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비친 낮달

독립운동가 준쟁

나래울 by 수아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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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인 인물 및 엑스트라의 사망 소재

1918년 4월, 도쿄.

묵직한 서적을 들고 도쿄대학교의 건물에서 나오던 한 학생은 뒤에서 누군가에게 어깨를 붙잡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큰 키와 다부진 체격에 피부가 하얗고 곱상한, 어디서 잘 자란 도련님 같은 청년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무표정했으나 눈빛만은 총명하게 빛났다. 내려다보는 시선이 올곧았다. 모르는 사람에게 난데없이 어깨를 붙잡혔는데 희한하게 두렵지도 화나지도 않는 것은 그 때문일까.

"네가 진재유, 맞지?"

"…맞는데, 니는 누고?"

"성준수. 이현성 선생께서 도쿄대 법과대학에 다니고 있는 진재유를 찾아가라고 하시던데."

일본 대학 한복판에서 대뜸 조선 말이라니. 진재유는 방금까지 나이 든 일본인 교수가 흐리멍덩한 일본어로 진행하는 두 시간짜리 형법 수업을 듣고 나온 참이므로, 오히려 또박또박한 모국어를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어쨌든 봉투를 건네받아 내용을 읽어보니 이현성이 진재유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편지 들고 간 애 이름은 성준수고, 걔도 내 제자인데 동갑이니 같이 지내며 일을 도모해보면 어떻겠느냐는 요지였다. 이게 무슨 소리람. 뒤늦게 확인한 편지 봉투에는 이현성, 익숙한 필체의 서명이 선명했다.

"하……. 선생님께서는 와 나한테는 일언반구 없으시다가. 준수, 만나서 반갑다. 일단 따라온나."

성준수와 진재유의 첫 만남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성준수는 고개를 끄덕이고 진재유의 뒤를 따랐다. 캠퍼스를 가로지르고 주택가를 거닐면서 두 사람은 드문드문 조선 말로 대화했다. 남의 눈을 의식해 일본어로 말을 걸었더니 성준수가 못 알아들은 탓이었다. 진재유는 내가 네가 찾던 그 사람인지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고, 성준수는 선생께서 키 이만하고 주근깨 있고 차분해 뵈는 조선인이라고 알려주었다고, 그래서 한눈에 알아보았다고 답했다. 그럼 조선인인지는 어떻게 알아보았냐고 되묻자 그냥 딱 보면 안다는 싱거운 대답이 돌아왔다.

진재유는 그 대답이 퍽 기꺼웠다. 그래서 굳이 딴지 걸지 않고 묵묵히 걸었다.

진재유의 아버지는 국권피탈 이전부터 일찍이 동포를 배반했다. 그러니까, 일본 군부의 개가 되기를 자청하여 나라를 팔아먹는데 일조했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민족 반역자라고 뒤에서 욕을 하든 말든 그가 나라 팔아먹은 대가로 손에 넣은 부와 안위는 값졌다. 부산항과 울산항, 아니 경상 지방 전체를 꽉 틀어쥔 실세의 자리에 아버지는 군림했다.

그가 비록 민족에게는 역적일지언정 아들에게는 꽤 괜찮은 아버지임은 틀림없다. 어려서부터 불란서에서 건너왔다는 실크 양복을 입히고, 매 끼니 흰쌀밥에 고기반찬 먹이고, 심지어 일본 내지로 유학까지 보내주었다. 유학 자금도 다달이 넉넉히 부쳐 진재유는 동경에도 흔치 않은 서구식 주택에 혼자 살았고 요리가 서툴러 사 먹는 일이 많았음에도 생활비가 모자란 적이 없었다.

진재유는 아버지에게 감사하면서도 그 풍족함이 끔찍했다. 일본에서 벌써 몇 해째 살다 보니 제가 정녕 조선인이 맞는지도 의심스럽곤 했다.

조선인이라고 무시하는 일본인이 거의 없었던 것도 그 의심에 한몫했다. 이는 진재유가 어릴 적부터 일본어를 배워 능숙하며 학교에서는 일본식 이름을 쓰기 때문에 조선인인 티가 별로 나지 않는다는 이유도 있지만, 그의 아버지가 일본 저명인사들과 쌓아온 친분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대학에 입학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 진재유가 내지인이 아닌 것을 알게 된 일본인 동기 하나가 마주칠 때마다 조센징 조센징, 시비를 건 적이 있다. 걔 친구들까지 덩달아 몰려 와 야유를 퍼붓곤 했다. 그런데 학술 행사로 자리를 비웠던 학과장이 아버님께 말씀 많이 들었다며 진재유에게 악수를 권하는 모습을 보고는 신나게 놀리던 입을 딱 다물었다. 조선인은 만만해도 일본인 학과장은 무서운가 보지. 시비를 걸기는 커녕 슬쩍 눈을 피하며 주춤대는 그 애들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게 벌써 몇 해는 지난 일이다. 딱히 감흥은 들지 않았다.

"재유. 근데 너는 왜 법과대학 갔어?"

"별 이유 없다."

성준수의 질문에 그렇게 답한 것은 답하기 싫어서 얼버무린 게 아니라 단지 그 말이 진실이기 때문이었다. 진재유는 평범한 조선 사람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호화스러운 삶을 누리며 컸으며, 아마도 앞으로의 삶도 그럴 터였다. 아버지 말씀하시는 대로 법과대학 졸업 후 변호사나 판사 같은 일을 하면서 아버지가 정해주시는 시기에, 아버지가 정해주시는 상대와 혼인하고, 아버지가 하시듯 일본 고관대작들에게 알랑거리며, 부유하고 내 몸 하나는 안전하게……,

그것은 참, 참으로 무료하고 절망적인 미래라고 진재유는 생각했다. 속에서 올라오는 쓴물을 익숙하게 삼켰다.

"도착했다, 내 사는 곳."

그러고보니 아침에 정리하고 나왔던가? 가장 내밀한 자신만의 공간을 오늘 처음 만난 사람에게 보여주려니 조금 긴장되었다. 오면서 딴생각하느라 이런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니. 그러나 이제 무를 수도 없어 진재유는 천천히 잠금장치를 풀었다. 한발 앞서 들어가 휘휘 둘러본 공간은 그럭저럭 깨끗했다. 애초에 물건이 많지도 않으니 기우였던 셈이다. 안심하고 아직 문밖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성준수를 들였다. 아무 데나 편히 앉아있으라고 말한 후 현관을 잠그고 주방에서 차를 내왔다. 말차 대신 맑게 우린 녹차, 선물 받아 아껴 먹던 한과 몇 종류. 먼 길 온 손님은 다행히 다과상을 반겼다. 손을 닦자마자 유과부터 집어 들어 먹는 모습을 보며 진재유는 녹차로 목을 축였다.

"준수, 선생님께서 니 여서 살라고 보내신 거 맞나."

"맞긴 한데, 너 불편하면 따로 방 구하면 돼."

"아이다. 선생님 말씀인데 무슨 뜻이 있겠제. 조금만 정리하면 방 하나 비워줄 수 있다. 니는 여서 사는 거 괘않고?"

"나야 뭐, 애초에 그럴 생각으로 온 거니까."

"맞나. ……선생님이랑은, 어떻게 알게 됐노?"

성준수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독립운동하려고 이것저것 알아보다가 연이 닿았다고. 이야기 좀 해보니 믿을만한 분 같았고, 일본 군부 놈들 다 족쳐버리고 싶다니까 껄껄 웃으며 너를 찾아가라 하시길래 따랐다고. 진재유는 그 이야기를 듣고 눈앞의 사내가 참 신기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진재유는 이현성을 믿는다. 그의 선택이나 판단도 믿는다. 진재유가 부산에서 일반 학교를 다닐 때 이현성은 그 학교의 교사였다. 이현성은 나라와 제자들을 진심으로 아끼는, 몇 안 되는 참된 스승이었다. 수업 시간에 일제의 입맛에 맞지 않는 말을 많이 한 게 들켜 결국 교직에서 잘렸지만, 진재유는 졸업한 지 수 년이 지났음에도 아직 그와 연을 이어오고 있다. 둘 사이의 신뢰는 서로 오래 교류하며 믿어도 된다는 판단을 할 만한 근거를 충분히 많이 얻은 다음 형성되었다.

그러나 성준수는 달랐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성준수와 이현성이 아는 사이가 된 지는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았다. 그런데 이현성은 어떻게 성준수를 믿고 그를 진재유에게로 보냈으며, 성준수는 어떻게 이현성을 믿고 진재유를 찾아왔단 말인가. 경성에서 동경까지 기차를 타고, 배를 타고, 다시 기차를 타는 먼 길을 오는 동안 그는 불안하지도 않았을까.

진재유는 선생님께서 성준수를 자신에게 보낸 이유를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은 그가 바라는 목적에 부합하는, 쓸모 있는 인간인가?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그의 꿈은 실현 가능한가? 그가, 그것을 이룰 수 있겠는가? 묻고 싶은 것은 많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아 한참 뜸을 들였다.

"독립…….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안 돼도 되게 해야지. 그러려고 여기까지 왔잖아."

힙겹게 꺼낸 함축적인 질문에 쌈박한 답이 돌아왔다. 성준수의 말 한 마디, 눈빛 한 조각에는 진재유는 모르는 색깔이 깃들어 있었다. 올곧은 믿음. 누군가에 대한 신뢰, 그를 믿기로 결정한 자기 자신의 선택과 판단에 대한 확신.

진재유는 소리 없이 탄식했다. 그의 확신은 너무나 낯설어서 두렵고 매혹적이다.


1918년 8월, 도쿄.

도쿄의 여름은 뜨겁다. 8월 말이면 슬슬 더위가 가실 법 하지 않나 싶어도 내리쬐는 햇빛과 꿉꿉한 열기는 가실 줄 몰랐다. 한반도의 여름도 상당히 습한데 일본 열도는 더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뚝뚝 흐르는 날씨에 다섯 남자는 서로 동떨어져 바닥에 널브러져 더위를 견뎠다. 낡은 일본식 목조 건물은 나무와 다다미가 습기를 빨아들여 바깥보다는 그나마 버틸 만 했다. 게다가 아직 본격적인 이야기를 하기 전이라 창문을 열어놓았더니 더운 바람이나마 불어 한결 나았다. 무명천에 파란 물감으로 멋들어지게 쓴 두 글자가 바람에 흔들렸다.

지상志上.

높은 뜻을 이루리라는 의미를 담은 이 모임의 이름이다.

이곳에 모인 다섯 남자는 모두 경상도 출신의 도쿄대 조선인 유학생이다. 진재유는 4학년, 나머지는 2학년. 학부와 나이는 다르지만 작년 4월 교내 농구 동아리에서 만난 그들은 같은 조선인으로서의 동질감과 부채감을 공유했다. 핍박 받는 동포의 설움을 안다. 별 쓰레기 같은 일본 놈들을 만나면 비아냥도 많이 당했다. 홀로 사는 타지 생활은 외로웠다. 그러나 내가 느끼는 나라 뺏긴 고통이 다른 사람들만 할까? 그들의 마음에 뼈저리게 공감한다고 당당히 말할 수나 있는가. 공부는 커녕 목숨 부지하기 바쁜 사람도 많은데. 부모 잘 만나 유학까지 와 있는 자신이…….

그러니 어찌 보면 그들이 뭉치는 건 순리였다. 진재유는 일본에 왔을 때부터, 즉 아버지의 손아귀에서 한 발짝 벗어나자마자 홀로 조선인들을 돕고 있었다. 일본어도 서툴면서 무작정 먹고 살기 위해 고향 떠나온 노동자나 유학생들에게 일본의 언어와 문화를 가르쳐 그들이 내지인 눈 밖에 나지 않게 돕고, 거처할 곳을 마련하는 일도 도왔다. 조선인, 혹은 조선인을 핍박하지 않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가게를 찾아 일자리를 알선해 주었고, 굶주린 이는 따뜻한 밥 한 끼 먹여 보냈다. 지상의 구성원들도 대부분 그런 식으로 진재유의 도움을 받으며 친해졌다.

진재유는 스승인 이현성에게 편지를 부칠 때면 으레 돈을 함께 보냈다. 독립운동 자금으로 써달라는 뜻이다. 아버지로부터 유학 자금을 받으면 큰 돈을 독립자금으로 뚝 떼어주고 본인은 남은 돈을 아껴가며 검소하게 산다. 그런 사람을 신뢰하지 않을 수 있는, 좋아하지 않을 수 있는 조선인은 아마 없을 것이다.

만난 지 1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그들은 '지상'이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만든 건 좋은데, 문제는 어디서 모이느냐였다. 모인 목적이 목적이니 남의 눈과 귀에 들키지 않아야 했다. 그러니 술집이나 대학교 내부 공간은 제외. 몸이 아프거나 집안 사정이 나빠지는 등, 여러 사정으로 몇 명이 나가 지금은 여섯 명 뿐인 모임이지만 그때만 해도 열 명이 넘었으니 그 인원을 수용할 만한 공간을 따로 마련해야 했는데 그게 쉽지 않았다.

생활고에 시달려 일과 학업을 병행하는 사람도 몇 있었고, 그렇지 않더라도 대체로 작은 사글셋방이나 하숙집에 살았다. 진재유의 집이 가장 넓기는 하였으나 커다란 장정 열 몇 명이 오래 머무를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주택가에 있어 밤이 되면 조용해 혹시나 소리가 새어나갈까 마음 편히 대화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낮에 모이자니, 각기 다른 강의 일정에 일을 병행하느라 바쁜 사람도 있어 도저히 시간이 맞지 않았다.

결국 진재유는 이현성에게 양해를 구하고 매번 보내던 독립 자금을 몇 달 걸렀다. 그리고 허름한 대신 싸고 넓은 아지트를 하나 따로 구했다. 번화가는 아니지만 대학과 그럭저럭 가까운 편이고, 옆 건물이 밤늦게까지 운영하며 술도 파는 식당이라 낮이고 밤이고 소란스러워 대화 소리를 숨기기에는 딱이었다. 진재유는 집에 있던 레코드와 악보, 악기를 죄 아지트로 가져와 공간을 꾸몄다. 혹시 검열을 당하거든 평범한 음악 동호회인 척 하기 위함이었다.

언뜻 보면 진재유가 모임의 주도자 같지만 그는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 아니면 한 발짝 뒤에 물러서 있었다. 지상이라는 모임 이름도 진재유가 붙인 게 아니었다. 진재유는 자신이 높은 뜻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그런 이름을 떠올리지도 못 했다. 설령 높은 뜻이 제 안에 있다고 한들 이룰 수는 없으리라 믿었다. 돈도 권력도 아버지의 것이지 제 소유가 아니었다. 아무것도 없는 일개 유학생 하나가 해봤자 얼마나 큰일을 한다고.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조금 할 뿐이지. 비굴하게 제 목숨은 아끼면서. 진재유는 그런 식으로 자신이 해온 일을 쉬이 평가절하했다.

지상이라는 이름에는 아직 오지 않은 그 애가 가장 잘 어울리는 것 같다고, 진재유는 더위에 지친 머리로 멍하니 생각했다. 아지트에 있는 건 힘들었다. 더위 뿐만 아니라 이곳에 새겨진 제 짧다면 짧을 세월이 너무나 지난했던 탓이다.

"나 왔어. 아씨, 왜 이렇게 더워?"

"준수햄 오셨으요……."

아지트 문이 드르륵 열렸다. 성준수가 오자마자 불평을 터뜨렸다. 기상호가 더위에 녹은 채로 다다미에 얼굴을 딱 붙이고 인사했다. 나머지는 손만 살랑살랑 흔들거나 고개를 까딱였다. 진재유는 창문을 닫고 문 앞에 레코드를 틀었다. 아지트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있던 청년들이 꾸물꾸물 일어나 안쪽 탁자로 모였다. 제대로 된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

그동안 지상이 해온 일들은 진재유가 혼자 하던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단지 일손이 많아지니 규모가 조금 더 커졌고, 필요할 때는 일을 분담했을 뿐이다. 그러나 성준수가 지상에 합류하면 우리들의 방향이 매우 달라질 것이라고 진재유는 직감했다. 과연 그래도 되는 것인지 고민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신뢰를 위해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하자 그는 의외로 쉽게 납득해주었다. 기다릴게, 그럼. 성준수는 때때로 인내심이 다 닳아 죽겠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묵묵히 기다렸다. 서툰 일본어를 공부하고, 진재유가 알선해준 양복점에서 일하며 돈을 모았다. 그러나 기다림이 한 달을 넘어서자 결국 먼저 말을 꺼냈다.

"진재유. 나는 언제쯤 네 동료들을 만날 수 있어?"

"……내야 말로 묻고 싶다. 니가 가려는 길에 함께하기에 내가 맞는 사람 같나. 내는 그런 큰일을 해낼 만한 사람이 못 된다."

"야, 말 돌리지 말고 싫으면 그렇다고 말해. 너만큼 겨레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 적어도 내 주변에서는 선생님 빼곤 없었어. 다 지 살기 바쁘지."

"오히려 먹고 사는 데 여유가 있으니까 소소한 일 하는거제. 내가 무슨 대단한 일 한다고……."

진재유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떠듬떠듬 가족 이야기를 꺼냈다. 자신이 민족 반역자의 핏줄임을 고하면 그는 어떤 반응을 할까. 언젠가는 말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두려움에 미뤄두었던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다. 이야기가 끝나도 성준수는 말이 없었다. 너에게 실망했다고, 왜 시간 낭비했냐고 말할까. 진재유는 눈을 질끈 감고 매서운 질책을 기다렸다. 그러나 들려온 어조는 평탄했다.

"그러니까, 먹고 사는 데 여유가 있는 놈들은 더더욱 자기네 잇속 챙기기만 바쁜 세상이어도 재유 너는 다르잖아. 너희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걷지 않고 있잖아. 그래서 나는 너와 뜻을 함께하고 싶어."

진재유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처음으로 만났을 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은 눈빛이 제 심장을 찌를 듯 올곧았다. 억누르고 있던 마음이 물밀듯 넘쳐흘렀다. 저 애가 가려는 길이 궁금해. 가능하다면, 나도 함께 하고 싶어. 진재유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성준수가 지상 멤버들을 만나는 걸 허락받은 순간이었다.

진재유의 직감은 적중이었다. 성준수는 지상에서, 기존의 지상이 하던 일보다 더 큰 일을 하고자 했다. 처음으로 만나 한 명씩 돌아가며 하는 어색한 자기소개가 끝나자마자 한다는 말이,

"나는 일본군 사령부의 군국주의자들을 척결할 거다."

였으니 말 다 했다.

"……이토도 암살됐는데. 못할 건 없겠죠. 근데 이런 걸 초면에 말 하나요 보통? 아무리 같은 조선인이라도 그렇지, 나라 팔아먹고 동포 팔아먹는 놈들이 천지빼까리인디……."

"하려면 혼자 하든가, 왜 여까지 왔는데요? 못 들은 셈 쳐 드릴 테니 돌아가시죠."

"나도 남에게 피해 끼칠 생각은 없어. 실행은 나 혼자 한다. 준비를 같이 할 사람이 필요할 뿐이야."

기상호와 공태성의 날카로운 경계에도 성준수는 당당했다. 할 말이 없어지는 건 도리어 다수인 쪽이었다. 네 쌍의 눈이 진재유에게 향했다. 어디서 이런 사람을 데려왔냐는 의문이 가득 담겨 있었다. 진재유는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선생님께서 보낸 사람이라고 말하니 시선이 조금 누그러졌다.

지상을 결성했을 때, 진재유는 그 소식을 이현성에게 전보로 알렸다. 곧 마침 일본에서 할 일도 있으니 얼굴 보러 가겠다는 회신을 받았다. 그리고 이현성은 정말 동경에 찾아왔다. 얼마간 지상의 곁에 머무르면서 그는 진재유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훌륭한 스승이 되어 주었다. 이현성의 눈빛과 말에는 깊은 통찰과 나라에 대한 들끓는 사모와 좌절한 사람을 일으키는 힘이 있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도 않고 이제는 교사도 아닌데 모두 선생님이라 부르며 따랐다.

"선생님 생각이시면 무슨 뜻이 있으시겠제……."

누군가의 혼잣말에 성준수는 그 말 진재유도 했던 것 같은데, 하고 생각했다. 적어도 여기 있는 여섯 명에게 이현성을 존경하는 마음이라는 공통점이 하나 더 있다는 사실은 청신호였다. 일단 서로에 대해 좀 더 알고 난 후에 다시 이야기하자고 정희찬이 넉살 좋게 중재했다. 진재유도 고개를 끄덕였다. 성준수는 일단 알았다고 답했다.

그게 5월의 일이다. 첫 만남 이후로도 얼마간은 경계의 의미를 담아 다들 깍듯하게 형님 대우를 하더니 이제는 다들 꽤 친근히 군다. 사실 중간에 공태성과 성준수가 의견 차이로 드잡이질을 했던 영향이 컸다. 다시 본론을 꺼내도 되겠다고 판단한 성준수가 본인이 생각하던 계획을 말했는데, 그게 공태성에게는 성급하게 느껴졌으며 말의 내용도 지나치게 위험하고 허무맹랑하게 들렸기 때문이었다. 사실 진재유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도 대놓고 화내지 않았을 뿐 공태성과 똑같이 여겼다. 계획대로 되기도 어렵고, 어찌저찌 일이 잘 풀린다고 해도 실행자는 반드시 죽을 수 밖에 없는 무모한 계획이었다.

"아, 그러니까 죽고 싶으면 혼자 뒤지라고! 니 영웅병 때문에 우리까지 개죽음 당해야 해? 하이고, 고마 잘-나신 투사 납셨네!"

"씨발, 너 지금 뭐랬어? 그럼 니새끼는 하는 게 뭔데?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인데!"

옆에서 나머지 네 명이 다 달라붙어 말려도 한참을 그런 식으로 싸웠다. 주먹질이 오가고 한 놈은 입술이 터지고 다른 한 놈은 코가 깨졌다. 하도 큰 목소리로 싸워대는 통에 순사가 들이닥칠까 두려울 지경이었다.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제풀에 지쳐 털썩 앉았다. 장정 둘씩 달고 싸우려니 그야 힘들기도 했을 터다.

"너희 지상이라며. 높은 뜻을 이루겠다는 마음으로 모인 거 아니냐?"

"허, 높은 뜻 좋지예. 근데 실패하면요. 싹 다 들통나면 개죽음 아입니까? 내가 그렇게 죽어뿌면, 우리 부모님은 어칸대요. 하나밖에 없는 자식새끼 그래 가면……."

"……나도 안 들키고 잘 해보려고 너네 찾아온 거야. 혼자 뒤지려고 온 거 아니고, 의거 성공하러 온 거라고. 나라고 가족 생각 안 해봤겠냐."

"……."

"내가 너희는 안 죽게, 안 잡혀 들어가게 할게. 어떻게든. 그러니까,"

도와줘. 열 오른 머리를 식히느라 씩씩대던 게 거짓말처럼 두 사람의 목소리는 나지막했다. 듣고 있던 네 사람은 그저 숨을 삼켰다. 마음이 요동쳤다. 비 온 뒤 땅 굳는다는 선인들의 말씀이 허풍은 아닌지, 성준수는 그때야말로 지상의 멤버로 받아들여졌다.

한바탕 뒤집어엎고 피도 보고 속내를 다 털어내며 성준수의 확신이 모두의 마음속에 있던 의협심에 불을 붙인걸까. 결국 성준수가 합류한 지 석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지상의 여섯 사람은 거사를 결의했다.

"정희찬, 뭐 알아낸 거 있어?"

"워낙에 비밀스럽게 움직이는 양반이라 소식 잡기가 힘든데, 듣기로는……, 여기. 일본 군사기지 중 하나인데, 요즘은 여서 일하고 있다 카대요."

정희찬이 손끝으로 지도를 가리켰다. 모두 그 지점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지상은 효율적인 활동을 위해 각자의 특기에 따라 역할을 나누었다. 통솔력이 있고 작전의 최초 기획자인 성준수가 총괄과 실행. 친화력과 언변이 좋은데다 발이 빨라 여차하면 도망치기 유리한 정희찬이 대인 정보 수집. 일본어가 가장 능숙하고 핵심을 잘 짚는 김다은이 문서 정보 수집. 화학을 전공하고 있는 기상호와 두뇌 회전이 빠르고 손재주가 좋은 공태성이 급조폭발물 제작법 연구와 시제품 제조. 사제폭탄은 다른 곳에서 구해오는 방법도 있지만 다른 사람이 제작하고 유통하는 과정에 더 큰 위험이 따른다는 판단하에 내린 결정이었다.

오늘의 회의는 순조롭게 끝났다. 정희찬과 김다은의 정보 수집에도, 기상호와 공태성의 폭탄 제조 연구에도 진척이 있었다. 다 같이 옆 건물 식당에서 저렴한 메뉴로 배를 채웠다. 밥을 먹는 동안에는 부러 재유가 소리 높여 음악 이야기를 했다. 다들 알아듣는 척 맞장구를 쳤다. 늦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왔는데도 해가 지지 않은 채였다. 다만 저녁놀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동생들을 배웅하고 진재유와 성준수도 나란히 집으로 가는 길을 걸었다.

"재유, 괜찮아?"

"뭐가? …내 괘안타. 신경 쓰지 마라."

진재유는 세수하듯 움푹 팬 눈가를 쓸었다. 원래도 눈가에 그림자가 져 조금 피곤해 보이는 인상인데 요즘은 더더욱 안색이 나빴다. 

지상의 작전이 들키지 않고 성공할 수 있도록 진재유는 무던히 노력하는 중이었다. 그동안 아버지의 지인인 높으신 분들을 은근슬쩍 멀리했지만, 최근 진로 고민을 핑계로 학과장에게 접근한 것을 시작으로 최대한 여러 사람과 친분을 쌓고 있는 중이었다. 혐오스러운 군국주의자 놈들 비위를 맞추며 사이 좋게 술이나 퍼마시는 일은 구역질 날 정도로 역겹고 혹여나 자신이 술에 떡이 되어 비밀을 누설할 위험도 신경 쓰느라 술자리가 끝나면 뒤늦게 찾아오는 편두통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러나 그들이 술에 취해 떠들어대는 말에는 때때로 중요한 단서가 포함되어 있었으며 그게 아니더라도 그들에게 '무해하고 얌전하며 일제의 통치에 순응하고 오히려 감사해 하는' 조선인 이미지를 박아넣어 놓는 것은 진재유, 그리고 그가 속한 지상이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라도 중요했기에 초대 받는 자리마다 족족 마다하지 않고 참석했다. 진재유는 술에 잘 취하는 편은 아니지만 부족한 부모자식을 좋게 봐주셔서 감사하다며 아양 떠는 일이 성격에 맞지 않아 극히 피곤해했다.

학교 수업과 지상 회의, 그리고 정보 수집에 사용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남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진재유는 그마저도 대부분 휴식 대신 원고 집필에 투자했다. 언제 한 번은, 목이 말라 잠에서 깬 성준수가 술자리 후 심야에 들어와서는 작은 촛불에 의지해 원고지를 들여다보고 있는 진재유를 보고 기겁한 적도 있었다.

"안 자고 뭐해?"

"글 쓴다."

"좀 쉬엄쉬엄 하지."

"됐다 마, 내 아니면 누가 쓰노. 잠 깨워 미안타. 준수 니는 언능 자라."

지상이 그냥 일본 사는 조선인들끼리 모여 서로 돕는 단체였던 시기에도 진재유는 혹시 모른다며 일부러 아지트 창가에서 기타를 치거나 하모니카를 불거나 레코드를 틀며 음악 동호회로 활동하는 척을 했는데, 수색 당하면 정말로 위험한 활동을 시작하면서는 더 철저하게 행동했다. 몇 명은 달라붙어서 만드는 회지를 홀로 집필하기 시작한 것도 그 일환이었다.

언제는 김다은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고 물었는데, 진재유는 겉으로는 음악 동호회로 위장하고 있는 만큼 뭔가 결과물을 내보여야 의심을 피할 수 있다고 답했다. 진재유 외의 멤버들은 고향 그리울 때 가끔 우리 노래를 흥얼거리는 정도지 음악 자체에는 별 관심도, 지식도 없었다. 그러니 위장용 활동은 오롯이 그의 몫이었다.

지상이 바빠지자 그는 좋아하던 농구 동아리에서도 조용히 빠졌다. 동생들이 아쉬워하며 자신들도 나가겠다고 하자 조선인들만 우르르 빠지면 의심을 살 수 있다면서 그대로 활동하게 했다.

그토록 좋아하는 농구도 포기한 눈물 겨운 노력 끝에 진재유는 결국 군국주의 옹호를 노래에 녹여낸 일본인 음악가들을 칭송하는 원고지 수십 장 분량의 글 다섯 편을 각기 다른 문체로 써내는 데 성공했다. 지인에게 그럴듯한 표지를 부탁해 회지를 몇 부 찍어냈다.

진심이 한 톨도 들어가 있지 않은 그 종이 뭉치를 아지트 문 앞에 떡하니 쌓아두고 자유롭게 읽거나 가져가라고 써 붙였다. 지상의 음악 활동에 관심을 가지는 이는 없었고, 지상 멤버들조차 만듦새만 슬쩍 보았을 뿐 무슨 내용인지는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아지트 문 앞에 쌓인 회지는 어쩌다 한 번씩 행인이 펼쳐보기는 해도 한 부도 줄어들지 않았지만, 덕분에 지상은 완벽히 무해하고 평범한 음악 동호회로 위장할 수 있었다.

성준수는 그런 진재유의 신중함이 마음에 들었다. 별의별 핑계로 사람을 잡아가 취조하는 이 시대 이 나라에서 그만큼 믿음직한 사람이 또 있을까. 거사 결행과 성공을 위해 지상의 멤버 모두가 구슬땀 흘리고 있지만, 진재유의 노력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면 짠하고 고마웠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무리하고 있는 것 같아 걱정이 되었다. 지상의 모든 활동은 사비를 각출하여 이루어졌으나 단연 진재유가 내는 돈의 비중이 컸다. 작전을 결의한 후로 진재유는 지상의 활동비를 더 늘렸다. 부유한 집안 환경에 비하면 원래도 검소한 편이었는데 이제는 정말 허리띠를 졸라맨 생활을 했다. 바쁘고 돈도 아껴야 한다며 끼니도 거르고 작전에 골몰하거나 글을 쓰는 그 애를 끌고 나가 밥다운 밥을 먹이는 게 성준수의 일과 중 하나가 되었다.

아지트에서 두 사람의 집까지는 걸어서 10분 정도 걸렸다. 진재유는 피곤한지 한 마디도 먼저 꺼내지 않았다. 성준수는 진재유를 흘낏 쳐다보았다. 동그랗고 유순한 인상의 그는 과묵하고 표정 변화도 크지 않다. 회의 때도 가만히 있다가 누가 콕 집어 의견을 물어보면 그제야 입을 열었다. 진재유를 모르는 사람이 그 모습만 본다면 그는 저 모임에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인다고 평가할 것이다. 그러나 막상 지상에서 가장 많이 일하고 작전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사람은 진재유다.

성준수는 왜 그가 그렇게까지 하는 지 궁금했다. 하지만 입술만 몇 번 달싹이다가 결국 아무런 대화 없이 집에 도착했다. 집 안을 대강 정리하고 번갈아 씻으니 드디어 밤이었다. 진재유는 창가에서 하늘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재유, 뭘 그렇게 봐?"

"달구경하고 있다. 오늘 보름인가, 꽤 예쁘다. 준수 니도 와서 볼래?"

젖은 머리칼을 수건으로 털며 성준수가 그의 곁에 앉았다. 안개도 구름도 없어서 말간 하늘에 환히 빛나는 둥근 달이 예쁘긴 했다. 그러고 보면 진재유는 종종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곤 했다.

"달 좋아해?"

"좋아한다. 특히 낮달."

"낮달?"

"어. 낮에 뜨는 달."

"아니, 아는데. 왜 낮달을 좋아하냐고."

진재유는 잠깐 말이 없었다. 큰 눈이 데구르르 둥글게 구른다. 성준수는 진재유의 그 행동이 생각 중이니 기다려 달라고 상대에게 알리는 표현임을 안다.

"태양은, 너무 눈 부셔서 볼 수도 없다이가. 그런데 고개를 조금만 돌리면 낮달은 볼 수 있거든. 파란 하늘에 하얗게 뜬 낮달이 참 예쁘다. 게다가 달이란 거는, 밤이 덜 어둡게 길을 비춰주는 존재 아이가. 그런데 낮에도 떠 있다는 게, 뭐랄까, 안심이 된다 해야 하나. 다정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좋아한다."

그렇게 말하면서 수줍게 웃는 진재유는, 적어도 성준수의 눈에는 창밖 저 멀리 있는 달보다 어여뻤다. 은은한 달빛이 얼굴에 드리웠다. 성준수는 충동적으로 그 애의 볼에 손을 가져다 댔다. 흠칫 놀라 자신을 바라보는 눈과 시선을 맞추며 산산이 흩뿌려진 주근깨를 쓸었다. 엄지손가락으로 느리게, 느리게……. 성준수가 손을 떼자 진재유는 자신도 모르게 참았던 숨을 뱉었다. 씻고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목덜미에 땀이 촉촉이 배어들었다.

"……뭔데. 깜짝 놀랐다이가. 내 얼굴에 뭐 묻어 있드나?"

"미안. 그냥 주근깨 예뻐서 만져 봤어."

"무슨, 하루 이틀 보는 것도 아이고……."

성준수는 진재유의 다리를 베개 삼아 누웠다. 덜 마른 머리카락이 바지를 적셔도 진재유는 그가 하는 대로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그런 점이 좋았다. 먼저 다가오지 않지만 이쪽에서 다가가면 군말 없이 곁을 내어주었다. 말수가 적어도 대화가 잘 통하고 시끄럽게 굴지 않아서 같이 있으면 편안하다. 일어날 때마다 잘 잤냐고 물어봐 주는 사람. 안색이 나쁘다 싶으면 조용히 곁을 지켜주는 사람. 목표를 위해 같이 걸어주고 헌신해주는 사람. 진재유는 성준수에게 그런 존재였다.

성준수가 태어난 가문은 대대로 유복한 부잣집이다. 나라 잃은 민족이 되며 일제에 많이 빼앗겼지만 부자는 망해도 삼 년은 간다고 아직 살림이 넉넉했다. 그러니 성준수의 주변에는 콩고물이라도 떨어질까 억지로 친한 척하는 사람이 많았다. 아니면 그의 잘난 용모와 출생 배경을 시기하여 배척하거나. 그런 사람들에게 신물이 났던 성준수에게 진재유는 신기하고, 또 각별한 사람이었다. 걱정스레 내려다 보는 눈이 보름달처럼 둥글고 다정했다.

"재유."

"응?"

"입 맞춰도 돼?"

진재유는 눈을 굴렸다. 아니, 어쩔 줄 몰라 헤매는 건가. 어찌 됐든 그는 말 없이 눈을 감았다. 성준수는 몸을 일으켰다. 그 애의 눈꺼풀, 턱선, 입술을 덧그렸다. 손끝에 와닿는, 버석해진 그 애의 입술이 안쓰러웠다. 혀를 내어 적시면 입술 틈새가 열렸다. 성준수는 파르르 떨리는 진재유의 속눈썹을 지그시 쳐다보며 한 손으로는 목덜미를, 다른 한 손으로는 허리를 단단히 잡았다. 진재유는 성준수의 어깨에 손을 얹었으나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아 스르르 미끄러졌다. 그는 성준수를 껴안는 대신 옷소매를 붙들었다.

두 사람의 첫 입맞춤은 오래도록 이어졌다.


1918년 12월, 도쿄.

세계대전은 끝났지만 두 번째 대전쟁이 발발할 지 모른다는 불안, 혹은 기대가 온 세계를 잠식하고 있다. 군부는 여전히 몸집을 불리길 원했지만 일본인이라고 모두 군국주의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더 이상의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는 목소리를 내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일본 군부는 자신들의 세계적인 위상을 선전하고 군국주의의 정당성을 설파해 민심을 모으려는 목적의 행사를 기획했다. 고위 관료들이 대거 참석하여 사람이 많이 모인 도쿄 한복판에서 잇따라 연설을 함으로써 위엄을 과시하려 했다.

바로 내일, 그 행사가 열린다.

행사의 시작 시간과 장소, 군대 행진을 포함한 행사 내용은 몇 주 전부터 신문과 라디오로 대대적인 홍보가 이루어졌으나 고위직들이 행사장에 도착하는 시간이나 정확한 연설 시간은 공개하지 않았다. 정희찬과 진재유가 인맥을 총동원해 알아낸 정보를 교차검증하면서 겨우 타임라인을 파악할 수 있었다.

경비가 아예 없지는 않겠지만 많은 인파가 몰릴테니 삼엄한 경계를 하기엔 무리가 있다. 다시 없을 지도 모를 좋은 기회였다. 성준수는 오직 내일을 위해 여태껏 김다은에게 일본어 발음을 교정 받았다. 일본식 이름이 적힌 가짜 신분증도 만들었다.

폭탄은 두꺼운 책의 속을 파내고 그 안에 넣었다. 열심히 공부하는 대학생이 우연히 들린 척, 다른 책 몇 권과 함께 손에 들고 있다가 연설이 시작되기 전 모든 인원이 단상에 올라와 인사하는 순간을 노릴 예정이다. 겉보기에 진짜 책 같으면서도 단단히 고정해서 그대로 던질 수 있게끔 만드느라 기상호와 공태성이 상당히 애썼다.

거사 준비는 때때로 난항을 겪기도 하였으나 무사히 모든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이제 실행만이 남았다. 최종 점검을 마치고 그들은 그동안의 모든 기록과 시제품을 폐기했다. 지도나 자신들만의 암호가 쓰인 종이 더미는 이전에 몇 번 폐기했는데도 끊임없이 나왔다. 아지트 뒷마당에서 지도와 책과 종이 뭉치를 한 데 모아 태우며 감자와 고구마를 구워 먹었다. 마치 그러기 위해 종이를 태우는 것처럼. 모두 말 없이 침묵을 지켰다. 콱 울음을 터뜨리고 싶기도 했으나 곧 죽을 당사자인 성준수가 너무도 태연하고 담담해 차마 그럴 수도 없었다.

증거 인멸이 끝난 후에는 그저 그동안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한 번씩 뜨겁게 포옹했다. 성준수는 상대의 등을 토닥였다. 정희찬은 힘을 꽉 주어 안았다. 기상호는 어깨에 얼굴을 문질렀다. 김다은은 상대의 어깨를 주물렀다. 공태성은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진재유는 한 명 한 명 얼굴을 유심히 보며 볼을 어루만졌다.

집에 돌아와 진재유와 성준수는 나란히 벽에 기대 앉았다. 말 없이 적막한 공간에서 진재유는 문득 성준수의 허벅지를 손끝으로 천천히 쓸었다. 어설픈 유혹이었으나 성준수는 받아들였다. 진재유가 먼저 무엇을 원한다고 의사 표명하는 일은 드물었으므로, 성준수는 그의 청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진재유는 성준수와 눈을 맞추고 연신 볼을 어루만지고 등을 쓸었다. 평소에는 부끄럽다고 가리던 녹아내린 표정과 상기된 피부도 오늘은 모두 보여주었다. 억누르지 않는 달뜬 소리를 들으며 성준수는 그에게 받는 마지막 선물이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다.

진재유는 침대에서 일어나 물잔 두 개를 들고 왔다. 내미는 걸 얼결에 받으니 술이 찰랑이도록 가득 들어있었다. 둘 다 좋아하지도 않는데 웬 술이냐고 하니 딱 한 잔만 나누자고 했다. 성준수는 어쩔 수 없이 술을 들이켰다. 독하고 씁쓸한 게 영 취향이 아니었지만 불평하지는 않았다. 숙취로 못 일어나면 깨워줘야 한다는 투정은 부렸지만.

"준수, 내일 날씨 어떨 것 같나."

"글쎄. 맑았으면 좋겠는데."

도쿄의 12월은 뼈가 시리도록 추웠고 눈이 많이 내렸다. 진눈깨비가 흩날린다 싶으면 소복하게 쌓였다. 녹을라 치면 다시 내리는 반복이었다. 성준수는 다음 날 눈이 오지 않기를, 바람이 거세게 불지 않기를 바랐다. 연설이 취소되지 않도록. 폭탄이 제가 원하는 바로 그곳에서 터지도록. 단지 그것만을 빌며 잠들었다.

진재유는 모로 누워 잠든 성준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늘이 진 그의 눈가를 가만가만 쓸었다.

"맞나. 내는 내일 눈이 펑펑 오면 좋겠다."


성준수는 어깨를 강하게 흔드는 손길에 눈을 떴다. 머리가 몽롱하고 어질어질했다. 힘겹게 눈을 뜨니 제 어깨를 흔들던 사람의 얼굴을 겨우 분간할 수 있었다. 정희찬이었다.

"준수햄, 준수햄!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아니, 씨……. 아침 댓바람부터 무슨 일이야."

"아침 아니에요! 벌써 저녁이라고요!"

뭐? 눈이 번쩍 뜨였다. 오늘은 분명 거사일인데. 갑자기 몸을 일으켜 아픈 머리를 부여잡았다. 어쩌면 일생일대의 기회였을 지 모를, 1년 가까이 준비해 온 거사를 고작 자느라 물거품으로 만든 것일까 두려웠다. 평소엔 작은 소리에도 잠에서 깨는 자신은 왜 이 시간까지 잠들어 있던 것일까? 진재유는 왜 저를 깨우지 않았을까? 그는 어디 있지?

"재유는?"

"…준수햄도 모르셨어요? 저도 듣자마자 온 거라 확실하진 않은데, 재유햄이 행사장에서 폭탄 던졌대요. 그래서, 그 자리에서 잡혀서…, 심하게 맞고 끌려갔다고…."

성준수는 심장이 내려앉고 발밑이 꺼지는 기분이란 걸 인생 처음으로 경험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진재유는 묵묵히 옷을 걸쳤다. 자면서도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성준수의 이마에 입 맞추면 찡그렸던 표정이 슬슬 풀렸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깨우지 않고 조용히 집을 떠나 아지트에 들러 한동안 머물렀다. 후일 추궁 당할 수 있으니 거사 당일에는 아지트에 가지 말라고 동생들에게 누누이 말한 것은 진재유 본인이었음에도. 그는 '음악 외울 것.'이라는 짤막한 메모 하나를 탁자 위에 남기고 아지트를 꼼꼼히 둘러보았다. 가야할 시간이 되자 그는 손목시계를 풀어 서랍에 넣어두고 대신 숨겨둔 폭탄을 챙겨 나왔다. 행사가 시작되는 공원까지 한참 걸었다. 뽀드득, 눈이 밟히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 준수, 눈 안 온다. 잘 됐제? 혼잣말을 대신한 한숨이 하얗게 흐려졌다.

행사가 시작되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으나 바삐 행사를 준비하는 인원 여럿에 일찍 도착해 기다리는 사람으로 북적였다. 진재유는 인파를 조심스레 헤치고 행사 책임자로 보이는 사람에게 다가갔다.

"失礼します。外務大臣閣下の招待を受けて参りました。 スピーチの前に彼にお会いしたいのですが…··. 실례합니다. 외무성 대신 각하의 초대를 받고 왔습니다. 연설 전에 그를 만나 뵙고 싶습니다만."

일본식 이름이 적힌 도쿄대 학생증을 보여주며 능청스럽게 말하자 책임자는 온화한 미소와 함께 정중하게 잠시 기다려 달라며 자리를 뜨더니 이내 진재유를 데리러 돌아왔다. 따라간 곳에는 고급스러운 천막을 삼엄한 경비가 둘러싸고 있었다. 안에 들어가 보니 연설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고, 익숙한 얼굴도 더러 있었다. 술자리에서 지겹게 본 아버지의 지인들이었다. 하나, 둘, 셋…··. 타깃은 모두 이 곳에 와있다. 진재유는 활짝 웃었다. 평소에 쓰지 않는 얼굴 근육이 부들거리는 것은 무시했다.

외무성대신은 진재유를 격하게 반겨주었다. 진재유가 술자리에서 떤 가식이 효과적이었는지, 일본에서 가장 명망 높은 도쿄대학교 법과대학에서 수석을 차지하고 있다는 학과장의 제자 자랑이 효과적이었는지. 모르긴 몰라도 그는 진재유를 상당히 마음에 들어 했다. 술에 거나하게 취하면 매번 자네 또래의 딸이 있는데 사위가 되겠냐는 농을 던졌고, 진재유는 그 말씀만으로도 과분한 영광이라고 호들갑을 떨어주었다. 지금처럼.

"閣下!ご招待いただき、大変光栄です。 今日のスピーチ、楽しみにしています。각하! 초대해 주셔서 너무나 큰 영광입니다. 오늘의 연설, 기대하겠습니다."

아버지의 지인들 모두와 한 마디씩 인사를 나누고 진재유는 천막에서 나왔다. 어느 정도 멀어졌는지 거리를 가늠하며 천천히 걸었다. 정확하게 던질 수 있으며 또한 폭발의 위력이 가장 클 지점에서 휙 뒤돌았다. 아무도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진재유는 망설임 없이 천막을 향해 폭탄을 던졌다. 누가 붙잡을 새도 없는 순식간이었다. 그는 폭탄이 터지는 굉음과 함께 중얼거렸다.

작전명, 여명黎明.

우리가 염원하던 새벽이 왔다.

붉음도 어둠도 걷히고 푸른 하늘이 드러나리라.


천막 안, 그리고 근처에 있던 사람은 대부분 죽거나 중상을 입었다. 폭발 자체의 충격도 위협적이었겠으나 폭발열로 인해 천막에 난 화재도 큰 몫을 했다. 행사는 취소되었고 사건은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전보를 받은 진재유의 아버지는 급하게 비싼 일본인 변호사들을 고용하고 담당 판검사들에게 엄청난 액수의 뇌물을 보냈지만 모두 거절 당했다. 일본을 서양 열강들과 같은 반열에 끌어올린 주역들이 죄다 죽거나 중상을 입어 그대로 은퇴하게 되었는데 당장의 돈에 눈이 멀어 진재유를 봐주었다가는, 혹은 그를 극형에 처하더라도 이런 중대한 사안에까지 뇌물을 받아 먹었다는 사실이 훗날에라도 밝혀지면 권력도 명예도 잃고 나락에 떨어질 미래만 남을 터이니. 그는 아들의 죽음을 막지 못하리라. 그것만이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는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였지만 일본으로 직접 출두하지는 않았다. 다만 수감되어 있는 동안 구타와 고문을 당하지 않도록 심복을 보내 자주 찾아가도록 하고 그를 통해 간수들에게 뇌물을 쥐여주었다. 결국 자신의 목숨과 부와 권력이 더 중한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최대한의 부정父情이란 그런 것이었다.

지상 멤버들도 당연히 수사 대상이 되었으나 취조는 길지 않았다. 진재유가 일관되게 자신의 단독 범행이라고 주장하였으며, 지상의 아지트는 아무리 탈탈 털어도 음악 회지와 쓰다 만 악보, 싸구려 레코드와 악기 뿐 작당모의한 흔적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진재유와 성준수가 살던 집도 마찬가지였다. 몇 번의 심문에 불려 갔으나 지상 멤버들은 끝까지 잡아뗐다.

"만나서 음악 얘기 하거나 농구하면서 놀기나 했지, 전혀 몰랐습니다."

"그 사람이 불령선인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 감쪽같이 속았네요."

"우리는 정말 결백하다니까요. 우리가 쓴 글, 그래, 저희 회지 읽어보시면 아실거예요. 봐요, 저희 이름만 쓰여 있잖아요? 이런 글을 쓴 사람들이 그런 일에 연루되어 있을리가요."

"어쩌면, 그 사람 정신이 잠시 이상해졌던 것 같아요. 그는 원래 일본에 충성스러운 신민이었거든요. 저희 모두 존경할 정도로요."

"그러니 우발적으로, 홧김에 저지른 범행이겠죠. 아마 지금은 정신 차리고 많이 반성하고 있을 겁니다."

사실 그 누구도 그런 식으로 말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그와 함께 계획했노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악을 쓰고 논리를 따져서 야욕에 눈이 멀어 도덕을 상실한 그들을 비판하고 싶었다.

우리는 대한의 독립을 열망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조선의 백성이었으며 대한제국의 국민이다. 일왕의 신민이 아니라.

그가, 우리가 대체 뭘 잘못했나. 우리의 국모를 살해하고 황제를 억지로 끌어내려 기어코 나라를 빼앗고, 우리 민족과 산천의 모든 것을 약탈해 또다시 인명을 해치는 일에 사용한 그들을 처단한 것이 정녕 죄란 말인가? 감히 우리를 손가락질 할 자 어디 있는가.

우리의 죄를 묻기 전에 너희가 부당하게 빼앗아 간 모든 자원에 대해 배상하라. 인간을 금수만도 못하게 취급하였던 나날을 사죄하라. 너희가 파괴한 우리의 전통과 터전을 돌려주어라. 다시는 학살과 전쟁을 일으키지 말라. 용서를 구하라며 다그치기 전에 먼저 용서를 빌어라. 씻을 수 없는 죄는 과연 누가 지었는가!

우리는 무고하다. 그러나 죽일 놈들을 죽인 것이 죄악이라 말한다면. 그래서 징벌하겠다면. 그 일은 우리 모두의 의지로 행하였으니 응당 우리 여섯 사람이 모두 나누어 받아야 한다. 그러니,

제발, 그를 살려주세요. 제발…··.

그러나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말할 수 없었다. 진재유가 그러지 않길 바랄테니까. 그는 줄곧 그래왔으니까.

 

피로에 잠겨 충혈된 눈 위를 꾹꾹 누르다가도 이름을 부르면 내색 않고 반겨주던 미소. 고향과 부모님을 생각하며 외로워 할 때 등을 맞대 전해주던 온기. 낯선 땅에 처음 도착해 헤매고 있을 때 내밀어준 손의 단단함. 밤새 작전에 골몰하다 한 명씩 졸기 시작할 즈음 정겨운 민요 가락으로 재워주던 작은 흥얼거림. 결행일 전날 그립다는 듯 올려다보던 눈빛. 그의 모든 다정함을 선연히 기억한다.

화가 나서 진심이 나올라 치면, 누구에게라도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려 애원하고 싶어지면, 수면 위로 차분하게 그러지 말라 다독이는 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머릿속에 그가 자신들의 일본식 이름으로 쓴 글의 내용이 맴돌았다. 하여간, 안 그럴 것 같으면서 뻔뻔스러운 인간 같으니. 힘든 건 혼자 감추고, 연기는 또 얼마나 잘 하는지. 덕분에 눈물을 삼키고 천연덕스럽게 거짓말할 수 있었다.

심증은 있어도 물증이 없으니 일단 용의선상에서는 벗어났다. 전혀 몰랐다고 일관되게 주장했기에 방조죄 혐의에서도 벗어났다. 그러나 지상의 멤버는 전원 요주의 인물 명단에 올랐다. 집과 일터만 오가도 불심검문에 몇 번씩 걸려 늦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아지트 앞에는 순사가 교대로 상주하게 되었고 집 앞까지 감시가 따라붙었다. 일상이 일상이 아니게 되어 숨이 턱턱 막혔다. 그들은 진재유가 의심 받지 않기 위해 그토록 노력한 이유를 실감했다.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우리는 그의 노력 덕분에 비교적 편안하게 살아왔구나. 진재유는 그들이 자유로울 수 있도록 지켜주고 싶어 했다. 비록 우리가 자유를 박탈 당한 식민지의 사람일지라도.


1919년 2월, 도쿄.

진재유의 내란죄 재판은 일반적인 재판에 비할 수 없을 빠른 속도로 이루어졌다. 즉결처형 당했어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했다. 지상의 멤버들을 비롯해 몇몇 조선인들, 소수의 아나키스트 혹은 반전운동가 일본인들이 탄원서를 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변호인단이 항소했지만 그것이 시간을 버는 역할 밖에 하지 않음을 모두가 알았다.

그나마 진재유의 아버지가 뿌린 뇌물이 먹혔는지 간신히 면회가 허락 되었다. 지상 멤버 모두 하루라도 빨리 그를 만나고 싶어 했지만 여럿이 간다고 시간을 더 주는 것도 아니니, 조금이라도 많이 그와 대화하기 위해 한 명씩 가기로 했다. 순서는 그냥 나이 순으로 정했다. 성준수는 같은 도쿄에 위치한 이치가야 형무소로 향했다. 그리 멀지도 않은데 마음대로 만날 수 없는 현실이 답답했다.

오랜만에 본 진재유는 수척해졌고, 아마 거사 당일 두들겨 맞아서 생겼을 흉터가 얼굴 곳곳에 남아있었다. 아마 죄수복으로 가려진 몸은 더 할 터이다. 그나마 새로 생긴 상처는 없어 보이는 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뒤를 돈 간수가 듣고 있으니 아무리 조선 말이래도 편히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지만 그동안 만들었던 암호와 잔뜩 뭉뚱그린 말, 표정으로도 충분히 서로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왜 그랬어."

왜 사람을 죽였냐는 뜻이 아니라, 왜 나 대신 그 일을 결행했냐는 뜻이었다.

"그러게. 왜 그랬을까."

"몸은 좀 어때. 밥은 잘 먹고 있어?"

"괘안타. 준수 니는 잘 자고 있고?"

"누가 누굴 걱정해. 잘 자고 있어."

뻔한 거짓말이다. 진재유도 알지만 침묵했다.

"…··너 때문에 괜히 우리까지 의심 샀잖아. 이제 괜찮지만."

"글나. 미안타."

진재유는 하나도 안 미안한 얼굴로 씩 웃었다. 질책이 아니라 우리는 안전하다는 신호임을 알아들었기에.

두 사람은 시시콜콜한 잡담으로 시간을 보냈다. 누가 들어도 상관 없는, 뒤늦은 생일 축하와 새해 인사, 맛있었던 식당 메뉴와 밤에 달을 보았던 추억과 좋아하는 날씨에 대해 이야기했다. 마지막 대화가 아니라는 듯이.

"준수. 나는 눈이 좋다."

"내리는 눈?"

"응, 내 고향은 아무리 추버도 눈이 잘 안 오거든. 어릴 때 못 보고 자라서 근가, 여 유학 와서 눈 오는 걸 몇 번을 봐도 안 질리데. 아마 앞으로도 계속 좋아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얗고, 반짝이고, 예쁘고, 금방 녹을 것 같은데 희한하게 뭉치면 단단해지는 게 참, 애틋한데 또 강해 보여가 부럽기도 하고. 녹아버리면 아쉽고."

"하지만, 눈은…·· 차갑잖아."

"그 차가움마저도 아름답지 않나? 게다가 북극 근처에서는 사람들이 눈이랑 얼음으로 집을 짓기도 한다데. 바람을 막아줘서 훨씬 따뜻하다고. 그럼 눈도 사실 따뜻한 거 아이겠나."

간수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무뚝뚝하게 말했다. 진재유는 그러든지 말든지, 술에 취한 듯 잠에 취한 듯 나른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준수 니는 눈을 닮았다."

간수가 뒤돌아 성큼성큼 걸어왔다. 진재유는 그 기척에 자리에서 일어나며 속닥였다. 오직 준수만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였다.

"준수, 지상의 푸른 하늘은 봤나?"

그러고는 간수가 이끄는 대로 순순히 떠나갔다.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성준수는 그의 야윈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문이 닫히고 그가 사라지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죽어라 달렸다.

아지트 벽에 걸린 파란 지상 두 글자. 무명천을 걷어내면 평범한 벽 같아 보이지만, 심혈을 기울여 만든 비밀 공간이 있다. 폭탄을 숨겼던 곳. 순사들이 이 잡듯 수색하면서도 찾아내지 못했던 곳. 거사 이후 미처 아무도 열어볼 생각을 못했던 곳.

그 안에는 편지 봉투 여러 장이 들어있었다.

다른 지상 멤버들에게 각각 하나씩, 이현성 선생님께, 부모님께,

마지막 하나는…··.

준수에게.

성준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제 몫의 편지를 쥐었다. 제 이름을 쓴 익숙한 필체 위를 손끝으로 스쳐보았다. 꾹꾹 눌러쓴 자국이 선명했다. 읽고 싶은데, 읽고 싶지 않았다. 숨을 몇 번씩 들이마셨다. 흐려지는 눈앞을 벅벅 문질러 닦고 조심스레 편지지를 꺼냈다.


친애하는 준수에게.

 안녕. 준수 너에게는 편지를 처음 써보는구나. 펜을 잡았지만 어떤 말투로 무슨 말을 써 내려야 할 지 막막하다. 어색해도 참아주길 바란다. 처음이자 마지막 편지가 될 예정이니 가능한 정중하게 쓰고 싶다.

나는 이 편지를 여명의 결행일 새벽에 쓰고 있다. 사실 네 술에 몰래 수면제를 넣었다. 예민하여 잘 깨는 너를 알기에 조금 독하게 탔다. 맛이 썼을 텐데 불평 없이 마셔주어 고맙고, 또 미안하다.

네 몫의 일을 빼앗은 것에 대해서도 사죄해야겠다. 책임감 강한 네가 나 때문에 마음이 상할까 두렵지만, 나는 그보다 너의 죽음이 두렵다. 원래도 나는 겁이 많다고 생각하였는데 연모하는 이의 죽음은 더더욱, 도저히 각오하지 못 하겠더라. 네가 떠나고 나는 남겨지는 것이 죽음보다 무섭다. 내가 싫은 일을 너희에게 떠넘기는 못난 행동이 부끄러워 감히 용서를 빌 수조차 없다.

사실 나는 조국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아버지의 행적에 대한 부채감과 동포에 대한 연민으로 그동안 여러 일을 해왔지만, 만약 일제가 가혹하게 굴지 않았다면 나는 그들이 우리를 지배해도 별로 상관 없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조선이나 대한제국의 벼슬아치들 또한 가여운 백성을 수탈하기는 매한가지였으며, 결국 나라를 빼앗긴 것도 그들의 무능과 부패 때문이었으니.

그러나, 준수야. 네가 조국을 너무나 사모하더라. 내가 사랑하는 네가. 그러니 나도 내 나라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단지 너의 목숨만을 구하려 내 목숨을 버린 것이 아니니 혹여라도 죄책감 느끼지 않기를 바란다. 나 또한 대한을 사랑하며 우리의 독립을 간절히 소망한다. 그렇게 되었다.

내가 우리의 여명을 성공케 하든 실패하든, 조선의 여명이 밝을 날은 아직 멀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너에게 부탁을 하나 하고 싶다.

이기적이라 생각할 지 모르지만, 나는 준수 네가 오래오래 잘 살기를 바란다. 때로는 비굴해질 지언정 오랫동안 잘 먹고 잘 자고 건강하게 살아서, 두 눈으로 우리의 완전한 독립을 똑똑히 보고, 그러고도 한참 있다가 아주 먼 미래에 내게 와 알려주련.

수 차례 입을 맞추고 정사를 나누면서도 곧 닥칠 이별이 두려워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 서로에게 제대로 말해주지 못했구나. 그러나 나는 언제나 내 마음이 얼마나 깊고 열렬한지 너에게 모두 속삭이고 싶었다. 안타깝지만 편지에나마 쓸 수 있으니 다행이라 여기련다.

수줍게 고백하자면, 나는 네가 곁에 있기만 해도 설렘에 마음이 붕 뜨곤 했다. 눈이 마주치면 잠시나마 우리가 처한 현실을 잊을 수 있었다.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입 안이 어찌나 달던지. 준수 네가 나를 떠올릴 때도 네가 좋아하는 다과처럼 달고 부드러우면 좋겠다. 너무 슬퍼하지 말고.

네가 오랜 인생을 살며 또 다른 사람과 사랑하게 되거든 그이와는 편안하게 애정을 주고받을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러나 그 사람을 너무 빨리 만나지는 않았으면 하는 걸 보면 나는 욕심이 많은 것 같다. 연심이 너무나도 깊어 불치병이 된 모양이니 부디 가엾게 여겨 눈 감아 주어라.

하고픈 말이 많지만 이만 줄인다. 다른 이들에게도 전해야 할 말이 있으니 이해해다오. 준수, 너를 많이 아끼고 사랑했다. 지금도 벅차오르게 흠모한다. 잠든 네 고운 얼굴을 보고 있는데도 여전히 네가 그립다. 아마 앞으로도, 질리지도 않고 계속.

1918년 12월 여명의 날

사랑을 담아, 진재유 씀.

추신. 집을 나서기 전 시간이 조금 남아서, 너에게 몇 마디 더 남기려 한다. 이제 와 두려움은 없으나 네가 또 밤잠을 설칠까 근심이 남는다. 네가 악몽 없이 푹 잠들게 해달라고 항상 기도하겠다. 아예 꿈일랑 꾸지 말고 매일 밤 평안하길. 조금 이르지만 생일 축하하고, 새해 복 많이 받아라.

나는 준수 너를 만나 행복을 알게 되었다. 사랑해.


성준수는 한참 울었다. 폐부를 찌르는 고통에 몸을 가누지도 못하고 엎어져 끅끅댔다. 아지트 밖에 순사가 서 있어 소리 높여 오열할 수도 없는 현실이 비참했다.

그는 제 눈물에 귀퉁이가 눅눅하게 젖은 편지를 고이 접어 다시 봉투에 넣었다. 다른 편지들도 함께 챙겨 소중히 가방에 넣었다. 어차피 내일 다시 들고 올 거지만, 그러고 싶었다.

지상은 거사 결행 이후로도 정기적으로 모였다. 사건과 무관한 취미 동호회가 갑자기 해산하면 오히려 의심스럽게 보일 수 있기도 하거니와 서로의 안위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성준수는 진재유가 으레 했듯 문 앞에 레코드를 크게 틀었다. 싸구려 레코드에서 가사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음질이 뭉개진 일본 가요가 흘러나왔다. 성준수는 전날 진재유와 면회에서 나눈 이야기와 그의 상태를 전했다. 그리고 진재유가 지상에게 쓴 편지를 나누어 주었다.

얼마 읽지도 않았는데 모두 숨죽여 울었다. 그의 편지에는 다정한 심성이 묻어났다. 그는 글을 통해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부르며 격려하고, 위로하고, 사죄하고, 고마움을 전하고, 축복하고,

죽지 말아 달라고, 오래 살아달라고 부탁했다.

눈물을 그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눈이 빨개진 정희찬이 입을 열었다. 목이 메어 답지 않게 말이 느렸다.

"사실은요, 준수햄. 여명 전날 밤에, 이제 준수햄 못 본다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심란해서. 너무 고통스러워서 밤새 잠도 못 잤어요. 차라리 내가 나간다고 할 걸 하면서, 막상 죽을 용기도 없는 주제에 계속 울면서…··."

다른 이들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죽음을 각오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마는 친우의 죽음을 각오하는 것 또한 괴로웠다. 진재유가 성준수의, 지상 멤버들의 죽음을 각오하지 못하여 자신의 죽음을 택했듯, 그들도 술과 눈물과 한숨으로 그날 밤을 지새웠다.

"오래 살아요, 우리. 살아서…··. 우리나라 독립되는 꼴은 보고 죽어요. 그래야 천당이든 하늘나라든 가서 재유햄한테 할 말이 있지 않겠어요. 웃으면서 볼 수 있지 않겠어요…··."

그쳤던 눈물을 어느새 다시 뚝뚝 흘리는 기상호의 말에 모두 그러자고 몇 번이고 답했다. 그것이 그의 소원이라면.

레코드에서 여전히 흘러나오는, 가사를 알아 들을 수 없는 일본 가요를 들으며 성준수는 눈물을 삼켰다. 저 노래가 다시는 조선 땅에서 울리지 않는 날까지 자신은, 우리는, 죽을 수 없다.


다음 면회 차례였던 김다은은 재유햄에게 편지 읽었다고 말했더니 머쓱해 했다고, 그렇게 얼굴 새빨개진 거 처음 봤다고 소리 높여 말했다. 정희찬이 정말이냐며, 재유햄 놀릴 생각에 신이 난다며 웃었다. 일부러 밝게 말하는 게 눈에 훤했다.

한 명씩 면회를 다녀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최종심에서 결국 사형이 선고되었다. 한 번이라도 더 만나려고 계속 면회를 신청했고 허락이 나면 다 같이 갔다. 몇 번 가지도 못 했건만 진재유는 너무 자주 오는 거 아니냐며, 이 형무소에서 자기가 제일 면회 자주 나온다고 질색하듯 말했다. 본심은 의심받을까, 생활은 제대로 하고 있는 걸까 걱정하는 걸 알아서 괜찮다고 안심시켰다.

기상호는 개인 면회를 다녀온 후 지상 멤버들에게 간수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러고는 잠시 혼자 생각하더니 면회 담당 간수는 한 명이고, 그는 조선 말을 아예 모르는 것 같다고 일러주었다. 덕분에 성준수는 면회에 갈 때마다 진재유에게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연모한다고 말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진재유가 깜짝 놀라 동생들 눈치를 보았는데, 공태성이 대표로 햄들 그런 사이인 거 우리가 정말 모를 줄 알았냐며 장난스럽게 핀잔을 주었다. 음음, 동생들이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진재유는 민망해하면서도 싫어하지 않았다. 조금 더 얄쌍하고 창백해진 얼굴이 말 한 마디에 생기를 가득 담고 붉어졌다. 다들 그런 모습을 반겼다. 가능하다면 오래 보고 싶었다.


독립선언문 낭독에 동참해달라 찾아온 조선 유학생 학우회 총회 임원에게 불참 의사를 밝힌 지상은 배신자라 손가락질 당할 각오를 했으나, 도리어 지난 번 놀랍도록 용감하고 치밀한 의거는 결코 혼자 할 수 없었음을 안다는 따뜻한 목소리를 들었다. 엷은 미소를 지은 그는 안 찾아오면 섭섭해하실까 찾아오긴 했으나 우리도 여러분께서 지금은 몸을 사리고 위험을 피해, 차후 더 큰 일을 해주시길 바란다고 전했다. 진재유의 사형 선고 소식을 들었다고, 비록 그를 쇠창살 밖으로 빼내오지는 못해도 그가 조선 땅에서 편히 잠들 수 있도록 자신도 용기 내겠다며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선언문 낭독 직후 체포되었던 그가 풀려났음을 들었을 때 지상의 모든 멤버가 안심했다. 그들은 더 이상 동지를 잃고 싶지 않았다.

진재유의 사형이 집행된 날은 완연한 봄이 된 줄 알았건만 춥고 싸리눈이 내렸다. 형 집행일이 확정된 후에야 일본으로 건너온 그의 부모가 집행 직전 마지막 면회를 했다. 특별히 가족과 친지에게 시체에 대한 예배는 허가한다는 선심 쓰는 듯한 말에 지상은 치밀어오르는 울분을 누르며 교회당에 들어갔다. 작은 체구의 여인에게서 어찌 그리도 끔찍한 소리가 나는지. 자식 잃은 부모는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을 느낀다는 말을, 독립운동에 목숨 걸었던 다섯 아들은 그때서야 실감했다. 우아한 인상의 아낙네는 교회당이 떠나가라 악을 쓰고 울며 교도관들에 매달렸다. 그러나 처량한 애원에도 유해는 끝끝내 넘겨받지 못했다. 반쯤 끌려나간 그들을 따라 지상의 멤버들도 눈물 범벅인 채 교회당 문 밖으로 나섰다. 모든 것을 잃은 듯 허망해보이는 부부에게 성준수는 진재유의 유품과 편지가 담긴 상자를 건넸다. 그들은 아들을 배웅해주어 고맙다고 거듭 감사 인사를 전하고 떠나갔다. 

그들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사실 지상 멤버들이 먼저 그의 소지품을 하나씩 나누어 가졌다. 이는 진재유의 뜻이었다. 아직 쓸만한 물건들이 아까우니 내가 죽기 전에 너희의 것이 되면 좋겠다고. 손목 시계, 기타, 만년필, 넥타이와 타이핀 세트, 지갑. 가지각색의 이유로 선택하였으나 서로의 까닭에 모두 납득하였다. 하나같이 그를 잊지 않겠다는 맹세가 담긴 선택이었으므로. 성준수가 고른 것은 기타였다. 기타는 진재유가 자신의 소유물 중 가장, 어쩌면 유일하게 아끼고 사랑한 물건이므로. 성준수도 그것을 사랑할 수 밖에 없었다.

성준수는 문득 진재유가 부모에게 쓴 편지에는 어떤 말을 써 내렸을지, 마지막 면회에서는 어떤 대화를 나누었을지 궁금해졌다. 반민족행위를 그만두라는 일갈? 아버지가 오랫동안 쌓아온 일본 간부들의 신뢰를 깨부수고 먼저 세상을 떠나는 불효를 저지른 사죄? 아니면, 감사하고 사랑한다는 작별 인사? 그러나 정신을 차려보면 그들은 어느새 시야 저 멀리 사라졌고 더 이상 알 길은 없었다.


지상은 일단 해산하기로 했다. 이들이 독립운동을 아예 그만두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진재유의 소망대로 오래 살아남아 조국의 독립을 보기 위해 좀 더 생존 확률이 높은 길을 가기로 했다. 성준수가 먼저 일본을 떠나고, 동생들은 일단 일본에 남아 얌전히 유학을 마무리 짓기로 했다. 이 또한 위험을 최대한 피하기 위함이었다.

진재유의 기타를 어깨에 매고 성준수는 작별 인사를 했다. 영원한 이별이 아니라는 확신을 품고 차분히 인사했다. 편지 자주 쓰십쇼. 어, 너네도. 잘 있어. 몸 조심하고. 안녕히 가세요. 또 봬요.

그래. 다시 만나.

며칠 전 이현성으로부터 편지가 도착했다. 대한의 땅에서 독립운동의 불길이 드세다고. 일제가 아무리 탄압해도 어린 여학생부터 허리 굽은 노인까지 결코 꺾임없이 만세를 노래하고 있으며, 그 영향으로 뜻이 맞는 사람들이 모여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노라고. 가능하다면 너희도 와서 힘을 보태달라고. 성준수는 상해로 가는 배를 탔다. 이현성과 함께 그곳에서 일할 것이다. 진재유가 이현성에게 쓴 편지는 부치지 않고 여전히 성준수가 가지고 있다. 직접 갖다 드리겠다고 말했더니 선뜻 그러라고 말하던 진재유를 떠올렸다. 말갛게 웃던 어여쁜 연인.

매서운 바닷바람이 눈을 따갑게 해도 성준수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단지 담담하게 하늘을 바라보았다. 조선 땅 위에 낮달이 떴다. 창공에 걸린 흰 달이 어여쁘다.

재유,

너는 달을 닮은 것 같아. 특히 낮달.

그래서 나도 달이 좋아졌어.

앞으로도 사랑하겠지. 질리지도 않고…··.

1919년 4월, 상해.

Fin,


[직간접적으로 언급된 역사적 사실]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

1907년 7월 20일 고종 황제 강제 퇴위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의거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1910년대 일제의 무단통치 (헌병 경찰 통치) 

1918년 11월 11일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1919년 2월 8일 2.8 독립 선언

1919년 3월 1일 3.1운동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그 외 을사늑약, 정미7조약, 기유각서 등 각종 불평등 조약 체결

[모티브로 삼은 사건]

1910년 2월 14일 안중근 의사 사형 선고

1910년 3월 26일 안중근 의사 사형 집행

1932년 1월 8일 사쿠라다몬 의거

1932년 4월 29일 훙커우 공원 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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