놀이, 심장, 복강을 뚫는 데 썼다.

비명이 낭자했다. 이규는 바텐더에게 숙이고 있으라 손짓하고 감마를 찾았다. 파란 브릿지가 여전히 감마에게 올라타 있었는데, 이번엔 비수를 쥐고 있다는 게 달랐다. 날붙이는 작았지만 턱 밑 급소를 찌르기엔 충분해 보였다. 이규가 인파를 가르기도 전, 청록색 드레스는 피로 물들었다.

감마가 깨진 술병으로 암살자의 목을 절도 있게 찔렀다. 그는 보드카를 담궈둔 우묵한 그릇에서 얼음을 가득 집어 얼굴을 닦았다. 그리곤 짜증스레 외쳤다.

“뭐해? 노래 마저 틀어!”

클럽 안이 다시 어지러운 조명과 음악으로 채워진다.

1, 2, 3, 4

총성이 이어졌다. 2층 난간에서 시체 두 구가 떨어졌다. 플로어에서 어딜 봐도 수상한 코트가 총을 꺼내들었다. 검문이 뻥뻥 뚫릴 줄 알았으면 그도 애착 핸드건 한 정 들고 나올 걸 그랬다. 이규는 뒤에서 목을 끌어안고 어깨 각도를 틀었다. 탄환이 천장으로 비껴났다. 손목을 잡아 팔을 꺾자마자 검은 코트가 뒤돌아 팔꿈치로 허공을 후렸다. 이규는 겹친 손으로 총신을 아래로 누르며 빠르게 탄창을 분리시켰다. 그가 두 팔을 들고 보란듯이 한 걸음 물러서는 동안 놈이 빈 총을 겨누었다가, 머리가 터졌다.

털썩 꺼지는 코트 자락 너머로 최종수와 마주쳤다. 그 찰나가 아주 길었다.

최종수가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이 총구를 그에게 향했다. 이규는 순간적으로 코트를 받쳐 들어 방패 삼았다. 몇 발이 절명한 검은 코트 사내의 등에 박혀 들어갔다. 재빨리 뒷걸음친 규는 시신을 던지며 실내 대리석 분수대 뒤로 굴렀다. 죽은 자의 뻣뻣한 아귀에서 빼온 권총에 뺏은 탄창을 끼워넣고 심호흡 했다.

이규는 티셔츠 안 달아둔 마이크가 멀쩡한지 확인하고 주머니에서 인이어를 꺼내 꼈다. 이모티콘이 귓속에 때려박혔다.

“눈치 챈 건지 변덕인지 모르겠다고, 나도.”

트레이를 힘껏 걷어찼다. 일자로 미끄러진 트레이 위 술병들이 총에 맞아 폭죽처럼 터졌다.

I Just Want To Celebrate yeah, yeah

핑크빛 조명이 주욱 내리고 핏물과 샴페인이 알록달록하게 섞였다. 수직으로 떨어지는 분수에 비쳐 보는 시야는 LSD를 녹여 먹는 것 같았다. 이규는 물살 속 일렁거리는 최종수를 겨눴다. 그의 눈동자처럼 일그러져갔다.

쏴. Q. 죽이지만 않으면 돼. 그의 상상인지 통신기에서 들리는 말인지 헷갈렸다. 이규는 동맥과 급소를 비껴 조준했다.

타앙-!

형상이 크게 휘청였다. 최종수가 허물어졌고 그의 뒷편으로 SIG를 겨눈 감마가 보였다. 그들은 일직선상에 있었다. 감마는 총부리를 내려 약실에 탄을 채웠다. 그가 겨냥한 방향은 최종수의 뒤통수였다.

“멈춰, 임승대!”

이규가 외쳤다. 그곳에 있는 오직 셋만이 아는 언어였다.

3. “Revival”

BACK IN THE NEVADA

-다시, 네바다

노수민을 직접 만난 건 한국에서였다. FBI 한국지부 정보보안과. 표면적인 명함은 그랬다. 한국지부에는 서류상 존재하지 않는 3팀이 있었고, 쓸데없는 정보 모으기가 취미인 노수민은 이규와 일한 해커였다. 한국계로 구성된 그들의 업무가 대북 정책과 맞닿아 있다 한들 이규를 보스턴으로 소환한 건 주찬양의 안보부가 아니라, 더 윗선의 개입이라고 얼핏 예상했다. 그에게 배정된 먹잇감은 더 큰 사냥을 위한 미끼일 뿐이라고⋯.

“우리 3팀은 한국에서 철수 중이야. 샌프란시스코 테러 잔당이 잡혔거든. 여럿 죽은 모양이지만.”

수민은 덕분에 벌써 며칠째 철야 중이라며 앓는 소리를 냈다.

“어떻게 됐길래 철수를 해? 이제와서 평화롭게 외교로 해결한단 건 아닐 테고.”

“얘기가 길어. 우선 심문 결과 그 테러 단체는 북한과는 엮인 게 없고 비밀경찰이 휘말려 죽은 건 우연이었대. 증인은 뭐⋯ 국정원에서 빼돌린 걸 다 알았잖아? 어쨌든 북한의 공작은 아니었단 게 밝혀졌으니 일단락 된 거지, 결국. (~^^)~”

이규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묵은 독성이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그는 거실 안, 카메라 렌즈가 있는 곳을 쳐다봤다.

“배후가 북한이 아니란 건 감마를 털어댈 이유가 없다는 거 아니야? 안보부 무기국으로 넘겨야지.”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귀국 결정된 건데⋯⋯ 이제야 알맞게 인계된 거야. 이규, 넌 알고 있었어? 감마가 ‘재활용’된 쓰레기라는 거 말이야. ( ;"m")”

손바닥으로 눈가를 덮었다가 뗀 이규는 벽에 붙은 잔혹한 사진들 속 사람의 잔해물을 응시했다.

“우리처럼?”

“응.”

전직 인터폴 수배자가 까꿍. 하고 놀랐냐며 웃었다.

“무기국이 여태 감마를 체포 못한 이유가 있던걸. FBI 첩보부가 애지중지 키운 녀석이야.”

이거 봐. ( ^皿^)っ

식탁에 둔 태블릿이 켜졌다. 노수민이 건드리는 모양인지 잠금이 저절로 풀렸다. 수민이 곧 몇 개의 창을 띄웠다.

수배명 Ⅱ, 감마. 본명은⋯

“임승대. 한국계, 출생지는 차이나타운. 화교로 위장하는 게 특기래. 군 복무 중 방산비리에 연루되어 체포됐고 징역 35년을 선고 받았어. ‘재활용 프로그램’에 합류하는 조건으로 석방됐지. 그 뒤는 뻔해. 중국과 접촉해 민족을 위하는 척, 반미 공작 활동을 지원하는 중이야. 물론 연방의 감시 하에.”

이규는 태블릿을 들고 서 자료를 뒤적였다. 장교 군복을 입은 임승대는 단신의 특수부대원과 찍힌 사진이 많았다. 안보부에서 감마의 정체를 모르는 게 당연했다. 임승대는 첩보부 자산이었다. 이규 그 자신처럼. 그는 이 사각형 은신처에서 오래 전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독방을 연상하지 않으려 했다. 한계를 시험하는 굶주림, 구속, 추위와 열기가 있었던 그 감옥은 기억 저편에 묻어두어야만 했으니까.

“군수 시장 스파이였구나.”

“나도 놀랐어. 중국인이라 생각했는데. 하긴 출신을 들켰으면 같은 한국 3팀으로 묶였겠지? 그건 별로~ 알아 보니 핸들링 어렵다고 자자하다나 봐. ‘교화’를 가장 오래 버틴 독종이래. 무려 신기록. w(゚Д゚)w”

이규는 제공된 긴 프로필을 모두 읽고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라면 이 타운하우스의 방범 카메라를 해킹해 지켜보고 있을 거였다.

“내 소관이라는 건 알겠어. 알겠는데.”

“이제 그를 데리고 뭘 해야 하는지 알려줄까?”

“수민아. 나 피곤해.”

“하하. 히트맨 커뮤니티에 그의 살인 의뢰가 들어갔어. 유럽과 중남미에서 킬러가 모여들고 있지.”

화면이 바뀌었다. 접근 권한 요청이 떴다가, 자동으로 패스워드가 입력됐다.

“무슨 뜻인지 알겠어? 이대로 뒀다간 그는 살해 돼. 첩보부 입장에선 최악의 시나리오야. (゜∀。)”

현상금 400만 달러. ‘린’. 국경에서 넘어온 바이커 갱이 린을 총살하려 들었고, 휘말린 FBI 마약과 요원 둘이 사망. 실종 처리한 과정이 기록되어 있었다.

“누가 의뢰한 거야? 이 정도 액수면 FBI 내에서도 1급 수배범이야.”

“임승대가 남미 마약왕, 파파 보나벤투를 교살하고 도주한 킬러의 밀입국을 도왔거든.”

“파파 보나벤투? 암살된 전 은드랑게타 보스?”

“맞아. 이탈리아 마피아가 또 독하잖아? 보스 멱을 딴 놈은 직접 죽일 생각인지 현상금을 안 걸었어.”

이규는 탄식과 같이 말했다.

“벤데타.”

“d(*゚∀゚*)”

다음 파일에는 인터폴에서 은드랑게타의 킬러들이 이탈리아 국경을 빠져나갔다고 경고한 내역이 들어 있었다.

“알다시피 ‘재활용’은 기밀이고 한 명이라도 잃으면 막대한 예산이 날아가는데다⋯ 미국 핸들러는 이규 너니까. 너와 우리가 프로그램 일원을 보호하란 명령이야.”

설명을 마친 수민이 드디어 작전 개요를 띄웠다. 이규는 한 지점에서 멈추었다.

“옵션이 붙어 있는데?”

“무려 마약왕을 해치운 킬러잖아. 공개수배 된 적도 없고, 어릴 때 납치되어 조직의 청부사로 큰 케이스라 신원도 없어. ‘재활용’ 하기 딱인걸. (^ㅡ^)”

“⋯영입, 아니면 사살이라.”

“어차피 연방법원에 기소 되든 콜롬비아로 이송되든 사형이야.”

네가 그 녀석을 구하는 거나 다름없지. 이규는 엄습하는 두통을 느꼈지만 티 내지 않으려 악물었다.

“오랜만에 수사관 역할은 재밌었나? 이제 본업으로 돌아가야지, Q. (人^▽^)♪”

그 소리가 기어코, 이규를 과거에 잠기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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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제 테이블 가운데에는 수갑을 걸어둘 수 있는 쇠고리가 튀어나와 있었다. 이규의 손목은 상 위로 끌어 올려져 단단히 고정되었고 두 다리 사이에는 족쇄가 채워졌다. 그가 갇혀 있었던 1평 남짓한 독방은 정신을 갈기갈기 찢어둔지 오래였다.

“리. 네게 흥미로운 제안을 할까 하는데.”

값비싼 정장을 차려입은 차장이 양손을 바지춤에 꽂아 넣고 다리를 꼬며 지껄였다.

“당연히 네게도 거부권이 있다. 이대로 교도관에게 면회를 끝내고 싶다고 말해. 넌 방으로 돌아가 남은 형기를 채우면 돼. 30년쯤 후에는 자유를 얻을 수 있겠군.”

무슨 제안이죠? 쩍 갈라진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너를 ‘다시 태어나게’ 해줄 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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