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쫑] 그래도 나랑만 해

[가비지타임/규쫑] 그래도 나랑만 해 - 12 [完]

규쫑 by 썬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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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수는 그 후 욕조에서도 이규를 졸랐다. 익히 있는 일이었기에 이규도 당연하게 응했다. 종수는 뽀득한 내벽에 꽉 들어차는 그을 한 번 더 느끼고 난 후에야 만족한 듯이 제 몸을 맡겨줬다. 물론 따끈한 물에 몸을 담그고 마음에 찰 만큼 이리저리 손장난을 치는 건 덤이었다.

덕분에 욕조의 물이 식고 나서야 섹스 전에 했던 것들이 모조리 똑같은 순서로 반복됐다. 이규는 기쁜 마음으로 또다시 종수의 여기저기를 씻기고 만져댔다.

다만 이번에는 종수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자신도 이규를 씻겨줄 수 있다며 나섰다. 이규의 머리가 제법 까슬까슬하게 올라와, 이제는 머리카락 같은 길이로 보인 덕이었다. 시즌이 끝난 후 한번만 다듬은 채로 샌프란시스코로 날아오기 전까지 쭉 손을 대지 않았더니, 이제 머리를 쓰다듬으면 손가락에 스칠 정도가 됐다.

종수는 그 감촉이 마음에 들었는지 나도 할래. 라고 통보를 한 다음, 곧바로 샴푸를 짜 이규의 머리 위로 턱 얹었다. 다음에는 머리칼인지 두피인지 모를 것들을 복복 문질러 거품을 냈다. 서투르기만 한 손길에 이규가 킥킥댔다. 거품이 줄줄 흘러 눈을 꾹 감고 있어야 하는데도 그냥 이것저것 해준다는 종수가 귀여워 웃음이 나왔다. 종수를 안은 팔은 여전히 풀지 않은 채, 비눗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서 입술을 쭉 내민 건 그 이유 때문이었다. 종수가 사랑스러우니 뽀뽀를 하고 싶은데 눈을 감고 있어 위치가 가늠이 안 됐다.

종수가 그런 이규를 보고 눈썹을 까닥 들어 올렸다가, 하도 물고 빨아 통통해진 이규의 입술 위에 제 입술을 꿍 박았다. 하여간 이규는 이런 귀여운 짓을 잘도 해댔다. 괜히 억울한 마음이 드는 것도 당연했다. 자신은 이규가 하고 싶다는 대로 제 몸을 맡기면서 이렇게 앙큼하게 군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종수는 마음만 같아서는 탱글탱글한 이규의 입술을 잔뜩 깨물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어서 샤워기를 이규의 머리 위에다 대고 바로 틀었다. 갑작스러운 물벼락에 이규가 숨을 참는 걸 보니 억울함이 좀 가시는 것도 같았다.

종수가 다른 손으로는 물이 쏟아지는 이규의 머리를 열심히 문질렀다. 거품이 시원하게 씻겨 내려갔다. 거품이 타고 흐른 목이나 어깨 위로도 따뜻한 물줄기가 연이어 쏟아졌다. 이규는 머리 위로 떨어지던 물이 아래로 내려가자마자 얼굴을 벅벅 쓸어내렸다.

“으, 종수…….”

종수가 큭큭대더니 샤워기를 대충 꽂아놓고, 이규의 얼굴에 있는 물기를 젖은 손으로 훔쳐냈다. 이규가 그 손길에 금세 처진 눈을 하고는 종수를 바라봤다.

“너무하다.”

“뭐가.”

종수가 일부러 내민 게 분명한 이규의 입술을 손으로 꾸욱 눌렀다. 이규가 종수의 엄지에 쪽쪽 입을 맞추고는 꿍얼댔다.

“갑자기 물이나 뿌리고.”

“헹구긴 해야 되잖아.”

“일부러 그랬지.”

종수가 이규의 입에 제 입술을 가볍게 눌렀다 떼고는 답했다.

“당연하지.”

그 얼굴이 너무 뻔뻔하게 귀엽고, 일순 의기양양해 보이기까지 해서 이규는 또 뭐가 됐든 다 괜찮다 싶어졌다. 종수가 즐거웠다면 물정도 맞는 게 뭔 대수냐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규가 기분이 좋아 보이는 종수를 끌어당겨 안았다. 물 때문에 촉촉하고 미끈한 몸이 맞닿아 부벼졌다.

“재밌었어?”

종수가 키득거리며 답했다.

“어.”

“그럼 됐어.”

하여튼 바보 개 다운 면모라는 생각이 들었다. 종수는 인생을 살아오며, 다짜고짜 물을 뿌려도 좋아하는 건 스테판 네 맥스 말고는 보지 못했다.

사람이 이렇게 순해서 어떡하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종수는 속으로 다시 한번 이렇게 순진한 애를 잘 데리고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 뒤에도 양치를 하다가 장난기가 발동하는 바람에 입가에 거품이 묻은 채로 뽀뽀를 하고, 그걸 빌미로 또 얼굴에 물을 뿌려대다가, 욕실을 가득 채우고 있던 수증기가 사라질 때쯤 되어서야 둘은 몸을 닦고 밖을 나왔다. 이규는 샤워가운을 재빨리 찾아와서 종수에게 입히고 허리끈까지 묶어준 뒤, 제 몸 위에도 대충 걸쳤다.

종수는 그 상태로 얌전히 이규에게 끌려가 얼굴에 뭐를 또 잔뜩 발렸다. 이규는 심지어 입혔던 샤워가운을 다시 벗긴 뒤, 몸에도 뭔가를 발라댔다. 종수는 늘어난 단계에 처음에는 인상을 찌푸렸으나 이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이규의 손길을 즐겼다. 일단 제 취향을 잘 아는 이규 덕에 몸에 발리는 바디로션은 끈적끈적하지도, 향이 강하지도 않아 거부감이 덜했고, 무엇보다 그의 따끈따끈한 손이 제 몸 여기저기를 만져주는 게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끝이라는 말과 함께 웃어보이는 이규에게 종수가 눈을 빛내며 손을 내미는 것도 당연했다. 종수 자신도 이규의 몸을 잔뜩 만지고 싶었다.

이규가 그런 종수를 알고 있다는 듯, 웃으면서 종수의 손 위로 바디로션을 짜줬다. 종수는 촉촉하고 물컹한 로션을 손바닥에 몇 번 비빈 뒤, 벌려진 가운 사이로 드러난 이규의 가슴에 턱 하니 손을 올렸다. 이규가 알아서 가운을 벗어 줬다. 그 후에는 간간이 리필을 요하는 종수의 손바닥에다 또다시 로션을 짜주며, 제 몸을 집요하게 만지작대는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재밌지.”

종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들지.”

종수는 촉촉해진 덕에 가볍게 톡톡거릴 때마다 찰싹찰싹 손에 감겨오는 이규의 가슴을 만지작대며, 이번에는 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규가 그런 종수를 와락 껴안았다. 코앞까지 가까워진 거리에서 이규가 이마를 콩 맞댔다.

“또 해?”

종수는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이규와 코끝을 부딪치고는 답했다.

“아니.”

하자고 하면 할 수 있는 걸 알았지만, 종수는 그 마음을 애써 참기로 했다. 오늘이 다가 아니었다. 내일은 허니문을 즐겨야 했으니 체력을 좀 아껴둘 필요가 있었다.

이규가 그래애. 하고 말꼬리를 늘리더니 종수를 안은 채로 뒤뚱뒤뚱 걸었다. 바깥은 여전히 밝았지만, 다른 옷을 입는 대신 나란히 잠옷을 입었다.

이규는 그 뒤에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종수를 데리고 가 의자에 앉혔다. 종수는 이규가 이끄는 대로 순순히 의자에 앉았다. 이규가 종수의 정수리에 입을 맞춘 뒤 드라이기 코드를 꽂고, 전원을 켰다. 미지근한 바람과 부드러운 손길이 물에 젖어 축축한 종수의 머리카락 사이사이를 파고들었다. 종수가 눈을 감고 나른하게 그 시간을 즐겼다.

이규의 손이 스치며 나는 사락사락 소리가 위잉대는 드라이기 소음 사이로도 선명하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 간지러운 감촉에 종수의 마음이 절로 풀렸다. 자꾸 뒤로 기대려는 종수의 머리를 이규가 배로 받쳤다가, 뒷머리를 말려야 할 때는 종수. 하고 부드럽게 그를 불렀다. 그럴 때마다 종수는 역시 제 평화는 여기에, 그러니까 이규의 옆에 있다는 생각을 했다.

“다 됐다.”

그 소리와 함께 종수의 머리칼에 꾹꾹 입술을 누른 이규가 고개를 숙였다. 종수가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들었다. 가벼운 키스가 오갔다.

종수는 이규와 함께 입안의 치약 맛을 없애기라도 하듯 굴다가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이규가 종수? 하고 의아한 듯 자신을 불렀지만, 종수는 이미 이규의 손을 낚아챈 뒤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

내내 행복에 젖어있다가 드디어 이규가 제대로 자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규도 하루쯤 못 잔다고 크게 잘못되는 허약한 체질은 아니었지만, 문제는 내일 결혼식을 해야 한다는 거였다. 오늘 아침 마주한 푸석푸석한 꼴로 식장에 이규를 세울 순 없었다.

종수는 이내 벽장 문을 모조리 열었다. 여분의 시트를 찾아내 침대로 걸어갔다. 이규가 종수를 졸졸 쫓아오다가 같이 시트를 벗겨냈다.

“내가 해도 되는데.”

“같이 해.”

물론 종수의 야무지지 못한 손끝으로는 뭔가가 엉성하게 될 뿐이어서, 종수는 새 시트를 씌우다 말고 벗겨둔 시트를 그러모아 세탁기에 가져다 빨래를 돌려놓고 와야만 했다.

돌아오니 이규가 누워서 한쪽 팔을 뻗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종수가 뛰듯이 걸어와 이규의 옆에, 그의 팔을 베고 풀썩 누웠다. 이규가 종수를 끌어안고 마구 입술을 부볐다. 종수가 그를 마주 안고 드문드문 입맞춤을 돌려주다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이규는 조금 자랐어도 여전히 드라이기를 쓸 필요가 없었다. 종수가 그의 까슬까슬한 머리를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이규가 제 머리칼을 만져줄 때마다 종수는 기분이 좋았다. 그가 머리를 말려주는 건, 고등학교 때부터 내심 기다리던 시간이기도 했다. 그때만큼은 저를 괴롭게 하던 것 중 그 어떤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커다랗고 단단하지만, 또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길에만 집중하면 돼서였다.

그러니 자신도 이규에게 그렇게 해주고 싶었다. 이규가 제 머리를 만지작대며 골똘히 생각하는 종수를 보다 슬쩍 물었다. 종수가 하는 생각이야 뻔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순간이 처음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 머리 기를까?”

종수가 이규를 보며 다시 고민을 이었다. 이규는 너무 좋은 애라서 벌레들이 지나치게 많이 꼬였다. 머리를 빡빡 밀고 있어도 그랬다. 물론 처음 머리를 민 건 이규의 선택이었지만, 10년이 넘는 세월을 그렇게 살게 만든 건 자신이었다. 이규는 말도 안 되는 제 요구를 또 순순히 들어줬었다. 종수도 자기가 막무가내로 군다는 자각 정도는 있었다. 하지만 머리카락 없이도 예쁜 애가 머리 빨까지 받으면 인기가 더 많아질 것 같아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중학교 2학년 이후로는 보지 못한 이규의 긴 머리를 보고 싶기도 했고, 또 결혼반지까지 끼워놨으니 괜찮지 않은가도 싶었지만……. 이규는 빡빡이인 상태로도 스캔들이 터진 전적이 있지 않았던가. 심지어 잘 어울린다고, 사귀었으면 좋겠다고 했던 댓글들도 모조리 떠올랐다. 종수는 금세 마음을 접었다. 계속 미디어에 노출되는 지금은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른다면 훨씬 더 나중이 돼야 했다.

게다가 세상엔 이상한 놈들이 너무 많았다. 배우자가 있는 놈한테 껄떡대는 미친놈도 있을 게 분명했다. 거기다 이규처럼 예쁘고, 몸 좋고, 살림도 잘하고, 내조도 잘하고, 밤일도 잘한다면, 그럴 인간이 하나 보다 더 있을 가능성은 더욱더 커졌다. 이규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아니.”

상상만으로도 불쾌해진 종수가 단호하게 답했다. 하지만 또, 자신은 오늘 프러포즈도 했고, 또 제법 그가 좋아하는 걸 더 열심히 해주기로 다짐하기도 했었다. 이규가 기르고 싶다고 하면 그렇게 하라고 해야 할까? 종수의 눈이 뱅글뱅글 돌기 시작했다.

“……기르고 싶어?”

안된다는 단호한 답과 그 뒤를 이은 그답지 않게 소심한 질문까지, 속내가 빤히 드러나는 종수의 표정을 이규가 애써 모른 척했다. 여기에서 귀엽다는 말을 했다가, 종수가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했다면 곤란했다. 이규는 최대한 웃음기를 감추고는 태연하게 답했다.

“별로?”

종수가 또 조심스레 물었다.

“……왜?”

하지만 안도의 기색이 잔뜩 묻어나는 걸 숨길 수는 없었다. 이규가 여상하게 답했다.

“편하잖아.”

종수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머리카락이 없으면 편해 보이긴 했다.

군 면제를 받지 않았다면 머리를 밀었을까. 그러면 이규랑 커플 머리를 할 수도 있었는데. 그런 아쉬움이 살짝 들었다가도, 면제를 받는 바람에 이규와의 동거가 앞당겨진 걸 생각하면 다행이다 싶었다. 하지만 저는 이규가 머리를 만져 주는 게 좋으니까, 이 머리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 커플 머리 같은 걸 하려면 역시 이규에게 머리를 기르게 하는 게 좋겠다 싶다가도……. 역시 웬 날벌레들이 꼬일 걸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상상이었다. 가발을 씌울까? 근데 그건 진짜 이규 머리가 아니니까 별로이지 않나? 종수의 생각은 또 끝도 없이 뻗어나가는 중이었다.

이규는 엉뚱한 상상을 하느라 바짝 좁혀진 종수의 미간 사이를 엄지로 부드럽게 문질렀다. 종수. 라고 그의 이름을 불러와 그를 다시 제 옆으로 꺼내오는 것도 덤이었다. 이규가 종수의 눈을 찬찬히 보며 말을 이었다.

“너가 바리깡들고 박박 밀어주는 것도 좋고.”

“응.”

이규의 머리통을 꾹 잡고 있던 종수의 손에서 서서히 힘이 풀렸다. 종수가 다시 이규의 머리를 느리게 쓰다듬었다.

“그거 느낌 되게 좋아.”

“그래?”

“종수 너도 목덜미 쪽은 그렇게 밀지 않아?”

그랬지만 썩 중요한 건 아니었다. 이규가 제가 해주는 걸 좋아한다는 게 중요했다. 또 마음이 간질간질했다. 종수가 이규의 입술 위에 빠르게 입을 맞췄다 떨어졌다. 이규가 그런 종수를 쫓아와 가볍게 혀를 얽었다.

종수는 또 금세 나른한 기분이 되었다. 제법 긴 시간 엎드려 있던 탓에 뻐근해진 목을 이규의 따끈한 손이 부드럽게 주무르기까지 하니 더 그랬다. 종수는 그 손길에 가물가물 감기는 눈을 하다가, 다시 눈을 부릅떴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지금 자기가 잘 때가 아니었다!

“이규.”

“응?”

갑자기 눈을 번쩍 뜨고 자신을 부르는 종수에게 이규가 반사적으로 답했다. 딱 낮잠을 재웠다가 점심을 차린 뒤 깨우러 오면 좋을 것 같았는데, 또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나 싶었다.

“너 빨리 자.”

이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대꾸했다.

“갑자기?”

“응.”

종수가 또다시 단호하게 답했다. 이규가 얼떨떨하게 반문했다.

“점심 먹어야 되는데?”

아침을 먹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점심이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사실 종수도 배가 고프기는 했다. 이규와 그렇게 뒹굴었는데 배가 고프지 않은 것도 이상했다. 하지만 어제 내내 마음고생을 시키고, 오늘 내내 진탕 몸을 섞은 상대에게 요리까지 하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종수가 팔을 휘저어 핸드폰을 찾아왔다.

“시켜 먹어.”

“뭐 시켜 먹지? 미국이니까 피자?”

종수가 이규의 팔을 벤 채로 몸을 바로 해서 누웠다. 이규도 자세를 고쳐 눕고는 종수와 함께 핸드폰을 바라봤다. 종수가 능숙하게 배달앱을 켜고 카톡방에서 주소를 복사한 뒤, 지역을 설정하자마자 곧바로 피자를 검색했다.

“응. 피자 먹어. 그리고 빨리 자.”

뭐 먹을래? 하고 묻지도 않았다. 뭐를 시켰는지 알 수도 없었다. 어느새 화면에는 주문 완료 같은 화면이 떠 있을 뿐이었다. 이규가 화면 위에서 빠르게 움직이는 종수의 손가락을 쫓다가, 그가 핸드폰을 옆으로 다시 던져 놓자마자 얼떨떨한 표정으로 종수를 바라봤다.

“한 시간 안 걸린대.”

이규는 거기에 고개를 끄덕여 대답하면서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종수는 대체로 메뉴 선택권을 모두 저에게 넘기곤 했다. 백번 양보해서 피자는 그래도 미국에 있을 때 자주 시켜 먹은 거라 그렇다고 하기에도, 그 뒤에 붙은 빨리 자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아까 재워 달라고 했다고 그런 건가. 이규는 타당하게 추론했으나 그래도 이렇게까지 제 수면을 요구하는 종수는 의아하기 그지없었다. 종수는 자고 일어나서야 같이 노곤해지길 바랬지, 자기 전에는 언제나 좀 더 함께 시간을 보내길 원하는 타입이기 때문이었다.

“……왜?”

“팩도 해.”

하지만 이규의 의문 가득한 목소리에도 종수는 뜬금없는 소리를 더할 뿐이었다.

“팩? 갑자기?”

“응. 해야 돼.”

“있긴 해?”

“가져왔어.”

종수의 입에서 나오는 팩이라니. 심지어 챙겨오기까지 했다니, 이건 뭔가 있는 게 확실했다. 스킨로션도 귀찮아서 안 바르는 사람이 팩을 종용한다? 이규는 왜인지 서늘한 기분이 들어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우리 내일 뭐 해?”

“응.”

“뭐 하는데?”

곧바로 나오지 않는 대답에 이규가 애써 한 번 더 같은 걸 물었다. 침이 절로 꼴깍 넘어갔다. 뭔가 말도 안 되는 큰일이 나올 것 같다는 직감이 들어서였다.

“결혼식.”

“……뭐?”

하지만 이규는 결단코, 결혼식이라는 답이 나올 거라고는 요만큼도 예상하지 못했다!!!

눈도 입도 동그랗게 벌린 이규를 보고도 종수는 태연히 답했다.

“예약 해뒀어.”

“아니, 잠시만. 종수.”

“프러포즈 받았잖아.”

그러니 바로 결혼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이규는 그렇게 말하는 종수가 참 그답다고 생각하면서도, 넘쳐흐르는 의문을 갈무리하지 못했다.

“아니, 보통 결혼을 바로 하지는 않지?!”

그렇게 말한 이규가 종수가 뭐라고 할 타이밍을 주지도 않고 연이어 의문을 토해냈다.

“그런데 결혼이 돼? 우리 둘 다 남잔데? 외국인인데? 장소만 빌려서 하는 거야?”

“샌프란시스코는 외국인 동성 결혼도 가능해.”

와다다 쏟아지는 질문에도 종수는 간단하게 답했다. 하지만 역시 이규에게는 부족했다! 종수의 답변도, 그걸 이해할 시간도, 정신도, 모두 모두 부족했다.

“아니, 종수. 잠시만.”

이규가 제 얼굴을 벅벅 쓸었다. 종수는 그런 이규의 손을 잡아 깍지를 끼더니, 또 요리조리 반지를 살펴보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덧붙였다.

“내일 8시까지 가야 돼.”

“어디로?!”

이규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도저히 누워서 들을 수는 없는 이야기였다. 종수는 그런 이규를 올려다보고는 속눈썹을 팔랑이며 답했다.

“결혼식장.”

“거기가 어딘데?”

“시청.”

진짜 믿고 싶지 않은 대답이었다. 그렇게 결혼하는 커플들이 많더라니, 그게 제 미래였던 거였다.

“진짜?”

“응.”

“우리 갔던 데? 샌프란시스코 시청?”

“응. 거기.”

거듭 확인을 마친 이규는 정말이지 눈앞이 아찔했다. 종수는 결혼을 하고 싶은 데서, 아니 할 곳에서, 결혼 생각이 없냐고 물은 거였는데, 제가 눈치도 없이 거기에 별생각이 없다는 답을 한 거였다! 정말 최악의 타이밍에 최악의 답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규가 저도 모르게 또 입을 떡 벌렸다. 종수가 그의 턱을 닫아주며 덧붙였다.

“8시 15분에 허가증 받고, 9시에 결혼할 거야.”

“허가증? 허가증은 또 뭐야?”

“혼인 신고서라고 생각하면 비슷한가?”

진짜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그게 가능하다는 걸 알았더라면, 이규도 결혼에 관련된 종수의 질문에 부정적인 답을 하지는 않았을 거였다. 이규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그게 돼?”

“샌프란시스코는 된다니까.”

이규가 제 손으로 입을 막고는 마른세수를 박박 한 뒤에 벌게진 얼굴로 질문을 이었다.

“9시면, 아침???”

“아침이지. 첫 타임이야.”

종수가 다시 이규를 끌어당겼다. 놀란 마음은 알겠지만, 그래도 떨어져 있는 건 안 될 일이기 때문이었다. 이규가 종수 위로 쓰러지려다 가까스로 버티고 섰다.

“진짜? 진심? 몇 시에 일어나는데?”

종수가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답했다. 큰 준비는 필요하지 않겠지만 일어나서 씻고 준비한 뒤 이것저것 얘기하고 가려면 좀 일찍 일어나야 할 것 같았다.

“……다섯 시 반?”

“아니……. 진짜?”

“그러니까 빨리 자.”

종수가 다시 한번 자라는 말을 하며 이규를 제 몸 위에 콱 눌렀다. 그 힘에 이규의 팔이 풀썩 꺾였다. 가슴 위로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이규가 꾸물대며 자리를 잡는가 싶더니 종수의 가슴팍에 뺨을 대고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뭐 준비할 건 더 없어?”

그 모습이 제법 귀여워서, 종수는 손을 들어 다시 이규의 동글동글한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어. 너는 몸만 오면 돼.”

그렇게 말하고 보니 제법 뿌듯했다. 이규가 해줬듯이, 자신도 뭔가를 해주는 기분이 들어 더 그랬다.

종수는 또 금세 풀어진 얼굴을 하고는 이규의 귀를 만지작댔다. 말랑한 연골이 손안에서 뭉개지는 감촉이 좋았다. 이규는 그런 종수의 손에 머리를 더 가져다 대 주고는 질문을 이었다. 이 순간에 취해있기에는 궁금한 게 너무 많았다…….

“옷은? 뭐 입고 해?”

“미리 보내뒀어.”

“어디에?”

종수는 지금 같이 좋은 시간에 딴 놈의 이름을 입에 올려야 한다는 사실이 분했으나, 답을 안 할 수는 없는 일이라 떨떠름하게 입을 열었다.

“……스테판한테. 내일 가져올 거야.”

“아. 전화 받은 그 친구.”

“……어.”

자신도 아직 못 불러본 프리티 같은 걸 지껄여 댄 그 자식.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열받는 건 열받는 거라서 종수의 숨에서 또 씩씩대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결혼식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이벤트에 정신이 쏙 빠져버린 이규의 귀에, 종수의 까드득 대는 잇소리 같은 건 들리지 않았다.

“어디서 샀어? 사이즈는? 아……. 어머님이 알고 계시나.”

그러니 종수가 둘만 있는 시간에 다른 사람 얘기가 나오는 걸 썩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어머님 같은 소리도 한 게 분명했다. 하지만 가출한 날 다음에 프러포즈를 받고, 프러포즈를 받은 날 다음에 결혼을 한다는 건 아무리 종수의 태풍 같은 성정에 단련된 이규라고 하더라도 소화하기가 힘들었다.

“이젠 나도 알아.”

하지만 그러기도 잠시, 금세 퉁명스러워진 종수의 목소리가 들린 탓에 애써 정신을 다잡아야 했다. 이규가 슬금슬금 올라가서 종수의 불퉁한 얼굴에 쪽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췄다.

“이제 알아?”

“어.”

“몰라도 되는데.”

“내가 제일 많이 알아야 돼.”

웃음을 참아야 하는데, 그렇게 구는 종수가 너무 귀여워서 어쩔 수 없이 큭큭대는 소리가 새어 나갔다. 종수가 금세 매서운 눈을 하고는 이규를 바라봤다. 이규가 종수의 미간을 살살 문지르고는 잔뜩 부드럽고 달콤한 목소리를 냈다.

“그런 거 한두 개쯤 몰라도, 나에 대해 제일 많이 아는 건 너잖아.”

“……그래도.”

종수는 꿀타래 같은 그의 목소리에 마음이 풀리나 싶다가도, 여전히 꽁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어 입술을 비죽였다. 이규는 그제야 내일이 결혼식이라는 사실에 너무 놀라서, 종수를 추궁하듯이 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좋은 날에 종수를 서운하게 만들 수는 없었는데, 제가 생각이 짧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규가 부드럽게 그를 불렀다.

“종수.”

답이 없는 걸 보니 속상한 게 확실했다. 이규가 몸을 일으켜 세워 종수를 안고는 데굴 굴렀다. 종수가 여전히 튀어나온 입술을 하고도 이규의 몸 위로 꾸물꾸물 자리를 잡았다. 이규가 종수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다시 한번 그를 불렀다.

“근데 종수.”

종수는 이번에도 답 대신 이규의 목덜미에 고개를 부비기만 했다. 이규가 종수의 손을 가지고 와 반지를 매만졌다. 요리조리 자세를 고쳐 잡아 자기 손에 끼워진 반지도 함께 봤다.

반지를 자세히 보는 건 처음이었다. 프러포즈부터 연이은 정사까지, 반지보다는 눈앞의 종수에게 집중하는 게 중요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뒤늦게 살펴보는 반지는 마음에 쏙 들었다. 샴페인 골드라 제 손이나 종수의 손에도 모두 잘 어울렸다. 제 반지는 밀그레인이 아래위로 두 줄, 종수의 반지는 위쪽 한 줄만 들어가 있었다. 다이아몬드로 추정되는 보석도 사파이어 컷으로 제 반지에는 두 개, 종수의 반지에는 한 개가 박혀 빛나는 중이었다. 비슷한 디자인이라 각자에게 잘 어울렸고, 나란히 놓으면 세트 같아 보였다. 무엇보다 제 반지에만 굳이 보석이나 장식을 더 넣어 가져온 종수의 마음이 또 너무 사랑스러워서, 이규는 괜히 코를 찡긋거렸다. 코끝이 시큰해서 그랬다.

종수가 해주는 게 뭔들 안 좋겠냐마는, 이건 종수의 선택이라는 사실을 제외하고서라도 취향인 디자인이었다. 액세서리 같은 건 커플링 정도가 최대인 종수에게 이 여정이 꽤 힘든 일이었으리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당연했다. 당장 내일 진행되는 결혼식이 당황스러운─물론 결혼식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설레고 기쁘기도 했지만─ 것과는 별개로, 그간 제가 모르는 곳에서 또 마음고생을 하지는 않았을지 걱정이 됐다. 프러포즈도 미리 알아차리지 못해 불안하게 만들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이거 언제 다 준비했어?”

“…….”

종수는 입을 꾹 다문 채 이규를 바라보기만 했다. 이규가 제 몸 위에 반쯤 걸쳐져 있는 종수의 몸을 흔들어 보챘다.

“응? 언제부터어.”

종수는 왠지 멋쩍고 민망한 마음이 들어 이규의 몸 위에서 굴러 내려왔다. 대신 이규의 팔을 다시 야무지게 베고 누웠다. 이규가 종수가 베고 있는 팔로 그를 감싸 안았다. 종수가 이규의 손을 가져 와 제가 끼워둔 반지를 또 만지작댔다.

이규를 봤더니 여전히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눈치였다. 종수는 결국 입술을 한참을 달싹이다 입을 열었다. 왠지 알아달라고 투정을 부리는 것만 같아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또 이규가 제 고생을 알고 달래줄 거라고 생각하니 기대가 되는 마음을 참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작년 설날?”

이규는 어렵지 않게 그 기억을 떠올렸다. 제법 자주 본가에 가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돼서 슬쩍 물었더니 수상하게 말을 돌리던 그 때가 확실했다.

“너 이거 하려고 계속 어머님 만나러 갔던 거야?”

“응.”

“진짜 대박이다…….”

어림잡아도 일 년이 훌쩍 넘는 기간이었다. 코끝이 또 찡 울렸다. 같이 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종수가 이렇게까지 저를 생각해 준 마음이 좋아서 마음이 마구 벅차올랐다.

“안 힘들었어?”

“힘들어.”

종수가 기다렸다는 듯이 답했다. 이규가 종수를 토닥였다.

“이런 데 관심도 많이 없는데 보느라 진짜 고생했겠다.”

“응……. 내 눈엔 다 똑같이 생겼어.”

종수는 순순히 인정했다. 자신은 그런 섬세한 것엔 정말이지 요만큼도 재능이 없었다. 이규 줄 반지인데 좀 더 열심히 봐야 하는 게 아니냐며 엄마에게 핀잔이나 구박도 많이 들었다. 종수 인생에 그 정도의 좌절은 처음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규가 그걸 먼저 알아주는 것 같아서 마음이 또 금세 들뜨고 노곤해졌다. 잔뜩 투정을 부리고 싶어졌다. 그의 다정한 얼굴을 보면 분명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아서, 종수는 이규를 올려다보고픈 마음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근데 반지 예뻐.”

“마음에 들어?”

종수는 그렇게 물어놓고는 침을 꼴깍 삼켰다. 조금 전의 다짐은 어느새 버려두고, 슬쩍슬쩍 이규의 눈치를 보기도 했다.

이것이야말로 종수가 결혼을 준비하는 내내 걱정했던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규가 프러포즈를 받아주지 않으리라는 생각은 준비 과정에서는 없었다. 그가 결혼을 하고 싶지 않아 할 수도 있다는 것도, 샌프란시스코에 오고 나서야 염두에 둘 수 있었다. 하지만 제가 이규의 취향에 맞는 반지를 잘 골랐는지는, 반지를 고르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도 여전히 불안했다.

“응. 마음에 들어. 완전 내 거 같아.”

하아. 종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못 껴보고 산 건데도 잘 어울리고. 같이 다녔어도 이거 골랐을 것 같은데?”

되묻는 말에도 이규가 선선히 답했다. 정말이지 안심이 되는 말이어서, 종수가 다시 몸을 꾸물꾸물 돌려 이규의 쇄골에 머리를 부볐다. 그의 윗가슴에 얼굴을 묻고 웅얼댔다.

“카탈로그 백 개는 본 것 같애.”

“백 개는 더 봤어?”

“몰라. 이백 개도 더 봤어.”

이규가 낮게 웃으며 종수의 머리칼에 연신 입을 맞췄다. 이렇게 어리광을 부리는 걸 보니 진짜 힘들었나보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규가 종수의 귀에 대고 그를 어르듯 말했다.

“그래도 진짜 잘 골랐다. 그치.”

“……응.”

“역시 너만큼 나를 잘 아는 사람 없어.”

“응.”

종수가 답과 함께 고개도 끄덕였다.

“어떻게 이렇게 잘 알지?”

이규가 어린애 대하듯 달래주고 있다는 걸 아는데도, 종수는 그걸 뿌리치거나 짜증을 낼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응?”

다디단 말과 함께 이규의 체온이나 입맞춤까지 느끼고 있으니, 그간의 고생을 몽땅 다 보상받는 것만 같아서 더 그랬다.

“……사실.”

“응.”

“너 반지 사진 다 찍어가서 비슷한 걸로 골랐어.”

그래서인지 입이 절로 열렸다. 애 취급은 딱 질색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예외였다. 이런 상냥하고 다정한 순간은 종수가 며칠 내내 바라던 것이었다. 그러니 종수는 그걸 누릴 필요도, 자격도 있었다.

“그걸 다 찍었어?”

“응.”

“진짜 감동이다.”

당연하다고 생각한 일을 한 것뿐인데 이규가 그렇게 말해주니까 괜히 머쓱해졌다. 종수가 뜨거워지는 귀를 느끼며 애써 목을 가다듬었다.

“크흠.”

이규가 따끈따끈하게 열이 오른 종수의 귓가에 입술을 부볐다.

“진짠데. 너무 고생한 거 아냐?”

“너 인스타도 열심히 봤고…….”

이렇게 귀여워서 어쩌면 좋지? 그간 힘들었던 점을 조잘조잘 말하는 종수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그가 이렇게까지 긴장을 풀고 마음을 내보이는 존재는 저 하나뿐이라는 걸 알아서, 이규는 또 마음이 빠듯하게 차올랐다. 너무 좋아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

“크크. 그래? 사이즈는 있었어?”

“없어서 주문했어.”

“그때 커플링 사이즈 물어봤던 것도 그거 때문이야?”

“……응.”

이제야 커플링을 새로 맞출까, 하던 질문에 단호하게 거절을 표하던 종수도 이해가 갔다. 서프라이즈로 한 번 더 맞춰올지 생각했다가, 종수가 첫 커플링이 마음에 든다고 했던 말이 걸려 그만두길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궁금한 게 또 생겼다. 종수가 커플링을 처음 받았을 때, 안에 새겨져 있던 각인 숫자를 꽤 좋아했던 기억이 나서였다.

“각인 같은 것도 하지 않나?”

“했어.”

“반지 안쪽에? 뭐 했는데?”

“우리 사귀기 시작한 날.”

“흐흐. 좋아.”

진짜 애인부터 남편까지 모조리 해줄 수 있는 것만 같아서 마음에 쏙 들었다. 결혼기념일을 새기는 커플도 많은 것 같았지만, 종수와 자신은 정말 오랜 연애를 한 뒤 결혼하는 사이였다. 그렇다면 처음 사귀게 된 날짜가 확실히 더 좋았다. 이규가 종수의 귀를 입술로 앙앙 깨물었다.

이규가 종수의 애정을 몰아서 만끽하고 있는 사이, 종수는 또 슬그머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니 제가 준비한 게 반지만 있는 게 아니라서 그랬다.

셔츠도, 정장도, 구두도, 면사포도 모두 제멋대로 정했는데 그게 괜찮을지 알고 싶어졌다. 이규는 다 좋다고 해주겠지만, 그래도 제가 허튼짓을 하지 않았다는 증명이 필요했다. 그간의 노력이 무용하지 않다는 걸 확인 받고 싶었다. 종수가 결국 몸을 돌려 누웠다. 그의 어깨쯤일 베고 그를 바라봤다.

“근데 이규.”

“응?”

“이렇게 내 맘대로 했는데 괜찮아?”

남 같았으면 빨리도 묻는다 싶었겠지만, 종수라면 또 얘기가 달랐다. 워낙에 큰일이긴 했으니 인제 와서 불쑥 불안해진 것일 수도 있고, 열심히 부려주던 어리광의 연장선일 수도 있었다. 뭐가 됐든 이규는 그걸 모두 다 받아줄 거였으니 썩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이규가 종수를 좀 더 끌어당겨 안았다. 씻고 나와 반들반들하고 촉촉한 볼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걱정돼?”

“……조금.”

종수가 움찔대는 손으로 이규를 더 끌어안으며 답했다. 이규가 장난스레 대꾸했다.

“그러면서 잘도 나한테 숨기구.”

이규가 종수의 코를 꾹 누르며 말했다.

“색시는 너가 먼저 해주겠다고 했는데.”

하하. 이규가 웃음을 터뜨렸다. 종수가 내내 입에 달고 사는 저놈의 색시 타령이 이규로선 너무 웃기고 귀여웠기 때문이었다. 대체 어디에서 어떻게 버튼이 눌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러다 정말 새색시처럼 한복이라도 입어주는 날에는 어떻게 반응해 줄지 궁금해질 정도였다.

“나는 좋아.”

“진짜?”

“너가 몇 달이 뭐야. 일 년이 넘도록 내 생각만 하면서 이런 걸 준비했다는데.”

그렇게 말하는 이규의 눈에는 정말이지 사랑이 가득해서, 종수는 또 괜히 떨리는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어떻게 마음에 안 들 수가 있어.”

“그래?”

“당연하지.”

“진짜지.”

거듭되는 확인에도 이규는 꼬박꼬박 답을 돌려주더니, 마지막 재촉에는 종수에게 꾸우욱 입을 맞췄다.

“내가 언제 너한테 거짓말하는 거 본 적 있어?”

없었다. 이규는 제가 세상에서 제일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규가 새삼스레 또 너무 좋았다. 그가 속삭여 주는 다정과, 그가 보여주는 애정이 모두 너무 좋았다. 이제 이 모든 게 완벽하게 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증거를 가져다 댈 수도 있었다. 종수의 가슴이 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절대 놓치고 싶지 않던 존재가 드디어 제 것이 됐다. 결혼 증명서는 내일이 되어서야 받을 수 있지만, 그 순간이 곧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종수는 주체할 수 없이 마음이 들떴다. 너무 좋아서 속이 바글바글 끓는 것만 같았다.

“규.”

“으응~”

이규가 또 헤실거리며 답했다. 종수가 그런 이규의 얼굴을 한 손으로 턱 부여잡고. 선언이라도 하듯 내뱉었다.

“넌 내 거야.”

“응. 나 너 거야.”

이규가 냉큼 답했다. 머릿속으로는 어릴 적 보곤 했던 만화 주인공이 떠오르는 것도 같았지만, 그 생각은 종수의 반문에 금세 흩어졌다.

“그게 다야?”

“응?”

이규가 예상치 못한 반응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종수가 이규의 볼을 엄지와 검지로 꾹 누르고는 정해진 답을 종용했다.

“너도 내가 너 거라고 해야지.”

“아. 그래?”

이규가 툭 튀어나온 입술로 웅얼댔다. 종수가 이규를 한 번 더 재촉했다.

“빨리 해.”

이규가 웃더니 종수를 와락 껴안았다. 종수가 이규의 품에 안기면서도 꿍한 목소리로 빨리. 하고 재촉했다. 이규가 그런 종수의 모습에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리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크흠흠, 종수.”

“응.”

종수가 안기면서도 여전히 쥐고 있던 이규의 얼굴을 그제야 놓아줬다. 이규가 손자국이 남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웃음기가 가득한 목소리였다.

“너도 내 거야.”

“응. 너 다 해.”

종수가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그렇게 말하는 종수는 꼭 원하는 걸 손에 다 쥔 남자애의 반짝반짝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귀엽고 예뻤다. 이 순간을 조금 더 누리고 싶어서 이규는 일부러 한 번 더 되물었다.

“진짜?”

“응.”

이규가 고개를 끄덕이는 종수에게 쪽. 입을 맞췄다. 그를 더 꽉 껴안았다. 팔 아래로 느껴지는 단단한 부피감이 좋았다.

“다 나한테 주는 거야?”

“응. 다 너 줄게.”

그의 청춘을 이미 다 줘놓고서도 또 다 준다는 종수가 정말이지 사랑스러워서, 이규는 어쩔 줄을 모르겠는 기분이 되었다. 종수의 얼굴 여기저기에 입술을 대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어디까지 줄 건데?”

“전부.”

“통장 비밀번호도 알려줄 거야?”

“알고 있으면서.”

“그렇긴 해.”

“카드도 똑같잖아.”

“그것도 그래.”

이규가 이마를 맞대고 키득거렸다. 종수도 그런 이규를 따라 웃었다. 이규가 너무 좋았다. 그와 함께라면 마음이 두둥실 부풀어 떠올랐다. 땅을 디딘 채로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해 고군분투하지 않아도 됐다. 그의 옆에서 조용하고 평화롭게, 그냥 그 시간을 즐기면 됐다.

“이규.”

“응.”

코를 맞댄 이규가 예쁘게 답했다. 대답 하나도 예쁘게만 하는 애인, 아니, 이제 남편을 정말이지 어디 내보이고 싶지 않았다. 이규를 알게 된다면, 그의 곁에 있게 된다면, 그 누구라도 이규를 좋아하게 될 거였다. 물론 자신이 있으니 그의 옆에 있을 순 없을 테지만, 제가 이규를 24시간 감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허점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 그에게 단단히 일러둬야만 했다.

“이런 건 진짜 나랑만 하는 거야.”

“내가 너 말고 이런 걸 또 누구랑 해.”

이규가 냉큼 답을 하긴 했지만, 그게 종수가 원하는 대답은 아니었다. 종수는 그런 이규를 빤히 보다가 결국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래도 나랑만 해.”

“으하하.”

종수의 귀여운 말에 이규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종수는 또 안달이 났다. 이규가 안 그럴 걸 아는데, 그래도 확답이 듣고 싶어서였다.

“빨리 그러겠다고 해.”

“아~ 종수~”

너를 진짜 어떡하면 좋지. 중얼거리는 이규의 말에도 종수는 여전히 이규를 재촉할 뿐이었다.

“빨리 대답해.”

여기서 또 시간을 끌었다가는, 이제 종수가 정말 화를 낼 게 분명했다. 이규가 애써 웃음을 가다듬고 답했다.

“응. 그럴게.”

“응.”

종수가 그제야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규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종수가 좋아할 것 같은 말을 또 속삭였다.

“난 너 거니까.”

“응. 맞아.”

직전에 배운 말도 잊지 않았다.

“너도 내 거고, 그치?”

“……응.”

종수는 그제야 완전하게 만족했다. 종수가 빨갛게 달아오른 뺨을 하고는, 이규에게 가볍게 입 맞췄다. 이규는 그런 종수의 얼굴을 가만히 만지작댔다.

이번 생에서 가장 잘한 일을 꼽으라면, 그날 체육관에서 종수에게 이름이 뭐냐고 물었던 걸 말할 것 같았다. 종수를 만나서, 그와 함께 있고 싶어서 자신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그는 정말이지 농구든 결혼이든 먼저 나아가는 등이 참 멋진 사람이었다. 그런 주장이었고, 그런 남편이었다. 그런 사람이 이제 나란히 함께 하자고 하는 걸 제가 무슨 수로 거절할 수 있을까. 이규는 또 괜히 시큰거리는 코끝에 입을 열었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주책맞게 눈물이 날 것만 같아서 그랬다.

“종수, 근데…….”

“응.”

“너 눈 부어서 얼음찜질하고 자야겠다.”

종수는 뜬금없는 이규의 말에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입술도 터져있는데 눈까지 부으면 꼴사나울 게 뻔했다. 이규가 여전히 붉은 기가 가득한 종수의 눈가를 조심스레 만지며 말했다.

“내일 결혼식 같은 게 있을 거면, 좀 덜 울릴 걸 그랬나?”

“흥.”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는 맞았지만, 마음에는 들지 않는 말이어서 종수가 작게 콧소리를 냈다. 이규는 그 반응에 서로의 거리를 좀 더 좁히더니 비밀이라도 말해주듯 코앞에서 속삭였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어. 프러포즈 진짜 좋았거든.”

“……응.”

제 성에 차지는 않았지만, 이규의 말을 믿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규는 자기를 좋아했으니까. 이제 진짜로 평생을 약속했으니까. 또 금세 힘을 푼 얼굴을 하는 종수를 보고, 코를 맞부볐다.

“결혼식도 너무 기대된다.”

종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몽글몽글한 게 가득 차올랐다. 역시 이 말이 듣고 싶었던 것 같았다. 결혼할까. 를 들었을 때랑 같은 기분이었다. 들뜨고 설렜다. 심장이 펄떡펄떡 뛰었다. 그게 주체가 안 됐다.

종수가 결국 이규를 빤히 바라보다가, 머리를 푹 숙여 그의 가슴팍에 머리를 콩 박았다. 이마를 부비적거렸다. 이규가 웃는 바람에 베고 있는 몸이 잘게 떨렸다. 종수가 괜히 또 너무 좋아서, 도톰한 가슴을 옷 위로 깨물었다. 이규가 좀 더 크게 웃으며 종수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종수.”

한참을 어리광 부리던 종수가 이규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이규가 발갛게 상기된 얼굴과, 고개를 부빈 탓에 또 엉망이 된 앞머리를 살살 쓸어 넘기고 만져주며 속삭였다.

“뽀뽀.”

종수가 몸을 끌어올려 이규의 입 위에 제 입술을 꾸욱 눌렀다. 말랑한 코끝도 같이 눌렸다. 다시 예쁘게 휘는 눈꼬리를 보던 종수가 입술을 뗀 뒤 거듭 입을 맞췄다. 쪽쪽대는 소리가 울릴 때마다 이규의 눈이 점점 더 곡선이 되었다. 그 사이로 보이던 반짝이는 눈동자가 사라질 때가 되어서야, 종수는 눈을 감고 고개를 비틀었다. 혀로 이규의 입술 사이를 파고들었다. 이규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벌렸다. 종수의 허리를 쥐고 제 위로 완전히 올리기도 했다. 종수가 이규를 덮치듯 그 위에 올라탔다.

따뜻하고 물컹한 혀가 부드럽게 얽혔다. 종수가 이규의 혀를 휘감고 깨물며 생각했다. 역시 뽀뽀 같은 걸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키스로도 부족했다. 예쁘게 씻겨놓은 이규를 당장이라도 다시 벗기고 싶었지만, 종수는 그 욕망을 애써 참았다.

내일은 대망의 결혼식과 허니문이 있기 때문이었다. 참는 자에게 복이 올 거라고, 종수는 스스로답지 않은 말을 되뇌며 부단히도 충동을 억눌러야만 했다.

내일이면 이규를 온 세상에 제 것이라 내보일 수 있었다. 그러니 하루 정도는 견딜 수 있었다.

[후기]

안녕하세요! 썬칩입니다!

드디어!!! 완결이 났습니다😭😭😭🥹🥹🥹🔥🔥🔥 

12월 19일에 1편을 올렸었는데, 사이에 돌발본도 내고 하는 바람에 네달이 훌쩍 넘은 지금에서야 완결을 내게 됐네요... 감개가 무량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래도 마지막에 가서야ㅋㅋ 제목의 대사가 밝혀졌는데 어떠셨나요? 넘 기엽지 않나요.. .. . .. 제목에는 제 지인분이 도움을 주셨는데, 넘 귀여워서 듣자마자 마지막 대사를 후루룩 써놓고 앞부분들을 채워 왔답니다👍👍👍!!! 

이제 남은 한달 동안은 외전을 또 열심히 써서 ^^; 4월 23일! 규쫑데이! 에는 외전 포함 소장본 입금폼을 가져올 수 있도록!! 해보겠습니다ㅋㅋㅋㅜㅜ 아~! 글이 넘 길어가지구 ... 책이 짱짱 비싸질 것 같아 걱정이 많네요😇!!

완결을 내고보니 막상 후기에 뭘 써야할지 모르겠다는 느낌이 또 있네요ㅋㅎㅎ!! 쓰려면 구구절절 더 쓸 수도 있겠지만... 요건... 외전까지 다 쓰고 난 다음에 소장본에 이것저것 tmi를 더 풀어보도록 할게요!ㅋㅋㅋ 

오랜 기간 함께 달려주신 분들께! 좋아요 눌러주시고 구매해주신 분들께도 넘넘 감사드려요ㅜㅜ~!! 특히 댓글로 감상 남겨주신 렛츠플레이더매직쇼하하쓰리투원레츠고님, LOADING...님, 짱이에요진짜로님, PP님, 까갸낑굥님, charm님, 君さん君님, 투명님, Lop님, .님! 넘넘 감사합니다! 덕분에...중도 하차 하지 않고💪 완결까지 잘 지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ㅜㅜ! !!!

다음주에는 1디페에 올렸던 돌발본을 가져오고(확정!) 외전은 플롯을 좀 짜고(...놀랍게도 준비된 게 없습니다...) 열심히 써서! 다다음주에는 가져와볼 수 있도록 해보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언제나 그렇듯 감상 나눠주시면 좋아합니다 ^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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