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할 수 없는 소년
준쟁
지구는 물의 행성이고, 지구에서 태어난 인간의 몸은 70%, 적어도 반절이 물이라는데. 눈을 깜빡이는 건 소량의 눈물로 안구에 수분을 보충하기 위해서라는데. 기분 나쁠 때는 속으로 썩히지 말고 펑펑 우는 게, 카타르시스인지 뭔지 아무튼 정신건강에 도움이 된다던데.
"준수, 이제 진정 좀 됐나."
"...어."
진재유 얘는, 울 줄 모르나.
준수는 어릴 때부터 눈물이 많은 편은 아니었다. 감정적으로 그렇게 섬세하고 여린 아이가 아니었고, 또한 남들 앞에서 우는 건 쪽팔린 일이라 생각했다. 준수뿐만 아니라 그 나이대 남자애들은 으레 그리 여겼다. 다툼이 나면 차라리 주먹질을 하고 말지 울음을 터뜨리는 건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고. 어쩌다 친구의 우는 모습을 보았다고 해도 걔를 깔보거나 놀린 적 없으면서 자기가 우는 모습은 보이기 싫어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앞뒤가 안 맞는데, 하여튼 그때는 그랬다. 어렸으니까.
반면 여자애들은 모두가 그렇지는 않았으나 대부분은 툭하면 울었다. 피구공을 얼굴에 맞았다고 울고, 시험을 망쳤다고 울고, 철 안 든 남자애의 짓궂은 장난에 매번 울고, 준수가 고백을 거절하면 울었다. 그렇게 감정적인 모습이 썩 좋아보이거나 부럽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다 울고 난 얼굴은 좀 후련해보이긴 했다.
눈물이 자주 나오냐 마냐의 문제를 제쳐두고, 그것이 터져 나오는 순간에 억지로 참는다는 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힘든 일이라서. 연습과 공식 경기를 막론하고 매번 발생하는 지상고의 패배는 언제나 끔찍했지만 그럼에도 유독 뼈저린 타격을 주는 날이면 준수는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가 혼자 숨죽여 울었다. 그럴 때마다 유니폼도 못 갈아입고 땀범벅인 채로 바람 쐬는 주제에 농구화에 모래흙 묻힐 수는 없어서 슬리퍼로 갈아신는 게 우습다면 우스울 수도 있겠으나 준수는 정말이지 농구를 사랑하고 아꼈으며 딱 그만큼 고통스러워 했으며 실망했다.
그래도 한바탕 울고 나면 후련했다. 다시 일어나서 공을 던질 의지를 다질 수 있을 정도로는. 감정이 얼추 정리된 후 발개진 얼굴을 식히다 보면 의문이 드는 것이다. 후배들이야 아직 지들은 1학년이라고 위기감이 없어서 그런다지만, 진재유 얘는 나랑 같은 처지인데 왜 눈물 한 방울 안 흘리는지. 옷도 신발도 멀쩡히 갈아입어 놓고 왜 굳이 나를 찾아내서 곁을 지키고 있는지.
나는 화내고 울고 짜증 내고 소리도 지르고 욕도 하고, 그래야 버틸 수 있는데. 얘는 왜 아무것도 안 하고 평온한 얼굴로도 이 상황을, 우리를 짓누르는 부담과 긴장과 압박을 그토록 초연한 얼굴로 견뎌내고 있는지. 준수는 진심으로 재유를 불가해(不可解)하다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이전에도 그랬다. 임승대가 말 한마디 없이 장도고로 훌쩍 떠난 날에도, 그 뒤로 재유의 연락을 읽어놓고 무시했을 때도. 코치님이 생초짜들 가르치는 일을, 선배들이 체육관 뒷정리를 당시 2학년이었던 세 사람에게 다 떠맡겼을 때도. 군말없이 주장까지 달았던 박기철이 그만두겠다고 갑자기 통보했을 때도. 후배들이 설렁설렁 연습 빼먹고, 선배 말 귓등으로도 안 듣고, 심지어는 경기에 차질까지 일으켜도. 성준수가 이 어린 나이에 뒷목 잡게 만드는, 누구라도 같은 상황이었다면 울화통 터질 상황에도 진재유는 대부분 미간 잠깐 찌푸리고 말았고, 어쩌다 한두 마디 정도 했을 뿐이다.
내가 화를 많이 내니까 얘한테 대리만족이라도 되나. 하지만 재유는 준수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다가도 진짜 싸움으로 번질 것 같으면 항상 격앙된 준수를 온몸으로 붙잡고 말렸다. 준수야, 니가 참아라. 안 참으면 니만 손해다. 그렇게 말하면서. 대리만족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그러진 않을 것이다.
불운, 또는 불행한 일을 금세 잊어버리고 기분 푸는 건 단순 무식하고 생각이 적은 사람의 특권이다. 성준수는 진재유가 그런 사람이 아니란 걸 알았다. 굳이 고르자면 진재유는 현실적이고 현재에 충실한 타입이지만 그런 타입 중에서는 생각이 많은 축에 속한다. 락 음악 좋아하는 것도, 속 시끄러울 때 밖이 더 시끄러우면 주의가 분산되는 효과 때문에 듣다가 진짜로 좋아하게 되었다고 할 정도니까. 재유는 대가리 꽃밭들처럼 상황을 낙관하지도 않고 패배주의자들처럼 비관하지도 않았다. 그저 현실을 객관적으로, 절망을 생생하게 받아들였다.
그럼 진재유 얘는, 밖으로 풀어내지 않고 그냥 다 쌓아두고 있는 걸까. 마음이 대체 얼마나 넓기에 그게 가능한 걸까. 준수는 고개를 돌려 재유를 마주 보았다. 어깨 위에서 가만히 체온과 맥박을 전하던 손이 넌지시 떨어져 나갔다.
"나 얼굴 아직 빨개?"
"아니, 감쪽같다."
"그럼 됐어. 가자."
그러나 준수는 재유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할 여력이 없다. 그는 자신의 선택이 잘못된 건 아니었는지 자책하고 후회하느라 지친 고작 열아홉 살이고, 어떻게든 실적을 내기 위해 능력도 열정도 없는 것 같은 후배들을 억지로라도 이끌며 자신도 열심히 훈련해야 하는 농구부 주장이며,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아니 나에게 선택지가 충분히 주어지기나 할 것인지 고민하고 정보를 긁어모으느라 바쁜 고등학교 3학년이라서. 그는 이미 짊어진 짐이 무거워서 숨을 쉬기도 벅찼으므로 그나마 산소호흡기 역할을 해주는 친구가 숨겨둔 고단함을 찾아내 끌어안을 힘이 없다. 성준수는 진재유와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이기 때문에.
지상고는 기적처럼 쌍용기 우승을 이뤄냈다. 지상고에 전학 온 건 결과적으로 준수에게 매 시합 주전으로 뛰는 경험과 인생 첫 우승을 가져다 준 옳은 선택이었으며, 속 썩이던 후배들은 제각기 능력을 꽃 피우며 나름대로 진지하고 열정이 담긴 표정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준수가 그들을 혼냈던 이유는 오로지 농구 때문이었기에 팀원 간 사이도 자연스레 개선되었다. 승리를 하나씩 쌓아갈 때마다 서로 조금씩 합이 맞아들어가며 결승에서는 완벽한 팀 플레이를 선보일 수 있게 되었고, 당장 올해 대학원서 넣을 준수와 재유는 물론 아직 1학년인 후배들도 대학 농구부 스카우터들에게 눈도장 제대로 찍었다. 물론 우승 한 번으로 족할 리가 없고 자신이 코트 위에 서는 한 언제나 승리를 위해 달릴 것이지만, 어쨌든 준수에게 심적 여유란 게 생겼다.
그동안 짊어지고 있었던 짐을 한결 던 준수는 만약 재유에게 남은 짐이나 응어리가 있다면 도와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재유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항상 준수에게 위로와 희망이 되어주었으니까. 펑펑 울고 나면 속이 시원해지니까 재유도 그렇게 해소하면 좋겠다고. 혹여 울고 싶어도 잘 못 우는 타입이라면 옆에서 도와주면 되지 않겠느냐고. 자신은 다리에 힘이 풀려 엎어진 채 울고 말았던 기적같은 우승에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던 이를 어떻게 울 수 있게 도와줄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성미가 급하고 직설적인 준수는 잠깐 고민해보고 그럴듯한 결과물이 도출되지 않자 그냥 당사자에게 불쑥 질문했다.
"재유, 혹시 울 줄 몰라?"
"...갑자기 뭔 소린데?"
"아니, 너 우는 거 한 번도 못 본 거 같아가지고...."
"내만 그렇나. 내는 상호 빼곤 우리 애들 우는 거 한 번도 못 본 거 같은데."
"아씨, 걔네랑 우리랑은 상황이 달랐잖아, 상황이."
인원이 적은 지상고는 야간 자율 훈련 뒷정리도 돌아가면서 한다. 예전엔 둘 밖에 없을 때가 많아 3학년이 전담하다시피 했는데 -대신 공정성을 위해 집안일은 다 후배들 시켰다.- 이제 특별한 일이 없으면 모두 참석하기에 집안일도 체육관 청소도 분담한다. 당번이라 3학년 두 명만 남은 체육관에서 날아든 뜬금없는 질문에 재유는 카트에 정리하려던 공을 두어 번 퉁퉁 튀겼다. 자유투 라인에서 깔끔한 슛이 들어갔다.
"그럼 준수 니가 울게 해주든가."
"...그니까 어떻게? 슬픈 영화라도 같이 봐줘? 그런 거 보면 재유 너 울긴 해?"
"...니 내 우는 얼굴이 그래 보고 싶나?"
"속에 쌓아두는 거 훤히 보이니까 답답해서 그렇지."
"그냥 뭐, 몇 대 시원하게 패면?"
"아니 그건 또 무슨 개소, 무슨 소리야?"
"내 기억으로는... 중학교 올라가서 처음으로 빠따 맞았을 때? 그때 이후로 운 적 없다. 아프면 생리적인 이유에서라도 눈물이 나겠제."
"...내가 널 어떻게 때려. 게다가 너 전에 발목 돌아갔을 때도 안 울었잖아."
"맞나. 그럼 걍 드가자."
림을 통과해 바닥을 구르는 공을 주워 카트에 던져넣은 재유는 가방을 메고 문 앞에 섰다. 안 가냐는 듯 고개를 갸웃, 기울이는 모습에 준수는 할 말을 잃었다. 뭐 저런 애가 다 있담. 햇수로 3년을 같이 살았는데 진재유는 도통 모르겠다. 그 작은 머리통으로 무슨 생각을 언제 얼마나 하는 건지. 경기에서 그가 보여주는 프로 포인트가드 급의 코트 비전과 순간 판단력은 감히 범접 못할 수준이지만, 평소에는 애가 영 맹하고 순진한 것 같은데....
"재유 너 좀 이상해."
"내가? 니도 만만치 않은데."
"내가 뭘?"
"...에휴. 됐다, 내만 이상한 놈인 걸로 치자."
"아니, 왜냐니까?"
재유는 집에 가는 내내 고집스레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준수도 고집으로 어디 가서 질 사람은 아니라서. 남몰래 숨기고 있는 안 좋은 감정과 기억을 박박 긁어내 그 작은 입술로 직접 다 토해내고 상쾌해지게 만들고 말리라, 준수는 신경질이 난 나머지 이를 빠득 갈았다.
그날부터 준수는 재유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집요하게 따라다니는 시선에 대해 재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힐끗 시선을 옮겨 눈을 마주치곤 몇 초 지나지 않아 어색하게 피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재유보다는 그 꼴을 계속 보고 있어야 하는 하우스 메이트들이 좌불안석이었다. 준수가 재유만 계속 쳐다본 지 며칠이 지나서야 모두가 그 사실을 눈치챘고, 혹시 둘이 싸웠나 쩔쩔매며 준수에게 무슨 일 있냐고 조심스레 묻기도 했다. 하지만 그 상태로 며칠이 더 흐르자 더 이상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몇 주 동안 재유를 관찰하고 알게 된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재유는 가끔 아무 것도 하지 않을 때가 있다. 헤드셋을 끼고 노래를 듣지도 않고, TV를 보거나 핸드폰으로 무언가 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책을 읽거나 잠을 자는 것도 아니고. 단지 벽에 기대 앉아서 눈을 반쯤 내리깐 채 무표정으로 가만히. 고르게 숨을 쉬는 몇 분.
쉴 때는 보통 각자 할 일 하느라 바쁘다 보니 몰랐다. 아마 봤어도 멍때리나보다 생각하고 잊어버렸겠지. 하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지루함을 견디면서 계속 보다 보니 알게 되더라. 아무 근거도 없지만 확신에 가까운 깨달음.
아, 너는 지금 울고 있구나.
표정을 찡그리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우는 소리를 내지도 않고
그저 그렇게 마른 울음을 조용히 담담하게....
아무도 모르게.
준수는 왜 그토록 재유가 울게 해주고 싶은지,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야 했다. 준수와 재유는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이지만 같은 처지에 놓인 서로의 둘도 없는 이해자였다. 준수가 울고 싶었을 때 아마 재유도 속상했을 것이고 준수의 마음이 가벼워진 지금 재유도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 왜, 이제서야. 그에게 보은이라도 하고 싶었던 걸까. 그럼 그냥, 예전에 나 힘들어할 때 옆에 있어 줘서 고마웠다고 밥이나 한 끼 맛있는 걸로 사면 그만 아닌가. 어릴 적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재유가 남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걸 싫어한다면 그 의사를 존중해줘야 하는데. 어째서 그렇게까지 재유가 자기 앞에서 속 시원하게 울길 바라는지. 후련해지고 싶은 건 재유가 아니라 자신이면서.
준수는 바로 납득이 되면 이해하지만 그렇지 않은 타인의 언행을 이해해주기 위해 애쓰는 사람은 아니다. 임승대가 장도고로 전학을 간 건 이해했다. 나라도 그랬을 테니까. 그러나 말 한마디 없이 사라진 건 이해할 수 없었다. 나라면 안 그랬을 테니까. 야간 자율 훈련 빼먹고 피시방 가거나 길거리에서 공놀이 하던 후배들은 진지하게 할 마음이 없다고 생각해서 혼냈다. 전학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연락이 아예 끊겼던 소꿉친구를 오랜만에 만났더니 갑자기 비아냥대며 적의를 보이길래 맞서서 화를 냈다. 최종수가 사람 위로 건너다니길래 싸가지 없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지적했다. 성준수는 자신과 다른 사람을, 불가해한 언행을 선해하고 수용하고 공감해줄 정신적 에너지가 있다면 차라리 마지막 슛을 성공적으로 넣는 일에 모두 쏟아붓는 사람이다.
그런데 왜, 진재유에게만은?
이제 와서 깨닫는 것이다. 아, 나는 그 불가해한 인물을 이해하고 싶구나. 그렇다면 왜? 두 번째 질문의 정답이 나오는 것은 첫 번째보다 빨랐다. 애를 쓰고 공을 들여 그를 있는 그대로, 깊게 이해하고 싶은 마음. 어쩌면 이게 사랑인가 보다.
몸 어딘가에 상처가 생긴 걸 모르고 있다가 자기 눈으로 보고 나서야 아픔이 느껴지는 일이 종종 있다. 주먹이 꽉 쥐어진 채 바들바들 떨리는 걸 뒤늦게 자각하고 나서야 내가 화가 났구나, 아는 일도 있다. 그렇다면 내가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인지하고 난 후에야 상대를 생각하면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감히 눈을 마주칠 수 없어지는 일도 있겠지. 성준수가 딱 그랬다. 온종일 붙어 있는데도 재유를 느끼는 순간마다 설렘을 느꼈다. 어쩌다 떨어져 있게 되어도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세상 모든 것이 진재유를 떠올리게 했다.
준수는 감정을 속 안에 담아두고는 견디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짜증이 나면 성질을 부려야 했고 서럽고 억울하면 울어야 했다. 그런 사람이 입을 열면 꽃이라도 토해버릴 것 같은 감정을 견딜 수 있을 리가. 설렘은 설탕보다 훨씬 달콤한데, 서먹해질까 두려움에 삼키려고 해도 도저히 녹지 않더라.
"재유, 있지... 나, 너 좋아해."
날이 쌀쌀해지긴 했지만 춥다고 말한다면 엄살일 가을의 어느 주말. 며칠 동안 머릿속으로 온갖 시뮬레이션 돌리다가 겨우 재유를 데리고 나온 준수는 그의 앞을 막아 섰다. 희고 매끈한 볼이 발갛게 물들었다. 시선의 교차와 거절이 두려워, 땅만 쳐다보면서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마음을 고백했다. 1초가 1시간 같은 기다림이 한참 지속되어도 대답이 나오지 않아 더해지는 초조함에 준수는 용기를 그러모아 재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처음으로 본,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왜, 왜 그래?"
"...아, 으...."
그렇게 내가 자길 좋아하는 게 싫은가, 충격 받기도 전에 재유가 한 발짝 다가와 준수의 가슴팍에 이마를 댔다. 가지 말란 듯이, 떨어지지 말란 듯이 매달리는 손은 팔을 제대로 잡지도 못하고 옷소매만 붙들었다. 재유는 오랫동안 쌓아온 설움을 토해내듯이 엉엉 울었다. 감정을 못 이겨 조절되지 않는 숨이 거칠게 멈췄다가 왈칵 터져나오길 반복했다.
준수는 그냥,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재유가 다 울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물방울이 바닥에 뚝, 뚝, 한참동안 떨어지는 동안 준수의 옷은 주름이 잡힐 지언정 전혀 젖어들지 않았다. 준수는 이제 비로소 그를 이해하게 되었다. 재유는 준수가 짊어졌던 무게를 알았고, 동시에 그의 앞에서 언제나 믿음직한 친구이자 에이스이고자 했다. 목 놓아 우는 방법을 모르는 게 아니라, 눈물도 소리도 없이 조용히 우는 방법을 익힌 것이었다. 그게 재유가 준수를 짝사랑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같은 마음임을 알게 되자, 높고 단단하게 쌓아두었던 댐이 허물어지듯 그동안 재유 혼자 견디고 억눌러야했던 모든 것이 쏟아져내렸다. 외로움, 불안, 좌절, 절망, 자신의 농구 실력을 깎아내리고 선수로서의 가능성과 미래를 부정하던 주변인과 스스로의 목소리, 오랜 짝사랑의 설움, 그 모든 것들이. 어쩌면 승리의 환희와 다시 보인 희망, 그토록 깊게 사랑하는 농구와 사람에게 보답처럼 사랑받는 감격 또한.
"...나랑 사귈래?"
울음이 잦아들고 진정된 재유는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다시 한 발짝 물러났다. 코를 훌쩍이면서 작게 끄덕이는 모습이 조금 애처롭고 안쓰럽고, 그마저도 애틋하고 귀여워서 준수는 소리 없이 살짝 웃어버렸다.
소년은, 소년들은 이제 안다. 사랑은 자신을 특별하게 만들고, 상대를 특별하게 만들고, 세상을 특별하게 만든다. 그 이전에는 의미를 가지지 않았던 것들이 이제는 존재 자체로 나를 숨 쉬게 하고 행복하게 한다. 사랑은 그 무엇보다 불가해하고 그럼에도 그 무엇보다 아름답다.
작은 생명체로서 우리는 오직 사랑을 통해서만 우주의 광대함을 견딜 수 있다.
- 칼 세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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